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fido

2부 6화

카리타스와 아페, 투루스 거리의 예언

카리타스는 그림을 완성한 다음 날 아침, 잔뜩 피곤한 눈을 비비며 일어나 캔버스 앞에 섰다. 처음엔 제가 잠이 덜 깨서 착각했나 했지만, 캔버스의 그림은 어제 자신이 그린 것이 아니었다. 빨간 장미와 녹색 정원이 맑은 하늘과 어우러졌던 풍경은 거친 회색 붓칠에 가려져 있었다. 잿빛 하늘 아래엔 물에 잠긴 집들이 그려져 있었고 수면에 둥둥 떠다니는 수상한 덩어리들은 이미 생명을 잃은 것으로 보였다. 캔버스 정중앙에 그려진 그림을 따라 시선을 내리던 카리타스는, 제 필기체로 쓰인 붉은 글씨를 밑단에서 발견하고 페이퍼 나이프를 집어 들었다.

[이렇게 하면 네가 내 뜻을 왜곡해서 전달할 수도 없지 않겠느냐?]

기억났다. 자신이 왜 그림을 포기했는지. 카리타스는 페이퍼 나이프로 캔버스를 그었다. 계속, 계속. 캔버스가 너덜너덜해져 더는 지지대에 붙어있을 수 없을 만큼 가늘게 찢었다. 천이 되기 전, 실이었던 상태로 돌아간 듯 캔버스는 바닥에 소복이 쌓인 하얀 더미가 되었다. 땡그랑-하는 소리가 들렸다. 페이퍼 나이프가 힘없이 추락해 바닥을 굴렀고 카리타스는 그것을 바라보지 않고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캔버스가 찢어지는 것을 지켜보고 있던 시종을 하얗게 질린 얼굴로 카리타스를 바라보았다.

“화구를 전부 치워. 다신 쓰지 않을 테니까 처분은 마음대로 해.”

평소처럼 대답도 제대로 하지 못한 시종은 허둥지둥 책상과 바닥을 정리했다. 카리타스는 제 얼굴을 문지르며 바깥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장미는 싱그럽게 피어있고 오늘도 날씨는 맑았다. 옛날에도 이런 일이 있었는데 너무 충격적이라 잊었던 걸까? 카리타스가 한숨을 쉬며 그 날을 회상하려 했지만, 도저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시도폰을 만나기 전에 있었던 일들은 거의 기억나지 않았고 당시 느꼈던 감정들만 드문드문 솟아오를 뿐이었다.

‘그래도 신을 원망할 수 없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네.’

자신의 그림을 망쳐놓은 건 분명 화가 나는 일이었지만 홍수가 일어날 것을 알려준 것은 호재였다. 신이 싫은 것이지 사람이 싫은 것은 아니었으니, 이 정보를 활용해서 사람들을 미리 대피시켜두거나 방제 작업을 해두면 될 일이었다.

‘교황에게 뭐라고 말해야 하는지는 온전히 나한테 달려 있지만.’

그리고 카리타스가 말한 정보를 교황이 어떻게 활용할지는 전적으로 그에게 달려있다. 경고대로 방제 작업을 진행하여 사람들의 생명을 구할지, 정적을 제거하기 위한 함정으로 사용할지는 카리타스도 예측할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그림 속 장소가 어디인지 알겠다는 거였다.

‘투르스 거리였지. 아페가 주기적으로 봉사활동을 가니까 거길 직접 함정으로 사용하진 않을 것 같지만…, 아페와 함께 다니는 귀부인 중 교황과 그리 가깝지 않은 이들을 따로 알아봐야겠어.’

투르스 거리에 봉사활동을 가는 귀부인들의 목록을 구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아페와 주기적으로 가고 있으니 자주 오는 이들은 목록을 보지 않아도 알고 있었고, 참가자 명단은 매주 작성하고 있으니 그걸 보면 나머지 인원들도 파악할 수 있었다.

‘특히 미들 부인은 멀리 사시는 데도 의외로 적극적으로 활동하신단 말이지.’

정확하게 말하면 대공 부인이라고 해야겠지만 그는 자신이 그렇게 불리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들었다. 미들 영지에 자부심이 엄청나기도 했고 대공과 그다지 사이가 좋은 것도 아니라는 소문도 있었으니 사람들은 그를 꼬박꼬박 미들 부인으로 불렀다. 그래도 정치적 입장이 있으니 이 사람도 왕가 쪽 사람으로 취급해두었다.

“이 정도인가?”

신의 예언은 한 달 뒤 정도의 일을 알 수 있게 해주었으므로 그때까지 봉사활동에 나올 것 같은 사람 중 왕당파만 따로 기억해두었다.

