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면, 은빛의 괴물
K님 커미션 / 1차
아직 만지지 마, 떨리는 그 손 끝은
마치 꽃도둑의 바보 같은 망설임
만져도 좋아, 이 가슴 깊은 곳까지
닿을 자신이 있다면…
/ ALI PROJECT, <성소녀영역>
그곳에 쓰러져 있던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무슨 연유로 그곳에 있는 건지 세른은 이해할 수 없었다.
입을 열자, 그것은 제 것이 아닌 표정으로 웃더니 제 가는 손목을 붙들고 어디론가 이끈다. 그녀는 맨발이었다. 상처가 보이지 않는 발로 가벼이 걸어가는데, 세른의 발은 도무지 가볍지가 않았다. 분명 자신의 손을 붙들고 있는 그녀는 자신의 얼굴을 하고 있는데, 그 얼굴이 너무나도 이질적이라, 의심을 넘어 단정하게 되는 것이다.
누구시죠?
누구시길래 저의 얼굴을 하고 기묘한 웃음을 짓는 겁니까?
연기를 못하시는군요.
그렇게 말을 끝마치고 나면, 손을 놓은 그녀는 세른을 바라보며 무어라 중얼거린다. 세른의 귀에는 닿지 못한다. 세른은 호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옷자락이 다 젖어서는 들어 올리는 거로는 손도 쓸 수 없을 정도인데, 당연하게도 아랑곳하지 않고 투명한 물에 젖어 들어가는 모양새를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녀는 어느샌가 사라지고 없다. 호수에 세른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비로 점점 차오르는 수위는 세른을 삼켜버린다. 차가웠다. 모든 게 잠겨버린 뒤에는, 어두컴컴하고, 손 끝 발 끝이 모두 얼어버릴 것만 같았는데, 그러나 이상하게도 가슴 깊은 곳은 뜨거워져 갔다….
세른은 직감했다.
아, 이것이 당신의 고향입니까.
그렇게 세른 마테 에르센은 눈을 뜬다. 눈을 뜬 곳에는 희미하고 따스한 빛이 서려 있으며, 몸을 겨우 가눠 손을 쥐락펴락 하면 축축하지 않은, 평소와 같은 감촉이 느껴진다. 침실 문을 열면 언제나 같은 스튜의 냄새가, 세른을 반긴다. 세른은 그 테이블에 앉아 있는 인물을 향해 눈길을 보낸다. 상대도 그 눈빛을 알아채곤 눈을 두어 번 깜빡이고, 느리게 고개를 끄덕인다. 세른은 그 인물 맞은편에 앉았다.
레넨 마테 에르센과 세른 마테 에르센의 아침은 그렇게 시작되는 것이다. 특별한 아침 인사 없이, 오늘은 어떻냐 같은 흔한 부부끼리의 안부 인사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되려 묻겠다만은, 둘은 부부인가? 물으면 구태여 부정할 이는 둘 중 누구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둘을 가리켜 부부가 아니다…, 라고 하여도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마테 에르센은 그러하였다.
자칫 삭막해 보이는 아침 식사이다. 볕이 들어오고, 조금 식은 스튜의 향기가 풍기고, 집안에 울려 퍼지는 소리는 오로지 식기들끼리 맞부닥치는 소리뿐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그것이 오르골의 소리와 같이, 어쩌면 머릿속 어딘가에 자리 잡고 있을 성난 파도를 잡아주는 조율자와 같이 느껴질 수도 있다. 이 집은 그런 공간이다. 이 호수, 이 집 안에서 서로는 레넨과 세른으로 있을 수 있다….
그 적막을 깬 건, 식기를 정리하던 레넨이었다.
“안색이 안 좋습니다.”
“예?”
멍하니 스푼을 들고 있던 세른이 퍼뜩 정신을 차리곤 레넨을 올려다본다. 레넨은 그런 말을 걸치고서는 자연스레 세른의 손에 쥐어진 스푼을 제 손으로 옮겨 그릇 안에 담았다. 꿈자리가 좋지 못했습니까? 넌지시 던지듯. 세른은 잠시 닿았던 손끝의 감각이 남아있는 듯, 스푼이 있던 손을 다른 손으로 매만졌다.
세른은 대답 대신 창밖을 바라보았다.
