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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관

1차 / 4천 자 (23.07 - 5회차)

잭의 연애는 이번에도 처참한 결말을 맞았다. 그러니 그의 사랑 또한 마찬가지였다. 수신인 없는 편지에 하등 의미가 없듯, 가닿을 곳 없어 추락한 마음 또한 진창에 처박혀 이전의 실패와 한데 엉겨 썩을 뿐이다. 잭은 이제 옛사랑이 된 연인이 마지막으로 남겼던 단말마 같은 말을 곱씹는다. 도무지 저를 이해할 수가 없어서 무섭다나, 뭐라나. 너무 많이 들어서 이제는 그다지 유용하지도 않은 조언이었다. 좀 더 쓸모 있는 이야길 해줄 수는 없었어, 올리비아? 문간에 기대 서 있던 잭은 느적느적 걸어 방 안으로 들어간다. 두꺼운 손이 장롱 문을 열어젖혀 오래된 옷가지들을 건져올린다. 통나무를 깎아 만들었다는 옷장 밖으로 한눈에도 세월감이 역력한 드레스나 숄 같은 것들이 한가득 들려 나온다. 이것들은 언제 이렇게 다 삭아버렸을까. 진작 내버려야 했던 것들을 여태 끌어안고 있었으니 이리 되는 것도 당연한 일이겠지만. 잭은 아직 그 옷가지 하나하나마다 배어 있는 옛 연인들의 체취를 맡을 수 있다. 풍성한 옷자락에 고개를 파묻고 있으려면 살냄새와 분내가 어지러이 뒤엉켜 머리를 아프게 죈다. 한참 옷더미를 뒤적거리던 잭은 그중 가장 오래된 것을 끌어안고 소파에 대자로 널브러진다. 그녀의 머리색과 눈색, 살결의 감촉 따위는 어렴풋이 기억날 듯도 했지만 정작 이름만큼은 생각해낼 수가 없었다. 제법 아쉬운 일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뭐 어떤가, 오래 살다 보면 헤어진 연인쯤은 대여섯 정도 잊을 수 있는 것 아니겠나. 잭은 아주 긴 시간 동안 살아왔다. 그리고 그 모든 세월 내도록, 한순간도 빠짐없이 사랑을 했다. 명백히 중독이었다. 그러니까 이쯤 되면 잭은 진정으로 궁금해지는 것이다. 대체 언제쯤이면 성공할 수 있을까? 왜 이렇게까지 많은 고통을 겪어야 하는 걸까. 지금껏 수없이 많은 사람을 거쳐 오기는 했지만, 잭은 그중 누구에게도 결코 소홀했던 적 없었다. 언제나 뜨겁게 사랑했고, 그리고 언제나 그만큼 돌려받고 싶었을 뿐이었다. 종내에 누군가는 반드시 저를 이해해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그것만으로 잭은 여기까지 왔다. 아무리 더럽고 추한 모양이라고 해도 사랑은 사랑.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통째로 씹어 삼키고픈 이 아득한 허기를, 단 한 명이라도 온전히 채워줄 수만 있다면. 안 그래? 마리아, 아이샤, 케이티, 레아, 바이올렛…… 이름을 주워섬기자면 끝도 없는 나열이 될 뿐이다. 진작 지나간 사랑에 연연하는 건 아무래도 부질없는 일이니까. 풍성한 드레스를 펼쳐들고 소맷자락을 만지작대던 잭은 그것을 이불처럼 제 몸에 덮어 버린다. 그의 손목에는 살갗을 죽 가로지르는 흉터가 있다. 자수실이 반짝이는 치맛자락에 들러붙다시피 했던 시선이 그 자국을 따라 천천히 이동한다. 등받이에 걸쳐 놓은 트고 갈라진 손 끝이 향하는 극단에는 장롱 속의 옷가지들만큼이나 낡은 총이 한 자루 놓여 있다. 그것을 목격하는 순간 잭은 생각한다. 어떤 이유도, 대책도 없이. 그저 섬광처럼 뇌리를 스치는 단언이었다.

헌터가 되어야겠다.

잭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아직 손아귀에 움켜쥐고 있는 드레스와 함께 춤추듯 거친 동작으로, 그가 웃음을 터뜨린다. 역시 기가 막힌 생각이야, 내 사랑. 레이스 달린 소맷자락 끝에 입 맞추다가도 잭은 고개를 젓는다. 옛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더 옳을까. 뭐 어느 쪽이든. 잭에게는 근사한 결심이었다. 헌터가 되는 최초의 뱀파이어라는 보장은 없더라도, 당분간 유흥을 위해서라면 나쁘지 않을 터였다. 어쩌면 지금보다 더 치열하게 살아가는 법을 배울 수 있을지도 모르지. 콧노래마저 흥얼거리던 잭이 다시 장롱을 열고 드레스를 쑤셔넣었다. 쿵, 문짝이 도로 닫히는 묵직한 소리.

 

그리고 잭은 정말로 사냥꾼의 옷을 입고 숲 한가운데에 서 있다.