똑똑-.

갑자기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카리타스는 명단을 서랍에 넣었다.

“아페입니다. 잠시 시간 괜찮으세요?”

“네, 무슨 일이십니까?”

소리 없이 문이 열리고 아페가 조심스레 카리타스의 방에 발을 디뎠다. 여전히 겁먹은 모습에 카리타스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시종에게 차를 내오라 했다.

“이른 시간에 죄송해요. 아, 이런 잘못 밟았어요. 페이퍼 나이프가 바닥에 떨어져 있네요, 걸어 다니실 때 조심하세요.”

아까 줍지 않고 그대로 놔둔 페이퍼 나이프가 아페의 발에 밟혔다. 예의상으로 괜찮냐고 물어본 카리타스는 그것을 주워서 책상에 올렸고, 불안해 보이는 아페에게 차부터 마시고 이야기하자고 말했다.

“음, 네. 사실 뒤숭숭한 꿈을 꿔서 말씀드리려고요. 유치하긴 하지만 이렇게까지 찜찜한 꿈은 처음이라.”

“평소엔 나오던 꿈과는 크게 달랐나 보네요. 무슨 꿈을 꾸셨습니까?”

“그러니까…. 사람과 가축이 물에 휩쓸려서 떠내려가는 꿈이었습니다. 개중엔 이미 죽은 채로 떠밀려 오는지 움직임이 전혀 없는 것들도 있었고요.”

카리타스가 든 찻잔의 표면에 파문이 일었지만, 아페가 눈치챌 정도는 아니었다.

“뒤숭숭할 만한 꿈이었네요. 곧 여름이 올 테니 홍수를 걱정하시는 마음이 꿈에 반영된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 걸까요….”

“단순히 그런 풍경을 보기만 하신 겁니까? 아니면 뭔가 다른 소리라든가, 물성 같은 게 느껴진다거나 하시는 일은 있으셨습니까?”

아페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너무 조용해서 오히려 소름이 끼칠 정도였어요. 저렇게 엄청난 일이 일어났는데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으니 더 불안하더라고요.”

‘아페가 예언 중 일부만 받을 수 있는 건지, 아직 까지는 일부만 해석할 수 있는 건지 모르겠네. 일단 더 지켜보고…. 아페를 데리고 가서 말하면 교황이 들어줄 확률이 높을까?’

머릿속으로 가능성을 가늠해보던 카리타스였다.

“마침 투르스 거리도 낮은 지대에 있다고 들었습니다. 홍수가 난다고 하면 그런 곳이 많이 위험하겠지요. 아페 저하께서, 아 아니 아페 님께서 봉사활동을 하실 때도 위험해질 수 있으니 그곳에 방제 대책을 세우자고 교황 성하께 요청하시는 건 어떨까요?”

“좋은 생각인 것 같아요.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투르스 거리 외에도 홍수로 자주 위험해지는 곳이 있을 것 같은데 혹시 아시는 곳이 있으실까요?”

“음…. 제가 지리적으로 세세하게 아는 곳은 극히 일부라 지금 당장은 그곳 외에 생각나는 곳이 없네요. 알아보라고 해보겠습니다.”

카리타스는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딱히 그런 곳을 찾을 생각은 없었다. 그림 속 그곳은 투르스 거리인 게 너무 명확했으니까. 그나저나 카리타스는 아페가 자신을 이렇게 찾아온 것이 신기했다. 분명히 그 광경을 보고 겁을 먹었을 텐데, 의지할 사람이라곤 그나마 또래인 자신뿐이라고 생각한 건지, 교황에게 이야기하기엔 부끄러운 일이라 생각한 건지. 어쨌든 대화가 시작되었으면 오해를 풀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나저나 얼마 전에 제가 따로 행동하는 걸 보셨지요?”

그 말에 아페는 순식간에 하얗게 질린 얼굴로 바들바들 떨어댔다. 찻물은 이미 미지근하게 식어 있어, 튄다고 해도 화상을 입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책상과 아페의 손, 소매에 난잡하게 찻물이 튀는 모양은 당연히 보기 좋지 않았다. 당황한 카리타스가 닦을 수건을 가져오기 위해 시종을 부르려고 할 때였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어요.”

“네?”

“당신께서 그렇게, 그렇게 무서운 눈빛으로 무엇을 하려고 하셨는지 저는 제대로 보지도 않았고 경솔하게 누군가에게 말하지도 않았어요.”

그렇게 말하는 아페는 카리타스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아니, 추궁하려는 게 아닙니다. 진정하세요.”

