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적 難敵
도원괴이담11
1
누이에 대한 추억은 얼마 되지 않는다. 밥그릇에 묻은 밥풀마냥 얼마 되지도 않은 것을 벅벅 떼어내면 직접 대면한 경우는 손에 꼽을 정도다. 그마저도 어렸을 적이 대부분이며, 공식 행사에서는 몸이 아프단 핑계로 기회를 박탈당해야 했다. 어렸을 적의 나에게 누이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는 극히 드물었기에 나는 8살때까지 누이가 있는 줄도 몰랐다. 그마저도 가주의 노호성으로 알게 되었으니, 풍문이 높은 담벼락 넘지 못하고 고꾸라지지 않고서야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이렇듯 누이의 존재도 몰랐던 나에게 그와의 첫만남은 좋은 기억으로 남았는데, 바로 그점이 그와 나의 모순된 관계를 설명해준다고 느낀다.
그가 사라지기 전이었으니 역으로 추정해보자면 내가 4살 이전이란 말이 된다. 그 나잇대의 대부분 기억이 흐릿한 가운데, 그를 만난 기억만이 또렷하다. 지루한 집구석에서 얼마없는 특이한 경험이었기 때문이다. 그때의 나는 바깥으로 나다니길 좋아해서 주위가 무진 애를 썼다. 어디 독 안에 들어가거나 길을 잃고 발견되어 나 대신 회초리 맞은 아이가 두 손을 넘었다. 정녕 웃길 일이다. 어린아이는 순수하듯이, 나또한 순수하게 내가 가진 권력을 사용할 줄 알았다. 그건 태어날 때부터 가진 권리이자 본능과도 같아 어렵지도 않다. 그러니 적어도 나를 감시하려면 적어도 내 권위에 준하는 이를 찾아 붙여줘야 타산이 맞았다. 가주님이 그를 모르실 분은 아니니 그러한 이유또한 쉽게 짐작해봄 직 했다. 내게 이유식을 먹이듯, 권력을 맛보여준 셈이셨을 테다. 그날도 나와 배는 차이나는 시동을 따돌리고 혼자 집안을 배회한 날이었다. 지금이야 집이 넓어 거추장스럽다고 생각하지만 어렸을 적에는 내게도 순수한 동심이 있었다. 홀로 집안 탐색하길 즐긴 것은 그 때문이었다. 탐험의 끝이 가장 끝 담벼락인 것은 정해진 수순이다. 개구멍이 아닌 이상에야 4살 아이가 담을 넘을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나는 담벼락을 따라 손을 그으며 쭉 흙을 쓸었다. 그가 있는 별채가 나올 때까지. 하루만에 이뤄진 일은 아니었다. 꾸준하게 여러 아이들을 회초리 맞힌 덕분에 찾을 수 있던 샛길같은 곳이다. 사랑채부터 끝자락 별채까지 혼자있는 나를 발견하지 못한 점은 온 집안 사람들 꾸중을 들어 마땅하다. 예전에는 이상함을 몰랐고, 이상함을 감지할 나이에는 답을 낼 수 있을만큼 자라있었다. 이 집에서 그의 존재를 인정하기 싫어 물리적 실체까지 지워버리고 싶은 심정임이 빤하다.
당도한 곳에서 검은색의 인영이 애꿎은 땅을 괴롭히는 중이었다. 때는 여름의 한창이라 담장 너머 울창한 수목때문인지 뒤뜰 왼편은 그늘이었다. 따지자면 그는 농부는 아니다. 농부는 새벽부터 일하고 해가 뜬 낮에는 일하지 않는 법이이었다. 한참 삽으로 땅을 괴롭히던 그는 땅에서 먼지가 요란하게 피어나자 뒤를 돌아보았다.
"흐어억...뭐, 뭐야? 귀신인 줄 알았잖아~"
너 누구야? 그이는 참으로 이상한 자다. 길을 잃었다 했더니 찾아줄 생각은 하지 않고 쉬다 가란다. 그러면서 그늘로 날 이끌었다. 목 마르다고 물 줄 법 하건만 시원한 냉수 한 잔 떠오는 법이 없었다. 지금 생각하니 손님맞이에 익숙하지 않겠구나 여기는 것이다. 그러며 도란도란 이야길 나누자는데, 내가 누구인지는 묻지 않고 제 이야기 떠들기 바빴다. 나는, 우리 어머니는... 그리움 차올라 혼자 훌쩍이는 모습을 보고있자니 4살배기 아이또한 날 세우기 어려웠다. 4살 딴에 많이 이야기했다. 가문은 어디고, 부모는 누구며, 외동이라 재미없다는 사실까지. 얼기설기 엮은 말인데 내용을 전하는 데에 무리가 없었다. 놀아줄 이는 한참 위의 손윗친척하고 시동뿐이다보니 재미없다는 소리를 지껄였다. 지금 생각하면 내 말 한마디 상처되지 않은 말이 없었을텐데도 나는 그날의 누이가 다정하다고만 느꼈다. 앞으로 그 나이 먹고도 아해에게 소리나 빽빽 질러댈 가주보다 성숙한 편이었다.
