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해언
창가에 앉아 있던 루브는 천천히 눈을 깜박인다. 갑자기 쏟아지기 시작한 비 때문에 주변이 소란스러웠다. 순식간에 젖어드는 보도블럭, 머리를 가리고 뛰어가는 사람들, 개중 몇몇은 급히 카페 안으로 들어오기도 했다. 루브는 오른편 벽에 붙어 있는 시계를 곁눈질한다. 곧 출발해야 하는 시간이었다. 노트북을 접어 넣고, 빈 커피잔을 치우고. 루브는 여유롭게 가방에
파티가 한창인 저택에는 아름다운 사중주가 울려퍼지고 있었다. 드넓은 홀은 인파로 가득하고, 화려한 차림새의 사람들이 저마다 파트너와 짝지어 춤추거나 술을 마시며 떠든다. 루브는 그들을 감흥 없는 눈길로 바라본다. 격식을 갖춰야 하는 자리에는 좀처럼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제게 날아든 초대장을 당장 구겨 버리지 않았던 것은 오로지 거기에 적힌 문구 때문이었다
검은 봉투 하나가 책상에 단정하게 놓여 있었다. 라울에서 온 초대장이었다. 내심 기다리던 것인데도 어째 반길 수가 없으니 이상한 일이지. 루브는 손에 쥔 페이퍼나이프를 만지작댄다. 내용이야 뜯어보지 않아도 알 만한 것이었으므로, 결국은 선택의 문제였다. 이제 와 화합이라니 웃기지도 않는다. 그토록 긴 시간 동안 서로를 죽이지 못해 안달이었던 족속들인데. 루
거울 속에서 익숙한 낯을 마주하는 순간, 너절해진 프레드릭의 머릿속에서 기억이 한꺼번에 역류한다. 여태껏 당연했던 프레드릭,이라는 이름은 억지로 걸친 남의 옷처럼 단숨에 불편하고 낯선 것이 된다. 이게 아니야, 다시. 나는 ‘잭’이지. 그래. 뱀파이어에게 안식이란 건 사치나 다름없는 거야. 기껏 고생해서 죽어 봤자 내가 편안히 묻힐 수 있는 땅 같은 건 애
눈밭에 튀기던 피의 잔상이 삭막한 병실의 천장 위로 검붉게 남는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위치를 바꾸어 가며 되살아나는 혈흔은 쉽사리 지워질 기미가 없다. 팔다리를 죽 뻗고 누운 채로, 루브는 시선을 내려 제 몸을 살핀다. 가슴팍을 가로질러 동여매 놓은 천조각에 진득한 핏물이 배어난다. 그밖에도 여기저기 찢긴 상처마다 붕대가 범벅이었다. 몸 구석구석을 찌르는
잭의 연애는 이번에도 처참한 결말을 맞았다. 그러니 그의 사랑 또한 마찬가지였다. 수신인 없는 편지에 하등 의미가 없듯, 가닿을 곳 없어 추락한 마음 또한 진창에 처박혀 이전의 실패와 한데 엉겨 썩을 뿐이다. 잭은 이제 옛사랑이 된 연인이 마지막으로 남겼던 단말마 같은 말을 곱씹는다. 도무지 저를 이해할 수가 없어서 무섭다나, 뭐라나. 너무 많이 들어서 이
지난날의 기억들이 환등으로 스쳐 간다. 색 바랜 필름이 희미한 영상을 띄운다. 장면은 마지막 식사 이후, 그 끝도 없던 기다림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렇게 영겁 같던 세월을 뛰어넘어 다시 첫 재회, 나를 잊은 너를 저주하는 절망 속에서도 차마 떠날 수 없었던 시간들. 그러다 문득 계시처럼 기억을 되찾는 너와, 온화한 날들을 지나는 사이 태어난 아이와, 그럼에도
― 1 정오의 태양빛을 한껏 빨아들인 검날이 고고히 번뜩인다. 백금색 몸체에 새겨진 검푸른 문양은 그간 익히 보아 왔기에 더없이 잘 알고 있는 것이었다. 예식을 거행하기 위해 소집된 기사들이 일렬로 늘어선 채 깃발을 드리우고 있었다. 두터운 천이 미풍에 흔들리며 맑은 하늘 위로 새파란 궤적을 덧그린다. 압도적인 풍경이었으나 생경함은 들지 않았다. 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