카리타스의 말에 아페가 심호흡을 하더니 아직 떨리는 손으로 찻잔을 내려놓았다.

“시종을 불러도 되겠습니까?”

“….”

아페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잠깐 지켜보던 카리타스는 직접 방 밖으로 나가 수건을 받아왔다. 수건 두 개를 들고 와선 하나는 아페의 손에 얹어주고 나머지 하나로는 직접 책상을 닦는 카리타스였다. 아페가 손을 닦는 동안 카리타스는 수건을 개어 책상 위에 올려둔 채 자리에서 일어났고, 어디 가느냐고 묻고 싶었던 아페는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짓씹었다. 카리타스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제 책상 쪽으로 가서 아페에게 등을 돌린 채 섰다.

“그 일은 제가 경솔한 게 맞았습니다. 감정에 휩쓸렸다고 한들 제 지위가 있으니 그렇게 과격한 행동을 하면 안 되었죠. 아페 님께선 왜 거주관이 아니라 신전에 오게 되셨는지 이유를 알고 있으신가요?”

엉뚱한 말이 이어지자, 망설이던 아페는 알고 있다고 답했다.

“거주관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있어서 국왕께서 신전으로 제 거처를 정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당신께 도움을 요청한 이가 그 일의 가해자였습니다. 물론 그 아이는 거주관에서 쫓겨나, 어린 나이에 벌써 거기서 일하는 것으로 합당한 처벌을 받기는 했습니다만, 사람 감정이라는 게 그런 건조한 처벌로는 달래지지 않는 것이더라고요.”

도무지 그 일과 카리타스의 분노를 연결하지 못한 아페는 오늘따라 말이 유독 많은 카리타스의 뒷모습을 바라만 볼 뿐이었다.

“그 일의 피해자가 저와 친한 거주관 아이였습니다. 그 아이도 참 착하고 다정한 아이였는데 그런 일을 당했다는 게 너무 화가 났어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피해자의 이름을 물어도 될까요?”

“죄송합니다. 그 애는 자기 이름이 밝혀지지 않길 원해서요.”

아페가 알고 있는 거주관 출신의 사람은 폰밖에 없을 것이다. 살짝 뒤를 돌아본 카리타스에겐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소매를 꽉 붙들고 있는 아페가 보였다.

“폰은 아니었습니다. 당신께서 모르는 아이예요.”

순간, 아페는 손에서 힘을 풀고 카리타스를 올려다봤다. 카리타스는 아페의 손에 뒀던 시선을, 그의 달라진 표정으로 옮겼다가 다시 뒤돌아서 창문을 응시했다.

‘순간 시도폰 님이 다친 게 아니라고 해서 안심했어. 누가 다쳤든 아픔은 똑같을 텐데.’

“제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는 이제 이해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그 애도 제가 폰만큼 소중하게 생각하는 아이입니다.”

카리타스는 기왕 말할 거 자작나무에 관해서도 이야기를 할까 고민했지만, 그것까지 말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아페는 그런 줄도 모르고 오해했다며 사과했고 그 일은 그렇게 일단락되었다.

 

다음 날 저녁, 기도를 마친 카리타스는 조금 있다가 자신의 방으로 오라는 교황의 지시에 따랐다. 가는 길엔 비가 내렸고 카리타스의 발걸음 소리는 세차게 땅을 때리는 빗소리에 묻혔다. 그래서인지 교황의 방 앞에서 문만 쳐다보고 서 있던 아페는, 카리타스가 제법 가까이 다가가기 직전까지 그를 눈치채지 못했다. 카리타스는 자신과 함께 들어가려고 기다렸냐고 물었고, 그 말에 깜짝 놀란 아페는 언어를 잊은 사람처럼 잠시 얼어붙었다.

“아, 아 넵. 교황 성하께서 함께 들어오는 게 편하시지 않겠냐고 하셔서요….”

“어제 제가 했던 이야기를 성하께 바로 전달하셨나요?”

아페는 고개를 끄덕였고 카리타스는 알겠다 답하며 문 옆의 시종에게 문을 열라고 지시했다.

“성하, 성녀님과 아페 님께서 오셨습니다.”

“들어오십시오.”

나직하지만 확실하게 들리는 목소리에 시종이 문을 열었고, 커튼 사이로 비를 감상하듯 등을 돌리고 있던 교황은 두 사람 쪽으로 몸을 틀었다. 그 모습이 카리타스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던 아페는 잠시 카리타스를 바라보았으나, 그는 아페 쪽으로 전혀 시선을 주지 않고 교황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올릴 뿐이었다.

“앉으시지요, 아페 저하와 성녀께서 잘 지내시는 것 같아, 이 늙은이는 마음이 놓입니다.”

