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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판14 기반 1차, 메인 스포일러 O / 총합 16만 자 (2022.09~2024.03)

1

 

정오의 태양빛을 한껏 빨아들인 검날이 고고히 번뜩인다. 백금색 몸체에 새겨진 검푸른 문양은 그간 익히 보아 왔기에 더없이 잘 알고 있는 것이었다. 예식을 거행하기 위해 소집된 기사들이 일렬로 늘어선 채 깃발을 드리우고 있었다. 두터운 천이 미풍에 흔들리며 맑은 하늘 위로 새파란 궤적을 덧그린다. 압도적인 풍경이었으나 생경함은 들지 않았다. 노아는 지금 이상할 정도로 평온하다. 그저 눈앞에 반듯하게 내밀어진 검의 선연한 형태만을 응시할 뿐이다. 그는 지금 뱅드로의 앞에 홀로 꿇어앉아 있다. 주위에는 어떤 방해도 존재하지 않는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단장의 선언은 오로지 노아, 하나만을 겨냥하여 쏟아지고 있다. 노아는 고개를 깊이 숙여 자신이 이미 준비되었음을 증명한다. 아름다울 정도로 예리한 검신이 다시 검집 안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그렇게 빛이 사그러드는 모습을 노아는 오래 바라보았다. 뱅드로의 양손에 수평으로 들렸던 검이 마침내 제 손에 옮겨지는 그때에, 영광의 일부를 함께 하사받는 감상은 별다를 것 없었다. 대신 노아는 첫 발도의 순간을 미리 상상한다. 이 검으로 수없이 베어내게 될 사특한 무리들을.

기실 노아에게는 이러한 수여가 어떤 보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언젠가 마땅히 다가올 내일이었고, 기다림의 과정 또한 인고로 여겨본 적 없으므로. 이단의 습격을 저지하고 난전 속에서 인사를 구제하는 것은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니었다. 사람이 호흡하는 일에 의구심을 품지 않듯 노아의 수행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의 믿음에는 조건이 없었다. 그것은 아주 오래된 맹목이었다. 따라서 그에게는 지금의 이 성취 또한 공적에 대한 보상이라기보다, 존경하는 은인을 제대로 향할 수 있도록 하는 일종의 자격이자 긍지로 다가왔다. 마침내 보은하리라는 그리고 기대를 저버리지 않겠다는 일념만으로. 새로운 전우를 힘주어 붙잡은 그의 손아귀에 조용히 핏줄이 돋는다. 문득 떠오르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일이다. 이단심문관을 지원하는 추적 업무에 동원되었던 때. 그날을 기점으로 비틀리기 시작한 것들이 분명 있었으므로. 노아는 그 이단의 이름을 아직 기억한다.

 

*

 

어쩌면 파견 자체가 노아의 가문을 위한 일종의 증명 수단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들이 이단자와 내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하려는 목적이었겠으나, 노아는 그러고도 이용당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제가 아니면 달리 누가 하겠는가? 노아가 특별히 열성을 보이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그가 임무에 소홀한 것도 아니었다. 단지 맡은 바에 충실할 뿐. 심문관을 안전히 호위하고 만약의 경우 전투에 참여하면 그만이었다. 이번의 추적 대상은 신학원 소속이었다고 했으니 크게 위험할 일도 없을 것이었다. 여태껏 거쳐온 이단자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혐의를 부정하고 억울함을 토로했을 뿐으로, 그들의 행적이 실질적인 위협으로 돌아오는 경우는 몹시 드물었다. 일행을 따라 드넓은 초원을 걸으며 노아는 생각한다. 믿음 없는 가엾은 족속들. 결국 구원은 외길 끝에 있는 것을.

상념은 길게 지속되지 않는다. 이 근방에서 이단자를 마주칠 수 있으리라는 제보가 있었다. 어디쯤에 길게 난 동굴 하나를 제외하면 주변은 온통 평원이니, 어려운 임무가 되지는 않을 것이었다. 토끼몰이나 다를 바 없었다. 운이 좋다면 오늘 하루의 일로 끝낼 수도 있겠지. 노아는 계속해서 전방을 주시한다. 부지불식간에 한두 점씩 떨어지기 시작한 빗방울 따위는 개의치 않았다. 이 정도 날씨는 궂은 축에도 들지 못했다. 가끔 얼굴에 묻어나는 물기를 닦아내며, 일행은 지친 기색도 없이 계속 걸었다. 노아의 날카로운 육감이 도망자를 발견한 것은 그로부터 얼마 후의 일이었다.

시리도록 흰 머리칼, 바람결에 흩날리는. 그 만남의 순간. 불가능한 거리에서 시선이 마주친 듯한 착각이 일었다. 멀리에서 기사단의 군집을 목격한 이단자는 즉시 등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새하얀 잔상이 푸른 초원 위에 남았다. 별다른 지물이 없는 풀밭 위를 내달려 봐야 결말은 뻔하다. 그의 선택은 명료했다. 그의 향방이 저편의 비좁은 동굴 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음을 읽어낸 노아가 곧장 행렬에서 이탈했다. 이렇듯 뻔한 일을 예상하고도 왜 진작 대비하지 않았나. 시작부터 일이 어긋나고 있었다.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예감이 들었다. 기사 두엇이 보조를 위해 뒤에서 쫓아왔지만 노아의 속도를 쉽게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노아는 쉬지 않고 달린다. 거리는 순간에 좁혀진다. 손만 뻗으면 저 이단의 머리채를 틀어쥘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를 바짝 쫓는 그 찰나에, 노아는 머릿속에 새겨진 정보들을 복기한다. 신학원 소속. 내부 고발. 성도 이탈. 에테르를 다룰 줄 안다고 했지. 곧 사정거리 안이다. 노아가 발도한다. 크게 휘두른 검격이 이단의 너른 등을 찢는다. 붉은 피가 점점이 튀었다. 걸음이 뒤엉키며, 그의 몸이 크게 휘청였다. 그럼에도 아직 완전히 거꾸러지지는 않았다. 노아가 재차 검을 고쳐 잡는 그 순간.

근거리에서 낯익은 포효가 울렸다. 마물이었다. 왜 하필 지금? 노아가 멈춘 아주 잠깐 사이, 그만큼의 틈으로도 이단자에게는 충분했다. 휘황한 빛이 갑작스레 시야에 범람했다. 격통을 이기지 못하고, 노아는 결국 눈을 감는다. 아픈 눈을 억지로 다시 부릅떴을 때 그는 이미 사라지고 없다. 멀리 동굴의 입구 쪽에서 첨벙대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는 것도 같았다. 그것을 감지했지만, 달리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어느새 노아를 따라잡은 일행이 다가오는 마물에 대비하며 경계 태세를 갖추었다. 지축을 울리는 발걸음 소리는 예상보다도 거대한 것이다. 뒤늦게 합류한 심문관이 한껏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차츰 가까워 오는 마물은 어쩌면 하나가 아닐지도 모른다. 빗줄기마저 조금씩 거세지고 있었다. 더 이상의 수색이 무리라는 사실은 명백해 보였다. 오늘은 이만 철수하지. 서두르게. 못마땅한 음성이 지휘관의 목울대를 긁으며 튀어나온다. 물기를 머금은 검을 한번 털어내고, 그것을 다시 검집으로 인도하면서도. 노아는 실망하지 않았다. 불필요한 소모전을 피하는 것은 당연하고도 효율적인 선택이었으며, 또한 조만간에 추가 지시가 내려올 거라고 믿었던 탓이다. 코앞에서 놓친 이단을 자유롭게 도망하도록 내버려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마물의 방해만 아니었더라면 그자를 진작 처분하고도 남았을 텐데. 그러나 그뿐이었다. 일행은 다음날 성도로 모두 복귀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단자를 낳은 가문과 심문관이 저들 각자의 이해관계를 목적으로 결탁해, 추적은 애초부터 없었던 일이 되었다. 노아에게는 허망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는 제 머릿속이 어지럽도록 두는 사람은 아니다. 불쑥불쑥 고개를 디미는 감정들까지 전부 수용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고작 이 정도의 부정이 노아의 심지를 꺾지는 못했다. 이런 일들은 오히려 그를 다른 방향으로 부추겼다. 그날 놓쳤던 이단을 차라리 직접 추적하고야 말겠다는 목적 아래, 노아는 스스로 이단심문관이 되기를 목표한다. 그것은 또한 그가 환술을 익힌 이유가 되었다.

 

그러니 노아를 지금 이 자리에 있게 만든 것은 결국 그 이단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말도 안 되는 비약이라고 고개를 내저으면서도. 노아는 모종의 의구심을 완전히 버릴 수가 없다. 그자와의 만남은 노아에게 너무도 명백한 계기로 작용하지 않았던가. 어쩌면 모든 것이 누군가의 계획으로 짜여진 일이었다는 것처럼. 실제로 그렇든 그렇지 않든, 노아에게는 이미 맡은 바 소임이 존재했으므로 그는 앞으로도 변함없이 주어진 일에 열심으로 임할 것이겠으나. 노아는 어느새 곁에 다가와 제 어깨를 격려하듯 두드리는 은인을 향해 반듯하게 웃어 보인다. 마치 새로운 사명이라도 부여받은 듯, 허리춤에 매달린 새 검이 이상하리만치 무겁게 느껴졌다. 예식을 마치고 일제히 해산하는 인파를 지나 거처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묘하게 느려진다. 분명 좀 더 기뻐해도 좋을 날일 텐데. 부정한 잡념이 뇌리를 끈질기게 파고든다. 노아는 아직 그 이단의 이름을 기억한다. 날카로운 검날이 그의 배후를 무겁게 베어내던 그 감각 역시도 손 끝에 선명했다. 그와 다시 대면하는 그 때에, 제 삶이 또 한 번 뒤엉키리라는 확신 속에서. 노아가 할 수 있는 것은 수련에 매진하는 일뿐이다. 예정된 고난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면 한순간도 허비할 시간이 없었다.

2

 

검날에 찢긴 등이 욱신거린다. 그러나 남자는 달리기를 멈출 수 없었다. 동굴의 초입까지는 고작 몇 걸음, 저 안으로 몸을 내던진다면 일단은 살아남을 수 있을지 몰랐다. 가까이 마물이 울부짖는 소리가 귀를 찔렀다. 있는 힘을 모조리 쥐어짜 한 걸음씩을 겨우 딛는다. 거칠어지는 호흡을 따라 몸이 크게 흔들린다. 그때마다 상처가 벌어져 피를 토했지만 다른 수가 없었다. 견뎌야 했다. 그는 좁고 어두운 석굴 안으로 뛰어든다. 시야가 어두워지기 무섭게 요란한 괴성이 다시 한 번 지축을 울렸다. 정신 없이 헐떡이던 남자가 숨을 억지로 고른다. 지친 눈이 어둠에 적응하려고 빠르게 깜빡였다. 여기에 언제까지 숨을 수 있을까. 만약 저 안쪽에 무언가 더 위험한 것이 있다면. 그는 자꾸만 허물어지려는 다리를 간신히 지탱하고 선다. 손아귀를 벗어나려는 마도서를 애써 움켜쥔다. 지독한 피로감이 몰려왔다. 눈앞을 짐작할 수 없었다. 이대로 쓰러져서는 안 되는데. 짙은 혈향에 둘러싸인 채 망설이던 그가 힘겹게 걸음을 떼려는 찰나. 깊은 암흑, 그 건너편에서. 낯선 기척이 들렸다. 남자는 최후의 여력을 끌어모아 경계 태세를 취한다. 하지만 조심스럽게 들려오는 목소리는 허망하게도 너무나 앳된 아이의 것이다.

위험해요, 이 쪽으로 오세요.

어떤 의심도 허용하지 않는 음성이었다. 가볍고 맑은, 그리고 순수한 떨림을 품고 있는. 남자는 닫히려는 눈꺼풀에 힘을 준다. 걸핏하면 어그러지고 빗나가는 걸음을 억지로 붙잡아 이끌고 겨우겨우 소리의 근원지로 향한다. 그사이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굴곡진 돌벽의 희미한 윤곽을 잡아냈다. 바닥을 더듬어 가며 천천히 디디던 발 끝에 어느새 찰박대는 물이 밟힌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여 아래를 확인한 남자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거기에 누군가 내민 손이 있었다. 조그맣고 여리지만, 그럼에도 분명한 힘이 느껴지는. 남자는 그것을 붙잡는다. 따뜻한 온기가 옮아붙었다. 군데군데 검고 하얀 아이의 머리칼이 어두운 동굴 안에서 희미하게 빛난다. 얼마간 더 나아가던 둘은 곧 움푹한 공간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았다. 흠뻑 젖은 남자의 옷에서 여전한 피비린내가 풍겼다.

죄송해요.

남자는 아이의 목소리에 물기가 묻어난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린다. 얼핏얼핏 흔들리는 그 눈동자는 명백히 겁에 질려 있다. 뭐가 미안한 거냐고 되묻기도 전에 말들이 급히 쏟아진다. 그 사이에서 엉킨 호흡이 문장을 몇 개로 조각냈다. 저 때문이에요. 제가 마물을, 데리고 왔어요. 남자는 시끄럽게 포효하던 그 생물이, 이토록 작은 아이를 먼저 쫓고 있었음을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다. 계속해서 멀어지려는 그의 시야에 미안함과 걱정으로 얼룩진 말간 낯이 담긴다. 남자가 겨우 고개를 내젓는다. 괜찮다는 대답은 입 밖으로 완전히 떨어져나오기도 전에 희미해진다. 지독한 현기증. 치료가 필요한데. 정말이지 숨을 들이쉴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여태 감싸안고 있던 마도서를 내려다본다. 흐려지는 시선 끝이 안절부절못하는 아이에게 가 닿는다. 지금은 스스로 치유술을 쓸 수 없다. 아직 정신을 잃지 않은 것만 해도 기적에 가까웠다. 그렇다면 이 애한테, 가르칠 수 있을까. 도움을 구할 수 있을까. 남자는 무너지는 몸을 억지로 지탱한다. 고개를 흔들어 정신을 일깨운다. 어차피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두터운 책이, 조심스레 내밀어진다. 얼결에 그것을 건네받은 아이가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나를 좀 도와주렴. 꺼질 듯한 목소리가 새어나간다. 설명 없이도 그가 이미 위태롭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이는 망설이지 않고 그러겠노라고 대답했다.

 

몇 장의 페이지가 팔락대며 넘어간다. 어지러운 마법 문양들이 눈앞을 스쳤다. 원하던 것을 금세 찾아낸 남자가, 아이의 고사리 같은 손을 잡아 책장 위에 올렸다. 여기에, 에테르를 주입하는 거란다. 남자는 그 작은 몸에 가득 들어찬 에테르를 느낄 수 있다. 어렵지 않을 거야. 네 안에 있는, 힘의 흐름을 느끼고, 불어넣으렴. 속삭이듯 이어지는 중얼거림을 아이는 놓치지 않고 모두 듣는다. 머뭇대던 표정은 금방 결연해진다. 까끌한 종이 위를 어루만지던 손 끝에서부터, 머잖아 눈부신 빛이 퍼져나오기 시작한다. 황급히 저를 돌아다보는 아이에게 남자는 웃어보인다. 커다랗던 상처가 조금씩 아물어가고 있음을 느낀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지, 이렇게 충만한 에너지가 느껴지는데. 그에 비하면 회복의 속도는 현저히 느리다. 어째서일까. 그럼에도 조금씩, 꾸준히. 생기를 되찾아가는 남자를 지켜보면서. 아이는 몇 번이나 같은 과정을 반복한다. 컴컴한 주변에 밝게 번졌다가 사그러드는 마법이 남자를 죽음의 경계 바깥으로 멀리 밀어뜨렸다. 창백하게 질렸던 입술에 핏기가 돌아오고, 끈적하던 혈향은 끝내 전부 흩어져 더는 느껴지지 않는다. 서툰 마법은 그를 완전히 치유하지는 못했지만 출혈이 멎은 정도로도 당장은 충분했다. 남자의 흰 눈에 초점이 또렷하게 돌아온다. 불안으로 흔들리던 아이의 얼굴이 안도감으로 환해졌다. 책장이 다시 덮이는 둔탁한 소리. 마도서를 옆에 내려놓은 남자가 작은 손을 마주 잡았다. 고맙다. 아까보다 분명해진 음성이 곧게 떨어졌다. 인사가 늦었다고, 중얼거리던 그가 뒤늦게 아이의 이름을 물었다.

김 공인이에요.

남자는 그 이름을 입속으로 굴려 본다. 낯선 이름, 동방의 것일까. 어쩌다 여기까지 왔느냐고 묻는 그에게 공인이 배시시 웃어 보였다. 배를 타고 왔어요. 오래 떠돌아다녔고요. 큰불이 났었거든요, 그때 부모님이 돌아가셨어요. 형과 함께 지내던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동요 없이 설명하는 아이를 보며 남자는 조금쯤 망연해진다. 그래, 나는…… 이슈가르드를 떠나 왔단다. 내 이름은. 남자의 목소리는 거기에서 뚝 끊긴다. 스스로 무어라 소개해야 할지 갈피를 잃은 탓이다. 지금껏 불려온 낡은 이름을 또다시 사용하는 것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망설이던 남자가 공인을 부른다. 너처럼 이름 짓는 방법을 알려 주겠느냐. 눈을 동그랗게 뜬 공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남자는 새로운 명칭을 얻는다.

차연, 이 차연.

그는 제 이름을 차근히 곱씹어 본다. 본래 쓰이던 것보다도 오히려 낯설지 않았다. 지금껏 평생을 그렇게 불렸던 것처럼. 이제야 들어맞는 옷을 찾아 입은 듯이. ‘차연’은 공인을 향해 미소짓는다. 그리고 무거운 진심을 매달아 인사를 건넨다. 고맙다. 공인이 환한 얼굴로 마주 웃었다.

 

얼마간 휴식을 취하고서는 마침내 차연도 스스로 걸을 수 있을 만한 상태까지 회복할 수 있었다. 동굴을 벗어난 그들은 차연이 오래 품고 있던 쪽지에 적힌 메모를 따라 함께 이동했다. 이슈가르드를 먼저 떠나간 선배의 거처로 가는 것이었다.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차연을 공인이 챙겼다. 채 다물리지 않은 상처가 가끔은 핏물을 쏟는 일도 있었다. 깨끗하던 옷에 셀 수 없는 얼룩이 겹겹이 붉게 남았다. 여정은 그리 길지 않았다. 이미 오랫동안 헤맨 덕이다. 목적지에 다다른 후에는 치료가 우선이었다. 지친 모습으로 안부를 묻는 차연을 보고 경악한 선배 내외가 허겁지겁 그를 손님방으로 들였다. 그러고는 차연도, 공인도 아주 긴 잠을 잤다. 그사이 선배의 어린 딸이 가끔 문간을 서성이며 기웃대고는 했다. 상한 육신은 단 며칠의 휴식만으로는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그들은 차연에게 손님방을 아예 내주었다. 이런 상태로 바깥에 내보낼 수 없다는 이유였다. 차연이 신세를 진다며 사과했을 때에는 괜한 소리 말라는 타박이 돌아왔다. 그사이 친해진 아이들이 덩달아 맞장구치는 모습을 보고서는 차연도 힘없이 웃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한동안은 고요하고 평화로운 시간이 이어졌다. 약해진 심신을 정비하며 소박한 일상 속에 녹아들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선배에게서 올드 샬레이안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듣게 되는 그때에. 차연은 비로소 결정하게 되는 것이다. 길 위로 다시 나서 보기를. 제가 해내야 할 일들을 저버리지 않기로 되새기면서.

같이 떠나자는 제안을 공인은 거절하지 않았다. 어차피 홀로 더 머물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공인은 이미 차연을 존경하며 따르고 있었으므로. 차연도 한번 가까워진 관계를 구태여 끊어낼 마음은 없었다. 무엇보다 올드 샬레이안으로 함께 들어가게 된다면, 그때는 정말로 안전해질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아직 잔여할지도 모르는 추적을 완전히 떨쳐낼 수 있으리라. 그런 다음에는, 어떤 방해도 없이. 목표한 것들을 향해 나아갈 수 있겠지. 새로운 지식을 탐구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준비는 착실히 진행되어 머잖아 채비가 끝났다. 다시금 여정에 오른 그들이 커르다스 산골짜기로 흘러들어간 것은 그 다음의 일이었다. 푸른빛 이지러지는 숲의 끔찍한 환각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3

차연은 지금에서야 깨닫는다. 상황을 바로잡기에는 이미 늦었다는 사실을, 애초부터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다는 것을. 왜 진작 알지 못했을까. 모든 것이 만용이고 오만이었나? 검푸른 나비 한 마리가 차갑게 얼어붙은 손끝을 스쳐 간다. 처음 점멸하는 불빛에 불과했던 그것은 곧 수백 개의 펄럭이는 날개가 되어 눈앞을 가리운다. 차연은 필사적으로 붙들고 있던 마도서를 가만히 내려다본다. 책은 오른편 모서리부터 형태를 잃어가며 녹아내리고 있다. 장갑 낀 손에 끈적하게 뒤엉긴 그것은 더 이상 본래의 기능을 수행하지 못한다. 온통 자욱한 안개 탓에 이지러지는 시야에는 제한을 모르고 어두운 숲만이 비친다. 빽빽하게 자라난 나무들 사이, 사람이 다닐 만한 길은 도무지 찾아볼 수가 없다. 지금 차연이 간신히 버티고 선 자리만이 유일한 공터로 그를 고립시켰다. 마치 외따로 떨어진 섬처럼. 이곳까지 뛰어드는 동안 거칠게 뻗은 나뭇가지에 아무렇게나 긁힌 자국이 옷자락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지쳤다. 그러나 눈앞에 마주한 요마를 두고 달아나서는 안 되는 일이다. 무엇보다 등 뒤에 아직 지켜야 할 공인이 남아 있었다. 귓가를 관통하는 이명 속에서, 사정없이 흔들리는 착란 속에서. 차연은 저 사특한 생물이 이 모든 사태의 근원이리라 감히 확신한다. 아직 광랑한 백색 눈이 숲의 어둠을 밝힌다. 지금 여기에서 사건을 매듭지을 수 있다면, 죄없이 피흘린 사람들을 대신해 끝을 볼 수 있다면. 소용되는 것이 제 목숨인들 그걸로 충분할 것 같았다.

차연의 혼탁한 머릿속에 지난날의 편린이 스쳐 간다. 어떤 자취도 남기지 않고 깊은 골짜기 너머로 사라진 이가, 높은 나무에 기어코 올라가 목매단 이가 있었다. 커져만 가는 광증에 발목을 붙잡힌 사람들은 서로를 서슴없이 죽이려 들었다. 모두가 하나의 가족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작고 화목한 마을이었는데, 자신이라면 이토록 선량한 주민들을 도울 수 있을 거라고 믿었는데. 차연은 손안에 흥건한 마도서의 잔흔을 움키려고 애쓴다. 손가락 사이로 모래처럼 흘러나가는 그것은 이미 형체가 없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 한기가 들었다. 집중된 사고는 다른 선택지를 내어주지 않는다. 차연은 마지막 여력을 쥐어짜 마법을 시전한다. 요마와 함께 죽으려는 것이다. 그래야만 했다. 곁에서 주춤대던 공인이 뭐라고 소리치는 것 같았지만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다. 눈에 억지로 힘을 주며 정신을 차리려고 애쓰는 와중에도 계속 현기증이 일었다. 한계에 다다른 육신이 자꾸 비틀거린다. 울퉁불퉁한 나무뿌리 사이를 헛딛은 걸음 탓에 문득 사위가 크게 어그러진다. 반쯤 녹아내린 마도서가 손아귀에서 급작스럽게 빠져나갔다. 마법은 중단된다. 차연의 무릎이 거친 흙바닥에 수직으로 부딪힌다. 마도서를 향해 팔을 뻗는 그를 공인이 잡아세웠다. 코앞에 가까워진 공인의 얼굴은 파리하게 질려 핏기가 없다. 눈물로 젖은 낯빛이 지나치게 창백하다. 그럼에도 총기로 또렷하게 빛나는 노란 눈동자. 순간 모종의 공명이 있었고, 일순 공기의 흐름이 뒤바뀌며 귀가 트였다. 이렇게 죽으면 안 돼요. 그가 밀쳐낸 마도서는 바닥에서 희끄무레한 웅덩이로 화하고 있다. 높은 곳에서 급작스럽게 추락한 것처럼, 내장이 뒤집히는 역행의 감각과 함께. 차연의 눈에 비치는 풍경이 서서히 뒤바뀌기 시작한다. 시야를 틈없이 뒤덮으며 몸부림치던 나비떼가 잿가루 날아가듯 스러진다. 오래된 기름마냥 끈적하게 흘러내리던 마도서의 부식이 멈춘다. 차연은 공인의 어깨너머에 여전히 버티고 있는 요마를 올려다본다. 지금 그것은 어떤 의지도 갖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생명 없는 조각처럼 놓여 있는 그것 앞에, 다시 맥이 풀려 주저앉으려는 차연을 공인이 간신히 부축했다. 진작 명을 다한 마을의 시취에 숲 전체가 시들고 있었다. 지금이면 도망칠 수 있어요. 차연은 부정하지 않는다. 견고하던 환상에 조금씩 균열이 일며, 감옥의 창살처럼 빼곡하던 나무들이 길을 열어주듯 서로에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공인의 말대로 지금이라면 이 숲을 빠져나갈 수도 있을 것 같다. 온전치 못한 상태로 더 감당할 수도 없는 도탄이라면 차라리 도망치는 편이 나은 선택일지 몰랐다.

혼미한 정신으로 머뭇대던 마침내 차연이 공인을 의지한다. 그가 수긍하자, 그다음부터는 더 망설일 것이 없었다. 공인은 바닥에 나뒹굴던 마도서를 챙긴다. 그것은 차연의 눈에 비치던 것과 달리 조금도 상하지 않았다. 둘은 빠른 걸음으로 오솔길을 비틀비틀 내달린다. 음산한 기운을 뿜어내던 요마는 여전히 공터의 그 자리에 정물처럼 붙박인 채로, 그들을 쫓거나 도망을 방해하지 않았다. 험한 길을 박차는 차연의 무릎이 걸핏하면 꺾였지만 공인은 포기하지 않고 차연을 지탱했다. 그가 숲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무엇에 휘둘렸는지는 알지 못하였으나. 차연을 구하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마침내 폐쇄된 숲의 바깥까지 나아갔을 때. 커다란 나무둥치 아래에서 둘의 걸음은 느려진다. 시린 눈발 같은 차연의 머리칼이 허공에 긴 궤적을 그렸다. 지친 몸이 흙바닥에 부딪히며 둔탁한 소리가 난다. 거의 탈진한 공인 역시 쓰러진 차연의 곁에 몸을 말았다. 그러나 이대로 잠들기 전에 차연을 치유해야 했다. 그에게서 배운 힘이었다. 곧이어 청명한 녹빛 광채가 그늘 내려앉은 주위를 환히 밝힌다. 불규칙하던 차연의 호흡이 미약하게나마 차분해진 것을 확인하고서야 안도한 공인이 등걸에 몸을 기댔다. 제게 겹쳐진 차연의 몸은 여전히 차가웠다. 공인은 그를 안타까이 바라본다. 그래도 최악만은 면했다는 것이 위로가 되어야 하는데, 이미 차연에게 새겨졌을 상흔을 생각하면 그럴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한낱 수족에 불과한 요마 따위를 죽이려고 목숨을 내던지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 무엇이 그를 환각의 파도에 휩쓸리게 만들었을까. 느리게 깜박이던 공인의 눈꺼풀이 점차 무거워진다. 둘은 아무렇게나 엉켜 누운 채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든다. 어떤 경계를 세울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주변은 풀벌레 우는 소리 한 점 없이 내내 고요했다.

 

먼저 깨어난 것은 차연이었다. 퍼뜩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사방을 급히 살피던 그는 제 곁에 누운 공인을 발견한다. 아직 어린티를 벗지 못한 말간 얼굴은 크고작은 생채기와 흙먼지로 얼룩져 있다. 세상모르고 잠든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면 어젯밤보다 몸집을 더 불린 죄책감이 차연을 짓누른다. 이런 아이조차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고 오히려 도움을 받았으니 면목이 없었다. 차연은 답답한 숨을 모아 내쉰다. 목아래에 무언가 걸려 있는 것처럼 호흡이 불편했다. 아직 시야가 안정되지 않았다. 균형감각을 상실한 몸은 가만히 앉아 있는데도 자꾸 혼자서 왼쪽으로 기울어졌다. 결국 나아진 것 하나가 없구나. 지키지 못한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얻은 것 하나 없이 잃은 것만 수없다. 차연은 너절한 손 안에 고개를 묻는다. 어째서 자신만이 그 마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던가. 외부에서 도움을 구하는 일이 어려우리라는 판단만큼은 공인도 동의한 것이었으나, 그럼에도 차연은 스스로를 믿을 수가 없었다. 무너져내린 정신과 함께 망가진 신체가 온통 비명을 질러댄다. 머리가 깨질 듯 죄어들었다. 사지의 말단이 잘게 경련한다. 이제 어쩌면 좋을까. 차연은 생각한다. 만약 그때 교만하지 않았더라면. 이제 와 후회는 어떤 소용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순간 옆에 누운 공인이 앓는 소리를 내며 뒤척인다. 그를 멍하니 내려다보던 차연은 문득 어서 홀로 떠나야겠다는 결심을 한다. 자신조차 멀쩡히 건사하지 못한 탓에 병든 몸으로 그와 계속 함께한다면 앞으로 더한 일이 생기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전신이 오래된 기계인형처럼 삐걱댄다. 이토록 처참한 실패를 떠안은 후에라면 더더욱 뼈아픈 고통이었다. 무엇보다 차연은 공인을 책임질 자신이 없었다. 아니, 실은 그에게 자신이라는 책임을 부과하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 지금 이상의 짐을 지우거나 폐를 끼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우선 묵을 곳을 찾아야지. 차연은 한켠에 얌전히 놓인 마도서를 가라앉은 눈으로 응시한다. 이 모든 일이 나의 오만에서 비롯되었으니, 더는 저것을 손에 쥐는 일이 없으리라. 이제는 어디로 가는 것이 좋을까. 차연의 눈꺼풀이 느른하게 내리감긴다. 슬몃 벌어진 잇새로 나직한 한숨이 흘러나온다. 어디든 가야겠지. 지체해 봐야 의미가 없다. 이대로 말없이 떠난다면 공인에게는 미안한 일이겠지만 당장은 다른 수가 떠오르지 않는다. 그를 언젠가 다시 만날 수도 있을까. 비겁하게 도망친다 책망하더라도 차연에게는 더 남은 변명거리가 없었다. 크리스탈의 가호가 그와 함께한다면 좋으련만.

차연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세운다. 정강이께에 걸쳐 있던 공인의 팔이 흙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동시에 잠에서 깨어난 그는 자리에서 튀어오르듯 일어나 선다. 언제 일어나셨어요? 좀 괜찮으세요? 이렇다할 투정도 없이, 제 주위를 돌며 상태를 살피는 모습에 차연은 기분이 묘하다. 막 떨어지려던 발걸음이 도로 무거워진다. 더 일찍 떠났어야 했는데, 망설임이 또다른 실수를 낳았구나. 공인은 차연의 눈이 흔들리고 있음을 알아챈다. 정신 없이 괜찮느냐고 묻던 그의 입술이 꽉 다물린다. 다음 물음은 한참의 공백 후에 뒤따라나온다. ……저를 두고 떠나시려고요? 차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공인의 눈동자가 상처로 물든다. 차연은 그것을 고스란히 지켜본다. 공인은 반문하는 대신 확고한 목소리로 말한다. 저는 가고 싶지 않아요. 그럼에도 채 숨기지 못한 떨림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음성은 겨울철 떨어지는 낙엽보다 위태롭다. 차연은 진짜 실수는 다른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순간에 알게 된다. 그를 혼자 남겨두는 일보다 더한 잘못이 어디 있겠느냐고, 차연은 스스로에게 반문한다. 하지만 정말 다른 사람 아닌 자신이 그의 보호자를 자처해도 괜찮을까. 그는 어쩌면 더 나은 가능성을 가질 수도 있지 않을까. 지금껏 함께한 시간이 오히려 공인을 갉아먹었다고 한다면 나는 그것을 마냥 부정할 수 없을 텐데. 그럼에도 차연을 향하는 공인의 시선은 꺼지지 않고 타는 촛불처럼 간절하고, 그렇기에 차연은 거부할 수 없다. 떠나지 않겠다는 말이 마침내 그의 입술 바깥으로 굴러떨어진다. 차연은 햇살처럼 환해지는 아이의 얼굴을 본다. 새카맣고 또 새하얀 머리칼, 형형한 금빛 눈동자와 무엇보다 그 곧은 심지를. 차연은 어젯밤처럼 그저 포기해버리고 싶지 않다. 그를, 그가 살아갈 미래를 더 오래 지켜보고 싶어진다. 그가 올곧게 자라날 수 있도록, 더한 고통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도록. 그렇다면 내 아이가 되겠느냐. 차연이 다시 묻는다. 희미했지만 결코 흩어지지 않는 단단함이 어린 목소리였다. 우리, 이제 가족이 되는 거네요. 공인은 말갛게 웃는다. 딸이 될지 아들이 될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어느 쪽이든 후회하지 않으실 거예요. 내내 희게 질려 있던 차연의 얼굴 위로 뒤늦은 미소가 번진다. 표백된 달 같은 그의 눈동자 안에 공인의 시선이, 그렇게 노란 빛줄기가 깃든다. 동시에 구름이 걷히며 성긴 나무그늘 아래로 볕이 든다. 그럼 함께 갈까. 차연이 공인에게 손을 내민다. 공인은 그것을 기쁘게 마주 잡는다. 차연은 기묘한 충족감과 함께 새로운 첫 걸음을 내딛는다.

4

 

등에서부터 느껴지는 통증이 단꿈을 방해했다.

몇 년이 지났으니 이런 것쯤 하찮은 환상통에 불과함이 분명한데도, 그날에 새겨진 흉터는 아직 선명하다. 차연은 그사이 턱끝까지 차오른 숨을 힘겹게 고른다. 간신히 몸을 일으켜 앉는다. 옷자락을 들추고 등을 더듬으면, 부자연스럽도록 매끄러운 상처에서 분명한 열감이 느껴진다. 이런 새벽이면 자꾸만 지켜내지 못한 것들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차연은 애써 탄식을 삼킨다. 여기까지 와서 옛날이야기에 연연해서는 안 되는 일인데. 올드 샬레이안에 들어온 이후 그는 눈에 띄게 안정되었다. 최초의 목적은 그날 산 속의 마을에서 있었던 일을 파악하는 데에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함이었지만, 단순히 학습하는 데에만 그치지 않은 덕이다. 다른 무엇도 아닌 수학과 철학이 자신을 구할 줄은 차연 스스로도 알지 못했던 일이었다. 우연치고는 너무 절묘했으므로 이것은 차라리 누군가의 안배와도 같았다. 뿌리가 좀먹어 흔들리던 신념은 책으로 쌓아올린 기둥으로 다시 튼튼해졌다. 그가 새롭게 받아들인 학문은 기존의 지식과 적절한 배합으로 뒤섞여 전에 없던 분야를 개척했다. 그런 발견과, 효율 면에서의 발전이 또한 그를 더 높은 곳으로 밀어올렸다. 길 없는 길의 방, 그 안까지도 들어설 수 있게 한 것이다. 현인임을 증명하는 그 문신은 차연에게라면 마땅히 등을 가로지르는 옛 상처를 뒤덮는 것이어야 했다. 어떤 후회도 남기지 않으리라는 늦은 결심이었고, 동시에 오늘을 다시 사는 동안 같은 과오를 반복하지 않으리라는 다짐이었다. 차연은 어지러운 환각으로 녹아내리던 그 푸른 숲을 똑똑히 기억한다. 거기서 죽어간 죄없는 목숨들을 아직 잊지 않았다. 수많은 죽음을 초래했던 그 사건의 진상을 차연은 끝까지 파헤쳐야만 했다. 초자연의 개입인지, 요마의 소행인지 혹은 인간의 죄악인지. 그중 것이든 상관 없었다. 마주할 준비는 진작 되었다. 오롯한 진실을 손에 쥐어야만 했다. 그 외의 선택지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므로.

바깥 공기는 더없이 서늘하고 깨끗하다. 세계를 최초로 뒤덮었던 밤이 꼭 이러했을까. 청명한 어둠이 주위를 부드럽게 감싸고 있다. 차연은 물가 위에 펼쳐진 다리로 들어선다. 길고 긴 통로였지만 그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것을 걸어서 지났다. 살리아크 상의 발아래를 거리낌없이 통과해, 현인이라는 칭호를 얻기 위해. 은밀히 숨겨진 저 방의 안쪽에서 스승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마침내 거듭나리라는 확고한 믿음으로. 다시는 이전과 같은 상태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맹세를 품고. 무거운 문은 차연의 앞에서 활짝 열린다. 익숙한 얼굴들이 그를 맞이하려고 나와 있었다. 차연은 예를 갖추고 천천히 인사를 올린다. 눈을 들어 올려다본 그들의 표정은 제각각이다. 온화한 미소를 머금은 낯이 있는가 하면 입술을 굳게 다물고 경직된 자세로 버티고 선 이도 있다. 하지만 차연은 그들 모두가 제게 얼마쯤의 관심과 애정을 할애하고 있음을 알았다. 침착한 손이 등 뒤의 문을 다시 붙잡아 닫는다. 밀폐된 공간 안에서, 신성한 의식은 그렇게 시작된다.

 

*

 

벗은 등에 새겨진 검푸른 문양이 깨끗한 거울면에 비쳐 반사된다. 선명하게 자리잡은 현인의 증표 덕에, 원래의 그 흉터는 이제 거의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 모양을 한동안 바라보던 차연의 시선이 오른편으로 느리게 옮겨 간다. 오래전 공인에게서 받은 편지가 탁상 위에 놓여 있었다. 차연은 쥐고 있던 셔츠에 팔을 마저 꿰어 넣는다. 흰 살갗이 그보다 더 새하얀 셔츠 아래에 가려진다. 단추를 하나씩 채우는 동안에도, 겉봉에 쓰인 이름을 몇 번이고 되짚던 시린 눈에 점차 따스한 빛이 깃든다. 편지에 담긴 내용은 간단한 안부 인사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으나 그것을 열심히 적어내렸을 아이를 생각하면 웃음짓지 않을 수가 없는 일이다. 차연은 그와의 첫만남을, 가쁜 숨을 몰아쉬던 두 사람이 운명처럼 맞닥뜨렸던 그때를 선명히 기억한다. 그토록 긴박했던 순간들을 어떻게 잊겠는가. 돌이켜보면 참 지난했구나. 차연의 손끝이 진작 닳아버린 종이를 천천히 쓸어 본다. 성인식을 치른 뒤에야 바깥 세상으로 떠났던 공인의 편지가 끊긴 지도 벌써 몇 주나 되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기쁘게 손을 내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그 어둡던 동굴 속에서 저를 지탱해 주었던 온기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는데. 지금 차연은 이유모를 한기를 느낀다. 공인이 떠나간 곳은 다름아닌 전장 한복판이니 물론 연락이 어려울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해보았지만. 진짜 문제는 그곳에 7재해가 발생한 이후부터였다. 건너건너 소식을 전해주던 사람들조차 도움을 주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들은 공인을 기억하지 못했다. 마치 공인이 처음부터 존재한 적 없었다는 것처럼. 누구도 그에 대해 알지 못했다. 외려 차연의 상태를 염려하는 질문들이 되돌아오기 일쑤였다. 차연은 서서히 지쳐가고 있었다. 아들에게 무지한 이들과 대화를 억지로 이어가려 애써 보기도 이미 여러번. 공인마저도 그 푸른 밤의 숲에서 보았던 환각에 불과한 것인지 의심하는 자신을 얼마나 책망했을까. 원하지 않아도 차연은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의 아들이 알 수 없는 영향력에 의해 지워졌다는 것을. 그렇게 실종되었다는 사실을. 이제 공인을 아는 것은 오직 차연뿐이었다. 그래서 포기할 수 없었다. 자신마저 그 아이를 놓아 버리면, 공인은 정말로 영영 없는 사람이 되어버릴 것만 같아서. 이대로 공인을 잃을 수는 없었다. 그들은 서로를 지탱해 오던 가족이었다. 차연은 다시 길 위에 오른다. 어디부터, 어떻게 찾아야 할지는 아직 알지 못했지만. 다른 이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다면 스스로 떠날 수밖에.

5

 

정확히 일 년 전의 일이다. 기사단의 총장이자 교황의 친위대였던 그, 뱅드로의 은퇴가 공표되었던 것은. 어딘가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갔다고 했던가. 노아는 돌연 자취를 감춘 그의 행적에 의문을 가졌던 적도 있었다. 시기가 너무 갑작스러웠다는 것이 무엇보다도 석연찮았다. 언질 하나 남겨주지 않고 그토록 급하게 떠나야만 할 이유가 있었을까. 그야말로 부족함이 없는, 존경받아 마땅한 사람이었는데. 그를 떠올리면 여전히 아쉬운 기분이 든다. 생각할수록 미심쩍은 구석이 많아지지만 노아는 애써 신경 쓰지 않으려 한다. 어쨌건 그가 선택한 일이었으므로. 무언가 더 중요한 문제가 있었겠거니, 하는 것이다. 신의 뜻이 그를 분명 더 나은 곳으로 인도했으리라. 남겨진 자리에서 노아가 할 수 있는 일은 최선을 다해 임무를 행하는 것이다. 노력껏 얻어낸 성과들은 스스로에게 만족감을 가져다줄 뿐만 아니라, 저를 손수 가르쳤던 그의 명예 역시 드높여줄 터였다. 이를테면 계단을 하나씩 쌓아올려가는 일이나 마찬가지인 거지. 노아의 굳은 입매에 아주 희미한 미소가 깃든다. 장엄한 조각으로 늘어선 기둥들을 지나 교황청 안으로 들어가는 지금, 아직 어렸던 날들을 건너온 노아는 그때의 선택에 후회가 없음을 되새긴다. 어차피 뱅드로를 찾아나설 수도 없었다. 제 자리를 지키는 것이 더 중요했다는 믿음을 노아는 아직 가지고 있다. 묵묵히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 꼭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고. 그리 손쉽게 끊어질 인연은 결코 아닐 거라고. 이제 노아는 곧 정식으로 이단심문관으로 임명된다. 이렇듯 성장한 자신을 만나게 된다면, 그때에 그는 어떤 말을 건네어 줄까.

답잖게 많아졌던 생각들은 각 잡힌 발걸음이 목적지 앞에 멈춰서며 함께 멎는다. 조금 뒤에는 교황을 직접 대면하게 될 것이다. 먼 옛날 자신을 기사로 서임했던 것은 제멜의 가주였으므로, 교황과 마주하는 것은 처음인 일이다. 그분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 아무래도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위엄을 풍기고 있을까. 정교회는 그 자체로 절대적인 것이었므로, 이런 상상은 아무래도 좀 낯설다. 노아는 깍듯한 안내를 따라 복도 안쪽으로 들어간다. 붉은 천으로 장식된 거대한 입구 앞에서도 그는 압도당하지 않는다. 문은 곧 묵직한 소리와 함께 양쪽으로 열린다. 은은한 조명이 드높은 홀을 밝히고 있었다. 융단이 깔린 복도 양옆으로 정렬한 기사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인다. 저 위쪽에, 높은 층계 너머 단상에. 왕좌만큼이나 화려하게 꾸며진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교황이 시야 끄트머리에 걸린다. 노아는 예를 갖추며 고개를 숙인다. 꿇어앉은 한쪽 무릎이 폭신한 카페트에 자국을 남겼다. 일순 장내가 고요해진다. 교황이 말씀을 전례하려는 것이다. 느릿한, 그러나 힘 있는 목소리가 일정한 간격을 두고 그의 입술 밖으로 흘러나온다. 어쩐지 위압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노아는 움츠러들지 않는다. 축사이자 당부, 혹은 어떤 경고로 전달되는 교황의 말을 놓치지 않고 집중해 들을 뿐이다. 차례는 금방 지나간다. 곁에 섰던 추기경이 곧 교황에게 서임장을 전달한다. 묵직한 음성이 형식에 불과한 문장들을 천천히 읽어내린다. 마침내 기다리던 단 한 마디가 떨어져나온다. ……노아 드 제멜을 이단심문관에 임명하는 바이다. 내도록 숙이고 있던 노아의 고개가 들린다. 총기 가득한 짙푸른 눈은 아직 아래로 내리깔려 있다. 그의 강직한 목소리가 교황청에 감사를 표하고, 사명을 다할 것을 맹세한다. 서약과 선서가 이어진다. 그렇게 모든 절차가 끝나면. 검은 벨벳에 싸인 하나의 반지가 노아의 앞에 내밀어진다. 그것은 이단심문관의 증표다.

 

돌아나온 바깥은 이전과 다를 바 없다. 공기는 똑같이 쾌청하고, 또 그만큼 혼탁하다. 노아는 손가락에 걸린 반지의 무게를 느낀다. 그것은 속박이고 동시에 증명이다. 흔들리는 매순간 바라볼 길잡이별이나 다름없는 그것이 이제부터 저를 나아가게 하는 지표가 되어 주리라. 노아는 스스로 이단심문관이 되고자 했던 이유를 아직 잊지 않았다. 그보다 명확한 목표는 다시 없을 것이었다. 속세의 욕망에 오염된 자들이 저질렀던 부정을, 노아는 천천히 곱씹으며 되새긴다. 그렇듯 흐지부지되었던 추적이 제가 겪었던 단 한 건에 불과하다면 그것이야말로 거짓일 터. 과거에 놓친 이단 혐의자들의 머릿수가 많으리라는 것은 이미 추측이 아닌 기정사실이었다. 노아는 그들을 단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정화하겠다는 결심을 다진다. 낱낱이 붙잡아 검증하고, 저지른 죄악에 책임을 묻겠노라고. 길 잃은 자들이 신성한 정도(定道)로 다시 돌아오게 하리라. 마침내 오랜 준비가 끝난 셈이다. 자격마저 얻어냈으니 이제는 더 이상 기다릴 이유가 없었다.

새로운 직분과 함께 거처도 바뀌었지만 노아는 그런 것에 달리 연연하지 않았다. 옮길 만한 집기도 몇 되지 않았으므로, 이사마저도 순식간에 끝나버렸다. 익숙한 탁상 앞에 다시 앉은 채 노아는 차근히 생각하기 시작한다. 지난날 놓아 보낸 이단들을 남김없이 찾아내기 위해 무엇부터 해야 할까. 머리가 바쁘게 굴러간다.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른 손 끝에는 냉기가 어려 있었다. 깔끄러운 종이 위에 원호를 그리며 맴돌던 손가락에서 이단심문관의 반지가 어둡게 빛난다. 그 순간 뇌리에 스치는 힌트가 있다. 가까운 모르도나에 조력자가 있다는 사실을 노아는 기어코 떠올려낸다. 거기에서부터 새롭게 시작한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 노아는 망설임 없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채비는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해야 할 일이 넘치도록 많았다. 본격전은 이제부터였다.

6

 

차연은 오랜 시간을 헤맸다. 이곳저곳을 걷는 동안 그는 오래전 떠나온 이슈가르드의 소식도 전해들었다. 이제 거기에는 자주 눈이 내린다고, 그것도 모두 재해의 영향이라고 했다. 차연은 세상이 격변했다는 사실을 다시금 체감한다. 그가 인정하지 않아도, 이미 변해버린 것들을 어쩔 수는 없었지만. 참 지난한 여정이었다. 온 에오르제아를 다니다 못해 라자한이며 동방 지역까지도 빠짐없이 살폈다. 끝도 없이 광활한 바다를 몇 차례나 건너고, 닳아빠진 신발을 몇 켤레나 버렸다. 낯선 곳에 자리한 에테라이트와 새롭게 교감할 때마다 절망이 쌓여 간다.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했지만 성과는 부진했다. 언제까지고 이렇게 다닐 수는 없었다. 어떤 행동이라도 당장 하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은 불안감마저도 이제는 차츰 무뎌져 간다. 하지만 너를 절대로 놓아 보내지 않을 거라고, 차연은 매순간 곱씹는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무작정 걷는 건 너무 비효율적이다. 어느 추운 밤, 들이치는 바람에 덜컹대는 여관의 창문 옆에서. 차연은 결국 올드 샬레이안으로 돌아가기를 결심한다. 공인이 반드시 저를 찾아 돌아오리라고 믿었다. 그를 다시 품에 안아줄 수 있을 날이 분명히 있으리라고. 그렇다면 그 애가 머물 수 있는 집을 마련해 두어야지. 혼자 무너져서는 안 되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테라이트의 휘황한 푸른빛에 감싸여 거처로 돌아왔을 때. 그 익숙한 풍경 한가운데에도 공인은 없다는 생각을 하면. 얼마간이라도 슬픔에 붙들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어서.

여장을 풀어놓으면서도 차연은 내내 아들을 떠올린다. 일여 년에 가까운 시간을 헤매었는데, 돌아오는 것은 순간에 불과하구나. 그렇다면 너 역시. 어느 때에 눈 깜빡이면 여기에 나타날 수도 있을까. 차연은 두터운 이불을 끌어당겨 덮는다. 도무지 정리되지 않는 생각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힌다. 그런 무력감이 밤을 더 깊어지게 만들었다.

