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린

8년의 연구

화린

푸하하 by 프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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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글보글. 플라스크의 내용물이 끓는다. 화린이 늘 머리 위에 걸치고 다니는 고글은 오랜만에 그 쓰임새를 제대로 하였다. 눈을 보호하기 위해 착용한 것이다. 거추장스럽게 느껴져서 고글 주변을 긁적이고 있으면서도 고글 너머로 눈의 총기가 드리웠다. 늘 썩은 동태눈을 하는 화린에게 몇 안 되는 순간 중 하나였다. 하나는 방화고 또 다른 하나는 지금 진행 중인 마법 연구였다.

화린은 마법이 좋다. 좋고 싫은 것을 명확하게 표현하지 않는 화린이지만 마법만은 당당히 좋다고 말하고 다녔다. 물론 방화도 좋긴 하지만 이건 사회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으니 대놓고 티를 내진 않았다. 그러니 화린에게는 마법만이 마음 편히 좋아할 수 있는 유일한 주제였다. 화린은 마법의 힘이 좋았다. 연구하면 연구할수록, 알면 알수록, 근본에 가까워지며, 근본에 가까워질수록 더 잘 다룰 수 있는 게 마법이었다. 화린은 지금도 충분히 고티어의 마법사지만 틈만 나면 연구를 이어가 자신을 함양했다.

화린은 강함을 좋아했다. 강한 마법을 좋아했으며 그래서 본인의 마법인 불 마법을 좋아했다. 마법사가 되는 것은 드문 일이다. 100명의 사람이 있다면 그 중 80명 만이 인간이고-20명은 수인이다- 그 80명 중 1%만이 마법사였다. 1%의 마법사들 중에서도 싱글, 더블, 트리플로 급이 나뉘었다. 싱글은 마법을 다룰 수 있는 마법사, 더블은 한두 가지의 고유 마법을 다룰 줄 아는 마법사, 트리플은 세 가지 이상의 고유 마법을 다룰 줄 아는 마법사이며 화린은 더블 마법사에 속했다. 화린은 더블인 자신이 좋았다. 세 가지의 마법을 다루는 것보다, 한 가지의 마법을 심도 깊게 다뤄 강한 힘을 다루는 것이 더 취향이었다.

하지만 트리플을 염원한 적이 없었다고 하면 그건 거짓이겠다. 세 가지의 마법을 다루는 마법사는 분명 강할 것이다. 그런 마법사와 한 번쯤은 제대로 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트리플 등급의 마법사는 전세계에서 손에 꼽힐 정도로 적은 인원이다. 화린이 되는 것도 어려웠고… 만나는 것조차 어려웠다. 그 수가 적다보니 관심이 고픈 관심종자를 제외하고는 자신이 대놓고 트리플임을 밝히는 이는 거의 없었다. 그리고 그런 이들은 대부분 또라이였다. 또라이더라도 만날 수 있다면 기꺼이 만나겠지만, 히어로인 화린은 바빴다. 그러니 이렇게 홀로 자신의 연구실에서 연구나 하고 있는 게 아니겠는가.

화린의 시선은 여전히 플라스크를 향했다. 화학 혼합물과 마나가 만나 마학 반응을 일으키면…… 특수 마나가 만나면…… 오늘 했던 실험을 실험결과 기록지에 작성해나갔다. 기록지를 파일에 넣어 책장에 꽂아두었다. 화린이 기록한 결과지가 책장을 빼곡히 채웠다. 화린이 8년간 연구한 연구 기록인 만큼 양이 상당히 방대했다. 불 마법을 다루는 만큼, 연구 기록이 유실되지 않도록 불에 대한 결계는 제대로 쳐두었다. 그러니 이 연구소는 화린의 소유한 장소 중 가장 안전한 곳이다.

…분명 그랬을 터여야 했는데.

그런 연구소가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 화린은 일순간 몸이 떠오르는 기분을 느꼈다. 불이 타닥타닥 타오르는 익숙한 소리에 잠시 불 구경을 했다. 그러나 평소 불을 쬐던 감각과는 확연히 달랐다. 화린의 어깨가 경직됐다. 아니, 자세히 보면 달달 떨렸다. 화린은 연구소의 문을 열고 보관함으로 향했다. 문고리는 뜨거웠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문을 열자마자 산소가 닿은 불길이 더욱 거세게 일렁였다. 불 마법사인 화린에게 이 정도 뜨거움은 견딜만 했다. 더욱 안으로 들어가 자료들을 뒤적거렸다. 찢어지고, 불타고, 연구소 내부는 완전히 엉망이었다. 무어라 크게 낙서돼있는 것 같기도 했지만 그것이 화린의 눈에 들어오진 않았다. 가장 오래된 자료부터 가방에 담기 시작했다.

“쿨럭…”

폐에 들어오는 연기가 매웠다. 몸이 힘든 것보다 자료를 챙기는 것이 중요했다. 재로 인해 손이 까맣게 물들든 말든 계속해 가방 안에 꾹꾹 눌러 담았다. 벌써 자료의 절반이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타올랐다. 아직 충분히 챙기지 못했지만 더이상은 몸이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오랜시간 화재 현장에서 일했던 화린의 감이 밖을 향하라 말하고 있었다. 조금만 더… 연구지가 몸을 옭아매는 것 같았다. 발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평소라면 이성적인 판단을 했을 텐데, 그랬다면 진작 이곳을 빠져나갔을 텐데, 감정이 화린의 몸을 조종했다. 그것이 문제였을 것이다.

