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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러디 시네마

1차 / 5천 자 (23.05 - 2회차)

지난날의 기억들이 환등으로 스쳐 간다. 색 바랜 필름이 희미한 영상을 띄운다. 장면은 마지막 식사 이후, 그 끝도 없던 기다림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렇게 영겁 같던 세월을 뛰어넘어 다시 첫 재회, 나를 잊은 너를 저주하는 절망 속에서도 차마 떠날 수 없었던 시간들. 그러다 문득 계시처럼 기억을 되찾는 너와, 온화한 날들을 지나는 사이 태어난 아이와, 그럼에도 규명되지 않았던 우리의 관계를. 하나하나 되짚으려면…… 낡은 필름이 힘없이 끊겨나간다. 오래되어 녹슨 영사기에서 불꽃이 튀긴다. 늘어진 필름은 군데군데가 빈칸으로 남아 있다. 한데 엉겨 녹아내리는 플라스틱 조각들. 허물어지는 것은 필름뿐만 아니다. 그것과 함께 나의 기억이, 삶이 송두리째 허물어지는 것만 같다고.

루브는 생각한다.

그런데 이번엔 재벌이라니. 하필 어울리지 않게 길고 화려한 이름을 달고서는. 깔끔하게 빗어넘긴 머리칼하며 몸에 밴 듯한 예의범절까지, 모두 제가 알던 것과는 사뭇 거리가 있는 모습이다. 살아온 배경마저도 죄 다를 테니 아주 모르는 타인이나 다름없는지도. 이번에도, 이전과 마찬가지로. 그는 루브를 기억하지 못한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거리감이 유독 멀고 또렷했다. 하녀가 제 주인을 보며 느끼는 괴리란 원래 이러한 것인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층계참에 기대어 서 있던 루브는 저만치 아래에 있는 잭 ―아니, 지금은 프레드리히― 에게서 눈길을 거둔다. 미련 없이 위층으로 걸음을 옮기며, 그녀는 차라리 그의 목을 미리 비틀어버릴까, 하는 고민을 곱씹는 것이다. 어차피 이번 생도 틀린 셈이라면. 시간을 좀 절약하는 방법을 찾아볼 수도 있겠지. 종종 그를 잭, 그렇게 부르는 실수 아닌 실수를 저지를 때마다. 루브는 조금쯤 처참한 기분이 들었고 실은 그보다 더 큰 분노를 느꼈다. 빗나간 호명에 의아한 기색으로 물드는 그의 눈을 움켜쥐어 뽑아내고픈 충동을 느낄 때도 물론 있었다. 그런 사소한 경험이 누적되어, 지금에라면 그 역시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으리라고 루브는 생각한다. 그러나 알 게 뭔가. 잭은 기억을 모조리 잃었고 그건 알맞은 때가 되기 전까지는 멋대로 불러올 수도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시기를 정하는 건 루브가 아니었다. 어딘가에 빌어먹을 신이 존재한다면, 이것이야말로 그의 역할일 수밖에. 그때까지 루브는 말없이 저택 구석구석의 먼지를 떨어내고 때로는 지겹도록 세탁물을 밟아 대야 하는 것이었다.

 