 

꿈을 통하지 않고는 어디로든 나아갈 수가 없나. 밤의 영속성은 이제 차연에게 어떤 경외를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벌써 몇 년이나 지겹도록 반복되는 악몽의 틈새로 굴러떨어질 때마다, 그는 스스로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꿈은 언제 어디에서든 차연과 함께했다. 몽중의 문턱을 넘을 때마다 돌아오는 인식. 이곳의 시간이 때마다 새롭게 접붙여지며 계속된다는 사실을 차연은 알고 있다. 익숙한 통증이 등허리를 타고 기어오른다. 팔다리를 뜻대로 움직일 수 없는 속박에 지배당한다. 이곳에 홀로 남겨졌다는 생각 외에 다른 것은 떠올릴 수 없다. 차가운 고독이 뼛속 깊이 흐른다. 나를 이런 구석까지 몰아넣는 것은 누구인가. 흐리게 뜨인 눈꺼풀 사이로 혼탁한 풍경이 번진다. 그 균열 사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인영이 어른어른 비쳤다. 깊이를 모르는 수면 아래로 잠겨들며 창백해지던 차연의 얼굴이 일순간 활기를 띤다. 이 지독한 꿈의 그물을 던지는 자가 바로 저기에 있다는 직감으로. 끔찍한 흉몽을 직조하는 자가 마침내 눈앞에 찾아왔다고 믿으며. 무겁게 가라앉던 사지의 말단에 힘이 되돌아온다. 끈질기게 들러붙는 그림자들을 떨쳐내고, 차연은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의 등 뒤로 끈적한 잔영이 녹아 떨어진다. 저기 투명한 장막 너머에 그가 있다. 마비된 듯 생경한 감각으로 작동하는 팔을 내뻗으면, 사위가 이그러지며 대기의 흐름이 뒤바뀐다. 검은 로브를 덮어쓴 아씨엔이 퍼뜩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둥글게 그늘진 어둠 아래에서 그의 눈동자가 형형하게 빛난다. 명백한 연민과 멸시가 그 안에 혼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또한 차연을 경계한다. 무엇 때문에 저렇게 바짝 날을 세울까. 어차피 그가 주관하는 몽중인 것을. 차연은 섣불리 나서지 않는다. 그가 먼저 입을 열기를 기다린다. 얼마간 탐색의 시간이 흐르고. 날카롭던 시선이 약간은 무뎌진 뒤에, 그 때. 낯선 언어가 그의 메마른 목울대를 타넘고 흘러나온다. 꿈이라는 장소의 특수성 때문일까. 차연은 그 말들을 남김없이 이해할 수 있다. 용케 나를 발견해냈네. 나직한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그는 참을성이 없다. 곧장 본론부터 꺼내드는 것을 차연도 마다하지 않는다. 왜 포기하지 않아? 별다른 부연 없이도 차연은 이것이 공인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헛웃음이 난다. 이토록 답이 명확한 질문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어느 아버지가 제 아들을 손쉽게 놓아버릴 수 있다는 건지. 하지만 희미하게 들끓는 분노보다도 중요한 것은 다름아닌 일말의 안도감이다. 공인을 기억하는 이가 아직 남아 있다는 사실, 그것 하나만으로. 차연은 온몸의 긴장이 풀어지는 것 같다. 미소를 머금은 입술이 말한다. 아이를 타이르듯 부드러운, 한 점 원망 없이 깨끗한 음성이 맑게 울린다. 그 애를 어찌 버릴 수 있겠나. 언젠가 내게로 돌아올 텐데. 내가 이렇게 기다리고 있다는 걸 그 애도 알 텐데. 온화하던 차연의 낯에 서글픔이 깃드는 모양을, 아씨엔은 이를 악물고 지켜본다. 무지한 인간, 한낱 미물에 불과한. 승산 없는 싸움을 계속하는 어리석은……. 그는 차연에게 자비를 베풀어줄 수 있었다. 차연도 그 사실을 모르지 않을 터였다. 따라서 그는 제안한다. 힘들여 기다릴 필요 없다고, 더 이상은 고통스러워하지 않아도 좋다고. 한층 더 깊어진 목소리가 차연을 유혹한다. 당신 아들을 이리로 불러줄 수도 있어. 어떤 위험도 불안도 없이 함께하는 거야. 계속, 영원히. 그 확신에 찬 목소리가 달콤하게 느껴지지 않았다면 분명 거짓말일 테지만. 차연은 동요하지 않는다. 곧바로 터져나오는 그의 음성에 외려 노기가 어린다. 내 아이에게 손댈 생각 말게. 차연은 안다. 아직 공인의 할일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그가 감당하고 또 겪어내야 할 운명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사실을. 그러니 차연에게 가능한 일은 단지 기다리는 것, 그뿐이다. 그것이 가족과 집의 역할이라고. 다른 선택지는 아무리 그럴듯해 보이더라도 애초 성립할 수 없다고 믿는다. 흔들림 없는 차연의 모습을 아씨엔은 허탈하게 바라본다. 고집불통이네. 짜증 섞인 목소리에 약간의 물기가 묻어나는 것 같았다면 착각일까. 후드 자락이 가리운 그의 눈동자가 빛을 잃고 어두워진다. 참으로 보람 없는 날이었다. 지금껏 공들인 노력이 모두 물거품이 되다니. 차연의 잠 속에 악몽을 밀어넣으려 얼마나 분투해왔던가. 분노로 타오르는 그의 눈을 차연은 피하지 않고 마주한다. 숨겨진 진실이, 저 어딘가에 분명 존재할 테지. 나는 그걸 포기할 수 없네. 어찌 그럴 수 있겠나. 내 아이가 아직 싸우고 있는데. 차연의 입가에 미소가 고인다. 후드 아래의 시선이 그것을 똑바로 노려본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왜 화가 나지 않지. 무엇 때문에 차연을 아직도 죽여 없애지 못했나. 아씨엔은 불시에 깨닫는다. 아, 그를 더 지켜보고 싶다. 그가 어디까지 나아가는지.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목도하고 싶다. 저 곧은 심지가 언제까지 부러지지 않고 견뎌낼 수 있을지를……. 아씨엔의 얼굴이 혼란과 경악, 어쩌면 환희로 일그러진다. 차연은 문득 그가 가엾다. 실은 조금쯤 고맙기도 했다. 공인의 존재가 정말로 사라진 것은 아닐까, 얼마나 많은 날들을 두려워 떨었던가. 지금껏 견뎌낸 시간들이 헛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받은 기분이다. 만약 공인이 정말 없었다면, 저자가 애써 찾아오지도 않았으리라. 의지를 잃은 그는 옷자락을 크게 펄럭이며 둥근 그늘막 아래로 녹아들듯 사라진다. 주인이 없어진 꿈의 공간은 속절없이 붕괴한다. 무너져내리는 파편들 틈사이를 헤치고, 차연은 다시 현실로 돌아와 눈을 뜬다. 익숙한 천장, 그리고 침구의 감촉. 달라진 것 하나 없는 주변의 공기. 차연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는다. 살짝 젖힌 고개를 벽에 기댄다. 그리고는 지난 세월을 반추하는 것이다.

오 년에 가까운 시간을 헤맸다. 한 해 꼬박 바깥을 걸으며 공인을 찾았다. 그러나 수확은 없었다. 지쳐 돌아온 저를 반겨 주던 올드 샬레이안도 안타까움을 감추지는 못했었지. 그 후로 수년을 더 연구에 매진했다. 처음에는 그를 말리던 몇몇도 이제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그가 반드시 해낼 것이라 여겨서든, 결국 부질없는 일이라고 생각해서든. 아무래도 좋았다. 차연은 멈추지 않았다. 멈출 수 없었다. 빼앗긴 것을 되찾고자 하는 노력이 어떻게 무용할 수 있다는 말인가. 누군가 공인을, 진실을, 먼 곳으로 데려가 버렸는데. 자리에 앉아 가만히 기다리기만 하는 것은 차연의 일이 아니었다. 공인을 직접 품에 안을 수 없다면. 최소한 그가 이 세계에 존재했었다는 흔적이나마 찾아내리라. 그가 남긴 자취들은 분명 증거가 되어줄 것이다. 차연은 스스로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알았다. 끔찍한 안개숲의 기억을 그는 결코 잊지 않았다. 지금에 와서라도 진상을 밝혀내고 말겠다고, 너무 늦은 것은 없다고 다짐하며. 차연은 지금까지 살아왔다. 그 연구가 차연을 살게 했다.

그렇게 어느덧 마흔이다. 시간을 허비했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다만 공인이 그리울 뿐이었다. 그 애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차연은 다시 떠날 때가 되었음을 직감한다. 불길한 악몽도 끝이 났으니 괜찮겠지. 차연은 지도를 꺼내 펼친다. 발 닿는 대로 떠돌 수는 없다. 여행길에 필요한 것을 전부 꾸리느라 또 며칠이 지났다. 에테라이트로 향해 걷는 동안, 차연은 조금씩 차분해진다. 책상 앞을 벗어나 바깥으로 나오니 번잡하던 상념들이 외려 씻겨나가는 것만 같다. 익숙한 푸른빛에 휩싸여 차연은 결심을 다진다.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공인을 찾아내겠다고. 그에게 얽힌 수많은 진실들을 알아내고 말겠다고. 환하던 시야가 차근히 가라앉으면. 펼쳐지는 세상은 생경하도록 아름답다. 이토록 선명한 색채가 살아 날뛰는, 광활한 대지 위에서. 차연은 숨을 가다듬는다. 다시금 첫 걸음을 내딛는 마음은 어느 때보다도 굳건하다.

 

*

 

언제나처럼 긴 여정이었다. 새로운 거처를 마련하는 것도, 조사를 이어가는 것도 늘 그랬듯 쉽지만은 않았다. 숱한 오해와 다툼에도 불구하고. 차연은 계속해서 나아간다. 이 길에도 분명 끝이 있다고, 그것은 공인에게로 닿는 결말일 거라고 믿었다. 오랜 연구는 쏟아부은 노력에 비해 지지부진하다.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줄 무언가가 필요했다. 근처 주민들의 이야기를 수집하는 것도 도움이 될지 몰랐다. 생각이 거기까지 닿은 뒤로, 차연은 광장에 나가 앉아 있는 일이 많아졌다. 저마다 웃음과 울음을 터뜨리는 사람들. 신중한 밀담을 나누거나 왁자지껄 술 취해 떠드는 목소리들을 귀 기울여 듣는다. 별 것 아니던 사소한 일상의 잡음 속에, 어느 순간부터 어떤 영웅에 대한 이야기가 섞여들고 있음을 차연은 기민하게 감지해낸다. 빛의 전사. 그가 가졌다는 힘은 기이하거나 신비한 것. 낭설에 불과했던 소문은 날로 몸피를 불리며 구체적인 실체를 획득한다. 그것을 전해듣는 동안, 차연은 전장에 나갔던 공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확신 없는 짐작이었지만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그 이름난 빛의 전사가 공인일 수도 있다는 것을 함부로 입에 올리지는 않았으나. 그를 찾아가면 만나볼 수 있을까. 하지만 만약 그가 공인이 아닌, 다른 낯선 누군가라면. 차연은 무너지지 않을 자신이 없다. 너무 오랜만에 찾아든 가능성이었다. 한 줄기 빛으로 내리쬔 희망이 차연의 영혼, 거기에 난 수많은 균열을 일깨웠다. 차연은 익숙한 무력감을 느낀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굳어버리고 말았던 그 악몽을 떠올린다. 거처로 돌아가는 길목이 유독 어두웠다. 누군가 불쑥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것처럼…… 아, 저기에. 정말 정체모를 인영 하나가 보인다. 굽이치는 골목의 입구를 등지고 섰던 그림자가 천천히 돌아선다. 그가 깊이 눌러쓴 로브의 빛깔을, 어둔 밤중에도 차연은 쉽게 감별해낼 수 있다. 부른 적 없어도 늘상 찾아오던 불청객. 그러나 이 순간만큼은 그의 방문이 기껍다. 하필 지금, 이 때에 나타나다니. 이것은 모종의 계시와도 같다. 저자는 늘 공인과의 재회를 막으려 했으니까. 차갑게 일렁이는 후드 아래 낯익은 얼굴은 차연, 자신의 고민이 올바른 방향으로 기울고 있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 같다. 차연은 물러서지 않는다. 제게로 다가오는 이의 목적을 쉬이 짐작하면서도 그랬다. 기어이 나를 죽이려 하나. 그가 구태여 나를 택했다면, 공인은 이미 충분히 강해졌다는 뜻일까. 그것이 못내 기쁘다.

두려워 않는 차연을, 아씨엔은 말없이 노려본다. 끈질긴 의문이 그를 괴롭혔다. 정말 차연을 죽이는 것이 옳은가. 차연이 걷는 길을 무너뜨리고, 끝내 무릎 꿇리는 것에 무슨 소용이 있는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건만 지금은 모두 미궁 속이다. 여지껏 어떤 결심으로 여기까지 왔는지 스스로 의심하며, 그는 차연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다. 흔들림 없는, 아니, 흔들리면서도 쓰러지지 않는 그 모습이. 짙은 암흑 속에서도 이상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이미 실패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살수를 뻗으려면 눈이 마주치는 그 순간부터 망설이지 말았어야 했다. 허나 다음을 기약하기에도 이미 늦은 일이지. 허탈한 웃음이 아씨엔의 잇새에서 뭉그러진다. 경계를 놓지 않던 차연의 눈빛도 점차 누그러진다. 차연은 그가 제게로 다가오도록 내버려 둔다. 가깝게 좁혀지던 거리가 맞물리지 않고 그대로 어긋난다. 둘의 어깨가 잠시간 스쳤다. 찰나에 불과한 그 부딪힘이 희미한 공명을 남겼다. 저를 지나쳐 멀어져 가는 그의 등을. 차연은 가만히 바라본다. 그의 목적을 모두 알지는 못하겠으나. 기실 중요한 것은, 이제 완전히 사라진 위협보다도. 다시 공인을 만날 수 있다는 기쁨. 그뿐이다. 분명히 살아 나를 기다리고 있겠지. 설령 그 애가 빛의 전사는 아니더라도, 이제는 좌절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너를 반드시 찾아 주마고. 차연은 눈을 내리감고 중얼거린다. 끝도 없이 이어지던 터널의 종착지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니 여기서 멈춘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차연은 다시 걸음을 옮긴다. 어지럽게 얽힌 골목을 모두 지나 아늑한 거처까지. 조금도 힘들지 않았다.

7

 

공인은 손에 쥔 쪽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랜 수소문 끝에 얻어낸 단 몇 줄의 주소였다. 아무리 위대한 업적을 이룬 영웅이라고 한들 가족과의 재회 앞에서 망설이지 않을 수는 없었다. 너무 멀리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은 겁이 났다. 그토록 만나고 싶었던 차연조차 자신에 대한 것들을 모두 잊었을까 봐. 공인을 기억하는 사람은 이제 한 손에 꼽힌다. 늘 함께하는 소중한 동료들. 그중에 가장 힘이 되는 것은 누구보다 차연 덕분에 만날 수 있었던 어릴 적 친구다. 그녀는 지금 어엿한 전사가 되었다. 그러고 보면 차연은 그녀가 부모를 잃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정말 다정하고 좋은 사람들이었는데. 공인은 차연이 너무 많은 것들을 떠나보내야 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중 하나가 자신이라는 사실을 종종 견딜 수 없었다. 단 한 마디 편지라도 남길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하다못해 무사하다는 소식이라도 전할 수 있었다면.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모두 부질 없는 상상이다. 이미 오랜 시간이 흘렀다. 단 하루도 차연을 생각하지 않은 날이 없었지만.

아버지가 나를 기억하실까. 한숨 섞인 목소리가 공인의 입술 바깥으로 흘러나왔다. 공인은 지금 침실에 혼자였으므로, 대답을 돌려줄 만한 이는 주변에 없었다. 그는 스스로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차연이 정말 기억을 잃었다면. 공인에게는 자신을 증명할 수단이 없었다. 구태여 차연을 혼란에 빠뜨리고 싶지는 않았다. 이대로 잊혀지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더 이상 걱정거리가 될 일은 없을 테니. 그걸로 된 게 아닐까……. 공인은 고개를 숙인다. 주소를 붙든 손아귀에 힘이 들어간다. 약해지고 싶지 않았는데. 차연과 함께하던 시절을 떠올리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만 같다. 돌아가고 싶었다. 그에게 의지하고 싶었다. 하지만 차연이 그를 잊지 않았더라도 문제는 여전했다. 공인은 에오르제아의 영웅이었다. 지금껏 아주 위험한 일들을 해냈고, 앞으로도 그래야 할 터였다. 차연이 공인을 기억한다는 것은 곧 그간의 시간 동안 공인을 찾아 헤맸으리라는 뜻도 되었다. 오랜 세월을 돌아서 겨우 만난 아들을 다시 떠나보내고 싶어할 리가 없지 않은가. 영영 차연의 곁에 머물 수는 없었다. 공인은 그 사실이 차연을 다치게 할까 겁났다. 그를 불안 속에서 살아가게 해서는 안 되었다. 제가 뭐라고, 이제 와 멋대로 차연을 찾아가 흔들어 놓을 수 있다는 말인가.

쪽지를 만지작거리던 손이 문득 얌전해진다. 공인은 그대로 자리에 드러눕는다. 중요한 것을 간과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모든 혼란에도 불구하고. 만약 차연이 공인을 다시 만나기 원한다면, 공인이 그러하듯 가족을 그리워하고 있다면. 재회는 마땅히 이루어져야만 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차연은 그렇게 연약한 사람이 아니라는 믿음이 공인에게는 있었다. 왜 그걸 잊고 있었을까. 공인은 팔을 들어 눈을 가린다. 옷소매가 조금 젖어들었다. 차연의 미소가, 차연이 내밀어주던 따스한 손길이 어느 때보다도 간절했다. 그래, 부딪혀보지 않으면 모르는 일이다. 어쩌면 모든 것이 예상 외로 잘 풀릴 수도 있겠지. 문득 공인은 크리스탈 타워에 잠든 친구를 떠올린다. 정말로 운이 좋다면, 차연에게 도움을 구할 수도 있을 텐데. 하지만 성과 같은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공인은 그저 아버지의 얼굴을 다시 한 번 마주하고 싶었다. 어떤 말부터 꺼내면 좋을까. 날이 밝는 대로 당장 여장을 챙겨야지. 그러려면 어서 잠들어야 하는데. 자꾸만 생각이 많아져 도저히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 결국 공인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지금 출발하면 아침이 되자마자 차연을 만날 수 있을 테니, 오히려 잘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급히 서두르는 탓에 이미 잠들었던 동료들을 모조리 깨워 놓고도 공인은 어쩐지 웃음이 났다. 다녀올게, 말하며 문을 힘차게 밀어젖힌다. 아버지를 만나면 새로운 가족에 대해, 사랑하는 동료들에 대해 이야기해주고 싶었다. 그들과 함께 잘 지내고 있었다고. 그러니 아버지의 시간도 너무 힘겹게만은 흘러오지 않았다면 좋겠다고. 공인의 걸음이 점점 빨라진다. 공인은 어느새 날듯이 달리고 있었다.

 

*

 

차연은 난간에 기대선 채 바깥을 응시한다. 유난히 잠이 오지 않는 날이었다. 뜬눈으로 새벽을 지새우고, 이제 곧 동이 틀 시간인데도. 차연은 쉽사리 이불 속에 몸을 누일 수가 없다. 어떤 예감 같은 것이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불꽃을 일으키고 있었다. 외면하기 어려운 감각이었다. 그리하여 차연은 점차로 밝아 오는 지평선만 괜스레 바라보는 것이다. 이 높은 곳에 올라 서 있노라면 황무지로 길게 뻗은 길목까지도 환히 내려다보인다.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이 차연의 소소한 즐거움 중 하나였다. 과연 이토록 이른 시간부터도 거리로 나서는 사람들이 드물지 않다. 다들 하루를 바쁘게 시작하는 게지. 차연은 조그마한 등불들이 황폐한 길가에 흔들리는 모습을 본다. 외곽으로 멀어지는 불빛들 사이에, 이쪽으로 가까워 오는 불빛 하나가 있었다. 해가 완전히 떠오르지 않은 탓에 어슴어슴한 시야에도 그 사람의 윤곽만은 이상하리만치 선명하다. 까만 머리칼, 머리 위로 솟은 비에라족의 귀. 역광에 가린 얼굴은 명확히 알아볼 수 없지만. 차연은 그의 귀 끝이 희다는 사실을 알아챈다. 공인과 닮은 생김이라는 것을 깨닫자마자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다. 놀란 차연이 난간에서 화드득 멀어졌다. 이렇게 갑자기, 어떤 전조나 계기도 없이. 공인일 리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차연은 자꾸만 이끌린다. 다시 내려다본 바깥은 불빛 한 점 없이 적막하다. 단순히 잘못 본 것일까. 아들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빚어낸 착각일까. 하지만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는 또 며칠을 잠 못 이룰 것이 뻔했다. 고민은 길지 않다. 차연은 겉옷을 단단히 여민다. 급한 걸음이 울퉁불퉁한 돌길을 내달렸다. 아래로 내려가 살피다 보면 비슷한 사람이라도 마주칠 수 있을지 몰랐다. 만약 그것이 정말 공인이라면 더할 나위가 없겠으나……. 차연의 입가에 쓸쓸한 미소가 고인다. 아이를 품에 안아본 것이 언제인지조차 까마득했다. 광장으로 내려간 차연의 눈에, 멀리 경비들 앞에 검문을 통과하고 있는 누군가 비친다. 분명히 검고 흰 머리칼을 가진 비에라족 청년이다. 차연은 어떤 말도, 행동도 할 수 없다. 자리에 못 박힌 듯 멀거니 서 있는 차연을, 공인은 단번에 알아본다. 아버지! 공인은 경비들의 허가가 떨어지기 무섭게 내달려 차연에게로 다가온다. 급히 챙긴 탓에 가볍기만 한 여장은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져 버린다. 다른 걱정은 할 틈이 없었다. 공인의 단단한 팔이 차연을 끌어당겨 안는다. 아직도 여리게만 느껴지는 아이가 떨고 있음을, 차연은 느낄 수 있다. 아이에게서 여실히 전해진 온기가 품안을 가득 채우는데도. 차연은 이 순간을 단번에 실감할 수가 없다. 차연의 마른 손이 공인의 등을 더듬더듬 붙잡는다. 어느새 부시도록 쏟아지고 있는 햇살 아래에서, 공인의 말간 얼굴이 환히 빛난다. 웃음과 울음이 뒤섞인 표정을 마주하는 순간. 차연 또한 눈물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내 아들. 떨리는 목소리가 마침내 공인을 부른다. 어떤 안도가 두 사람을 감싼다. 마침내 돌아왔다는 감각.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되찾았다는 다행감. 서로를 붙잡아 안은 둘의 어깨가 뜨겁게 젖어들고 있었다. 저편에서 경비들이 기웃대고 있었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겨우 마음을 가라앉힌 차연이 공인을 향해 미소지었다. 이리 오렴. 안으로 들어가자. 함께 이야기할 것이 많지 않겠느냐. 주먹으로 눈가를 훔친 공인이 고개를 끄덕인다. 차연이 내민 손을, 공인이 마주 잡았다. 조금의 낯섦도, 어색함도 없이. 둘은 서로에게 의지하며 걸음을 옮긴다. 가족이라는 이름은 그들이 떨어져 있었던 시간조차 무색하게 만들었다. 원래부터 함께임이 당연하다는 것처럼.

 

주전자의 물이 끓는 동안 공인은 방 안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있었다. 차연은 그런 공인을 바라보며 웃음지었다. 여전히 호기심이 많고 활발한 아이였다. 공인은 차연이 기억하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키가 좀 자랐고, 잔상처가 늘었다는 것 외에는 그저 차연이 알던 그의 아들 그대로였다. 다행이구나. 차연이 불쑥 내뱉었다. 걱정을 많이 했다. 너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 틈에서, 조금은 외롭기도 했고. 그사이 김을 피워올리는 주전자를 들여다보고 있던 공인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죄송해요. 진작 아버지부터 찾았어야 했는데. 금세 울상을 짓는 공인을 보며 차연은 손을 내젓는다. 그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무사하니 괜찮다. 네게도 너만의 고민이 있었겠지. 차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차를 준비하기 시작한다. 정갈한 손놀림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공인이 자리에 얌전히 앉았다. 찻잎이 우러나며 고소한 냄새가 풍겼다. 사실은 저도 걱정했어요. 아버지도 저를 잊었을까 봐. 따뜻하게 데워진 잔을 감싸쥐며, 공인이 중얼거렸다. 기억하신다고 해도, 제가 돌아왔을 때 아버지를 힘들게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그것도 겁이 났고요. 차연은 공인의 시선을 따라 짚는다. 잔잔한 수면에 번져 가는 찻잎의 색깔은 부드럽고 포근한 녹빛이다. 차연은 조용히 대답한다. 너는 내 아들이지 않느냐. 아버지를 의지해 준다면 좋겠구나. 공인을 찾아 헤맨 시간이 힘겹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것은 그의 존재가 불확실했기 때문이었다. 공인이 이렇게 분명히 살아, 제 곁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지금. 차연은 더 두렵지 않았다. 공인에게 남은 일들을 걱정으로 방해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단지 그를 믿고 기다려주는 것이 차연의 일이었다. 꼭 지금처럼, 언젠가 그가 돌아왔을 때 안아줄 수 있도록. 그러니 어떤 말도 더 필요하지 않았다. 이 한 마디면 충분했다. 나는 언제든 너를 기다리고 있다. 아들아. 차연은 공인을 향해 웃는다. 차가 식기 전에 마시렴. 고개를 숙이고 있던 공인은 그제야 차연을 제대로 마주 본다. 흔들림 없는 모습. 쉽게는 무너지지 않을 그 모습을. 이 얼굴을 영영 보지 못할 뻔했다니, 순간 아찔해진다. 사랑하는 가족의 곁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지 절실히 느낀다. 지금껏 했던 고민은 이 순간에 모두 쓸모없어진다. 공인은 뒤늦게 활짝 웃는다.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직 뜨거운 찻물을 급하게 들이킨다. 기침이 마구 터져나왔지만 괜찮았다.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차가운 물을 챙기는 차연을 보며 다시 멋쩍게 웃어보인다. 걱정스럽던 차연의 눈빛도 금세 맑아진다. 둘은 서로를 보며 웃음을 터뜨린다. 아주 오랜만에, 진정으로 느껴보는 즐거움이었다.

 

찻물이 식어갈 즈음, 공인이 조심스레 입을 떼었다. 부탁이 하나 있어요. 차연은 사뭇 진지해진 아들의 눈빛에 생경함을 느낀다. 이런 표정도 지을 줄 아는 아이였나. 공인이 부쩍 자랐음을 새삼스레 실감한다. 차연은 손에 쥐고 있던 찻잔을 천천히 내려놓는다. 말해 보렴. 얼마간 머뭇대던 공인은 곧 고민을 털어놓기 시작한다. 크리스탈 타워에 대해서는 들어 보셨을 거예요. 차근히 이어지는 공인의 말을 듣는 동안, 차연의 머릿속에는 일련의 정보가 스쳐 지나간다. 스스로를 희생하여 탑을 봉인했다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본 것 같다. 공공연히 떠들고 다닐 만한 정보는 아니라지만 샬레이안의 사람들이라면 아마 모르는 이가 없을 것이었다. 차분히 고개를 끄덕이며 귀기울이던 차연의 눈이 문득 커진다. ……언젠가 제 친구를 되찾고 싶어요. 그 말에 짧은 탄식이 차연의 잇새로 흘렀다. 소중한 이를 남겨두고 오는 안타까움을 모를 리 없다. 기한이 정해지지 않은 슬픔이라면 더더욱. 그렇다면 공인의 부탁은 자연히 탑을 다시 여는 방법에 관한 것이리라. 차연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다. 섣부른 위로보다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약속이 나을 터였다. 힘 닿는 만큼 노력해 보겠다. 선뜻 돌아오는 대답에 공인이 반색한다. 금세 환해지는 얼굴에 깃든 일말의 쓸쓸함을 차연은 읽어낼 수 있다. 상심이 크겠구나. 덧붙여진 말에 공인이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괜찮아요. 꼭 다시 만날 테니까. 이전보다 훨씬 단단해진 그 표정에 차연은 가슴 한켠이 이유모르게 시리다. 혼자서 얼마나 많은 일들을 헤쳐 왔을까. 차연은 그 깊이를 쉬이 짐작할 수 없다. 다만 주전자를 들어 공인의 빈 잔을 채워줄 뿐이다. 공인은 아직 희미한 김을 피워올리는 찻잔을 소중히 감싸 쥔다. 향이 정말 좋아요. 해사하게 웃는 아들의 얼굴을 차연은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이런 시간을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모른다. 공인과 함께 조용히 흘러가는 일상의 소소한 순간들을 그토록 되찾고 싶어하지 않았던가. 어느덧 날이 밝고, 공인이 다시 여장을 챙겨 먼길을 떠날 때까지도. 차연은 아들의 존재를 쉽사리 실감할 수 없다. 분명 곁에 있는데도 꿈을 꾸는 듯 멀게 느껴졌다. 그것을 눈치챈 공인이 몰래 쓴웃음을 삼켰다. 진작 돌아올 걸 그랬다는 후회는 이제 와 소용 없는 것이겠으나. 공인은 못내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가만 앉아 있던 차연은, 팔을 뻗어 평소보다 높은 목소리로 조잘대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공인이 저를 안심시키려고 애쓰는 것 같아 미안했다. 한참 떠들던 공인은 잠시 말을 멈추고 차연의 손에 고개를 기댄다. 익숙한 온기. 그리운 가족의 온기였다.

 

공인은 곧 다시 찾아오겠노라고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다가 겨우 길을 떠났다. 멀어져가는 뒷모습이 시야에서 아주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던 차연은 가벼운 한숨을 내쉰다. 이제야 현실 감각이 조금 돌아오는 것도 같았다. 갑작스러웠던 만큼 짧은 만남이었지만 차연에게는 충분했다. 기약 없는 기다림이 끝났다는 점에서, 그리고 원한다면 언제든 공인을 다시 찾을 수 있으리라는 점에서도. 아이에게 쥐여 보낸 링크펄이 있으니 앞으로는 연락이 좀 더 쉬울 터였다. 그거면 되었지, 차연은 생각한다. 오랜만에 마주한 아들과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 것이 아쉬울 뿐이었다. 성곽 입구에 멈춰선 차연은 지평선 끄트머리에서부터 밝아 오는 여명을 응시한다. 햇무리를 가르고 부시게 쏟아지는 빛이 온몸을 흠뻑 적신다. 햇살의 열기가 도톰한 옷감을 데우고, 몸을 따스하게 만들어 준다. 지금껏 멈춰 있던 시간이 비로소 다시 흐르는 듯한 기분. 어제와 다를 것 없는 풍경이고 일상일 텐데. 하룻밤 사이 너무 많은 게 변화했다. 아니, 마침내 제자리로 돌아왔다고 하는 것이 옳겠지. 거처로 돌아가는 차연의 걸음은 어느 때보다도 가볍다. 들이쉬는 숨마다 상쾌했다. 모처럼 새로운 하루를 기대할 수 있었다. 다시 살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기쁨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 것. 차연의 걸음이 우뚝 멎는다. 그는 곧 문틈에 끼인 쪽지 한 장을 발견한다. 거기에는 지겨운 이름이 적혀 있다. 그토록 오랜 시간이 흘렀으니 서로를 기억 저편으로 떠나보냈을 법도 하건만. 차연은 그를 아직 기억한다. 노아 드 제멜.

8

 

노아는 밝은 태양빛으로 물드는 대지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성곽 바깥으로 거칠게 깎아지른 암벽들의 면면이 햇볕 아래 노랗게 반짝이고 있었다. 모르도나는 그리 낯설지 않은 지역인데, 이런 식으로 생경함을 느끼게 될 줄은. 못다한 추적의 결실이 가깝기 때문일까. 그토록 찾아 헤매던 이단이 곧 눈앞에 나타날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무겁게 뛰었다. 썩 유쾌하지만은 않은 감각이었다. 서임식 이후 활동을 재개한 노아의 첫 번째 표적은 다른 누구도 아닌 차연이었다. 가장 가까이에서 목격했고, 그만큼 아쉽게 놓쳤던 이단. 마물의 방해가 없었더라면 애초에 일이 번거로워질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추적을 피해 숨어든 차연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던 데에는 무엇보다 사제, 현의 도움이 컸다. 설마 모르도나에 있었으리라고는. 바로 곁이었는데 왜 진작 생각지 못했을까. 자책은 찰나의 일이다. 이단의 위치를 특정한 뒤로는 모든 것이 속전속결이었다. 재판을 준비하는 노아의 마음도 마냥 가볍지만은 않았으나, 그럼에도 오래 지연된 업무를 끝내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그를 조금쯤 상기시켰다. 차연이 잠시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쪽지를 남기는 수고를 한 것은 노아 나름의 배려였다. 그가 달리 원하지는 않았겠지만, 이단의 생각 따위야 알 바가 아니었다. 애초에 근처 주민이 휘말리지 않도록 하여 귀찮은 일을 덜기 위함이기도 했으므로. 노아는 길목에 서서 차연이 오기를 기다린다. 부디 제시간에 나타나준다면 좋으련만. 이른 아침부터 부지런한 경비들을 피해 외곽을 접선 장소로 택한 만큼, 불필요하게 소란을 만들고 싶지는 않은데. 노아는 허리춤에 걸린 검의 손잡이를 쓸어 본다. 오래되었으나 꾸준히 관리한 덕에 조금도 낡아 보이지 않는 가죽이 햇볕 아래 특유의 윤광으로 반들거렸다. 머지않은 발도의 순간을 고대하며. 노아는 묵묵히 자리를 지킨다. 햇빛이 점점 강해진다. 통보한 시간이 가까워 오고 있었다.

과연 오래지 않아 저편에서 흰 머리칼을 가진 인영이 비친다. 노아는 멀리서도 그를 알아볼 수 있다. 잊은 적 없는 낯이다. 심판의 날을 얼마나 기다려왔던가. 저 이단의 처분이 결정되는 그때에, 다시금 명확해지는 것들이 분명 있으리라고. 노아는 굳게 믿었다. 그것이 노아가 재판의 형식을 고집한 이유였다. 그는 늘 원칙보다 무거운 가치는 없다고 생각해왔으므로. 노아는 눈앞에 선명하게 나타나는 차연의 모습을 놓치지 않고 응시한다. 급히 나온 것은 아닌지 차림새가 제법 정돈된 모습이었다. 지금에 와서도 여유를 부릴 기세가 남아 있다니. 한눈에도 불쾌한 기색이 역력한 차연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면, 이상하게 입술을 비집고 조소가 흐른다. 무엇에 대한 비웃음인지는 스스로도 뒤늦게 떠올려보아야 하는 것이었으나. 차연의 심기를 뒤틀리게 만들기에는 더없이 충분했다. 그의 기분은 노아의 진의와 무관하다. 아직도 나를 쫓아다니고 있었나. 거리낌없이 던져진 질문이 날카롭게 떨어진다. 이유를 묻고자 뱉은 말이 아니었지만, 노아는 그것을 알면서도 부러 정직한 대답을 내놓았다. 이단은 끝까지 추적하여 원칙대로 재판합니다. 당신의 의무를 이행하십시오. 집요한 요구에 차연의 눈매가 사나워진다. 여기는 이슈가르드가 아니다. 내가 응할 이유가 있나? 씹어뱉듯 돌아오는 대꾸에도 노아는 물러섬 없다. 한 점 흔들림 없는 목소리는 오히려 한가롭게 들리기도 한다. 그렇다면 애초 이곳까지 나올 이유도 없지 않았습니까. 결국은 차연의 인상이 구겨진다. 한층 낮아진 목소리에 희미한 적의가 실린다. 나는 이슈가르드에 기대하는 바가 없네. 그곳을 떠난 지 한참인데, 내게서 무얼 얻으려고 이러지. 노아는 눈앞의 상대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이어지는 대답은 이번에도 무상하다. 어떠한 이득을 취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당신은 이미 이단으로 지목된 바 있고, 당신과 같은 이단을 정화하는 것이 나의 임무일 뿐. 재판에 응하십시오. 사무적인 대답에 질린 차연이 노골적인 경멸을 드러낸다. 이단? 어떤 증거도, 증인도 없이? 그러나 노아는 굴하지 않는다. 그에게 이런 문제쯤 사소한 부분에 불과하다. 내가 이단심문관입니다. 어떤 증명이 더 필요합니까? 갑주를 입은 노아의 손이 검을 천천히 그러쥔다. 이단, 차연. 정식으로 결투재판을 요청하는 바입니다. 노아는 대답을 더 기다리지 않는다. 그는 이미 넘치도록 자비를 베풀었다. 다른 누구에게 떠넘기지 않고 스스로 차연의 처분을 맡은 것만으로도 그랬다. 다른 누구도 신뢰할 수 없었다. 직접 증명하고 싶었다. 이 손으로 차연을 베고, 그것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면 해소되는 갈증이리라고 노아는 지금껏 믿어 왔다. 분신이나 다름없는 검을 기어코 빼드는 동작에는 군더더기 하나 없다. 그것을 차연에게 똑바로 겨누는 마음 또한. 흔들리지 않았다.

어느새 완전히 떠오른 태양 아래에 잘 벼려진 검날이 번쩍인다. 차연이 난색을 표한다. 이제 와서 물러설 수는 없었다. 도망친다면 저자의 믿음에 확신을 더해줄 뿐이다. 하지만 그의 말대로, 아예 바깥으로 걸음하지 않았다고 한들 그가 순순히 포기했을까. 흔한 이단심문관의 성정대로라면 외려 거처까지 쫓아와 죄 헤집어 놓고도 남았을 텐데. 궤변이다. 죄없는 사람들을 덩달아 다치게 만들 수는 없었다. 노아는 물러설 기미가 없다. 이미 검을 빼들었으니, 그럴 마음은 조금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었다. 여기까지 따라왔으니 순순히 떠난다면 그편이 더 이상한 일이겠지. 이제는 방법이 없다. 이 싸움이 끝나고 나면 또 어디로 걸음을 옮겨야 할까. 차연의 눈이 근심으로 깊어진다. 그는 마지못해 로브 안자락에 걸린 지팡이를 꺼내 쥔다. 손가락 사이에 감기는 나뭇가지의 존재감은 너무도 얄팍하고 그래서 불안하다. 금방이라도 부러질 듯한 지팡이를 간신히 말아쥔 손이 잘게 떨렸다. 그러나 마도서를 펼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다시는 그것을 손에 쥐지 않으리라는 결심이, 고작 헛된 맹목에 눈먼 이단심문관 때문에 무너져서는 안 됐다.

여전히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차연은 호흡을 가다듬는다. 어차피 돌이킬 수 없었다. 망설여서는 피해가 커질 뿐이다. 불합리한 싸움인 것을 알면서도 물러서지 못하는 자신이 조금은 원망스럽다. 어쩌다 여기까지 왔을까. 입이 쓰다. 부신 볕에도 눈을 감지 않고, 상대를 오롯이 바라보며. 차연은 이 순간이 가능한 빨리 지나가기를 바란다. 긴장으로 뻣뻣해진 손이 작은 지팡이를 고쳐 쥐었다. 그를 지켜보던 노아의 눈에 순간 의아함이 스친다. 왜 마도서를 들지 않지? 그러나 상세한 사정을 캐묻는 것은 나중의 일로 미루어도 충분하다. 어떤 이유가 있다고 한들 그의 혐의가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이미 재판은 시작되었다. 노아가 바라마지않던 일이다. 가볍게 도약한 걸음이 차연에게로 쏟아진다. 선뜩한 검날이 일으키는 풍랑이 뺨을 할퀴며 다가온다. 동시에 발동된 마법이 환하게 치솟았다. 녹빛 섬광을 두른 바람결이 노아의 주위를 휘돌며 시야를 어지럽힌다. 살을 깎아낼 듯한 압박감에 눈을 찌푸리다가도, 노아는 곧 기세를 회복한다. 생각만큼 강하지 않았다. 노아가 내지른 검이 허공에 은빛 궤적을 그리며 차연에게로 돌아온다. 집중한 차연의 눈빛이 첨예해진다. 휘둘러진 검격이 반투명한 보호막에 부딪혀 튕겨나간다. 가로막힌 노아의 자세가 흔들리는 아주 잠깐 사이, 차연은 재빨리 몸을 뒤로 물린다. 최소한의 거리조차 확보하지 못한 채로 캐스팅에 집중할 수 있는 술사는 없으므로. 그러나 차연이 거리를 벌리기 무섭게 노아는 사냥개처럼 뛰어들어 다시 간격을 좁히는 것이다. 차연은 묵직하게 날아드는 검날을 간신히 흘려낸다. 너무 늦지 않게 완성된 마법이 다시 한 번 빛을 터뜨리며 암석 덩어리를 토해냈다. 노아의 검에 부딪힌 돌조각들은 어렵지 않게 썰려나간다. 마른 땅에 떨어지는 파편이 흙먼지를 일으켰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 고작 두 번 합을 섞었을 뿐인데. 차연은 벌써부터 지쳐 보였다. 애초에 그에게 불리한 싸움이라는 것만은 자명했다. 노아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비록 재판을 중단할 명분으로 받아들이지는 못하더라도. 정화할 이단을 약하게 만든 것조차도 곧 신의 뜻이자 자연의 섭리 같은 것이라고, 노아는 생각했다.

외곽의 부지는 그리 넓지 않다. 오가는 사람들이 다져 놓은 길을 벗어나면 곧장 깎아지른 암벽이다. 잘못 스치기만 해도 살갗을 찢어 놓을 듯한 저것을 타고 오르거나 절벽 아래 몸을 던질 수는 없는 일이다. 토끼몰이하듯 쏟아지는 광풍에 차연의 머리칼이 어지럽게 흩날렸다. 겨우 펼쳐내는 보호막은 점차 힘을 잃어가고 있다. 채 흡수되지 않은 충격이 차연의 온몸을 고스란히 뒤흔들었다. 귓가에 이명이 웅성댄다. 치유마법으로도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처 곳곳에서 진득한 피가 배어나고 있었다. 쉴 틈 없이 영창을 읊던 입술은 바짝 말라 갈라진 지 오래다. 차연은 지금 가냘픈 지팡이가 부러지지 않도록 하는 것만으로 고작이었다. 발밑의 중심을 쉬이 잡을 수 없다. 눈앞이 흔들리며 번진다. 에테르를 너무 많이 사용한 게지. 그러나 이런 상대 앞에서 힘을 아끼는 것은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였다. 그렇잖아도 녹록잖은 상황, 전력을 다한다고 한들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초반에는 그나마 타이밍을 맞추어 오고가던 합이 눈에 띄게 어긋나기 시작한다. 하지만 노아는 조금의 틈조차 허용하지 않는다. 저를 표적 삼고 쫓아오는 이단심문관의 시리도록 푸른 안광이 숨통을 틀어막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그는 호흡 한 점 흐트러지지 않고 계속해서 공격을 이어간다. 재판은 이미 일방적인 난전으로 전락했다. 좀처럼 차오르지 않는 에테르, 그럼에도 포기 않고 캐스팅을 이어가느라 드문드문 달싹이는 차연의 입술 틈으로. 기어코 끈적한 핏물이 역류한다. 기침과 함께 토해낸 붉은 액체가 거친 흙바닥을 적신다. 재차 돌진해 오는 노아를 이번에는 막을 수 없을 것 같다. 보호막을 펼치기에는 늦었다. 금방이라도 차연을 꿰뚫을 듯 내지른 검날이 날카로운 반사광을 일으킨다. 어차피 죽일 거라면 이렇게 시간을 끌어댄 이유가 뭐지. 마지막 순간 차연은 생각한다. 새하얀 눈동자 안에서 일말의 증오와 슬픔이 뒤섞인 채 일렁인다. 그 모습을 앞에 두고, 노아의 움직임이 미세하게 느려졌다. 고대하던 단죄의 순간을 기뻐해야 할 텐데, 이 검은 분명 이단을 정화하는 성물일 텐데. 무엇 때문에 무고한 자를 도륙하는 듯한 착각이 이는지. 전투를 이어가는 내동안 어딘가 찜찜하고 석연찮은 기분이 들었다면 그것은 차연의 나약함이 병균처럼 옮아붙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애써 파헤치지 않았던 모종의 남은 진실 같은 것이 발목을 붙잡는 탓일까. 어느 쪽이든 이제 와 무를 수는 없다. 종결을 기대하고 크게 휘두른 검이 둔탁한 물체에 거세게 가로막힌다.

예상치 못한 방해였다. 찢어질 듯 날카로운 금속성이 대지를 울린다. 인상을 구긴 노아의 앞에는 어느새 붉은 옷의 남자가 버티고 서 있다. 날렵한 세검이 위협적으로 번뜩인다. 명백히 중재를 요구하는 굳은 눈빛 앞에서도 노아는 기세가 꺾이지 않는다. 다만 방금까지 흉흉하던 전의를 거두었을 뿐이다. 제삼자를 사이에 끼워 두고 집행을 이어갈 생각은 없었다. 본래 자신의 무기를 사용하지도 않는 상대의 목숨을 기어이 끊어 놓고자 하는 마음 또한. 노아는 차라리 안도한다. 이 적마도사의 난입은 어쩌면 신께서 내린 계시 같은 것일지 몰랐다. 차연이 이단이라는 확신만큼은 변함없었으나, 만약 그에게 다른 쓸모가 있다면 어떨까 하는 가정. 이 앞에 예비된 다른 뜻이 있다면……. 새로운 가능성으로 깊어지는 눈동자. 노아의 상념은 낯선 목소리에 의해 깨어진다. 이대로 죽게 내버려둘 셈인가. 뒤늦게 시선을 돌리면, 거친 바닥에 힘없이 쓰러져 누운 차연이 보인다. 아무렇게나 너브러진 팔다리가 미약한 호흡을 따라 간헐적으로 움직댄다. 흰옷을 물들인 핏자국. 노아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린다. 짧은 한숨이 이어진다. 결국 노아가 손을 들었다. 선뜩한 검날이 곧 제 집 안으로 돌아간다. 이름을 물어도 되겠습니까. 멋대로 치유 마법을 시전하려는 그의 곁으로 몸을 낮추며, 노아가 물었다. 하지만 그를 제지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돕겠습니다. 환술이라면 미욱하나마 배운 적 있으니. 검은 갑주 낀 손이 힘겹게 오르내리는 차연의 몸을 향해 뻗어진다. 시룬 티아. 자초지종은 잠시 후에 듣지. 불편한 목소리가 대꾸한다. 동시에 그의 손 아래에서부터 환한 빛이 움튼다. 상한 육신을 수복하고 생명을 불어넣는 힘. 완전한 상태로 되돌려놓을 수는 없더라도 급한 응급처치를 하기엔 충분했다. 차연의 숨이 안정된 것을 확인한 마도사가 그를 천천히 일으켜 세워 부축했다. 노아는 자연스럽게 그 뒤를 따른다. 선명히 남은 싸움의 흔적 때문인지, 마을 입구를 넘어서고부터는 달갑잖은 시선들이 몇몇 달라붙었지만 노아는 개의치 않았다. 그럴 이유가 없었다.

 

여관 침대에 누웠던 차연은 한참 뒤에야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깊이 남은 내상과 어렴풋한 통증이 그를 찔러대며 괴롭혔다. 잔뜩 찡그린 얼굴, 부르튼 입술에서 옅은 신음이 부서진다. 그가 깨어나기만을 기다리던 시룬 티아와 노아의 눈길이 그에게 쏟아졌다. 괜찮나? 낯선 목소리가 묻는다. 차연은 그것의 은인의 배려임을 알 수 있다. 그를 향해 가볍게 고개 숙여 인사한다. 이제 어떻게 된 일인지 듣지. 제게로 돌아오는 시선에, 정직한 자세로 서 있던 노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슈가르드의 이단심문관으로서 재판을 집행하러 왔을 뿐입니다. 대답을 기다리던 마도사의 잇새로 헛웃음이 샌다. 여기는 성도 바깥인데? 피로한 기색이 역력한 차연이 말을 이었다. 나는 지금 샬레이안 사람이네. 이슈가르드의 일은 나와 무관하고, 이단자들 또한 마찬가지야. 붉은 모자챙이 차연과 노아를 향해 번갈아 기울어진다. 파악하기에 어려운 문제는 아니었다. 그가 노아에게 다시 물었다. 기어이 손에 피를 묻혀야겠나. 이번에는 재깍 답이 돌아온다. 아니오. 당분간 지켜보며 검증할 예정입니다. 노아의 담담한 낯을 차연은 올려다보지 않는다. 대체 무슨 자격으로? 씹어뱉었을 뿐. 노아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그를 주시한다. 옆에 앉은 시룬 티아가 긴 숨을 내쉬었다. 어느 쪽도 거짓으로 꾸며낸 이야기는 아닌 듯하지만, 상황이 어떻게 돌변할지는 모른다. 환자를 두고 갈 수는 없으니 결국은 당분간 머물러야 하지 않을까. 그는 잠자코 차연에게 동의를 구한다. 제대로 회복할 때까지만 곁을 지켜도 되겠느냐는 물음에 차연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부탁하고픈 일도 있었으니 오히려 감사할 일이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그들을 지켜보던 노아가 문득 끼어들었다. 오늘은 이만 자리를 피해 드리겠습니다. 다시 뵙지요. 차림새를 가다듬은 그는 정말로 미련 없이 방에서 나가 버린다. 묵직한 갑주가 바닥을 스치는 소리에 차연이 미간을 좁혔다. 그러다가도 저를 향하는 걱정스런 시선과 눈을 맞추는 것이다. 이 사람이 아니었으면 정말로 죽음의 문턱을 넘었을지 모른다. 사랑하는 아들을 남겨둔 채, 억울한 죄목을 뒤집어쓰고. 최악의 상황을 떠올리자면 은인을 향해 한없는 감사를 표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대로 영영 신세를 질 수는 없는 일이다. 송구스러운 말씀이지만, 부탁이 있습니다. 아직 기운을 차리지 못해 형편없이 갈라지는 목소리가 시룬 티아에게 요구한다. ……제게 적마법을 가르쳐 주시겠습니까. 착잡한 표정으로 차연을 지켜보던 그는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자세한 사정을 굳이 캐묻지 않더라도 차연이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방도를 마련해줄 필요가 있다는 계산이었다. 적어도 아까와 같이 불합리한 싸움이 반복되어서는 안 될 테니. 긍정의 답을 받아낸 차연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어린다. 감사합니다. 당장 오늘부터는 힘들겠지만……. 말을 이어가며 느리게 깜박이던 눈꺼풀이 다시 무겁게 감겨들었다. 시룬 티아는 그러고도 얼마간 자리를 더 지켰다. 자그마한 창가에 드리운 커튼 너머로는 여전한 햇빛이 내리쬐고 있었다.