잠깐 망설인 그 10초도 안 되는 시간, 큰 소음이 들렸다. 그곳을 향해 휙 고개를 올리니 화린의 바로 위에 불이 붙은 자재가 떨어지고 있었다. 화린은 그순간이 길게 느껴졌다. 그러나 피하지 못했다. 아니, 피할 수 없었다. 화린의 품에는 자료가 있었다. 이걸 피한다면 장작에 자료가 손상되고 말 것이다. 그런 생각에, 두 눈을 부릅뜨고 정면으로 막아냈다. 이마가 찢어지는 감각과 피부가 타오르는 감각, 그리고 점점 멀어지는 의식… 그리고 자료는…

그런 와중에도 자료를 쥔 손에 힘을 빼지 않았다. 그것이 마지막 기억이었다.

***

“화린 님 미쳤어요?”

“…잘못했어.”

“어떤 사람이 불타고 있는 화재 현장에 들어가요? 미친 사람도 그딴 짓은 안 할걸요!”

“…….”

“큰일났으면 어떡하려고….”

토끼 귀가 축 쳐졌다. 화린은 머리를 쓰다듬을 뻔한 걸 참았다. 몸이 조금만 덜 아팠더라면 손을 뻗어 래빗을 위로해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화린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것도 힘겨웠다. 딱 죽지 않을 만큼의 부상이었다. 전신에 화상을 입었고 오른쪽 눈은 아예 뜰 수도 없었다. 붕대가 칭칭 감겨 겉으로 보이는 꼴이 꽤 우스웠다. 불 마법사인 화린에게 화상은 별 일 아닌 일이었지만 이번은 정도가 심했다. 어쩌면 부상을 치료한다고 하더라도 흔적이 남을지도 몰랐다.

“이번 건은 방심했어.”

평소의 자신과 달랐다. 무언가 홀린듯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들었다. 지금 생각하니 조금 이상했다.

“다음부터는 이럴 일 없을 거야.”

이번 일을 본보기 삼아 다시는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할 것이다. 점검 횟수를 늘린다든가.

“…너무 걱정하지 마. 래빗 씨.”

그러니 네가 울지 않았으면 하는데. 제 멍청한 실수에 동료가 동요하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의사 말로는, 움직일 수 있는 수준으로 치료하는 데에만 한 달이 걸린다 했다. 보통의 사람이면 살아남기 어려웠을 거라고도 말했다. (죽었을 거라는 것을 돌려 말한 것이다.) 피부 뿐만 아니라 폐 속까지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 어지간한 힐팩으로도 치료하기 어려웠다.

불행 중 다행인 건 연구 자료는 지켰다는 건가. 역시 들어가는 건 무모한 짓이었던 걸까. 타오르는 걸 가만히 두고볼 걸 그랬나.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그게 맞는 행동이겠지만 과거에 했던 선택이 후회되진 않았다. 눈동자를 돌려 래빗의 얼굴을 바라봤다. …양심이 찔려 더이상의 생각은 그만두었다.

나중에 알아보니 연구소 방화 사건은 고의적 사건이 맞았다. 그나마 건진 자료도 보존 술식이 파괴되어 있어 복구에 어려움이 있던 탓에 일부 정보밖에 건져내지 못했다. 제 연구가 필요했거나, 어쩌면 개인 원한… 정도이지 않을까 추측만 했다. 그정도로 범인에 대한 정확한 증거를 찾을 수 없었다. CCTV를 설치할 걸 그랬다. 애초에 백업도 안 해두었으니 내 잘못이었다.

“화린 씨! 치료받으실 시간이에요.”

“아, 벌써… 항상 감사합니다.”

이번 사건으로 몇 달 간 병원에서 치료받으며 생각치 못한 인연도 생겼다. 의사, 예나 씨였다. 예나 씨는 히어로의 팬이라고 했다. 히어로를 저렇게 좋아할 수 있는 건가 싶긴 했지만 부드럽게 웃는 미소를 보면 마음까지 치유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예나 씨.”

“네…?”

“예나 씨의 치유 마법은 의복에도 적용되잖아요.”

“그…렇죠?”

“어느정도의 범주까지 복구되는지 궁금해요. 옷이 아예 없는 상태여도 가능할까요?”

“그건 안 해봐서 잘 모르겠… 꺄아악! 화, 화린 씨! 태우지 마세요! 흉터에 불 닿으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예나는 치유 마법사였다. 치유 마법사의 수는 꽤 드물었기에 화린의 호기심을 채우기는 충분했다. 마침 연구할 것도 없어진 화린은 예나를 좋은 표본으로 삼았다. 예나는 등 뒤에서부터 느껴지는 화린의 따가운 시선이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히어로의 관심을 받는다고 생각하면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환자면 환자답게 굴라구요!”

“네.”

“대답은 잘하시네요…!”

“잘하는 편이에요.”

“…….”

화린은 마법이 좋다. 마법사도 좋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치유 마법사인 예나도 좋아했다. 그런 그를 알아가는 것-이자 연구-도 좋아했고. 화린은 예나가 자신을 괴롭히는 진상 히어로 환자(…) 정도로 생각하는 것을 꽤 오래동안 눈치채지 못했다.

*공백 포함 4236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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