“감사합니다. 사실 저는 성하와 아페 님 사이에 있었던 대화를 전해 듣지 못해서, 혹여 제 마음대로 추론하고 행동하게 될 것이 두렵네요.”

“그러셨군요. 그럼 아페 저하께서 다시 말씀해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저의 기억이 잘못되었다면 당신께서 지적하시기엔 아직 어려우실 테니까요.”

아페는 자신에게 갑자기 대화의 주도권이 넘어오자 잔뜩 긴장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는 어제 성녀님과 잡담을 하던 중에 곧 있으면 여름이니 장마가 시작되지 않겠냐는 이야기를 하게 되었고, 성녀님께선 이번 홍수로는 사람들이 많이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람들을 지키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지 여쭤보았고 성녀님께서는 방제 대책을 세우는 걸 제안해보자고 말씀해주셨어요.”

어제 카리타스는 꿈 이야기는 하지 말고 우연히 떠올랐다고 얘기하라고 지시했다. 의문을 가진 아페를, 꿈 이야기는 제안의 타당성을 오히려 떨어뜨릴 수 있다고 설득했던 카리타스는, 아페의 말에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타닥타닥 빗소리만 들려오는 침묵이 짧게 이어졌다.

“제게 말씀해주신 것과 같군요. 성녀께서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매 여름, 교회에서 방제와 구호 작업을 진행하긴 하지만 아무래도 구호 쪽으로 치우쳐져 있었으니…. 이제 서야 방제에 신경을 쓴다고 하면 문제가 될 여지가 있을 수도 있지 않나 싶습니다. 성하께선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아페에겐 말하지 않았던 일이라 카리타스에겐 원망의 눈빛이 꽂혔다. 하지만 그는 무시하고 교황의 답변을 기다렸다.

“그렇지요. 방제 작업은 주로 국왕 저하의 기간 사업에 포함되어 있고, 저희가 맡은 부분은 교회 주변과 북부 기사단 주변의 마을 정도니. 저희가 갑자기 방제 작업을 분담하겠다고 하면 이유를 물어보실 것 같긴 합니다.”

아페는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투르스 거리에서 자신이 알지 못했던 삶을 사는 사람들을 목격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그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저보다 다정하고 사려 깊은 아버지라면 그들을 돕는 일을 떨떠름하게 여길 리가 없는데, 지금 이들은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인가?

“저기, 끼어들어서 죄송합니다. 그런데… 두 분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 나라의 백성을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하는 일에 왜 그런 걸 걱정해야 하는 겁니까?”

바로 무어라 말하려던 카리타스는 교황에게 제지당했다. 아페의 말에 감화된 사람처럼 교황은 고개를 끄덕이고 입을 열었지만, 카리타스는 교황이 전혀 감정적 동요를 일으키지 않았다는 걸 알아챘다.

“생명을 구하는 일이니 아페 저하의 생각이 온당합니다. 저 또한 사람을 구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고요. 하지만 저와 당신과 국왕 전하께서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세간에선 국왕의 업적을 교회가 가로채려고 한다는 헛소문이 퍼질 수도 있습니다.”

질문으로 되돌려 받을지 몰랐던 아페는 대답하지 못했다. 비바람이 한차례 지나가고, 작은 목소리로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라는 말이 흘러나왔다.

“아직은 모르시는 게 당연하지요. 저하께서 왕궁을 나오신 지는 얼마 안 되었으니까요. 하지만 저하, 앞에서 말씀드렸다시피 그런 의심이 얼토당토않다고 해도 조심해야 하는 것이 신의 뜻을 따른다고 자부하는 이들의 사명입니다.”

갑자기 교황은 가벼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저하의 존재가 저희에겐 큰 행운이지요.”

아페는 숙였던 고개를 들어올리고 어리둥절한 눈으로 교황을 마주보았다.

“저하는 존재만으로 교회와 궁의 화합을 상징하십니다. 그건 국왕 전하께 듣고 오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렇지요? 그래서 저는 저하께서 방제 작업을 주관해보시면 어떨까 합니다.”

살짝 올라갔던 아페의 입꼬리는 미세하게 떨렸다.

“어리다고 면피하고 싶진 않습니다. 다만 저는 실무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해서….”

“걱정하지 마십시오. 실무를 다루는 조직은 제가 구성해드릴 테니까, 그 부분은 부담스러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성녀께선 함께 방제 작업에 참여하실 의사가 있으신지요?”

카리타스는 대화 도중 시종이 조용히 두고 간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대답했다.