바깥은 비가 오지 않는다. 올 시기가 아니다.
또다시 방 안에는 레넨이 식기를 정리하는 소리만이 남는다. 창으로 들어오는 빛은 따스한데, 세른에게는 서늘한 감각만 서린다. 싱크대에 고이 쌓아 둔 식기들을 뒤로 하고 레넨은 몸을 세른에게 향한다.
그리고 느껴지는 것은, 머리카락 너머의 열감. 딱딱하지만 부드러운 감촉. 이마를 맞댄 채, 레넨은 세른의 뒤통수를 부드럽게 감싸 안는다. 그러고 몇 초나 지났을지, 레넨은 물러나 세른을 내려다보고는 이런 말만 남긴다.
“쉬십시오, 세른. 그러실 수 있지요?”
그러한 연유로 오늘의 세른은 집에 혼자 남겨진 채….
몇 시간은 책상에 앉아 펜을 들었으나, 마땅한 문장이 써지지 않았다. 당장 떠오르는 심상을 글로 남겨보려고도 하였으나, 파고들면, 빠져나올 수 없는 심암이 보이기 시작하여 펜을 내동댕이쳤다.
혼자 하는 식사는, 풍경을 두고 보자면 한 명이 있으나 두 명이 있으나 다를 바가 없다는 점이 귀추이며, 실제로도 얼마 전까지만 해도 크게 염두에 두지 않았을 터이다. 그러나 몇 입 먹다 곧 입을 틀어막고, 무엇이라도 느낀 듯, 그릇을 엎어버린다. 쨍그랑. 와장창. 댕그랑. 10초 정도 의자 위에서 엎어진 그릇을 마물 보듯 보던 세른은 이윽고 고른 숨으로 돌아와 치맛자락을 올리고선 예리해진 그릇 조각들을 주워 담았다.
….
물은 따듯했다. 거짓말같이 이 작은 욕조가 세상의 전부 같아 보였다. 적어도, 호수의 물과는 다르다…. 웅크리고, 눈을 감으면, 3초면 완성되는 세계……. 이곳이라면, 빠져도 되지 않을까….
……그 뒤로 눈을 떴을 때 세른은 침대 위였다. 분명 마지막 기억은 욕조 속이었을 텐데…. 세른은 눈을 뜨고, 자신에게 대충 감겨있는 가운을 매만진다. 방 안의 불빛은 등 하나로 희미했으며, 이외에는 깜깜했다. 고개를 조금 돌리면, 그곳에는 가는 눈을 하는 레넨이 있다.
“정신이 드십니까.”
“레넨. 들어와 있었군요.”
“예. 어디에도 당신이 보이지 않아, 찾아보니 욕실에서 잠이 들어 계셔, 그만.”
“아아….”
그런 거였나. 덮인 이불을 조금 걷어내니 한기가 느껴졌다. 레넨은 세른의 손을 쥐었다.
“차갑습니다, 세른.”
“…예. 요즈음의 저는, 굉장히 산 송장과 같이 느껴집니다."
가운 아래,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세른의 부드러운 피부를 스쳐 지나가는 찬 바람. 세른은 이질감을 느끼다가, 레넨의 손이 손에서 벗어나, 팔을 건너 어깨 위에 얹히는 걸 눈으로 좇는다. 레넨의 탁한 두 눈이 세른을 응시한다.
“말해주시겠습니까?”
그 말이 끝나자, 세른은 머뭇거리며,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다, 고개를 떨구고는 두 손으로 남은 레넨의 한 손을 붙들었다.