그는 왜 이런 집을 골랐을까. ‘프레드리히’의 저택은 ‘잭’의 저택과 몹시도 흡사한 구조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루브는 무한히 생겨나는 일감을 피해 적당히 눙칠 만한 곳을 언제든 쉽게 찾아낼 수 있었다. 드넓은 저택 안에 낮잠을 잘 만한 은신처라면 한 손에 다 꼽지 못할 정도로 많았다. 복잡하게 이어진 계단을 몇 차례 더 올라, 루브는 외진 복도 끝에 자리한 퇴창에 걸터앉는다. 널찍한 유리창 너머로는 부신 햇살이 내리쬐고 있을 테지만 두 겹의 커튼은 귀찮은 화상을 막아주기에 충분했다. 까맣고 하얀 치맛단이 발아래로 둥글게 퍼지며 늘어진다. 아주 오래전에 입었던 적 있는 순백의 드레스의 잔상이 그 위로 희미하게 겹쳐 떠오른다. 루브는 점차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올리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본래 야심한 밤에 활동하는 그녀가 잠에 빠지는 것은 너무도 속절없는 일이었다. 바짝 틀어올린 금발이 무겁기만 하다. 루브는 끌어안은 무릎 사이에 고개를 묻는다. 뱀파이어가 되고도 꿈이란 걸 꿀 줄은 몰랐지. 어차피 깨고 나면 잘 기억나지 않는다지만, 그 속에 흠뻑 빠져 있을 때는 그만큼 불편하고 기이할 수가 없었다. 거기서는 모든 것이 지나치게 생생했다.

이제는 없는, 어쩌면 정말은 있었던 적이 없는지도 모를 그, ‘잭’을 상대하던 때처럼.

뼈마디 도드라진 손가락이 잠결에도 반지를 어루만진다. 손끝에 걸리는 붉은 보석의 익숙한 질감을 느끼며, 루브는 잠 속으로 굴러떨어진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이 지독한 꿈일지 모른다는 생각은 이제 와 지나친 낭만이었다. 이토록 지난한 생은 차라리 누군가 멋대로 기워다 붙인 필름 조각에 더 가까웠다. 그럼에도 잠에 들고 나서는 불가피 꿈을 꾸게 될 터였다. 뭐든지 가능하다던 그곳에서도 결코 행복을 누릴 수만은 없겠으나. 어차피 기억하지 못할 것이라면 아무래도 좋았다.

 

그녀가 잠에 들었던 때와 같이, 루브는 불시에 다시 깨어난다. 충분히 오래 잠들어 있었던 것은 아닌지 아직 등 뒤에 후끈한 태양의 열기가 느껴졌다. 아니, 그것은 비단 등 뒤에서만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잭? 루브가 무심코 내뱉는다. 발치에 무릎을 대고 앉은 그가 루브의 왼손을 매만지고 있었다. 반틈 걷힌 커튼, 쏟아지는 햇살이 루브의 뺨을 홧홧하게 데운다. 부신 빛 아래 더욱 찬연한 붉은빛으로 타오르는 그의 머리칼. 검고 노란 눈동자가 선명히 루브를 향한다. 그는 여전히 루브의 왼손을 쥐고 있다. 그의 두꺼운 손가락이, 언젠가 그가 스스로 끼워 주었던 반지를 건드린다. 루브는 미간을 한껏 찡그린 채 그를 내려다본다. 당장이라도 손을 뿌리칠 수 있었는데. 일할 때도 반지를 끼고 있네. 그가 입을 열었다. 더없이 느긋하면서도 모종의 장난기를 품은 목소리. 루브는 손을 잡힌 채로 얼어붙는다. 그의 호기심 가득한 시선이 긴장한 듯 예민해진 루브를 훑고 지나간다.

결혼반지?

그 순간 루브의 안에서 무언가 역류한다. 맞물리는 기억. 내장을 죄 헤집어 놓는 것처럼 아찔한 현기증이 루브를 휩쓸었다. 그날 내가 너의 가슴을 열고 심장을 꺼냈을 때, 네 기분이 꼭 이랬을까. 애써 억누르고 있던 감정들이 한꺼번에 소용돌이친다. 지금껏 누적되어 온 삶을 감당할 수 없었다. 파리하게 질린 루브가 을 뿌리친다. 힘껏 악문 잇새를 비집고 구역질이 올라왔다. 입가를 틀어막은 루브가 급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저만치 달려가는 그녀의 치맛자락이 신경질적으로 휘날린다. 프레드리히,는 그녀를 구태여 뒤쫓지 않는다. 그저 방금 전까지 만져 보았던 반지의 감촉이나…… 그녀 손의 크기 같은 것을 어렴풋이 가늠해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가 분명 수상한 하녀라는 것쯤은 쉽게 알 수 있었는데, 정확히 어떤 부분이 왜 그러한지는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중요한 것을 놓쳐버린 듯한 기분. 구체적으로 붙잡아 끌어올릴 수 없는 기묘한 상실감. 그는 루브를 깨우기 위해 열어 두었던 커튼을 잡아당겨 닫는다. 긴 복도가 다시 그늘 속에 처박혔다.

