언젠가 이 영혼이 스러진다 할지라도
20231028 디페스타 무료배포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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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굴왕 에드몽 당테스 두 번째 막간의 이야기
『夢の終わり、 或いは恩讐の果て』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후지마루 리츠카는 며칠째 이어지는 평범한 나날에 만족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을 감출 수 없었다. 미묘하게 불규칙적으로 뛰고 있는 자신의 심장과 고르지 못한 숨소리, 드문드문 빠져 있는 기억의 퍼즐과 몽롱한 시야. 이것은 모두 평범한 나날과는 거리가 먼 것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리츠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좋지 못한 일에 휘말리고 말 것이라 확신했다.
한편, 암굴왕 역시 며칠간 계속되는 자신의 미묘한 상태에 의구심을 품고 있었는데, 이는 자신의 문제라기보다는 또 다른 자신—제 마스터, 후지마루 리츠카의 내면에 존재하는 남자 말이다—의 문제인 듯했다. 지난번 일을 통해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고 생각했건만, 아무래도 아닌 모양이었다. 그러나 이는 어딘가에 말하는 것으로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게다가 또다시 제 마스터를 나락과도 같은 그곳에 떨어뜨릴 수는 없었다. 그러니 그는 지금의 이 이상을 참아내기로 했다. 이번에야말로 완벽하게, 치밀하게.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도록.
그러나 리츠카는 알 수 있었다. 암굴왕, 그가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인다는 것을. 대놓고 물어보기에는 조심스러운 부분이기에, 리츠카는 암굴왕을 앞에 둔 지금조차도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했다. 무엇보다, 이를 묻는다 해도 그는 분명 아무 일도 아니라고 할 터였다. 그리고 그 예상은 보기 좋게 들어맞았다.
“아무 일도 없다.”
“그럴 리가. 이젠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다고.”
리츠카의 답에 암굴왕은 크게 웃었다.
“그런가. 그럼 거짓말은 통하지 않겠군. 허나 이번 일은 그렇게 큰일이 아니다. 네가 신경 쓸 만큼의 일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니 이럴 시간에 다른 서번트를 더 챙기는 게 좋을 것 같군. 자, 저기를 보아라. 어린아이들이 기다리고 있지 않나.”
리츠카가 고개를 돌리자 어린이 서번트들이 동화책을 든 채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리츠카는 멋쩍게 웃었다. 다시금 고개를 돌리자 암굴왕은 사라진 상태였다. 리츠카는 한숨을 내쉬었다. 늘 이런 식이라니까.
숨이 막히는 듯한 암흑이었다. 리츠카는 자신이 서 있는 이곳이 어디인지, 쉽게 알 수 있었다. 이곳은 자신의 내면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곳. 후지마루 리츠카의 은원, 그 모든 것의 종착지. 리츠카는 눈을 깜박거리며, 이곳에 있어야 할 존재의 모습을 찾았다. 하지만 그 어디를 둘러보아도 그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리츠카는 미묘한 실망감을 느꼈다. 그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았는데…… 그녀는 그의 이름을 몇 차례고 불러 보았다.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앞으로, 또 앞으로 걸었다. 어쩌면 같은 자리를 빙빙 돌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완전한 암흑 속에서 길을 찾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 따라서 리츠카는 주머니에 있던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이제는 자신의 부적과도 같은 물건이 된 이것을, 리츠카는 멍하니 바라보다가 다시 발을 내디뎠다. 여기까지 온 이상, 그를 만나야만 할 것 같았다.
어딘가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리츠카는 그곳이 바로 그가 있는 곳이라 생각하며, 망설임 없이 뛰어갔다. 하지만 보이는 것은 커다랗고 붉은 눈을 한 그녀의 원념이었다. 이런 것을 처음 마주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그녀는 숨이 막히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심장을 묵직하게 짓누르는 감각이 답답했다. 그녀는 바로 몸을 돌려 뛰기 시작했다. 앞으로, 다시 또 앞으로. 언젠가 보일 탈출구—그런 것이 존재하는지는 중요치 않았다—를 향해서.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폐부가 터질 것처럼 부풀기를 반복했다. 그녀는 더 이상 견딜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아, 결국에는 이런 곳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마는 건가. 리츠카는 남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이런 순간이면, 늘 그가 있어 주었는데.