"허면 뭐 가지고 싶은 이가 있어? 이렇게 물으니 이상하네..."
"누이!"
"뭐어~? 그건 좀 힘들, 아니다. 힘들 것도 없나?"
"좋아, 그렇다면 이제부터 내가 네 누이다. 누님, 누이. 뭐가 좋아?"
"......누님?"
뭐, 실제로 피를 나눴으니 거짓은 아니지. 그리 중얼거리는 소리를 어렴풋이 들었던 것도 같다.
2
그날은 저녁이 될 때까지 나를 찾지 못했다. 누군들 차마 그곳을 생각할 수 없었을테니 당연한 수순이었다. 별채를 나와 사람 소리가 들렸다. 그는 내 손을 놓고 사라졌다. 마치 그가 신비의 존재 같아서 돌아간 나는 유모에게 비밀을 속살거렸다 호되게 혼났다. 망할... 그새 가주에게 일러바치긴. 하여간 유모는 다 좋은데 입이 싸서 문제다. 그러니 쫓겨났지. 끊어진 연은 내가 다시 이었다. 혈육의 정은 아니고, 순전 호기심이 강했다. 세간에서 그토록 떠들어대는 소설의 주인공이 나의 누이라는데, 혈육이라는 이유 하나로 소문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으면 싸게 먹히는 것이 아닌가. 가주의 눈을 피해 서신을 전달하고, 그가 해외로 나섰을 때 우연한 척 마주쳤다. 몇년의 시간이 흘렀으나 붉음에 섞인 먹색의 머리칼을 고수해서 알아보기도 쉬웠다. 성인이 되었음에 버릇 못 버리고 천방지축 철부지인 자를 보고는 안심하기 보다는 한심하게 여겼다. 적어도 가주자리 탐낼 이는 아니구나 싶어서. 그때의 나는 가주가 되는 데에만 전념한 상태였기 때문에. 처음에는 껄끄러운 듯 싶다가도 누이라 부르자 화색이다. 사람 좋아하고 의심치 못하는 것이 티가 났다. 하여 옆에 멱리 쓴 자는 누이의 새로운 가족이구나 어림짐작하였다. 누이는 이상한 사람이니까. 아무래도 요괴와 가족의 연을 맺어도 누군들 수긍할 터였다. 서로 챙기는 것부터 자연스럽고 저들끼리 모를 소리하며 시시덕 거리는 것을 보니 벗의 관계에 가깝게 보이기도 했다. 아무렴. 상관없다. 그하고 혈육의 정을 나누러 온 것도 아니니까. 그저 누님이 궁금했고 가주께서 노하셨으니 조심하라는 지극히 가족스러운 충고를 건넸지만, 정녕 궁금해서 왔다. 그에 돌아오는 미소가 조소하나 없이 맑은 까닭이 궁금하였으나 앞으로 연 이을 생각은 없어 더이상 말하지 않고 젓가락을 놀렸다.
"그리 깨작댔다간 서무에서 이랑이 이놈-하고 찾아올지도 모르네."
"윽-... 그럼 나랑 같이 도망가 줄 거지?"
"내 그를 불러도 모자랄 판에 왜 자네와 함께 도망치겠나."
"사사사, 삼세의 인연이라며! 내세에도 만나기로 했잖아~"
"계약자를 건강하게 오래 사게 만들어 내세 갈 일 늦추는 것도 내 할 일이지."
멱리 아래의 그는 의자 뒤로 느릇이 기댄다. 그럼 누이는 그의 어깨는 끌어안고 굳이 멱리에 머리칼을 부비는 시늉을 했다. 멱리가 상당하여 목이 저 뒤로 빠졌다. 이리 보니 항간의 신파같은 꼴이다. 그 연극이 제법 유쾌하다는 점을 빼면.
"아, 맞다. 여기 음식맛은 어때?"
