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드포인트
1차 / 6천 자 (23.07 - 6회차)
눈밭에 튀기던 피의 잔상이 삭막한 병실의 천장 위로 검붉게 남는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위치를 바꾸어 가며 되살아나는 혈흔은 쉽사리 지워질 기미가 없다. 팔다리를 죽 뻗고 누운 채로, 루브는 시선을 내려 제 몸을 살핀다. 가슴팍을 가로질러 동여매 놓은 천조각에 진득한 핏물이 배어난다. 그밖에도 여기저기 찢긴 상처마다 붕대가 범벅이었다. 몸 구석구석을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진다. 그중 가장 선명하고 날카로운 감각은 발목에 깃든 상흔으로부터 기인한다. 잭의 송곳니가 박혔던 자리다. 마찬가지로 붉은 자국이 점점이 스며 더러워진 붕대 아래에는 분명 그 이빨이 관통한 흉터가 남았을 것이었다. 뜯겨나간 살점 아래, 흘러넘치는 피를 빨아 마시던 그의 형형한 눈빛을 좀처럼 잊을 수 없다. 그에게는 과연 만족스러운 식사가 되었을까. 어쩌면 그리 오랜 시간 속고만 살 수가 있었는지. 저를 이토록 지독한 배신감 속으로 밀어뜨려 놓고서도 한껏 이를 드러내며 웃음짓고 있을 그의 생각을 하면 대번에 심사가 뒤틀린다. 그야말로 새빨간 거짓말이잖아, 잭. 느른한 한숨이 잇새를 비집고 흘러나온다. 루브는 마냥 무겁기만 한 눈꺼풀을 내리감기도록 두었다. 잭에게 이유를 묻는 건 부질없는 일이다. 그들 뱀파이어는 태생부터가 포식자로, 그들의 사냥이란 것도 결국은 인간이 토끼를 잡아 취하는 일과 하등 다를 바가 없을 테니까. 그저 그들을 위해 마련된 최상의 먹잇감이 하필 인간일 뿐이다. 그보다 더 나은 명분은 없었다. 숲의 사냥꾼들이 겨울철 퍼붓는 폭설을 저주하거나 뱃사람들이 파도의 변덕을 원망하지 않듯이, 루브 역시 마찬가지였다. 애초 자연의 섭리를 거스를 수 있는 인간은 존재치 않으므로. 루브는 흡혈귀들을 증오해본 적 없었다. 특별히 사적인 감정을 품어본 적부터가 없다고 함이 옳을 것이다. 그것이 그녀가 냉정을 유지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달라졌다. 제게로 달려들던 잭의 붉은 머리칼이 흩날리는 모양새를 떠올리면, 순식간에 너무도 많은 감정이 밀려든다. 루브는 그것들 모두가 더없이 낯설었다. 실망이라고 말하면 어떤 기대를 품었던 것처럼 들리고, 후회라고 말하면 돌이킬 여지가 있었다는 것처럼 들린다. 번잡스럽게 피어나는 감정들을 낱낱이 정의하려 드는 건 쓸데없이 심력을 낭비하는 일이나 다름없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무슨 수를 쓰든 간에 이 상황을 수습하지 않고 그저 내버려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동료들에게 자세한 상황을 알리는 편이 좋을까, 아니다. 언젠가는 퍼져나갈 소문이겠으나 루브는 가능한 그 때를 늦추고 싶었다. 구태여 먼저 나서서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이 순간 루브는 제 안에서 요동치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가지 않으려 애쓰는 중이다. 금방이라도 속을 게워낼 듯 울렁거리는 이 감각이 끔찍할 정도로 생경했다. 계속 이런 식으로 살 수는 없었다. 앞으로 남겨진 삶을 위해서라도 자신에게는 어떤 예외도 남겨두지 않음이 옳으리라. 그렇다면 잭, 그와 다시 대면하여 해결하는 수밖에. 루브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그를 직접 사냥하기로 하는 것뿐이다. 이 손으로 그에게 되갚아줄 수 있다면, 그렇게 그의 피를 충분히 만끽한 다음이라면.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올지도 모른다. 루브는 감은 눈꺼풀에 힘을 준다. 눈을 뜨지 않고도 창밖에 해가 떠오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우선 잠에 들 시간이었다. 너절해진 육체를 갈무리하는 것이 먼저다. 그다음엔 어디든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으리라.
