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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열

R님 커미션 / 카드파이트!! 뱅가드 드림

OSINT by 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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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된 명예와 자존심의 잔해

귀에 거슬리는 파열음, 밝은 연옥

닿아버리면 희망이었던 것이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당신마저 길동무로

/ 藍月なくる, <Evil Bubble>

도망쳐라!

어디까지나 도망치거라!

그러나 어디로 도망칠 수 있는가?

그 끝에 종전이 있고 낙원이 있는가?

쓰러진 자들의 영혼은 어디로 가는가?

우리에게 영혼은 있는가?

가르쳐줘, 실비레.

 

비가 왔었나? 물방울이 뚝, 뚝 떨어지는 소리에 소녀가 천천히 눈을 뜬다.

“이제야 눈을 뜨나?”

그 앞에 있던 것은 사람의 얼굴, 깜빡이는 붉은 눈동자, 천진난만한 목소리와 그에 어울리지 않는 말투. 치즈카 이오리― 전음공명 르네르트는 일순 소리를 내려 했으나 그 입 위에 올려진 검지손가락이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명백히 놀란 얼굴을 한 르네르트를 바라보며 그 위에 올라탄 소년은 싱긋 웃었다.

“소리는 내지 말거라, 그러면 자네만 불리해질 뿐이야….” 소년이 손가락을 떼어낸다.

“……또, 또 무슨 생각을 하는 거죠?”

르네르트는 숨을 몰아쉬었다. 식은땀을 흘리며, 조금 풀린 눈을 하고선 올려다본다.

“아니? 특별히 꾸미고 있는 것은 없다만…. 나는 꽤나 흥미본위 적인 성격이라서 말이지.”

“비켜주세요.”

날카로운 목소리에 소년은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가늘게 하더니 순순히 물러났다. 다리를 털고 일어나서는 몸을 빙 돌려 다시 르네르트를 향해 웃는다.

“이것도 운명이라면 운명일 수도 있겠군. 자네와 이런 형태로 다시 만나게 될 줄은,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야. 그래…. 왜 U20에는 참가하지 않은 거지?”

“그저 당신을 감시하려고 온 것뿐이니까요.”

“참가하는 편이, 더 감시에 용이했을 터이다. 알고 있지 않나? 스타디움 내 외부인의 출입은 금지되어 있어.”

이세계로부터의 빙의자에게 이 이상의 이목이 쏠려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이미 당신이 조기 탈락한 시점에서 그럴 의미는 더더욱 없고요.”

“덕분에 이 꼴이 되어버렸지만, 말이지……. 안쓰럽게 됐군, 르네르트 경.”

르네르트의 손발이 움찔댄다. “사람이 살 환경이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뒤통수가 차갑다고요.”

“크크큭…. 글쎄에…. 자네는 사람이 아니지. 그리고 자네라면, 더한 환경도 버텨내지 않았는가? 가령…….”

소년의 핑거스냅. 그러더니, 어디선가 아미 나이프가 날아와선 르네르트의 머리카락을 빠르게 스친다. 그것은 이내 반대편 벽에 박힌다. 잘린 머리끈, 이오리의 머리칼이 흩날려서 바닥에 가라앉는다.

“어때, 기억이 조금은 되살아나나? 그 시절 자네는 어설픈 감정이 매력적이었는데…. 아니, 지금도 꽤 마음에 들어. ‘더미 이모션 프로그램’…. 정말 걸작이군 그래, 하하!”

침묵한 르네르트를 앞에 두고 호시자키 노아― 성휘병 카오스브레이커 드래곤의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주머니에서 그것과 비슷한 날붙이를 꺼내 들고, 구두 소리를 내며 르네르트를 향한다.

“살벌한 물건을 가지고 있군요.”

“구하기 어려웠어.”

“지금의 우리는 인간입니다. 신상에 위협이 갈만한 짓은 관두는 게 좋을 거예요.”

카오스브레이커가 미소 지으며 칼끝을 르네르트의 턱에 갖다 댄다. “두려운가?”

뚝, 뚝……. 넓은 폐허에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르네르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카오스브레이커를 내려보더니, 눈을 감고선 숨을 크게 한 번 내쉬었다.

“……역시, 그때 당신을 확실히 죽여놨어야 했어….”

그 후, 카오스브레이커에게 날아드는 것은 르네르트의 양손이었다.

카오스브레이커의 손에 들려있던 날붙이가 내동댕이쳐지고, 날카로운 마찰음이 여러 차례 울린다. 얇은 소년의 목구멍에서 공기의 흐름이 막히는 소리가 역력히 새어 나오고, 소리가 들릴 때마다 소녀의 손에 들어가는 힘은 더욱더 강해져만 간다. 그 누구도 막지 못했던 광대, 그게 다 뭔가.

“어차피 같은 인간이라면…, 당신의 목숨을 여기서 끊어 놓는 것쯤은 간단하겠죠…….”

노아의 몸으로 어떻게 치즈카 이오리의 힘을, 그리고 그곳에 실린 르네르트의 무겁고 차가운 분노를 어떻게 이겨내겠는가? 클레이와는 다르다. 이곳은 지구이다. 인간은 나약하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것이 르네르트이다.

“…………컥, 하, 하하…….”

“뭐가 웃긴 거죠?”

“……나를, 죽일 셈인가? 지금이라면, 가능하겠지……. 하지만…”

카오스브레이커의 손은 떨리며 르네르트의 얼굴을 매만진다. 목이 졸리고 있는데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장난감을 보는 눈빛을 하며 웃음을 흘린다.

“그러면, 너의 소중한 치즈카 이오리는 살인자가 되고…, 죄 없는 호시자키 노아는, 목숨을 잃게 되겠지…. 크크큭…….”

르네르트의 두 눈동자가 흔들린다. 손에서 힘이 점점 빠진다. 결국 손과 고개를 모두 떨궈버린다. 그리곤 거칠게 카오스브레이커를 밀어내버린다. 조금 전까지 숨을 쉬는 것도 힘들어했던 카오스브레이커는, 밀쳐지고도 이런이런, 정도의 말만 하고 옷깃을 매만지더니 다시 고개를 들었다. 어두운 낯빛을 한 르네르트에게 다가가는 카오스브레이커는 그녀와 다르게 여유 있는 몸짓을 했다.

“아직 유희는 시작되지도 않았다고….”

카오스브레이커는 르네르트의 뒤로 돌아서 갔다. 르네르트의 길게 늘어진 은빛 머리칼을 카오스브레이커가 손가락을 쓸어내리며, 소녀 같은 손길로 어루만졌다. 그리곤 남은 한 머리끈을 풀어 제 손에 걸더니, 르네르트의 머리를 하나로 모아 손으로 빗질하며 묶는다.

“여기에서 죽기에는 아깝잖나? 나도, 물론 자네도…….”

폐허에는 어느샌가, 카오스브레이커의 속삭이는 목소리와 흥얼거리는 콧노래만이 울려 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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