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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hind the Scenes

1차 / 4천 자 (23.09 - 9회차)

파티가 한창인 저택에는 아름다운 사중주가 울려퍼지고 있었다. 드넓은 홀은 인파로 가득하고, 화려한 차림새의 사람들이 저마다 파트너와 짝지어 춤추거나 술을 마시며 떠든다. 루브는 그들을 감흥 없는 눈길로 바라본다. 격식을 갖춰야 하는 자리에는 좀처럼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제게 날아든 초대장을 당장 구겨 버리지 않았던 것은 오로지 거기에 적힌 문구 때문이었다. 나를 기다렸잖아, 러브. 그녀는 들고 있던 샴페인을 입안에 몽땅 털어넣는다. 어차피 입가심밖에는 안 되는 음료수였다. 두어 잔을 더 마시고 나니 오히려 머리가 맑게 개었다. 손에 묻은 물기는 붉은 드레스 자락에 대충 닦아낸다. 북새통 속에 맨정신으로 버티고 서 있으려니 슬슬 짜증이 오르기 시작했다. 불규칙한 심박이 귓가에서 날뛴다. 괜스레 조급해지는 기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할까. 루브는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었다. 실은 원하는 언제든 그를 방문할 수 있었으므로, 하필 이런 자리에서 견디고 있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지만 정말로 그가 돌아온 것이라면.

높은 중앙계단의 위쪽으로, 저택의 주인이 나타난다. 새빨간 머리칼을 가진 남자다. 이번의 이름은 뭐였더라. 기억을 더듬어 보지만 정확한 문자들은 떠오르지 않는다. 분명 초대장에도 써 있었을 텐데. 하지만 그런 것이 중요한 건 아니다. 루브에게 그는 영원히 ‘잭’이다. 멀끔한 정장을 차려입은 그가 짤막한 환영사를 이어간다. 순간 시선이 마주친 것도 같았는데, 착각일까. 애초에 이 정도 거리에서는 불가능하다. 루브는 한켠에 등을 기댄 채 마음 놓고 잭을 구경한다. 그는 그간 잘 지낸 것 같다. 혈색도 좋고 건강해 보인다. 쓸데없이 일찍 죽어버리는 것보다야 훨씬 잘된 일인데도 심기가 불편했다. 그사이 연설이 끝나고, 박수갈채가 쏟아진다. 능청스럽게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그의 곁으로 뺨을 붉힌 여인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었다. 한껏 들뜬 표정의 사내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지간히 사랑받고 있는 모양이지, 잭. 그의 호쾌한 웃음소리가 귓가를 날카롭게 파고든다. 문득 심사가 뒤틀린다. 루브는 이곳의 모두를 죽여버리는 상상을 잠깐 해 보다가, 그만둔다. 잭의 등장과 함께 잠시간 잦아들었던 음악이 다시 커진다. 파트너의 손을 잡은 여자들이 드레스 자락으로 바닥을 쓸며 홀 중앙으로 걸어나온다. 루브 역시 이미 몇 번의 춤을 추었다. 파티는 이른 시간부터 지금껏 이어지고 있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너무 눈에 띄지 않으려면 한두 번 굽힐 줄도 알아야 했다. 괜한 가십의 발원지가 되는 건 사양이다. 그러나 어떤 꽃은 구석에서도 여전히 아름다운 법이어서. 벽에 기대어 선 루브에게 누군가 다가와 머뭇머뭇 손을 내민다. 춤을 청하는 것이다. 루브는 무심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본다. 엷은 갈색머리, 수수한 인상의 사내다. 잠시 고민하던 루브가 가벼운 목례로 그에게 응한다. 흰 새틴 장갑의 감촉이 손과 손 사이에서 미끄러진다. 사내는 준비 자세를 잡는 것조차 서툴어 보인다. 패기는 봐줄 만하지만 영 능숙하지는 못하군. 그의 리드를 따라 적당히 몸을 움직이며, 루브는 수줍어 보이는 사내의 얼굴 너머로 다른 생각을 떠올린다. 그녀는 지금껏 모두 몇 벌의 드레스를 갈아입었을까. 그녀의 첫 춤과 마지막 춤은 어떤 사람들과 함께였을까.

그런 것들을 제대로 기억하고 있을 리 없다.

그사이 음악이 한차례 갈무리된다. 상기된 얼굴의 사내가 아쉬운 듯한 인사와 함께 다시 멀어져 간다. 루브는 제 그리움에 실체가 없음을 깨닫는다. 찬바람을 좀 맞아야겠어. 발코니로 나가려던 루브의 팔을 누군가 붙들었다. 대번에 표정을 굳힌 그녀가 고개를 틀었다. 그리고 그대로 멈추었다. 잭이었다. 쉿, 그는 검지를 입가에 대고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보인다. 그들은 기둥 뒤편에 자리한 계단을 따라 올라간다. 아래쪽에서 그를 찾아 두리번대는 여자들이 몇몇 보였다. 헛웃음이 났다.

