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불과 등불지기
1세계에서 돌아온 후 영웅은 줄곧 고민이 깊어 보였다.
말도 없이 성도를 떠나 연식도 없는 세계를 구하러 가서는 뻔뻔하게 돌아온 녀석이었기에 나는 한동안 녀석의 고뇌를 모르는 척했다. 성도에 남으라고 해도 굳이 알라미고를 구하러 가고, 전쟁에 나가 죽을 뻔하고…… 하나같이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녀석은 이따금씩 털어놓고 싶은 말이 잔뜩 있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럴 때마다 난 "오늘은 도도새 고기를 먹을까?" 따위의 말들로 일축해 버리곤 했다. 내가 녀석에게 할 수 있는 아주 사소한 복수였다.
그러다가 더 이상 모르는 척하기 어렵게 되었을 때, 나는 최후의 보루에서 생각에 잠긴 녀석에게 말을 걸었다.
"요즘 항상 여기서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네.
네가 무슨 생산적인 고민을 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웬 시비지?
…… 생산적인 고민을 하지 않았던 건 맞지만!"
"거울 세계에서 있었던 일 때문인가? 잘 풀렸다고 하지 않았어?"
녀석은 눈을 데루룩 굴렸다. 영웅은 워낙 인내심이 없으니 이 정도로 찔러대면 얼마 지나지 않아 술술 실토하곤 했다. 이번에도 금세 입을 열어 하는 말이, "그게, 사실은……"
영웅은 언제나 믿기지 않는 이야기들을 가져온다. 이번 이야기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미래에서 에오르제아는 제국이 만들어낸 살상 무기에 철저히 파괴되었다. 이에 이 시간선 바깥의 사람들은 죽은 영웅의 발자취를 곱씹으며 그를 살려낼 계획을 세웠다고 했다. 그리하여 어떤 인물 - 이름이 그라하 티아라고 했다 -과 크리스타리움을 거울 세계로 전송하여 재해의 근본 원인을 없애고자 했고, 그 끝에서 그라하 티아는 기꺼이 사라지려 했다는 것이다. 나는 내심 녀석이 무얼 고민했는지 알 것도 같았다. 그러면서도 물어보았다.
"어찌되었든 모두 매듭이 지어졌잖아. 1세계의 재앙은 사라졌고 원초세계의 재해 가능성은 크게 낮아졌어.
그런데도 뭘 고민하는 거지? 너는 '지나간 일'에 얽매이는 편이 아니었잖아."
"그래, 그렇지만 뭐랄까…… 조금 부담스럽다고 해야 할까?
그 모든 일이 나를 살리기 위해서 일어났다는 걸 믿을 수 없어.
사실 내가 그렇게 대단하지 않은 사람이면 어떻게 하려고 그랬을까?
내가 살아 있어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면?"
"……."
"그런 건 아무도 바라지 않을 거야. 그러니 나는 대단한 사람이어야 해.
그렇지만, 그렇게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에메트셀크 녀석도 늘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보고 있는 것처럼 굴었지……." 그리 덧붙이며 녀석은 웃었다가, 금세 씁쓸한 표정이 되었다.
"'새벽'에 몸담기 전까지, 나는 어떤 단체는커녕 모험가 파티조차 소속되지 않으려고 했어.
내가 무언가를 책임져야 하는 게 부담스러웠거든.
그렇지만 새벽을 만나고, 그 애들에게 책임이라는 걸 배웠어.
배운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책임져야 할 게 점점 늘어만 가네.
더 잘 책임지기 위해서 나는 본래의 나보다 훨씬 대단한 사람인 양 굴어야 해…….
나는 이제서야 어른이 되어가나 봐."
나는 그 마음을 알 것도 같았다. 나는 아버지와 형제들을 내 손으로 죽인 후 덜컥 가문을 책임져야 했다. 사실상 이름뿐인 가문이 되었대도 가문에 의지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내가 그다지 대단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믿을 수 있는 사람인 양 꾸며내어 모두를 안심시켜야 했다.
그래, 나도 알아. 하지만— 너는 무엇도 꾸며낼 필요가 없어.
"너를 처음 보았을 때, 나는 네가 영웅이라는 말을 절대 믿지 않았어.
넌 꾀죄죄하고 무례한 데다가 용을 닮은 뿔까지 달고 있었지.
나는 영웅이라면 좀더 격식 있고 단정한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거든."
"아핫, 너는 이슈가르드 사람이니까 당연히 영웅이라면 엘레젠족으로 생각했겠구나?"
"맞아. 그리고 그 편견은 머잖아 깨져 버렸어.
그 꼬질거리는 녀석이 천 년간 이어진 전쟁을 단숨에 끝내 버리다니…….
내가 그렇게나 좋아하던 영웅 설화 속 인물 중 누구도 그러지 못했는데 말이야."
나는 녀석의 곁에서 평화로운 성도를 바라보았다. 녀석이 없었다면 지난한 전쟁이 이어지고 창천 거리는 폐허인 채로 남았을 것이다. 인간의 죄와 니드호그의 비탄 또한 몇몇 이단자를 제외하면 성도의 사람들은 알지 못했을 터. 또는 야만신이 된 교황이 백성들을 세뇌하여 영영 문을 걸어잠근 나라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녀석도 '전쟁을 단숨에 끝내겠다'는 각오로 움직인 건 아닐 터이다. 그저 할 수 있는 일을 조금씩 해 나가고, 모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보니 화합에 가까워졌을 것이다. 희망은 본디 아주 작은 걸음으로부터 시작된다. 그 애를 보며 깨달은 것을 이제는 그 애에게 돌려주고 싶었다.
"그래서 알게 되었어. 영웅에 걸맞은 사람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그가 걸어온 궤적이 그를 영웅으로 만든다는 것을.
영웅다운 행동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그저 옳다고 믿고 행한 일들이 미래로 이어졌을 뿐이라는 것을."
녀석은 내 말에 환히 웃었다. 새파란 눈에서 반짝반짝 빛이 났다. 누군가는 영웅을 희망의 등불이라 불렀다는데, 정말로 그 반짝이는 눈을 따라가면 분명 빛나는 곳에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니 나의 영웅이여, 너는 그저 너답게 있어 줘. 아무것도 바꾸지 않은 채 너 자신으로 살아가면 돼.
영웅은 곧 네가 되고, 네가 믿는 신념이 곧 영웅다움으로 정의될 테니."
녀석은 망설임 없이 답했다. "응, 그럴게!" 그제야 근심이 가신 영웅은 활짝 웃으며 내 손을 꼭 잡았다. 녀석이 나에게 의지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한때는 그 마음을 이용하려 했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 마음을 지키고 싶었다.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역할임을 아니까.
희망과 미래로 사람들을 이끄는 등불을 지키기 위해 나는 기꺼이 등불지기가 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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