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fido

2부 2화

첫 오순절(교회편)

폰은 남부로 향하는 14일 동안 그 길에 있는 모든 마을에 들러 제 모습을 보여주어야 했고, 7일째 되던 날에 가면을 쓸 수 없겠냐고 베론에게 물어봤다가 거절당했다.

“저들은 당신의 얼굴을 본 것만으로도 내일을 살아갈 힘을 얻었을 겁니다. 이런 힘든 시기에 존재만으로 희망이신 분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다니요.”

꾸짖는 말은 아니었다. 베론은 삶이 힘든 이들이 이번 방문으로 얼마나 힘을 얻었는지 폰이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쑥스럽고 부끄러운 마음으로 말을 꺼냈던 폰은 새삼스레 제 직책의 무게를 실감했다. 일행이 마을에 도착하면, 그곳 사람들은 거친 손을 거친 천에 닦고 폰에게 손을 잡아달라고 내밀었다. 물론 멀찍이서 동경하는 눈으로 쳐다만 보는 이들도 있었지만, 폰이 말에서 내려 그 손들을 잡아주자 그들도 용기를 내어 다가왔다.

‘이 사람들이 내가 지켜나가야 할…, 남부에서도 훈련할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폰은 손을 잡는 그 순간순간의 얼굴들을 하나씩 눈에 담았다. 그러는 바람에 일정이 밀릴 뻔하긴 했지만, 베론이 큰 마을에 들를 때마다 말을 교체했기 때문인지 예정대로 남부 교회에 도착할 수 있었다.

5월의 순풍이 일행을 맞았다. 성문을 통과한 폰은 맑은 하늘을 빼곡히 뒤덮은 꽃비와 그 틈새로 쏟아지는 환호성에, 몇 번은 와봤던 거리가 낯설게 느껴졌다. 코지와 함께, 시도폰은 머리끈으로 쓰고 있는 팔찌를 샀던 가게도 그대로 있었다.

상점 주인은 폰을 올려다보며 사람들과 함께 환호하고 있었고, 상점엔 경쾌한 글씨체로 ‘휴무일’이라고 적힌 팻말이 걸려있었다. 울퉁불퉁해서 넘어질 뻔했던 돌길도 말끔하게 정비돼있었는데, 아무튼 눈에 보일 만한 모든 곳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제1 신전에 도착하자마자 말에서 내린 일행은 옷에 잔뜩 묻은 꽃잎을 털어내고 건물로 들어갔다. 폰을 필두로, 사람들이 회중석을 따라 천천히 단상으로 걸어가는 동안 노래가 울려 퍼졌다.

‘매번 저런 곳에 앉아서 사제님들이 입장하는 걸 바라보기만 했는데. 이렇게 내가 걷고 있으니까 기분이 이상하네.’

어색한 기분에 땅을 보고 걷던 폰은 시야 위쪽에 들어온 익숙한 형체를 알아보았다. 단상에 가까이 가지 않아도 교황의 뒤에 서 있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고개가 들렸다.

교황을 중심으로 도열한 사제 중에서 홀로 반투명한 베일을 쓰고 있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는 사람이 있었다. 촘촘하게 짜인 베일이 그의 머리카락과 눈을 덮고 있어 기쁜지 슬픈지 알아볼 수 없었지만, 그런데도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던 폰은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재촉했다.

“잠시만요, 너무 빠르십니다.”

베론이 급하게 뒤에서 속삭인 말을 듣고서야 폰은 원래 속도로 돌아올 수 있었다. 유달리 두근거리는 심장을 자각하고 옅은 한숨을 쉬는 시도폰의 뒤로, 행사를 구경하는 시민들을 위해 열려있는 문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베일이 살짝 흐드러진 모양이 꼭 활짝 핀 꽃 같다고 생각한 폰은 마음을 다잡고 단상에 올라 교황을 마주 보았다. 노래가 끝나고 교황은 북부 기사단의 노고를 칭찬하는 말로 행사를 시작했다. 귀는 열려있으니, 시도폰은 교황이 자신의 일화에 금칠을 거듭해서 사람들을 고취하고 있다는 것은 알았다.

하지만 대중과 교황의 열성에도 불구하고 시도폰의 모든 신경은 저와 같은 줄에 서 있는 카리타스에게 쏠려있었다. 회중석은 그나마 점잖았지만, 신전 바깥은 벌써 흥분한 사람들이 있어 들썩거렸다.

