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9

닮은 꽃

슈나버틴

2호점 by 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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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을 싣고 나르는 바람은 그 계절을 닮았다. 봄에 부는 바람은 잔잔하고 부드러우며, 햇볕의 따스함과 어울리는 시원함이 있었다. 그런 봄바람은 해야 할 일을 위해, 가야 할 곳을 가고 있는 무표정한 소녀의 볼이나 머리칼을 살짝 쓰다듬고 지나가는 게 전부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소녀에게는 나른해지기 쉬웠다. 어딘지 모를 지역과 시대에 살며시 내려앉은 계절은 폭풍우라는 재난이 꼭 먼 이야기인 것만 같은, 그런 봄이었다.

쥐고 있는 체크무늬의 여행 가방은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다. 손가락에 힘을 아주 조금 풀어도 땅에 떨어지거나 하지 않을 것이다. 잠깐 내려온 눈꺼풀만큼이나 몸에 긴장을 놔버린 버틴은 그대로 천천히 봄에 녹아들다가도, 바람을 타고 날아온 작고 하얀 꽃잎들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곳에는 오랫동안 이런 봄을 몇 번이나 맞이했는지 모를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나뭇가지에는 푸른 이파리 대신 그 작은 꽃들이 솜사탕처럼 옹기종기 모여서, 누구 먼저 바람을 타고 날아갈지 떠드는 듯했다.

“이게 벚꽃이야?” 직사광선에 오랫동안 바래져 사라지는 색이 있듯, 기억하고 있어도 시간이 흘러 어떤 목소리였는지, 그 목소리의 높낮이나 억양은 또 어땠는지 완전히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을까, 그런 걱정이 쓸데없는 것이었는지 의문이 드는 순간이었다. 그저 고개를 옆으로 돌리면, 봄이 오지 않았던 시카고를 끝으로 차갑고 축축한 빗속에서만 머물던 소녀가 신기하다는 듯 손톱만큼 작은 꽃잎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슈나이더? 묻는 말 대신 크게 들이마신 공기에서 꽃내음이 가득하다. 숨이 턱 막혀도 이 상황만큼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그 커다란 벚나무와 꽃잎만 보던 소녀는 덤덤히 말을 이어나갔다.

“아몬드꽃 본 적 있어, 마스터? 이거랑 비슷하게 생겼는데.” 어느새 옅은 색의 눈동자도, 바람에 나부끼는 머리칼이나 모자를 묶은 리본처럼 가볍게 흔들렸다. 눈에 들어오는 검정 머리칼과 코트, 붉은 눈동자와 깃털들은 그림자처럼 움직이지 않았지만, 여전히 웃고 있었다. 발밑부터 이어지는 그늘은 오로지 한 사람의 몫뿐이다.

아몬드. 그 고소한 맛의 씨앗을 떠올리자 때마침 여행 가방은 손에서 미끄러져 바닥에 둔탁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잠시 선 채로 몽롱하게 봄의 햇살에 기대어 졸았는지 알 수 없지만, 버틴이 다시 가방을 주웠을 때 슈나이더는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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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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