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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 5천 자 (23.09 - 10회차)

창가에 앉아 있던 루브는 천천히 눈을 깜박인다. 갑자기 쏟아지기 시작한 비 때문에 주변이 소란스러웠다. 순식간에 젖어드는 보도블럭, 머리를 가리고 뛰어가는 사람들, 개중 몇몇은 급히 카페 안으로 들어오기도 했다. 루브는 오른편 벽에 붙어 있는 시계를 곁눈질한다. 곧 출발해야 하는 시간이었다. 노트북을 접어 넣고, 빈 커피잔을 치우고. 루브는 여유롭게 가방에서 우산을 꺼내 든다. 직원의 인사를 뒤로한 채 문을 열고 나선다. 과연 사방이 물난리 속이다. 안에서 보던 것보다 비가 더 많이 오는 것 같았다. 늦지 않게 가려면 서둘러야겠군. 붉은색 우산이 환하게 펼쳐진다. 그리고 누군가 루브의 곁으로 순식간에 붙어 섰다. 그녀가 쥐고 있는 우산만큼이나 선명한 빨강, 순간 시야가 흔들린다. 루브가 눈을 깜박인다. 바깥에 가득한 물비린내 틈으로 생경한 향기가 끼쳤다.

“러브, 우산 좀 빌려 줄래?”

루브는 대뜸 제 우산 속으로 뛰어든 낯선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이미 들어온 주제에 뭘 묻는 거지? 가방을 앞으로 껴안은 그가 제법 간절한 표정으로 루브의 대답을 기다렸다. 루브는 주변을 잠시 둘러본다. 변덕스런 비가 여전히 퍼붓는 중이었고, 카페 앞에 다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루브는 다시 남자를 잠깐 쳐다본다. 당장 꺼지라는 무언의 거절이 담긴 눈빛이었으나, 남자는 그런 것쯤 아무래도 개의치 않는 듯했다. 이렇게 인상을 쓰고 있는 걸 보면 알아서 갈 만도 한데. 잘못 걸렸군. 빠르게 결론을 내린 루브는 더 이상 그를 상대하지 않기로 한다. 곧장 걸음을 옮긴다. 약속 시간에 맞추려면 곧 전철을 타야 했다.

“응? 러브. 역까지만 좀 씌워 줘.”

하필 목적지가 같은 모양이다. 요즘 같은 시대에 이런 징그러운 호칭은 또 뭐란 말인지. 금방 포기할 줄 알았는데, 남자는 루브를 따라 꿋꿋이 걷는다. 가방엔 대체 뭐가 들었기에 저렇게 소중하게 껴안고 있는 걸까. 그는 벌써부터 혼자 신이 난 듯 고맙다는 인사까지 덧붙이고 있다. 이러다간 정말 그를 위해 역까지 동행하는 거라고 착각당하기 십상이다. 루브는 남자를 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빨리한다. 그래 봐야 성큼성큼 걷는 그의 보폭에는 금방 따라잡힐 수밖에 없었지만. 빗줄기가 제법 거셌다. 고작 초면의 불청객을 엿 먹이기 위해 이런 우중에 우산을 접어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되도 않는 애칭만 아니었어도 이렇게까지 기분이 불편하진 않았을 텐데, 생각하면서. 루브는 속으로 한숨을 삼킨다. 아침부터 재수가 없으려니 별 이상한 놈이 다 꼬인다. 발아래 커다란 웅덩이를 가볍게 뛰어넘은 남자가, 그런 속내를 읽기라도 한 것처럼 불쑥 입을 열었다.

“그래서, 고마우신 분의 이름을 좀 물어도 되나?”

루브는 이번에도 그를 노려보는 것으로 답을 대신한다. 남자가 알겠다는 듯 순순히 두 손을 들어 보였다. 그러고 보면 그는 루브의 키에 맞추어 허리를 불편하게 구부리고 있다. 루브는 어쩔 수 없이 우산의 높이를 약간 조절한다. 그것을 알아챈 남자가 씩 웃었다. 그러든지 말든지, 루브는 걸음을 재촉하는 데에만 집중한다. 저만치 역의 입구가 보이기 시작했다. 남자는 계속 말을 붙이고 싶어하는 것 같았지만 루브는 동참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지붕 아래에 들어서자마자 우산을 접은 루브가 인사도 없이 등을 돌렸다. 남자는 여전히 그녀를 따라온다. 방향이 같은 거겠거니 생각하고 무시하려는데, 그가 급기야 루브의 연락처를 물었다. 정강이라도 한 번 걷어차 줄까. 진지하게 고민하던 루브가 내내 참고 있던 한숨을 뱉었다. 그녀가 우산의 물기를 거칠게 털어내자 남자가 웃었다.