마침내 긴 기도가 끝나고, 시도폰이 나설 차례가 되었다. 기도 동안 멈춰있던 선율이 잔잔하게 다시 흘렀고, 엄숙한 분위기에 어색하게 교황을 마주 보고 선 폰은 창을 바르게 고쳐 들었다.

카리타스는 아까와 같은 표정으로 폰을 보고 있었다. 카리타스가 웃어주리라 생각했던 폰은, 낯선 반응에 당황했다. 게다가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모두의 시선이 제게 쏠려있다는 게 느껴져서 긴장하기도 했다.

교황은 인자한 표정으로 폰을 내려다보다가 기도하듯 두 손을 모았다. 높은 천장에서 오전의 햇빛이 쏟아져 그의 눈은 신성한 금색을 띠었고, 폰이 정해진 콘피테오르를 읊조리자, 단상엔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로 밝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이젠 이 빛이 익숙한 폰을 제외하고 누구도 제대로 눈을 뜨지 못했고 답가를 읊어야 하는 교황마저 강렬한 빛에 압도되어 쉽사리 입을 열 수 없었다. 정당한 절차대로 끄는 것조차 불경하다고 여겨질 신성한 빛이 꺼지지 않자, 폰은 자신이 끌 생각으로 입을 열었다.

그때, 작지만 귀에 익은 목소리로 누군가 대신 답가를 읊었다. 점차 사그라지는 하늘색 광채 너머로 카리타스가 막, 입을 닫고 있었다. 교황은 자신이 답하지 않았는데도 빛이 사라진 것이 이상했는지 바로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못하다가, 빠르게 정신을 차리고 시도폰이 집행자로서 신께 인정받았음을 공표했다.

곧바로 우레와 같은 함성이 단상부터 회중석을 관통해 시장까지 번졌다. 성문을 통과할 때 내렸던 붉은 꽃비의 배는 족히 될 것처럼, 작은 꽃잎들이 빽빽하게 떨어졌다.

시도폰은 향긋한 꽃향기와 풍경을 즐기다가 문득 고개를 돌려 회중석을 바라보았다. 우연히 시야에 들어온 건 환호성을 지르는 사람들 사이로 빠져나가고 있는 녹색 머리카락의 소녀였다. 뒤늦게 그것을 알아차리고 아이를 쫓는 두 사람도 눈에 익은 콤비였다.

“저, 이제 단상에서 내려가 봐도 될까요?”

얼토당토않은 폰의 물음에 교황은 단호하게 ‘안됩니다.’라고 답했다. 폰은 이후의 행사가 어떻게 진행됐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신전이 평소와는 다른 밝고 시끄러운 분위기로 가득했지만, 코지가 사라진 자리는 먹구름이 들어찬 것처럼 칙칙해 보였다. 코지는 왜 그렇게 나가야 했을까? 집행자라는 직책에 올라간다고 해서 코지와 친구가 아니게 될 리가 없었다.

열심히 눈알을 굴렸지만, 행사가 끝날 때까지 코지, 얀, 센은 돌아오지 않았다. 청중들의 환호성이 잦아들고 신전의 문이 굳게 닫혔다. 모든 행사가 끝난 건물에 남아있는 사람은 고위 사제와 북부 기사단 일부뿐이었다.

폰도 마음 같아서는 다른 기사들을 따라 시장으로 나가고 싶었지만, 이번 일의 주인공이 되어버렸으니 불가능한 일이었다. 교황이 오찬을 들자고 제안하여 식당으로 이동하게 되었을 때, 시도폰은 은근슬쩍 카리타스의 옆으로 자리를 잡았다. 베론은 그것을 보고는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렸다.

“잘 지냈어? 편지하고 싶었는데 외부랑 아예 차단되어 있어서 못 했어. 그때 너희 배웅한다고 잠깐 나갔다가 감시가 더 엄격해져서 도저히 몰래 연락을 할 수가 없었어.”

카리타스는 시도폰이 서 있는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입도 크게 움직이지 않으며 대답했다. 다른 사람이 보고 있었다면 카리타스가 말없이 채소를 씹어먹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난 네가 무사히 지낸다는 것만 알 수 있어도 괜찮아. 미안해하지 마, 이해하니까.”

