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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봉투 하나가 책상에 단정하게 놓여 있었다. 라울에서 온 초대장이었다. 내심 기다리던 것인데도 어째 반길 수가 없으니 이상한 일이지. 루브는 손에 쥔 페이퍼나이프를 만지작댄다. 내용이야 뜯어보지 않아도 알 만한 것이었으므로, 결국은 선택의 문제였다. 이제 와 화합이라니 웃기지도 않는다. 그토록 긴 시간 동안 서로를 죽이지 못해 안달이었던 족속들인데. 루브에게는 그들 모두에 대해 어떤 믿음도 없었다. 연회에서는 반드시 어떤 일이라도 벌어질 것이다. 그렇다면 그 불씨가 개화하는 모습을 직접 목도하기 위해 나서는 것이 당연할 테지만. 루브는 선뜻 초대에 응할 수 없었다. 연회에서 잭을 만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직감 때문이다. 고작 그런 문제 때문에 다시 없을 기회를 놓치는 건 말도 안 된다. 그러나…… 루브는 아직 기억한다. 추위에 마비되어 둔해진 사지의 감각과 눈밭을 온통 물들인 피의 빛깔, 그리고 무엇보다 그 직시. 정면으로 마주쳤던 그 노랗고 검은 눈동자를. 그때의 기분이 어떠했는지까지도.
고작 사냥감 따위에 할애하기에는 차고 넘치는 감정이었다. 루브는 스스로 갈피를 잡을 수 없다. 그와의 재회를 원하는 것인지, 아니면 영영 피하고 싶은 것인지. 한번 손아귀를 빠져나간 사냥감은 멋대로 활개를 치며 뇌리를 엉망으로 어지럽힌다.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연회에 참석하려면 더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 도무지 그런 모임에는 나가 본 적이 없으니 준비가 제법 필요할 터였다. 무엇보다 마땅히 입을 만한 옷이 없다는 것부터가 문제였다. 우선은 재단사부터 불러야겠지. 치수를 재어 볼 만큼의 여유는 있을 테니, 그 때 값을 넉넉히 치르고 전부 알아서 해 달라 맡기면 될 것이다. 일단은 갈 준비를 하자. 루브는 이쯤에서 생각을 털어 버린다. 다른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연회까지 남은 말미가 줄어들수록 라울은 쉴 틈 없이 분주해진다. 아마도 말뿐일 평화, 그것이 공표되기 직전까지도 힘을 다해 날뛰어 대는 흡혈귀들을 상대하느라 바쁜 탓이다.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를 드레스의 만듦새 같은 것에 신경 쓸 여력은 없었다. 말투나 품행에 격식을 차리는 일이라면 더욱 그랬다. 그럼에도 잭의 존재는 도통 머릿속에서 나갈 생각을 않고 불쑥불쑥 튀어나와 그렇잖아도 복잡한 심경을 난잡하게 헤집어 놓는 것이다. 루브는 이미 시작된 생각을 걷잡을 수 없다. 아침에 일어나 거울 앞에서 머리칼을 정돈할 때, 싸움터에서 은제 나이프를 움켜쥘 때나 소파에 기대어 포도주를 들이킬 때. 심지어는 아늑한 침대에 누워 잠들기 전까지도. 그의 시선이 제게 따라붙는 듯한 착각을 느낀다. 그것을 전부 떨쳐 내려고, 고개를 흔들다 보면 순식간에 며칠이 날아가 버린다.
협약을 기념하는 날은 그렇게 도래한다.
