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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 4천 자 (23.08 - 7회차)

거울 속에서 익숙한 낯을 마주하는 순간, 너절해진 프레드릭의 머릿속에서 기억이 한꺼번에 역류한다. 여태껏 당연했던 프레드릭,이라는 이름은 억지로 걸친 남의 옷처럼 단숨에 불편하고 낯선 것이 된다. 이게 아니야, 다시. 나는 ‘잭’이지. 그래. 뱀파이어에게 안식이란 건 사치나 다름없는 거야. 기껏 고생해서 죽어 봤자 내가 편안히 묻힐 수 있는 땅 같은 건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거라고. 잭은 물 먹은 시체처럼 무거워진 몸을 억지로 일으켜 앉힌다. 눈앞이 울렁거리기 시작한다. 거울 저편, 시뻘건 머리칼의 사내가 새카맣고 샛노란 눈알로 그를 노려보고 있다. 어떻게 보아도 영락없는 ‘잭’의 모습이었다. 다른 이의 생 위로 덧씌워진 자아가 멋대로 의구심을 품는다. 두 명분의 이름을 동시에 끌어안고 살아갈 수 있는 걸까. 아니, 기억해낸 이상 그는 이미 온전히 한 사람으로 존재하는 일 수밖에. 어딘가에서 무거운 종소리가 들려온다. 정확히 열두 번의 경종은 또 무엇에 대한 예고일까. 도무지 뜻대로 흘러가는 게 단 하나도 없었다. 삶도 사랑도, 결국은 이겨내지 못하고 휩쓸려버렸을 뿐이었으니. 잭은 그의 얼굴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커다란 흉터를 멍하니 매만진다. 연한 살갗이 손끝에서 부드럽게 뭉개지는 감촉이 선명하다. 아니, 기왕 살려줄 거면 이번엔 좀 갸륵한 미남으로 만들어 주든가. 적어도 이런 사소한 하자 정도는 수습해줄 수 있는 거 아닌가. 깊은 한숨이 허공에 흩어진다. 지금 잭이 할 수 있는 일은, 해야 하는 일은 우선 그가 머물고 있는 방 안을 둘러보는 것이다. 잭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난다. 구태여 주변을 열심껏 살필 필요는 없다. 속이 뒤틀릴 정도로 친숙하게만 느껴지는 풍경은 일말의 여지도 없이 ‘프레드릭’이 사냥꾼이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기묘한 이질감이 그를 휘감는다. 이 집에 오래도 눌러살았으니 이런 포근함도 어쩌면 당연한 것일 텐데. 어차피 동일한 생김의 육신을 입은 채라면, 잠시의 부재를 겪고 돌아온 나는 정말로 ‘잭’인가? 다른 이름으로 살아가던 시절로부터 불과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그 모든 세월이 아득히 멀게만 느껴진다. 잭은 잘 손질되어 있는 화승총을 집어올린다. 반질반질 윤이 나는 총구가 그의 관자놀이에 툭, 툭, 성의 없이 부딪힌다. 그냥 이대로 방아쇠를 한 번 더 당기면 그뿐인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사냥꾼에 대해 생각하려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러브.

너는 어디에 있지.

다른 삶이 가능하다면 그때도 나는 네 곁이고, 너 또한 내 곁일 것만 같았는데. 그것을 너무 당연하게만 여겼던 걸까. 사실 환생이란 것도 참 웃기는 일이지. 피를 빨며 살아가는 흡혈귀였던 걸로도 모자라 거듭 태어나기까지 했다니. 잭은 아직 총을 쥐고 있는 손아귀에 힘을 가한다. 그대로 방아쇠를 당기려던 충동이 문득 사그러든다. 그의 시선이 아래로 비껴난다. 탁자 위에는 잘 갈린 페이퍼나이프가 놓여 있다. 한눈에 보기에도 은제는 아니다. 잭은 총 대신 그것을 주워올린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 수직으로 세운 은빛 칼날이 손바닥을 매끄럽게 가르고 지나간다. 붉게 벌어지는 살갗, 몇 번을 겪어도 완전히 익숙해질 수는 없는 고통. 핏물이 후두둑 떨어진다. 잭은 물끄러미 상처를 바라본다. 아물지 않는다. 재생하지 않는다. 그럴 리가 없다. 인간의 몸이란 원래 그런 것이니까. 그래.

이번에는 인간이구나.

그것은 곧 전신을 낱낱이 헤집던 고통을 두 번은 겪을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낯선 절망과 기이한 흥분감이 교차한다. 잭은 최초의 죽음을 돌이킨다. 제게 그것을 선사했던 사랑을 떠올린다. 가슴을 찢으며 열어젖히던 거친 손길, 온몸을 불사를 듯한 격통보다도 뜨겁게 맞닿던 입술과…… 마지막 순간 기어이 점멸하는 시야에 비치던 그녀의 얼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 인상을 찡그린. 미처 기억해내지 못했던 지난날들이 한꺼번에 물밀듯 들이닥친다. 잭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쥔다. 벌어진 상처에서 핏물이 울컥, 한차례 더 솟아오른다. 이전에는 정신없이 취하도록 달콤했을 혈향이건만 지금은 구역질이 날 정도로 지독하기만 하다. 옷자락을 흠뻑 적시고도 모자라 카페트 아래까지 범람하는 비린 냄새. 혼곤하다. 러브. 러브. 러브. 내도록 붙들고 있던 나이프는 어느새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고. 잭이 반쯤 무릎을 꿇은 채 휘청거린다. 좀처럼 피가 멎지 않는다. 뒤이어 암전.