 

가르침은 며칠에 걸쳐 이어졌다. 짧은 시간 동안이나마 그와 대화를 나누며 차연은 모처럼 생경한 기분이었다. 새로운 지식을 흡수하는 일은 언제든 그런 것이었다. 스승은 이곳저곳을 방랑한다고 했으니, 헤어지고 나면 또 언제 만날 수 있을는지 몰랐지만. 인연이 닿는다면 다시 보게 되리라고 믿으면서. 차연은 그의 앞에서 그간 전수받은 기술들을 한번 더 점검한다. 처음보다 제법 유해진 인상으로, 시룬 티아는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배움이 길지 않았음에도 차연의 실력은 제법 준수했다. 차연은 스승의 얼굴에 만족감이 번지는 것을 본다. 세검을 정리해 넣고, 둘은 한적한 그늘에 잠시 나란히 앉는다. 시룬 티아가 말문을 열었다. 혼자서도 정진하면 크게 발전할 수 있을 거야. 꾸준히, 계속하면 좋겠다. 차연은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아내고, 감사의 뜻으로 고개를 잠시 숙인다. 모처럼 기분 좋은 미소가 그의 입가에 걸렸다.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언젠가 보답할 일이 있겠지요. 그러나 스승은 손을 내저을 뿐이다. 그런 일은 애초에 생기지 않는 편이 좋지. 차연은 씁쓸한 웃음으로 긍정한다. 한동안 침묵이었다. 미미하게 불어오는 산들바람이 뺨을 간질이고 간다. 둘은 시원한 공기를 한껏 들이마신다. 시룬 티아가 자리에서 먼저 일어났다. 나는 이제 가 봐야겠네. 알다시피, 떠돌이니까. 차연의 눈이 커진다. 급히 따라 일어나는 옷자락이 바람결에 펄럭였다. 하루쯤은 더 계실 줄 알았습니다. 미련 섞인 눈으로 스승을 올려다보다가도, 차연은 고개를 끄덕인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아쉬운 당부를 남긴다. 당신께서 어디로 가든지 늘 편안하셨으면 합니다. 시룬 티아는 차연을 향해 가득 웃어 보인다. 고마웠다는 짧은 인사가 돌아오고, 그뿐이다. 뒤를 돌아보지 않고 걸어 떠나는 붉은 옷의 마도사를 차연은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9

 

스승이 떠난 뒤로도 수련은 계속되었다. 낯설기만 하던 세검은 어느덧 몸의 일부처럼 자연스럽다. 모처럼 피어나는 호기심은 훈련의 능률을 높여 주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바깥 공기를 마시는 동안은 잡념도 모두 씻겨 나가고 상쾌한 기분이다. 그러고는 늦은 오후면 다시 책상 앞에 앉아 깃펜을 집어드는 것이다. 쉴 틈 없이 연구와 실습을 이어가는 차연을, 노아는 계속해서 지켜보았다. 검증이라는 명목 하에 한시도 놓치지 않고 따라붙는 시선을 차연도 알고 있었다. 늘상 곁을 지키는 존재가 불편하지 않을 리 없었으나 노아는 언제나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하지만 차연에게는 그마저도 울타리와 같은 속박으로 여겨졌다. 차연의 성취는 노아의 감시와 무관하다. 노아는 여전히 저를 꺼리는 차연의 눈빛을 어렵지 않게 읽어낼 수 있다. 훈련할 때나 산책할 때, 식사를 하거나 차를 마실 때에도. 노아가 자리를 비우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그의 주시가 불쾌한 것과 별개로, 차연은 그의 존재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음을 인정해야 했다. 어디를 가든지 먼발치에는 늘 노아가 있었다. 앞으로 얼마를 더 이렇게 지내야 할까. 그의 구미를 당길 만한 건수가 없음을 언제쯤이면 깨닫고 돌아갈까. 차연은 노아가 스스로 지치기를 기다리는 중이었으나 솔직한 심정으로는 그리 기대하지 않았다. 몇 년을 뒤쫓아온 그림자였다. 어느 순간 홀연히 나가떨어진다면 그편이 더 어색할 터였다.

차연은 모처럼 울다하 상점가로 나온 참이었다. 자잘한 식료품 꾸러미를 품에 안고, 차연은 저만치에서 어른대는 노아의 인영을 못 본 체한다. 짐을 맡길 만한 사이도 아니었으니 아예 시야를 닫는 것이 나았다. 거리는 오늘따라 북적대는 것 같다. 삼삼오오 모여 선 사람들이 목소리를 낮추고 무어라 수군대고 있었다. 묘한 분위기였다. 어떤 사건이라도 벌어졌던 걸까. 천천히 이어지던 걸음은 찻잎을 늘어놓은 가판대 앞에서 멈춘다. 색색깔 마른 이파리들이 서로 뒤섞인 채 정갈히 진열되어 있었다. 공인이 좋아할 만한 것이 있을까 싶어, 차연은 허리를 굽히고 좌판을 살핀다.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머리칼 너머로 언뜻 파란빛이 스쳐 갔다. 묵직한 군홧발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난데없이 위협을 느낀 차연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멀리에 있던 노아도 어느새 곁에 가까이 다가와 있다. 짙푸른 제복을 입은 사람들 서넛이 게시판 앞에 버티고 선 것이 보인다. 주변을 둘러싼 사람들은 함부로 다가가지 못하고 저들끼리 떠들어댈 뿐이다. 커다란 수배지를 붙인 제복들은 미련 없이 자리를 떴다. 원호를 그리며 주춤대던 걸음들이 게시판 앞으로 몰려든다. 차연도 그중 하나였다. 뜻모를 불안으로 흔들리는 백색 눈동자가 굵은 글씨로 적힌 문자들을 급히 읽어내려간다. 울다하 여왕 암살. 용의자 도주. 수배 중. 커다랗게 나붙은 초상화는 다름아닌 공인의 것이다. 흰 부분이 섞인 검은 머리칼, 접혀 있는 비에라의 귀와 선명한 황금빛 눈동자. 문득 발밑이 허물어진다. 휘청이는 차연을 붙잡은 것은 다름아닌 노아였다. 품을 벗어난 꾸러미 하나가 바닥을 굴렀다. 노아가 그것을 주워들어 다시 차연에게 안겨 주었다. 표정 없는 얼굴이 차연을 직시한다. 어지럽다. 차연은 간신히 헛숨을 삼킨다. 우선은 거처로 돌아가야 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보고, 그리고, ……. 오랜 시간 동안 한곳에 틀어박혀 있었던 탓일까.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귓가에 사납게 날아든다. 여지껏 소식을 몰랐다니 세상 물정에 너무 어두운 것 아니냐느니, 수배지가 이제야 붙은 것이 수상하다느니 하는 이야기들이. 틀어막은 귓가 사이로 이명이 틈입한다. 기껏 골라 담은 식료품들이 속절없이 바닥에 나뒹군다. 하나라도 다시 주워 올릴 여력은 없었다. 차연의 걸음이 점점 빨라진다. 차연은 도망치듯 달린다. 무엇을 떨쳐내려는지도 모르는 채. 뛰어가는 차연의 뒷모습을 노아는 얼마간 바라보았다. 주변은 아직 소란하다. 시린 물빛 눈동자가 수배지에 잠시 머물렀다가, 곧 흥미를 잃고 멀어졌다.

 

묵직한 목재 문이 등 뒤에서 굳게 닫힌다. 차연은 쓰러지다시피 자리에 앉는다. 노아는 다행스럽게도 바깥에 볼일이 남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차연은 그가 곧장 저를 따라 들어오지 않은 것이 잘된 일인지 아닌지 짐작할 수조차 없다. 노아는 이슈가르드인이다. 그것도 하필이면 의무와 책임에 목을 매는 이단심문관. 공인의 안위를 볼모 잡히는 일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차연은 한숨을 삼킨다. 가슴 아래에 무언가 들어앉은 것처럼 답답했다. 제대로 호흡할 수 없었다. 눈이 무겁게 깜박인다. 결국은 요구에 응하는 수밖에 없는 걸까. 그에게 연구실의 문을 열어 보이는 날이 오게 될 줄은. 자료를 죄 헤집어 놓겠지. 유실되는 것이 없다면, 괜한 오해로 트집 잡히는 일이 없다면 좋으련만. 지금은 무엇 하나 보장할 수가 없었다. 정처 없이 헤매던 차연의 시선이 잘 정돈된 침대에 가 닿는다. 지쳤다. 당장이라도 쓰러져 잠들고 싶은데. 자리에서 겨우 몸을 일으킨 차연이 문간 앞에 섰다. 근처에서 노아의 기척을 느낄 수 있다. 힘없이 들어올린 손이 차가운 문고리를 잡아 돌린다. 발치에 식료품 꾸러미가 닿는다. 차연은 가만히 그것을 집어든다. 노아가 무감한 표정으로 차연을 돌아보았다.

이야길 좀 하지. 노아는 이렇다할 반응 없이 걸음을 옮길 뿐이다. 그에게 자리를 내준 차연이 침대 머리맡에 걸터앉았다. 노아는 언제나처럼 곧은 자세로 차연을 바라본다. 이어질 말을 기다리는 듯이. 차연이 뻣뻣한 눈가를 문지르며 내뱉었다. 그 “검증”이라는 게 어떤 절차로 이루어지는지부터 듣겠네. 의중을 모를 시선이 차연을 스쳐 간다. 노아는 천천히 대꾸한다. 당신의 행동 양식은 지금껏 충분히 관찰했습니다. 오래 매진한 연구가 있는 것으로 압니다.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게 좋겠지요. 과정이 번거롭지는 않을 겁니다. 내가 직접 확인하면 그뿐이니까요. 미세한 안도가 차연에게 깃든다. 적어도 문서화된 자료가 당장 유출되지는 않으리라는 뜻이었으므로. 누구에게든 연구의 내용을 공개하는 것이 꺼려지기는 했으나, 다른 수가 없었다. 어쩌면, 정말 만에 하나. 진상을 전부 알게 된 뒤에라면 노아도 순순히 물러나줄지 모르는 일이었다. 여전히 내키지 않았지만……. 차연의 고개가 살며시 떨어졌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은백색 눈이 노아를 향해 희미하게 빛난다. 협조를 약속하지. 갑작스러운 선언에도 노아는 그리 놀라지 않는다. 단지 차연을 한번 흘긋 넘겨다보았을 뿐이다. 달리 이유가 있습니까. 불필요한 되물음에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애초 기대한 적 없다는 듯, 노아는 불쾌한 기색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하룻밤 말미는 드리겠습니다. 내일 이르게 출발하지요. 가벼운 목례, 그리고 등을 돌린 노아가 방에서 나갔다. 짧은 대화였는데도 차연은 숨이 가쁘다. 불안정한 상태가 어디서 비롯되는지는 이제 너무도 명확한 것이다. 목줄기를 쓸어내리던 차연은 창가로 걸어가 커튼을 닫아 버린다. 방 안에 드리우는 그늘은 어둠을 몰고 오기에 충분치 못하다. 차연은 비틀비틀 침대에 눕는다.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쓰고 있노라면 제 희박한 숨소리를 여실히 느낄 수 있다. 내일이면 옛 연구실로 향해야 한다. 저지 드라바니아……. 그곳에 쓸만한 기록들이 아직 남아 있을 터였다. 차연은 어지러운 환각으로 녹아내리던 그 숲을 또렷히 기억한다. 그 안으로 재차 발을 들이게 된다면 어떨까. 다시는 반복하고 싶지 않은 끔찍한 경험. 개미떼가 타고 오르듯, 맨살갗에 소름이 죽 돋는다. 편히 잠들지 못하는 날이 오래 이어지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이동하는 내도록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차연에게는 구태여 불편한 상대에게 말을 붙일 이유가 없었고, 노아 역시 소모적인 대화를 원치 않았으므로. 길고 긴 침묵만이 끝도 없이 늘어졌다. 차연은 여차하면 연구실을 통째 이사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차피 이단과는 관계 없는 연구였지만, 만약을 대비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이곳은 이슈가르드의 관할 밖이니 달리 관심을 가질 만한 사람도 없을 것이었다. 제법 먼 길이었지만 말없이 걷다 보면 목적지까지도 금방이었다. 하늘은 어느새 어둑해지기 시작한다. 밤그늘 속에서 거처의 입구가 어른어른 드러난다. 오랜만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긴장이라도 한 걸까. 분명 코앞인데도 차연은 몇 번 헛손질 끝에야 문을 열 수 있었다. 여태 주인을 잃고 비어 있었던 내부는 빛 한 점 없이 어둡다. 불 밝힐 만한 것을 찾아 두리번대는 차연의 뒤에서 노아가 품 안을 뒤적였다. 흐르는 에테르의 파동이 느껴지고, 곧 푸른 빛이 연구실 안을 가득 채운다. 환하게 발광하는 물 크리스탈이 노아의 손에 들려 있었다. 차연은 그 선명한 광채를 조용히 바라다본다. 노아에게는 어울리지 않도록 맑은 빛깔이라고 생각하다가도, 문득 그의 눈동자와 닮은 구석이 있다는 데에 생각이 미치는 것이다. 그러나 쓸데없는 잡념이다. 냉하게 가라앉은 차연의 시선이, 넓은 탁상 위 한가득 쌓인 문서들에 닿는다. 차연이 가볍게 턱짓한다. 마음껏 뒤집어 놓으라는 체념이다. 한구석에 내려놓은 크리스탈이 여전히 주변을 밝힌다. 차연은 저만치 의자에 앉아 노아를 지켜본다. 본래 차연의 자리였던 곳에 어색하게 앉는 것도 잠시, 노아는 금세 적응한다. 탁상에 늘어선 문서들을 하나씩 집어 꼼꼼히 확인하는 눈길이 날카롭다. 기록은 생각했던 것보다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빼곡한 글자들을 차분히 읽어내려가다 보면, 이 연구가 이단이나 드래곤과는 연관이 없다는 사실 또한 오래지 않아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이다. 기록을 훑는 동안 조금씩 누그러져 가던 노아의 인상은 다음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 다시 딱딱해진다. 약품의 목록이 낱장 가득 즐비했다. 노아는 그 이름들을 모르지 않았다. 열몇 개의 해독제, 그리고 그에 대응하는 환각 물질의 목록 또한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다. 검은 눈썹이 느리게 들려올라간다. 차연은 여전히 무심한 낯이다. 노아의 시선이 근처의 진열장에 닿는다. 조그만 유리병들이 줄지어 놓여 있다. 의자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 그리고 노아가 그 앞으로 다가간다. 그는 라벨에 정갈하게 적힌 글씨를 소리 내어 읽는다. 동시에 차연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건……

비겁한 도망자. 노아는 변명할 틈을 주지 않고 단정한다. 푸르던 눈 안에 빙하처럼 시린 경멸이 가득 들어찬다. 차연이 입술을 짓씹었다. 저것들을 들이키는 상상을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느냐고 그가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노아를 똑바로 바라보던 시선은 금방 거두어진다. 어지러이 스쳐 가는 과거의 편린들. 상기하고 싶지도, 들춰내고 싶지도 않은. 저자가 그 마을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다면 분명 직접 확인하려 들 텐데. 차연은 이마를 짚는다. 짧은 한숨을 토해낸다.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하지만 어떤 해명도 없이는 제 입지가 곤란해진다. 차연의 낯빛이 어두워진다. 결정해야 했다. 그는 여전히 형형한 기세로 버티고 선 노아를 지나쳐 뒤편의 서랍을 뒤적인다. 마찬가지로 깔끔히 정리해 놓은 서류철 하나가 손에 들려 나왔다. 그것을 노아에게 던지듯 건넨다. 털퍽, 책상 위로 떨어진 문서의 낱장이 펄럭였다. 역시 꼼꼼하게 기입된 숫자들이 한가득이다. 노아는 그것이 사용량 수치에 대한 보고서임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다. 합법적인 허가를 받은 연구입니까? 노아가 조금 누그러진 기세로 물었다. 차연은 그사이 한층 피곤한 기색이다. 약물 사용에 관해서는, 그렇네. 해독법을 공유하는 조건으로 제공받은 것이고. 지친 목소리로 대답한 차연이 다시 자리로 돌아가 앉는다. 그가 뒤로 몸을 기대는 모습을 지켜보던 노아가 재차 질문했다. 연구의 목적을 설명해 주십시오. 은빛 날카로운 눈길이 노아를 향한다. 그러나 달리 수가 없었다. 차연은 느릿느릿 입을 뗀다. ……커르다스 골짜기에 마을이 하나 있네. 불쾌한 환각을 일으키는 곳이야. 사람들은 광증에 휩싸여 죽었고, 나는 도망쳤지. 비겁하게. 구태여 덧붙이지 않아도 좋았을 말이 꼬리를 물고 매달렸다. 노아는 차연의 얼굴 가득한 후회가 정확히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지 짐작하지 못한다. 그래도 알아야 했네. 무엇 때문에 그런 일들이 벌어졌는지. 꺼져 가는 차연의 음성은 분명 더 캐묻지 말라는 경고 내지는 권고를 언뜻 드러내고 있었지만, 노아는 그를 추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렇듯 말을 아끼는 경우라면 더더욱 그래야 했다. 노아는 이단심문관이었으나 그보다 먼저 이슈가르드의 기사였다. 환각 물질이 이단에게 전달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애초 그 마을이 이단의 소굴은 아닌지. 그런 경우가 아니라도 치안이 무너진 것만은 분명했으므로. 스스로의 눈으로 확인해야만 했다. 단 한 점의 진실이라도 놓칠 수 없다. 노아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안내해 주십시오. 굳게 버티고 선 노아를 보는 차연의 잇새로 헛웃음이 흐른다. 아니, 너무 위험해. 그러나 노아는 물러나지 않는다. 일을 번거롭게 만들 필요는 없겠지요. 안내하십시오. 강압이 깃든 목소리. 차연은 제게 여지가 없음을 깨닫는다. 적어도 날이 밝은 뒤 출발하고 싶었지만, 노아는 이미 크리스탈을 챙겨 문간을 나선 뒤였다. 차연은 억지로 몸을 일으켜 나간다. 노아가 묵묵히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산길은 기억보다도 험준했다. 곳곳에 나무뿌리가 엉킨 흙길을 밟으며, 차연은 자꾸 고개를 털어낸다. 시야에 스치는 푸른빛이 물 크리스탈의 그것인지 아니면 환각 속 나비떼의 재현인지 알 수 없었다. 날카로운 이명이 귓가를 꿰뚫는다. 차연의 걸음이 오른쪽으로 치우치고 있었다. 그곳엔 빽빽이 솟은 나무들과 깎아지르는 비탈뿐인데. 두꺼운 나뭇가지에 충돌하려는 차연을, 노아가 적당한 때에 낚아챈다. 왜 그러십니까. 미간을 한껏 찡그린 차연이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통로가 보였던 것 같은데. 그것도 착각이었나. 입을 열어 무어라 말하려던 차연이 고개를 홱 돌린다. 그 나비, 검푸르게 발광하는 날개가 뺨을 스친 것 같았다. 과연 저편에 무리지어 날고 있는 나비 떼가 보인다. 그것들은 아름답다고는 도저히 말해줄 수 없을 만치 괴괴한 빛을 내뿜는다. 망연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나비들은 점차 가까이 다가오는 것 같다. 차연은 급히 노아를 떨쳐내고 걸음을 옮긴다. 그 마을에 다시 찾아가도 정말 괜찮은 걸까.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했던 지난날이 뼈아프다. 아직까지 거기에 살고 있는 사람이 남았을까? 아주 폐허가 되었거나 공동묘지로 전락하지는 않았을까?

차연은 힘겹게 걸음을 딛는다. 순간 발밑이 푹 꺼지며 차가운 강물이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큰 소리와 함께 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뒤따라오던 노아가 잠시 놀란 눈을 떴지만 그뿐이었다. 알아서 다시 나오리라는 판단인 것이다. 결국은 촌극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스쳐 간다. 애를 쓰는군. 그가 헤엄쳐 나오기까지 몇 개의 숫자를 세어야 할까. 그러나 열 손가락을 다 접도록 차연은 돌아올 기미가 없다. 첨벙대는 소리마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노아는 그제야 비탈을 내리달려 물가로 향한다. 구석에 머리를 처박고 힘없이 허우적대는 차연이 보인다. 그마저도 움직임이 차츰 잦아들고 있었다. 거칠게 팔을 뻗은 노아가 차연을 단숨에 건져 올렸다. 차연은 잔뜩 삼킨 물을 토해낼 여력도 없이 희박한 숨을 몰아쉰다. 크리스탈을 비춰 본 그의 얼굴은 더 창백할 수 없을 정도로 희게 질려 있다. 노아는 그를 끌어다 넓적한 돌 위에 눕힌다. 등을 세차게 두드리자 차연이 물을 한가득 뱉어냈다. 원형의 소용돌이를 그리며 뭉개지는 차연의 시야에 여전히 나비 몇 마리가 걸린다. 몇 번 콜록대던 차연은 차라리 눈을 감아 버린다. 그럼에도 사라지지 않고 잔여하는 날개의 파동. 차연은 물 속에서 저를 끌어당기던 새하얀 손의 감촉을 아직 선명히 느낀다. 색색대는 숨소리가 어두운 숲에 메아리쳤다. 그를 말없이 내려다보던 노아는 곁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이대로 산행을 강행하기엔 무리였다. 어떤 준비도 없이 무작정 떠나온 것이 실책이라면 실책이었다. 마을에 무사히 진입하기 위해서는 대안이 필요하겠지. 가라앉은 음성이 노아의 입술 틈으로 떨어져나온다. 이만 돌아가도록 하지요. 비웃을 힘조차 없으면서도, 차연은 힘겹게 대꾸한다. 이제 와서? 왜, 무고한 사람을 죽일까 겁이라도 났던가.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날선 눈빛이 차연을 잠시 스쳤다. 차연은 저 끔찍한 나비떼가, 녹아 엉켜드는 나무들이 보이지 않느냐고 따져 물을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지겨운 푸른빛이 눈앞에 가득 들러붙었다.

차연은 한참 뒤에야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럼에도 뼛속까지 스미던 냉기가 아직 느껴지는 것 같아 몸서리가 쳐진다. 거처로 돌아가는 길이 멀게만 느껴진다. 차연은 몇 발짝 떼지 못하고 계속 거꾸러졌다. 하는 수 없이 차연을 부축한 노아가 천천히 걸음을 맞추었다. 그 또한 평소와 다른 감각을 느낀다. 불쾌한 두통이 머리를 옥죄는 듯하다. 이것도 그 수상한 마을의 영향일까. 특별한 환상을 발견할 수는 없었으나. 노아는 차연이 다시 쓰러지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인다. 마침 꼬리깃 마을까지는 그리 멀지 않으니, 거기서 쉬어가는 것도 괜찮을 터였다. 둘은 계속 걷는다. 여전히 어둑한 주변을 노아의 크리스탈이 밝혀 주었다. 몇 마디 주고받을 법도 한데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그와 잡담을 나눌 만한 사이는 아니지. 노아가 생각한다. 한참 가다 보면, 거칠기만 하던 숲길이 점점 평탄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사람이 많이 오가는 길목으로 들어섰다는 뜻이다. 가쁘게 몰아쉬던 차연의 호흡은 이제 많이 정돈되었다. 지독한 이명도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멀리 에테라이트의 불빛이 보인다. 둘은 외곽을 돌아 마을의 입구로 향한다. 저만치 어른대는 인영이 보였다. 불침번을 서는 경비들일까. 그런데 마을에 가까워질수록 누군가 다투는 소리가 크게 들려온다. 다시금 몰려오는 두통에 차연이 인상을 찌푸렸다. 근처에 사람이 있다는 것도 모르고 그들은 고함을 질러 댄다. 그러거나 말거나 개의치 않고 걸음을 옮기던 노아의 움직임이 뚝 멎었다.

그 뱅드로를 마지막으로 본 사람이 바로 나라니까!

흔들리는 노아의 눈동자가 일순 차연을 향한다. 하필 이런 곳에서, 이런 때에. 고민은 찰나에 불과하다. 석연찮은 은퇴 이후, 그의 마지막 모습을 목격한 자가 있다면 당연히 쫓아가 물어야 했다. 차연을 지탱하고 있던 손이 떨어져나간다. 노아는 횃불이 비치지 않는 구석자리에서 다투는 남녀를 향해 망설임 없이 걸어간다. 힘차게 싸워 대느라 노아의 접근을 알아채지 못한 그들이 뒤늦게 얼어붙었다. 이단심문관, 노아 드 제멜입니다. 자세한 이야기를 좀 들을 수 있겠습니까. 냉엄한 목소리가 그들에게 묻는다. 뒤늦게 따라온 차연이 한숨을 삼켰다.

 

여자는 교황청 내부에서 일했었다고 한다. 뱅드로가 은퇴를 선언하기 전날, 그가 교황의 처소로 향하는 것을 목격했으며 직후 복도에서 들어서는 안 될 소리를 들었다고. 그리고 바깥으로 나온 것은 뱅드로가 아닌 이단심문관 샤리베르뿐이었다는 진술이 이어졌다. 그들이 교전했다는 뜻이 맞습니까? 노아가 딱딱한 어조로 재차 물었다. 여자는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직접 본 건 아니지만, 분명히 들었어요. 차연은 말을 아끼려는 듯 입을 꽉 다문 그녀를 가만히 바라본다. 시선은 조각상처럼 제자리에 굳은 노아에게로 다시 옮겨 간다. 그는 분명 혼란스러워 보이지만 아직 무너지지는 않았다. 이 정도의 의구심으로는 부서지지 않는 세계에서 살고 있는 것이리라. 하지만 차연은 내막을 금세 짐작할 수 있었다. 그의 선배가 이슈가르드를 떠났을 때 어떤 공표가 있었는지를 생각하면, 진실 또한 쉽게 움켜쥘 수 있는 것이다. 선택은 이제 노아의 몫으로 남겨졌다. 그리고 차연은 그가 무엇을 고를지 또한 알 수 있다. 안절부절못하고 선 남녀를 향해 노아가 손짓한다. 이제 떠나도 좋다는 뜻이었다. 아무렇지 않은 듯 저를 챙겨 마을로 들어서려는 노아에게, 차연이 말했다. 그리 힘들어 보이지는 않는군. 노아의 눈썹이 들려 올라간다. 무엇을 힘들어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흔들림 없는 표정에 차연은 괜스레 심사가 뒤틀린다. 보고 싶은 것만을 보며, 믿는 것만을 믿는 자. 차연이 웃는다. 그런 방식으로 사는 것이 편하다면야. 그 말에 노아가 미간을 좁혔다. 그러나 차연의 입가를 비틀던 미소는 부지불식간에 사라지고 없다. 조각처럼 틈없이 매끄러운 낯을 마주하는 순간, 노아는 열의를 잃는다. 사무적인 답변이 출력된다. 고결한 성직자, 그중에서도 존엄하신 교황 성하를 의심하는 것은 죄악입니다. 그의 원칙은 변하지 않는다. 차연이 다시 말한다. 그렇다면 저 목격자들은 이단 혐의자가 되겠군. 이번에 노아는 곧바로 대답을 내어 놓는 대신 얼마간 뜸을 들인다. 생각 끝에 도출되는 결론은 그래 봐야 단순한 것이다. 그들의 착각에 불과할 수도 있겠지요. 분명 무언가를 오인했을 것입니다. 속 편한 대꾸에 차연은 할말을 잊는다. 동요한 기색조차 없이 덤덤한 노아의 얼굴을 더 바라보고 싶지 않았다. 고개를 틀어 공터를 향한 차연은 한동안 침묵을 지킨다. 뻔한 진실이 코앞에 놓여 있는데도 손을 뻗어 움킬 마음이 없다니. 하지만 결국 그 자신이 원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소용도 없는 것이다. 차연은 노아를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의 계획을 묻는다. 노아가 기다렸다는 듯 읊기 시작한다. 나직한 목소리로 하나씩. 차례로 뱉어내는 계획들에 차연이 귀 기울인다. 우선 당신의 혐의에 대한 검증이 남았다는 것, 잊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성도 가까이에 도사린 위험 요소 역시 좌시할 수 없겠지요. 조사가 필요할 겁니다. 마지막으로, ……그분의 지난 행적 또한 되짚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대답이 돌아오는 것은 빨랐으나, 말을 마친 노아는 정작 길을 잃은 듯한 표정이 된다. 한꺼번에 닥친 문제가 너무 많았다. 그것들 모두가 제각각 다른 의미에서 중요했기에 하나라도 등한시할 수 없었다. 이단심문관으로서, 이슈가르드의 기사로서. 무엇보다 오래 소홀했던 노아 드 제멜이라는 개인으로서 역시.

차분히 생각을 정리 중인 노아의 옆에서, 차연은 입을 꾹 다문 채 자리를 지킨다. 어떤 제안도, 조언도 섣불리 꺼내 놓을 수 없었다. 물론 진솔한 심정으로는 ‘그 뱅드로’에 대한 조사부터 시작하라 등을 떠밀고 싶기도 했지만. 그의 주의를 제게서 돌리려는 것이기도 했고, 또한 제가 해내지 못한 일을 그를 통해 이루려는 욕심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만큼 부질없는 일이 또 있을까. 그 대상이 다른 누구도 아닌 노아 드 제멜이라면 더더욱. 여기서 조금 더 정직해지려면, 차연은 여태 제가 개입했던 사건 중 무엇도 결코 좋게 마무리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려야 한다. 이번에는 그런 운명을 피할 수 있을까, 모두를 위해 최선의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을까. 묻는다고 한들 답해줄 이 누구도 없지만. 머릿속 한구석에는 어렴풋이 공인의 웃는 얼굴이 있고.

노아는 아직 묵묵하다. 거듭되는 신중은 외려 그에게서 갈피를 빼앗아 간다. 인내를 가지고 기다리던 차연이 한참 후에야 노아를 향해 입을 열었다. 조사를 나서겠다면 도울 의향이 있네. 나에 대한 검증은 동행하는 시간 동안 겸할 수 있겠지. 끝내 진실을 탐하려는 욕망이 앞선 것이다. 마지막으로, 단 한 번만 더. 누군가를 제대로 돕고 싶었다. 그뿐이었다. 나머지 몫은 전부 노아의 앞으로 남겨져 있다. 차연은 노아의 일을 대신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었고, 자신의 실패를 대신해 그가 성취를 이뤄내기를 바라는 것 또한 아니었다. 애초에 그들은 어떤 의미로 묶인 사이도 아니었으므로. 차연은 단지 그가 정답을 찾아가는 과정에 약간의 도움만을 주려는 것이다. 그의 푸른 눈이 저를 주시하는 동안, 저 또한 그를 지켜볼 수 있으리라. 저 목석 같은 심문관이 마침내 모든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어떻게 행동할까. 한낱 인간이 오롯한 주체가 되어, 깊이에 파묻힌 진실을 파헤치는 일이 과연 가능할까. 일종의 시험이었고 동시에 실험이었다. 차연은 일방적인 관찰의 대상으로 남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노아의 선택지 하나를 기꺼이 지워 주는 것이다. 제게 돌아오는 이득이랄 것은 무엇도 없을 테지만, 차연은 아직 그의 선배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답은 어쩌면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것. 역경에도 포기 않고 진실로 향하는 것만이 스스로 세운 목표이자, 또한 모든 인간의 가장 첫 번째 의무이기 때문에.

허공의 먼 지점에 박혀 있던 노아의 시선이 차연에게 가 닿는다. 그의 의중을 완전히 꿰뚫을 수 없어 미간을 찡그리면서도, 노아는 그사이 제 기분이 기묘하게도 안정되었음을 느낄 수 있다. 차연의 은백색 눈동자가 교교히 빛난다. 찜찜한 구석이 조금도 없다고는 말하지 못하겠으나, 적어도 노아는 차연이 그저 도주를 위해서라면 이토록 번거로운 길을 택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가 정말 도움이 될까. 은인의 죽음, 그 내막을. 기어이 걷어낼 수 있을까. 이단을 데리고서 정교회의 내막을 파헤친다니 도무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지만. 이 또한 검증되기 전까지는 누구도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문제였다. 노아가 주저하는 사이 먼동이 트기 시작한다. 대지가 온통 아스라한 광명으로 물든다. 노아는 이곳에 더 버티고 서 있어 봐야 달라질 것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무언가 새로 시작하기에 이런 아침보다 적합한 시간은 없었다. 망설임은 도무지 노아의 성정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마른 땅 위에 정물처럼 자리하던 노아가 천천히 걸음을 떼었다. 차연은 말없이 그 뒤를 따른다. 만족감으로 피어오른 미소가 입가에 단단하게 어룽졌다.

 

노아가 가장 먼저 꺼내든 것은 대륙의 지도였다. 빳빳한 종이가 탁상을 뒤덮으며 펼쳐진다. 갑주에 뒤덮인 손끝이 몇 개의 지역을 차례로 짚었다. 지금 그들이 머물고 있는 꼬리깃 마을부터 시작해, 커르다스 중앙고지를 넘어가 심판의 문으로. 그다음 목적지는 당연히 성도 이슈가르드의 내부일 것이다. 차연은 숨을 한 번 고른다. 마디가 분명히 도드라진 손이 용머리 전진기지를 가리켰다가, 곧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입성하기 전 이곳에 먼저 들르는 게 좋겠네. 아도넬 점성대의 관찰 기록을 확인할 수 있겠지. 차연의 손가락 끝을 바라보며, 노아가 뒤늦게 고개를 끄덕인다. 협조를 구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군요. 누그러진 기세로 지도를 살피는 노아를 향해, 차연은 말을 마저 맺는다. 협조는 약속하지. 그러나 나는 성도에 들어갈 생각이 없네. 순간 노아의 표정이 얼어붙는다. 하지만 차연은 전혀 굴하지 않았다. 곧은 시선이 서로 부딪힌다. 한 점 흔들림 없이 마주하던 눈과 눈, 먼저 고개를 돌린 것은 노아였다. 지금 입씨름을 해 봐야 무의미한 소모전에 불과할 뿐이다. 상황이 닥쳤을 때에 다시 생각해도 좋을 일이었다. 지도를 가지런히 접어든 노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나씩 해결하도록 하지요. 이 마을에 다른 목격자가 더 있는지부터 확인하겠습니다. 군더더기없는 동작을 바라보던 차연도 그를 따라 몸을 일으킨다. 탐문이 순조롭길 비네. 곧 나갈 채비를 하던 노아가 의아한 기색으로 돌아보았다. 함께 가시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차연은 짧게 고개를 젓는다. 이후 거점을 불편 없이 탐색하기 위해서는 준비가 필요했다. 이를테면 얼굴을 가려줄 만한 장비라든가. 먼저 가게, 한 시간 정도면 충분하니까. 에테라이트 앞에서 만나지. 차연의 목소리 또한 여지 없이 확고하다. 그를 물끄럼 바라보던 노아가 머잖아 등을 돌렸다. 어쩐지 그에게 말려드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제 와서는 불필요한 잡념일 뿐이다. 새카만 뒷모습이 금세 저만큼 멀어져 갔다. 잠시 자리를 지키던 차연은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노아에게 당부했던 대로, 필요한 것들을 마련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얼마 뒤 단출한 로브 차림으로 문간을 나서는 차연의 얼굴에는 상앗빛 반가면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제 막 아침을 맞은 마을은 바삐 오가는 사람들로 활력 넘치는 모습이다. 노아는 어느 곳의 문부터 두드려야 할지를 잠시 고민한다. 일반 주민을 붙잡고 시간을 낭비하느니, 차라리 도처의 상점이나 초코보 대여소로 곧장 향하는 편이 도움이 될지 몰랐다. 목표를 정한 뒤로는 모든 것이 거침없다. 절차는 간단하다. 형식상의 인사와 함께 소속과 이름을 읊고, 창천기사단의 총장이었던 그 뱅드로와 비슷한 생김의 인물이 이곳을 지난 적 있는가를 묻는다. 질문과 맞닥뜨린 사람들은 하나같이 얼굴을 굳혔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실없는 웃음을 터뜨린다. 멋쩍은 표정으로 전혀 아는 바가 없다고 대답하는 그들에게서는 못내 미안해하는 기색마저도 보인다. 시작부터 소득이 있을 리가. 애초 기대를 걸지 않았다는 듯, 무감한 낯으로 목례한 노아는 계속해서 걸음을 옮긴다. 다음 목적지로, 또 다음 목적지로. 그러나 마을의 절반을 돌아볼 때까지도 수확은 없다. 에테라이트 앞에 기다리고 있던 차연이 광장을 가로질러 걷던 노아를 붙잡아 세웠다. 그를 바로 알아보지 못한 노아는 눈을 두어 번 깜박인 후에야 아, 짧은 탄성을 내뱉었다. 가면 뒤의 차연이 묻는다. 수확은 없었나? 노아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한다. 반대편 주민들도 마찬가지겠군. 하지만 미리 단정짓는 차연의 말에는 고집스레 대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남김없이 확인하는 것이 좋겠지요. 마저 돌아볼 작정입니다만……, 동행하시겠습니까. 차연은 제게 향하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받는다. 희미한 웃음기를 머금은 입술이 곧 열린다. 이런 모습으로는 외려 눈에 띌 텐데, 괜찮겠나. 완곡한 거절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를 말없이 바라보다가도, 노아는 결국 별다른 불만 없이 수긍한다. 그렇다면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앞으로 한두 시간이면 출발할 수 있을 겁니다. 차연은 선선히 손을 흔들어 그를 배웅한다. 그렇게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면서는 다시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오직 노아의 일이라고. 그가 짊어진 몫이고, 그만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고. 이렇듯 부러 거리를 두려는 심산까지 그가 꿰뚫어볼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는 지나치게 곧고 우직한 면이 있고, 어차피 조력하는 입장일 뿐이라는 것을 여러번 못박았으므로.

차연은 적당한 구석에 걸터앉는다. 익숙잖은 가면이 답답하게 느껴질 법도 한데, 이상하게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마침내 새로운 장으로 혹은 시작하는 장으로 넘어온 것 같다는 생각. 이제 와서는 너무 늦은 감상이지만……. 그래도 무언가 걸어 보고 싶다면. 분에 넘치는 욕심일까.

아직은 모르는 일이다. 차연은 주변에 오가는 사람들을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바라본다. 저들에게도 각자의 지켜낼 믿음이 존재할 테지. 노아는 지금 낯선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고 있을 것이다. 그 사무적인 태도라면 쉽게 의심을 사지는 않겠지만. 차연은 느리게 숨을 들이쉬고 다시 내쉬면서, 그의 기분을 잠시나마 짐작해 본다. 그도 지금 필사적일까. 수면 아래 드러나지 않은 것들이 어지럽게 요동치고 있을까. 무엇이 그를 옭아매고 그의 눈을 가리우는가. 올곧게만 뻗어지는 검이라면 좋으련만. 여전히 정리되지 않은 문제들이 있었으나, 앞으로 이어질 여정이 길었다. 노아를 기다리는 동안 차연은 잠깐이나마 머리를 비우고 한껏 시원한 공기를 호흡한다. 닥치기 전에는 미리 알 수 없는 것들. 그러나 끝에는 반드시 원하던 것을 찾아내고 말 테니까. 섣불리 걱정하지 않아도 좋았다. 선명히 고동치는 심장의 박동이 불쾌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시간은 천천히 서두르며 흘러간다. 약속된 기다림이 끝나면, 저만치 돌아오는 노아의 흐린 얼굴이 보인다.

10

 

함께 이동하는 것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둘은 유독 데면데면한 태도를 유지했다. 내색하지 않으려 의식하고 있음에도 노아의 얼굴은 평소보다 경직되어 있었다. 한눈에도 착잡해 보이는 그를 차연도 굳이 건드리지 않았다. 어색한 기류에도 불구, 목적지만큼은 불변하는 것이다. 심판의 문은 한참 멀리에서도 그 윤곽을 또렷하게 드러내고 있다. 가까워질수록 거대해지는 저곳에 닿기까지 얼마가 더 걸릴까. 이번에는 사소한 수확이라도 얻어내야 하는데. 노아에게서 못내 불편한 기색을 읽어내고도 차연은 아는 체하지 않는다. 긴장마저도 그의 몫이었다. 곁에서 동행하는 지금,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는다면 거짓이겠지만. 답안은 이미 짐작 가능한 것이었고 채점은 차연에게 맡겨진 일이 아니었으므로. 차연은 다만 자리를 지킬 뿐이었다. 노아가 물러서거나 그러지 않거나, 도망치거나 뛰어들거나 어느 쪽이든. 그의 결정을 끝내 목도하기 위해. 그것이 제게 어떠한 위안이 될는지만큼은 명확히 알지 못하면서도.

잡념이다. 노아는 그의 대리인이 아니었다. 차연은 저보다 살짝 앞서 가는 노아의 옆얼굴을 쳐다본다. 처음의 도자기 같던 모습은 간데없고, 낯에는 온통 미세한 균열이 번져 있다. 그것은 단지 왼뺨을 가로지르는 흉터에서 기인하는 착시가 아닐 텐데. 왜 그때는 보이지 않았을까. 차연의 물끄럼한 시선을 감지한 노아가 뒤를 흘긋 넘겨다보았다. 용건이 있느냐고 묻는 듯한 눈빛이다. 차연은 문득 실소한다. 잠시 깊어지는 듯하던 노아의 눈동자는 다시 나아갈 곳을 향해 돌아간다. 그에게서 뒤늦게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무엇이 우스워 그러십니까. 차연의 대꾸는 답잖게 산뜻하다. 그래서 웃은 것이 아니네. 새삼스러웠을 뿐이라고 하지. 노아는 그것이 이 기묘한 동행에 대한 답변임을 어렵지 않게 알아챈다. 절반만 드러난 그의 낯빛이 한결 더 다단해진다. 차연은 이제 그것을 읽을 수 있다. 명백히 심란해 보이는 모습에 다시 헛웃음이 난다. 그에게 고민거리를 더 얹어줄 요량은 아니었으니 금세 거두기는 했지만. 노아는 침묵을 지킨다. 차연이 뒤집어쓴 가면을 벗겨 두고 싶다는 생각만이 스쳤을 뿐이었다. 언뜻 불공평하지 않은가. 그러나 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말을 잃어버린 채로, 둘은 꿋꿋이 나아간다. 멀리 아스라하던 심판의 문이 차츰차츰 구체적인 형상을 얻으며 선명해지고 있었다. 관문의 이름다운 그 위용은 분명했으나 둘 중 누구도 압도당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도착했군요. 노아가 중얼거린다. 생각만큼 오래 걸렸다고도, 생각보다는 금방이었다고도 여길 수 있었다. 반 발자국 비껴 서 있던 차연은 묵묵히 차림새를 가다듬는다. 로브의 모자를 매만지고, 가면을 고쳐 쓰고 나면. 그를 기다리느라 멈춰 있던 노아의 걸음이 자리를 지키고 선 경비병에게로 곧장 향한다. 이슈가르드의 이단심문관, 노아 드 제멜입니다. 최근 일 년간의 출입 기록의 조회에 협조해 주시겠습니까. 자리에 붙박여 있던 경비병은 경례와 함께 짧은 양해를 구한다. 상급자에게 우선 보고하겠다는 대답에 노아가 가볍게 고개를 까닥였다. 그들의 대기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짧았다. 안내를 따라 걸음을 옮기며, 둘의 눈빛은 좀 더 날카롭고 신중하게 변모한다. 구태여 첨언하지 않았으니 상세한 목적을 확인하려 들 일은 없을 것이다. 이단심문관이라는 직책은 그런 것이라고, 차연은 문득 입맛이 쓰다. 이런 상념이야말로 불필요한 사감이나 다름없을 텐데. 다행스럽게도 가면 뒤의 사소한 변화는 바깥에서 쉬이 알아챌 수 없는 것이다. 차연은 노아를 따라 걷는다. 삭막한 집무실에 당도하면, 기다리고 있던 병사가 눈치를 살피며 허겁지겁 서류 뭉치를 내민다. 노아는 망설임 없이 그것을 받아들어 확인한다. 정확히 일 년 전의 기록부터 발췌된 것이다. 잠시 자리를 비워 주십시오. 얼핏 명령조처럼 들리는 말투였으나 이렇다할 반박은 따라붙지 않았다. 곧이어 조용히 문이 닫힌다. 집무실에는 노아와 차연만이 덩그러니 남는다. 자연스레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노아는 가장 아래쪽의 문서부터 확인하기 시작한다. 필요한 날짜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으므로,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거침없던 노아의 동작은 목표와 마주치는 순간 뚝 멎는다. 차연은 이 모든 일련의 과정을 곁에서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결과야 뻔하겠지만. 필요한 기다림이었다.

없군요. 노아가 나직히 씹어뱉는다. 서류를 모아 쥐고 있던 손이 책상 위에 흩어진다. 펼쳐지는 종잇장들 사이 빼곡해야 할 날짜는 정확히 하루가 비어 있다. 이렇듯 기록이 누락되었다면 별지를 끼워 두었을 법도 한데. 명백히 의도된 실수겠지. 담당자를 불러 추궁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별로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상부에 보고가 들어갈 위험은 감수할 필요 없을 테니까. 짧게 숨을 내쉬고, 노아는 다시 책상을 정돈한다. 어렴풋 예상은 하고 있었으나 막상 직면하는 건 다른 이야기였다. 슬금슬금 고개를 디밀기 시작하는 무력감을 애써 모른 척한다. 서류를 구겨버리지 않으려면 약간의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노아가 자리에서 일어남과 동시에 시선을 거둔 차연이 내색 없이 무상한 투로 말했다. 이제 점성대로 가지. 그곳까지 돌아본 후에 쉬는 편이 좋겠네. 노아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집무실을 나서 입구까지, 깍듯한 자세로 배웅하는 병사들에게는 눈길을 주지 않았다. 차연이 그를 대신해 가볍게 묵례했다. 들이쉬는 공기가 유독 텁텁했다.

 

노아는 조금 천천히 걷는다. 마음만 조급하다고 해결되는 문제는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제대로 깨닫게 되었으므로. 또한 이 모든 노력에 어떤 소용이 있는지 약간의 의구심이 생겨나고 있기도 했다. 그들이 작정하고 진실을 숨기고자 한다면, 나는 무슨 일을 할 수 있는가. 이단심문관이라는 이름마저도 거대한 권력 앞에서는 한없이 가벼워질 수 있는 것이었다. 상념에도 불구하고. 노아의 곧은 자세는 좀처럼 흐트러지지 않는다. 그는 속도를 유지하며 나아간다. 곁에서 함께하는 차연의 걸음도 자연히 느려진다. 흙길을 밟는 소리만 한참 이어졌다. 침묵을 깨뜨린 것은 차연이었다. 너무 상심하지 말게. 대수롭잖게 던져진 말은 그저 형식에 불과한 위로인지도 몰랐다. 노아가 그렇게 받아들인대도 상관 없었다. 그럴 수밖에. 하지만 어느 정도는 분명 진심이었다. 노아가 벌써부터 포기하리라 생각한 것은 아니었으나, 지금 그 기분이 어떨지는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에. 구태여 괜찮느냐는 물음을 겨냥하여 던지지 않은 것은 차연 나름의 배려인지도 몰랐다. 기왕 함께하게 되었으니 신경을 좀 쓰는 편이 좋겠지. 노아가 잠시 차연을 돌아보았다. 의중을 알 수 없는 눈빛은 금방 거두어진다. 괜찮습니다. 언뜻 듣기에는 사무적인 대답이다. 희미한 미소 같은 것이 차연의 입가에 번졌다. 그 목소리가 평소보다 약간은 누그러져 있다는 것을 알았다. 기묘한 동행이군. 이번에는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뱉는 대신 속으로만 되뇐다. 노아는 더 첨언하지 않는다. 계속 걸을 뿐이다. 차연은 한결 가벼워진 목소리로 말한다. 점성대에서도 소득이 없다면, 그다음엔 성도로 들어갈 셈인가. 노아가 돌아보지 않고 대꾸했다. 그렇습니다. 차연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다. 섣부른 응원보다는 아예 말을 아끼는 게 나았다. 노아 역시 입성에 대한 이야기는 미뤄 두려는 것 같다. 다시 발걸음 소리만 이어진다. 적막이 불편하지 않았다. 둘 사이의 기류는 첫 대면에 비해서는 말도 안 되게 무르다. 이런 시간이 오리라고 상상이나 했던가. 무언가 기대하는 일은 더 이상 힘들다고만 믿고 있었는데.

생각이 많은 것은 노아도 마찬가지다. 머릿속이 이처럼 어지러웠던 적은 드물다. 익숙지 않은 두통이 머리를 따끔따끔 죄어 오고 있었다. 아픔이야 경미한 것이었으니 결국은 기분의 문제였다. 증거를 찾는 일이 과연 중요할까. 그것들이 전부 의도적으로 말소된 후라면, 그렇게 무엇도 남아 있지 않다면 설령 일말의 가능성을 발견해낸다고 한들 없는 것으로 치부당하고 말 텐데. 노아는 문득 제멜의 저택에 잠시라도 들러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차후의 일이 어떻게 흘러가든 한번쯤은 어머니를 찾아뵙고 근황을 전하는 것이 좋을 터였다. 아니, 낱낱이 고하지 않아도 이미 알고 계실지 모른다. 노아는 저를 따라 걷는 차연의 기척을 느낀다. 지나치게 앞서거나 뒤처지지 않도록,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교차하는 발걸음을.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까지는 짐작할 수 없었지만. 노아는 이제 와 새삼스러움을 느낀다. 차연이 말했던 것이 바로 이런 감상일까. 그의 존재가 더는 꺼려지지 않았다. 기어코 어둠을 밝히려는 희미한 반딧불처럼……. 이상했다. 그가 왜 자신을 도우려 드는지, 노아는 지금 이 순간에도 완전히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왜 이상을 포기하지 않을까. 자신의 일관된 믿음을, 어쩌면 틀렸을지 모를 그것을 비웃고 조롱하며 떠난대도 그만일 텐데. 시험일까. 단순히 이타심에서 비롯되는 관용일 수도 있을까. 그러나 모든 현인이 너그럽거나 관대한 것은 아니다. 차라리 얄팍한 동정에 불과하다면 오히려 그편이 납득하기에 쉬운 답안일 거라고. 노아가 번잡스레 뻗어나가던 생각을 갈무리하는 것보다도 아도넬 점성대가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더 빨랐다. 그럼에도 하나 확실해진 마음이 있다면 이제 차연을 조금은 신뢰할 수 있을 듯하다는 결정 하나였다. 적어도 그들이 합의한 목표를 달성하기까지는 등을 맡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엉망으로 엉켜 있던 머릿속 실타래들을, 노아는 그냥 잘라내 버리기로 한다. 흘러넘치던 생각이 멎는다. 마침내 노아가 차연을 돌아다 본다. 이제부터는 당신이 안내할 차례라는 듯이. 시선이 마주 부딪히고, 차연은 기다렸다는 듯 가면을 벗으며 느리게 미소짓는다.