 

*

 

그날부터 그의 꿈은 자꾸 뒤섞인다. 여러 개의 영상이 하나의 화면에 겹쳐진 채로 상영되고 있었다. 하나같이 비가 내리고 있는 스크린 속의 장면들은 누군가 붉은 셀로판지를 덧대어 놓은 것처럼 흐리다. 잠에서 깨고 나면 기억나는 것이라곤 오로지 루브의 창백한 얼굴뿐이다. 뒤돌아 도망쳐나가던 그녀 머리칼의 금빛 궤적. 그 손의 온기는 어쩐지 낯설지 않고, 그는 언젠가 그녀를 깊이 알았던 것만 같은데. 밤을 거듭할수록 의문의 경계는 흐려진다. 머리맡에 이명처럼 틈입하는 목소리들을 그는 귀 기울여 들었다. 그가 무엇을 잊었는지, 무엇을 떠올리려고 이렇듯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알아야 했다. 그렇게 며칠의 시간이 더 지나가고 나면.

프레드리히는 문득 프레드리히라는 이름이 낯설다. 저를 부르는 호칭은 본래 더 짧은 어감으로 분절되는 것이어야만 했던 듯한데.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잭, 속삭인다. 그는 저도 모르는 사이 그것을 따라 읊조린다. 잭……. 동시에 무언가 요란하게 박살나는 소리가 들린다.

난잡하게 흩어진 도자기 조각들 사이, 경악한 루브가 복도 저편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곧이어 다른 하녀들이 몇몇 다가와 루브를 책망한다. 어질러진 파편들을 쓸어담으며 저만치 선 주인의 눈치를 살핀다. 그러나 그는 핀잔을 주거나 화를 낼 생각 따위 조금도 없다. 그는 이를 드러내며 시원하게 웃을 뿐이다.

러브.

고개 숙인 하녀들 틈에서도 루브는 나무토막처럼 꼿꼿하게 서 있다. 핏발 선 눈동자가 그를 노려본다. 반지 낀 손 끝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한 마디 덧붙인다. 조심해야지. 그리고 천천히 뒤돌아 자신의 서재로 사라지는 것이다. 루브는 그의 뒷모습을 끝까지 응시한다. 속이 울렁거렸다. 그녀가 너무도 잘 아는 말투, 그렇게나 그리워했던 음성 때문에. 며칠 사이 하녀들 틈에서 들려오던 수군거림은 그의 변화에 대한 전조였던 것일까. 역겹다. 그리고 딱 그만큼, 그가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다. 그것이 더없이 끔찍했다.

그렇다고 해서 마음 놓고 기대를 걸 수는 없는 일이지만. 루브는 거듭 태어나기를 반복하는 그의 목숨이 얼마나 연약한 것인지 알았다.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그녀는 은밀하게 다가오는 속삭임을 뿌리친다. 첫 재회만큼 성공적인 삶은 두 번 다시 없을 것이다. 그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믿으면서도. 루브는 차마 완전히 체념할 수가 없었다. 그가 되살아나는 가능성을 이미 보았는데. 더한 것을 바라는 마음이 어떻게 죄가 될 수 있다는 말인가. 루브는 생각한다. 저를 이만큼 불안하게 만든 값을 반드시 잭이 치르도록 하겠다고.

 

그는 정확히 일주일 후에 루브를 호출했다.