 

*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다. 단골 주점의 침침한 조명 아래에 구겨져 앉은 잭은 멀쩡한 손으로 술잔을 움켜쥐고 놓지 않았다. 붕대를 대충 감아 놓은 왼손은 의자 아래에 힘없이 걸쳐 두었을 뿐이다. 상처가 덧날 걱정 따위는 처음부터 하지 않았다. 취기가 돌기 시작하며 온몸에 기분 좋은 열감이 오른다. 잔이 너무 빨리 비워지고 있었으므로 차라리 병째 입에 대는 편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언뜻 스쳤지만, 이곳에 오래 출입하고 싶다면 그런 추태는 부리지 않는 편이 좋을 것이었다. 점차 어지러워지는 정신으로 그가 간신히 감각할 수 있는 것은 고작 위스키의 단맛, 그리고 바로 곁에 자리한 유리창 밖으로 줄기차게 쏟아지는 빗소리뿐이다. 스스로 그저 인간에 지나지 않음을 자각했기 때문일까. 늘 마시던 술인데도 오늘따라 유독 몸이 힘들어하는 듯한 착각이 든다. 잭은 이렇게까지 엉망으로 취해본 일이 드물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주점 안에는 손님이 몇 없다. 행패를 부려도 질색할 사람이 적다는 뜻이다. 잭은 혼자서 킬킬 웃으며 다시 잔을 채운다. 비가 너무 많이 오고 있었다. 바깥은 분명 습하고 춥겠지. 그런 생각이 지나는 사이 술병은 점점 가벼워진다. 결국은 마지막 잔이다.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던 잭은 미련스레 값을 치르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뒷문을 밀고 나간다. 억수 같이 퍼붓는 폭우 속으로 선뜻 걸음을 딛는다. 세차게 내리는 빗줄기가 잭을 따갑게 때린다. 흥건하게 취한 덕일까, 걸음걸이가 팔자로 흔들흔들 어그러진다. 그러나 그는 곧 자리에 멈추어 선다. 지척에서 익숙한 냄새가 풍겼다. 짙은 화약 냄새와 그 너머로 스미는 허브의 향기. 축축한 물비린내에 묻혀 한참 늦게 올라오는 살내음까지도. 녹회색 로브를 뒤집어쓴 여자가 곁을 스친다. 그녀의 얼굴을 확인하는 것보다 손목을 붙들어 쥐는 것이 더 빨랐다. 퍼뜩 놀란 그녀가 고개를 들어올린다. 이전보다 선명해진 붉은빛 눈동자가 잭을 직시한다. 동시에 잭이 폭소를 터뜨린다. 걷잡을 수 없이 커져 가는 웃음소리가 골목에 가득 울린다. 꿈일까. 너무 취한 탓에 헛것을 보는 걸까. 조금도 로맨틱하지 않은 재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뭐 어때, 러브. 허탈할 정도로 쉬운 우연이라고 해도 우리에겐 기적일 텐데. 잭은 움켜쥔 손목을 힘주어 끌어당긴다. 루브가 저항 없이 잭에게로 쏟아진다. 혹시라도 그녀를 놓칠세라 세게 끌어안은 잭이 여린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는다. 숨을 깊이 들이쉰다. 달콤한 냄새가 난다. 품 안에서 루브의 몸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미친 듯 몰아치는 비바람이 둘을 온통 적신다. 차갑게 식은 잭의 손이 그녀 뺨에 닿았다. 그제야 온전히 맞닿아 뒤섞이는 둘의 시선, 교차하는 환희와 비참 사이에서. 잭은 루브 역시 뱀파이어로 거듭났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다시 태어난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던 셈이다. 서로를 만나기 위해 여기까지, 서로가 감당해야 했던 것들 전부. 오로지 최후의 해피 엔드를 향해 가는 과정이었던 거라고. 잭은 생각한다. 그렇게 믿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다. 추운 밤공기 사이로 하얀 입김이 흩어진다. 둘의 이마가 가볍게 부딪힌다. 여전히 경악으로 흔들리는 루브의 눈동자, 그 안에는 숨길 수 없는 애욕이 또한 깃들어 있다. 잭은 그것을 아직 읽을 수 있다. 그가 힘껏 웃는다. 몸을 무겁게 끌어당기던 취기는 어느새 흔적도 없이 날아가고. 그는 루브를 향해 속삭인다. 어쩌면 처음과 같은 목소리로. 러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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