11

 

주변은 어느새 어둑하다. 짙게 깔린 어스름을 밝히느라 수십 개의 횃불이 스스로를 태우고 있었다. 진입은 생각 외로 수월했다. 차연의 얼굴을 알아본 경비병들은 주춤대다가도 뒤편의 노아를 마주하고서는 별다른 의구심 없이 스스로 길을 열었다. 구차한 소개 없이도 이단심문관을 알아볼 수 있는 이들인 것이다. 그러고도 줄기차게 따라붙는 시선이나 속삭임 같은 것은 이제 와 신경쓸 바가 아니었다. 야트막한 계단들을 지나 점성대 앞에 다다른 차연은 두꺼운 문을 망설임 없이 밀고 들어간다. 노아가 그를 따라 몸을 안으로 들였다. 벽면을 따라 가득 늘어선 나선계단은 언제 마주해도 사람을 압도하는 감이 있다. 점성대의 내부는 서고로 빈틈없음에도 불구하고 살풍경하다. 어룽지는 불빛 사이로 앙상한 책장의 백대가 드러났다. 한껏 삭막하던 분위기는 차연의 등장과 함께 한층 더 날카로워지는 듯하다. 서류철 사이에 파묻혀 있던 연구자 하나가 일행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그는 깍듯한 인사와 함께 차연의 동행에 대해 조심스레 묻는다. 이단심문관이 여기서 무얼 찾고 있냐는 질문이었을 테지만, 등 뒤에 비껴 서 있던 노아는 익숙한 문장만을 곱씹을 뿐이다. 거듭 말할수록 모호해지는 기분으로. 도무지 몇 번째인지도 모르게 된 관례다. 이슈가르드의 이단심문관이며 제멜 가의 기사, 노아 드 제멜입니다. 협조를 부탁드릴 수 있겠습니까. 다가왔던 연구자는 아, 짧은 탄성만을 내뱉는다. 노아의 냉엄한 표정을 올려다보고서는 도저히 되물을 자신이 없었다. 복잡한 문제는 책임자에게 떠넘기는 것이 낫겠다는 판단 아래, 일행은 그의 인도를 따라 겹겹의 계단을 오른다. 모두가 말없는 가운데 공간을 울리는 발걸음 소리만이 또렷하다. 어째선지 차연은 가면을 벗어낸 맨얼굴이 허전하다. 그는 괜스레 손을 들어 마른 뺨을 쓸어내린다. 폴르모르를 보는 것이 얼마만이던가. 그가 저를 환대해 주리라는 기대 따위를 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고작 가면 뒤에 숨은 채로 그와 마주할 수는 없었다. 진실을 목표하는 노아를 곁에 둔 지금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이미 그의 등을 떠밀어 놓고서 혼자 도망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만약 폴르모르가 적의를 드러낸다면, 차연은 다만 노아의 표적이 자신이라고 둘러댈 심산이었다. 어쨌거나 차연을 구속한 혐의는 아직 벗겨지지 않은 것이었으므로.

그들은 머잖아 최상층에 도달한다. 거기에는 침침한 낯으로 차연을 맞는 폴르모르가 있다. 그 책임자는 구차한 인사치레를 이어가는 대신 차연에게 방문의 목적을 묻는다. 무엇이 필요하냐는 물음에 차연의 낯 위로 흐린 웃음이 비친다. 관찰 기록을 좀 확인하고 싶네. 최근 일 년이면 충분해. 이쪽의 이단심문관에게도 중요한 일이니…… 부탁하지. 눈앞의 폴르모르는 명백히 “이단심문관”이라는 말에 동요하는 듯 보인다. 내색하지 않으려 해도 미세하게 경련하는 얼굴의 떨림까지 감출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기록을 순순히 내어 주려는 걸까, 그는 손짓으로 저만치 물러나 있던 조수를 부른다. 원하는 걸 찾으신다면 좋겠군요.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어딘지 음울한 데가 있다. 차연은 대답 없이 흐린 미소를 머금는다. 머잖아 월별로 구분된 열두 개의 문서책이 그들의 앞에 묵직한 소리를 내며 쌓인다. 차연은 선뜻 자리를 비켜 주는 책임자의 뒷모습을 얼마간 바라보았다. 멀어져 가는 발걸음 너머로 그가 조수에게 무언가 지시하는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멀리 뭉개지는 문장들 사이에 이단심문관이라는 단어 하나만은 또렷했다. 밀고를 걱정해야 하는 때일까, 그러나 차연은 불안하지 않았다. 그에게 다른 의도가 있었다면 애초 기록의 열람부터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노아는 주위가 한적해지기 무섭게 손을 뻗어 서류철을 움켜쥔다. 목표하는 날짜를 찾아 거침없이 종잇장을 넘기는 모습은 심판의 문에서 보았던 그것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당연하게도. 뱅드로에 관해 남겨진 기록은 단 한 줄도 찾아볼 수 없다. 노아의 입술 틈으로 느른한 한숨이 샌다. 이 탑에 머무는 사람들을 수소문한들 다른 대답을 기대할 수 있을까. 결과야 이미 정해진 것이겠으나. 마른세수하는 노아를 보며 차연이 말한다. 계속 탐문할 거라면 더 늦기 전에 다녀오게. 폴르모르에게 직접 묻는 것보다야 그편이 낫지 않겠나. 머리를 감싸쥐고 있던 노아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겠습니다. 딱딱한 대답이었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노아는 차연을 기다리지 않고 계단을 돌아 내려가기 시작한다. 어둑한 회랑 곳곳을 밝히려 내걸린 등불이 그의 눈에 유독 거슬린다. 어쩐지 그것들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아를 보내 놓고 나서야 차연은 기지개를 쭉 편다. 자리에 잠시 앉을까 하다가도 결국에는 다시 등을 돌려 계단을 오른다. 꼭대기의 관측소까지 가려는 것이다. 길목의 점성술사에게 가볍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 조금 더 걸어 올라가면. 중앙에는 거대한 망원경과 사다리가 놓여 있다. 차연은 그것을 들여다보는 대신 외곽에 대충 자리를 잡는다. 완전히 새카맣게 뒤덮인 하늘 위로 총총히 박힌 별들이 빛나고 있었다. 복잡한 심경과는 다르게 날이 무척이나 맑다. 별자리를 세어 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모처럼 상쾌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던 차연의 낯이 차츰 복잡해진다. 이곳을 떠나면 노아는 이제 성도에 입성하게 될 텐데. 함께 가는 것을 재차 거부한다고 해서 과연 그가 받아들여 줄까. 그와 지내는 시간 동안 차연은 언제고 기분이 묘했다. 그처럼 곧고 그리하여 부러질 것만 같은 사람은 본 일이 없었다. 무엇을 하든지 탐탁찮았던 시절을 지나, 그에 대해 모종의 기준이 생긴 지금에 와서라면. 그 또한 차연 자신을 어느 정도는 신뢰하고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은 기대를 걸어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그와의 사이에 모든 것을 덮어놓고 진솔한 대화를 나눈 적은 없는 것 같다. 여태껏 그럴 필요가 없었다고 말하는 것이 옳겠으나. 그럼에도 여기까지 함께 올 수 있었다니, 그저 이상하다는 말밖에는 붙일 수 있는 표현이 없었다. 보석 가루를 엎지른 듯 어지럽게 반짝이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으려면 온 사방의 풍광이 소용돌이치며 저 아득한 하늘 위로 빨려들어가는 듯한 착각이 든다. 등을 제대로 기대고 앉아 있는데도 어지러웠다. 아름다운 밤풍경 아래에서 차연은 문득 공인이 그립다. 그 애는 지금쯤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안전한 곳에 있기는 할는지. 차연은 겨우 정신을 차리고 시선을 밑으로 내린다. 그는 곧 저만치에 우두커니 선 노아를 발견한다. 군데군데 타오르는 횃불의 빛이 그의 얼굴에 음영을 덧칠하고 있었다. 이제 슬슬 숙소에 들어가야 하는 시각이다. 차연은 재깍 자리에서 일어난다. 무엇 때문일까, 그를 홀로 오래 내버려두고 싶지 않았다. 남은 여정을 위해서는 더 늦기 전에 잠자리에 드는 편이 좋기도 할 터였다.

 

불행히도 개인실 같은 것은 마련되어 있지 않았으므로,둘은 여러 개의 침대 사이에 적당히 짐을 올려놓고 몸을 부려야 했다. 선객이 없는 것이 그나마 다행인 일이었다. 단출한 여장 곁으로는 벗어 놓은 로브와 가면이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이렇듯 조촐한 숙소에 몸을 들이고도 노아는 눈만 붙이면 그만이라는 듯 아무렇지도 않은 기색이다. 차연은 머리맡의 등불을 끄지 않고 내버려두었다. 모포를 끌어다 덮은 채, 고요 속에서 두 사람이 숨쉬는 소리만이 간간이 들려온다. 정자세로 누워 있던 노아가 먼저 말을 붙였다. 날이 밝는 대로 성도에 들어갈 계획입니다. 마찬가지로 가만히 천장을 올려다보던 차연이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직도 동행할 예정이 없으십니까? 말을 이어나가면서도, 노아의 옆얼굴은 여전히 무감하고 단단해 보인다. 차연은 정해진 대답을 내어 놓는다. 내게 동행은 기대하지 않는 편이 좋겠네. 노아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차연을 보았다. 차연은 머뭇거리지 않고 말을 끝까지 맺는다. 하지만 자네를 돕지 않겠다는 뜻은 아니야. 부탁 하나만 해도 되겠나. 노아의 푸른 시선이 차연을 비껴나 다시 천장을 향한다. 말씀하십시오. 차연이 낮은 목소리로 고맙네, 중얼거렸다. 노아는 재촉하지 않고 다음 이야기를 기다린다. 한동안 조용하던 차연이 곧 다시 입을 열었다. 내게 아들이 하나 있는데, 그 애 이름은 공인이라고 하네. 지난번 상점가에서 잠시 소란했던 일을 기억하나. 노아는 아직 제게 향해 있는 차연의 시선을 느낀다. 그가 느리게, 하지만 확실한 동작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차연은 말을 이어간다. 그 애가 억울한 혐의를 받고 있어. 지금은 이슈가르드에 있다고 하고…… 아들의 안부를 알고 싶네. 링크펄을 전해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 먼젓번 주었던 것에서는 소식이 없어. 차연의 목소리는 제법 침중하게 들린다. 이런 것은 함부로 꾸며낼 수 없다는 사실을 노아는 알고 있다. 그러니 그는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왜 직접 가지 않으십니까. 차연의 대답은 단호하다. 곤란한 상황은 만들고 싶지 않네. 일이 괜히 복잡해지는 것은 자네 역시 피하고 싶으리라고 생각하고. 노아는 차연을 처음 마주쳤을 때를 떠올린다. 제게 쫓기던 그의 등, 그러나 지금은 제 뒤를 지탱하는 등……. 여왕 암살 혐의로 수배된 자가 차연의 아들이었다니. 대번에 거절함이 마땅하지만 노아는 쉽사리 그런 대답을 내놓을 수가 없다. 그것이 차연을 배신하는 일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하면서도 마땅히 쓸만한 대안은 떠오르지 않는다. 차연 또한 자신을 성심껏 돕고 있지 않은가. 정확한 이유를 짚어낼 수는 없지만, 그는 제게 분명히 조력자였다. 따지고 보면 그리 어려운 부탁도 아닐지 몰랐다. 직접 물건을 전달하는 건 우선 차치하고서라도, 그의 아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알아보는 정도라면.

노아는 섣불리 긍정하는 대신 다른 질문을 던진다. 성도가 아니라면 어디로 향하실 작정이십니까. 그러나 이미 팔할의 긍정이었다. 차연은 희미하게 피어오르는 웃음을 삼킨다. 외부 지역을 더 돌아볼 생각이네. 뱅드로가 해로를 통했을 수도 있고…… 가능성은 어디에든 있겠지. 노아가 나직하게 중얼거린다. 그렇습니까. 그러고는 다시 침묵이다. 노아는 언제 눈을 감았을까. 차연이 다시 천장을 바라다본다. 노아에게 조심하라는 경고를 덧붙일까 하다가 그만둔다. 그런 것쯤 어련히 알아서 챙기겠거니, 생각하는 것이다. 은인을 찾아나서는 이단심문관은 특별히 수상하게 여겨질 이유도 없었다. 서로가 눈을 감은 채로, 앞날에 대한 짧은 논의가 끝난 뒤에는. 고요한 숨소리만 드문드문 울린다. 이후로는 깊은 밤의 적막만이 방 안에 가득했다.

 

날이 밝으면 두 사람은 길 앞에서 헤어진다.

차연은 당분간 볼 수 없을 노아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본다. 처음과 달라진 것은 없을 텐데. 오늘만큼은 저 차가운 얼굴이 조금쯤 누그러진 듯하다. 그래도 함께 지낸 시간이 있다고 달리 보이는 걸까. 어렵지 않게 납득한 차연이 앞에 버티고 선 노아에게 링크펄을 건넸다. 노아는 그것을 받아들고 손 안에서 굴려 본다. 저를 향해 조용히 기울어지는 차연의 미소는 지금껏 보아왔던 것 중에 가장 또렷하다. 그의 모습이 오늘따라 생경하게 느껴지는 것은 노아 역시 마찬가지다.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마친 차연은 곧 미련 없이 등을 돌리고 멀어져 간다. 잘 부탁한다거나, 몸조심하라는 말을 구태여 덧붙이지는 않았지만. 작아지는 뒷모습을 보면서도 노아는 계속 상상하게 되는 것이다. 차연의 입가에는 아직도 웃음이 고여 있을지, 아니면 그런 것쯤 진작 날아가 버렸을지. 후자라면 그는 지금 어떤 표정으로 걷고 있을까. 이렇게 사소한 일을 왜 궁금해하는지 알지 못하면서도. 노아는 계속 생각하게 된다. 마침내 그가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한동안 허공을 응시하던 시선을 뒤늦게 거두고, 노아는 잠시 눈을 내리감는다. 입속말로 짧은 기도를 올린다. 차연을,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 남은 여정이 무탈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으나…… 그럼에도 기원해야 했기에. 끝내 바라던 진실을 손에 쥘 수 있기를.

모처럼 바람이 시원했다. 노아는 머릿속 어지럽던 생각들을 갈무리한다. 차연은 그의 몫을 하기 위해 떠났고, 이제 다시 혼자가 된 지금. 노아가 해야 할 일은 무엇보다 명확하다. 성도로 향하는 그의 걸음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다.

12

 

성도는 노아에게 더없이 익숙한 곳이다. 그러한 사실이 오히려 기묘한 이질감을 불러일으켰다. 그가 검을 겨누어야 할 방향이 바뀌었기 때문일까. 하지만 개인적인 감상에 연연하며 지체할 시간 따위 없다. 뱅드로가 머물렀던 장소를 우선 확인해야 했다. 거기에라면 어떤 사소한 단서라도 남아 있을지 몰랐다. 교황청으로 직접 들어가는 것은 아직 섣부르다는 판단 하에, 노아는 과거 뱅드로가 사용했던 외부 거처를 먼저 돌아보기로 한다. 그가 남긴 기록이 어떤 형태로든 분명 존재할 터였다. 일지 같은 것을 발견한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 노아는 괜스레 조급해지려는 마음을 간신히 다독인다. 지난날 저를 돌보아 주던 은인의 얼굴은 기억 속에 차츰차츰 빛이 바래 가는 중이다. 다른 이들에게도 다르지 않으리라고 생각하면 가슴 한켠이 무거운 돌로 눌러 놓은 듯 답답해졌다. 그의 거처는 예전 그대로일까. 그렇다면 그가 생활하던 흔적들도 아직 남아 있을까.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동안 노아는 이런저런 회상으로 마음이 복잡해진다. 단지 그리워한다고 해서 되찾을 수 없는 한때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랬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그 균열의 시작점을 더 빨리 알아챌 수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어쩌면 제때에 그를 구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이제 와 소용없는 상념이 자꾸만 뇌리를 파고들었다.

 

오랜만에 찾은 뱅드로의 처소는 겉보기만큼이나 그 내부도 깔끔하고 단정하다. 이런 상태로 방치된 지 오래인 듯, 사람의 발길이 닿은 흔적은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 주변은 기억하던 모습보다 삭막했지만 세월은 어떤 풍경이든지 곧잘 미화하는 습성이 있으므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곳곳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집기들은 최소한의 청결을 유지하는 중이었다. 정기적으로 관리를 받고 있기라도 한 걸까. 몇몇 커다란 가구 위에는 아예 커다란 흰 천이 덮여 있기도 했다. 최대한의 효율을 추구하듯 깔끔한 모양새로 구성된 내부는 어쩐지 원래 알던 것보다 조붓하게 느껴진다. 이곳에 마지막으로 걸음한 날로부터 그리 긴 시간이 지난 것도 아닌데, 이렇듯 낯설다니. 노아는 천천히 눈을 깜박인다. 확인해야 할 곳은 서재와 침실, 두 군데뿐이다. 문고리를 쥔 손이 잠시간 머뭇댔지만 그마저도 길지 않았다.

서재의 문을 열면 익숙한 종이의 냄새가 훅 끼친다. 그와 함께 가라앉아 있던 잔 먼지가 일어나 공중에 부유한다. 책장 가득 정갈히 꽂혀 있는 서책들은 이전에 알던 모습과 다를 바 없다. 노아의 손이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선 책등을 느리게 쓸고 지나간다. 그것들의 균일한 높낮이가 손가락 끝에 걸린다. 차분하게 이어지던 물결이 어느 틈에 급작스레 어긋나는 순간이 있다. 다른 곳보다 약간 더 벌어져 있는 배치, 그 미세한 간격을 노아는 놓치지 않고 포착한다. 무엇을 끼워 두기라도 한 걸까. 고개를 숙여 들여다보면, 얄팍한 수첩 한 권이 어울리지 않는 모습으로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노아는 그것을 신중히 꺼내든다. 조금 낡은 감이 있는 표지를 넘기면 몹시도 낯익은 필체가 눈앞에 나타난다. 노아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고 주변을 살핀다. 지금 손에 쥔 것이 그가 바라마지않던 목표물임을 본능으로 알았다. 그리고 이것을 찾아내기 원하는 자는 비단 자신뿐만이 아니리라는 사실 또한. 이토록 쉽게 발견되다니 오히려 의심스러울 지경이었지만, 다행스럽게도 주변은 아직 이상이 없다. 노아는 끄트머리에 표기된 날짜를 확인해 가며 종잇장을 넘긴다. 한껏 긴장해 굳어진 손끝이 마침내 적확한 페이지에서 멈춘다. 그리고 노아는 목격한다. 가려진 그 날의 사건 일부를. 읽는다. 교황이 아씨엔과 결탁하여 야만신을 소환하려 했다. 그 문장은 노아에게 곧바로 흡수되지 못하고 얼마간 겉돈다. 노아는 같은 페이지를 수차례 되짚는다. 홀로 묵상한다던 토르당 7세가 그날 흑법의를 입은 괴인과 함께 있었다는 사실과, 또한 그가 소환하려던 신은 할로네가 아니라는 사실을. 몇 번이고 곱씹은 후에야. 노아는 끝내 받아들인다. 비틀리고 이지러지던 문장은 언제 그러했냐는 듯 제자리에 그대로 놓여 있다. 그리고 그것은 명백히 뱅드로의 글씨체였다. 여과 없는 진실이 드러난다. 이것을 읽은 이상 그날의 사건에는 더 이상 어떠한 여지도 없었다. 노아는 묵묵히 일지를 덮어 품 안에 챙겨 넣는다. 다음 행선지가 정해졌다. 꼬리깃 마을에서 들었던 진술의 진위 여부를 확인하려면 필히 샤리베르에 관한 소문을 조사해야 했다. 그의 오른뺨에 새겨진 흉터가 언제부터 나타났는지 짚어야 하는 것이다. 노아가 짧은 숨을 내쉰다. 여기까지 왔다면 이미 정교 측에도 꼬리를 밟혔을지 몰랐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을 시작한 이상, 도중에 그만둔다는 선택지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 것. 여러모로 신경 써야할 일이 많았다. 이대로 정신이 산만해지게 두어서는 안 된다. 집중해야 했다. 노아는 천천히 등을 돌려 서재에서 나온다. 그러고도 금방 떠나기가 어쩐지 아쉬워, 그는 혹시 존재할지 모를 단서를 찾는다는 핑계로 살풍경한 거처를 얼마간 더 돌아보았다. 그리운 목소리가 귓가에 어렴풋 들려오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재차 결심을 다지고, 노아는 다시 바깥으로 걸음을 옮긴다. 그는 마지막으로 눈을 들어 어둑한 거처의 모습을 담는다. 품속에 자리잡은 일지의 무게가 선명히 느껴졌다. 발 딛는 행선지마다 정체모를 그림자가 따라붙고 있었다는 사실을, 노아는 미처 알지 못했다.

 

끈질긴 노력에도 불구하고 진척 없는 날들은 이후로도 계속되었다. 도움이 될 만해 보이는 누구를 붙잡고 물어보든지 대답은 같았다. 노아의 시린 눈길 앞에서도, 기사들뿐 아니라 다른 이들 역시. 마지못해 탐문에 응했던 모두가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였다. 오래전 일이라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다고 얼버무리거나, 그런 것을 갑자기 왜 묻느냐고 반문하거나. 그들의 태도가 가벼웠든 무거웠든간에 결국 충분한 정보를 얻지 못했다는 사실만은 뼈아프게 남는다. 이쯤에 와서는, 솔직한 심정으로, 어쩔 수 없이 노아도 이력이 나기 마련이었다. 여기까지 쉼 없이 달려오고 나서야. 노아는 제가 조금쯤 지쳤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로 한다. 막막함 뒤에 찾아드는 것은 다름아닌 죄책감이다. 어머니를 향한.

한동안 제자리에서 서성이던 노아는 문득 제멜 가에 곧 들러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샤리베르의 흉터에 대해 알아본 뒤에, 그런 다음에는. 어머니를 한번 뵈러 가야겠다고. 자신의 일에 열심을 쏟느라 가문에 너무 큰 폐를 끼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걱정스런 마음이 이제야 고개를 디밀고 있었다. 일단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우선이겠지만. 노아의 다물린 입매가 팽팽하게 경직된다. 그간 바깥을 너무 오래 헤맨 것이 아닐까. 어떠한 소득 없이는 이것을 여정이라고 할 수도 없다. 단지 떠돎에 불과할 뿐. 긴 시간 저택을 떠나 있었으니…… 짧은 보고나마 올리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가. 오후의 여상한 햇볕을 받으며, 자리에 가만히 서 있던 노아는 다시 걸음을 떼기 시작한다. 복잡하게 엉켜든 생각들을 끊어내려 애쓴다. 실타래 같던 잡념이 모조리 잘려나간 자리에는 이제 하나의 이름만이 단정히 버티고 놓여 있다. 라멕 드 제멜. 전대 가주였던 타레송 드 제멜의 딸이자, 머잖아 차기 가주가 되실 분. 그녀의 얼굴을 마주한 날로부터 얼마의 시간이 흘렀던가. 노아는 차근히 되짚어 본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것 같으면서도 까마득한 기분이 든다. 속절없이 거슬러 올라가는 기억의 물살 끝 언저리에 그녀에게서 받았던 격려가 떠오른다.

노아가 제멜의 아들로 거두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평민이라는 신분은 남들 입방아에 오르내리기 좋은 이야깃거리였으므로, 그날 역시도 흔한 뒷담화가 오가고 있었을 뿐이었다. 하나 다른 점이 있었다면 그것이 노아에 관한 비방으로 그치지 않았다는 정도일까. 그날 함부로 라멕의 이름을 입에 올렸던 이들은 새빨갛게 달아오른 낯을 겨우 가리고 도망치듯 몸을 피해야 했다. 아직도 제 앞으로 먼저 나서던 그녀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여자인 탓에 사리분별을 하지 못한다는 헛소리에도 흔들림 없는 정연한 논리로, 그토록 아둔한 자들에게 되려 망신을 안겨주지 않았던가. 노아는 또한 기억한다. 저택으로 함께 돌아오는 길에 그녀가 했던 말들을. 제멜의, 라멕의 명예는 아직 어린 철부지의 입술 같은 것으로는 훼손되지 않는다고 했던가. 그녀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라는 그 말은 분명 종용 아닌 격려인 동시에 노아에게는 제 능력을 보일 기회였다. 그러한 선언이 그에게 조금의 부채감도 남겨주지 않았다면 거짓이겠으나, 노아는 그 모든 일들을 수행하는 동안 조금이나마 기쁘지 않았던 적 없었다.

그러니 한번쯤은 그저 조언을 구하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어떤 대단한 성과에 대한 보고가 아니더라도. 괜찮을지 몰랐다. 그는 어떤 일에도 건성으로 임한 적 없이 노력껏 매진해 왔으므로. 어머니 또한 그러한 사실을 알고 계실 것이었다. 하지만 마음은 생각과 달리 자꾸만 제멋대로 군다. 가슴팍 안에서 펄떡이는 심장의 불규칙한 박동과 발밑으로 기어드는 불안의 희미한 궤적을 애써 모른 체하고. 노아는 천천히 걷기 시작한다. 그의 집을 향해서 간다. 마침내 익숙한 저택의 모습이 눈앞에 나타날 때까지 계속.

 

*

 

제멜의 저택은 변함없는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노아에게는 익숙한 조경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집안을 꾸며 놓은 장식이 아니라 지금부터 만날 사람이 누구인지에 관한 문제였으므로. 시종을 따라 화려한 응접실로 안내받으며, 노아는 답잖게 입 안이 바짝 마른다. 그는 자리에 얼른 앉지 않고 주변을 한 바퀴 돌아본다. 햇살 사이 드러나는 풍경들은 예전 그가 살던 시절에 비해 그리 달라진 데가 없다. 빈틈없는 설계로 꽉 채워진 방 안은 꾸준한 관리로 생활감이 묻어나지 않아 오히려 낯설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감상에 젖을 새도 없이 라멕이 들어선다. 시종의 낭랑한 목소리가 그녀의 도착을 알리고 곧장 물러갔다. 뒤돌아 선 노아가 어머니에게 고개를 숙인다. 일자로 다물려 있던 그녀의 입매가 미미한 호선을 그렸다. 오랜만이군. 단단한 음성에는 분명 나긋한 호의가 깃들어 있다. 노아는 그것을 알아챌 수 있다. 다시 고개를 든 그가 입을 열었다. 진작 찾아뵈려 했습니다만, 일이 예정보다 복잡해진 탓에…… 늦게나마 소식을 전하러 왔습니다. 노아를 가만히 지켜보던 라멕이 가볍게 손을 내젓는다. 이미 알고 있다는 뜻이다. 노아 역시 그러리라고 짐작하고 있었으면서도, 그는 자꾸 말을 덧붙이게 된다. 위험한 일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혹여 폐를 끼칠까 염려됩니다만 우선은 지켜봐 주셨으면 합니다. 모두 끝마친 뒤에 다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습니까. 기실 노아는 지금에 와서도 그가 괜히 어머니의 발목을 붙드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는 것이다. 성도 밖에서 지내는 동안 소득 없는 세월이 길었다. 자연히 가문의 눈치를 신경쓸 수밖에. 특별히 요구되는 증명이 없다고 한들 마음의 부채마저 덜어지는 것은 아니다. 언뜻 보기에는 냉혹하기 그지없는 노아의 얼굴이 미세하게 불안한 기색으로 물들어 있다는 것을, 라멕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구나.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충심으로 여겨져 조금쯤 기특하기도 했다. 그녀는 안절부절못하는 아들의 모습을 모처럼 귀엽게 여겨 주기로 한다. 노아는 언제나 은혜를 갚으려 노력하는 아이였으므로, 그의 일을 구태여 방해할 이유는 없었다. 애초 문제가 되었다면 진작부터 나섰을 것이기도 했다. 라멕이 대수롭잖다는 듯 말한다. 이쪽은 신경쓰지 마라. 너의 덕이 없다고 해서, 내가 목표 하나 이루지 못할 사람은 아니다. 제대로 해결을 볼 때까지 당분간은 네 일에 집중해도 좋다. 노아는 한치의 흔들림도 없는 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다본다. 이런 사람이 가주가 될 수 없다면 감히 누가. 문득 그는 제가 여전히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에 부끄러운 기분이 든다. 그러나 라멕은 이번에도 역시 노아에게 나름의 독려를 주었다. 보은에 매달리는 대신, 그 자신의 일에 온전히 수고를 쏟아도 좋다는 허락. 동시에 그녀의 일은 오롯이 그녀만의 몫으로 남겨두는 그 철벽 같은 성정이 노아에게는 기묘하게도 위로가 되었다. 조금쯤 상기된 채 묵묵히 서 있는 그를 향해 라멕이 다시 말을 걸었다. 이제 교황청으로 가겠군. 무운을 빈다. 깔끔하게 떨어져나오는 문장은 더 이상의 여지를 내어주지 않는다. 그러나 노아에게는 이만큼으로도 충분했다. 어머니의 시간을 더 빼앗을 생각은 없었다. 그는 재차 라멕을 향해 고개를 숙인다. 차 한 잔 함께하지 못했건만 이상하게도 그것이 아쉽지는 않았다. 시종들의 짧은 배웅을 뒤로하고, 그는 천천히 발길을 떼어 마지막 행선지로 걸음을 옮긴다. 차연과도 곧 재회하게 되겠지. 노아는 그에게서 건네받은 링크펄을 떠올린다. 그의 아들에 관한 일까지 고민할 여력은 없었지만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 어머니께 도움을 구할 것을 그랬나, 뒤늦게 떠올리지만 이제 와 후회는 늦었다. 다른 곳에서도 별다른 이야기는 듣지 못했으니 소득은 그야말로 전무하다. 잠깐 느려지려던 노아의 걸음은 곧 제 빠르기를 회복한다. 고개를 털어낸 그가 이제는 교황청을 향해 걷는다. 눈앞에 닥친 일부터 매듭지어야 했다.

13

 

교황의 거처에는 아무나 출입할 수 없음이 당연하다. 그곳으로 향하는 입구에조차도 경비가 늘어서 있고, 대단한 직분 없이는 허가를 얻기 위한 절차 또한 복잡하다. 그러니 뱅드로를 해한 자 또한 이곳의 내부자이리라는 가설은 합당한 것이다. 기사들의 묵례를 받으며 문을 통과한 노아는 제법 복잡한 심경으로 주변을 살핀다. 석재로 마감한 길목은 한눈에 보기에도 깔끔하기 그지없다. 바닥이 이런 재질이라면 분명 뭐라도 흔적이 남았을 텐데, 낡은 창문을 뜯어내듯 손쉽게 교체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 노아는 깨끗하고 너른 통로 대신 기둥 뒤편의 구석진 곳을 돌아보기로 한다. 신중한 자라면 분명 눈에 띄지 않을 만한 자리를 골랐으리라. 섬세하게 조각된 기둥은 더없이 말끔하고 그 주변도 마찬가지이지만. 노아는 좀처럼 안심할 수가 없다. 찜찜한 기분으로 탐색을 이어 가던 노아의 눈에 문득 보답처럼 검은 얼룩이 들어온다. 노아는 그 자리를 향해 주춤주춤 가까이 다가간다. 허리를 숙여 들여다보지 않아도 그것은 분명 무언가 뜨거운 불에 그을린 자국이다. 그리고 노아는 그가 뜻하는 바를 알았다. 이 흔적은 자신의 조국에서, 다른 누구도 아닌 뱅드로가 암살당했다는 표식이나 다름없었다.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던 노아는 애써 안색을 가다듬는다. 이대로 뛰쳐나가기라도 한다면 무언가 목도했다고 의심받게 될지 몰랐다.

바깥으로 다시 걸어나가는 길이 영겁 같기만 하다. 가슴이 불쾌하게 죄어든다. 하필 이곳에서, 하필 그가 죽었다. 자명한 사실인데도 좀처럼 머리가 받아들이지 못한다. 날카로운 햇볕이 머리 위로 따갑게 내려앉는다. 무슨 정신으로 움직여 걷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대로 쭉 걸어, 차연과 다시 합류해야 하는데. 그를 또 무슨 얼굴로 보면 좋다는 말인가. 전에 없던 무력감이 한꺼번에 밀어닥친다. 이런 것이 신의 뜻이라면, 이런 것마저 신의 뜻이라면…… 노아의 걸음이 약간 어그러진다. 그는 멋대로 비틀대는 몸을 억지로 추스른다. 무겁게 내리감기는 눈을 마구 깜박인다. 흐릿한 시야가 약간 맑아진다. 이러다가는 성도를 벗어나기도 전에 무언가 잘못될 것 같다. 외곽으로 빠져나오는 동안 노아는 뇌리를 가득 채운 생각들을 떨쳐내려 애쓴다. 가능하다면 차연과의 만남을 나중으로 미루고 싶다. 곧고 흔들림 없는 그의 모습을 보면 이유 없이 심사가 뒤틀릴 것만 같아서. 그러나 노아의 발은 착실히 걸어, 성도의 중심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다. 여전히 작열하는 태양이 그의 머리 위에서 번쩍인다. 이마에 땀이 맺힌다.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데도 노아는 길을 잃은 것 같다. 발아래에 처박혔던 시선이 뒤늦게 제자리를 찾는다. 깨끗하고 맑은 하늘이 보인다.

차연은 거기에 서 있다.

저만치 서성이던 인영이 노아를 향해 천천히 가까워 온다. 약속했던 장소는 이곳보다 더 멀리에 있었던 것 같은데. 그런 것을 따질 정신도 없이 노아는 어쩐지 뒤돌아 도망치고 싶었다. 그는 주춤대는 걸음을 억지로 옮겨 차연에게 다가간다. 바싹 마른 입안에 우두커니 자리한 혀가 이물감을 불러일으킨다. 꿈을 꾸는 것 같았지만 이것은 더없이 적나라한 현실이다. 이럴 때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답안을, 노아는 알았다. 이 모든 사태 또한 할로네의 뜻으로 이루어졌다 치부하는 것. 신의 거대한 안배를 누가 감히 헤아릴 수 있겠는가. 한낱 인간이……

괜찮나?

차연이 묻는다. 지긋한 시선이 노아를 찌른다. 발밑이 땅과 유리되는 듯 충만한 괴리감 속에서, 노아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는 우선 소지품을 뒤져 차연에게서 건네받았던 링크펄을 도로 꺼낸다. 공인에 관해서는 소득이 없었다는 것을 쉬이 짐작한 차연이 가라앉은 표정으로 그것을 받아 챙겼다. 새삼스레 상심한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지금 노아가 손에 쥐었을 결정이 더 중요한지도 몰랐다. 차연은 먼저 되묻지 않고 노아가 말하기를 기다린다. 잠시 머뭇대던 노아가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나는 신께서 이끄시는 대로 따를 뿐입니다. 이해할 수 없다고 해도, 모두 할로네의 뜻이겠지요. 그를 처음 보았을 때와도 같은 기계적인 대답이 잇새로 출력된다. 동시에 차연이 헛웃음을 터뜨린다. 직접 보고도, 다 알고도 부정하겠다고? 일갈하는 목소리에는 언뜻 분노가 섞여 있다. 여기까지 와서도 눈을 감겠다면 그것은 퇴행이나 다름없다. 무엇이 노아를 그토록 두렵게 하는가. 아니, 그는 두려움이 무엇인지조차 아직 모르는 것 같다. 차연은 그를 단잠에서 깨워야 했다. 다른 이들은 영영 모른 채 살아가더라도, 자네만큼은 똑바로 알고 인정해야 해. 자네의 교리가 진실을 배척하라고 시키던가? 그런 것을 옳은 믿음이라고 할 수 있나? 비난조로 쏟아지는 노성에도 불구하고, 노아는 차연을 제대로 마주보지 않는다. 쉬운 이야기가 아니라고 변명하고 싶었지만. 그는 차연이 겪어온 세월 또한 지난함을 알았으므로. 달리 내놓을 대답이 없었다. 노아가 마른 입술을 짓씹는다. 차연은 물러서지 않는다. 그를 직시할 뿐이다. 미동조차 없는 시선이 노아를 재촉한다. 한참 침묵하던 그가 꺼져 가는 숨을 토해낸다. 날더러 어쩌란 말입니까.

그러나 차연은 노아를 동정하지 않는다. 스스로 판단하게. 냉엄하다 여겨질 정도로 단호한 문장이 그의 입술 밖으로 떨어져나왔다. 부당한 고통에 억눌린 자들의 존재마저 외면할 셈인가. 교황청의 잘못을 알고도 따른다면, 그들의 억압을 방관할 뿐만 아니라 기어이 동참하겠다면. 자네 역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거야. 무엇이 옳고 그른지는 자네가 고민할 몫이네. 그제야 노아는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가 보고도 지나쳤던 불행에 대해. 무고한 자들이 치르지 않아도 되었을 값에 대해. 죽은 은인과 그리고 앞으로도 수없이 고통받게 될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을. 결투재판이 있었던 날, 때마침 난입한 이가 아니었다면 차연 또한 진작 그의 손에 죽어 없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차연처럼 운이 좋을 수는 없었으리라. 몇 명의 죄없는 사람이 억울하게 붙들려 죽임당했을까. 굴레를 끊어내지 않고는 더 많은 이가 희생될 것이다. 이제는 더 피할 수 없었다. 직면해야 했다. 이미 알게 된 후로는 무엇도 돌이킬 수 없다. 실은 이미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입으로는 신의 뜻이라 주워섬기면서도, 그 신을 의심하고 있지 않았던가. 여태껏 믿어온 교리는 허울 좋은 겉치레나 다름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누구를 위하는 대의였나.

적어도 차연이나 뱅드로, 그리고 저와 같은 사람들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간신히 버티던 마음이 끝내 무너져내리는 것 같다. 가슴 속 희미하게 누적되었던 균열의 틈새가 크게 갈라지며 무언가 깨져나간다. 이미 지난 일을 돌이킬 수 없다면 앞으로 벌어질 일이라도 막아야 한다. 차연은 말없는 노아의 얼굴을 응시한다. 그는 몹시도 괴로워 보이고, 꼭 그만큼 후련한 듯하다. 발아래에 처박혀 있던 그의 눈동자가 천천히 제자리를 되찾는다. 그가 차연을 본다. 잠시 말을 고르던 노아가 나지막이 말한다. 미안합니다. 더없이 단단한 그 음성은 차연에게 온전히 가 닿는다. 복잡한 부연 없이도 충분한 한 마디였다.

 

둘은 묵묵히 걸음을 옮긴다. 앞으로의 행선지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우선 인적이 드문 곳을 찾아야 했다. 하루쯤 숲에서 야영하며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고지 드라바니아, 초코보 숲으로 이어지는 길목을 향해 북서쪽으로 걷는 동안. 노아의 얼굴에 드리운 그늘은 차츰 밤의 어둠과 맞물려 희미해진다. 여전히 다단한 낯이었지만 그럼에도 묘하게 홀가분해 보이는 무언가가 있었다. 차연은 별다른 말 없이 계속 걸었다. 노아도 구태여 말을 붙이지 않았다. 발아래에서 나뭇가지와 마른 잎이 바스러지는 소리만이 불규칙하게 들려온다. 둘은 사람들이 오간 흔적 없는 길을 찾아 더 깊은 숲속으로 들어간다. 늦은 시간임에도 비교적 온후한 날씨 덕에 그다지 춥지 않았다. 얼마나 더 걸었을까. 꿋꿋이 나아가던 둘은 동물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도록 충분히 외진 곳을 찾아낸다. 짙게 드리운 나무그늘 아래, 커다란 바위가 드문드문 자리잡고 있었다. 여기서 머물지. 차연이 먼저 멈춰섰다. 노아는 그제야 기계적으로 반복해 걷던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본다. 적막한 숲이 살풍경해보일 법도 하건만, 이상하게도 외려 포근한 기분이 들었다. 검게 물든 녹음 아래에 가만히 서 있노라면 축축한 흙내음 같은 것이 풍긴다. 넋을 놓은 듯한 노아에게 차연이 모포를 하나 안겨주었다.

시야가 어둠에 적응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모닥불이라도 피우는 것이 좋을까, 생각했지만 괜한 여지를 남길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모포를 대충 덮은 둘은 바위에 기대어 앉는다. 푹신하게 자라난 이끼가 등을 약간 받쳐 주었다. 쉼없는 여정으로 고단해진 몸 구석구석이 뒤늦게 비명을 지르는 듯하다. 차연은 저편의 나무들 사이 먼 곳을 보고 있다. 지금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는지. 그의 옆얼굴을 잠시 넘겨다보던 노아는 곧 시선을 거둔다. 무거운 고개를 반쯤 숙인다. 멀리 풀벌레 우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고, 가만가만 불어오는 바람이 건조한 뺨을 부드럽게 만지고 간다.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지만 억지로라도 눈을 감고 있어야 할 것 같았다. 그러다 보면 또 어느 순간 저도 모르게 달갑지 않은 꿈과 마주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노아는 두르고 있는 모포를 바짝 끌어당긴다. 편히 쉬지 못하고 자꾸만 뒤척이는 노아에게 차연의 시선이 가끔 와 닿았다.

깜박이는 노아의 눈꺼풀 사이로 어떤 장면의 편린이 스쳐 간다. 조각나는 영상들.

그는 어느새 이른 아침의 햇볕 아래에 서 있다. 환한 광채로 밝아 오는 대지 위에. 그는 차연과 대치하고 있다. 당신의 의무를 이행하십시오. 이 대화를 복기하는 동안 노아는 어떤 자각도 없다. 이단, 차연. 정식으로 결투재판을 요청하는 바입니다. 누구의 방해도 없이, 재판은 수순대로 진행된다. 속수무책으로 몰아치는 공격 앞에서도 제 힘을 온전히 쓰지 못하는 차연의 에테르는 순식간에 고갈된다. 노아의 검날이 차연의 목아래에서 번뜩인다. 최후의 일격이 내리꽂히기 직전, 그의 서느런 음성이 선고처럼 떨어진다. 더러운 이단자.

시야가 뒤집힌다. 어지러운 역행의 감각 속에서 노아는 눈을 뜬다. 모든 것이 지나치게 생생했다. 그러나 아직 새벽조차 되지 않은 탓에, 주변은 여전히 캄캄하다. 긴장한 노아는 제 손을 몇 번 쥐었다가 편다. 꿈 속의 감각을 떨어내려는 것이다. 차연은 아직 곁에 있을까. 그제야 고개를 돌려 옆을 보면, 그는 저를 응시하는 가만한 시선과 마주친다. 흔들림 없이 무감하기만 하던 그 얼굴에 언뜻 일렁임이 보였다면 그것은 착각일까. 천천히 차오르는 숨을 몰아쉬면서도, 노아는 차연의 눈을 피하지 않는다. 평소라면 먼저 고개를 돌렸을 법도 하건만. 차연은 외려 노아에게 말을 걸었다.

나쁜 꿈이라도 꿨나. 노아는 그 물음에 곧장 답할 수가 없다. 어떤 행운의 덕도 입지 못한 그날의 가능성을 보았다고, 그리하여 이 손으로 당신을 직접 베어냈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멈칫대는 표정을 들여다보던 차연이 뒤늦게 한마디 덧붙였다. ……더 자게. 허락과도 같은 음성이었으나 노아는 쉽사리 눈을 감지 못한다. 사위가 점점 더 선명해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입을 열어 대꾸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노아는 한참 더 침묵을 지킨다. 차연은 별다른 반응 없이, 여전히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굳게 다물려 있던 노아의 입술이 마침내 떨어진다. 가라앉은 목소리가 고해라도 하듯 느리게 이어진다. 꿈을 꾸었습니다. 간단한 문장으로 시작되는 진술은 여타의 복잡한 설명을 모두 건너뛰고, 그가 좀전에 보았던 가능성의 결과만을 그대로 담는다. 그래서 나는 당신을 베었습니다. 마지막 노아의 음성은 확연히 흔들리고 있다. 차연은 아직 그를 바라보는 중이다. 그를 용서한다거나 하지 않는다거나, 그런 말이 지금 이 순간 과연 유효할지 알 수 없었다. 노아는 다만 몹시도 위태로워 보인다. 그래서 차연은 다른 이야기를 꺼내기로 한다. 자네 은인 말일세. 넋 나간 듯 멍하니 있던 노아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흐려지던 그의 눈동자가 다시금 또렷해진다. 그는 조금쯤 맑아진 정신으로 차연의 다음 말을 기다린다. 그분을 기억할 만한 물건은 없나. 노아는 반문하지도, 오래 고민하지도 않고 품을 뒤적인다. 그가 꺼내 놓은 것은 다름아닌 푸른빛의 물 크리스탈이었다. 차연도 이미 몇 번 보았던 적 있는 것이다. 그것을 만지작거리던 노아가 흘려넣은 약간의 에테르로, 크리스탈은 비로소 환하게 발광한다. 차연은 주위를 둘러싸는 푸른빛을 보며 환각으로 녹아내리던 그 숲을 떠올리지 않는다. 이상하게 포근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빛 너머에 가리운 노아의 얼굴을 바라본다. 음울한 낯이다. 그러나 분명, 처음과는 달랐다. 무언가 더 깨끗해지고 가벼워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순간 차연은 저 역시 홀가분해졌다는 것을 깨닫는다.

날이 밝으면, 그걸로 무덤을 만들지. 나직한 목소리가 노아에게 제안한다. 그분은 이미 빙천에 계실 테지만…… 기릴 것을 남겨두면 좋지 않겠나. 노아는 잠시 놀란 듯 하다가도,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다. 생각해 보면 은인을 위해 충분한 애도를 표할 기회가 없었던 것 같아서. 그는 새삼스레 입 안이 쓰다. 슬픔을 온전히 느낄 새도 없이 바쁘게 내달리지 않았던가. 노아가 쥐고 있던 크리스탈의 불빛이 차츰 잦아든다. 차연은 자세를 바로하고 눈을 내리감는다. 고요한 밤. 숲의 나무들이 수런대는 소리 너머로 다시 풀벌레 울음이 멀게 들려온다. 한잠 자고 나면, 그렇게 다시 아침이 오면. 이제는 손에 쥔 진실을 전하기 위해 일어나야 하겠지.

노아는 그러고도 한동안 잠들 수 없었다. 숲의 모든 소리를 다 들을 것처럼 예민해진 귀가 닫히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잠깐이라도 눈을 붙이려 애쓰는 동안 그는 뱅드로의 생각을 한다. 그것은 어쩌면 또 다른 꿈이었는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각자의 생각으로 번잡해지는 사이, 시간은 홀로 줄달음질치고.

 

아침이 밝아 온다. 더없이 눈부신 태양빛으로.

14

 

적당한 자리를 찾아 무덤을 만드는 동안 둘 사이에는 어떤 대화도 오가지 않았으나, 땅을 파고 비석을 세우는 내도록 그들은 불편한 기색 없이 각자의 생각에 골몰했을 뿐이었다. 은인을 추모하는 마음과, 그런 마음을 귀하게 여기는 생각과…… 또 다시 겹쳐지는 기억들. 그것에 대해 전부 이야기하자면 끝이 없겠지만. 따뜻하고 축축한 흙을 만지고 있노라면 번잡스럽기만 하던 생각들도 하나둘 정리되어 간다. 그와 비슷한 속도로 무덤은 완성된다. 흙에서 골라낸 잔가지와 돌 같은 것들을 한켠에 잘 정리해 두고, 두 사람은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야트막한 무덤 앞에서 노아는 다시 뱅드로를 떠올린다. 진실을 수호하고자 하는 것은 그의 의지뿐만은 아니었다. 사정을 알게 된다면 그와 가까웠던 누구든 함께 마음을 모아주지 않을 리 없다고, 노아는 그의 측근이었던 이들에게 숨겨진 내막을 알리고자 결심한다. 후일에 대해 그들의 의사를 물으려는 것이다. 노아는 곁에 선 차연을 향해 차분히 계획을 털어놓는다. 그는 결과를 빤히 알면서도 노아를 아주 뜯어말릴 수는 없다. 노아의 얼굴이 이미 죽음을 각오한 듯 굳건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정말로 죽는다면, 뜻한 바를 이루기도 전에 절명한다면. 그가 쥐고 있는 진실은 과연 어떻게 되는 것이냐고 묻고 싶기도 했으나. 차연은 그를 뒤따라 가기로 결정했을 뿐 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지금 노아는 오로지 한 가지 생각만을 붙잡고 있었다.

그들은 무덤 앞에 고개를 숙이고 묵념한다. 망자의 안식과,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에 가호를 바라며.