그 순간, 검은 불길이 원념의 커다란 몸뚱이를 집어삼켰다. 리츠카는 그 모습에 압도당한 것처럼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토록 찾아 헤매던 존재와의 재회였다. 잿더미를 뚫고 남자의 모습이 서서히 드러났다.
“암굴왕……!”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그 부름에 답했다.
“그래, 나의 공범자. 리츠카.”
그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어떤 말도 내뱉지 않았다. 평소였다면 분명 그녀를 이곳에서 내보내기 위해 무슨 말이든 내뱉었을 그였지만, 오늘의 모습은 그런 모습과 많이 달랐다. 리츠카 역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리츠카…….”
그가 리츠카의 이름을 다시 한번 중얼거렸다. 분명 전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묻고 싶은 것이 많았는데,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리츠카가 입을 열어 무엇이라도 말하려던 순간이었다. 공간은 점점 비틀리고, 그의 목소리는 희미해졌다. 몽롱한 정신이 점차 맑아진다. 이제 꿈에서 깨어날 시간이었다.
“마스터, 무슨 고민이라도 있나요?”
잔느는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는 리츠카를 걱정스러운 눈길로 바라보며 물었다.
“아니, 그게…….”
리츠카는 이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난감했다.
“암굴왕이 조금 이상하다고 해야 할지…….”
“그 남자는 원래도 조금 이상했잖아.”
잔느 얼터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아, 아니. 그건 그렇지만…….”
“얼터, 그렇게 말하면 안 돼요.”
“흥. 알 게 뭐람.”
리츠카는 식판으로 시선을 옮겼다. 오늘의 반찬은 푸짐했으나 먹고 싶은 마음이 영 들지 않았다.
“무슨 일이든 간에, 원래 그런 남자니 신경 쓸 필요 없지 않아?”
“그렇다 하더라도…….”
잔느는 심각한 표정으로 리츠카의 말을 들어 주었고, 얼터는 관심 없는 듯한 태도를 보이면서도 리츠카와 함께 고민했다.
“이번에는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겠네요.”
몇 번이나 말을 머뭇거리던 잔느는 진지한 투로 내뱉었다. 그 말을 들은 리츠카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들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게 무슨 말이야? 그 남자, 없어지기라도 할 거래?”
“아니요, 그런 말을 직접 들은 건 아니지만…… 왠지 그런 느낌이 들어요. 무언가 완전히 정리하고자 하는, 그런 느낌 말이에요. 그렇지 않고서야 늘 함께하던 마스터를 이렇게 멀리할 리가 없죠.”
“성녀님의 감, 이런 거야? 아무리 그래도 너무 나간 것 같은데.”
“그런가요? 그런 거라면 좋겠지만…… 아무튼 마스터, 그를 잘 지켜봐 주세요. 지금의 그가 불안정하다는 것은 확실하니까요.”
리츠카는 홀로 방에 누워 생각에 잠겼다.
무언가 완전히 정리하고자 하는, 그런 느낌 말이에요.
잔느의 목소리가 귓가에 계속 맴돌았다. 리츠카는 그녀의 감이 틀리기를 바라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불안해졌다. 그와 함께한 추억은 너무도 많았다. 함께 감옥을 탈출했던 것도, 마신주와 마술왕을 상대했던 것도, 동인지를 만들며 수십 번의 루프를 한 것도…… 전부 어제의 일처럼 생생했다. 마음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아무리 많은 추억이 있다 해도, 그녀는 그에 대해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았다. 이런 사소한 행동의 변화조차도 알 수가 없다는 점이, 그녀를 괴롭게 만들었다.
무언가를 정리한다. 자신과 칼데아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자 한다는 의미일까. 이는 본인에게 직접 물어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만약 이대로 아무것도 모른 채 그와 헤어지게 된다면, 평생…… 아니, 눈을 감고 난 뒤에도 후회하고 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자신의 마음만큼은 제대로 전해야 한다는 생각.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나 방을 뛰쳐나갔다.