위층은 사뭇 조용하다. 저 아래가 그만큼 많은 인간으로 들어차 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혹시나 쫓아올지 모를 불청객을 피해 조금 더 깊은 안쪽까지 걸어가던 두 사람은 금빛 문양의 카페트가 깔린 복도 한가운데에 멈춰 선다. 오랜만이라고 인사라도 할까, 싶었지만 루브는 금세 그 생각을 거둔다. 아직은 원망 같은 것이 더 컸다. 아래층에서 연주되는 느린 왈츠곡은 여기까지도 희미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기껏 사람을 끌고 와 놓고도 잭은 별말이 없다. 루브는 그를 재촉하지 않는다. 검고 노란 눈이 탐색하듯 그녀를 바라본다. 깊이 맞물리는 시선에 새삼스러운 전율이 일었다.

“파티는 잘 즐기고 계셨습니까?”

이만큼 뜸을 들인 것치고는 시시한 질문이었다. 루브는 그의 진의를 가늠하듯 미간을 찡그린다. 구태여 외진 곳까지 불러내 놓고, 겨우 이런 것을 묻다니. 초대장의 그 문구는 단지 착각일 뿐이었나. 원래부터 방탕하게 노는 캐릭터라면 하지 못할 말도 아니었다.

“아니, 내가 춤을 싫어해서.”

잭은 폭소를 터뜨렸다. 한참이나 배를 잡고 웃어 대던 그가 눈가를 훔치며 대꾸했다. 너무 쌀쌀맞잖아, 러브. 나 안 보고 싶었어? 루브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 잭을 바라보는 눈에 자꾸 힘이 들어간다. 그녀는 이제 잭을 거의 노려보고 있다. 다 기억해냈구나. 그런데도 이렇게 여유롭단 말이지. 그녀가 이를 악문다. 잭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인다. 그리고 루브에게 손을 내민다. 러브. 나랑도 춰야지. 그녀는 망설임 없이 그 손을 움켜쥔다. 결국 마지막 춤은 그와 함께하게 된 셈이다. 멀리서 들려오는 선율에 맞추어 춤이 시작된다. 잭의 스텝은 아까의 풋내기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깔끔하다. 붉은 치맛자락이 루브의 움직임을 따라 부드럽게 흔들린다. 하고 싶은 말도, 묻고 싶은 것도 많았다. 그러나 당장 가능한 것은 잭의 얼굴을 깊이 들여다보는 일밖엔 없었다. 몇 번을 거듭해도 똑같은 생김새, 흉터, 무엇보다 특유의 미소. 춤이 흘러갈수록, 애써 평온을 가장하던 루브의 얼굴에 조금씩 균열이 번진다. 그것은 잭 또한 마찬가지다. 형형하던 그의 눈동자가 얼핏얼핏 흔들리고 있었다. 그들 모두가 무언가를 참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입을 맞추거나 총칼을 들이밀고 싶은 충동, 하다못해 마음 놓고 주먹질이라도 해댈 수 있다면. 온갖 어지러운 감정으로 부풀어오르는 가슴을 억누르느라 자꾸만 호흡이 잦아든다. 루브는 제가 은연 중 잭의 팔을 쥐어뜯다시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녀의 시선 끝이 향하는 곳을 알아본 잭이 희미하게 웃었다. 루브의 허리께에 얹혀 있던 그의 손이 몸의 완만한 곡선을 느릿느릿 타고 오른다. 지루하기 짝이 없는 왈츠를 들으면서 이만큼의 긴장감을 끌어올릴 수 있다니 놀라운 일이다. 한계까지 달아오른 공기가 달갑잖은 열감을 몰고 온다. 그의 뜨거운 손이 루브의 맨어깨를 지나 허공에 잠시 머문다. 뺨을 감싸고 어루만질 것처럼 움직대던 그의 손. 성마른 그 손이 한순간에 루브의 가냘픈 목줄기를 틀어쥔다. 루브는 어떤 저항도 없이 잭을 바라본다. 머리에 피가 쏠리는 감각. 귓가에 윙윙대는 소리가 들리고, 눈앞이 하얗게 떠오른다. 멀리 들려오던 선율이 기괴한 불협화음으로 변주되며 이지러진다. 그러나 이런 것쯤으로는 죽지 않는다. 루브는 언제든 떨쳐낼 수 있는 그 손을 천천히 겹쳐 잡는다. 옛날이었다면 그는 제 두 손 안에 그녀의 삶을 가두었노라고 착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잭이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었다. 그가 지금 ‘잭’이든, 다른 누구이든 간에. ‘루브’는 언제나 변함없이 ‘루브’였다. 그의 생각만큼은 쉽게 부서지지 않고, 그의 생각보다도 쉽게 무너질 수 있는. 그러니 지금 목이 메는 것은 한껏 핏줄이 돋아난 잭의 손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가 절망했기 때문이었다. 양쪽의 빛깔이 다른 잭의 눈 속에 깃든 환희와, 꼭 그만큼의 비참을 목격하고야 말았기 때문에. 사랑, 그것만을 위해 영겁의 시간을 방황하는 그들에게 무엇이 예비되어 있는지 둘 중 누구도 알 수 없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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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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