“또 봐, 러브.”

루브는 그가 끝까지 개소리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곧 도착한 전철에 오르며, 그에 대한 것들을 깡그리 잊어버렸다. 이런 경험은 한 번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면서.

 

그러나 루브는 그를 정말로 다시 만나게 되었다. 다음날 아침, 비슷한 시각 전철역에서. 계단 옆 플랫폼에 서 있던 남자가 루브를 보자마자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저렇게 불타는 듯 시뻘건 머리칼은 알아보지 못할래야 그럴 수도 없다. 대번에 인상을 찡그린 그녀가 남자를 못본 척 지나치려는데, 그가 또 순식간에 다가와 말을 붙였다. 그냥 자리를 피하고 싶었지만 동시에 내가 왜, 싶은 오기가 생기는 것도 사실이었다. 루브는 미묘한 표정으로 남자를 올려다본다. 그제야 그의 얼굴이 눈에 제대로 들어온다. 양쪽이 다른 빛깔로 검고 노란 눈동자. 얼굴의 절반쯤을 넓게 뒤덮은 흉터까지. 지나칠 정도로 당당하고 여유로운 그의 태도가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다시 보자고 했잖아.”

진짜 그렇게 됐네. 그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진짜 이상한 사람이네. 루브는 그의 곁에서 두어 발짝 떨어져 선다. 정말로 들어맞은 거라기엔 믿기지 않았고, 아니라면 이른 시간부터 그녀를 기다렸다는 뜻인데 그건 그것대로 소름이 끼쳤다. 그들은 겨우 한 번, 우연찮게 마주친 사이일 뿐이다. 왜 이렇게까지 친근하게 구는 걸까. 빙글빙글 웃는 낯으로 루브를 들여다보던 남자가 손을 척 내밀었다. 한가롭게 악수나 나눌 생각은 없는데. 그는 루브가 그의 손을 마주 잡아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 같다. 물러설 기색 없는 남자를 보며 루브는 이제라도 도망쳐야 하는지 고민한다.

“소개가 늦었네. 그냥 잭이라고 불러.”

러브, 너는? 남자가 루브의 이름을 되묻는다. 러브가 아니고 루브라고, 무의식적으로 대답할 뻔한 그녀가 입술을 꾹 물었다. 이런 허튼수작에 넘어가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는 오래 기다리지도 않고 루브의 손을 멋대로 낚아채 악수를 마쳤다. 참을성이 별로 없는 모양이지. 놀랍지도 않았다. 손에 생생하게 들러붙는 열감. 주먹을 느리게 쥐었다 펴면서, 그녀는 플랫폼의 전광판을 곁눈질한다. 열차가 곧 도착한다는 표시가 깜박이고 있었다. 시선을 눈치챈 남자가, 아니, 잭이 비죽 웃었다. 연락처는…… 알려주기 싫은 것 같고, 러브. 나랑 내기 하나 할래? 남자가 또 멋대로 지껄이기 시작한다. 어디까지 하나 보자는 심정으로 묵묵히 기다리던 루브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무슨 내기.”

그 음성을 들은 잭은 꽤나 기뻐 보인다. 정말로 반응해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얼마간 뜸을 들이던 그가 들뜬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우리가 한 번 더 마주치면, 그때는 같이 한잔하는 거 어때. 이름도 연락처도 알려주고. 루브는 영 탐탁찮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본다. 이런 게 무슨 내기라는 건지, 그와 친해지고픈 마음이 없는 루브로서는 어떻게 해도 손해 보는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왜 당장 거절할 수가 없는 걸까. 잭은 저를 빤히 보는 루브를 향해 히죽 웃는다. 때마침 요란한 신호와 함께 전철이 들어온다. 이걸 놓치면 지각이다. 멈칫대는 루브에게 잭은 손을 흔들어 보인다. 그리고 다시 플랫폼 밖으로 사라진다. 아직 대답을 듣지 않았는데, 그녀가 당연히 응할 거라고 믿는 듯 한 점 미련도 없는 뒷모습이었다. 정말 여기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가. 루브는 더 늦기 전에 전철에 오른다. 문이 닫히고, 열차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비틀대는 사람들 사이에 끼어 탄 루브가 간신히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내일부터는 전철 대신 버스를 타야겠다.