 

야영했던 자리로 다시 돌아온 둘은 이다음 행선지에 대해 논의한다. 커르다스 서부 혹은 중앙고지의 거점들을 차례로 늘어놓다 보면, 결국에는 왔던 길을 되짚어 가는 편이 가장 나으리라는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지체할 시간이 없는 만큼 조금이라도 이동이 용이한 쪽을 골라야 하는 것이다. 중앙고지로 넘어가 하얀테 전초지로 향한다면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이야기를 마치고, 노아는 혼자 떠나기를 고집했다. 충분히 신세를 졌으니 이제부터는 그의 일이라는 이유이기도 했고, 이미 이단 혐의를 입은 차연이 또다시 휘말린다면 안전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어지는 설명을 듣고서 착잡한 얼굴로 노아를 보던 차연은 무어라 말을 덧붙이는 대신, 그에게서 돌려받았던 링크펄을 꺼내 건넸다. 그것을 받아드는 노아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특별한 당부 없이도 차연의 염려를 읽을 수 있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해야 할 일을 할 뿐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노아의 얼굴은 더없이 맑다. 맹목적인 심판을 좇아 가던 그 사람은 이제 간데없다. 이제 그는 찬란한 내일을 향해 서 있다. 그래서 차연은 내심 불안한 기색을 다 드러낼 수가 없었다. 자신에게는 그의 각오를 해칠 자격이 없다는 생각 또한 있었지만. 어떤 말을 한들, 의도와는 상관없이 결국 그를 깎아내리게 될 것만 같아서. 차연은 노아의 여상한 표정을 말없이 바라볼 수밖에 없다.

부신 태양은 그사이 머리꼭대기에 걸려 있다. 노아는 떠날 채비를 한다. 위험할 것을 알았지만 가지 않을 수는 없었다. 잘못된 신앙을 섬기는 이들이 아직 많았다. 그들에게 주어져야 마땅한 진실을 전달할 의무가, 그들의 눈을 가린 거짓을 걷어낼 의무가 노아에게는 있었다. 그는 그렇게 믿었다. 그가 눈먼 채 살았던 시절, 무고한 목숨들이 숱하게 위태로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지금에라면. 무엇도 방임할 수는 없는 일이다. 대가로 자신의 삶을 치른대도 좋았다. 이미 꺼져버린 생명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었으므로. 이제나마 그에 대한 값을 지불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것이 얼마든.

조심하게. 차연이 노아를 배웅한다. 그는 차연을 뒤로하고 걷기 시작한다. 빛이 들이치는 숲속은 그에게 길을 알려주려는 것처럼 환하고,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마저 그의 등을 밀어주는 것 같다. 차연은 노아의 뒷모습이 아주 멀어져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그를 응시한다. 마침내 흔들리는 나무그늘 속으로 그가 사라지고 나면, 차연은 그제서야 숨을 돌릴 수 있다.

그리고 그 순간 차연의 링크펄이 반응한다.

차연은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방금 떠난 노아에게 잊은 말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의아해하던 차연의 얼굴 위로 무언가 깨달은 기색이 스친다. 동시에 몹시도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버지? 그 반가운 한마디에 가슴이 울컥 벅차올라, 차연은 곧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뜸을 들였다. 더없이 기다리던 공인의 연락이었다. 저예요, 아버지. 재차 이어지는 부름에 차연이 뒤늦게 응답한다. 콧등이 시큰했다. 아들아, 괜찮은 게냐. 걱정을 많이 했단다……. 그간 마음 졸인 시간이 무색하게도 공인은 조금 멋쩍어 보일 뿐 크게 힘든 기색이 없었다.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차연은 오랜만에 아들과 근황을 나눈다. 이전에 도망치며 여장을 통째로 잃어버렸던 탓에 링크펄을 사용할 수 없었다고 했다. 지금은 새벽과 다시 만났지만, 곧 아지스 라로 떠날 거라고 이야기하는 공인의 계획을 잠자코 듣고 있으려면 그가 교황을 쫓아 가는 게로구나, 구체적인 설명 없이도 차연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다 보면 저 역시 이제라도 노아를 뒤따라 가는 것이 옳은가 하는 고민이 든다. 애써 심란한 기색을 숨기며 차연은 공인에게 늘 조심할 것을, 그리고 할일을 무사히 끝마칠 것을 또한 당부한다. 성도로 돌아온 다음이면 꼭 연락을 달라는 말도 잊지 않는다. 공인은 힘찬 목소리로 그러겠노라 대답했다. 통신이 끊긴 뒤에도 차연은 한참이나 링크펄을 바라보고 있었다. 짧은 연락을 마치고 나니 어쩐지 속이 헛헛한 기분이 들었다. 꼭 무언갈 잃어버린 것처럼 그랬다. 차연은 한동안 제자리를 서성인다. 우거진 숲속, 흙바닥에 떨어진 이파리들이 발길 아래에 사각사각 밟히는 소리를 낸다. 저만치 노아가 멀어져 갔던 길을 멀거니 응시하다가, 차연은 문득 긴 한숨을 쉰다. 뻔한 끝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을 붙들지 않는 방법은 몰랐다. 구할 수 있는 기회가 아직 남았다면 마땅히 그렇게 하는 것이 옳으니까. 진실을 쥔 노아가 불길 속으로 뛰어들어 사라지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차연은 다시 숨을 삼킨다. 노아를 뒤따라 가려는 것이다. 소지품을 점검하고 옷매무새를 바로하는 사이에도 볕은 여전히 환하게 타오르며 내리쬐고 있다. 이제 와 두려울 까닭도, 망설일 이유도 없었다. 차연은 노아가 밟고 지났을 길 위로 걸어나가기 시작한다.

 

*

 

앞서 간 노아는 지체 없이 하얀테 전초지에 다다르고 있는 중이었다. 뱅드로와 유독 가까웠던 동료 중 하나가 그곳에 근무하고 있을 터였다. 걸음을 서두르며, 노아는 삭막한 서재에서 챙겼던 일지를 떠올린다. 그것이라면 충분한 증거가 되어 주겠지. 구태여 제가 말을 얹을 필요도 없을 것이다. 저만치에 희미하던 건물과 사람들의 윤곽이 점차 또렷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노아는 제가 찾는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 알았다. 저를 향해 기울어지는 어떤 인사에도 응답하지 않고서, 노아는 다만 묵묵히 걷는다. 한시라도 빨리 진실을 토해 놓고 싶었다. 바라마지않던 반가운 얼굴은 머잖아 눈앞에 나타난다. 가볍게 목례하는 노아를 향해 그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왜 여기에 있냐고 묻는 듯한 낯빛이었다. 쓴웃음을 삼키며, 노아는 그에게 잠깐의 시간을 청한다. 그는 영문을 몰라하면서도 노아를 선선히 맞아 주었다.

한적한 골목 안으로 들어선 두 사람은 모처럼의 안부를 나눈다. 간단한 인사가 끝나고 머뭇대는 노아를 향해, 그는 할 이야기가 있다면 어서 해 보라고 다정하게 재촉한다. 그에게 허락된 여가가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제 앞에서 머뭇대는 노아가 답지 않게 초조해 보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노아는 오래 망설이지 않고 숨을 가다듬는다. 뱅드로 경의 마지막을 기억하십니까. 딱딱하게 굳어 떨어지는 말마디가 분위기를 삽시간에 얼어붙도록 만든다. 불편하고 그리운 기색으로, 뱅드로의 친구였던 이가 입을 뗀다. 물론 그가 홀연히 사라진 것은 기억하지. 하지만 그 일을 왜, 갑자기? 노아는 품을 뒤적여 일지를 손에 쥔다. 그것을 꺼내들기까지는 다시 한 번의 다짐이 필요했다. 노아가 나직이 중얼거린다. 당신께 전해야만 할 진실이 있습니다. 종이에 낱낱이 새겨진 사실을 여과 없이 보이고, 그것으로 그의 눈을 뜨이게 하리라는 결심이 채 온전히 매듭지어지기도 전에. 노아의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던 이는 경직된 자세로 부자연스럽게 굳어버린다. 그의 눈이 노아의 어깨너머를 향해 흔들리고 있었다. 대체 제 등 뒤에 무엇이 버티고 있기에 그러는지. 노아는 일지를 움켜쥐었던 손을 거두고 덩달아 뒤를 돌아본다. 거기에는 저 또한 아는 얼굴이 서 있다. 그가 아직 기사였을 시절, 차연의 추적을 함께했던 이단심문관이었다. 노아의 뒤에 반쯤 가려져 있던 이가 앞으로 비집고 나와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추기경님. 그 한 마디로 노아는 방해가 벌써 이곳까지 뒤쫓아 왔음을 완전히 깨닫는다. 어느 틈에? 아니, 처음부터 전부 지켜보고 있었나.

낭패한 표정으로 입술을 말아 무는 노아를 향해 추기경이 천천히 다가온다. 그 진실이란 것, 내게도 좀 알려 주게. 내도록 차분하던 노아의 눈이 더한 냉기로 시리게 가라앉는다. 그 앞을 지키고 선 것처럼 안절부절못하던 이가 추기경과 노아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추기경이 이번에는 그에게로 시선을 돌려 묻는다. 아, 자네는 이미 들었나? 이단심문관께서 이야기해 주는 “진실” 말일세. 그는 대답을 미루며 노아를 바라본다. 하지만 추기경은 일말의 틈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가 한 발 더 다가오며 거리를 좁혀든다. 이상하지 않은가. 누구보다도 이단 척결에 앞장서야 할 심문관이 그릇된 사상에 사로잡혀 계시다니. 뱀 같은 미소가 추기경의 얼굴을 타고 오른다. 힘껏 이를 악문 노아의 얼굴 위로 서슬퍼런 핏줄이 도드라진다. 어서 대답하게. 자네를 심문관과 함께 체포할지 여부를 결정해야 하니까. 노아는 어쩔 줄을 모르고 황망해진 그의 앞으로 나와 버티고 선다. 아직 공표된 바 없는 진실입니다. 씹어뱉는 말에도 추기경은 가소롭다는 듯한 표정이다. 불경한 망언은 이쯤 관두게. 자넬 기다리는 병사들이 가엾지도 않나. 그의 수신호와 함께 비좁은 골목 안으로 병사 여럿이 몰려든다. 노아는 당황하지도, 분노하지도 않는다. 단지 제 뒤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이를 향해 괘념치 말라는 듯 눈짓할 뿐이다. 그와 동시에 병사들이 달려들어 노아를 포박한다. 일말의 저항도 하지 않는 모습에 추기경이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지하에 수감해. 날이 밝으면 호송하도록 하지. 붙들려 가면서도, 노아의 날카로운 시선은 추기경에게서 쉽사리 떨어져나오지 않는다. 그것을 끝까지 지켜보던 추기경이 질린다는 듯 혀를 찼다.

 

신문은 짧게 끝났다. 비로소 홀로 남겨진 지하는 차갑고 축축하다. 까치발을 들어도 닿지 않을 만큼 높이에 자리한 창문, 그러나 한 뼘 크기도 못 되어 단지 숨구멍 역할밖에는 안 되는 그것 너머로 이제야 완전히 저물어 가는 햇빛이 조각나 들어온다. 잠시간 위를 올려다보던 노아는 울퉁불퉁한 흙벽에 등을 기대고 앉는다. 성도로 호송된 후에는 집행이 이루어질 테지만 그는 이 순간 조금도 두렵거나 후회스럽지 않았다. 끝내 누구에게도 진실을 직접 마주하고 선택하도록 할 수 없었다는 사실만큼은 어쩔 수 없이 아쉬운 일이고, 끝내 어머니에게 폐를 끼치게 된 것에 대해서는 더없이 죄송스러운 마음이었으나. 어차피 혼자서 짐을 지게 되었으니 그마저도 괜찮았다. 노아는 자신을 신문한 기사가 라멕과의 만남을 언급했던 것을 떠올린다. 이후로는 결백을 주장하기를 그만두고 그들이 원하는 대답에 잠자코 고개를 끄덕여 주었으므로, 그녀의 소지품에 이단의 증표가 남몰래 섞여드는 일은 없을 것이었다. 바라던 정상까지 도달하기에는 힘들지 몰라도…… 최소한 저 아래로 추락하지는 않을 테니. 그러니 끝내 여기까지 온 지금, 노아라는 개인으로서는 무엇보다 홀가분함이 가장 컸다. 이제야 오랜 숙원을 해결한 듯한 개운함이 숨통을 틔웠다. 그는 그가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할로네가 자신을 위해 안배한 결말이 죽음이라고 한들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저만치 창살 밖은 점점 짙은 노을빛으로 검붉게 얼룩져 간다. 노아는 이제야 마음 편히 눈을 감는다. 좀 쉬고 싶었다. 이미 모든 것이 종결되었으니 그저 한동안 긴긴 잠에 들어도 좋을지 몰랐다. 아침이 오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아 있었다. 노아는 캄캄한 시야 속에서 천천히 생각을 비워낸다. 그러고 보면 차연은 지금 어디로 떠났을까. 그에게 남은 일 또한 무사히 해결된다면 좋으련만. 문득 그가 조금쯤 그립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면 그에 응답이라도 하듯이, 거짓말처럼 희미한 속삭임이 들려온다. 어딘가 가까이에서 차연이 제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착각이 빚어낸 환청일까.

노아는 반신반의하며 눈을 뜬다. 아프게 타들어가던 창 너머로 익숙한 빛깔의 머리칼이 보였다. 당신입니까? 작은 속삭임이, 그러나 차연에게 가 닿기에는 충분히 선명한 목소리가 조심스레 묻는다. 바깥에서 부스럭대는 소리가 멀게 들린다. 그가 창 옆에 주저앉은 모양이었다. 그러게 끝이 뻔한 일이라고 했지 않나. 낮게 흘러드는 음성이 조금씩 갈라진다. 자리에서 일어난 노아는 차연이 있는 쪽으로 다가간다. 왜 이곳에 계십니까. 되묻는 노아의 눈이 미미하게 흔들린다. 차연은 대답 대신 대뜸 사과를 건넨다. 미안하네. 그 말에 노아가 실없이 웃음을 흘렸다. 나를 여기까지 이끌어준 것이 바로 당신인데, 대체 무엇이 미안하다는 것인지. 그럼에도 노아는 그의 이야기를 방해하지 않는다. 차연은 차근히 말을 이어 간다. 체포되는 것을 막지 못해 미안하다거나, 그 자신이 그러했듯 노아마저도 옳은 선택 후에 부당한 실패를 겪지 않기를 바랐다거나. 전부 노아가 듣기에는 차연의 책임이 아닌 일들뿐이다. 오히려 그에게는 진실을 밝히기 위해 애써 주어 고맙다는 말이 가장 기껍게 들렸다. 맑게 개인 노아의 얼굴 위에 시원한 미소가 걸린다. 차연은 볼 수 없겠지만, 그는 분명 기분 좋게 웃고 있었다. 얼마간 뜸을 들이던 노아가 바깥의 차연에게 대답을 내민다. 후회하지 않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정말로 한 점 미련도 없이 청명하다. 미안할 것은 오히려 내가 아닙니까. 뒤늦게 덧붙이는 노아의 말에, 차연은 그제서야 힘없이 웃어버린다. 그가 향한 길목을 향해 우르르 몰려가는 병사들을 보았을 때 얼마나 가슴을 졸였던가. 결국 이렇게 수감된 지금에 와서도 역시. 차연은 마음 한구석이 답답하고 이상했다. 본래의 계획대로라면 그가 진실을 알리는 것을 마지막으로 떠나야 했는데. 어쩐지 선뜻 걸음을 뗄 수가 없었다. 여전히 자신은 하지 못했던 일을 노아가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 침묵하던 차연이 겨우 한 마디 뱉어낸다. ……편히 쉬게. 비좁은 지하 감옥에서라면 어불성설이었지만 노아는 달리 토를 달지 않았다. 무탈하시기를 바랍니다. 재차 당부하며, 이제는 어둠밖에는 자리하지 않는 창밖을 오래도록 바라볼 뿐이었다.

 

곧바로 시작될 줄 알았던 호송은 예상외로 지연되었다. 하필 함박눈이 지겹도록 퍼부었기 때문이었다. 몹시도 혹독한 날씨가 이어졌다. 이틀을 꼬박 쏟아진 폭설은 창밖을 하얗게 물들이다 못해 감옥 안까지 사납게 휘몰아쳤다. 곳곳에 얼음 조각들이 굴러다녔다. 창가가 아예 눈 덩어리로 틀어막힌 다음에는 차라리 좀 나았다. 추위를 피해 웅크리며, 노아는 바깥에 인기척이 드물어지는 것을 느낀다. 이런 눈보라 속에 경비를 세워둘 수는 없겠지. 혹여 탈출에 성공한대도 멀리 가지 못하고 붙잡힐 게 뻔했다. 노아는 가만히 모포를 덮고 누워 골똘해지다가, 까무룩 잠들기를 반복할 뿐이었다.

 

한참 잠들었던 노아의 이마 위로 차가운 물방울이 떨어진다. 며칠이 더 지났을까. 삭막한 지하 아래에서는 시간의 흐름을 종잡을 수 없다. 그래도 이제는 날이 좀 풀린 모양인지 바깥에 가득 쌓였던 눈이 녹아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벽에 가득 맺힌 물기 탓에 공기가 습하다. 묵직한 모포를 털어내며, 노아는 좁은 창문 밖을 내다본다. 기병의 군화가 여럿 보였다. 뒤늦게 경비를 보충하기라도 한 걸까, 이제 와서는 그다지 소용없는 문제 같았지만. 정해진 결말을 향해 휩쓸려 갈 뿐이라면 어차피 수감된 노아가 달리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의지로 통제할 수 없는 상황 앞에서 노아는 무력감보다도 더 커다란 편안함을 느낀다. 이미 그에게 가능한 최선을 다했기 때문일까. 기묘한 일이었다.

벽에 기대앉은 노아의 귓가에 바깥을 오가는 발소리, 그리고 머잖아 경비병들의 대화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이 안에 누가 들어앉아 있는지 모르는 걸까. 알고도 신경쓰지 않는 것일 수도 있었으나 어느 쪽이든 노아에게는 얼핏 반가운 일이었다. 마른 빵 조각을 던져두고 가는 병사 외에는 사람을 구경할 일이 없기도 했으니, 그들의 잡담은 불편한 소음보다는 오히려 기꺼운 사건이다. 바깥의 기병들은 저를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다. 시끄럽게 웃기도 하고 큰 소리로 욕설을 내뱉기도 한다. 며칠이나 종일 눈을 치우느라 힘들었다느니, 제발 좀 드러누워서 쉬고 싶다느니 잡담을 늘어놓던 그들은 갑작스레 목소리를 낮춘다. 노아는 덩달아 숨을 죽이고 들려오는 이야기에 정신을 집중한다. 곧 개중 하나가 다시 불평을 시작했다. 그거 들었어? 호송용 마차가 아주 박살이 났다잖아. 기지에 비축된 식량도 일주일치는 족히 사라졌다던데.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다른 병사가 꼬리를 물고 한탄한다. 그뿐인가, 어젯밤에 성벽이 무너져서 당분간 남서쪽 문으로는 통행할 수 없게 됐네. 호송 마차가 지나갈 길이었는데 말이야. 조용히 듣고 있던 다른 병사들도 차례로 한마디씩 보탠다. 뭔가 거대한 게 들이박은 흔적이 있다던데. 마물인가? 하긴 어떤 간 큰 도적이 이런 데엘 오겠어. 어쨌건 귀찮게 됐지. 이러다간 쉴 시간도 없이 경비를 서게 될 게 뻔하잖나. 에이……. 한참 저들끼리 투덜거리며 농땡이를 치던 병사들은 어느 순간 일제히 입을 다문다. 잠깐의 침묵, 그리고 뒤이어 일사불란하게 흩어지는 발걸음 소리가 들리는 걸 보아하니 근방에 상급자가 나타나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노아는 그제야 호송이 지연되는 데에 다른 이유가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날씨야 사람의 힘으로 어쩔 수 없으니 우연이라고 해도, 기물의 파손이나 도난된 식량 같은 것들은 분명 인력에 의한 것일 텐데. 죄인의 호송에 힘들여 훼방을 놓을 이가 달리 없지 않은가. 차연 말고는 누구도 없었다. 그렇다면 그는 아직 떠나지 않은 것일까. 여태 이 근처에서 맴돌고 있었던 것일까, 오로지 저를 건져내기 위하여. 그것들 모두 불필요한 노력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을지도 모르겠지만. 노아는 천천히 눈을 깜빡인다. 누군가 저를 위해 애써 주고 있다는 사실에 괜스레 기분이 묘했다. 그렇게 큰 마음을 받아도 되는 것인지. 노아는 홀로 아득해진다.

 

다시 해가 지고 떠오르고, 며칠이 더 지나며 바깥은 기병들의 잡담 소리 한 점 없이 고요해진다. 가끔 누군가 오가는 기척은 들렸지만 그뿐이었다. 입이 무거운 자들을 골라 경비를 강화한 모양이었다. 그즈음 호송을 재개하려는 듯 지하에 들락대는 사람들이 늘었다. 노아는 착잡한 심정으로 그들을 응시할 뿐 별다른 행동은 하지 않았다. 달리 바깥소식도 없는 걸 보아하니 차연의 방해도 한계에 다다른 듯했다. 이제 정말 가야 할 때가 된 거겠지. 노아는 기다린다. 그들이 저를 데리러 오기를. 그리하여 호송 마차에 들어앉은 채, 운명이 이끄는 길 위로 다시 한 번 오르기를.

 

그 무렵 차연은 링크펄을 붙잡고 초조해하고 있었다. 아무리 애썼다고 한들 노력에도 한계가 있었다. 이제 기다릴 것은 정말 공인의 연락밖에는 없는데. 내색하지 않으려 하지만, 기도하듯 모아쥔 손의 미세한 떨림까지 숨길 수는 없다. 노아의 이야기를 진작 전했어야 했나. 이제 와 늦은 후회인 걸 알면서도 차연은 자꾸 속이 탔다. 며칠을 늦은 밤까지 잠들지 못해 피곤할 법도 하건만. 차연은 좀처럼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공인은 무사할까. 노아를 구할 수 있을까…… 한자리에 가만히 있지 못하고 서성이던 그가 마침내 익숙한 기척을 느끼고 반색한다. 링크펄이 반응하고 있었다.

아버지, 연락이 늦어서 죄송해요. 저는 오늘 성도로 돌아왔어요.

안도의 한숨과 함께, 차연은 무너지듯 제자리에 주저앉는다. 괜찮은 게냐? 뒤늦게 되묻는 목소리가 흔들렸다. 공인은 걱정 말라는 듯 맑게 웃는다. 다들 무사해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음, 그간 어떤 일이 있었는지 성도 전체에 공표하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지만요. 교황은 기사왕을 강림시켜 결국 야만신이 되었고…… 그를 토벌하는 데 성공했어요. 엄청난 이야기를 대수롭잖게 하는 아들 때문에 철렁 내려앉았던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잠시, 차연은 다급히 말을 잇는다. 공인아. 신성재판소에 전갈을 한 통 보내 주겠느냐. 교황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면 된다. 내 친우가 지금 성도로 호송되고 있단다. 아침이면 도착할지도 모르겠구나. 자세한 이야길 다 하기엔 시간이 없지만, 교황 때문에 무고하게 죽은 이를 위해 진실을 알리려 했던 사람이다. 좀처럼 부탁하는 일이 없는 아버지의 간절한 음성에 잠시 멈칫거리다가도, 공인은 서둘러 그러겠노라고 대답한다. 성도에도, 전초지에도 당장 연락을 넣겠다고. 나머지 생각은 일이 끝난 후에 해도 좋은 것이었다.

통신이 끊어지고 나서야 한꺼번에 긴장이 풀렸다. 차연은 힘없이 늘어지려는 몸을 간신히 일으켜 침대 위로 올라간다. 팔다리를 죽 내뻗고 나서야 숨을 고를 수 있었다. 기껏해야 열흘 남짓한 사이 급격히 지쳐버린 심신이 삐걱대며 비명을 질러댔다. 내도록 얼굴을 뒤덮고 있었던 가면은 이제 벗어도 될 것 같았다. 호송을 막기 위해 전초지의 애먼 기병들을 번거롭게 만든 것은 미안하다면 미안한 일이겠지만, 애초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목숨만큼 귀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더구나 그것이 노아의, 진실을 되찾으려는 자의 목숨이라면……. 물론 인간의 생명에 경중을 따져서야 안 될 말이겠으나. 차연은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 앉는다. 이런 와중에 홀로 한가롭게 잠들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노아가 실려올 성도까지 미리 도착해 있는 편이 더 나을까, 그러나 풀려난 다음이라면 그는 다시 진실을 전하기 위해 전초지로 돌아올 텐데. 그런 것들을 따지자면 이제야말로 그저 기다리는 것밖에는 수가 없었다. 벌써 몇 번의 밤과 낮을 지새웠던가. 차연은 애써 이불을 끌어당겨 덮고 눈을 내리감는다. 쓰러지듯 힘없이 누운 차연이 몇 번이고 뒤척이는 동안, 새벽이 마저 지나간다.

 

*

 

호송 마차는 지체 없이 목적지를 향해 가는 중이었다. 저만치 희미하게 보이던 성도의 관문이 점차 가까이 또렷해지고 있었다. 덜컹이는 차체에 몸을 실은 채 눈을 감고 앉아 있던 노아는 마차의 이동 속도가 조금씩 느려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목적지에 거의 도착한 모양이라고 생각하면서. 노아는 마음을 다잡는다. 아침부터 차갑게 내리쬐는 햇빛의 열기로 마차 안이 후덥지근했다. 가늠하던 어느 타이밍에 멈추어야 했던 마차는 예상보다 훨씬 이르게 급정거한다. 무슨 일이 있나, 노아가 천천히 눈을 떠낸다. 앞쪽에서부터 무언가 달려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의아해하기도 전에 커다란 외침이 허공을 가른다. 성도에서 온 전갈입니다! 사악한 교황이 사망했습니다! 영문 모를 상황에 눈만 깜빡이던 노아가 바깥을 향해 귀를 기울인다. 호송을 위해 나섰던 기사들, 그리고 추기경까지도 성도에서 뛰쳐나온 전령에게 들러붙어 해명을 요구하고 있었다. 분노 섞인 목소리가 무차별적으로 뒤섞여 쏟아지는 가운데에서도 그는 기세에 굴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토르당 7세는 기사왕을 소환하여 스스로 야만신으로 강림하였고, 마땅한 절차에 따라 처단되었습니다. 더 자세한 사항은 성도에 들어가시면 전달받으실 수 있을…… 아, 마차 안에 계신 분은 제멜 경입니까? 호송을 즉시 중지하고 석방할 것을 요청합니다. 순식간에 쏟아지는 말들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던 기사들 중 하나가 탄식을 내뱉었다. 혼란스러워 보이는 그들을 직접 대면하려고, 노아는 마차에서 직접 걸음을 내린다. 안색이 창백하게 질린 추기경이 그를 돌아보았다. 그건 분명 두려워 떨고 있는 사람의 얼굴이다.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겠지. 출세를 위해 갖은 노력을 했는데, 그게 전부 물거품으로 돌아가게 생겼으니. 노아는 태연스럽게 생각한다. 교황의 문제 때문이라면 정교에 대한 인식이 나빠지는 것도 순식간일 것이었다. 앞으로 갈 길이 멀겠군. 저들끼리 모여 웅성대던 기사들이 홀린 듯 멍청한 표정으로 노아를 바라보았다가도 급히 시선을 거두었다. 모든 것이 지나칠 정도로 절묘하게 맞아떨어지고 있다는 의심은 물론 들었지만, 그의 처분에 대해 더 말을 얹어서 좋을 게 없다는 판단만큼은 본능으로 감지할 수 있는 것이었다. 곤란스러운 낯으로 버티고 선 전령에게 가볍게 목례한 노아는 덩그러니 비어버린 마차와 아직 어수선한 인파를 뒤에 내버려두고 미련 없이 자리를 떠난다. 그리고 제가 왔던 방향을 되짚어 걸어가기 시작한다. 시간이야 좀 걸릴 테지만, 끝내 원하던 곳에 도착할 것을 알았으니 상관없었다. 하얀테 전초지로 다시 돌아가고 나면. 미처 입 밖으로 내어 놓지 못했던 진실을 낱낱이 알리리라. 제가 갈 즈음이면 전초지 쪽에도 전령이 이미 다녀갔을지 몰랐다. 노아는 제 머리 위로 환하게 나리는 햇살과 함께 걷는다. 가장 큰 문제는 이렇듯 잘 해결되었지만 마음이 완전히 가볍지만은 않았다. 아직 정리해야 할 일들이 남아 있었다. 차연에게서 받은 도움도 그중 하나였다.

15

노아가 찾던 이는 진작부터 길목에 나와 있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당혹한 기색의 그는 마치 노아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급히 걸음을 옮겨 다가온 그가 더듬더듬 물었다. 교황이, 죽었다고 들었네. 이게 다 어떻게 된 일인가? 쓴웃음을 삼킨 노아가 고개를 가볍게 흔든다. 들으신 그대로입니다. 그보다 마치지 못한 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그는 이제 노아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 있다. 분명 뱅드로의 행방에 관한 것이리라. 그리고 그것은 아마 교황과도 연관된 일이겠지. 그는 차분히 이어지는 노아의 이야기를 듣는다. 어떤 것은 예상했던 부분이고, 또 어떤 것은 꿈에도 몰랐던 사실이다. 결국 그렇게 된 거였나. 그가 씁쓸한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노아는 품을 뒤적여 그에게 뱅드로의 일지를 건넨다. 이후의 일은 당신께 맡기겠습니다. 잠시 망설이던 그가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받아들었다. 노아는 그저 부탁한다는 말만을 남기고 등을 돌린다. 그에게도 마음을 갈무리할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마지막 순간 뱅드로는 외로웠을까, 노아는 문득 생각한다. 화가 나지는 않았을까, 미처 지켜내지 못한 것들이 가슴에 사무쳤을까. 이제는 알 수 없게 된 일이지만. 적어도 아직은, 더 바꿀 수 있는 것들이 남아 있다. 이를테면 차연에 관한 일. 그가 보는 환각에 대한 것들. 노아는 손안에 쥔 링크펄을 만지작댄다. 연락을 해도 괜찮을까. 답잖게 머뭇대는 이유야 뻔한 것이다. 은혜라고 칭하기에도 부족함 없을 만큼의 도움을 받았는데, 정작 고맙다는 말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한 것 같다. 외려 차연의 입에서 그 말을 듣지 않았던가. 그가 제게 감사할 것은 하나 없는데도…….

뭐든 늦은 때는 없다. 아직 전하지 못했다면, 이제라도 미루지 않으면 될 일이다. 노아는 짧게 숨을 들이킨다. 흙먼지 가득한 땅을 보느라 내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든다. 그리고 멈춘다. 차연이 거기에 서 있었다. 언제 나타났는지도 모를 그가 걱정스레 노아를 바라본다. 괜찮나? 그제야 모든 것이 일단락되었다는 실감이 든다. 엉망으로 출렁이던 감각들이 그 음성 한 마디에 일제히 가라앉는다. 노아는 천천히 끄덕이며 숨을 고른다. 하려던 말이 있었지 않나. 마침 상대가 나타났으니, 지체할 이유는 없다. 그의 물빛 눈동자가 조용히 움직여 차연을 응시한다. 차연은 서둘지 않고 노아의 다음 말을 기다린다. 이제껏 많은 일을 겪었으니 지치기도 할 터였다. 한참이나 차연을 바라보던 노아가 나지막이 말을 뱉었다. 당신의 모든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진작 말씀드렸어야 함이 옳다는 것을 압니다만……. 거듭 감사하다는 인사밖엔 드릴 것이 없군요. 당신이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겁니다. 그리고 여전히 눈먼 이단심문관으로 살았을 것이다. 뒷말은 삼켰으나 그 내용은 차연 역시 짐작할 수 있는 것이었다. 언뜻 착잡한 것 같다가도 금세 단정한 표정으로 돌아오는 노아의 낯을, 차연은 마주 바라본다. 당신은 이제부터 어떻게 하실 예정이십니까. 노아가 묻자 차연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어린다. 그 마을로 들어갈 방법을 연구할 생각이네. 준비를 단단히 해야겠지. 그러고는 얼마간 뜸을 들이던 차연이 되묻는다. 자넨 이제 어디로 가나. 그 말은 두 사람의 동행이 여기서 끝이 났다는 뜻이기도 하다. 아쉬움도 잠시, 노아는 이편이 그들에게 더 당연한 일이라는 것을 납득한다. 고민은 길게 이어지지 않는다. 노아가 어렵지 않게 답을 냈다. 그간 기사로서의 본분에 소홀했으니, 우선은 성도로 복귀해야겠지요. 곧은 시선은 여전히 차연을 바라보고 있다. 입술을 달싹이며 말을 고르던 노아가 한마디 덧붙였다. 다만, 당신에게 어떤 보답도 드리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차연은 그럴 만하다는 듯 미소를 지어 보인다. 매사 칼같은 그의 성정이라면 신경이 쓰일 법도 하겠지. 그러나 차연은 가볍게 손을 내젓는다. 구태여 챙기지 않아도 괜찮네. 노아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차연이라면 이렇게 말하리라고 짐작키는 했지만 어쩐지 허전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대수롭잖게 어깨를 으쓱인 차연이 말을 이었다. 나는 당분간 외곽에 머물 예정이네. 아들을 좀 지켜보고 싶기도 하고. 우리도 다시 만날 날이 있겠지. 문장 하나하나를 곱씹으며, 노아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다면 여기서 작별이겠군요. 노아는 그의 아쉬움을 전부 드러내지 않는다. 원래부터 갑작스러웠던 만남이었고, 지난했으나 그만큼 값진 여정이었다. 기약 없는 헤어짐인 만큼 벌써부터 심력을 소모해서야 곤란했다. 곧장 머릿속으로 최적의 경로를 고민하던 노아의 앞에 대뜸 차연이 손을 내민다. 악수를 청하는 그의 얼굴은 언제나처럼 깨끗하고, 무언가에 대비하듯 굳건하다. 노아는 그 손을 마주 잡는다. 따뜻한 온기가 느껴진다. 크리스탈의 가호가 함께하길 바란다는 인사와 함께 짧은 목례가 끝나면, 두 사람은 다시 각자의 길 위로 떠난다. 아직 여정은 끝나지 않았고 그들에게 남은 길은 아득히 멀었다. 그럼에도 이대로 영영 서로에게서 멀어질 것만 같은 예감은 이상하게도 들지 않았다.

 

*

 

성도에 돌아온 노아는 그야말로 뭇 사람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았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오랜 시간 자리를 비워 두고도 아무런 징계도 없이 멀쩡히 복귀했다는 데에 있었다. 그가 호송 마차에 실린 적 있다는 사실도 소식이 빠른 몇몇은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만큼 곱지 않은 눈길도 개중에 섞여 있기는 했지만, 대부분 기사들의 눈동자에는 놀라움이 ― 어쩌면 경외마저도 ― 깃들어 있었다. 자세한 사항이야 대외비라는 명목하에 숨겨졌다고 해도 교황의 죽음에 노아가 연관되었다는 사실만큼은 알음알음 소문이 퍼진 듯 했다. 노아는 그것이 썩 달갑지 않았다. 따지자면 공적을 세우긴커녕 방해가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을뿐더러, 아직 할일이 남은 지금에는 윗선의 눈에 함부로 띄어서야 좋을 것 하나 없었다. 아무래도 얼마간은 숨죽여 지내야 할 테지만 타이밍이 나빴다. 교황의 부재가 촉발한 이슈가르드의 변혁은 이제 막 시작이었다. 국가가 에오르제아 연합과의 친선을 도모한다는 것은 머잖아 기사단이 차출될 일이 생긴다는 뜻이나 마찬가지, 분명 조만간에 하달될 지시가 있을 터였다. 타국의 기사들과 합을 겨루는 훈련도 빼놓을 수 없는 행사일 테니 노아는 그때까지 개인적인 수련에만 매진하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을 내린다. 그만하면 행사에 적당히 대비하는 것처럼도 보일 테고, 연무장에 틀어박힌 그를 애써 찾아와 귀찮게 할 만한 인물도 없을 것이다. 정비할 짬을 내는 것이라 생각하면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그동안 놀고먹은 것은 아니라지만 수련에 대해서라면 필사적으로 피땀 흘려 노력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무엇보다 잠깐의 수감 생활을 지내며 낭비한 체력을 원래대로 회복시켜 놓을 필요가 있었다. 노아는 허리춤에 매달린 검의 손잡이를 쓸어 본다. 묵직한 존재감으로 자리잡고 있는 그 검을 처음 손에 쥐었을 때부터, 그것은 그와 한몸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만한 전우에게 그간 얼마쯤은 소홀했다는 생각이 든다. 노아의 투지가 고요히 불타오른다. 그는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겨 연무장으로 향한다. 슬슬 해가 저물어가는 시각이었지만 어차피 마음 편히 누워 잠들 수 없을 거라면 일 초라도 더 몸을 움직이는 편이 나았다. 연무장에는 아직 자리를 지키고 있는 기사들이 드문드문 보인다. 가볍게 검을 빼든 노아가 그 사이에 자연스레 섞여든다. 어둔 밤을 가르는 은빛 섬광, 손안의 감각에 온전히 집중하다 보면 주변의 풍광은 흐릿하게 날아가고. 어느덧 검끝이 겨누는 그 첨단만이 시야에 느리게 모여든다. 긴장으로 굳어 있던 근육이 풀리며 온몸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더운 숨을 모아 뱉으며, 그는 허공을 베는 데에 열중한다. 그렇게 검과의 대화에 몰두하는 동안이면 노아는 시간의 흐름마저도 역행하는 듯하다. 모든 것이 느리게 부유하는 착시 속에서, 밤은 깊어 간다.

 

대심판의 문 앞에는 이른 아침부터 인파가 제법 모여 있었다. 나란히 도열한 합동 훈련의 참가자들이 저마다 마지막 정비를 마쳐 가는 중이었다. 노아는 멀찍이 인산인해를 이룬 구경꾼들 쪽으로 잠시 눈길을 준다. 모처럼의 행사를 구경하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로 주변이 산만했다. 그래도 이 정도 규모의 인파라면 장소 선정에 반영되었던 당초의 의도는 충분히 만족된 셈이다. 덕분에 훈련 행사의 시일 또한 무리 없이 앞당겼으니, 더할 나위 없었을 테지. 곧 전투의 시작을 준비하라는 안내가 들린다. 규칙을 설명하는 지휘관의 목소리는 고저 없이 일정하다. 각각 열 명의 인원이 전투에 참여하며, 상대편 1인을 쓰러뜨릴 때마다 1점씩이 부여된다. 단, 진영의 전술 목표를 쓰러뜨리면 10점이 부여된다. 개별 전투에서 패했더라도 후방에서 치유를 받고 복귀할 수 있다. 총점 일백 점을 먼저 달성한 진영이 승리한다. 그것들을 차분히 머릿속에 입력하며, 노아는 이슈가르드 측의 참가자들을 한바퀴 둘러본다. 개중에 아는 얼굴이 있다. 차연의 아들, 공인이다. 그와 시선이 마주친다. 그는 노아의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본다. 노아 또한 그를 피할 이유는 없다. 노아가 공인에게 조용히 목례한다. 인사를 받은 그의 표정이 조금 묘해지는 듯도 했으나, 무난한 인사가 마주 돌아왔으므로 노아는 오래 신경 쓰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공인은 노아에게서 떨어져나온 기억의 파편들을 본다. 발밑이 떠오르는 듯 어찔한 부유감과 함께 눈앞에 펼쳐지는 몇 개의 장면. 도망치는 아버지의 등, 허공에 그려지는 은빛 궤적과 뒤이어 붉은 피. 갑작스레 점성대의 풍경. 눈 속에 파묻힌 지하 감옥과 창살 밖으로 어른대는 다시 아버지의 인영. 순식간에 스쳐 가는 영상들로 시야가 어지럽다. 공인은 느리게 눈을 깜박인다. 둘은 분명 기댈 수 있는 동료로 서로를 신뢰하는 것 같았는데. 그에게 가장 처음 보여진 장면은 그런 신의와는 거리가 먼 광경이었다. 그러고 보면 아버지와 처음 만났던 날, 그는 노아에게 쫓기고 있었던 것이리라는 짐작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어떻게. 이토록 긴밀한 사이로 거듭날 수 있었을까. 공인이 상념 속으로 빠져드는 사이, 맑은 종소리가 정신을 일깨운다. 모의 전투에 참여하는 기사들을 훈련장 안으로 부르는 신호다. 그들은 지휘에 따라 각자의 위치에 선다. 확성되어 울려퍼지는 목소리가 잠시 후 전투의 시작을 알리고, 곧이어 다시 종소리.

난전이 시작된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흐름은 그렇게 난폭하게 돌아가지 않았다. 몇몇 호전적인 인물들이 목청을 높이기는 했지만 어차피 명목상의 친선 행사, 대부분은 이것이 훈련에 불과한 모의 전투임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구태여 힘을 뺄 이유는 없다고 생각하는 듯했고, 실제로 지휘를 담당하는 이들 또한 비슷한 의견을 가졌을 것이었다. 하긴 다수가 얽히고설켜 있는 상황에서는 사실 지휘랄 만한 것도 쓸모가 없었다. 기사들은 일대일로, 혹은 두셋씩 무리를 이룬 채 전투를 이어 가는 중이었다. 잠시 뒤편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노아는 근거리에서 다른 기사와 합을 맞대고 있던 적 진영 남자의 시선을 신호로 받아들인다. 어차피 훈련장에 들어온 이상 누구와도 싸우지 않고 나간다는 것은 어불성설, 적당히 분위기에 어울리면 그만이겠지, 노아는 검을 고쳐 쥐고 자세를 낮춘다. 제 상대를 금세 떨쳐낸 남자가 노아에게로 훌쩍 몸을 날렸다. 어지간히 들뜬 모양이었다. 자칫 눈에 띄어서는 곤란한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막상 몸을 움직이기 시작하면 약간은 기분이 고조되기 마련이다. 노아는 제게로 날아드는 검날을 유연하게 흘려낸다. 몇 번은 받아내고, 또 몇 번은 공격을 돌려주기도 하면서. 그렇게 합을 주고받다 보면 노아에게 진심으로 겨룰 생각이 없다는 것쯤 상대편도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다. 그럼에도 좀처럼 유효타를 허용하지 않는 노아 때문에 약이 올랐는지, 그가 뒤편의 동료를 불러냈다. 금방 한 명이 가세한다. 노아는 자리를 피하기를 택했다. 날쌔게 몸을 숙인 노아의 등뒤에서 상대편 둘의 검이 서로 뒤섞이는 사이, 그는 몇 걸음을 더 도약해 훈련장의 반대편 구석으로 넘어간다. 너덧 명이 치열하게 엉켜 있는 모습을 자세히 보아하니 하필 상대의 전술 목표가 있는 쪽으로 온 모양이었으나, 이제 와서 무를 수도 없는 일. 차라리 여럿 사이에 섞여 있는 편이 묻어가기에는 나을 거라는 판단이다. 노아는 다만 힘을 다하지 않고 싸운다. 휘두르는 검날 끝은 목표물의 약점을 파고들 법하다가도 아슬아슬하게 비껴난다. 이후로도 치명타를 가할 만한 기회가 몇 차례 돌아왔지만 노아는 그마저도 곁에 있던 기사에게 넘겨주기 일쑤였다. 그사이 싸움은 조금씩 더 격해지고 있다. 다시 이동해야 하나, 재빨리 주변을 살피던 노아의 눈길에 공인의 장난스러운 미소가 걸려든다. 그 알 수 없는 표정을 해독할 겨를도 없이. 이변은 그때에 일어난다.

한껏 상기된 얼굴의 공인이, 제게 덤벼들던 적 진영의 기사를 단번에 물리치고 노아를 향해 뛰어든다. 노아는 제게로 날아드는 검을 반사적으로 쳐낸다. 당황스런 기색이 그의 낯에 미미하게 어린다. 같은 소속을 공격하다니 착오일까, 혹은 치기일까. 영 내키지 않는 듯 자리를 피하려는 노아를 공인이 쫓는다. 그가 상쾌하게 내지른 검이 노아의 곁을 스쳐 간다. 곤혹스런 표정을 지으면서도, 노아는 이제 성의를 보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서로를 탐색하는 눈길이 신중히 오간다. 날선 긴장감이 주위를 맴돈다. 눈앞에 마주 선 이가 만만찮은 상대라는 것쯤은 서로가 진작 알고 있는 사실. 다시, 공인이 불시에 검을 뻗는다. 날카로운 금속성이 울리며 방패가 진동한다. 무리 없이 받아낸 합인데도 팔에 제법 힘이 들어갔다. 그가 전력으로 상대하기를 원한다면 아마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는 곤란하다. 노아의 얼굴 위로 비치는 불편함을 알아본 공인이 슬쩍 미소지었다. 가까이로 날아드는 검날과 함께 그의 맑은 목소리가 묻는다. 이번의 공격은 장난처럼 가벼웠다. 아버지와는 어떻게 친해지신 거예요? 그 음성은 조금쯤 의미심장하게 들리기도 해서, 노아는 괜스레 착잡한 기분이 된다. 꼭 그것 때문만이 아니라도 마땅한 대답을 찾기가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되었더라. 그러나 길었던 여정을 반추하는 것은 전투 중에는 적합한 행동이 아니다.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노아의 대답이 돌아오기까지 다시 몇 번의 합, 그를 기다리며 움직임을 느슨하게 풀고 있던 공인이 다시 거칠게 뛰어들었다. 그토록 다단해 보이는 관계에 대한 설명치고는 지나치게 답이 간결했던 탓일까. 공인은 조금 부루퉁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 같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부딪히기를 반복하는 검과 방패. 노아는 방어에만 집중하느라 마음대로 운신하지 못한다. 아무리 사방이 정신사나운 난전 속에 있다지만 이래서는 주변의 눈에 띄기 쉬울 텐데. 공인은 아직 만족하지 못한 것 같았다. 저는 공인이에요. 모험을 하고 있어요. 상황에 맞지 않는 자기소개였다. 그는 대답을 돌려달라는 듯 노아를 말갛게 바라본다. 옆으로 파고드는 검을 비껴내며, 노아가 천천히 말을 고른다. 한때 이단심문관이었고, 지금은 그저 이슈가르드의 기사입니다. 탐색은 진작 끝났다. 명목상일 뿐이라도 이것은 어쨌든 공식적인 국가 행사였다. 언제까지 이런 소모전을 계속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일순간 자세를 낮춘 노아가 공인의 빈틈을 파고든다. 내지른 검이 공인의 것과 맞부딪히며 경쾌한 금속성이 이어진다. 제 이름을 아시지 않습니까. 공인이 고개를 끄덕인다. 알아요, 노아 경. 그냥 궁금했어요. 여전한 아쉬움이 묻어나는 그의 눈빛은 아까보다 침착한 듯하다. 노아의 뒤편을 곁눈질하는 공인은 제가 끼어들 만한 다른 난장을 찾고 있는 것 같다. 이쯤에서 물러나면 될까, 적당한 타이밍을 재던 노아가 문득 낯선 기척을 감지한다. 그리고 공인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도 그것을 느낀다. 호기롭게 싸우던 사람들의 움직임이 천천히 멎어 가고, 그때 지축이 뒤흔들린다.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한 곳으로 향한다. 난감함 섞인 탄식이 몇몇의 입술 밖으로 흘러나온다. 언제 나타났는지 모를 외눈박이 거인의 거대한 몸체가 지척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어쩌면 일촉즉발의 상황, 각자의 전투를 일시 정지한 기사들이 지시를 기다리는 것도 잠시. 산크레드가 먼저 나섰다. 그의 짧은 머리칼이 바람결에 날린다. 지체 없이 달려나간 그의 뒷모습은 어느새 거인을 착실히 유인해 가며 점점 멀어지고 있다. 거인의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수차례 이어지다가, 이내 완전히 잦아들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상황을 지켜보던 지휘관이 다시 전투를 재개하라는 신호를 보낸다. 기사들은 곧바로 대열을 정비한다. 아까와 크게 다를 것 없는 전형, 어쩐지 열기가 식어버린 훈련장 안에서 기사들은 차근히 상대편과 검을 섞는다. 노아는 그 틈을 타 훈련장의 외곽으로 빠져나온다. 훈련의 종결까지 필요한 합계는 총 일백 점. 어느덧 전투도 막바지를 향해 가는 중이었다.

그사이 공인은 라우반을 앞에 두고 서 있다. 무어라 몇 마디를 주고받던 그들이 유쾌한 웃음을 터뜨린다. 곧이어 둘의 몸이 서로를 향해 쏟아진다. 어지럽게 뒤엉키는 검과 검 사이에서 붉고 푸른 스파크가 튀긴다. 일대일로 격전을 벌이는 둘의 주변으로부터 나머지 기사들이 물러난다. 그러는 중에도 훈련을 끝내기 위해 그들의 전투는 속행되는 중이었다. 공인과 라우반이 주고받는 합은 점점 많아지고, 또 빨라지고…… 훈련장에 속한 기사들의 절반 정도는 이미 그들의 대결을 구경하다시피 하는 중이다. 한켠에서 적당히 합을 맞추고 있던 노아는 그러한 상황을 파악하자마자 상대를 금방 제압한다. 충분히 시간이 지체되었으니, 이제는 빨리 끝내는 것이 나으리라는 판단 아래. 그는 아직 전투를 멈추지 않고 무리지어 있는 나머지의 사이로 섞여든다. 노아가 휘두르는 검날 아래에 총점을 채우기까지 아직 부족하던 점수들이 마저 쌓여 간다. 마침내 상대편의 마지막 기사가 쓰러지고,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몇몇이 노아에게 달려오려는 그 사이에. 종이 울린다. 훈련이 끝난다. 그 소리에 공인과 라우반도 아쉽게 몸을 물린다. 누군가는 허탈한 표정으로, 누군가는 안도한 표정으로. 다시 대열이 정비된다. 지휘관이 이슈가르드의 승리를 알린다. 일제히 기사들의 경례가 끝나고 나면, 행사는 정말 다음 순서로 넘어가는 것이다.

