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지나간 자리는

별이 지나간 자리는, 1

혜성이라고 하던가요, 별자리라고 하던가요?


*주의!*
글 내부에 다소 심리적 압박감을 일으킬 요소와 직-간접적인 사망의 묘사가 들어가있습니다.

아이를 안고 뛰는 몸에서는 언제까지고 뛸 수 있을 것 같은 힘이 솟아났다. 생존의 위협을 받은 사람의 몸은 마치 위대한 전사와도 같은 힘을 낸다고, 언젠가 어머니께 들은 적이 있다. 그러니 너도 위험한 때가 되면 선택해야한다고.

쐐액

뿔 옆을 스쳐 지나가는 화살 소리에 당장이라도 몸이 굳을 뻔했지만 달음박질을 멈출 순 없었다. 옆에서 나란히 뛰는 반려의 이마에선 피인지 땀인지 모를 것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는 시선을 찰나의 깜빡임과 함께 다시 앞으로 돌렸다. 저 멀리 일몰 직전의 해를 보는 것처럼, 재회시장의 불빛이 보였다. 저기까지만 가면, 저기까지만 내 딸을 데려가면. 

"잡아라! 놓치지 마라!"

방금 밟고 뛰어넘은 물가에 뒤에서 쫓아오는 횃불의 불꽃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불꽃의 물이 다리를 적시는 줄도 모르고, 빠르게, 더 빠르게. 말보다 더 빠르게, 초원의 그 어느 바람보다 더 빠르게, 하늘을 지나가는 별똥별보다 빠르게. 한참을 숨도 고르지 않고 칼다르 평원 위를 질주하다 돌연 옆의 반려가 우뚝, 멈췄다. 나는 아이를 안은 채 얼빠진 얼굴로 반려를 올려다봤다. 

"쇼락, 뭐하는거야⋯. 어서 뛰어!"

"오드, 뛰시오."

"뭐? 뭐,라는거야. 저기 바로 앞인데⋯ 당신 미쳤어?"

"오드, 보이지 않소? 너무 가까운 곳에서 당신이 쫓기면 어찌 될지 몰라."

"⋯어쩌면 안에 들여보내 주지 않을지도 모르오."

"그렇다고 네가, 너를. 내가 당신을 어떻게⋯."

얼굴이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으로 일그러져가는게 느껴졌다. 갑자기 상처가 덧나거나, 불현듯 눈 먼 화살을 맞아서는 아니었다. 그건 하나의 직감이었다. 여기서 발을 떼면 당신을 다시는 볼 수 없을테지, 30년을 넘게 함께한 당신을. 뿌드득, 하고 이를 가는 것을 대신으로 비명을 짓이겼다. 반려는 담담하게 나를 내려보지도 않고 그리 말하며 뒤쪽을 바라봤다. 언덕 너머로 아침도 아닌데 불길한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소란스러운 고함과 힐난, 사냥의 소리. 심장의 고동이 내달리고 있었다. 움직여야 해. 나도, 당신도.

"제발⋯. 쇼락, 같이가야 해! 제발, 이러지 마. 당신도 함께⋯"

"오드!"

젊은 시절 둘이서 떠난 여행에서 아주 흥분한 들짐승을 만났을 때도 저렇게 큰 소리를 내보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일갈에 눈을 휘둥그레 뜨며 바라보니, 그는 나를 잠시 굳은 얼굴로 두 호흡 정도 내려다보았다. 한 호흡 뒤에는 그의 몸이 숙여졌고, 그 다음 호흡에는 차가운 몸이 나를 단단하게 감싸안았다. 그제야 품에 안은 잠든 아이가 꿈지럭 거리는 것이 다시금 느껴졌다. 그리고 두 호흡 뒤 그는 불길한 태양과 나의 사이에 우두커니 스더니, 몸을 꿈틀거렸다. 특유의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웃는 얼굴을 내게 보이며 내 어깨를 잡고 뿔을 부볐다.

"사랑하오, 오드. 내 평생, 에진족이면서 수영을 못했던 사실이 자랑스러웠던 건, 그대를 만나서 였어."

"⋯ ⋯."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다시 이별을 이로 짓이겼다. 잇사이로 뛰쳐 나가고 싶은 것은 비명과 분노 뿐만이 아니었다. 둘이서 함께한 시간을 억지로 뜯어내어야 하는 만큼, 수백 수천가지의 말이 있었다. 이게 만약 마지막이라면 평생동안 해온 말을 나 역시도 들려줘야겠어.

"나 역시도, 너를 그 강가에서 만난 건 그 어느 별보다 찬란한 일이었어."

"사랑해, 쇼락."

작별의 입맞춤도, 더 이상의 포옹도 용납되지 않았다. 언덕 위로 태양을 업은 칼날들이 반짝였으니까. 차가운 양 팔에서 벗어나 나의 반려를 눈에 담고 바르르 떨려 움직이지 않는 입꼬리를 최대한 끌어올려 미소지었다. 그는 그걸 보더니 씩 웃으며 다시 뒤를 돌았다. 여기다! 하는 외침과 함께 그는 태양을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나도 다시 뒤를 돌아 뛰어갔다. 한 발자국엔 첫 만남이, 한 발자국엔 해질녘의 추억이, 한 발자국엔 결혼식이, 한 발자국엔 아이가 태어난 날이⋯. 초원의 대지에 딛는 이 모든 발걸음은 내일이면 지워질테지. 해가 뜨면 아무 일도 없듯이. 나의 발 밑에 누운 초원의 풀들은 다시 일어날거고⋯.