 

이후로는 눈코뜰 새 없이 바쁜 날들의 연속이었다. 잠깐잠깐 숨통이 트이는 순간이면 루브는 가끔 잭을 생각했다. 이유를 모르면서도 그 특유의 웃음이 눈앞에 떠올랐다. 그에 대해 루브는 그간 줄창 비가 내렸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합리화한다. 펼쳐든 우산 속으로 뛰어들던 붉은 머리칼과 그 낯선 향기. 그날 시작된 비가 아니었다면 그와 마주치지 않았겠지, 생각하면서도 그렇게 묘한 만남이 있을까 싶어 기분이 이상해진다. 지독히도 궂은 날씨가 이어지고 있었다. 장마는 도무지 언제쯤 끝이 나는지. 반나절쯤 맑게 개었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변덕스러운 계절이었다. 이 도시는 항상 이런 식이다. 루브는 이곳에 달리 기대하는 바가 없었다. 언제든 떠날 수 있고, 그리하여 반대로 더 오래 머물게 되는 곳. 모든 것이 작년과 똑같았다. 그 이상한 남자만 빼고.

버스는 제시간에 도착했다. 팔에 걸쳐 놓은 우산이 좌석 근처에 작은 물웅덩이를 만들었다. 앞으로 두 정거장을 더 가면 사람들이 우르르 내리고, 다시 개떼처럼 몰려들 것이다. 그래도 오늘은 일찍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으니 다행이지. 루브는 창밖에 여전히 내리는 비를 본다. 늦은 퇴근 시간,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로 거리가 붐비고 있었다. 휴대폰을 만지작대던 루브가 창문에 머리를 기댄다. 도착까지는 좀 걸리니까, 잠깐 졸아도 괜찮을 것이다. 루브는 우산을 옆에 잘 갈무리해 내려놓는다. 가방을 끌어안고 눈을 감는다. 버스의 덜컹거림이 차츰 잦아들고 있었다. 혼곤한 의식이 조금씩 멀어진다. 정차음이 몇 번 희미하게 들리고, 문이 여닫히는 소리, 어딘가 버스의 앞쪽에서 통화하는 목소리…… 버스가 급정거한다.

놀라 눈을 뜬 루브가 창밖을 쳐다본다. 빨간불이었고, 내려야 하는 정류장의 직전 길목이었다. 루브는 급하게 정차 버튼을 누른다. 빼곡한 버스 안을 힘들게 비집고 하차문 앞에 가 선다. 곧이어 버스가 다시 움직이고, 멈추고, 한꺼번에 내리는 승객들 사이에 루브가 함께 쏟아진다. 사람들이 사방으로 일사불란하게 흩어지고 나면 정류장은 다시 한적해진다. 잠시 숨을 고르던 루브가 고개를 들면. 팔에 걸려 있던 우산이 없다. 아까 내려 두고 챙기지 않은 것이다. 이마를 짚던 루브의 시야에 무언가 빨간 것이 걸린다. 그녀가 천천히 시선을 옮긴다. 정류장 의자에 앉아 있던 잭이 놀란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난다. 다가온다. 그의 옆에는 노란 우산이 하나 놓여 있다.

“러브?”

젠장. 루브가 속으로 욕설을 짓씹는다. 이걸로 세 번째다. 이제는 어쩐지 돌이킬 수 없을 것 같다. 기분 나쁜 울렁거림이 가슴 속에서 들끓는다. 그녀는 눈을 피하지 않고 잭을 바라본다. 그의 머리칼도, 눈동자도. 우중충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기억보다 선명한 빛깔이다. 복잡해지는 루브의 시선을 받으며, 그가 한껏 유쾌한 표정으로 웃는다. 그리고 묻는다. 우산을 같이 쓰겠느냐고.

“가자.”

루브가 먼저 손을 내민다. 잭이 그것을 덥석 잡았다. 그들은 활짝 펼쳐진 우산 아래에서 나란히 걷는다. 나 배고파, 루브가 말한다. 러브, 그럼 펍으로 갈까? 잭은 근처에 단골 가게가 있다고 이야기한다. 루브는 못이기는 척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마디 덧붙인다.

“러브가 아니고, 루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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