 

차연은 그 광경을 멀리에서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차마 말로 다 형용키 어려운 감정이 가득 뒤엉켜 마음이 내내 어지러웠다. 제게 달려드는 공인을 받아내던 노아의 모습은 어딘지 새삼스러운 데가 있었다. 그러고 보면 그 둘은 제대로 소개를 나눈 적도 없다 싶은 것이다. 멀리 훈련장에 자욱하던 흙먼지가 조용히 가라앉고 있었다. 차연은 나란히 경례하는 기사들과 그 틈에 섞여 있는 노아를 바라보며, 그가 지금껏 얼마만큼이나 달라졌는지 실감한다. 앞뒤 꽉 막힌 상자에 갇혀 있었던 것이나 다름없는 그가 끝내 족쇄를 떨쳐내고 진실을 강구하기까지. 얼마나 먼 여정을 함께했던가. 또한 공인이 그의 모험으로 바꾸어 가는 이슈가르드의 모습, 그렇게 차차로 변화하는 이곳의 정경을 내려다보는 지금. 차연은 그에게 남은 일에 대해 생각한다. 아직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남아 있었다. 꿈에서도 잊을 수 없는 풍경이 눈앞에 어른거리는 듯하다. 환각으로 뭉그러지던 그 숲속의 푸른 자욱들, 죄없이 죽어간 사람들과 여전히 그 안에 도사리고 있을 미지의 위험에 대해. 차연은 골몰한다. 골짜기 속 마을로 돌아가야만 했다. 이미 몇 번의 실패를 겪고서도 그랬다. 차마 다른 이에게 도움을 구할 수는 없겠지만,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대비한다면 괜찮을 것이라고 믿는 마음이, 믿고만 싶은 마음이. 점차 굳어진다. 이것이야말로 그가 아니면 누구도 할 수 없는……, 하지 않을 일이었다.

한동안 묵묵히 앉은 채 아래편을 조망하던 차연이 자리에서 느지막이 일어난다. 행사는 폐막을 향해 착실히 달려가는 중이다.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 잠시 인사나마 하지 않고 갈 수는 없겠지. 차연은 내려가는 길목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앞으로도 먼 길을 더 가야 한다. 그 전에 잠시, 아주 잠시라면 쉬어가도 좋을 것이었다. 우선은 사랑하는 아들과 시간을 좀 보내고 싶은 마음이기도 했다. 노아와도 더 나눌 이야기가 있을지 몰랐다. 차연은 조금씩 북적이기 시작하는 거리로 나아간다. 사람들이 왁자하게 떠드는 소리 곁으로 찬바람이 불었다.

16

 

뒤풀이가 모두 끝나고, 늦은 저녁. 공인은 전진기지의 응접실로 들어선다. 문지기를 지나치며 그는 새삼스러운 기분이 된다. 이곳에서는 오르슈팡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공인은 잠시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는다. 씁쓸한 미소가 입가를 스쳤다. 언젠가 오르슈팡이 내주었던 코코아가 생각난다. 이제 그가 만든 코코아를 마실 수는 없겠지만. 공인은 우선 두 개의 잔을 준비한다. 곧 노아가 올 것이고, 그와 이야기하다 보면 뒤이어 차연도 도착할 것이었다. 초콜릿을 덜어내고 우유를 데우는 동안 다시 마음이 가라앉는다. 부드럽고 달콤한 향기가 코끝을 간질인다.

구태여 노아를 불러낸 것은 여전히 그에게서 듣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아버지와 친구가 되었는지, 그들의 관계뿐만 아니라 합동 훈련에서 보았던 의뭉스러운 태도들까지도. 좀처럼 틈을 내보이지 않는 그 냉철한 모습이 차연의 앞에서 순간순간 누그러지는 것을 목격할 때마다 공인은 괜스레 흥미가 돋았다. 은제 스푼이 따뜻한 잔을 둥글게 휘젓는다. 초콜릿이 녹아들며 갈색 소용돌이를 그린다. 코코아가 식기 전에 와야 할 텐데, 하는 고민은 금방 무색해진다. 공인이 테이블에 잔을 내려놓자마자 노아가 나타났다. 반색하며 웃는 공인을 마주하는 노아의 표정이 어딘지 어색해 보인다. 그는 훈김을 피워올리는 코코아 앞에 조용히 자리잡는다. 특유의 달착지근한 냄새가 이유도 없이 긴장했던 마음을 누그러뜨렸다. 어느새 맞은편에 앉아 양손으로 잔을 매만지고 있던 공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까는 죄송했어요. 노아는 그것이 종전의 합동 훈련에 관한 사과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갑자기 공격해서 놀라셨죠. 그래서 사과도 드릴 겸, 사실은…… 그냥 저도 아버지의 친구와 친해지고 싶었어요. 멋쩍게 웃는 공인을 향해 노아가 가만히 고개를 젓는다. 사과는 괜찮습니다. 제게 묻고 싶은 것이 있으시다면, 얼마든지요. 코코아를 한 모금 마시고, 공인은 얼마간 뜸을 들인다. 무엇부터 들어야 할지 고민이 되기도 하고, 정말 아무것이나 물어도 괜찮은 것인지도 걱정이 되었다. 그래도 공인은 결국 노아에게 묻는다. 어떻게 친해지신 거예요? 처음에는, 그러니까. 사이가 무척 나빴잖아요. 한껏 조심스러운 그 질문에 노아는 조금쯤 웃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대답을 고르는 데에 퍽 오랜 시간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함께 지내며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배운 것도 많고요. 노아는 제가 내놓는 답이 공인의 성에 차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말한다. 고개를 갸웃대던 공인은 아쉬운 얼굴로 다시 코코아를 홀짝인다. 하기야 그들이 보내온 시간을 단지 말 몇 마디로 정리할 수는 없으리라. 공인이 다시 묻는다. 합동 훈련에서는 왜 그러셨어요? 이번에는 조금 대답하기 쉬운 질문이었다. 다른 이에게 공을 넘긴 이유라면 가능한 눈에 띄지 않기 위함이었을 뿐이니까.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공인은 그 말에 납득한 듯하면서도 여전히 궁금한 기색으로 되묻는다. 앞으로는 어떻게 할 계획이세요. 노아는 가장 먼저 그의 모친을 떠올린다. 라멕의 가주 승계를 위해서라면 기사로서의 일은 계속해야 한다. 노아가 생각한 그대로를 털어놓으면, 공인이 재차 되묻는다. 그런 다음에는요?

그다음이라니. 여지껏 생각해본 적 없는 일이다. 공인은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노아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는 제법 착잡해 보인다. 노아는 제 앞에 놓인 코코아 잔을 가만히 내려다본다. 어머니가 가문의 이름을 얻어낸 다음의 일이라. 그때는 노아도 그 자신의 목적을 위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 목적이라는 것을 아직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주제 파악이라는 명목하에 스스로 몸을 낮추었던 어린날을 지나, 이단심문관으로서 마땅히 행해야 했던 금욕과 절제. 그리고 제가 누리는 것만큼 혹은 그 이상의 값어치를 해야 한다는 기사로서의 의무감 또한 마찬가지다. 그런 모든 제약을 떠나 사적인 욕망을 추구할 수 있다니. 그런 결정을 단숨에 내릴 수 있을 리 없다. 침침한 노아의 낯을 응시하던 공인이 괜찮다는 듯 웃었다. 당장 알려주지 않으셔도 돼요. 앞으로 생각해보면 되죠. 노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이제는 그가 공인에게 질문을 돌려줄 차례다. 당신의 계획은 어떻습니까. 공인은 얼마 남지 않은 코코아를 마저 들이켠다. 저도 이제부터 생각해 보려고요. 가야 할 곳도, 만나야 할 사람도 많으니까요. 저도 아버지를 돕고 싶지만…… 찾아야 할 사람도 있고, 아버지는 제게 그 마을의 이야기를 한 적 없으세요. 위험하다고 생각하시는 걸까요. 뺨을 긁적이는 공인의 얼굴에는 아직 앳된 티가 남아 있다. 노아는 차연이 그를 걱정하는 마음을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다. 아무리 유능한 영웅이든, 결국 그에게 공인은 가장 먼저 아들일 테니까.

때마침 차연이 합류한다. 그의 얼굴에 올라앉은 가면은 노아에게는 익숙한 것이다. 반갑게 인사하는 공인에게 마주 손을 흔들며, 차연은 가면을 벗어 내려놓는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공인을 도로 앉힌다. 제 몫의 마실것은 스스로 챙기겠다는 뜻이다. 한 잔의 코코아가 더 준비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차연은 금방 공인의 옆자리에 앉는다. 노아는 뒤늦게 그에게 목례한다. 오랜만입니다. 그간 별일은 없으셨습니까. 차연은 여상한 낯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조사 건으로 조금 바쁘다뿐이지 특별히 복기할 만한 사항은 없었다. 이후로는 합동훈련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하여 가벼운 잡담이 이어진다. 적 진영의 누가 상대할 만했고, 또 누구는 너무 태만했다든가. 별것 아닌 이야기인데도 함께 둘러앉아 떠들고 있으려니 기분이 제법 좋았다. 그런데 노아는 좀처럼 집중하지 못하는 것 같기도 하다. 차연은 조용히 코코아만 홀짝이는 노아를 넘겨다본다. 공인의 질문 세례를 따라가지 못해 되묻는 일도 벌써 몇 번, 결국 그가 움켜쥐고 있던 잔을 내려놓는다. 저는 먼저 일어나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죄송합니다. 코코아는 감사했습니다. 복잡한 기색으로 자리를 정리하는 노아에게, 공인이 급히 덧붙인다. 다음에도 같이 활동할 수 있다면 좋겠어요. 아까 그 얘기는, 정말로 천천히 생각해보셔도 괜찮을 거예요. 그 말에 노아가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그의 말대로 서두를 이유 없는 고민이었다. 그런데도 왜 이렇게 심란하기만 한지. 둘을 번갈아 바라보던 차연이 말을 얹는다. 아무래도 조만간 다시 보게 될 것 같군. 수고 많았네, 푹 쉬게. 뒤늦게 돌아오는 한 마디에 노아는 그제야 마음이 좀 놓이는 듯한 기분이 든다. 불안하게 요동치던 가슴이 한순간에 가라앉는다. 이것저것 고민해야 할 문제들로 여전히 머리가 어지럽기는 했지만, 적어도 오늘 밤만큼은 걱정 따위 모두 놓아 버리고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노아는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응접실 바깥으로 향한다. 그의 멀어지는 뒷모습을 얼마간 바라보다가도. 차연과 공인은 못다 한 이야기를 다시 꽃피우느라 바쁘다. 담소를 나누는 동안 차연은 아들을 눈 안에 오래 담는다. 또 언제 떨어지게 될지 모르는 일이기도 하고, 그간 그리웠던 마음을 좀 채워 넣고 싶기도 했다. 차연이 가만히 손을 뻗어 공인의 머리칼을 쓰다듬는다. 벌써 이렇게 자랐구나. 어딘지 쓸쓸해 보이는 목소리로 차연이 말한다. 공인은 배시시 웃으며 머리를 기댄다. 그러는 동안 밤은 깊어 가고. 조용히 흔들리며 타들어가던 등불이 마침내 힘을 잃고 연약한 빛으로 사그러들 때까지, 둘은 그간 쌓아둔 이야기를 나누느라 바빴다.

 

*

 

평화를 맹세하는 언약으로 마무리되었어야 할 다음날의 행사는 갑작스레 파국을 맞았다. 사실상 부활한 사룡 니드호그의 선전포고를 받아, 성도는 순식간에 쑥대밭이 되었다. 앞다투어 대피하는 사람들 틈에 차연은 없었다. 차연이 제때 떠나지 못한 것은 물론 노아와 공인 때문이었다. 그들을 남겨두고 홀로 떠나려니 영 마음이 불편했다. 그러다가 결국은 용시전쟁의 마지막 전투를 지켜보게 된 것이다. 곳곳에 결집한 이슈가르드의 기사들이 사룡의 졸개들을 저지하기 위해 악을 쓰고 있었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참전한 노아는 적과 아군이 까맣게 뒤엉켜 있는 전장 틈을 바쁘게 누빈다. 그가 내뻗는 검 끝에서 용의 날개가 하나둘 꺾이며 죽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습격은 끝도 없고, 졸개들은 계속해서 수를 불리며 전장으로 날아든다. 먼발치에서 혼란한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차연이 끝내 걸음을 옮겼다. 그는 어느새 달리고 있다. 이슈가르드를 위해 싸우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는데, 아니. 그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무고한 생명을 하나라도 더 지키기 위함이다. 차연은 난장 속에서 저를 발견하고 망연해지는 노아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손을 흔들어 보인다. 도우러 왔네. 무어라 외치려던 노아가 입을 꾹 다물었다. 몰려드는 졸개들의 숫자가 점점 더 많아지고 있었다. 이렇듯 열세에 몰린 상황, 한 사람이라도 손을 보태어 준다면 사양할 이유가 없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차연의 도움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그가 함께한다면 어떤 식으로든 일이 해결될 것만 같다는 막연한 안도감 너머로, 그를 다시 위험에 끌어들였다는 죄책감이 미약하게 덧입혀진다. 그러나 오래 생각할 여유는 없다. 사방에서 고성이 오간다. 세검을 꺼내든 차연이 노아를 재촉한다. 노아는 눈앞의 적을 꿰뚫는 데에 집중한다. 선뜩한 광채로 빛나는 검날을 휘두를 때마다, 그는 어떤 책임감에 대해 어렴풋하게나마 생각하게 된다. 귀족의 책무를 떠나서도 한 명의 인간으로서 갖는 책임이 분명 있을 것이었다. 그 무게를 견디고 또한 성취를 얻어내기 위해 분투하는 과정이 제법 기껍다는 사실을, 노아는 차츰 깨닫는다. 곁에 붙어 선 차연의 보조는 제 역할을 톡톡히 해주었다. 노련하게 움직이는 노아를 따라 차연은 그에게 필요한 것들을 기민하게 포착하고 있었다. 노아는 제법 효율적으로 전투를 이끌어가고 있다. 하지만 이대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싸움이 길어질수록 모두가 지쳐 가기 마련이다. 고통 섞인 침음은 이제 누구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것인지도 알 수 없다. 필사적으로 검을 휘두르는 기사들의 머리 위로 문득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운다. 흐레스벨그의 신형이 저만치 먼 곳에 내려앉으며 지축이 울린다. 그와 함께 공인이 나타난다. 분노한 니드호그가 포효한다. 노아와 차연이 순간 눈빛을 주고받는다. 그들은 동시에 달려나간다. 공인의 전투가 방해받지 않도록 저지선을 쌓아야 했다. 그들을 뒤따라 군집한 기사들의 대열이 까맣게 몰려드는 졸개들을 차례로 베어나간다. 정신없이 검을 휘두르는 도중에도 차연의 눈에는 공인의 모습만이 선명하다. 그는 차연이 지금껏 본 적 없는 표정을 짓고 있다. 더없이 강한 상대 앞에서도 압도당하지 않고 전투를 이끌어 가는 아들의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생경하고 그만큼 애틋하다. 내게 손 내밀어주던 네가 벌써 이만큼 자라났구나. 하지만 지금은 그런 감상에 젖을 때가 아니다. 그들은 흐레스벨그의 날개가 뜯겨나가는 것을 본다. 구름길 끝에 내몰린 니드호그가 울부짖고 있었다. 사방에 뜨거운 불길이 치솟는다. 그러나 공인도, 그들도 물러서지 않는다. 진작 나가떨어진 졸개들의 시신이 화염에 휩싸인다. 차연은 흉악하게 돋아난 니드호그의 뿔과 비늘이 부서져가며 피흘리는 모습을 본다. 싸움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는데도 사룡은 눈에 띄게 기세를 잃어 가고 있었다. 눈부신 은빛 궤적이 허공을 거칠게 찢고 지나간다. 저것이라면 최후의 일격으로 손색없으리라. 그런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곧이어 끔찍한 단말마가 울려퍼진다. 일말의 힘까지 쥐어짜며 비명을 토하던 사룡이 끝내 쓰러진다. 둔중한 몸체가 더러운 핏물을 흩뿌리며 추락한다. 매캐한 연기 속에 일렁이던 그림자가 인형(人形)을 입고 사그러든다. 아직 상황이 종결되지 않았음을 눈치챈 노아가 기사들의 대열을 천천히 물렸다. 새카만 그을음으로 뒤덮인 길목 곳곳에 불티가 날린다. 어지러운 불길 속에 수런대는 공인과 그 일행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차연은 그 너머를 여전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평화가 찾아온다. 다시금 몸을 일으킨 흐레스벨그의 날갯짓 아래에 잔불이 일제히 꺼져든다. 그가 말한다. 혈족들 모두가 퇴각하고 있다고. 그리하여 전쟁이 마침내 종결되었노라고. 곳곳에서 탄식이 터져나온다. 그러나 여전한 전운이 감도는 풍경 한가운데에, 그들은 함부로 기뻐할 수도 없이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다. 그토록 길었던 전쟁이 진정으로 끝났다는 것을 실감할 수 없었다. 누군가는 쓰러지듯 주저앉았고, 다른 누군가는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사이 눈물흘렸다. 기묘한 적막이 사방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차연은 착잡한 낯으로 서 있는 노아를, 저편에서 다가오는 공인을 본다. 그러면 이 순간 모든 것이 고요해진다. 다른 생각은 필요 없어진다. 차연에게는 그들로 충분했다.

17

 

따뜻한 차에서 훈김이 피어오른다. 나란히 둘러앉아 있으려니 함께 코코아를 마셨던 날이 떠오를 법도 한데, 또 한차례 큰 싸움을 겪었기 때문일까. 그 풍경은 유독 멀게만 느껴진다. 찻잔을 그러쥐고 있는 차연의 등 뒤에는 챙기다 만 짐들이 가지런히 쌓여 있었다. 차연은 잔을 들어 마른 입술을 축인다. 연구실로 가봐야 할 것 같네. 더 늦어지도록 둘 수는 없으니.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핑계로 할일을 여태 미뤄 두었으니 이제는 정말 떠날 때가 되었다. 덤덤한 그 말에 노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마을로 가시는 것이라면 제가 돕겠습니다. 차연은 그의 말에도 마냥 고마워할 수가 없다. 어쩐지 그를 붙잡아 두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차연은 조금쯤 무거운 마음으로 노아를 마주 바라본다. 공인은 그 눈길 안에 깃든 다단함을 노아보다 먼저 알아챈다. 공인이 머뭇대며 끼어든다. 아버지와 함께 가 주신다면 큰 힘이 될 거예요. 사람들도 이제 노아 경의 실력을 모르지 않게 되었잖아요. 이것은 이슈가르드의 기사인 노아에게는 잘된 일이기도, 그렇지 않기도 하다. 노아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전투를 치르며 고전하는 모습을 남들에게 고스란히 보였으니 더는 숨길 수도 없을 것이다. 분명 어느 면에서든 차연에게 도움이 될 수는 있겠지만, 동시에 그런 만큼 당장 그와 함께 떠나기는 힘들지 모른다. 그렇지만 노아는 꿋꿋이 한 마디 덧붙인다. 돕고 싶습니다, 언제든. 차연이 다시 찻잔을 들어올린다. 따뜻한 차가 서서히 몸을 덥혀 주고 있었다. 고맙네. 늦은 대답이 떨어져나온다. 어차피 공인과 노아는 다시 성도로 돌아가야 하는 몸, 차연의 행선지는 그들과 같을 수 없다. 혼자서 무작정 떠날 셈이 아니라면 당분간은 필요한 것들을 꾸리며 상황을 지켜보는 편이 좋으리라. 혀를 데지 않도록 조심히 차를 마시던 공인이 문득 노아를 보며 묻는다. 낚시 좋아하세요? 갑작스런 질문에 노아가 그를 멀뚱히 쳐다보았다. 답잖게 당혹감이 어린 표정에 공인이 웃었다. 언젠가 함께 낚시하러 가요. 재미있을 거예요. 그들을 지켜보던 차연이 푸스스 웃는다. 노아가 뒤늦게 미소를 머금는다. 그는 기꺼이 그러겠다는 대답을 한다. 별것도 아닌 소일거리들에 대해 즐겁게 이야기하는 동안에도 내내 피어오르는 향긋한 차의 냄새가 마음을 차츰 누그러뜨려 주고 있었다.

 

용시전쟁 이후 이슈가르드는 공화제로 전환했다. 체제의 변화는 많은 것들을 새롭게 움직여 놓았다. 그런 중에도 기사들의 훈련은 여전히 바쁘게 이어졌다. 대규모로 진행되는 모의 전투를 앞둔 시점에서도 노아는 이런저런 공무로 쉴 틈 없었고, 공인 또한 이슈가르드 주변의 마물을 사냥하느라 하루가 멀다하고 쏘다녔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종종 서로와 동행했다. 의도치 않게 동선이 겹치는 날도, 공인이 부러 노아를 따라 움직이는 날도 있었다. 그들은 자주 차연의 이야기를 했다. 차연은 지금쯤 연구실에서 정신없이 지내고 있을 것이었다. 함께 지내는 시간이 늘어갈수록 대화의 주제는 점차 다른 곳으로도 옮겨 간다. 둘 사이에 맴돌던 어색한 기류도 이제는 사라진 지 오래다. 공인을 마주할 때면 묘하게 뻣뻣해지던 노아의 얼굴은 더없이 친숙한 이를 대할 때의 그것이 되었다. 그에게는 이상하게도 마음을 편안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었다. 그가 아무렇지도 않게 건네는 조언들 하나하나가 노아의 마음에 파문을 일으킨다. 차연과 마찬가지로, 만약 그를 좀 더 일찍 만났더라면 어땠을까. 노아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그는 저만치에서 몇 마리째인지도 모를 마물을 해치우고 신나게 손을 흔드는 공인에게 마주 손짓해 보인다. 미소가 슬그머니 입가를 비집고 나온다. 정말이지 열의로 넘치는 모험가였다.

 

*

 

부신 태양이 작열한다. 또 한 번의 모의 전투를 위해 마련된 훈련장에는 채비를 마친 기사들이 일렬로 늘어선 채 대기하는 중이다. 실력자로서 초청받은 공인도 자리에 함께하고 있었다. 미리 언질을 받은 차연은 멀리서나마 오늘의 전투를 지켜볼 예정이었다. 지시에 따라 위치로 이동하며, 노아는 여전히 맑게 웃어보이는 공인을 곁눈질한다. 어딘가에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을 차연의 시선이 느껴지는 듯하다. 훈련이 끝나면 이야기를 더 나눌 수 있겠지. 그러나 당장은 전투에 집중해야 할 때다. 훈련장 한가운데로 나와 선 기사들이 서로 대치한다. 노아는 제 맞은편에 버티고 선 공인의 장난스런 미소를 본다. 언뜻 불길한 기운이 스친다. 그러고 보면 공인이 지난번 합동 훈련 때와 같은 변덕을 두 번 부리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는 것이다. 그저 기우일 뿐이라면 좋으련만. 노아는 차분히 숨을 고른다. 오랫동안 함께해온 검과 방패의 손잡이가 그의 손아귀에 틈없이 감겨든다. 지휘관의 고저 없는 목소리가 훈련장 안에 확성되어 울린다. 곧 전투가 시작될 것이다. 저편에 선 공인이 눈을 찡긋한다. 아무래도 괜한 염려가 아닌 모양인데. 더 생각할 틈 없이 종이 울린다. 기사들은 각자의 상대를 향해 달려나간다. 동시에 공인이 노아에게로 뛰어든다. 주변의 상황까지 파악할 여력은 없다. 이번에도 적당히 하고 빠질 생각이었다는 것을 미리 꿰뚫어본 것처럼, 공인은 처음부터 틈을 주지 않고 노아를 몰아붙인다. 이렇게 되면 노아 역시 전력으로 응하지 않을 수 없다. 공인은 그의 얼굴에 곤혹스러운 기색이 어리는 것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한다. 언제까지고 어영부영 물밑에 숨어 지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슬슬 윗선의 눈에 띄어 승진할 때도 되었지. 앞으로의 여정에도 차라리 그편이 더 도움 될 터였다. 공인이 내지른 검이 노아의 것과 힘차게 부딪힌다. 경쾌한 금속성이 귓가를 때린다. 물러서지 않고, 노아는 얼핏 버거울 정도로 무겁게 내리찍히는 검날을 온전히 받아낸다. 먼젓번 훈련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모처럼 웃음기를 지워낸 공인이 진지한 낯으로 기세를 잡고 있었다. 정신없이 몰아치는 검격 속에서 노아는 오래된 시절의 일을, 그리운 이름을 잠시 떠올린다. 이제는 더 멀리 나아가야 할 때였다. 공인 또한 그것을 알고 도우려는 심산이겠지. 행여 단장 자리라도 꿰차게 된다면 정말 더할 나위 없을는지도. 그것은 아주 가망 없는 이야기도 아니었기 때문에, 노아는 못내 불편한 표정을 짓다가도 곧 자세를 낮추어 공인의 빈틈을 노린다. 더는 무엇도 보류할 수 없게 된 지금이다. 그가 흔쾌히 뻗어낸 검이 방패와 부딪혀 공명한다. 공인은 그저 이름뿐인 영웅은 아니다. 그에게는 사람을 구하는 힘이 있다. 노아의 눈이 깊고 날카로워진다. 완력은 강하지만 아직 기술이 능란하지는 못하다. 시간을 오래 끌지 않는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을지도 모른다. 둘 사이에 몇 번의 합이 더 오간다. 각자의 전투를 이어 가던 기사들은 어느새 그들에게 조금씩 한눈을 팔고 있다. 누군가 경탄 섞인 한숨을 뱉어낸다. 노아는 무섭게 파고드는 공인의 검날을 기어코 흘려낸다. 전부 받아내다가는 금방 체력이 다할 것이었다. 노아의 검 끝에서 시작되는 은빛 궤적이 허공에서 변주되며 공인의 것과 뒤섞인다. 서늘한 바람결 속에 선연한 불꽃이 튀긴다. 그 조화는 차라리 아름다울 지경이다. 형세는 어느 쪽으로도 쉽사리 기울지 않는다. 전투를 끝내는 것은 이번에도 다른 기사들의 몫에 달렸다. 몰두한 노아의 미간 사이로 땀방울이 미끄러진다. 공인은 좀처럼 지친 기색이 없다. 그렇게 몇 번의 합이 더 오갔을까.

예고 없이 종이 울린다. 어지럽게 흩어져 있던 기사들이 모두 각자의 자리로 되돌아간다. 뒤엉키던 검과 검이 한순간에 떨어져나간다. 여전히 눈부신 역광 너머로 지휘관의 실루엣이 까맣게 드러난다. 어느새 거칠어졌던 숨을 차분히 고르며, 노아는 부지불식간에 뱅드로의 이름을 뇌까린다.

 

지독한 피 냄새가 난다. 넝마가 된 부모의 시신이 에이비스의 발길에 채인다. 그러나 슬퍼할 여유 따위 없다. 검을 움켜쥔 노아는 거칠게 날아드는 발톱을 간신히 비껴낸다.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버틸 수 있을지 몰랐다. 용의 피를 들이키고 변이한 이단자에게는 분별이랄 것이 없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람이었던 저것은 이제 눈먼 짐승처럼 피를 원할 뿐이다. 노아는 어떤 원한이 저 이단자를 집어삼켰는지 궁금해하지 않는다. 그저 살아남는다면, 저것과 같은 자들에게 되갚음할 기회가 있으리라는 생각밖에는. 하지만 이제 여력이 얼마 없다. 필사적으로 검을 붙잡아 쥔 손아귀에는 이미 감각이 없다. 어쩌면 고철에 불과한 그 검이 진작에 부서져버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기적인지 몰랐다. 노아가 가쁜 숨을 내쉰다. 아직 여린 살갗 위로 피와 땀이 뒤섞여 흐른다. 그는 경련하듯 떨리는 눈꺼풀에 간신히 힘을 준다. 잔뜩 성난 에이비스가 다시 제게로 달려드는 것이 보인다. 노아는 돌을 매단 것처럼 무거운 팔다리를 억지로 움직인다. 죽더라도 끝까지 싸우고 싶었다. 계속해서 무거워지려는 눈을 힘겹게 깜박이는 사이.

누군가 노아의 앞으로 끼어든다. 짐승과 다를 바 없어진 이단자는 일격에 피를 토하며 나가떨어진다. 노아는 해어지고 불탄 옷소매로 눈가를 문질러 닦는다. 그는 어쩐지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기사의 이름을 알 것 같다. 평민들 사이에서도 명망 높은 사람이라더니, 나를 구해 주러 온 걸까. 뒤늦게 도착한 기사들이 엉망이 된 마을을 속속 뛰어다니기 시작한다. 내도록 숨어 있던 사람들을 안심시키고, 다친 이들은 데려가 치료한다. 그 어지러운 풍경을 바라보고 선 노아에게 기사가 말을 걸었다. 그의 목소리는 멀고 아득하게 들린다. 괜찮냐는 물음인 것 같기는 한데. 도무지 현실감이 없었다. 노아는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올려다본다. 흐트러짐 없이 단정한 모습, 그러면서도 저를 향해 어떤 안타까움과 놀라움을 표하는 눈동자. 노아는 천천히 입을 연다. 그러려고 했다. 하지만 순식간에 눈앞이 검게 변한다. 한계에 다다른 육신이 제자리에 힘없이 무너졌다.

 

기사들은 마을에 일주일쯤 더 머물렀다. 엉망이 되었던 마을이 제모습을 되찾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환자를 돌보고 불탄 건물을 수습하던 그들은 이단자에 의해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장례까지 도맡았다. 모두 그들을 좋아했다. 갑자기 들이닥친 재난을 물리친 영웅이나 다름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에게 감사한 마음이었던 것은 노아 역시 마찬가지다. 쓰러졌다가 깨어난 이후로는 매순간 몸이 비명을 질러대는 것 같아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지만, 따뜻한 모포를 두르고 식사를 입에 욱여넣으며 노아는 항상 눈길로 기사들을 좇았다. 그 시선을 알아챘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만남은 금방 다시 찾아왔다. 절체절명의 순간 노아를 구했던 기사의 이름은 뱅드로라고 했다. 그는 노아가 훈련받지 않은 몸으로 살아남은 것은 기적이나 다름없다고, 제게서 가르침을 더 받을 생각은 없는지 물었다. 노아는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건강이 완전히 회복되지는 않았지만 이런 제안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앞으로 살길을 찾아야 했다. 언제까지고 남의 호의에 기대어 살 수는 없다는 것이 노아의 생각이었다.

뱅드로는 훌륭한 스승이 되어 주었다. 짧은 시간이나마 그와 함께 지내며 노아는 쓸 만한 전투 기술을 여럿 배울 수 있었다. 역시 타고난 재능이라고, 습득이 빠르다며 칭찬하던 그의 미소가 아직도 눈에 선하다. 노아가 여신 할로네의 가르침을 받게 된 것 또한 뱅드로가 전해 준 덕분이었다. 그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런 상상은 이제 의미 없는 상념인 것을 알면서, 동시에 노아는 뱅드로를 향해 모종의 부채감을 느낀다. 원수를 피로 갚듯 은혜에도 보답해야 함이 마땅하건만. 스스로는 당장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데에서 오는 무력감이 노아의 발치에서 얕은 파도처럼 찰랑인다. 그를 따라갈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기사들이 모두 철수하기 전날 밤, 노아는 평소와 같이 마지막 훈련을 마쳤다. 허공을 가르던 검날이 마침내 땅에 떨어진다. 뱅드로는 호흡을 갈무리하는 노아를 기특하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선물이다. 그러고는 품에서 작은 크리스탈을 하나 꺼냈었지. 평소라면 그저 푸른 물빛에 불과한 그것은 에테르를 빨아들이면 등대보다도 환한 빛을 낸다고 했다. 노아는 그 의미도, 용도도 모른 채 얼떨떨한 기분으로 크리스탈을 받아들었지만. 이상하게도 그것의 무게만큼은 실감할 수 있었다. 언젠가 중요한 쓸모가 생기리라는 예감만이 존재했다.

그렇게 기사들이 모두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노아는 제멜 가의 방계로 입양되었다. 뱅드로가 아니었다면, 그에게서 배우지 못했더라면 있을 수 없었던 일이다. 노아는 어쩌면 뱅드로에게 보은하기 위해 남은 평생을 쏟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이제 노아는 차연과 함께 쌓았던 그의 무덤을 떠올린다. 외진 숲 속에 쓸쓸히 남을 수밖에 없었던 그의 마지막을.

소중한 이를 또 한 번 잃을 수는 없는 일이다.

 

거처로 돌아온 노아는 탁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차연과 마주 앉는다. 그의 여정에 동참하고자 설득하기 위함이다. 제가 받았던 도움을 다시 돌려주고픈 마음을 차치하고서라도, 그 마을은 분명히 사지(死地)나 다름없는 곳이다. 그를 혼자서는 보내고 싶지 않았다. 차연은 이번에도 제법 곤란한 기색이 된다. 그러나 실은 차연도 이미 알고 있다. 어떤 말로도 노아를 물러나게 할 수는 없으리라는 사실을. 그들 앞에 남은 시간은 지금껏 그들이 함께해온 시간만큼이나 길 것이라고, 차연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차연은 제게 향하는 노아의 곧은 눈동자를 말없이 마주 본다. 그 푸른 물빛을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복잡스레 요동치던 마음도 어느새 안정을 찾는다. 차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솔직히는 그와 함께라면 일이 더 수월할지 몰랐다. 자네 남은 일정이 끝나면 출발하도록 하지. 기어코 허락을 받아낸 노아가 미소짓는다. 종종 모르도나에 들르겠습니다. 떠나기 전의 채비까지도 돕겠다는 뜻이다. 그 말에 차연이 결국 두 손을 들었다.

 

*

 

저녁, 노아가 제멜로 복귀하자마자 호출이 있었다. 언제나처럼 틈 없는 모습으로 응접실 소파에 앉아 있던 라멕이 환복을 마치고 들어서는 노아를 일별한다. 그녀는 평소보다 조금 온화한 기색이다. 노아가 자리에 앉으면 테이블 위로 간단한 다과가 놓인다. 할일을 마친 시종이 그림자처럼 조용히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을 무심히 곁눈질하며, 노아는 따뜻한 찻잔을 손에 쥔다. 라멕이 먼저 입을 열었다. 활약은 전해들었다. 이번에는 눈에 띄었던 모양이구나. 그녀에게 돌아갈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다. 잠시 목을 축인 노아가 잔을 다시 내려놓는다. 원치 않는 일이십니까. 그러나 도자기처럼 말끔한 라멕의 낯에는 조금도 불쾌한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외려 희미한 미소가 그 위로 맴돈다. 그녀가 가볍게 손을 내젓는다. 그간 나를 살피느라 절제하고 있었다는 건 안다. 그게 기껍지 않았다면 거짓이겠지. 노아는 두 손을 모으고 천천히 눈을 깜박인다. 칭찬 같은 말이었다. 무슨 대답을 해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라멕이 말을 잇는다. 하지만 앞으로는 네 마음 가는 대로 해도 좋다. 수고한 것에 대한 보상이라 생각해도 되고. 그뿐이라는 듯, 그녀가 찻잔을 집어올린다. 노아에게는 방금의 말만으로도 충분한 보상이 되었다는 사실을 그녀 역시 알고 있을 것이었다. 노아가 고개를 숙인다. 어쩐지 기분이 묘하다. 그렇지만 노아는 더 늦기 전에 감사 인사를 내놓는 것을 잊지 않는다. 흐붓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던 라멕이 다시금 운을 뗀다. 헌데. 궁금증 섞인 어조에 노아가 긴장한다. 그사이 들었던 잔을 도로 내려놓으며, 그는 라멕의 이야기에 집중한다. 달리 이유가 있나? 성도가 변하고 있으니 너 역시 그럴 수도 있겠다만. 뭔가 특별한 게 있는지 알고 싶군. 평온한 말투로 건네어진 물음이었으나 노아는 쉽사리 입을 열 수 없다. 그러고 보면 어디로 어떻게 갈 것인지에 관하여는 그리 깊이 생각해 보지 못한 탓이다. 창천기사단이 해체된 지금은 뱅드로를 뒤따를 수 없고, 그렇게 한다고 해도 의미가 없다. 그렇다고 신전의 기사단장이 되고 싶으냐고 물으면 그 또한 답은 아니라서. 노아는 스스로 무엇을 위해야 하는지 좀처럼 갈피를 잡기가 어렵다. 지금껏 제가 받아 누렸던 만큼의 값을 전부 치르고 나면 종래에는 떠나려는 마음이었으므로, 그의 의무는 언젠가 끝이 나는 종류의 것이다. 그렇다면 라멕을 위한 후임을 마련해두는 것도 빠뜨려서는 안 될 과업일지언정. 노아는 이런 책임감 말고도 다른 것을 더 생각하고 싶다. 그러니까 마침내 성도를 벗어난 뒤에 벌어질 일들에 대하여.

그 때에도 차연과 함께할 수 있을까. 왜 그를 떠올리게 되는 건지 잘 알 수 없지만. 노아는 불안하게 날뛰던 맥박이 서서히 차분해지는 것을 느낀다. 그와 지내는 동안 참 많은 것이 변했다. 무엇이든 전처럼 쉽게는 확신할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 가장 그랬다. 그렇게 지금은 잠시 방향을 잃었다고 해도. 노아는 스스로 어디든 가리킬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그는 나아갈 곳을 확정한 이후에도 차연과 함께이고 싶다. 모든 일을 만족스럽게 끝낸 다음이라면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 일렁이는 노아의 얼굴 위로 스쳐 가는 감정들을, 라멕은 어렵지 않게 읽어낼 수 있다. 라멕에게는 제법 낯설기도 한 모습이지만 그녀는 말없이 차를 마실 뿐이다. 입가에 머금었던 미소가 따뜻한 찻물에 녹아든다. 그사이 밤은 무척 깊어 간다. 빈 잔을 내려놓은 라멕이 나직이 말한다. 이만 쉬어도 좋다. 또 이야기할 때가 있겠지. 가볍게 고개를 숙인 노아가 먼저 일어난다. 평안한 밤 되십시오. 라멕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일 뿐 말을 더 붙이지 않았다.

응접실을 나서며 노아는 긴 숨을 내쉰다. 복잡한 생각은 이쯤 해두어도 좋을 것이었다. 우선 눈앞에 닥친 문제부터 해결해도 늦지 않을 테니, 괜히 서두르는 것보다야 마음을 가라앉히는 편이 나았다. 우선 잠을 좀 자야겠지. 그리고 내일이면 다시 차연에게 가는 거다. 가서 일손을 보태다 보면 시간도 금세 날아가버릴 테니, 당분간은 그런 생활로 바쁘게 지낼 수 있을 것이었다. 노아는 애써 눈을 감는다. 번잡한 생각들로 소란한 밤이었다.

18

 

산골짜기 마을로 떠나기 위한 준비도 이제는 어느덧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었다. 책상에 즐비한 문서들을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는 차연의 곁에서 서성이다가도, 노아는 그를 위해 따뜻한 차라도 한 잔 내오는 게 낫겠다는 생각으로 잠시 자리를 피한다. 간단한 심부름은 이미 끝난 뒤였지만 어쩐지 그냥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찬장을 열면 아직 찻잎이 충분히 남아 있다. 그래도 조만간 새것을 마련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노아는 찻잔을 가져온다. 오늘은 우유를 좀 섞어 볼까 싶기도 하다. 노아가 다시 찬장에서 투명한 유리병 두 개를 꺼내든다. 뜨거운 물에서 금세 우러난 찻물에 부드러운 우윳빛 액체가 섞여든다. 설탕 한 스푼을 더해 달콤한 향기가 나는 차를, 노아가 두 손에 조심히 받쳐 들었다. 바깥쪽에서 낯선 기척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한데. 아무래도 잠시 나가 보는 편이 좋겠지. 노아는 한참 바빠 보이는 차연의 책상 끄트머리에 찻잔을 조심히 내려놓는다. 고맙다며 미소하는 그를 향해 마주 웃음짓는다. 그리고 다시 바깥을 향하려는데.

희미하지만 분명한 노크 소리가 들린다. 노아는 문가에서 멈칫, 걸음을 멈춘다. 차연은 그 소리를 듣지 못한 것 같다. 문을 여는 것이 옳을까. 짧은 고민 끝에 노아가 한껏 경계하며 문고리를 잡아 돌린다. 옅은 푸른빛 머리칼이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다. 아는 사람의 얼굴이다. 그러나 긴장을 다 내려놓기에는 아직 섣부르다. 그의 목적을 알지 못하고 안으로 불러들일 수는 없을 텐데. 더욱이 차연에게 그를 들키고 싶지 않은 탓이다. 망설이던 노아는 그를 초대하는 대신 스스로 문 밖으로 빠져나온다. 모처럼 마주하는 조력자는 노아의 행동에 별다른 말을 얹지 않는다. 현. 당신이 왜 이곳에 있습니까. 하지만 어딘지 불편한 듯한 물음에는 그 역시 대꾸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감정 없는 눈동자가 천천히 굴러 노아를 향한다. 종교에 대해 궁금한 것이 있어 왔습니다. 뜬구름 잡는 소리나 마찬가지인 대답에 노아의 눈썹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이런 때에, 하필 여기까지 찾아와 괜한 이야길 늘어놓다니. 평소와 하등 다를 것 없는 말투인데도 무언가 숨겨진 의도가 있는 것만 같아 노아는 괜히 그를 경계하게 된다. 한껏 날을 세운 노아를 주시하던 현이 묻는다. 종교인이 가진 신앙의 기반은 결국 욕망이 아닙니까? 시도 때도 없이 기도하는 그들의 목소리를 익히 들어 알겠지만, 그들은 결국 바라는 것을 구할 뿐입니다. 만약 신을 버리는 대가로 욕망을 이루어준다 말하면, 사람들은 어떤 선택을 할까요. 반대로 종교의 입장은 어떻습니까. 그들의 욕망을 볼모 삼아 권세를 유지하는 것이 종교의 원리가 아닌지. 한 마디, 한 마디가 노아의 심기를 불쾌하게 만든다는 것을 알면서도 현은 말을 멈추지 않는다. 당신은 언제, 어느 때에도 흔들리지 않을 결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깨끗이 떨어져나온 질문에도 노아는 곧바로 답하지 않는다. 천천히 말을 고르며 현의 물음을 곱씹는 동안 노아는 차츰 깨달을 수 있다. 차연과 함께 머무는 이곳에 그가 왜 지금 나타났는지, 자신의 결의를 시험하는 듯한 질문을 왜 건네고 있는지. 자신의 가정이 맞다면 이 모든 일의 원흉은 정말로 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 그러나 이런 가능성을 대놓고 드러내서야 안 될 일이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떠낸 노아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진실로 믿는 자는 신앙을 의심치 않고, 불안에 떨지 않으며, 무엇보다 사리사욕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설령 소망하는 것이 있더라도 내색해서는 안 되지요. 그 말에 현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에게는 턱없이 부족한 답변이었다. 노아도 그것을 알았다. 지금 눈앞의 현보다는 안에 있는 차연이 더 신경 쓰이지만 이대로 등을 보일 수도 없는 노릇. 당장 달려들어 공격할 정도로 얕은수를 쓰지는 않겠으나, 아직 그의 의중을 전부 알지 못하는 만큼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었다. 그는 저와 같은 정교도의 신자가 아니다. 그렇다면 그가 믿고 따르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당신의 말에, 행동에.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까? 그 복잡한 마음을 알아챈 듯 현이 되묻는다. 그의 파리한 손끝이 노아가 닫아버렸던 문을 가리키고 있다. 어서 들어가 확인해 보라는 것처럼. 노아의 안색이 순식간에 창백해진다. 이후로는 생각의 영역이 아니다. 노아가 자리를 박차고 안으로 달려들어간다. 종전의 노크 소리처럼, 희미한, 그러나 분명한 피비린내가 풍긴다. 책상 가득 엎질러진 찻물과 거기 섞여 번지는 토혈이 깨끗한 종이를 더럽히고 있었다. 쓰러진 차연의 입가에도 붉은 자국이 가득하다. 어서 달려가 무슨 처치라도 해야 하는데, 노아는 자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다. 언젠가 차연이 이야기했던 풍경이 평온하던 연구실의 모습을 집어삼키며 펼쳐지고 있었다. 어둡고 푸른 숲, 안개로 가득하여 한 치 앞도 가늠할 수 없는 그 위태롭고 험악한 환각을. 노아는 지금 보고 있다. 나아갈 수도 뒷걸음질할 수도 없이, 그 자리에 붙박인 채로.

노아를 뒤따라 들어온 현이 질린 얼굴로 멈칫대는 그의 어깨너머를 넘겨다보았다. 역시 당신도 환각을 보는군요. 그에게 독을 먹인 것이 당신임을 알고 있습니까. 하여튼 신도들이란. 낮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파고든다. 노아는 부엌의 장면들을 차례로 복기한다. 어지러운 정신으로는 제가 쥐었던 것들이 정말 우유며 설탕이 맞았는지 확신할 수가 없다. 어쩌면 쓰러져 있는 차연의 모습조차 환각이 아닐까, 그러나 이어지는 현의 말이 마지막 희망마저 거두어 간다. 죽을 만한 독은 아니니, 걱정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나는 단지 그 숲에 대해, 이자의 참견을 막고 싶을 뿐입니다. 당신의…… 환각에 대한 것도 확인할 겸.

노아는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나려는 걸음에 힘을 주고 버틴다. 분명 전에는 본 적 없는, 볼 수 없었던 환상이다. 혼란으로 얼룩지는 노아의 표정을 바라보던 현이 느릿한 어조로 말을 잇는다. 지금까지는 그가 마을로 돌아갈 것 같지 않아 보여 내버려 두었습니다만, 이제 아니게 되었으니. 마땅히 포기하게 만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당신을 이용해서라도. 노아를 향하는 그의 얼굴은 미동조차 없이 무감하다. 노아는 눈앞의 현과 쓰러진 차연을 번갈아 응시한다. 뭐라도 해야 하는데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현은 안절부절못하는 노아를 신경 쓰지 않고 계속해서 말하고 있다. 내게도 사정이 있어 그를 죽이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당신이 이렇듯 환각에 속는 일이 반복된다면, 어떨까요. 굳게 다물려 있던 현의 입가가 미세한 웃음기로 일그러진다. 그 뻔뻔한 낯을 더는 참을 수 없다. 어차피 협상은 불가능하다. 이를 악문 노아가 검을 뽑아든다. 그 형형한 눈빛에도 현은 조금도 기세가 죽지 않는다. 기회를 주겠습니다. 그리고 그걸로 마지막이다. 그는 어느 순간 훌쩍 사라지고 없다. 노아가 그를 뒤쫓는 대신 차연에게 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분명 차연의 소지품 어딘가에 해독제가 있을 것이다. 죽을 만한 독은 아니라고 했으니 차연이 제조한 것으로도 충분할 텐데. 머잖아 겨우 약병을 찾아 쥔 노아가 그것을 차연의 입가에 급히 가져다 댄다. 죽은 듯 늘어져 있던 차연이 간신히 해독제를 받아 삼킨다. 거칠게 들썩이던 호흡이 차츰 잦아들기 시작한다. 잘게 떨리던 입술의 경련도 멎는다. 그가 마지막으로 건넨 눈길은 이제 괜찮다고 말하는 듯 해서. 노아는 얼음장처럼 차가워진 제 손을 뒤늦게 붙잡아 쥔다.

 

어질러진 피를 닦고, 차연을 부축해 침상에 누인 다음에야 노아는 겨우 숨을 돌린다. 현의 독이라면 분명 저주가 깃들어 있을 터. 그렇다면 쓰러진 차연이 마음 편히 잠들어 있도록 두지도 않을 텐데. 그를 억지로 깨웠다가는 또 무슨 부작용이 있을지 모르는 노릇이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로, 노아는 방 안을 계속 서성인다. 차연은 어떤 고통을 겪은 뒤에 일어나게 될까. 그가 건너의 환상으로부터 무사히 돌아온다면 그간의 사정을 전부 알려 주리라. 차연이라면 모든 것을 듣고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노아는 여전히 그를 돕기 원했다. 비록 불안과 두려움으로 어두워진 눈이라고 해도, 아직은 차연을 위해 더 싸울 수 있었다. 노아는 불편한 얼굴로 잠든 차연을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얇은 이불을 정돈해 덮어 주고, 그는 의자를 하나 가져다가 차연의 머리맡을 지키고 앉는다. 그가 깨어나기까지 얼마의 시간이 필요할지는 모르겠지만 눈을 떴을 때 혼자이도록 두고 싶지 않았다.

 

*

 

마을 사람들은 날로 이상해져 간다. 근원을 알 수 없는 공포에 사로잡힌 그들은 밤낮없이 하나둘 실종되었다가 에테르를 모두 잃고 변사체로 발견되기 일쑤였다. 제게도 더는 수가 없으니 이제는 혼자서라도 도망쳐야만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차연은 좀처럼 결정을 내리기 힘들다. 언제까지고 미루다가는 결국 돌이킬 수 없게 될 텐데. 아직 어두운 새벽녘, 몇 번이고 뒤척이다 불시에 잠에서 깨어난 차연은 어느 때보다도 선명한 위기감을 느낀다. 겁에 질린 주민들을 달래고 설득하는 일도 이제는 한계에 다다랐다. 그렇지만 한 명이라도 더 구할 수는 없는 걸까. 불편한 마음을 억누르고 다시 잠들려 애쓰던 차연의 귓가에 멀리 웅성대는 소리가 들려온다. 차연은 기척을 내지 않으려 조심하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문간으로 다가가 귀를 기울이면 그것이 다름아닌 주민들의 목소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각자가 하는 말이 죄다 한데 뒤엉켜 쉽사리 알아들을 수 없지만, 몇몇 문장들은 지나치게 분명한 음절로 귓가에 꽂힌다. 쓸모가 있을 것 같아 받아 주었더니 아무래도 수상하다느니, 역시 저 외부인이 원흉인 것이 틀림없다는 요지의 이야기들. 그래도 상황이 심각하니 조금 더 이용하다가 죽이자는 의견까지도 서슴지 않고 내뱉는 그들의 얼굴을 차연은 차마 확인하러 나갈 수 없다. 문고리를 힘주어 붙들었던 손이 힘없이 허공으로 떨어진다. 처음에는 비록 샬레이안으로 가기 위해 이곳에 찾아왔다고 한들, 위기에 처한 주민들을 위해 지금껏 얼마나 애썼던가. 그들도 저를 가족 같은 애정으로 받아들인 줄로만 알았었는데. 선량하기만 하던 그들 모습이 실은 흉악한 비밀을 숨긴 겉포장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니 모든 것이 허무하기만 하다.