“허락해 주신다면 돕고 싶습니다. 본래 제 담당이던 구호 작업은 문제없이 준비해두도록 하겠습니다.”

교황은 만족스러운 듯 웃었고 이미 다 마신 찻잔을 흘긋 바라보다, 아페의 잔으로 시선을 돌렸다. 다른 두 사람의 것과 다르게, 아페의 찻잔엔 찻물이 처음과 같은 높이로 미동도 없이 자리하고 있었다.

“저런, 대화에 집중하시느라 전혀 차를 드시지 못하셨군요. 전문 농원이 아닌 신전 텃밭에서 키웠지만, 장인들의 보살핌을 듬뿍 받은 차랍니다. 달아서 드시기에도 편할 겁니다.”

그의 말에 아페는 안도의 한숨을 작게 내쉬고 찻잔을 들었다.

‘이대로 이야기가 끝나면 계획대로야. 하지만 저 인간이 또 무슨 말을 할지….’

교황이 이렇게 아페를 압박했다 풀어주는 방식으로 길들이리라고 예상했기에 카리타스는 억지로 이 자리에 끼어들 구실을 만들었었다. 방제 작업을 이쪽에서 하자고 말하는 것도, 아페의 일에 함께하는 것도 성공했지만 여전히 대화는 끝나지 않았다. 아페가 차를 다 마시면 바로 일어날 작정으로, 카리타스는 다리에 힘을 주었다.

“성녀께 여쭤볼 것이 있는데….”

교황의 말에 카리타스는 잔뜩 긴장한 채 귀를 기울였지만, 다행히 심각한 내용은 아니었다. 지난 정규 회의에서 있었던 안건에 대한, 추가적인 토의가 필요할 것 같다는 카리타스의 제안을 교황이 받아들이기로 했다는 의사전달일 뿐이었다. 아페는 차를 다 마시고 조심스레 찻잔을 내려놓았다. 카리타스는 교황과 묵례를 주고받았고 아페는 그를 따라 인사한 뒤 교황의 방을 나왔다.

“후….”

문이 닫히고 아페는 크게 숨을 내뱉었다.

“제가 말씀드린 대로 잘 하셨더군요.”

카리타스는 땀 맺힌 손을 아닌 척, 옷에 닦으며 아페를 내려다보았다. 일이 끝났으니 방제를 담당할 조직이 정해지면 그때 이야기하자며 카리타스는 아페에게서 등을 돌렸다.

“잠깐 기다려보세요.”

아페가 작게 소리치는 바람에 카리타스의 발걸음이 멈췄다.

“묻고 싶은 게 있어요. 국왕 전하와 교회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던 건지, 그리고 그걸 왜 제게 말해주시지 않았는지.”

그런 것조차 자신이 알려주지 않으면 모르면서, 당당한 왕녀의 태도에 카리타스는 당신이 물으면 나는 전부 대답해주어야 하느냐고 비꼬려다 참았다. 이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방제와 구호 대책을 어떻게 세워야 할지 고민하려고 했는데, 쓸데없이 시간이 낭비되는 건 싫었다.

“알고 계시리라 생각했습니다. 저하께서 이곳에 오신 것도 왕실과 교회의 화합이 목적이라고 알고 있었으니까요.”

말하는 와중에도 카리타스는 주변에 사람이 돌아다니지 않는지 살폈다.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국왕 전하께선 이 나라를 다스리시지만, 교회는 국경을 넘어, 이 세계 전체를 소유하는 분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모시는 이들의 모임이니까요. 인망을 놓고 본다면 교회가 상대적으로 유리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왕실에서는 대대로 교회를 견제해 오셨지요. 이런 것들은 왕실에서 가르쳐주시지 않았나 봅니다.”

말하고 보니 당연한 사실인가 싶었다. 아페는 충격을 받았는지 파리한 얼굴로 말을 받았다. 안색을 보아하니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아, 쏘아붙이고도 되려 카리타스 쪽이 당황했다.

“그, 그렇다고 해도 현 국왕 전하와 교황 성하 사이에 무슨 일은 없었지요?”

“…없었다면 당신께서 여기 올 일도 없었을 겁니다. 쉬십시오.”

할 말이 없어진 카리타스는 아페의 표정을 보지도 않고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올리비아에 대한 일은 설명했지만, 아페와의 관계는 딱히 진전되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너무 당당하게 구는 아페의 태도는 거슬리긴 했지만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었는데 왜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했을까?

‘생각해야 할 게 많아서 그랬나….’

아페도 여기서 오래 생활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일이니 이번 건 굳이 오해를 풀 필요 없을 것이다. 지금 급한 건 다른 일이라며 카리타스는 제 방에 도착해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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