이제는 정말 무를 수 없다. 루브는 새벽녘, 재단사가 땀을 뻘뻘 흘리며 두고 간 꾸러미를 뜯어낸다. 그간 까맣게 잊고 있던 드레스는 혼례라도 치르는 새신부의 것처럼 희디흰 순백색이다. 원하는 대로 만들라고 했으니 뒤늦게 따질 수도 없는 노릇이지만, 하필 이렇게 해놓을 줄은 몰랐다. 마치 그 자리에서조차도 결백을 증명하라는 듯한 모양새군. 마음에 썩 들지는 않으나 지금에 와서 새옷을 마련할 수도 없는 일이다. 루브는 불편한 기색이 가득 묻어나던 낯 위로 약간의 화장을 얹는다. 높이 틀어올려 묶은 머리칼은 훤히 드러난 목덜미를 타넘고, 새빨간 리본 두 가닥이 왼어깨 아래로 흘러내린다. 고스란히 노출된 가슴팍에는 짐승이 할퀸 듯 가로로 길게 남은 흉터가 보인다. 거울 앞에 비딱한 자세로 서서, 루브는 그 흉터의 주인을 만날 생각에 가슴이 뛰고 있음을 이제야 알아차린다. 깨닫는다. 자신이 잭을 만나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내내 속이 울렁거렸던 이유가 바로 이거였던 거지. 그와 다시 얼굴을 맞댄 뒤에 과연 무슨 일을 벌이고 싶은 것인지는 미처 알지 못하고 있었으나, 여하튼 제가 짐작할 수 없는 모종의 이유로 그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역겹도록 분명하다. 루브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본다. 내도록 침잠해 있던 회적색 눈동자에는 기묘한 흥분이 깃들어 반짝이고 있다. 그 모습이 더없이 생경했다. 침착히 숨을 고르며, 루브는 해가 완전히 떨어지기를 기다린다. 그들의 만남을 위해 예정된 시간은 밤중이다. 벌써부터 들떠서야 안 될 일이다. 그러나 정말로 어둠이 찾아오고, 그녀를 기다리던 마차에 올라 저택으로 향하는 동안에도. 루브는 자꾸 입안이 바짝 마른다. 기대하게 된다. 그와의 만남을. 다시 마주하게 될 그 까맣고 노란 눈동자를.
덜컹대며 흔들리던 마차가 끝내 도착지에서 멈춘다. 마차의 무거운 문을 밀어젖히자마자 싸늘한 숲 공기가 폐부를 찌른다. 일순간 숨이 멎을 듯 차가운 향기, 그 속에 옅은 사향 냄새가 스쳐 지나갔다. 루브는 망설임 없이 걸음을 내딛는다. 무섭도록 촘촘한 울타리 너머 입구를 향해 다가간다.
그리고 생각한다. 그날도 이렇게 추웠다고.
내뱉는 숨결에 공허한 입김이 흩어진다. 저택의 창살을 건드리던 손끝이 기어이 뾰족한 날 끝에 찔린다. 뜨끔한 감각과 함께 무언가 질척하게 흐른다. 잭은 대번에 인상을 찡그리며 손을 떨쳐낸다. 검게 맺힌 핏방울마저도 아까워 핥아내면, 오래되고 상한 것 특유의 떫은맛이 혀를 고통스럽게 한다. 더럽게 맛없네. 눈앞의 저택은 제가 머무는 곳과 달리 고풍스럽기 그지없다. 사람은커녕 짐승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숲 속에 이런 저택을 지어 놓을 이유가 대체 뭐란 말인가. 공터 한복판을 다 차지할 정도로 커다란 이 저택은 그럼에도 규모에 걸맞는 손님들을 품고 있는 것 같다. 수도 없는 창문들 중에 불이 꺼진 것은 하나도 없었다. 잭이 선뜻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울타리 앞에서 서성대는 사이, 어디선가 늑대 우는 소리가 길게 들린다. 그는 괜히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핀다. 그것은 무언가에 대한 경고 같기도, 혹은 저를 부르는 소리 같기도 하다.
잭!