침대에 걸터앉은 차연은 불규칙하게 들뜨는 호흡을 억누른다. 어쨌건 지금은 요마에 맞서는 것이 우선이다. 사사로운 불화에 전부 신경 쓰다가는 정말 중요한 문제를 놓치게 될 수도 있었다. 그들의 말대로 나빠져만 가는 형국이니 당장 무슨 일이 벌어지리라고는 생각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합리화하며 이부자리를 정돈하던 차연의 귓가에 찌르는 듯한 비명이 들린다. 그는 고민할 여유도 없이 문을 박차고 뛰쳐나간다. 가까운 숲에서 들린 소리다. 요마가 나타난 걸까. 험한 흙길을 급히 내달리는 차연의 등 뒤로 수상한 그림자가 진다. 그의 걸음이 멎은 곳은 한갓진 공터 한가운데다. 걷잡을 수 없는 한기가 몰아친다. 악취를 내뿜으며 시들어가는 숲 한가운데에서 차연을 반기는 것은 요마가 아닌, 그저 마을의 주민들이다. 각자가 쥔 날카로운 병장기가 모두 차연을 겨눈다. 위험에 빠진 사람 따위는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찾아드는 것은 가장 먼저 안도감이다. 짙게 밀려드는 안개 틈으로 푸른 나비가 날고, 조금씩 거리를 좁혀드는 그들 앞에서 차연은 이제 어떤 설득이나 회유도 소용 없다는 것을 안다. 마도서를 꺼내어 쥔 손이 의지와 무관하게 떨린다. 두려움은 그 뒤에 온다. 지키려던 사람들을 기어이 스스로 해치게 되었다는 절망감이 눈앞을 어지럽게 뒤덮는다. 차연은 무너지려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세운다. 형형한 살기를 내뿜는 주민들은 그를 더 기다려 주지 않는다. 그들이 한꺼번에 달려든다.

이후의 일은 잘 기억해낼 수 없다.

단지 날카로운 비웃음 소리만이 귓가에 선명하다. 바닥에 쓰러진 몇몇을 손가락질하며 숨 넘어갈 듯 깔깔대던 요마의 조소가. 차연은 제 손에 쓰러진 사람들을 차마 제대로 바라볼 수 없다. 길을 잃고 우왕좌왕하던 나머지 주민들이 명을 달리하는 것도 한순간의 일이었다. 짐짓 안타까운 척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손을 내밀던 그 요마의 모습이 아직도 어른거리는 것 같은데. 눈앞이 어두워진다. 손 안에 움킨 마도서가 자꾸만 형체를 잃고 녹아내린다. 지독한 환각이 차연의 어깨를 틀어쥐고 놓아 주지 않는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그의 곁으로, 어디선가 문득 바람이 불어 온다. 이상하리만치 따뜻하고 부드러운 바람이……

 

차연이 눈을 뜬다.

머리맡에 불편한 자세로 기대앉아 잠든 노아의 모습이 보인다. 벌써 몇 번째인지도 모를 악몽이다. 이전과 다른 것이 있다면 곁을 지키고 있는 사람의 존재일 테지. 차연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는다. 노아를 바라보는 그의 눈길이 복잡해진다. 정말 함께 가도 괜찮을까. 고민을 끝맺기 전에 곧 노아가 깨어난다. 뻣뻣하게 굳은 목덜미를 몇 번 매만지던 그가 차연을 보고 반색했다. 괜찮으십니까. 희미한 미소와 함께 차연이 고개를 끄덕인다. 내상이야 남았겠지만 당장 거동에 문제는 없을 테니 다행인 수준이었다.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마른세수를 하던 노아가 무겁게 입을 연다. 불청객이 찾아왔었습니다. ……그에게 도움을 받았던 적도 몇 번 있지만, 이제는 아니게 되었군요. 당신에게 독을 먹이도록 한 것이 그자입니다. 저 또한 푸른 숲의 환각을 보았고요. 그 순간 차연의 얼굴 위로 파문이 인다. 문제의 마을로 들어가지 않았는데도 그 풍경을 목격했다니. 사정이 있어 당신을 죽이지는 않겠다고 말했습니다만. 그자가 당신에게 독을 썼듯 내게도 무슨 수를 쓴 모양입니다. 한숨 섞인 노아의 말, 바쁘게 굴러가던 차연의 생각이 어느 지점에 덜컥 멈춘다. 그렇다면 지금껏 끈질기게 이어져 오던 환상들도 모두 요마의 소행이거나 초자연 현상은 아닐 것이다. 전부 사람의 짓이다. 노아를 찾아왔다는 그자가 원흉이겠지. 차연이 여태 품고 있었던 가정들이 한순간 무너져내린다. 결국 어떤 오만과는 무관한 이야기였던 셈이다.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괜한 자책을 이어 왔던가. 그저 약물의 탓이라면, 그렇게 오랜 시간 갉아먹힌 육신이 기어이 고장난 것이었다면 지금 차연은 차라리 기쁘다. 그간의 모든 고민이 매듭지어지고 드디어 가닥이 잡히기 시작한다. 어지러이 뒤엉켜 있던 미로 같은 앞길이 분명한 중심을 되찾고 모여든다. 마침내 진실에 가까워지고 있음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노아는 한 겹 그늘을 덜어낸 차연의 얼굴을 바라본다. 그가 쉽게는 포기하지 않으리라 막연히 짐작하고만 있던 마음이 확신을 얻어 요동친다. 바라는 것을 위해 끝까지 싸우는 그의 모습을 지켜보고 싶다는 욕심, 그리고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기꺼이 하겠다는 결의가 노아의 투지에 불을 댕긴다. 그런 생각과 달리 말은 느릿느릿 떨어져나오는 것이다. ……저는 여전히 당신을 돕고 싶습니다. 차연은 허락을 구하듯 저를 바라다보는 노아를 향해 부드럽게 미소한다. 괜찮겠나. 재차 확인하듯 노아에게 돌아가는 질문의 답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다. 그가 고개를 끄덕인다. 차연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인다. 그리고 진심을 다해 말한다. 고맙네.

19

 

어쨌거나 현의 방문은 그들에게 오히려 어떤 지표가 되어 준 셈이나 다름없게 된 일이다. 찾던 것을 손에 쥐기까지 머지않았다는 믿음을 가진 뒤라면, 이제부터 남은 것은 그 마을로 언제 떠나느냐 하는 문제뿐. 이런저런 계획을 늘어놓던 그들은 잠시간 고민에 빠진다. 아무래도 당장 길을 떠날 수는 없는 상태였다. 독을 삼킨 차연의 육신에는 아직 상흔이 남아 있고, 노아에게 따라붙은 환각 역시 이제 막 시작되었을 따름이므로. 그러나 얼마쯤 논의 끝에 그들은 이번에도 다음을 기약할 수는 없다고 결론 내린다. 완벽을 기한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이미 많은 시간을 헛되이 지체했다. 돌이킬 수 없어지기 전에 우선 부딪혀 보는 편이 나으리라. 입가에 말라붙은 핏물을 훔쳐내며 차연은 괜찮다는 듯 손을 내젓는다. 불안한 듯 그를 바라보던 노아가 무거운 숨을 삼켰다. 시선을 조금만 비끼면 어두운 창문 밖으로 자꾸만 어두운 숲 속 푸른 불빛이 어른거린다. 그 흔들리는 눈빛을 알아챈 차연이 노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어차피 더는 물러날 길이 없다. 반드시 이겨내야만 했다.

 

아침 일찍 채비를 마치고, 둘은 익숙한 길목으로 들어선다. 여분의 해독제와 회복약을 넉넉히 챙겼으니 그것으로 충분하기를 바랄 수밖에. 이전에는 노아의 강압에 못이겨 밟았던 길을 이제는 차연이 이끌어 가고 있었다. 그때와 다름없이 험준한 산길, 어쩌면 예전보다도 거칠게 뻗어난 나무뿌리들이 서로 뒤엉켜 걸음을 방해한다. 분명 이 즈음부터 시야에 푸른빛이 틈입했던 것 같은데. 차연의 사위는 나무 그늘로 어둑할 뿐 깨끗하다. 어떤 이명도 차연에게는 들리지 않는다. 그는 비탈로 치우치지 않고 길 한가운데를 바르게 걸어간다. 뒤따라오는 노아를 한 번씩 돌아보며 살피는 것도 잊지 않는다. 그는 숨 쉬기가 답답한 듯 자꾸만 목 근처를 매만지고 있다. 둘의 걸음이 천천히 느려진다. 노아가 고개를 거칠게 털어낸다. 가슴 속 이미 움트기 시작한 의심의 씨앗이 그의 눈앞에 검푸른빛 지독한 환각을 비춘다. 예의 그 이명이 차연 대신 노아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혼자서 걷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차연이 손을 뻗어 노아를 지탱한다. 가까이에서 강물 흐르는 소리가 음산하게 들려온다. 지금 노아의 눈 앞에는 파란 나비 떼가 날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차연은 마을로부터 처음 도망쳐나오던 그 때를 상기한다. 공인의 눈을 빌려 걸었던 긴긴 날들을 지나 이제는 나 또한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이 되었구나. 차연은 품을 뒤적여 해독제를 꺼내 노아에게 내민다. 효과가 크게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아무래도 먹어두는 편이 좋을 것이었다. 차오르는 숨을 몰아쉬던 노아가 그것을 받아 들이킨다. 여기까지 와서 돌아갈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차연은 다시 그를 따라 해독제 하나를 입안에 털어넣는다. 시원하고 씁쓸한 맛이 가득 퍼진다. 그때 벌어졌던 참상을 막을 수 없었던 것이 제 오만 때문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진작 깨달았더라면 좋았으련만. 부서진 시계에서 흘러나간 모래알들을 도로 주워담을 수 없듯이, 차연에게는 앞으로의 일들만이 남겨져 있다.

어느덧 숲길의 끝이다. 근처에 민가가 한둘쯤 있었던 것 같은데 눈앞에는 우거진 풀만 한가득이다. 아무리 마을의 초입이라지만 사람 사는 흔적은 눈 씻고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혹시나 안온한 풍경을 기대했던 마음이 철렁 내려앉는다. 누군가 마구잡이로 뜯어낸 듯 가지가 꺾인 나무들이 바닥에 나뒹굴고 있다. 어디선가 지독한 한기가 흘러들고…… 익숙한 악취가 풍긴다. 그들 모두 그것이 어디에서부터 비롯되는 냄새인지 안다. 다름아닌 사람의 시취다. 서로를 마주 보는 눈빛이 흔들린다. 마을은 이미 터만 남은 폐허가 되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노아의 굳어진 표정에 미세하게 균열이 인다. 차연은 천천히 숨을 가다듬는다. 아직 시작에 불과하다. 이렇게 약해져서는 사람들의 억울함을 면밀히 살피기도 힘들다. 걸음을 조금 더 옮기면, 마을에는, 마을이었던 곳에는 온통 불타고 무너진 가옥의 잔해뿐이다. 이래서야 사방이 사각지대라 각자가 떨어져서 살피기도 위험하다. 끈질긴 두통이 노아의 머리를 옥죈다. 나지막이 신음하는 그의 손을 차연이 잡아 이끈다. 뭐라도 좋으니 증거가 될 만한 것을 찾아야 한다. 수상한 기록이 남은 문서라든가, 독을 쓰는 자라고 했으니 사소하게나마 흔적을 남겼을 것이 분명한데.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노아와 함께는 조사가 쉬이 진척되지 않는다. 그가 점점 지쳐 가고 있음을 차연도 알 수 있다. 틈나는 대로 회복약과 해독제를 섞어 마시며 노아는 아득해져만 가는 정신을 붙잡으려 부단히도 애를 쓴다. 처음 한두 마리에 불과했던 나비들이 차츰 시야에 빼곡해진다. 풍광의 모서리부터 흘러내리듯 녹아 무너지는 가운데, 노아는 제가 딛고 선 발아래가 진정 단단한 흙바닥이 맞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다. 까맣게 그을린 기둥에 기대어 있던 노아가 비틀거린다. 그사이 차연은 잿더미 속에서 기어코 무언가를 끄집어낸다. 한번쯤 본 적 있는 필체로 기록된 서류 뭉치다. 많은 부분이 훼손되어 원문을 정확히 알아볼 수는 없지만, 차연은 그것이 어떤 일기, 혹은 일지라는 사실을 알아챈다. 그자가 회수하지 못하고 불태운 것을 보면 미처 발견되지 않았던 모양인가. 차연은 스치는 손길에도 부스러지는 종이를 말없이 어루만진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렀다 해도 이곳은 한때 차연의 집이나 마찬가지었던 마을이다. 그러고 보면 이 자리는 언젠가 가족 같았던 누군가 살았던 흔적인지도 모르겠다. 문득 입안이 쓰다. 그래도 이것만으로는 확실한 증거가 되지 못한다. 차연은 낡은 종잇장을 도로 내려놓는다. 그 미약한 바람결에 희부연 먼지가 일었다.

 

종일 폐허를 뒤지고 다녔건만 특별히 수확이랄 만한 것은 없었다. 잠시 정비를 마친 둘은 바깥이 더 어두워지기 전에 마을 외곽으로 돌아 나가야겠다는 결론에 이른다. 숲을 살피다 보면 새로운 단서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차연은 처음 이곳에 들어섰을 때보다 확연히 파리해진 노아의 얼굴을 살핀다. 그는 아직 버틸 만하다는 듯 손을 휘저어 보이지만, 그 창백한 낯 위에 가득 맺힌 식은땀은 노아가 명백히 무리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숲에서는 해가 금방 저문다. 지금부터라도 더 서두른다면 너무 늦기 전에 탐색을 마칠 수 있을 것이다. 차연이 노아를 재차 부축한다. 더 갈 수 있겠나? 노아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개를 끄덕인다. 조금만 버티게. 그를 안심시키는 차연의 목소리에 미약한 흔들림이 묻어난다. 스스로를 믿게. 그러면 헛것 따위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어. 오랜 기간 헤매 온 내가 보증하네. 그자의 술법은 사람의 의심과 혼란을 매개로 하니…… 무엇보다 자신을 믿는 힘이 환각을 부술 수 있는 열쇠야. 그 말에 노아가 차연을 언뜻 올려다본다. 세상에 완전한 인간이란 없는데도, 어떻게 자신을 그대로 신뢰할 수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금방이라도 깨질 듯한 두통에 가쁜 호흡으로 그가 묻는다. 차연은 잠시 걸음을 늦추고 노아를 바라본다. 잠시 묵묵하던 차연이 천천히 말을 잇는다.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한 고민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한 번뇌도 모두 소용 없네. 그러나 적어도 우리가 했던 선택을 끝까지 지킬 수는 있겠지. ……과거 나에 대한 책임은 모두 지금의 내게 있는 것이니. 노아는 천천히 숨을 가다듬는다. 지난날의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것은 또한 오늘을 살아가는 자신뿐이라는 사실을 되새긴다. 그리고 그것은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일이다. 때로는 완전무결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을 왜 자꾸만 잊게 되는지. 무엇보다 부족한 자신을 곁에서 함께 이끌어 준 이가 여기에 있지 않은가. 해답의 실마리가 차츰 잡히기 시작한다. 노아가 희미한 미소를 머금는다. 이제부터는 혼자 걸을 수 있습니다. 차연이 고개를 끄덕인다. 둘은 계속해서 숲을 헤치고 나아간다.

 

차츰 깊어지는 숲의 어둠 속에서 악취가 한결 짙어진다. 불타고 그을린 흔적이 남은 나뭇가지들, 그리고 내딛는 걸음에 무언가 채여 고개를 숙이면 허옇게 바스라진 사람의 유골이다. 순간 차연의 눈앞으로 십수년 전 스스로 목매단 이의 형상이 겹쳐 지나간다. 누군가 죽어야 했다면 반드시 그만한 이유가 있었으리라. 하지만 죽음으로도 은폐할 수 없는 것이 진실이다. 그렇다면 확실한 단서를 손에 쥐기까지도 이제 머지않았다. 밤이 더 깊어지기 전에 어서 움직여야 한다. 숲의 안으로 얼마나 깊이 걸어 들어왔을까, 지친 기색이 역력한 그들의 눈앞에 난데없이 반듯한 오두막 하나가 나타난다. 마침내 무언가 찾아냈구나. 뒤늦게 긴장이 풀리는 듯하다. 노아가 탄식을 뱉는다. 이곳에 그가 머물렀을 겁니다. 여기까지 도달했다면 더 지체할 필요가 없다. 문을 열고 들어선 그들의 눈앞에 오래지 않아 지하 공간으로 향하는 통로가 드러난다. 차연은 곁에 선 노아를 돌아본다. 괜찮다는 듯, 그가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인다. 파리하게 질려 있던 안색이 그사이 조금 회복된 듯도 하다. 그렇게 어둔 비탈을 내려가다 보면. 새까맣기만 하던 사위가 도로 밝아지는 것을 알 수 있다. 풀을 짓이긴 듯 씁쓰름한 냄새가 풍긴다. 그런데 어느새 귓가에 선명한 웃음 소리.

길목 앞에 버티고 선 두 요마가 그들을 비웃는다.

그중 하나는 차연에게 아주 익숙한 생김이다. 함께 죽으려 했던 상대의 모습이라면 알아보지 못할 리 없다. 다른 하나는 아무래도 마을 사람들의 시신을 매개로 소환된 것일까, 짐작하며 차연은 그들의 어깨너머를 응시한다. 이토록 황량한 숲 속에 요마들이 머물러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응당 무언가를 지키거나 숨기기 위해서일 테지. 과연 저편에는 어렴풋이 텃밭 같은 공간 주변으로 짙푸른 형체가 어른어른 비치고 있다. 기괴한 모양으로 뒤틀리듯 뻗어난 식물의 정체를 구태여 묻지 않고도 쉽사리 알아챌 수 있었다. 분명 저것이다. 지금껏 사람들을, 자신을 괴롭혔던 환각은 모두 저것에서부터 비롯되었으리라. 상세한 취급법이나 가공 과정은 알 수 없겠으나 이렇게 깊은 곳에 숨겨 두었다면 바깥 세상에서는 자생할 수 없는 종류일 터, 하지만 온전히 보존하지 않더라도 증거로 기능하기에는 충분하다. 노아는 이미 전투 태세를 갖추고 있다. 차연은 멀리에 가 있던 시선을 거둔다. 저들끼리 낄낄대던 요마 하나가 그를 도발한다. 이번에도 잘 도망갈 수 있겠어? 아니면 미리 기회를 줄까? 차연은 대꾸하는 대신 노아에게 눈짓으로 신호한다. 동시에 검을 빼어든 노아가 앞으로 돌진한다. 눈부신 빛이 터져나오며 마법과 마법이 충돌한다. 싸움을 이어가는 동안 차연은 그들이 생각보다 대단찮은 상대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간 스스로 성장해냈기 때문일까, 조금쯤 버겁지 않다면 거짓이겠으나 아주 버티지 못할 만큼은 아니었다. 차연은 얼마 남지 않은 회복약을 입안에 털어넣는다. 옆을 곁눈질하면 다른 요마 하나를 도맡은 노아는 아직 잘 싸워 주고 있다. 차연은 망설이지 않고 마법을 연달아 시전한다. 그를 얕잡아 보았던 요마가 눈에 띄게 당황하고 있었다. 순식간에 흥건해지는 피비린내 위로 소름 끼치는 비명 소리가 엎질러진다. 싸움은 오래 이어지지 못하고 끝이 난다. 쓰러진 요마의 시체 너머, 차연은 징그러울 정도로 생생하게 자라나고 있는 식물 한 뿌리를 잡아 뜯는다.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던 노아가 차연을 다시 바깥으로 오르는 길을 향해 인도한다.

오두막 안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조용하다.

그러나 섣불리 문을 열고 나갈 수는 없다. 지금쯤 그자, 현에게도 연락이 닿았을 테니. 차연은 손에 쥔 식물의 줄기를 가만히 들여다본다. 흉측한 개량종은 그 자체로도 괴괴한 광채를 내뿜고 있다. 상념에 잠긴 차연을 일깨우는 것은 노아의 목소리다. 잠시간 정비를 마친 그가 이제 완전히 캄캄해진 창가에서 몸을 떼고 입을 연다. 이제 그만 가지요. 더 지체하면 안 될 것 같습니다. 그 말에 차연도 고개를 끄덕인다. 식물을 잘 갈무리해 챙겨 넣은 차연이 문간으로 걸음을 옮긴다. 문고리를 잡아 돌리는 손이 어떤 예감으로 미세하게 떨고 있다.

그들은 어두운 밤길을 따라 걷는다. 언제 어디서 뭐가 튀어나올지 몰라 한껏 경계하면서도 둘은 속도를 늦추지 않는다. 이미 시간을 너무 많이 썼다. 가능하다면 그자와 직접 마주치고 싶지는 않은데, 생각하던 차연이 문득 낯선 기척을 느낀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숨어 있지만 그만한 존재감을 느끼지 못할 리는 없다. 걸음을 멈추지 않고 그는 노아에게 조용히 속삭인다. 저 앞, 오른편 사선 방향에 마물이 있네. 하나가 아닌 듯하고…… 돌아가는 길은 계속 이런 식일 것 같은데, 어떤가. 노아가 조용히 응답한다. 그는 여전히 그의 검을 손에 쥔 채다. 가능한 처치하고, 적당한 곳에 은신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차연은 잠시 고민한다. 어차피 그자는 자신을 죽일 수 없다고 했으니 굳이 위험을 감수하려는 목적을 따지자면 결정적 증거의 반출을 막기 위함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외려 노아가 위험해질 수도 있는 게 아닌가. 이쯤에서 한 보 물러나는 편이 좋을까, 차연이 망설인다. 품 속의 풀뿌리가 아니라도 이미 모든 진실은 그의 머릿속에 담겨 있다. 외부에 진상을 알리기 위해서는 증거물이 필요하겠으나 단지 그뿐, 지금 이곳이 아닌 어딘가에도 또 다른 단서가 남아 있을 텐데. 차연은 지켜야 할 것에 대해 생각한다. 그를 여기까지 다다를 수 있게 한 노아에 대해, 그리고 그와 함께라면 분명 더 멀리 갈 수 있으리라는 확신에 대해서도. 그러니 이번의 후퇴는 비겁한 도망이 아니다. 정리를 마친 차연이 나지막이 말한다. 무리할 필요 없네. 목적이야 뻔하지 않은가. 잠시 포기한대도 괜찮아, 영영 그만두는 것이 아니니. 우선은 무사히 돌아가는 것을 가장 첫 번째로 하지. 말없이 그의 말에 귀 기울이던 노아가 고개를 끄덕여 긍정한다. 체력도, 마력도 얼마 남지 않았다. 회복약마저도 소진된 지금, 이런 곳에서 쓰러져 버린다면 지금껏 쏟아 온 모든 노력이 무용지물이 될 테니. 노아 역시 근방에 도사리고 있는 마물의 기척을 느낀다. 셋을 세겠습니다. 저를 따라 달리십시오. 하나, 노아가 검을 고쳐 쥔다. 둘, 차연은 주문을 캐스팅할 준비를 마친다. 셋. 순간 자세를 낮추었던 노아가 길게 도약한다. 동시에 전방에서 마물 여러 마리가 풀숲을 헤치고 뛰어나와 그와 격돌한다. 거친 검격으로 길을 뚫으며 달려 나가는 노아를 따라, 차연은 전투를 보조하는 동시에 몸을 숨길 만한 구석을 찾는다. 온통 캄캄한 주변을 에테르시로 살피면 커다란 나무로 빽빽한 산길 저 멀리에 다시 득시글대는 한 무리의 마물과 요마가 보인다. 산을 완전히 빠져나가기까지는 아직 먼 길이다. 먼저 공격해 오는 것들만 상대하더라도 자원은 턱없이 부족했다. 왼편으로 가지. 차연의 말이 떨어지는 동시에 노아가 마지막 마물을 베어낸다. 앞으로 잠시 동안은 여유로울 것이다. 그들은 마지막 남은 힘을 전부 끌어모아 달린다. 쓰러진 나무 한 그루가 길목을 막아 주고 있었다. 둘은 그 뒤로 몸을 숨기고 기대 앉는다. 턱끝까지 차오른 숨을 힘겹게 몰아쉬면, 금방이라도 각혈할 것처럼 목 안 깊숙한 곳에서 피비린내가 올라온다. 차연은 간간이 고개를 내밀어 주변을 살핀다. 처음 그들을 놓치고 헤매던 요마가 차츰 범위를 좁혀 오고 있었다. 이대로 오래 버틸 수는 없다. 차연은 오두막에서 챙겼던 식물을 꺼내어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지금 와 이것을 포기한다고 해서 무사히 돌아갈 수 있다는 보장이 될까. 아니면 그 오두막 안으로 들어갔던 그 때부터 지금까지, 모든 것은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일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를 바라보던 노아가 차연의 손을 말없이 밀어 그 식물을 도로 챙겨 넣도록 한다. 차연이 의아한 기색으로 노아를 본다. 그는 어느 때보다도 단단한 목소리로 차연에게 말한다. 차연. 나는 당신을 믿습니다. 당신이 나의 가능성을 믿어 주었던 것처럼, 어쩌면 그 이상으로. 노아가 꺼내드는 것은 낯익은 물 크리스탈이다. 뱅드로의 무덤에 함께 묻혔어야 할 이것이 왜 그의 손에 들려 있는지, 그만큼 소중한 물건을 이런 순간 꺼냈다는 것은 도무지 어떤 다짐인지. 차연은 그가 희생을 말할까 두렵다. 다른 방법을 생각하겠다고, 어떻게든 돌파구를 찾아내겠다고 설득해야 하는데. 차연은 순간 말문이 막힌 채 그를 올려다본다. 그러나 노아는 여전히 흔들림 없는 얼굴로 고개를 젓는다. 홀로 감당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나 또한 믿으니 반드시 싸워 이기겠습니다. 약속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긴박한 상황인데, 이상하게도 차연은 마음이 누그러진다. 모든 것이 다 잘 될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든다. 노아가 차연에게 부탁한다. 그러니 이번에도 도와 주시겠습니까. 차연이 고개를 끄덕인다. 다른 대답이 존재할 리 없었다. 그러면 노아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번진다. 그가 곧 물 크리스탈에 에테르를 흘려넣는다. 크리스탈을 쥐고 있는 그의 두 손 안에서 눈부신 광채가 터져나온다. 노아는 방금까지 등을 기대고 있던 나무둥치를 단숨에 밟고 올라 마물과 요마들이 한데 모여 웅성대는 곳으로 뛰어든다. 둘을 찾아 멀리에서 헤매고 있던 것들까지도 노아가 뿜어내는 빛을 향해 몰려들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순간 그는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크리스탈의 푸른빛이 일렁이는 자리마다 어지러운 환각 속 풍경이 씻겨 나간다. 분명 한밤중인데 눈앞은 더없이 밝고 시원했다. 답답하게 닫혀 있던 시야가 환하게 트인다. 까맣게 몰려드는 공격을 하나씩 검날로 쳐낼 때마다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몸을 할퀴는 통증도 지금은 아프지 않았다. 이대로 조금만 버티면 된다, 머잖아 차연의 캐스팅도 끝날 것이다. 혼자서 해치울 수 없는 적 앞에 사력을 다해 버티고 있는 지금은 마치 어릴 적 뱅드로에게 구원받았던 그 때 같기도 하다. 노아는 문득 이만큼 자라난 제 모습이 생경하다. 그때와 다른 것이 있다면, 그를 도우러 올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다는 점이겠지. 한계에 다다른 육체가 핏물을 토해낸다. 노아는 의지를 반하고 꺾이려는 무릎에 억지로 힘을 주어 몸을 일으킨다. 그가 뒤편을 스치듯 돌아본다. 때맞추어 차연의 마법이 완성된다. 크리스탈의 그것을 압도할 만큼 거대한 섬광이 싱그러운 빛을 내며 폭발한다. 노아를 집요하게 둘러싸고 있던 적들이 한꺼번에 재로 화한다. 따스한 기운이 포근한 여름날 미풍처럼 노아의 상처입은 뺨을 부드럽게 쓸며 지나간다.

그러고는 암전이다.

 

한바탕 폭풍이 잦아들고, 힘겹게 몸을 일으킨 차연은 저만치 쓰러진 노아에게 다가간다. 이곳저곳 찢긴 상처에서 피가 흐르고 있다. 한눈에 보기에도 심각한 부상이었지만 다행스럽게도 미약하나마 숨은 아직 붙어 있었다. 차연은 죽은 듯 의식을 잃고 누워 있는 그를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오랜 기간 손에 들지 못했던 마도서를 이제야 다시 꺼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모두를 구하지 못했던 자신을 탓하며 내려놓았던 그것을, 이제는. 저를 구해준 것이나 다름없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펼치리라고. 크고작은 상처로 얼룩진 것은 차연 또한 마찬가지다. 누적된 내상 탓에 계속해서 울컥이며 치솟는 핏물을 삼키면서도, 생채기로 가득한 그의 손끝이 마도서의 거칠고도 매끄러운 책장을 천천히 넘겨낸다. 그 감각은 차연에게 더없이 익숙한 것이다. 그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노아를 위해 치유의 빛을 피워 올린다. 마른 땅을 적시며 흘러 넘치던 피가 거짓말처럼 멎는다. 불규칙하게 들썩이던 노아의 호흡도 정상 궤도로 돌아온다. 응급 처치만으로도 남은 마력을 거의 소진한 차연이 숨을 몰아쉬며 주저앉는다. 회복약도 더는 남아 있지 않은 지금, 노아의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치료를 위해서는 그를 이슈가르드로 돌려보내는 것이 나을 터였다.

잠시 몸을 추스른 차연은 노아를 간신히 부축하며 걷는다. 성도 내부로 진입할 수는 없으니 길목 어귀의 점성대에 그를 맡기는 편이 좋겠다는 판단이다. 그사이 꺼내어 쓴 가면이 피와 땀으로 얼룩진 얼굴 위에서 불편하게 들썩인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더한 위험 부담을 떠안을 필요는 없다. 뒤랑데르와 다시 얽히는 일은 피하고 싶었다. 발목을 잡히기에는 타이밍이 나빴다.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자꾸만 땅으로 끌려 내려가듯 늘어지는 노아의 몸을 차연이 힘주어 붙든다. 혼곤한 사이 둘은 어느덧 산의 초입을 지났다. 그렇다면 이제 점성대까지도 머지않았다는 뜻이다. 이를 악물고 걷던 차연이 문득 자리에 멈춰 선다. 칠흑같이 까맣기만 하던 하늘이 어느 샌가 푸스름한 빛으로 밝아 오고 있었다. 비로소 여명이다. 저 멀리 끝없는 지평선 너머에서 붉은 태양이 슬금슬금 고개를 내민다. 이 풍경을 함께 볼 수 있다면 좋았으련만. 차연은 파리하게 질린 노아의 얼굴을 곁눈질한다. 상태가 더 나빠지기 전에 어서 그를 침상에 눕혀야 한다. 차연이 다시 걸음을 재촉한다. 동이 완전히 트기 전에 일을 끝내야 했다.

 

점성대에서는 예상외로 별말 없이 환자를 받아주었다. 노아의 인계를 마치고, 차연은 가면을 눌러쓴 채 서둘러 자리를 떠난다. 그를 향하는 숱한 눈초리를 느끼지 못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렇다면 더더욱 그곳에 머물 이유가 없었다. 차연에게는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아 있다. 우선은 올드 샬레이안으로 돌아가야겠지. 얼마간 회복을 마친 뒤에는 다시금 연구에 전념해야 할 것이다. 철학적 고찰 내지 진실에의 탐구, 영웅으로 활약하고 있는 아들 공인에 대한 지원 그리고 모든 사건의 원흉이었던 현이라는 자와 관련해 나머지 추적을 이어가는 것까지. 그를 위한 일거리는 차고 넘친다. 당장은 아득한 심정일지라도 하나씩 차근히 매진하다 보면 다시 길을 찾게 될 테니 조급할 필요 없다고, 차연은 스스로를 다독인다. 걸어가는 눈앞은 어느새 부신 태양빛으로 완연하다. 다시는 어둠에 좀먹히지 않을 것처럼 반짝이는 그 길을 걸으며 차연은 마침내 후련하게 웃음짓는다.

20

 

한동안 입원 치료를 마치고, 이슈가르드로 복귀한 노아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뱅드로의 무덤을 새롭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의 묘는 성도와 가까운 곳 커르다스에 마련되었다. 볕 좋은 오후, 비석 곁으로 둘러선 기사들은 저마다 고개를 숙이고 예를 표한다. 개중에는 이제야 그가 제대로 쉴 수 있게 되었다며 눈물 흘리는 이도 있다. 조금쯤 착잡한 심정으로, 노아는 미리 준비해 온 기도문을 읊기 시작한다. 곁에 나란한 기사들이 훌쩍이며 애써 착잡한 마음을 가라앉힌다. 그를 위한 애도가 너무 오랫동안 유보되었다는 생각. 저마다의 안에서 제때 해소되지 못한 슬픔이 모두의 등 뒤에 무거운 그늘로 매달려 있었다.

짧은 묵념을 마치고, 기사들이 저마다 번갈아가며 뱅드로에게 한 마디씩 말을 건네는 동안 노아는 깔끔하게 꾸며진 비석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 거기에는 그저 뱅드로의 이름만이 가지런히 새겨져 있을 뿐이었으나 그를 기억하는 이들에게는 달리 거창한 수식 없이도 충분할 것이었다. 그의 이름자는 앞으로도 노아에게, 그리고 다른 기사들에게도 마찬가지로 변함없는 지표가 되어 줄 터였다. 같은 참극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그리고 다시금 앞으로 나아갈 몫으로 남겨진 미래를 위해서도.

 

조촐한 추도식을 마치고, 노아는 제멜 저택으로 돌아간다. 아직까지는 치료를 위해 오갈 일이 잦았으므로 거처를 완전히 옮기기에는 이른 감이 있었다. 느른한 햇살이 내리쬐는 탁상에는 그간 노아에게 배달된 우편물이 가지런히 쌓여 있다. 아무런 기대 없이 가볍게 집어든 그것들 중 하나에 반가운 이름이 쓰여 있었다. 차연이 보낸 서신이었다. 겉봉에 적힌 날짜가 꽤 지난 것을 보아하니 한참 병상에 누워 있었을 그때에 도착했던 모양이다. 잠시 망설이던 노아가 페이퍼나이프를 들어 붉은 밀랍으로 된 봉인을 뜯어낸다. 아직은 낯선 필체가 종잇장 가득 빼곡하다. 그것을 손에 쥐고 노아는 천천히 자리에 앉는다. 시간을 들여 성의껏 읽고 답장을 보내려는 것이다.

 


자네가 돌아와 이걸 읽을 때쯤이면 어느 정도 회복한 다음이겠지. 지금은 좀 지낼 만한지 모르겠군. 당시에 급한 대로 필요한 처치는 했네만 아무래도 꾸준한 치료를 받아야 할 것 같아 자네를 두고 갈 수밖에 없었네. 신원이 확실치 않은 몸으로 성도에 자유로이 드나들기란 힘든 일이기도 하고. 아쉬운 일이지만 그쪽에서 나름대로 자네를 잘 보살폈으리라 믿네. 전투의 후유증이 너무 오래 가지 않는다면 좋겠군. 어서 털고 일어나야지, 자네 앞으로 남은 일 역시 많기도 할 테니.

근황 이야길 좀 해야겠지.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직까지는 모든 게 순조롭네. 그날 발견했던 식물은 샬레이안에 잘 보관되어 있고, 믿을 만한 동료들 그리고 스승님과 함께 분석을 이미 마쳤어. 지금은 해독제를 개발하는 중이네. 동시에 마을에서 있었던 사건과 환각 물질의 존재에 대해 주변국에 전달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했고. 같은 일이 또 벌어져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이렇듯 정보를 공유한다면 모두가 좀 더 경계할 수 있겠지. 여지껏 숨어 나타나지 않는 그자의 자취를 쫓는 데에도 도움이 될지 모르고.

자네에게 부탁 하나만 남기고 싶네. 이슈가르드에 이와 관련한 내용을 알리는 건 좀 더 나중이 되었으면 해. 연구를 마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지는 않으니, 그때 자네가 직접 소식을 전해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네. 문제의 근원지와 가장 가까이에 자리잡은 이슈가르드인 만큼 너무 서두르고 싶지는 않군. 현재로서 내가 누구보다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은 노아, 자네뿐이야. 그러니 당분간 때를 기다려 주면 좋겠네.

심각한 이야기는 이 정도면 되었겠지. 나는 지금 라벤더 안식처에 공인과 같이 지내고 있네. 이곳에서 크게 불편한 것 없으니 내 안부는 걱정하지 말게. 필요한 일이 생기면 언제든 겉봉에 적힌 주소로 연락 주고. 이만 마치겠네. 곧 다시 편지하지.


  

길지 않은 편지를 몇 번 되짚어 읽은 끝에 노아가 고개를 들고 긴 숨을 뱉는다. 자리를 비운 사이 큰일이 없었다니 무엇보다 다행스러운 마음이다. 노아는 차연의 부탁에 대해서도 길게 고민하지 않는다. 차연의 판단을 믿기 때문이기도 했고, 스스로도 그편이 나으리라 생각하고 있기도 했다. 연구가 마무리되기 전에 섣불리 알렸다가 일을 그르치는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을 테지. 누가 어떻게, 어디까지 엮여 있는지 알 수 없는 만큼 당분간은 함구하는 것이 좋을 듯했다. 가벼운 편지 낱장을 조용히 내려다보던 노아는 곧장 서랍을 열어 종이와 펜과 잉크를 꺼내든다. 코를 톡 쏘는 잉크의 독한 향기며 오랜만에 쥐어 보는 필기구의 감촉이 제법 낯설다. 얼마간 고민하던 그가 펜촉을 잉크병에 살짝 담근다. 망설임도 잠시, 단정한 필체가 빳빳한 종이 위로 까맣게 윤을 내며 미끄러진다.

 


그간 안부 전하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씀 먼저 올립니다. 한동안 병상에서 거동이 자유롭지 못했던 탓에 미처 서신을 확인할 여유도 없었군요. 제멜 저택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아직은 경과를 지켜볼 필요가 있다고 하여 당분간 통원 치료를 계속해야겠지만, 건강은 차질없이 회복하고 있는 중이니 그리 염려하지 않으셔도 괜찮겠습니다. 걱정 끼쳐 드린 것 같아 죄송한 마음이 큽니다. 그렇지만 사과보다는 감사 인사부터 전하는 편이 좋겠지요. 함께 지내며 신세를 정말 많이 졌습니다. 덕분에 무사히 복귀할 수 있었습니다. 베푸신 은혜에 대해서는 응당 보답하는 것이 옳겠지요. 그간 자리를 비웠던 만큼,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껏 미루었던 일들로 ― 앞으로는 요직에 오르기 위해서도 ― 다소 바빠지겠으나 당신이 필요로 하신다면 부탁하시는 건에 대해서도 기꺼이 소식 전하겠습니다.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어 부득이 몇 줄 덧붙입니다. 당신 안부는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지만, 그날 부상이 컸던 것은 당신 또한 마찬가지였을 텐데요. 나에게 그러하듯 당신에게도 남은 일이 있다는 것은 이해합니다만 너무 무리하지 않아도 좋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이미 많은 여정을 지나 오지 않았습니까. 육체의 상흔은 금세 아물지만 가슴에 새겨진 것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 법이기도 하니, 모쪼록 무탈하고 평안한 날들 보내시기를 소망하는 바입니다. 다시 만나뵙게 될 날을 기대하겠습니다.


 

문장을 끝맺고 노아는 나서도 왜인지 모를 아쉬움에 한참 쥐고 있던 펜을 내려놓는다. 잉크가 마르기를 기다리는 시간은 잠깐이면 충분하다. 노아는 편지를 가지런히 접어 넣은 봉투 위로 붉은 밀랍을 녹여 붓는다. 둥글게 쏟아지는 봉인 위로 제멜의 인장이 찍힌다. 그는 곧장 시종을 불러 서신의 배달을 부탁한다. 답신이 늦어진 만큼 하루라도 빨리 차연에게 전해졌으면 하는 마음이다. 이다음 회신은 언제쯤이면 돌아올까, 기대할수록 시간의 흐름은 느리게만 느껴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노아는 아쉬움을 감출 수 없다. 그렇다고 피차 바쁜 마당에 그를 재촉하거나 찾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니 그저 기다리는 것밖에는. 노아는 손끝으로 어루만지고 있던 차연의 서신을 잘 갈무리해 서랍에 보관한다. 언제까지고 책상 앞에 한가롭게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다음 연락은 노아가 답신에 대한 것을 거의 잊기 직전에 도착했다. 그 무렵 성도에 출현한 위신수의 탓으로 모두가 정신없이 토벌을 준비하고 있을 즈음이었다. 가지런히 쌓여 있는 우편물을 대충 훑어보며 넘기던 노아의 손길이 차연의 이름을 발견하는 순간에 뚝 멎는다. 다른 서신을 모두 떨어내고 차연의 편지만을 남겨둔 그가 시계를 흘끗 올려다본다. 답신 한 통을 보내기에는 아직 충분하다. 페이퍼나이프를 꺼내들 정신도 없이 손으로 봉인을 뜯어낸 노아가 편지를 꺼낸다. 그사이 눈에 익은 필체가 빼곡이 펼쳐진다.

 


연락이 늦어지게 되어 미안하네. 그사이 내 스승이나 다름없는 이와 재회가 있었어. 그에게 약간의 문제가 생기는 바람에 회신할 여유가 없었네. 그 건은 지금 해결이 되었으니 자세한 이야기는 차치하고, 자네도 알다시피 성도에도 위신수가 나타났다는 이야기를 공인에게서 전해 들었네. 토벌을 위해서는 굳센 마음을 지녔으면서도 마법전에 능란한 자를 필요로 한다지. 그리하여 조만간 내 아들과 함께 성도를 방문하게 될 것 같네. 지금 나의 신분으로는 대심판의 문을 별탈 없이 넘을 수 있을지 모르겠네만, 만약을 대비하여 자네에게 도움을 구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군.

근래 일에 대한 얘길 좀 더 하자면, 나는 자네 바람대로 무탈히 잘 지내고 있네. 그런 만큼 자네에게도 별일은 없는지 알고 싶군. 한때는 밤낮 꼬박 함께하던 사이인데, 자네와 이토록 오랫동안 떨어져 지내려니 영 허전한 데가 있어. 머잖아 얼굴을 맞댈 날이 오겠지만 그래도 하나 묻자면 자네도 내가 그립지 않느냐는 것이네. 이만 줄이지. 답신 기다리겠네.


 

노아는 야트막한 한숨과 함께 이마를 짚는다. 차연의 스승이라는 이에게 생겼다는 문제도 신경 쓰이거니와 위신수 토벌을 돕기 위해 공인이 올 예정이라는 소식도 반갑기는 하지만, 그를 아득하게 만드는 것은 조금만 더 기다리면 차연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가 마지막으로 덧붙인 물음 때문이다. 그립지 않느냐고, 그런 질문은 아무래도 소용이 없다. 말로 직접 전하지 않았다뿐이지 그간 홀로 지내는 동안 얼마나 그를 생각했는지. 온전히 체감하지 못했던 만큼의 그리움까지 이 순간 한꺼번에 밀어닥치는 것만 같아 한참 눈을 내리감고 있던 노아는 답신을 적으려 손을 뻗는다. 어차피 그들이 곧 방문할 테니 긴 말은 필요 없을 테다. 어떤 대답을 해야 좋을까, 한참 고민하던 그는 결국 간단히 두 줄의 문장만을 써내린다. 그러는 동안 노아의 입가에 어느새 선명한 미소가 고인다.

 


보고 싶습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봉인을 찍고 서신을 갈무리한 노아가 그것을 품속에 소중히 챙겨 넣는다. 이번의 회신은 시종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부치려는 것이다. 누군가 이유를 묻는다면 명확히 답하지는 못하겠지만 어쩐지 그러고 싶은 기분이었다. 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낼 만한 가치는 충분했다. 무거운 문을 밀어젖히고 바깥으로 나가는 발길은 내도록 가볍기만 하다. 한 발짝 내디딜 때마다 상쾌한 바람과 햇살이 쏟아지며 노아를 반긴다. 돌아온 이곳에서 맞이하는 매일이 새롭게 활기를 띠는 기분, 어쩌면 차연을 만난 뒤로부터는 늘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환한 풍경을 온 몸으로 새삼스레 느끼며 노아는 걸음을 재촉할 뿐이다.

21

 

단 두 개의 문장만으로 간단히 돌아온 답신을 열어본 차연이 슬몃 웃음짓는다. 회신을 보낼까, 하다가도 펜을 도로 내려놓은 그가 책상 한켠에 놓여 있는 물 크리스탈에 눈길을 주었다. 노아에게 미처 돌려주지 못한 크리스탈은 여전히 청량한 푸른색을 머금고 있다. 그것은 언뜻 노아의 눈동자에 깃든 색깔과도 비슷하다. 그뿐만이 아니라도 크리스탈을 바라볼 때면 그 주인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을 구태여 눈에 띄는 자리에 꺼내 놓은 이유이기도 했다. 별탈 없이 지낸다고 했으나 언제나처럼 과로하고 있지는 않을지. 남 걱정할 때가 아니라는 말을 한 번쯤 해줄 걸 그랬다. 차연이 희미하게 흘려넣은 에테르에 감응해, 크리스탈로부터 시원한 물빛이 확산한다. 그렇게 방 안 가득 일렁이는 빛 속에서 차연은 의자에 기대앉은 채 노아를 떠올린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와 함께했던 시간들이 감은 눈꺼풀에 아스라한 편린으로 환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잘못된 맹신에 얽매여 있던 그 때로부터 혼란하던 과도기를 지나 마침내 오늘까지. 새로운 신념을 붙들고 바로 선 그의 미소가 눈앞에 선연하다. 처음 마주했던 이단심문관과는 도무지 같은 사람이 아닌 듯하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달라진 모습이었다.

한참 눈을 내리감고 있던 차연은 문득 자리에서 일어나 거울 앞에 선다. 언제나처럼 희고 단정한 얼굴 곁으로는 불에 그을린 탓에 군데군데 녹아 엉킨 머리칼이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다. 이것도 정돈을 좀 해 주어야 할 텐데. 노릇한 갈색으로 버석해진 머릿결 끄트머리가 손 안에서 부스러진다. 그것을 만지작거리며 차연은 그가 쥐고 돌아온 단서를 통해 바꾸어 낸 것들을 떠올린다. 결코 헛되이 사라지지 않을 진실에 대해, 쉽게는 바스러지지 않을 미래에 대해. 이단심문관에게 쫓겨 피 흘리던 그때로부터 참 많은 시간이 흘렀다. 온전히 가진 것 하나 없이 도망쳐 다녀야 했던 그에게는 이제 남부럽지 않은 아들도 있고, 곁을 내줄 수 있는 동료도 생겼다. 저를 단단히 옭아매고 있던 무언가가 씻은 듯 사라진 기분으로. 차연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을 향해 부드럽게 미소지어 보인다. 여기까지 정말 많은 것을 변화시켜 주었다고, 덕분에 이렇게 치열하게 살아낼 수 있었고 그래서 고맙다고. 그러면 은판 너머의 그가 차연을 향해 똑같은 얼굴로 마주 웃는다.

차연은 날이 잘 선 가위를 찾아 손에 쥔다. 여태껏 이슈가르드의 변화를 지켜봐온 만큼 제게도 무언가 새로운 모습을 주고 싶었다. 그러니 기분전환 삼아 머리를 잘라 보는 것도 좋겠지. 미용사를 찾아갈 수도 있겠지만 그편은 훨씬 번거로우니, 스스로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다. 상한 부분만을 정리해도 괜찮겠으나 차연은 훨씬 과감한 길을 고른다. 차가운 가윗날이 뒷목에 닿는다. 망설임 없는 손 안 가득 움켜쥔 머리칼이 단숨에 썩둑, 잘려나간다. 은백색 머리채가 마룻바닥에 떨어진다. 순식간에 허전해진 목덜미를 몇 번 매만져 보던 차연이 마저 가위를 움직여 머리를 정돈한다. 조금은 서투른 솜씨였지만, 가위질이 끝나고 거울에 비친 차연의 모습은 생각보다 깔끔하다. 이제 남은 것은 뒷정리뿐이다. 공인이 돌아와 제 모습을 보면 놀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뒤늦게 하며, 차연은 빗자루를 들고 열심히 바닥을 치운다. 그 애와 함께 이슈가르드로 떠날 날도 이제 머지않았다. 마냥 편하기만 한 마음으로 향할 수 있는 것은 아니겠으나 어떤 일이든지 직접 부딪혀보기 전에는 모르는 법, 정리를 마친 차연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일어나 여장을 챙기기 시작한다. 언제든 이슈가르드로 출발할 수 있도록.