리츠카는 칼데아 안을 한참이나 돌아다녔다. 하지만 그가 자신을 일부러 피하는 것인가,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오늘은 포기해야 하나, 생각할 때쯤이었다. 바로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많이 바쁜 모양이군.”
“암굴왕!”
리츠카는 몸을 돌리며 그의 이름을 큰 소리로 불렀다.
“바쁜 건 아니지만…… 너를 찾고 있었어.”
“나를? 발로 뛰는 것보다는 내 이름을 부르는 편이 훨씬 빨랐을 터인데. 별일이군.”
“아…….”
모르겠다. 그저 직접 그를 찾아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깐 사이에 그가 완전히 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일지도 몰랐다. 리츠카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고개를 들어 올려 암굴왕과 시선을 맞췄다.
“나, 아무래도 너를 가만히 둘 수 없을 것 같아.”
“그게 무슨…….”
“네가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잖아. 걱정되어서 며칠 동안 한숨도 못 잤다고.”
“나는 분명 어떤 이상도 없…….”
“거짓말은 그만해도 돼. 너도 알고, 나도 알고,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니까.”
리츠카는 다시금 그의 말을 잘랐다.
“그렇군. 하지만 여기까지다. 마스터. 이 일은 네가 해결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고 말았어.”
“그래도 나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거야.”
“이 일은 포기하는 게 좋다. 잠시 양보한다고 생각하도록.”
리츠카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게 어디 있단 말인가. 그가 자신을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님은 잘 알 수 있었다. 그는 지금, 자신을 걱정하는 것이다. 이런 일—특히나 자신과 관련한 일에 휘말리게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리츠카는…… 그의 모든 것을 알고 싶었다. 그와 모든 것을 함께하고 싶었다.
“정말로?”
“그래, 정말로.”
“그러지 않으리라는 거 알잖아.”
“고집 센 주인이군.”
암굴왕은 가볍게 웃으며 내뱉었다.
“……아무래도 나에게 다시 이상이 생긴 듯하다.”
“그럴 거라고는 예상했어. 어젯밤에 그를 만났거든. 무언가 이상했어. 평소랑 다르다고 해야 하나.”
“나를 만난 건가.”
“응. 눈을 뜨니까 그곳이었어. 적에게 쫓기고 있던 나를 구해주었는데, 말없이 사라져서…….”
리츠카의 말에 암굴왕은 생각에 잠긴 듯 눈을 감았다. 무엇이 자신이라는 존재를 흔들고 있는 것인가. 지난번 만남 이후로 다시금 강적을 상대했던 리츠카였다. 그러니 그가 고전하고 있음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번 일은 그것과 거리가 먼 듯했다. 암굴왕은 천천히 눈을 떴다. 걱정스러운 모습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리츠카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리츠카는 침대에 누운 채 자신을 바라보는 암굴왕과 시선을 맞췄다. 그의 표정은 평온하고 침착했으나, 미미한 걱정을 담고 있었다. 리츠카는 이에 괜찮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마스터를 사지로 몰아넣는 것은 내키지 않지만…….”
“너랑 애비 쨩이 있잖아.”
“그렇군. 나를…… 우리를 믿나?”
“당연한 걸 묻네.”
리츠카는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애비게일은 불쑥 얼굴을 들이밀며 말했다.
“잡답은 여기까지. 마스터, 아저씨. 준비됐어?”
리츠카는 짧게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암굴왕 역시 한 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전했다. 리츠카는 눈을 감았다. 다시금, 그 남자가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
눈을 뜨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마치 달빛 하나 없는 심야의 숲속을 걷는 것처럼. 리츠카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암굴왕과 애비게일의 모습을 찾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암흑 속에서는 그 무엇도 찾아낼 수 없을 듯했다.
“아무리 말해도 듣지 않는군. 다시 한번 제 발로 찾아올 줄이야.”
리츠카가 고개를 들어 올리자, 그곳에는 밝은 빛으로 타오르는 눈동자가 있었다. 리츠카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만나고 싶었어.”