“다행이다. 그, 혹시 아까 코지가 행사 도중에 뛰어나가는 거 봤어? 못 봤을 수도 있겠지만….”

이후로 어디가 아픈 거 아니냐, 생각지도 못한 오해를 한 게 아닌가, 등등의 걱정이 줄줄 이어졌고 카리타스는 살짝 주위를 둘러보며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각자 제 옆 사람과 이야기하며 식사 중이라 두 사람에게 수상한 시선을 보내는 이는 없었다.

“아냐, 코지는 아까 네가 집행자라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됐을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인 폰에게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당황한 폰은 카리타스가 자신이 읽던 소설의 뒷부분을 미리 알고 제게 말했다며 얼버무렸다. 다행히 그 엉성한 수습에 사람들은 속아 넘어갔고 오찬 내내 폰은 카리타스의 시선을 전혀 받지 못했다. 이따금 전해지는 정보라고 해봐야, 제 손에 닿을 듯 말 듯 움직이는 카리타스의 손가락 움직임 정도였다.

“내가 설명하진 못했지만, 누군가는 말해줬을 거라 생각했는데. 어떡해….”

“일단 밥부터 먹어, 가만히 있어 봐.”

작은 소리로 징징거리던 시도폰은 제 옷 주머니로 들어온 카리타스의 손에 놀라서 먹던 음식을 뱉을 뻔했다. 다행히 맞은편에 있는 오토 대주교의 얼굴에 음식이 튀는 불상사는 발생하지 않았다. 다음날, 시도폰은 시장에 혼자 놀러 가겠다고 통보하고 평신도의 옷을 빌려 입었다. 어제 카리타스에게 받은 쪽지엔, ‘사잇길, 나무, 두 시.’라고 적혀있었기 때문이다.

“여기도 오랜만이네.”

작년에 마르고 닳도록 갔던 곳이다. 그때 시도폰은 아래에서 올라왔고 카리타스는 위에서 내려왔지만, 이번엔 두 사람의 방향은 같았다.

“그런데, 신전 안에서 만나도 괜찮지 않아? 나도 여길 좋아하긴 하지만….”

시도폰은 신전 쪽을 바라보다 카리타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만나야 할 사람이 있으니까. 여기가 최적의 접선 장소라고 생각했어.”

장난스레 웃는 카리타스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이윽고 제 뒤에서 느껴진 인기척에 폰은 잽싸게 뒤돌았고 그리운 얼굴들이 풀숲 너머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걸 발견했다. 북부 수행을 같이 다녀왔던 두 사람은 시도폰이 불덩어리가 되어 벽을 기어 다니는 것까지 봤던 터라, 자연스럽게 오랜만에 본다며 인사했다.

“두코, 프라이에! 잘 지냈어? 그때 도와줘서 고마웠어.”

함박웃음이 피어난 시도폰은 그 뒤에서 서서 어정쩡하게 제게 손을 흔드는 얀과 센, 시선을 바닥에 고정하고 죄 없는 제 치맛자락을 붙들고 있는 코지에게 향했다. 시도폰이 힘차게 다가가서 얀의 오른손, 센의 왼손에 제 손을 맞부딪치고 코지의 앞에 섰다. 제 앞에 발 두 개가 놓인 것을 분명히 봤을 텐데 코지는 얼굴을 들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내가 어떻게 된 건지 설명 못 해서 미안해. 바깥에 알리면 안 된다고 해서 편지에 그런 내용을 담을 수 없었어.”

‘그렇다고 해도 어떻게든 알렸어야지!’ 같은 호통을 기대한 시도폰이었지만, 코지는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사태가 왜 이렇게 된 건지 짐작도 가지 않는 데다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으니, 코지를 달래려고 올라갔던 시도폰의 입꼬리도 점차 내려갔다. 보다 못한 센이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어제 임명식 행사 도중에 얘가 나가길래 데리러 갔는데 얼굴이 빨개져서 엉엉 울기만 하고 아무 말이 없었어. 너랑…, 반말 써도 괜찮아? 아, 괜찮다고? 고마워. 그래서 너랑 직접 만나게 하면 뭐라도 얘기하지 않을까 싶어서 데려온 건데.”