 

*

 

모르도나를 지나 어느덧 커르다스 중앙고지까지, 대심판의 문 앞에 다다른 차연과 공인은 너머로 들어서지 못하고 멈춰 선다. 차연의 얼굴 윗부분을 가린 반가면 때문이다. 그들을 막아선 위병이 공인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지금 같은 때에 그런 정도의 보증으로는 아무래도 부족했다. 신원이 확인되지 않는다면 누가 종말의 야수로 변했는지 파악할 수 없다는 명분 아래에 차연은 진입을 거부당한다. 차연은 곤란한 기색이 역력한 아들의 어깨를 토닥인다. 실은 크게 걱정할 것 없었다. 그가 제때 나타나 주기만 한다면. 차연은 사무적인 태도로 일관하는 위병의 등 뒤를 응시한다. 과연 저만치에서 누군가 다가오는 것 같기도 한데. 기척을 느낀 것은 위병 또한 마찬가지다. 내내 미심쩍은 눈으로 차연을 바라보던 그가 몸을 돌려 노아를 맞는다. 짧은 경례가 이어진다. 제멜의 기사단장께서 무슨 일이십니까? 노아는 곧장 차연을 향해 목례한다. 공인 또한 반가움을 숨기지 않았다. 간단한 인사치레가 끝나고서야 노아는 위병에게 대답을 돌려주었다. 그의 신분을 대신 보증하겠습니다. 문제가 생긴다면 모든 책임은 제게 물으십시오. 갸우뚱한 얼굴로 머뭇거리다가도, 위병은 금세 고개를 끄덕이며 노아의 말에 수긍한다. 차연의 정체가 무엇이든 그를 위해 나선 것이 다른 누구도 아닌 제멜의 기사단장이라면야 그 자체로 충분한 증명이 된다.

대치는 싱겁게 끝난다. 노아는 공인과 차연을 안내하듯 곁에서 나란히 걷는다. 멀리 에테라이트 광장에서 푸른빛이 일렁이고 있다. 먼저 대화를 시작하는 것은 차연이다. 기사단장으로 임명받은 걸 축하하네. 공인이 먼저 알았더라면 내게도 이야기했을 텐데, 소식을 들은 적 없어 몰랐군. 노아는 그 말에 조금 미소짓는다. 최근의 일입니다. 직접 말씀드리고 싶었는데 한 발 늦었네요. 차연은 가볍게 손을 내젓는다. 괜찮다는 뜻이다. 그간 고생 많았네. 위신수 문제가 어서 해결되기를 바라야겠지. 필요한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좋겠군.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걷던 노아가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짧은 탄성을 뱉는다. 어디에서 머물 예정이십니까? 마땅히 정해두지 않으셨다면 제멜 저택으로 초대하고 싶습니다. 눈치를 살피며 함께 걷던 공인이 그 말에 불쑥 끼어든다. 저는 오랜만에 포르탕 가에 가보려고요. 아들의 선언에 잠시 고민하다가도, 차연은 기꺼이 노아의 초대에 응하기로 한다.

 

잡다한 이야기를 나누며 안부를 주고받는 사이 그들은 금세 광장에 도착한다. 일행을 기다리고 있던 아르투아렐과 아이메리크가 반갑게, 그러나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전달받은 내용에 따르면 위신수로 변한 엘레젠 남성의 신원은 파악 불가능하며, 그는 성도 상공에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중이라고 했다. 때마다 발생하는 야수화는 신실한 정교의 신도에게만 일어난다고. 차연은 그 모든 이야기를 차분히 듣는다. 반면 노아는 제법 결연한 표정이었다. 그는 단지 휘하의 기사들을 통솔하기 위해 나와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미 벌어진 일의 수습만 해서야 상황에 휘둘리기만 할 뿐이다. 공인과 차연이 동행한 만큼 더더욱,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할 터였다.

우선은 야수화를 직접 목격하고 당시의 증언을 도운 부사제 클렘의 사라진 동료들을 조사하는 데에서부터 시작하기로 정한다. 일행은 이제 커르다스의 서부고지로 향한다. 겁에 질린 이탈자들을 그대로 내버려두는 편이 더 위험하리라는 판단이었다. 그들을 발견하는 것은 생각만큼 어렵지 않았다. 클렘이 고르가뉴 목장에 머물고 있던 이탈자들을 먼저 알아보았다. 그러고는 긴긴 설득과 회유가 이어졌으나, 도망친 이단심문관들은 성도로 복귀하기를 극구 거부했다. 그중 하나의 손가락질이 아이메리크를 향했다. 정교의 역사를 더럽힌 당신 때문에 성직자들이 규탄당하고 있어. 신실한 우리들만이 야수로 변한다니 말이나 되는가? 전부 모함이다! 그는 끝도 없이 성화를 토하며 고함친다. 핏발 돋아 붉어진 눈이 묘한 광기로 번들거린다. 언제까지고 이어질 것 같던 그의 외침이 일순 뚝 멎는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씨근대던 그가 머리를 부여잡는다. 쓰러질 듯 휘청이던 그의 몸체가 단번에 뒤로 넘어간다. 공기의 흐름이 요동친다. 거기에는 더 이상 사람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자리하지 않는다. 그다음 순간 그들이 보는 것은 결국 한 마리의 야수다. 방금 전까지 언성을 드높이던 그것의 뒤에 무리지어 동조하던 이탈자들이 한바탕 비명을 지른다. 그 소리에 놀란 것인지, 혹은 변이한 제 모습을 견디지 못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막 태어난 야수는 저편의 공터를 향해 내달리기 시작한다. 그것을 가장 먼저 쫓는 이는 공인이다. 남은 심문관들에 대한 것을 맡겨두고 차연과 노아도 뒤이어 달리기 시작한다. 아직 희미하게나마 의식이 남았는지 힘을 다해 도망치던 야수의 등뒤로 수차례 공격이 날아든다. 멀리 가지 못하고 붙들린 그것이 고통에 몸부림친다. 야수를 향한 처치는 가차없이 이어진다. 셋의 합세에는 그것도 오래 버틸 수 없다. 그것은 곧 둔중한 소리를 내며 쓰러진다. 흙먼지 사이에 나뒹구는 사체를 바라보며 노아는 조금쯤 복잡한 심경이다. 저것의 혼은 이미 모두 썩어 없어져 환생조차 이룰 수 없게 되었으리라. 끝까지 도망치려 애쓰던 모습은 아직 살아 있었을 때의 의지, 그 부산물에 불과하겠지만.

신전기사단 본부로 돌아와 노아는 스스로 갈무리해 놓은 결론을 차근히 풀어낸다. 야수화한 이단심문관이 옛 체제에 미련을 두었다는 사실을 말하려면 그간 숨겨진 정교의 진실 또한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의 위조와 은폐, 야만신과의 결탁이나 교황의 사악한 계획 같은 것들. 그럼에도 공화제가 이룩한 성과는 미미하다는 것까지도. 정치와 종교는 분리되었으나 개혁은 여전히 지지부진하다. 신도들의 혼란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 이러한 상황이 야수화와 연관되지 않았으리라고는 누구도 단언할 수 없다. 무엇보다 신을 가장 의지했던 자들이 크게 상처입었을 테니 그들의 불안과 슬픔이야말로 가장 좋은 양식이 되었을 터였다. 여러 가능성에 대한 논의 끝에 그들은 클렘에게서 들을 이야기가 아직 남았다는 합의점에 이른다. 성도로 다시 인도해 데려온 성직자들의 상태가 안정된 뒤라면, 변이한 이의 생전 일들에 대해서도 더 알 수 있을 것이다. 우선은 그렇게 일단락되었으나 회의에 참석했던 중 누구도 개운한 표정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잘될 거라는 공인의 위로에는 모두가 어렴풋하나마 미소를 머금는다.

가볍게 인사를 마치고, 공인은 아르투아렐과 함께 포르탕 저택으로 향한다. 그는 공인이 아홉 구름에서 머물렀던 일에 대해 말하며 백작이 서운함을 표했었노라 전한다. 공인은 약간 곤란한 듯 웃는다. 창천 거리가 잊힌 기사 주점과 가까웠다거나, 당시에는 프란셀 경과 동행할 일이 많아 포르탕에 머물기는 어려웠다거나 하는 변명 아닌 변명과 함께. 그들의 사라지는 뒷모습을 얼마간 지켜보던 차연과 노아도 뒤이어 상층으로 올라간다. 시시콜콜한 잡담을 나누다 보면 얼마 지나지 않아 주황빛 너른 지붕이 보인다. 너머의 신성재판소와 교황청에 잠시 머물던 차연의 시선이 금방 다시 노아의 곁으로 돌아온다. 붉은색과 금장으로 장식된 저택의 입구에는 경비병이 줄지어 있다. 가면 쓴 동행에게 쏟아지던 눈초리는 그에 대해 미리 언질해 두었던 노아의 소개 한 마디에 금세 누그러진다. 현관을 지나 층계참에서 차연은 저를 손님방으로 안내하려는 시종에게 고개를 내젓는다. 그는 노아를 보며 제 가면을 가리킨다. 아직은 정체가 드러나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자네의 방으로 가도 되겠나. 차연이 묻는다. 노아는 그제야 아차 싶은 마음이다. 시종들의 호기심 내지 실수, 어느 쪽이건 차연에게는 위험이 될 수 있다. 구태여 그것을 감수할 이유는 없으니. 그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고 시종을 물린다. 그사이 작은 소란에 잠시 모습을 비춘 라멕이 그들을 일별했다. 차연이 그녀를 향해 묵례한다. 가면 쓴 낯에 한 겹 그늘이 덧씌워진다. 그의 방문에 대한 것은 지난번 노아의 보고를 통해 알고 있었으므로, 라멕은 그저 둘의 모습을 가만히 응시하다 한 마디 얹을 뿐이다. 식사가 아직이라면 준비하라 이르지. 나는 먼저 마쳤으니, 모쪼록 편히 머물다 가기를 바라네. 탐색하듯 호기심 어린 눈길은 이내 미련 없이 거두어진다. 라멕은 층계를 올라 서재로 이동한다. 노아가 여기까지 누군가를 데려왔다는 사실, 그리고 동행한 당사자에 대해서도 역시 궁금증이 생기지 않는다고는 할 수 없겠으나 아직은 서두를 것 없다는 생각이다. 그녀가 시야에서 사라지고서야 노아는 차연을 돌아본다. 늦은 식사를 할 차례였다.

 

*

 

내도록 가면을 벗지 않고 있던 차연은 밤이 되어 노아의 방 안에 들어서고 나서야 그것을 탁상에 내려놓았다. 갑갑하던 시야가 환히 트이고 나니 주변의 풍경이 더욱 생경하게 다가온다. 벽지의 문양이며 가구의 모양까지 부러 절제한 듯한 모습이 오히려 낯설다. 화려한 저택 가운데에 이곳은 홀로 단정한 느낌이다. 방을 한 바퀴 둘러보던 차연이 나지막이 말한다. 방이 주인을 닮았군. 노아는 고개를 슬몃 기울이다가도 곧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짐작한다. 애매한 웃음이 그의 입가에 걸린다. 그렇습니까……. 창밖은 어느덧 달빛 한 점 없이 칠흑 같은 어둠이다. 하루가 끝난 지 오래다. 이제 잠자리에 누울 시간이었다.

등을 끄고 난 뒤에는 잠시간의 침묵이 내려앉았으나 그마저도 오래 가지는 않았다. 피로한 눈을 깜박이며 어둠에 익숙해지기를 기다리던 노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대중들의 비난도 영향을 끼치기는 했겠지만, 당장은 정교 내부가 어지러운 탓이 더 큰 것 같습니다. 조용히 그의 말을 듣던 차연이 짧은 침음과 함께 동의를 표한다. 때가 혼란하니 덩달아 불안해질 수밖에. 그러면 휘둘리기 쉬워지는 것이고, 중심을 잃는 것은 한순간이니. 이런저런 의견을 주고받는다 해서 당장에 뾰족한 수가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둘은 서로와 대화하는 동안 조금씩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당분간 주변을 바삐 살펴야 하겠다는 결론을 마지막으로 짧은 고요가 흐른다. 자리에서 몇 번 뒤척이던 차연이 문득 중얼거린다. 예전 생각이 나는군. 함께 다닐 때 말이네. 그 말을 들으면 노아의 머릿속에도 몇 개의 장면들이 스쳐 간다. 그는 조용히 미소를 머금는다. 앞으로 같이 보낼 날도 많겠지요. 차연은 대답 대신 나지막한 웃음으로 긍정한다. 부드럽게 내려앉은 어둠과 고요가 깊은 밤을 어루만진다. 모처럼 편안한 시간이었다.

22

작전 계획실을 나서는 사람들의 얼굴은 전날보다 사뭇 진지하다. 클렘의 말에 따르면, 처음 위신수로 변한 엘레젠의 차림새는 성직자와 거리가 멀다고 했다. 외투조차 걸치고 있지 않았다고 했으니 그 말에는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변이했던 둥근방패 광장에서 목격담을 수집하는 것부터 시작함이 옳을 테다. 일행은 조사를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쓸만한 증언을 확보한다. 나이 지긋한 시민이 이야기하기를, 변이한 청년이 바로 루슈망드 기념 병원의 직원이 찾아 다니던 사람이었다고 했다. 그의 이름은 다름아닌 뱅드로다. 노아의 입가가 미세하게 꿈틀거린다. 아무래도 우연이라기엔 달갑지 않다. 묵묵히 곁을 지키고 있던 차연이 그에게 묻는다. 정교에서 뱅드로의 이름을 쓰는 이는 더 없었나? 노아는 오래 고민하지 않고 끄덕인다. 관계자 중 그와 이름을 공유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동명이인일 가능성이 큽니다만, ……. 차연은 더 묻지 않고 한 걸음 물러난다. 노아의 기분을 짐작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루슈망드에서는 뱅드로의 간호 담당이었던 로브릭을 보내 주었다. 뒤늦게 위신수와 관한 소식을 듣고 탄식하던 로브릭은 그가 기사 뱅드로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며 손을 내저었다. 그가 스스로 말한 것은 자신의 이름뿐, 외에는 신원 파악을 위한 어떤 정보도 없다고. 단지 뱅드로는 의식 없이 앓는 중 이따금 교황과 주교를 찾았다고 했다. 그리하여 일행은 바르티누아를 알현하기 위해 성 레마노로 나선다. 주교로 일하는 자는 몇 없으니 탐문을 거친다면 어렵지 않게 추적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성당은 비어 있다. 클렘의 곤란한 얼굴을 뒤로하고, 일행은 주변을 살핀다. 다행히도 만남을 목표하던 이는 멀리까지 가지 못했다. 이번에 그에게 질문하는 것은 공인이다. 뱅드로에 대해 아세요? 루슈망드에서 지내던 사람, 위신수로 변한 그 남자를. 주교는 대번에 고개를 내젓는다. 급히 자리를 피하려는 그를 공인이 대뜸 붙잡았다. 당황한 주교의 저항에도 공인은 그를 놓지 않는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함부로 거동하지 못하던 주교가 늦게나마 정신을 차리고 언성을 높이려는 찰나, 잠시간 초점 없이 아득하던 공인의 눈에 날카로운 생기가 돌아온다. 놀람과 분노가 그 안에서 일렁인다. 주교를 둘러싸고 선 일행은 공인을 재촉하지 않고 기다린다. 숨을 고른 공인이 분명한 목소리로 말한다.

나이츠 오브 라운드를 소환하려 했군요.

일순간 공기가 얼어붙는 듯한 침묵, 그리고 다시금 도망치려는 주교의 앞을 대경한 아이메리크가 막아선다. 야만신의 소환이 금기임을 주교가 모를 리 없다. 숨 쉴 틈조차 주지 않고 이어지는 추궁에 어쩔 줄을 모르던 주교는 끝내 비명 섞인 절규를 내지른다. 내 평생을 정교에 바쳤다! 그런데 네놈들이 우리에게서 올바른 교리를 빼앗아 갔지. 나 자신과 다름없는 사상을 부정당하는 원통함을 아는가? 정교가 설 자리 없는 세상 따위 원하지 않는다…… 몸부림치던 그의 목소리가 기이한 음색으로 갈라지기 시작한다. 그토록 명백한 전조에도 아이메리크는 물러서지 않는다. 주교가 있던 자리에는 어느새 커다란 야수만이 남는다. 그를 처치하는 것은 금방이다. 단말마가 길게 이어지고, 착잡한 표정으로 그것을 지켜보던 공인은 제가 본 회상에 대하여 천천히 말을 고르기 시작한다.

 

계획실로 돌아와 모든 설명을 끝내고, 공인은 아지스 라에 버려졌던 클론이 바로 그 청년, 뱅드로일 것이라 추측한다. 심각한 표정으로 그의 말에 귀 기울이는 사람들 사이 노아는 홀로 불편한 기색을 다 감추지 못하고 있다. 평소보다 유달리 예민해 보이는 모습에 공인도 잠시 눈길을 주었다가 거둔다. 일행의 토론이 바삐 오가는 동안 노아는 어떤 가능성에 관해 생각하는 중이다. 만약 제 스승에게 얽힌 진실을 밝혀내지 않았더라면, 그것을 다 알지 못하고 그저 무지한 이단심문관인 채로 살았더라면. 그의 검 아래에 수도 없이 스러졌을 무고한 피해자들은 어찌 되었을까. 그러다가 마침내 거짓된 역사와 무너진 교리에 절망했을 자신은 또, 어떻게……. 노아는 종말의 야수로 변이한 제 모습을 상상한다. 지그시 감은 눈꺼풀 아래에 만약의 풍경들이 더없이 또렷하게 새겨진다. 야수로 전락하지 않았더라도 위신수, 혹은 다른 야수들에게 당해 쓰러졌겠지. 머리가 지끈대며 죄어든다. 어째서 뱅드로의 이름이 관련되었을까. 야만신의 소환에 이용당한 것일까, 아니라면 또 무슨 연유로 얽혀 있는 것인지. 노아가 복잡한 생각들 사이에서 헤매는 사이에 오늘의 회의도 끝이 난다. 다음날이면 주교의 부재로 교황청이 또 한바탕 소란할 것이다. 이렇듯 홀로 번민할 때가 아니건만 노아는 좀처럼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공인은 차연과 함께 제멜로 돌아가려는 노아를 부른다. 걱정스러운 눈길이 그에게 닿는다. 공인은 괜한 뜸을 들이는 대신 곧장 묻는다. 계속 마음에 걸려하시는 것 같아서요. 뱅드로 경의 이름 때문에 그러시는 거지요? 노아 역시 대답을 피할 이유는 없다. 그는 머뭇대지 않고 긍정한다. 그러면 공인은 과거시로 보았던 주교의 일행, 그 둘의 생김을 설명하기 시작한다. 누구인지 짐작 가는 이가 있다면 대화를 부탁할 수 있겠느냐는 언질도 함께다. 노아는 그가 일러주는 자들의 인상착의를 머릿속에 새긴다. 미약한 미소가 노아의 입가에 번진다. 공인이 부러 신경을 써 주고 있다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가볍게 고개 숙여 감사를 표하고, 노아는 다시 걸음을 옮긴다. 뒤늦은 피로가 한번에 밀려오는 것 같았다.

 

밤은 늘 그랬듯 고요하기 그지없다. 자리에 차연과 나란히 누운 채 노아는 따끔거리는 눈꺼풀을 힘주어 문지른다. 내일은 바르티누아의 일행들을 찾아가 봐야겠습니다. 무겁게 가라앉는 목소리를 듣고 있던 차연이 조심히 한 마디 얹는다. 사안이 급한 건 맞네만, 너무 무리하지 말게. 노아는 허탈한 듯 짧게 웃는다. 지친 목소리가 이어진다. 아닙니다. 스승에 대한 문제도 물론 그렇지만, 단지…… 스스로 변화하기를 택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제가 어떤 모습이었을지 하는 생각 때문에. 차연은 섣불리 대답을 돌려주지 않고 한동안 침묵을 지킨다. 괴로운 숨을 내쉬던 노아가 천천히 차연을 등지고 돌아 눕는다. 차마 입밖으로 내어 놓을 수 없이 번잡스러운 생각들이 어지럽게 뒤엉킨다. 스승을 걱정하는 마음과 이기적인 자신을 힐난하려는 죄책감, 그리고 저 바깥에 남아 있는 사람들. 제게 그랬듯 그들에게도 아직 기회가 남아 있을지 모르는데. 그들을 어떻게 구해야 한단 말인가. 흐트러지는 노아의 숨소리를 말없이 듣던 차연이 그의 어깨를 가만히 도닥인다. 걱정은 그만 내려놓게. 할 수 있는 일부터 하도록 하지. 노아가 다시 호흡을 갈무리한다. 종전보다 선명해진 목소리가 차연에게 괜찮다는 듯 대답한다. 대화는 거기에서 매듭지어진다. ……모쪼록 편안한 밤 되십시오.

 

이른 아침, 날이 밝으면. 두 사람은 공인이 일러주었던 주교의 동행들을 찾아간다. 그들은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도 노아를 선뜻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러나 노아는 그들이 자신을 이단심문관이자 동시에 착실한 신자로서 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오래지 않아 깨닫는다. 그들에게 본의를 밝히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노아는 그 일을 미룰 수 없다. 그들을 진심으로 대하며 이야기한다면, 어쩌면 그들 역시 이슈가르드의, 정교의 변화에 대해 납득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곁에 앉은 차연이 노아에게 가만히 눈길을 보낸다. 그 신호에 마음을 다잡은 노아가 입을 열었다. 흐름은 이미 바뀌었습니다. 그것이 나쁜 일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노아는 주변의 눈치를 살핀다. 조금쯤 숙연한 분위기가 될 줄 알았건만, 그들은 생각외로 무던해 보인다. 이대로 괜찮은 걸까. 그때 혼자서 무어라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이던 이가 돌연 자리에서 일어난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노아가 그를 붙잡으려 따라 일어났지만 차연이 그를 막았다. 차연은 밖으로 향하는 그의 입모양을 읽는다. 다 틀렸어. 그리고 그가 야수로 변한다.

이번의 변이는 느리게 이루어진다. 노아는 아직 사람의 모습 일부를 가지고 있는 그를 진정시키려 다시 팔을 뻗는다. 그러나 무슨 말을 해도 이미 늦었다. 동료의 끝을 목도한 나머지 한 명조차 마저 야수화에 잠식당한다. 순식간이다. 더 늑장을 부리다가는 위험할지 모른다. 노아의 시린 물빛 눈동자가 어두워진다. 끝내 검을 빼드는 그의 낯빛이 침통하다. 차연은 제때에 노아를 보조한다. 그들 모두를 처치하기까지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어디에서도 정보를 얻을 길이 없다. 막연한 기분에 숨이 막히는 것도 잠시, 벽에 기대어 숨을 고르던 노아는 차연이 건넨 손을 잡고 몸을 일으킨다. 더 이상의 희생을 두고 볼 수만은 없는 일. 허비할 시간이 없다. 그들은 곧 아르투아렐과 합류하기로 정한다. 아지스 라에서의 조사가 끝나면 커르다스 중앙고지를 향하는 경로를 마저 살피고 다시 공인 일행에게 돌아가면 될 터였다.

 

*

 

현재까지 별다른 성과는 없었으나 차연과 노아는 예정대로 비공정에 올랐다. 마대륙의 남은 조사는 아르투아렐이 이어갈 것이었다. 그들은 이동하는 도중에도 주시를 그만두지 않는다. 광활한 창공 가운데 뺨을 스쳐 가는 바람 소리만이 선명하다. 탁 트인 주변을 둘러보던 차연이 노아에게 말을 붙인다. 아침의 일은 유감이네. 내도록 바깥쪽을 향해 몸을 기대고 서 있던 노아는 그제야 고개를 들고 차연을 바라본다. 괜찮습니다. 마음에 걸리지 않는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계속 연연할 수는 없겠지요. 그렇게 말하는 노아의 얼굴은 이전보다 흔들림 없이 단단한 데가 있어서, 차연은 이제 그를 보며 안심할 수 있다. 차연은 노아를 향해 조용히 미소짓는다. 노아도 그 웃음의 의미를 알았다. 조금쯤 씁쓸한 기분이 들지 않는다면 거짓이겠으나. 만약을 가정하는 일은 이미 지나간 시간 앞에 어떤 효용도 갖지 못하기 때문에. 노아는 지난밤 차연의 말을 곱씹는다. 할 수 있는 일부터 하라는 것. 사건은 아직 종결되지 않았다. 벌써부터 포기하고 물러날 수는 없었다. 목적지가 가까워 오고 있었다.

 

한편 아이메리크와 공인은 쓰러진 뱅드로가 처음 목격되었다는 용머리 전진기지에 있다. 검은 초코보를 타고 이동하다 보면, 과연 엉망으로 부서진 비공정이 나타난다. 그 잔해 근처에는 사라졌던 위신수가 머물고 있다. 타오르듯 푸른빛이 물결치며 일렁인다. 그들이 착륙하는 잠깐 사이에 문득 파프니르가 고개를 돌린다. 그것과 공인의 눈길이 맞닿는다.

동시에 초월하는 힘이 발동한다. 공인의 시야가 울렁인다. 스쳐 가는 일련의 장면들 속에서 뱅드로가 로브릭에게 스스로 ‘뱅드로’라 소개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창천기사단의 기억과 자아가 그의 내면에 한꺼번에 혼재한다. 어지러운 머리를 붙잡고 교황을 지켜야 한다고 되뇌던 그를 향해 로브릭이 갸우뚱한 표정으로 소식을 전한다. 기사단은 행방불명되었고 교황은 사망했다는 사실을. 청년은 충격받은 얼굴로 고개를 든다. 그리고 곧 자리에서 이탈한다.

흔들리는 공인의 시야가 안정하는 잠깐 사이, 아이메리크가 휘청이는 공인을 붙잡고 살핀다. 근처에 당도했던 차연과 노아도 어느새 그들 곁에서 공격에 대비하여 전투 태세를 취하고 있다. 잠깐의 대치가 이어진다. 그러나 공인이 일행과 함께라는 것을 이해하기라도 한 것처럼, 파프니르는 날개를 펼쳐 사라진다. 공인은 그제야 흩어져 있던 단서의 조각들을 모두 끼워맞춘다. 다급한 시선이 아이메리크를, 노아를, 차연을 향한다. 그들은 모두 성도로 복귀한다.

23

아르투아렐과 공인의 보고가 끝난 뒤에는 잠깐의 적막이 내려앉는다. 계획실에 둘러앉은 사람들 사이로 삭막한 공기가 흐른다. 누구도 섣불리 입을 열지 못한다. 정교는 뭇 성도 사람들을 위한 언덕이었으므로, 아이메리크는 여전히 갈등하는 중이다. 그것이 어느 쪽이든 오래된 문제의 결론을 쉽사리 끊어내지는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을, 여전히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누구든 결정을 내려야 함은 자명하다. 언제까지고 선고를 미룰 수는 없는 일. 아이메리크를 지켜보던 공인은 분명히 말한다. 성도의 안식처는 이미 무너졌으니 더 이상 그에 기댈 수는 없다는 것을. 그러나 과거를 기억하되 우리 모두는 계속해서 나아가야 한다고.

긴 한숨이 이어진다. 아무래도 더는 미룰 수 없는 일인 것 같다. 아이메리크는 귀족원 의장이 아닌 정교의 신도로서 생각을 정리한다. 끝내 알맞은 방향을 찾기 위해 곧 공회의를 개최하겠다는 그의 선언으로 오늘 일정은 마무리된다. 며칠 숨 돌릴 시간이 지나고 나면 이슈가르드의 교의는 새로이 세워지게 될 것이었다.

 

차연과 노아는 제멜 저택으로 돌아간다. 간단히 식사와 잠깐의 정비를 마치고, 둘은 어둑한 방안에 앉아 골똘해진다. 사실 착잡한 기분으로 생각에 잠기는 것은 차연보다도 노아의 일이다. 주교 일행의 야수화에 대해서도 심경이 복잡했을뿐더러 지금의 위신수 문제에 결국 뱅드로가 연관되고 말았다는 사실마저도 조금은 받아들이기가 버거웠다. 두 사람의 변이가 결과적으로 뱅드로에 대한 모욕이 되었다는 것,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실제 뱅드로의 의지와는 관계가 없으면서도 그를 어떤 식으로든 말려들게 했다는 것이 화가 나면서도 안타깝다. 노아는 방 한켠에서 가만히 흔들리는 불빛을 응시한다. 노아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 정확히는 모종의 죄책감이다. 성도를 지키는 기사의 입장으로, 주교 일행의 변이를 막아내지 못했다는 데에서부터 시작하여…… 쉽사리 사그러들지 않고 지속되는 혼란스러운 주변의 상황에 대해서도 역시.

차연은 이런저런 생각으로 묵묵해진 노아를 바라본다. 언뜻 침울해 보이기도 하는 낯 위로 일렁이는 등불의 주홍빛 그림자가 스며 있다. 오늘은 참 많은 일이 있었지. 부드럽게 위로하듯 건네는 목소리가 상념에 골몰하던 노아를 일깨운다. 그는 천천히 눈을 들어 차연을 바라본다. 그의 은백색 광채 어린 눈동자를 마주하면 시끄러운 파랑이 일던 가슴도 차츰 잠잠해지는 것 같다. 해결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이제부터가 정말 바쁘겠지요. 차분히 내뱉은 노아가 천천히 숨을 정돈한다. 아까보다는 훨씬 편안해진 듯한 기분이다. 실은 화가 좀 났습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포기한 셈이니, 제 스승께는 그보다 더한 모욕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분이라면 공연히 분노하는 일로 심력을 낭비하기를 원치 않으셨을 겁니다. 노아는 뒤늦게나마 솔직한 생각을 털어놓는다. 차연은 그런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느리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대신에 성도와 정교가 더 나은 길로 나아가기를 원했을 걸세. 머잖아 정말로 그렇게 될 테고. 그의 나직한 목소리가 노아에게 확신을 준다. 잠시 고개를 숙이고 마른세수를 하던 노아가 엷게 미소짓는다. 지금이라면 성도 사람들도 좋은 교의를 결정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숱한 어려움을 지나 여기에 다다르기까지, 지금이야말로 기다리던 때를 맞이한 것이리라고 노아는 믿는다. 차연이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다. 공회의가 잘 되길 바라지. 간단한 한 마디였으나 그것만으로 노아에게는 충분했다. 모래알처럼 남아 있던 한 줌 걱정이 시원한 바람에 모두 쓸려 가듯, 지금까지의 여정을 마침내 매듭짓게 될 그 순간을 기다리며 노아는 더없이 명확해진다. 그들은 멀리 우는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는다. 모처럼 깊은 밤이었고, 긴 단잠이었다.

 

역사상 최초로 각계각층의 성직자와 신도들을 불러모으는 자리가 된 만큼, 공회의를 준비하기까지는 며칠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럼에도 조만간의 위신수 토벌을 위하여 체력 단련과 모의 전투 등의 대비가 필요했으므로 모두에게는 변함없이 바쁜 날들이었다.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묘한 긴장으로 상기되어 있다. 그만큼 전례 없고 중대한 사안이었다. 마지막으로 열렸던 공회의는 무려 팔십여 년 전의 일이다. 그마저도 문헌으로만 남아 있는 기록이었고, 주교의 자리 또한 비어 있는 와중인지라 불가피하게 혼란스러운 분위기를 영 잠재울 수는 없었다.

차연은 창문 너머에 흘끔 눈길을 준다. 오늘을 위해 소집한 인원들이 바깥에 속속 도착하고 있었다. 잠시 후면 중대한 회의가 시작된다는 사실을 얼마쯤은 제대로 실감하지 못한 채로, 사람들은 저마다 차림새를 정돈하고 목소리를 가다듬는 중이다. 더없이 무겁고도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공인이 아이메리크를 데리러 간 사이 차연은 노아와 먼저 옥좌실로 향한다. 회의장 안에는 커다란 테이블 하나, 그리고 그것을 지켜볼 수 있도록 길다란 의자가 줄을 맞추어 늘어서 있다. 중앙의 테이블은 곧 논의를 나눌 주역들을 위한 것으로 두고 차연과 노아는 적당히 뒤쪽에 자리를 잡는다. 차갑고 건조한 공기가 분위기를 한층 삭막하게 만든다. 나란히 앉아 나머지 인원이 모두 들어와 모이기를 기다리며, 두 사람은 그간 위신수 문제를 다루어 오는 동안 이슈가르드 또한 격변을 거쳤다는 것을 체감한다. 그간 주요한 정치가 양원제로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말로만 들어온 것이지, 이렇듯 직접 보는 것은 아무래도 처음이다. 어떤 노력이든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끝내는 빛을 보게 되었다는 것을 목도하는 순간이었다. 속속 회의장에 입장하는 의원들은 과연 귀족뿐만 아니라 평민 출신도 함께다. 저만치 중앙 테이블에 함께 앉은 공인이 차연에게 눈길을 준다. 인사들과 미래를 결정짓기 위해 모여앉아 있는 아들에게 마주 인사를 건네고, 차연이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그의 곁을 돌아본다. 시선을 느낀 노아가 그를 바라본다. 차연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웃음 머금은 낯으로 고개를 젓는다. 곧 모두가 제자리에 착석한다. 그리고 아이메리크가 일어나 회의의 시작을 알린다.

어쩌면 당연스럽게도, 상황은 생각만큼 온건하게 흘러가지 않았다. 정교의 두 가지 측면에 관해 말하며 회의의 서두를 연 것은 클렘이다. 창의 역할이 천 년의 세월 끝에 다하였으니, 이제 방패의 역할을 생각할 때입니다. 잠깐 동안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머뭇대는 탐색전 끝에 서민원이 먼저 나쁜 교리를 설파한 책임을 고위층이 지고 또한 계급제를 없애야 한다는 주장으로 입을 연다. 성도평의회의 일원들이 그 말을 가만 듣고 있을 리 만무하다. 그들은 지금껏 보호해온 옛 교리를 상실한다면 정교 또한 의미를 잃는다 주장하며 목소리를 높인다. 명백히 서로를 적대시하는 발언으로 장내의 분위기가 날카로워진다. 함부로 첨언하지 않고 숨죽여 있던 이들도 하나둘 흐름에 휩쓸려 화를 내거나 불안감으로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그것을 지켜보던 차연과 노아가 다시금 시선을 주고받는다. 중재가 필요하다는 데에 동의한 그들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아이메리크의 음성이 좌중을 압도한다. 천 년 전과 같은 잘못을 저지르려고 하는가. 그는 역사의 과오를 반성키 위해 그것을 먼저 인정함이 필요하다 이야기한다. 그의 말을 클렘과 아르투아렐이 옆에서 거든다. 최초의 본질을 지키기 위해서는 결국 모두가 힘을 합쳐야 한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도 그것을 모르지 않는다. 저들끼리 웅성대던 성직자들의 소란이 곧 잦아들어, 회의장은 다시 조용해진다. 각자의 이득을 차지하려 싸우기 급급하던 사람들은 이제나마 무언가 깨달은 기색이다. 그들은 더 나은 이슈가르드를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협력하겠노라 입을 모은다. 그것을 지켜보며 노아는 안도한 기색으로 긴장을 내려놓는다. 차연은 이 모든 광경이 조금 멀게 느껴진다. 성도의 사람들은 이제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줄 안다. 그들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방법을 찾아내었다. 더는 나 같은 사람은 없겠구나, 그런 생각으로 차연은 희미하게 웃는다. 시원하면서도 씁쓸한 기분이었다.

 

*

 

공회의 이후 상황은 눈에 띄게 안정되고 있었다. 정교에 속한 이들이 갈피를 잡은 뒤로부터 야수로 변이하는 일도 드물어졌거니와, 그마저도 회의에서 합의된 내용을 공표한 후에는 단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본격적인 토벌을 준비하며 잠깐의 여유 동안 차연은 제멜 기사단의 훈련을 지켜보거나 성도 바깥 건축물의 방어를 돕는 등 노아와 함께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그렇게 바쁜 와중에도 잠깐씩 틈을 내어 하는 산책이나 그때마다 나누는 담소도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일 것이다.

선선한 날씨, 적당히 햇빛이 드는 후원을 나란히 거닐며 차연은 문득 노아에게 묻는다. 자네의 본래 할일이 위신수 문제로 미뤄지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군. 갑작스러운 사건의 발생으로 지금껏 골머리를 앓고 있었으니 한번쯤은 물을 법한 질문이기도 했다. 노아는 잠시 고민하지만 어차피 답은 하나다. 그는 기사로서 살기로 했다. 그러니 이것 역시 전부 이슈가르드를 위한 일이었다. 마냥 시간만 빼앗겼던 것도 아니고, 과정을 지나며 오히려 엉켜 있던 타래들을 더 좋은 방향으로 풀어낼 수 있었으니 다행인 일이기도 하다. 뱅드로에 대한 생각을 하려면 조금쯤 복잡한 기분이 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노아는 그런 내색을 애써 떨쳐내고 담담하게 대답한다. 기사의 할일이 달리 있겠습니까. 저는 괜찮습니다. 때마침 산들바람이 뺨을 스쳐 간다. 그 서늘함이 오후의 볕 아래에 달아오른 피부를 식혀 준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차연은 고개를 끄덕일 뿐 다른 말을 더 얹지 않는다. 토벌이 끝난 다음이라면 그는 다시 성도를 떠나야 할 것이다. 이후의 일이 어떻게 흘러갈지, 또 어떤 사건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지는 아직 모르는 일이겠으나. 차연은 곁에서 조용히 걷는 노아를 흘긋 넘겨다본다. 변함없는 모습이었지만, 동시에 처음과는 아주 달라진 모습이기도 했다.

 

클렘에게 의뢰했던 준비물은 곧 복구되었다. 파프니르를 유인하기 위해 마련된 전쟁신의 자비가 그들 편에 있었다. 더 지체할 것 없이 출정을 앞둔 아침, 빈방에서 홀로 일어난 차연은 노아를 찾아 뱅드로의 무덤으로 간다. 미리 언질을 들은 것은 아니었으나 이런 때에 그가 자리를 비울 만한 이유는 분명 이것뿐이리라. 한차례 종결을 앞두고서는 마음을 다잡을 시간이 필요할 테지. 예상대로 노아는 야트막한 봉분 앞에 먼저 자리를 잡고 있었다. 눈을 감고 묵념하던 그가 인기척에 고개를 든다. 표정 없이 굳어진 얼굴은 상대를 알아보자 금세 유연하게 풀어진다. 차연은 가만히 그의 곁으로 다가가 선다. 죽은 자가 그러하듯 산 자들 또한 이 순간 말없었으므로 사방이 고요하다. 가끔 불어오는 바람결에 흔들리는 나뭇잎들만이 숨죽여 소근거린다. 차연은 노아의 곁에 서 짧게 묵념한다. 그가 여기에 온 것은 노아를 다시 한 번 지탱하기 위함이다. 차연의 시선이 정물처럼 놓여 있는 노아의 옆얼굴에 가 닿는다. 교황과 직접 대면하려 했던 그분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겠나. 그 가만한 물음에 노아의 얼굴이 괴로운 듯 미세하게 일그러진다. 사람은 사람의 속내를 낱낱이 읽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해 또한 먼 것이 될 텐데, 하물며 보통의 인물도 아니고 뱅드로를 대상으로 하는 말이라면. 그러나 노아는 힘겨울지언정 대답을 삼키지 않는다. 그가 지키고자 했던 것은 지금 자신이 지키려는 것과 같다. 성도를 바른 길로 이끌기 위해, 그가 감수했던 모든 일을 헛되게 할 수는 없다. 노아가 고개를 들고 답한다. 다 알 수는 없겠지요. 부족한 저로서는 감히 짐작하는 것이 고작이지만, 그분의 의로운 유지를 잇기 위해 무엇이든 할 겁니다. 차연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충분한 대답이었다. 그의 흔들림 없는 시선을 마주보고 있노라면 노아는 스스로 입에 담은 결의의 무게를 절감할 수 있다. 그리고 곧 알게 된다. 자신이 반드시 그렇게 이루리라는 것을.

 

천년에 걸친 용과의 전쟁이 일찍이 매듭지어졌음에도 불구, 용과 흡사한 모습을 취하는 위신수는 그들이 재차 성도를 습격한다 오인할 수 있는 위협이 된다. 교황의 홀을 지닌 아이메리크는 이렇게 말한다; 창천기사가 교황을 지키는 존재라면, 신전기사는 신도를 지키기 위해 서는 존재다. 그러나 마대륙에 당도한 창천기사들은 모두 죽었다. 그들이 토벌해야 하는 위신수는 곧 마지막 창천기사나 마찬가지다. 교황의 부정을 알고도 맞서려 했던 그라면, 더욱이 그에게 깃들어 있는 기사들의 모든 마음은 반드시 후세까지 전해져야 함이 마땅하다.

태양호 근처에 숨어 지내던 파프니르는 전쟁신의 자비를 좇아 빙천궁 예배당으로 유인당해 왔다. 모두는 각자의 위치에서 만전을 기한다. 예정대로 전투가 시작된다. 위신수는 창천기사들이 사용하던 것과 같은 방식의 마법을 쓴다. 그는 야만신과 같이 소형종 야수들로부터 힘을 얻기도 한다. 하지만 싸움의 승기를 잡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다음 전세가 기울어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 전투에 임하는 모두의 의지가 그것을 가능케 한다. 그들이 거머쥔 미래는 끝없이 정의를 관철해 온 결과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쟁취하는 데에서만 끝나지 않는다. 책임은 과거를 딛고 일어나 현세를 살아가는 모두의 것이다. 이슈가르드의 사람들이 품었던 마음, 그것을 단 한 조각도 남김없이 끌어모아서. 끝내 안식의 품에 스러지는 위신수를 뒤로하고 그들은 다음 걸음을 나아간다. 비로소 내일을 향한다.

24

성도에서 보내는 마지막 아침은 평온하기 그지없다. 따스한 햇살과 맑은 새소리에 깨어난 다음이면, 여전히 가면을 착용하는 차연을 배려하여 노아가 손수 방안의 탁자에 정갈한 식사를 차려낸다. 빵과 수프, 간단한 요깃거리였지만 이처럼 이른 시간에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허기진 배도 채웠겠다, 가만히 앉아 창가에 흥건히 쏟아지는 볕을 쬐고 있으려면 차연은 저도 모르는 사이 일말의 긴장마저 풀어놓게 된다. 편안한 기분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은 노아도 마찬가지인 듯 싶지만…… 차연은 그의 낯빛에 서린 아쉬운 기색을 어렵지 않게 읽어낼 수 있다. 그러나 아직은 둘 중 누구도 별말을 얹지 않는다. 헤어지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남았다. 정식으로 작별을 고하기에는 일렀다.

한껏 여유를 만끽하고, 느지막이 자리를 정리한 둘은 함께 응접실로 향한다. 부드러운 소파에 앉아 잠시 기다리면 그들을 일별하기 위해 라멕이 걸음한다. 인사는 짧고 형식적인 것이라지만 둘을 살피는 라멕의 눈길은 분명 전보다 깊어진 데가 있다. 그녀는 차연이 뜻하는 바를 이루기까지 탈 없기를 기꺼이 빌어 준다. 어쩐지 멋쩍은 기분이 되어 사이에 끼어 있던 노아는 차연을 배웅하기 위해 그보다 조금 앞서 걷는다. 저택의 긴 복도를 빠져나가는 동안 어느덧 익숙해진 침묵이 둘 사이를 잇는다. 언젠가는 이런 고요가 불편했던 때도 있었지만. 그저 가까이에 있는 것만으로도 편안한 상대가 있는 법이다. 꼭 입을 열어 말을 주고받지 않아도 좋았다. 노아는 저를 뒤따라 오는 차연의 기척을 온전히 느낀다. 그러고 보면 지금껏 여정에서는 항상 그의 등을 보며 걸었던 것만 같다는 생각이 불쑥 든다. 그렇잖아도 무겁던 걸음이 조금쯤 더 느려지고, 그러는 사이 다시금 노아 곁에 나란해진 차연이 의문스런 기색으로 그를 바라본다. 노아의 푸른 눈동자를 찬찬히 뜯어보던 차연이 자못 장난스레 한마디 던진다. 그렇게 아쉽나? 노아는 달리 부정할 것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가벼운 웃음기 섞인 대답이었으나 미처 숨기지 못한 미련 탓에 말끝이 조금 늘어졌다. 긴 시간을 함께했지 않습니까. 이제는 오히려 따로인 것이 어색하군요. 차연은 그에게 눈짓하며 다시 걷기 시작한다. 바깥에서 맞는 햇살은 실내의 그것보다 환하고 눈부시다. 너무 그러지 말게. 새 신분을 얻었으니 앞으로는 이슈가르드로의 출입도 자유로울 테지. 종종 들르겠네. 노아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차연의 옆에서 걷는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던 걸음이 차츰 균형을 찾고 나란한 수평을 이룬다. 성도를 떠나는 날까지도 차연은 가면을 쓰고 있다. 뒤랑데르 백작과는 아는 사이로 다시 마주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니 이곳에 돌아온다고 한들 그 때에도 차연의 얼굴 위에는 가면이 올라앉아 있을 테지만. 이런저런 생각을 곱씹는 사이 둘은 저택에서 제법 멀어져, 공인과 합류하기로 약속했던 길목에 들어선다. 여기서 조금 기다리면 그 애가 오겠지. 그리고 함께 돌아가는 거다, 집으로.

노아는 웃음이 가득 어린 차연의 입가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가 이만큼 시원하게 미소짓는 것은 본 일이 없는 것 같다. 동시에 그의 얼굴은 잠시 이 세상 사람의 것이 아닌 것만 같기도 하다. 얼마간 넋을 놓고 있던 노아는 더 늦기 전에 그가 해야 할 말을 전하기로 한다. 언젠가 차연과 다시 함께하고 싶다는 것, 그러기 위해 자신의 소명을 끝마칠 때까지 힘써 일하리라는 것까지도. 그와 처음 맞닥뜨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불통이었던 이단심문관은 이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오롯이 설 수 있는 기사가 되었고, 그런 변화를 이루어낼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차연과 나눈 경험의 덕이었다. 그와 동행하며 겪었던 모든 일들, 몸으로 직접 부딪히며 생생히 느꼈던 것들. 그 기억 전부가 더할 나위 없는 양분이 되어 노아를 이렇듯 성장하게 했다. 그러니 변화를 가능하게 만들어 준 은인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을 리가. 그러나 단지 그뿐만은 아니다. 자신의 몫으로 남겨진 과업이 모두 끝난 다음이면, 노아는 그를 향해 더한 욕심을 내고 싶다.

 

바람이 분다. 햇살은 포근하고, 하늘은 청명하다. 노아는 저만치 공인이 나타날 길목을 바라보느라 정신을 쏟고 있는 차연을 불러 세운다. 이름에 반응하여 흰빛 단정한 시선이 노아에게 돌아오고, 그는 망설임 없이 입을 연다. 제 소명을 끝마친 뒤에, 당신의 길을 함께 걷도록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그에 응하는 차연의 대답도 조금의 고민 없이 돌아간다. 기꺼이 기다리겠네. 그다음 차연이 꺼내드는 것은 다름아닌 물 크리스탈 조각이다. 본래 뱅드로의 것이었던, 그리고 지금은 온전히 노아의 것이 된 크리스탈이 주인의 품으로 돌아간다. 이것은 차연 나름대로의 믿음을 다지는 방식이다. 내색하지 않았으나 아쉬움 많았던 것은 그 역시 마찬가지다. 이것은 훗날 노아와의 재회가 있을 것을 확신하기에 내릴 수 있었던 결정. 노아의 청을 듣는 순간 차연은 알 수 있다. 앞으로의 날들에도 그와 어떤 식으로든 관계하게 되리라는 것을, 그리하여 또한 서로를 끊임없이 변화시킬 소중한 존재로 다시없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그래서 크리스탈을 담보하는 대신 돌려줄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받아든 노아는 서늘한 기운이 손바닥 위에 찰랑대는 것을 느낀다. 맑고 푸른 크리스탈의 색이 태양볕 아래에 더욱 투명한 빛깔로 깊어진다. 그 다채로운 모양을 얼마간 바라보다가도, 노아는 고개를 들고 크리스탈을 품에 챙겨 넣는다. 내도록 비어 있던 자신의 어느 부분이 그제야 충만해진 것 같다는 생각. 이 순간 노아는 차연의 마음에 적어도 반쯤은 닿은 것 같다. 그리고 지금은 그것만으로도 족했다. 다음의 만남을 약속했으니 이후는 기다림마저 기꺼이 받아들일 수밖에. 차연이 그를 보며 미소짓는다. 노아는 이제 아무런 거리낌 없이 차연에게 미소를 돌려줄 수 있다. 이만큼 후련한 기분은 오히려 새삼스럽다. 희미한 곡선으로 휘어지던 입가가 벌어져 웃음을 토해 낸다. 둘은 서로를 보며 한바탕 키득댄다. 이렇게 소리 내어 웃어보는 게 대체 얼마만인지. 때맞추어 저 멀리서 공인이 달려오고 있다. 차연은 제 품에 뛰어드는 아들을 힘차게 받아 안는다. 무슨 재미있는 얘길 그렇게 하고 계셨어요? 짐짓 서운한 체하던 공인도 곧 그들과 함께 이유 없는 웃음을 터뜨린다. 셋은 눈가가 시큰해질 때까지 웃고서야 겨우 숨을 가라앉힌다. 마른기침을 몇 번 하던 공인이 노아를 향해 눈을 찡긋한다. 우리 같이 낚시하러 가기로 했었잖아요. 잊지 않으셨죠? 나머지 토벌이 끝나면 연락 드릴게요. 잠깐 머뭇대던 노아가 손을 뻗어 공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다. 물론입니다. 그러고는 다시 웃음. 그들이 돌아가기 전, 노아는 차연에게도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한다. 하지만 마지막 인사가 아니니 슬퍼할 필요도 아쉬워할 이유도 없다. 아직 펼쳐지지 않은 이야기가 가장 흥미로운 법이고, 그러니 그들 앞으로 남겨진 나머지 날들이야말로 무엇보다 값진 것일 테다. 차연은 노아의 손을 힘주어 맞잡는다. 짧은 순간 주고받는 시선에는 무엇보다 깊은 믿음이 담겨 있다. 서로의 손 안에 선명한 온기가 전해진다. 그것은 손을 놓은 뒤에도 쉽게 사라지지 않고 잔여한다. 노아는 저만치 멀어져가는 둘의 등을 오래도록 바라본다. 당분간 작별에 걸맞는 완벽한 장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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