“이곳까지 다시금 다다른 데는 이유가 있을 터. 허나, 떠나라. 지금의 나는 너에게…… 그 어떤 도움도 줄 수 없다.”
“네 도움을 바라고 찾아온 것이 아니야. 내 도움이 필요할 것 같아 찾아온 거지. 네가 도움을 바란다면 나 역시…….”
“불을, 붙여 주겠나.”
남자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리츠카는 이에 고개를 끄덕이며 주머니에 있던 라이터를 꺼내 들었다. 그녀는 그의 담배에 자연스럽게 불을 붙였다. 남자는 짧은 웃음으로 고마움을 대신했다. 그는 깊은 한숨처럼 연기를 훅 내뱉었다. 오늘따라 그 숨의 무게는 너무도 무거운 듯했다.
“이곳은 온갖 것들의 무덤이다. 잔재가 쌓이고 쌓여 만들어진 밑바닥의 지옥. 그러니 네가 있을 만한 곳은 아니다. 오늘만큼은 확실히 말하지. 돌아가라, 고.”
이에 리츠카는 한 손을 꾹 쥐었다.
“아니, 그럴 수는 없어. 분명, 무언가 이상해. 지금 네 반응도 그렇고. 이번에도 무리하고 있는 거지? 그런 거라면…….”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니다.”
그런 문제가 아니라면 대체 무슨 일이 그를 힘겹게 하고 있단 말인가. 리츠카는 입을 꾹 다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슬픔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럼 무엇이 너를 힘들게 하는 거야.”
남자는 다시금 담배 연기를 내뱉었다. 그는 한동안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어떤 생각을 하는 것인지는 좀처럼 알 수 없었다. 정적을 참지 못한 리츠카가 다시 무언가 말을 꺼내려던 순간, 그는 목소리를 냈다.
“아무래도 쏟아지는 잔재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 그 잔재는…… 아무리 이 손으로 태워 없앤다고 한들, 다시 그 모습을 드러내고 마는 것들이다. 하나같이 꺾이지 않을 네 영혼을 탐하며, 타락을 바라고 있지. 나는, 이 흑염으로 그것을 태워 왔다. 네 영혼은 어디까지나 너만의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리츠카는 얌전히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나는, 타락하고 말았다. 언젠가부터 네놈의 영혼을, 아니, 네 모든 것을 탐하게 되었다. 너의 그 맑은 영혼을, 흩어지지 않을 그 아름다움을, 이 손에 넣고 싶다고 생각했다. 나의 것으로 만들고 싶다 생각했어. 이 나는, 네놈과 이런 식으로밖에 마주할 수 없음에도 말이다.”
리츠카는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남자는 그런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큰 소리로 웃었다.
“그래! 그렇다! 나는 네놈의 인도자. 어찌 감히 그 영혼을 손에 넣을 수 있겠는가. 닿을 수 없는 것을 향한 갈망이다. 이 마음을 죽이는 것은 자신의 일. 그러니 공범자여, 이곳을 떠나라. 그리고 다시는…… 얼굴을 보이지 않는 것이 좋을 거다.”
리츠카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답을 하지 않았다. 남자는 여전히 입에 담배를 문 채였다. 그는 정해진 답을 기다리는 것처럼 묵묵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순순히 그럴게, 라고 답하리라 생각한 건 아니지?”
리츠카는 먹먹한 마음을 눌러 담으며 내뱉었다. 지금 느끼는 이 감정이 어떤 감정인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기쁨을 느끼는 것인지, 혹은 슬픔을 느끼는 것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n번째의 이름 없는 감정인 것인지…….
“그래. 그렇군, 나의 공범자. 후지마루 리츠카! 네 영혼을 바라는 가장 타락한 존재에게도 손을 뻗는가! 허나 이번만큼은, 네 그 바람에 응할 수 없겠군.”
그의 반응은 단호했다.
“아저씨, 마스터.”
애비게일의 목소리가 두 사람의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아. 애비 쨩.”
애비게일과 암굴왕, 두 사람은 함께 리츠카를 찾고 있던 듯했다. 잔재와도 같은 남자는 두 사람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또 하나의 나, 너 또한 함께였던가.”