“당신의 일전 제게 말했던 게 맞습니다. 요즈음 잠에 들면 진기한 경험을 하고는 합니다. 제가 본 이 꿈을, 심상을 말로 뱉으려 하면 정리가 되지 않으며, 글로 엮어내자니 펜이 도망을 가고는 하지요. 본능이 거부하는 걸지도 모릅니다. 꿈의 내용이라함은, 그건 분명 제가 저를 끌고 지옥으로 데려가는 것이겠지요. 눈을 뜨면 언제나 이 집과 당신은 없고, 저는 울창한 숲에 맨발로 남겨집니다. 마치 어느 시절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래요, 어쩌면 정말로 그런 걸 수도 있습니다…. 그 숲길을 따라 계속 걷다 보면, 이상한 비명이 들려 황급하게 발걸음을 옮겨보면, 사람이 보입니다. 저와 같은 용모를 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것이 저일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만, 저의 손을 잡아끄는 그 표정을 보고선 곧 그런 생각을 거뒀습니다. 그녀 또한 맨발이었습니다만, 그럼에도 상처 하나 보이지 않았습니다. 향한 곳은 호수였습니다. 점점 물이 다리 위로 차오르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그녀가 무어라 제게 말합니다만, 저는 그 말이 도저히 어떤 것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쩌면 세발의 것이 아닌 언어를 사용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면, 어느샌가 그녀는 보이지 않게 됩니다. 정말로 호수 한가운데에 저만 남게 됩니다. 그러면 비가 내리기 시작합니다. 비와 함께 저는 호수에 잠겨갑니다. 결국 빠져버리고 맙니다. 그곳은, 호수가 아니라고, 저는 확신을 합니다….”
세른의 말은 흐려지고, 레넨은 여전한 표정으로 듣고 있었다. 그러면, 레넨은,
“그러면, 확인하시겠습니까?”
라고, 권유를 하는 것이다.
마치 꿈에서 보았던 것처럼, 레넨은 세른의 손을 이끌고 호수로 향한다. 맞지도 않은 구두를 신은 듯한 느낌이 세른을 놓아주지 않는다. 다만, 다른 것이라고 한다면, 꿈에서처럼 끌려간다는 기분은 전혀 받지 않는다는 점이다. 세른은 그저 홀린 듯이 레넨의 흩날리는 은빛 머리칼만 뒤에서 바라보며, 천천히 발걸음했다. 레넨도 그에 맞춰 걸어가 준다.
눈에 익은 호수가 보인다. 집에서 창문을 열면 늘 보이는 풍경이다. 그것이 눈앞으로 옮겨졌을 뿐이다. 분명 꿈과는 무언가가, 다르다. 그러나 레넨은 마치 그 꿈속의 호수를 보았다는 듯,
“닮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호수 말입니까?”
“당신이 무엇을 보았는지 알 것 같습니다.”
레넨은 신발을 벗어 호숫가 어딘가에 내려놓았다. 세른은 무심코 레넨의 이름을 입에 올린다. 그러면 호수 얕은 곳으로 들어간 레넨은, 뒤를 돌아 세른을 바라본다.
“세른.” 손을 뻗는다. “이리 오시지요.”
세른은 이미 구두를 벗어 던진 상태였다. 발이 맞지 않는 느낌이 든다 하지 않았던가. 치맛자락을 들어 올리고는 천천히 발을 담근다. 천천히, 천천히. 네, 그겁니다. 레넨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정말 레넨이 말한 것인지는 모르나, 그러나….
“비는 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빠지는 것만으로도, 저도 당신과 같은 경험을 할 수 있을 겁니다.”
“레넨이 했던 경험과, 같지는 않지만, 비슷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세른이 말하려던 것은 이것이다….
“아니요, 세른. 당신과 함께 볼 그 풍경은 오래 전의 그것과는 확연히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세른, 당신은 그곳에 갈 자신이 없겠지요. 아직은 때가 아니라 생각하십니까?”
“때는, 언제가 와도 됩니다.”
“그렇습니까.”
레넨은 눈을 감고 세른의 두 손을 맞잡았다. 호수의 중앙, 두 사람은 잠기려면 잠길 수 있는 깊이였다.
“그러나 저는, 아직은 당신과 있고 싶군요…….”
물 아래의 허리를 레넨의 팔이 감는다.
“두려움입니까?”
“아니요, 그것은 ‘그리움’에 더 가까울 것입니다….”
둘은 호수 한가운데에서 거짓된 추억을 상기한다. 언젠가는 도달할 것이라며, 허황의 바다에 빠져든다. 정말 호수의 물은, 따듯하다는 것을, 세른은 실감했다. 아니면 이 감각마저도 옆의 사람에게 지배된 것일지, 일순 생각을 해도, 정말로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다. 세른은 가라앉으며 레넨을 있는 힘껏 껴안았다. 이미 이 파도는 가슴안까지 들어왔다. 그것이 어디로 이어질지, 둘의 바다를 향하는 것일지. 눈을 감아,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들을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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