더운 바람결이 뺨을 간질이고, 산새가 지저귀는 여름. 그 선명한 초록의 틈바구니에서. 저를 사이에 두고 두 명의 헌터가 대치하고 있었다. 언쟁이 오가는 와중에도 잭은 홀로 한가롭다. 그의 시야에 들어찬 것은 부신 금발머리. 잭의 눈길이 어깨 뒤로 땋아내린 그 머리칼을 아래에서부터 훑고 올라간다. 머리 정말 더럽게 못 땋네. 내가 좀 만져도 되나? 차라리 대신 정돈해주고 싶을 정도로 마구 튀어나온 잔머리를 빤히 보고 있노라면 불시에 뒤돌아선 그녀와 시선이 마주친다. 잭은 천연덕스럽게 미소지을 뿐 놀라지 않는다. 그녀는 신입 주제에 조금도 긴장한 기색이 없는 잭을 의아한 듯 바라보다가, 곧 다시 고개를 돌린다. 분명 의식적으로 눈을 피하는 것 같았다. 딴에는 깊게 생각해 봐야 좋을 것이 없고 귀찮기만 할 뿐이니 그런 것이었겠지만, 잭은 그녀 얼굴에 스쳐가던 위화감을 이미 읽어낸 뒤였다. 주술 때문에 기억도 온전치 못할 텐데. 풋내기 헌터라도 직감은 역시 무서운 건가. 잭은 여전히 미소 띤 낯으로 얌전히 서서, 저를 두고 떠드는 선임들의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중이다. “맡기는 게 아니라 한번 키워 보라는 거잖아”, “보통은 그걸 두고 귀찮은 일을 미루는 거라고 하지”. 대놓고 피곤한 기색으로 머리를 쓸어넘기는 금발의 여자에게 다른 헌터가 다시 호소한다. “내버려 두면 흡혈귀 새끼들한테 죽을 텐데?”라니. 음, 만약 내쳐진다고 해도 쉽게 죽는 몸은 아니라 아쉬운 일이지만. 그녀는 주춤대는 기색도 없이 동료에게 쏘아붙인다. “발정난 짐승은 두들겨 패는 게 약이지”. 끝도 없이 실랑이를 이어가는 둘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잭이 슬금슬금 걸음을 뗀다.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느물대는 태도만으로 짐승 취급을 당하다니 어쩐지 좀 억울한 일이었다. 한참 성을 내고 있던 여자의 등 뒤로 다가간 잭이 그녀를 대뜸 끌어안았다. 동시에 뾰족한 팔꿈치가 명치를 거세게 파고든다. “루브!” 곁에 있던 헌터가 놀라 그녀를 부른다. 아, 그런 이름이셨군. 일순간 숨이 멎을 듯한 고통에 눈물이라도 흘리고 싶은 심정으로 배를 움켜쥐고 있던 잭을 루브가 황당하다는 듯 쳐다본다. 약이 잘 듣기나 하면 다행이지, 중얼거리며 앞서 나가는 그녀 걸음걸이에는 한치의 망설임조차 없다. 안절부절못하며 저와 루브를 번갈아 바라보던 헌터가 결국 미안하다는 듯 고개를 숙이고 루브를 쫓아 종종걸음으로 달려갔다. 괜찮다고 손사래를 치면서도, 잭은 멀어져 가는 노란 뒤통수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이 충직한 파수견이라면 얼마쯤은 그런 행세를 해줄 요량도 있을지 몰랐지만. 단번에 순순해지는 건 재미가 없잖은가. 그렇다고 이대로 혼자 남겨져 있을 수도 없으니, 그들을 따라 한참 늦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며 잭은 생각한다. 루브Louve, 암늑대라. 사람 이름치고는 험상궂은 선택이겠으나 어쩐지 나쁘지만도 않은 것 같았다. 짐승의 이름을 가졌으니 진짜 짐승을 알아볼 수도 있는 걸까. 아니, 꼭 그런 사소한 문제와 연관짓지 않더라도. 그녀의 거침없는 태도나 사나운 눈빛 같은 것들을 떠올리자면 그녀에겐 퍽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살아남기 위해 열심껏 벼려 왔을 그 무기는 그녀가 품에 지니고 다니는 단도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리라. 하지만 그런 절박함이야말로 아름답고 찬란한 파편에 불과하게 되는 것. 흉포한 들짐승을 한순간 귀여운 설탕과자로 전락시키고픈 치기가 불쑥 고개를 내민다. 루브, 네게 딱 맞는 애칭이 있다고 하면 어때. 가장 어울리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혀 놓은 것마냥 우습기도 하지만…… 뭐, 네가 알기라도 할까? 성큼성큼 걷는 잭의 걸음은 멀어졌던 루브를 어느새 반틈이나 뒤쫓아간 뒤다. 손을 뻗으면 엉망으로 나부끼는 금발을 쥐어볼 수도 있을 듯한 거리에서.

러브.

잭이 그녀를 부른다. 저를 칭하는 것인지도 모른 채, 그저 인기척에 뒤를 돌아보았던 루브가 질린 표정을 지었다. 둘의 시선이 다시 부딪힌다. 잭은 루브를 향해 입꼬리를 끌어당겨 웃어 보인다. 아주 반가운 것을 찾았다는 듯이, 그의 앞으로 남겨진 즐거움의 몫을 예감했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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