말하면서 자신감이 떨어진 센이 말끝을 흐렸고 코지는 왜 그걸 다 말하느냐고 화내는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센의 말에 집중하던 카리타스가 ‘전혀 원인을 모르겠는데?’라고 생각할 때 폰은 ‘알았다!’라고 외치며 코지를 제 오른쪽 어깨에 들쳐메고 언덕을 뛰어 내려갔다.

“잠시만 다녀올게!”

유쾌하게 흔들리던 갈색 머리가 순식간에 거주관 빨래 건조대 사이로 숨어 들어갔다. 주인공이 사라진 자리엔 밟혀서 짓이겨진 잔디 조각만이 남았다. 당황한 코지는 누군가에게 들킬까 봐 한마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창백해진 얼굴로 땅을 디뎠다.

“여기라면 주변에 아무도 없으니까 괜찮아. 아까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남들 있으니까 못한 거지?”

그렇게 말하는 시도폰의 얼굴은 확신에 차 있었다.

“…눈치가 늘었네. 원래 이 정도는 알았다고? 그래, 인정해줄게.”

고개를 든 코지는 유해진 표정으로 시도폰을 마주 보았고, 시도폰은 얼른 왜 그랬는지 이야기해달라고 발을 동동거렸다.

“잠시만, 이게 좀 부끄러운 감정이 아니라서, 어떤 걸 어떤 순서로 이야기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

“그으래? 얼마든지 기다려줄게.”

시도폰은 정면에 버티고 서서 팔짱을 꼈다. 겨우 말을 정리한 코지가 천천히 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일단 내가 왜 임명식 도중에 나간 건지 말해줄게. 네가 이런 중요한 사실을 편지에 전혀 안 써뒀다는 게 서운해서 그랬어. 나 쫓아온 둘이 얘기해줘서 이해는 했지만.”

“미안, 올라가기 전에 미리 암호라도 만들어 둘 걸 그랬나? 고양이 그림을 그려둔다거나 하는 거로.”

“암호로 어떻게 ‘내가 집행자가 됐어. 그래서 북부에서 떠날 수 없을 것 같아.’라고 전달할 수 있겠어? 아무도 이런 상황은 예상 못 했을 텐데. 아, 미안 이거 함부로 말하면 안 되는 거라고 했지. 앞으로 조심할게.”

“내가 허락했으니까 괜찮아.”

시도폰의 농담에 코지는 피식 웃고는 말을 이었다.

“그다음으로는 네가 부럽다고 생각했어. 5구역에서 같이 고생하다가 너만 여길 떠나버렸다고. 친구가 잘 됐으니까 축하해주는 게 먼저여야 하는데 질투나 하고 있다는 게…”

잔뜩 달아오른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 쥔 코지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윽고 개미만 한 목소리로 ‘부끄러워서 교회로 돌아올 생각을 못 했어. 미안해, 당황했지?’라고 중얼거렸다.

“당황하긴 했어. 설마 아무도 네게 알려주지 않으리라곤 예상이 안 됐거든. 그리고 난 네 마음도 이해가 되는걸, 나도 사제나 다른 아이들을 부러워했으니까. 그래도… 여전히 날 친구로 생각해줘서 고마워.”

“근데, 친구인지 아닌지에 대한 걱정은 내가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코지가 존댓말로 바꿔야 하냐며 진지하게 고민하자 시도폰은 자리에서 펄쩍 뛰어오르며 반대했다.

“아냐! 난 여전히 거주관이 익숙한 남부 출신 평민이라고. 그리고 네 친구지. 들어봐, 내가 집행자로 인정받고 나서 무슨 일이 있었냐면….”

이어서 말을 하려던 폰은 다른 애들한테도 말해줘야겠다며 손뼉을 쳤다.

“아까처럼 들지는 마,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어.”

습관적으로 폰의 옆구리에 짧게 주먹을 날리는 코지와 잽싸게 피하는 폰이었다. 기다리던 아이들은 언덕으로 돌아온 두 사람의 표정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프라이에는 걱정했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다려준 건 고마운데 걱정은 안 한 거 아냐? 이 주사위랑 판은 또 뭐야?”

두 사람이 사라진 뒤 남은 사람들은 그들이 언제 돌아올지 내기를 하다가, 내기라는 단어를 듣고 센이 펼친 보드게임 판에 정신이 팔린 것이다.

“근데 누가, 몇 분에 걸었는지 기억하는 사람? 일단 난 아닌데”

두코가 묻자 다들 말이 없었다.