*
영원으로 치닫는 이야기의 시발점치고는 제법 시시한 내용이다. 고작 허기를 이기지 못해 이 모든 일을 벌어지도록 만들었다니. 루브는 문득 잭이 한심하다. 하지만 그러한 감상은 머잖아 그녀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것이다. 애초에 그를 놓아 보내주었다면 어땠을까. 그를 함부로 저울 위에 올리지 않았더라면. 그러나 이런 고민은 이 시점에서 유효한 것이 아니다. 막 저물어가기 시작한 황혼녘, 라울 근처의 주점으로 들어선 루브는 구석의 누군가에게 동전 몇 닢을 건네고 얄팍한 종이 뭉치를 받는다. 하필 이 시간대를 고른 것은 그나마 사람들 틈에 섞여 눈에 띄지 않기 위함이었지만 사실 루브는 애초부터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다. 뒤이어 들어차기 시작한 손님들 중 몇몇이 그녀의 셔츠를, 그러니까 헐렁하게 늘어진 오른쪽 소맷자락을 곁눈질했다. 어딜 가든 시선을 받는군. 루브는 순식간에 붐비기 시작한 주점을 미련 없이 빠져나와 거처로 향한다. 이제 새로운 균형점을 찾은 몸은 차츰차츰 빨라지는 그녀의 걸음에도 불구, 흔들림 없이 중심을 유지할 수 있다. 그간 끼니를 제대로 챙겨 먹지 않아 피골이 상접했음을 고려하면 더욱이 놀라운 일이었다. 루브는 더없이 익숙한 숲길을 지나 오두막의 문을 열어젖힌다. 이전에는 텅 비어 있었을 따름인 그 집안은 지금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책 몇 권과 종잇장들로 어지럽다. 그녀는 정돈되지 않은 책상 앞에 앉는다. 보통 사람의 시력으로는 모든 것이 어둠 속에 침침해지는 시각, 일단은 램프에 불을 밝히는 것이 우선이었다. 마찰면에 그어진 성냥은 순식간에 점화된다. 심지에 옮겨붙는 불꽃을 잠시간 바라보던 루브는 성냥을 불어 꺼버리고 다 타들어간 나무조각을 등 뒤로 내던진다. 그리고는 아까 받아온 종이뭉치로 눈길을 돌리는 것이다. 투박한 나무 의자에 무릎을 세우고 앉아 빽빽한 활자들 틈으로 고개를 파묻은 그녀는 한동안 부동자세로 말이 없다. 새롭게 입수한 정보를 머릿속에 하나하나 입력하느라 바삐 굴러가는 생각의 톱니바퀴 사이, 자꾸만 이물이 끼어드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오늘만큼은 이상하게도 집중이 잘 되지 않는다. 한데로 모이지 못한 생각들이 자꾸만 산발적으로 튀어나간다. 난삽하게 조각난 생각의 파편들이 원활한 사고를 방해한다. 루브는 결국 문서를 끝까지 다 읽지 못하고 내려놓았다. 이성을 되찾기까지 잠시의 휴식이면 충분할 터였다. 길어야 하룻밤을 넘기지 않으리라. 이런 날이면 사냥을 나가는 것이 오히려 상쾌하게 여겨지던 때도 있었건만, 루브는 잭을 죽인 뒤로 사냥에 나선 적 없다. 그것은 비단 협약 이후 명목 없는 사냥이 일체 금지되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표면상일지언정 인간과 뱀파이어는 예상보다 빠르게 화합을 이루었다. 그들이 서로를 향해 적의를 드러내는 일은 이제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 루브의 눈길이 책상 끄트머리에 간신히 얹혀 있는 붉은색 표지의 소설책에 가 닿는다. 그것은 수백 년간 살아가며 자신의 연인을 빼닮은 인간과 몇 번이고 사랑에 빠지는 뱀파이어를 주인공으로 둔 작품으로, 그 저자 역시 뱀파이어였다. 어딜 가나 지겨운 로맨스 이야기만 늘어놓는 사람들 틈에서 근 두어 달은 괴로웠던 기억이 난다. 그뿐인가, 바다 건너에서 새롭게 전해져 들어온 사상은 요새에도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다. 사람이 죽어도 천국이나 지옥으로 가지 않고 또 다른 생사를 거듭한다는 윤회설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런데 만약 이런 허튼소리들이 전부 사실이라면 어떨까, 루브는 생각한다. 다시 태어나는 것이 가능하다면, 최초의 삶을 잊지 않고 어떤 형태로든 지속하는 일이 정말 벌어질 수 있다면.
혹시 잭을 다시 만날 수도 있을까? 조각조각 씹어 삼켰던 그 심장의 비린 맛이 루브의 혓바닥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뜨거운 스튜를 끈질기게 먹어치우며 느꼈던 그 충만함, 포만감, 루브는 아직 똑똑히 기억할 수 있다. 증명을 갈구하는 건 멍청한 짓이라는 그 깨달음 역시도. 그날로부터 그리 오랜 시간이 흐르지도 않았을 텐데. 루브는 어쩐지 그것이 정말로 이미 벌어진 일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다. 그날의 회상은 단지 헛소문이거나 질 나쁜 동화에 불과한 것만 같다. 이런 체감은 아마도 세상이 너무나 빠르게 바뀌어가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는 일이다. 모든 것이 예전 같지 않았다.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뜰 때마다 휙휙 뒤집히는 거리의 풍경, 루브에게는 아직 이 땅에 발을 딛고 살아 있다는 실감이 부족하다. 하지만 시곗바늘을 되감아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것은 루브에게는 허용되지 않은 가능성이었으므로. 그러니 여태껏 살아온 삶으로는 결코 돌아갈 수 없음을, 이제라도 인정하는 수밖에. 돌이킬 수 없다면 나아가는 수밖에……. 그러나 그저 시간의 격랑에 휩쓸리지는 않을 것이라고. 루브는 이를 악문다.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잭을 다시 보고 싶었다.