쇼락의 말이 맞았는지, 재회시장의 문지기는 미심쩍어 하는 얼굴을 하더니 이내 안으로 들여보내주었다. 나는 정신없이 재회시장 안으로 들어가며 미리 연락해두었던 상인에게 품에 안고 뛰어온 나의 소중한 별빛과, 어디로 보내달라고 써있는 편지를 전했다. 같이 가냐고 되묻는 듯 나를 말없이 바라보기만 하는 상인에게는 고개를 저었다. 그들은 나를 죽일 때 까진 멈추지 않을거야. 다른 부족에게 불씨를 옮기는 것도 옳지 않아. 그렇다면 내가 해야할 일은 역시. 

잠시 숨을 고르며 상인에게 보답으로 줄 돈을 세고있자, 아이가 깼는지 그제야 울음을 조금 내어보이나 했다. 대초원을 거의 반 가르다 싶히 달려왔는데도 깨지 않은 것에 혹여 다친 것은 아닐까 노심초사 했지만, 울음소리를 들으니 다행히 건강해보였다. 상인은 나에게 아이를 다시 안아서 건네주며 달래길 부탁하는 것 같았다. 나는 익숙하게 아이를 받아안아 토닥이며 어르고 달랬다. 쇼락의 하얀 머리와, 그의 푸른 물결과 나의 보랏빛 밤하늘이 담긴 눈이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 이 아이의 눈에 나와 쇼락이 비칠 때가 생각나 눈물이 날 뻔 했지만, 아이에게 우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어짜피 아이들은 자라서 애기 때의 일을 모두 잊는다지만, 그래도 그냥 웃고 싶었다. 적어도 너에겐, 어떤 슬픔도, 어떤 불꽃도 닿게 하고 싶지 않으니까. 나를 닮은 옆으로 자란 뿔은 너무 크게 자라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아이에게 서투른 자장가를 불러주자, 착하게도 아이는 그 큰 눈망울을 잠시 꿈뻑거리더니 잠들었다. 

잘 자렴, 나의 아가. 우리의 물 위에 뜬 작은 별아. 

너는 그 어디에 가서도 빛날거야. 

나의 모든 마음을 담아, 나의 반려의 마음까지 담아서 너에게 축복을 내릴게. 눈을 뜨면 너는 낯선 곳으로 떠나겠지만. 그 곳은 우리가 가기엔 너무 먼 곳이겠지만, 너를 정말로 사랑한다는 건 잊지 말아주렴. 너의 발걸음 닿는 모든 곳에 우리가 있을거야. 별들은 언제나 너를 사랑할테니. 우리가 너를 어디서든 사랑하고 있을게, 아가.

시간은 어느새 나아마께서 별이 새겨진 거대한 천으로 온 하늘을 뒤덮었을 때였다. 잠깐 졸았는지, 옆의 상인이 내 어깨를 붙들어 살짝 흔드는 움직임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상인은 염려하는 얼굴로 나를 한 번 보고, 바깥을 바라봤다. 상인을 따라 천천히 시선을 옮기자, 점점 정신이 드니 알 수 있었다. 그리 멀지 않은 그 언덕에, 불길한 태양이 뜨고 있었다. 바로 뒤까지 쫓아왔던 그 불꽃이 마치 나를 불러내듯 서있었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했다간 부탁도 제대로 들어줄 수 없을테지. 

나는 품에 안은 나의 샛별을 상인에게 조심히 안겨주었다. 등에 차고 달렸던 도끼를 천천히 한 손에 쥐며 다른 한 손은 최대한 옷에 닦아내어 깨끗하게 만들었다. 상인은 그것을 물끄럼 보더니, 작은 천을 내밀었다. 나는 감사인사 대신 고개를 살짝 숙이며 그 천에 손을 닦아내었다. 그나마 말끔해진 손을 들어, 마지막으로 아이의 머리부터 뺨까지 천천히 쓰다듬었다. 마음 속의 수 많은 말을 전하기엔, 태어난지 두 해를 막 넘긴 아이에겐 짐이 될 수도 있으니까. 그저 천천히, 네가 무사하기 만을 빌며. 손끝부터 손 전체에 닿는 보드라운 감촉을 느끼자 눈물보다는 웃음이 나왔다. 나도 살고 싶어. 하지만 나보다는, 앞길을 걸어나갈 네가 더 소중하니까.

"⋯우리 아기, 꼭 좀 부탁할게요."

"⋯ ⋯."

상인은 잠시 나를 보더니 결의에 찬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보다 신뢰를 중시 하는 부족은 언제나 천마디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주기 마련이었다. 양 손으로 으스러져라 도끼자루를 잡았다. 거의 안다싶히 도끼를 안은 채 천천히 재회시장의 정문 밖으로 나갔다. 문지기 케스티르 족들이 내게 시선으로 말을 걸었던 것 같지만, 괜찮을거야. 너희들에게 해는 안 끼칠거야. 라며 안심시키곤 밖으로 천천히 나갔다. 무심코 나아가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별이 지독히도 높은 창공에 쏟아놓은 보석처럼 아름다웠다. 

"죽을 날로는 너무 아름다운거 아닌가."

괜히 헛웃음을 지으며 심호흡을 했다. 들이쉬는 숨에는 초원의 바람이, 내쉬는 숨에는 초원의 땅이 나를 위로했다. 하늘을 바라본 눈을 천천히 내리자 조금씩 일렁이는 그 불길이 거기 여전히, 기다리는 듯 서있었다. 뒤는 돌아보지 않아. 양 손으로 도끼 손잡이를 꾹 쥔 채 어느정도 재회시장과 거리를 벌리며 소리쳤다.

"여기까지 와보시지, 겁쟁이들아!"

초원이 기억하던 그 날의 마지막은, 어느 때보다 아름다운 밤하늘 아래. 분홍빛 머리의 전사가 밤에 떠오른 태양의 속으로 파고들며 사라지는 것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다른 재회시장의 주민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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