그가 고개를 돌린다. 화장대 앞에 앉은 오늘의 연인이 세모눈을 뜨고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한켠에 버려두었던 검은 봉투를 당당하게 들어올린 채다. 내가 저런 걸 언제 받았었나, 기억조차 희미한 걸 보면 어지간히 성가셨던 모양이다. 그건 그렇고 오늘의 연인은 질투가 꽤 많은 듯하다. 저 안에 무슨 말이 담겨 있을 줄 알고 이런 표정을 짓고 있는 건지. 잭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샌다. 여자의 손끝에서 봉투가 열리고, 한눈에도 고급스러운 편지지가 들려 나온다. 거기에 적혀 있을 법한 멘트야 잭에게는 보나마나 뻔한 것이다. 이 즐거운 전쟁도 이제 끝이라는 섭섭한 소리가 적혀 있겠지. 그런다고 멈출까보냐, 혀를 차며 고개를 젓는 잭의 귓가에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날아든다. 라울이 어떤 여자야? 순간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잭이 성큼성큼 걸어 여자의 손에서 종잇장을 낚아챈다. 서로 다른 빛깔로 번뜩이는 눈동자가 정갈한 필체를 낱낱이 읽어나간다. 종전 기념? 만찬회? 분명 우스운 일이지만, 참석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불시에 떠오른다. 나름대로 즐거울 수도 있겠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지독한 변덕인지라 다시 웃음이 나오려는데, 어깨를 늘어뜨리고 부루퉁한 표정을 짓고 있던 연인이 금방 다시 팔을 뻗고 제 품을 파고들었다. 칭얼대며 사랑을 요구하는 여자의 결 좋은 금발이 조명 아래에서 예쁘게 반짝인다. 아이처럼 순진하고 애교 많은 여자다. 무엇보다 단순한 면이 사랑스럽지. 따뜻한 온기가 온몸에 부드럽게 옮아든다. 잭은 달콤한 목소리로 쉬지 않고 조잘대는 그녀를 내려다본다. 누구와는 영 딴판이네, 그런 생각을 하다가도. 대체 누구를 떠올린 건지 의아해지는 것이다. 창백한 눈밭을 뜨겁게 적시던 피의 잔상이 문득 눈앞을 스쳐 간다. 그 황홀을 다시 한번 맛볼 수 있다면. 잭이 입맛을 다신다. 그것을 어떠한 신호로 받아들인 연인 덕분에 방 안의 공기가 훅 달아오른다. 잭은 은근하게 몸을 맞붙여 오는 그녀에게 기꺼이 고개 숙여 키스한다. 이 순간 다른 여자를 생각하기엔 아무래도 시간이 아까웠다. 그야 눈앞의 사랑을 놓칠 수는 없으니까, 그것이 찰나에 불과한 감정일지라도.
잭은 자꾸 누군가를 기다리게 된다. 안락한 저택에서도, 드넓은 광장에서도, 누구와 미리 약속을 했거나 그러지 않았거나 언제 어디서든. 첫사랑을 겪는 소년처럼 한껏 설렜다가도, 막상 상대와 얼굴을 마주하면 반가움은 새처럼 날아가 버리기 일쑤다. 절벽에서 추락이라도 하듯 격렬한 실망감이 잭의 등에 내내 업혀 있었다. 그러고 보니 최근 만나는 여자들 중에 금발이 늘었다. 원래는 이런 취향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하긴 예고 없이 심사를 뒤바꾸는 것이야말로 제 특기나 다름없으니,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렇잖아도 죽 끓듯 했던 변덕이 요새는 더 난동을 부린다. 평생 매달렸던 연애에조차 몰두하지 못하고 퇴짜를 맞으니 말 다 했지, 뭐. 잭은 가장 마지막으로 만났던 여자를 떠올린다. 그녀 또한 예쁜 금발이었다. 화장이 다 번져 흉해진 얼굴로, 대체 누굴 생각하고 있는 거냐고 화를 냈던가. 제게 집중하라며 울먹이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선하다. 대체 뭐가 문제야, 잭?
잭이 혼자서 낄낄대며 웃는다.
늑대는 왜 지치지도 않고 울어대는 걸까. 그것들이 무리지어 우는 소리가 어둠 속에 잠겨들던 숲을 깨운다. 그저 포근한 밤을 반기는 것인지도, 아니면 미처 만나지 못한 동료를 기다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연쇄하며 이어지는 울부짖음이 공허뿐이던 주변을 채우고 있었다. 살벌하게 늘어선 울타리에서 관심을 떼고 정문으로 향하며, 잭은 또 괜스레 입맛을 다신다. 야릇한 기대가 가슴 속에 피어오르는 것을 느낀다. 어쩌면 이번에도 가벼운 흥미일 뿐, 그밖에는 무엇도 아닐지언정. 언제나처럼 결국은 아무것도 되지 못한다고 해도 좋았다. 이상하게 기분이 들떴다. 오늘은 달이 유독 밝고 하얗다. 모든 것이 얼어붙어 있던 그 황량한 숲속처럼. 그러니 이번에는 내기를 걸어 봐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잭은 이제껏 먼저 제안한 게임에서 져본 적 없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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