그녀는 순순히 부름에 응했다. 하녀로 일하고 있는 입장에서 그러지 않을 수도 없었지만, 어쨌든. 티세트를 준비하는 손 끝이 그간 쥐어뜯은 탓에 얼핏 붉었다. 오후의 티타임을 위해 마련된 것들을 실은 손수레를 응접실 안으로 들이고, 등 뒤에서 문이 닫히는 순간. 그녀를 반갑게 부르는 그의 목소리가 울린다. 아, 러브. 보고 싶었어.

루브는 그 눈을 직시할 용기가 없다. 고개를 들면 이 거기에 있을까 봐. 두렵고 설레었다. 떨리는 손이 유리 탁자 위에 화려한 도자기로 된 주전자와 찻잔을 천천히 내려놓는다. 뜨거운 찻물을 엎어 버리지 않으려면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얄따란 주둥이에서 붉은 찻물이 정갈하게 쏟아진다. 흰 찻잔에서 곧 뿌연 김이 피어오른다. 루브는 그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사실 홍차 따위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지만.

러브.

그가 다시 루브를 부른다. 그는 찻잔을 들어 홀짝이면서도 눈웃음짓는다. 뜨겁지도 않을까. 커튼을 모조리 닫아걸어 응접실 안은 어둡기 그지없는데. 그의 실없는 웃음소리가, 잔 너머에 가리웠던 미소가 루브를 햇빛처럼 찌른다. 루브는 숨을 크게 들이쉰다.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바라본다.

그녀가 알던 잭이 거기에 있다.

그녀를 아는 잭의 얼굴. 모든 것을 기억하는 그 눈빛. 이 모든 지난한 세월을, 함께 건너 온 동반자의……. 루브는 낯익은 표정으로 웃음짓는 잭을 본다. 그녀가 그를 부른다. 잭.

그는 대답 대신 핏물을 토한다.

곧장 루브의 앞섶까지 붉은 피로 흥건해진다. 그가 힘없이 늘어진다. 들고 있던 찻잔은 바닥에 떨어진다. 조각나 나뒹군다. 루브는 잭의 옆으로 다가가 그를 살핀다. 쓰러져 누운 그의 숨은 이미 멎었다. 그것을 알면서도, 루브는 그의 손을 잡아 본다. 깍지 껴 손가락을 얽는다. 잭을 끈질기게 따라다니던 약지의 흉터와, 루브의 반지가 핏물을 뒤집어쓴 채로 붉게 발광한다. 그 빛이 징그러울 정도로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이명이 들리기 시작한다. 머릿속에서 뒤엉키는 불협화음과 함께 필름이 역재생한다. 찰칵대는 소리를 내며 영사기가 미친 듯 헛돈다. 스쳐 가는 환등 너머로 다시 불꽃이 튀기고, 끊어진 필름이 더럽게 녹아내리고…… 뇌리를 마구 헤집어 놓던 소음이 마침내 잦아들 즈음이면. 루브는 차갑게 식은 잭의 뺨 위로 제 얼굴을 맞댄다. 주검의 서늘한 냉기만큼이나 덤덤한 눈으로, 그녀는 그렇게 했다. 조금도 따뜻하지 않네. 당연한 생각을 곱씹는 동안. 멀리 응접실의 문이 열리는 소리, 그리고 누군가의 비명 소리가 길게 들려온다. 후일은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잭은 또 다시 태어나기를 반복할 것이고, 루브는 얼마든지 그를 위해 시간을 허비할 수 있었다. 완벽한 결말을 찾을 때까지 인내심을 가져볼 수도 있었다. 끝모르는 기다림은 이렇듯 루브의 의지로 결정되는 것이다. 그가 계속해서 죽어버린다면, 다가오는 죽음보다 먼저 그를 낚아채면 그만인 일 아닌가. 어쩌면 기억에 매달리는 것부터가 잘못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그를 다시 만나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를 붙들고 있는 것이 누구의 손아귀인지조차도.

루브는 잭의 손을 힘주어 그러쥔다.

그를 마지막으로 갖는 것은 오직 그녀 자신뿐이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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