“그렇다. 설마, 하는 생각은 있었지만 정말로 그럴 줄이야.”
무덤덤하게 내뱉는 암굴왕의 말에 남자는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아무래도 이 만남이 꽤 유쾌하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이 자리에서 불타 없어지는 것도 꽤 어울리는 최후가 되겠군.”
리츠카는 두 주먹을 꾹 쥐었다.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녀는 문득 이 남자가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깨달았다. 그와 함께한 수많은 시간…… 그와 주고받은 수많은 말…… 모든 것은 자신의 안에 깊게 새겨진 채였다. 이 남자가 있기에, 그가 자신의 길을 밝혀 주었기에 지금까지의 길을 걸어올 수 있었다. 그런 그가 없다면…….
“나는…… 네가 없으면 안 돼.”
리츠카는 당장이라도 울 것처럼 말했다.
“그렇지 않다, 공범자. 나는 이제…….”
“아저씨가 없는 마스터를 상상해본 적 있어?”
애비게일의 물음에 남자는 말을 멈추었다.
“마스터는 홀로 길을 찾지 못할 정도의 바보는 아니야. 분명 언젠가 이 모든 것을 헤치고 나가 별빛이 내려앉는 대지 위로 다시금 발을 내딛겠지. 하지만…… 그것은 모두의 힘이 있어 주었기 때문이야. 그 ‘모두’ 중에는 당연히……”
“네놈도 함께일 테다. 또 하나의 나여. 네가 무엇을 바란다 해도, 마스터, 후지마루 리츠카는 모든 것을 내어줄 테지. 하지만 그녀는 그녀를 잃지 않을 것이다. 너의 마음이 옳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녀를 믿으라고 말하는 거다. 너도 나와 같다면, 분명 그럴 수 있겠지.”
“나의 존재는 더 이상 필요치 않다, 고 하려 했건만. 이래서는 더 말을 꺼낼 수 없겠군. 그래, 좋다! 리츠카, 나의 공범자. 지금의 나라면 네놈의 영혼을 서서히 잠식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 감정은 하루빨리 버리는 것이 좋겠지.”
“암굴왕…….”
“나는 계속해 네 원한의 잔재를 불태울 거다. 이 화염은 언젠가 나 자신의 존재마저 휩쓸게 될지도 모를 터. 하지만 그 순간이 온다 해도 나는, 기쁘게 받아들이마. 너라는 존재와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고, 감정을 주고받았음에 만족하마. 그러니 그런 표정은…….”
그제야 리츠카는 자신이 울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리츠카는 황급히 두 손으로 눈을 비비며 눈물을 닦아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애비게일이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그렇다면 또 하나의 나여. 이번이야말로 작별이다.”
“그래. 공범자…… 「마스터」를 잘 부탁하지.”
다시금 모든 것이 흐려졌다. 전하지 못한 말이 너무도 많았지만, 언젠가 다시금 그에게 직접 전할 수 있는 날이 오리라 믿었다. 그 만남이 언제가 될지는 모를 일이었지만, 분명 그리 멀지 않으리라 생각하며…….
리츠카는 천천히 눈을 떴다. 애비게일의 모습이 점차 선명해졌다. 그녀는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어라, 암굴왕은?”
“이번에도 먼저 나갔어. 저거, 마시라면서.”
테이블 한쪽에 올려져 있는 커피 두 잔. 역시 이번에도 휘갈겨 쓴 메모가 붙어 있었다.
피곤하다면 다시 눈을 감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 되겠지만, 이 편이 더 나을 거다.
리츠카는 그의 마음을 생각하며 가볍게 웃었다.
한편, 스톰 보더 밖. 암굴왕은 담배를 입에 문 채다.
“영혼을, 탐하고 있는 것인가.”
이는 자신의 마음 때문인지도 몰랐다. 나아가는 소녀의 발걸음을 붙잡고 싶지 않아 숨기고 있던 진득한 감정. 그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바람을 느꼈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이 감정을 버려야만 했다. 자신도, 잔재도. 그는 깊게 숨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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