“카리라면 기억할 줄 알았는데, 아 아냐 열심히 게임 했구나.”

가만 보니 화폐 역할을 하는 돌멩이가 카리타스에게 쏠려있었다. 쑥스러워하던 카리타스는 ‘두 사람이 빨리 이야기를 끝내고 돌아오리라 생각했어. 그래서 기억 안 하는 거야.’라고 변명했다.

“내 얘긴 끝났어. 이젠 시도폰이 이야기해 줄 거래.”

코지는 평소처럼 시도폰의 등을 한 번 쳤다. 소리만 크고 당연히 전혀 아프진 않았기에 폰은 어깨를 으쓱이고 혼자 격리되어 있을 때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근데 이거 우리가 들어도 되는 거야?”

잘 듣고 있던 얀이 손을 들었다.

“그러게, 편지도 못 쓰게 한 거면 이것도 말하면 안 되는 거 아니야?”

프라이에가 시도폰에게 물었고, 폰은 머리카락을 만지며 시선을 피했다. 아이가 내놓은 대답엔 확신이 없었다.

“이미 내가 집행자가 된 게 다 알려지기도 했고, 비밀이라고 했던 콘피테오르 문장은 제대로 기억나지도 않아서 말을 못 하겠더라. 괜찮지 않을까?”

믿음직스럽지 못한 모습에, 잠자코 있던 카리타스가 눈가를 꾹꾹 누르다 입을 열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리고 우리가 지금 들은 얘기를 다른 사람한테 해봤자 딱히 믿을 것 같지도 않아.”

“시도폰이라면 건물 외벽을 기어오를 수 있겠다고 생각하지만, 집행자님이 그랬다는 말을 들으면 못 믿었을 것 같아.”

어이가 없었는지 코지는 말하면서도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많은 이야기를 짧은 시간에 다하려고 부지런히 입을 놀렸던 폰이, 목을 축이다가 코지의 반응에 사레가 들려 잔기침을 해댔다.

“대단하다고 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그때 안 그랬으면 내 편지는 아예 받아보지도 못했을걸!”

“그래그래.”

아이들은 시도폰이 없는 동안의 거주관은 전혀 변한 게 없다며 심심해했다. 발화자는 어느새 시도폰에서 두코로 바뀌어 있었다.

“네가 안 오는 이유를 애들이 물어봤거든, 특히…. 근데 기밀이다 보니까 섣불리 다른 핑계를 만들어내기가 어렵더라고. 괜히 이상한 얘기를 지어냈다가 다른 애들이랑 말이 안 맞거나, 나중에 네 평판에 악영향이라도 있을까 봐. 그래서 ‘이유는 말할 수 없지만, 시도폰은 북부에 남아있고, 몸이 아프다거나 심각한 일이 발생한 건 아니다,’라는 말만 앵무새처럼 하고 다녔어.”

‘특히’라는 대목에서 두코는 코지를 쳐다보았다. 얌전한 학구파라고 생각했던 5구역 꼬맹이가 1구역까지 와서 자신의 옷을 붙들고 늘어질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며, 두코는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미안해. 내가 너무 그때 무례했어….”

“아, 아니야 괜찮아. 그때도 사과는 받았으니까.”

개미만 한 목소리로 코지가 사과하자 되려 두코가 당황해 손을 내저었다. 한창 떠들던 중, 한 아이가 거주관에서 올라와 아이들에게 다가왔다.

“스키피! 오랜만에 보네, 왜 안 오나 했어. 아, 근데 어색하니까 존댓말 같은 거 쓰지 말아 줄래.”

폰이 스키피와 손을 맞잡고 붕붕 소리가 나게 흔들었다. 반갑게 인사를 건넨 스키피는 아쉬워하는 감정이 뚝뚝 느껴지는 눈으로 카리타스를 한번 보고는 거주관 아이들에게 돌아갈 시간임을 알렸다.

“이거 말하려고 올라온 건데 얼굴 보니까 계속 이야기 하고 싶어지네, 나중에 다 같이 편지나 쓰자.”

스키피가 자리를 마무리하는 말을 꺼내자 아이들은 군소리를 내면서도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가! 북부에 올라가기 전에 다시 만나자.”

폰은 아이들에게 손을 흔들며 배웅했다. 아이들도 두 사람이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손을 흔들며 내려갔다. 둘만 남은 언덕에서 해가 져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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