저들끼리 그리 놀더니 이번에는 내가 표적이었다. 대번에 둘의 시선이 돌았다. 그마저도 동시에 일어난 일이라 시간을 함께 나는 이들의 특징이 보인다.
"꽤나 맛이 좋습니다. 청랑에서 보기 드문 재료를 이용하여 이국적인 맛이지만 그또한 적절히 조화가 이루어졌으며, 특히 이...무슨 문제라도 있는지요?"
"아니, 너 혹시 음식 좋아하나~ 싶어서."
"큼, 어찌 아셨습니까."
저들끼리 마주보고 웃는다. 원래 웃음이 많았는지 둘이 함께 있으면 웃음이 많아지는지. 두가지의 가능성 중 하나를 셈하다 두 개 다가 아닌가 하는 결론에 도달할 때쯤 답이 나온다. 너 표정 장난 아니었어~. 맞네, 자네 표정이 무슨 선물받은 아해 같더군. ...그랬습니까.
3
그 후 연락은 하지 않았다. 소문의 진상은 두 눈으로 확인했다. 신경쓰지 않아도 될 곳에 신경쓰면 정작 중한 것은 놓치기 마련이라. 청랑을 받치는 열가문의 수장이 되기 위해선 선택에 대한 감내가 필요했다. 그뿐이었는데. 내게 주인이 되기 위해 살라시던 가주께선 다른 곳에 눈독 들이기 시작했다. 벽투의 난이 일 적, 앞서 나서지 않았단 이유로 가문의 위세가 크게 줄었다. 내다버린 자식이 승승장구하는 꼴을 봐야했다. 한 번도 자식으로 여긴 적없는 이를 들여다 방석 위에 앉혀 꼭두각시 시키겠단 심산이다. 정녕 천도량 석자 신경쓴 일 없음이 티났다. 안다면 눈독들일 일도 없었을 테다. 누이가 순순히 당신 말을 들으면 정녕 망할 징조로 꼬리 두개 달린 거북이가 대륙에서 목도될 것이다. 잘 있던 도사를 건드려 황제의 눈 밖에 나고싶진 않았다. 청랑에 더이상 분란을 일으키고 싶지도 않았다. 가주는 아무래도 판단력이 흐려진 모양이다.
가주를 죽이기 위해 특별히 조합한 독은 가명으로부터 들여온 독이었다. 무색무취의 흔적없는 독이라길래 구매했더니 과연 가주의 죽음을 의심한 이는 없었다. 누이만 제외하면. 또 그 요괴와 함께 왔다. 얼굴을 보지 못했으니 얼마나 변했는지는 파악할 수 없었다. 장례식을 찾았음에도 여느 때와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농을 던지거나 하진 않으나 함께 있으면 긴장이 덜한. 이 가문으로부터 유리된 느낌. 아마 만들어낸 것이겠지. 대개 결심이 섰을 때 내보이는 눈빛을 보아하니...
'더이상 천씨라 불리지 않으려 한다만.'
예상은 어김없이 들어맞았다. 대화를 거쳐 천씨에서 제명되기로 결정이 났다. 행위의 주체는 그였고 객체가 나였다. 이건 일종의 계약이다. 그는 음모에 대해 눈 감고, 나는 그로써 자유를 주겠다는 이해관계다. 그래, 편히 가셨더냐. 네. 아프지도 슬프지도 않게 가셨습니다.
'아프지 않도록 잘 모신 것 같더구나.'
그 말에 웃어보일 뿐이었다. 얻은 정보에 의하면 정이 많은 이라더니, 우리는 아쉽지도 않을 인연이었다. 누이는 생각보다 담담했고 단단해뵌다. 가늘지만 몇 번이나 담금질 당한 검처럼 보이기도 했다. 막상 커다란 일이 지나면 오롯이 한 감정만 남진 않는다. 나부터도 가주를 향한 분노와 일말의 애정으로 혼란을 겪었다. 그럼에도 저리 깔끔하다면 필히 다른 기댈 구석이 생겼기 때문이리라.대청을 나서며 오가는 천씨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 누가 봐도 누님의 발뻗을 구석이 지척에 있었다. 푸른 물결을 입은 그는 또다른 누이를 식혀주는 물이다. 언제든 고통을 겪어도 녹아내리거나 굽지않고 새로 나아갈 길을 인도하는 흐름이다. 오늘은 내가 원하던 것을 얻은 날이었다. 이런 선심쯤이야 아무것도 아니리라.
"누님."
"..... 그래, 온아."
"...저 안쪽 별채에 여전히 꽃이 피고집니다."
한 번 들렀다 가시지요. 저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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