이토록 단순하고 모호한 바람을 손에 쥐고. 루브는 책상에 어지러운 문서들을 눈으로 다시 훓는다. 통속 소설과 신흥 종교, 그리고 협약 사이 어떤 연관이 있을지는 그녀 자신조차도 스스로 알 수 없는 것이었으나, 몇 번의 눈길이 오간 뒤 루브는 끝내 어떤 계시를 받은 듯 모든 것이 명징해짐을 느낀다. 뱀파이어가 되자. 책상 위에 널려 있는 이것들은 모종의 힌트나 다름없었다. 우리가 실제로 윤회를 겪고 있다면, 그렇게 다른 모습으로 거듭나는 일이 가능하다면. 잭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루브마저 죽어버려서야 의미가 없다. 그녀 하나만큼은 끝까지 살아, 모든 일을 낱낱이 기억하고 있어야만 했다. 그리하여 잭을 다시 만나게 되는 그때에 그를 마음껏 비웃어줄 수 있도록, 혹은 가엾어할 수 있도록. 어차피 루브에게 내맡겨졌던 인간의 삶은 진작 다 소용되었다. 이미 끝난 시간을 붙들고 있어 봐야 의미가 없다. 그렇다면 이제는 새로운 갈망을 손에 움키는 것이 마땅할 터. 사랑이란 본래 이성과는 거리가 먼 것이라지만, 이 순간 루브는 충동이나 불안 따위 조금도 느끼지 않는다. 외려 아주 침착하고도 차가운 마음으로 서랍을 당겨 열 뿐이다. 그 안에는 깃펜과 잉크, 깨끗한 종이가 들어 있다. 정말로 뱀파이어가 된다면 불편이 더 클 테지. 언제 다시 태어날지, 정말로 그러기는 할지 모를 잭을 기약 없이 기다리는 일, 그리고 무엇보다 불로불사의 권태마저 떠안고 살아가는 시간 동안 루브는 분명 괴로울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스스로 내린 결정을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막연하고 순진한 소원이라고 해도 괜찮았다. 무언가를 이렇게 간절히 바랐던 때가 있던가. 까마득한 옛날까지 거슬러 올라가도, 이렇듯 강렬한 조갈은 루브에게 찾아왔던 적이 없다. 그리고 이 열감은 순간에 스러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또한 그녀는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사이 창밖에는 해가 완전히 가라앉고 있다. 지평선 안으로 끌려들어가는 태양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루브는 곧 책상 위로 시선을 돌려 놓는다. 뱀파이어가 되고 싶다고 한들 아무나와 피를 섞을 수는 없는 일, 이런 부탁을 위해서라면 신세를 질 만한 사람은 하나뿐이다. 루브의 편지를 받고서 그가 과연 어떤 생각을 할지는 모르겠으나. 결국은 사랑을 위해 감수하는 광기라는 것마저도 토로한 뒤라면 그도 별수 없을 것이었다. 실은 정말로 그랬다. 잭을 단 한번, 스치는 순간으로나마 다시 마주볼 수 있다면. 루브는 어떤 고통이든 겪어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어쩌다 여기까지 왔느냐는 질문은 이제 와 무용한 것. 잭과의 재회를 위해서라면 피에 미친 살인귀가 되는 것도, 그리하여 한때 동족이었던 이들에게 사냥당하는 것도 괜찮았다. 아니면 오래 산 뱀파이어들이 흔히 그러듯 가없는 공허에 빠져들어 홀로 허우적대는 것도 나쁘지 않을 터였다. 어느 쪽이든 좋다. 그녀가 여전히 이 땅에 발을 딛고 살아 있음을 다시 온몸으로 느낄 수만 있다면. 불길처럼 새빨간 그의 머리칼을, 검고 노란 그의 눈을 직시할 수 있다면.
잉크에 젖은 펜촉이 종잇장 위를 부드럽게 미끄러진다. 편지의 내용은 간결하게 끝맺어진다. 결국은 그가 거절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누구든 너무 오래 살다 보면 약점이 생기게 마련이고, 그녀의 착한 친구는 이런 류의 스토리에 사족을 못 썼다. 이에 대해 약간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루브는 훗날에도 결코 그를 탓할 생각이 없었으므로. 지독하게 타들어가는 황혼녘의 태양빛이 방안을 온통 시뻘건 빛으로 물들인다. 편지 위로 얼룩지는 색채가 꼭 엎질러진 핏물 같았다. 만남의 때와 장소를 당부하는 추신을 덧붙이고, 루브는 펜을 크게 휘둘러 서명을 남길 뿐이다. 인간으로서 그녀의 존재를 확인하는 마지막 순간이었다. 이제 필요한 절차는 모두 끝났다. 비로소 루브의 첫 번째 기다림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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