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fido

2부 12화

헤일로 사망 후 뒷수습(북부편)

“집행자님! 무사하셨군요, 다행입니다. 단장은 어디, 아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겁니까?”

제 쪽으로 허둥지둥 뛰어온 슈바헨에게 시도폰은 할 말이 없었다. 시도폰의 안내로 헤일로의 시신을 확인한 슈바헨이 참담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 성호를 그었다. 그리고 시도폰에게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무언가 중얼거린 뒤, 슈바헨은 사제들에게 시신을 깨끗이 닦고 수의를 입히라고 명령했다. 뭐라고 변명해야 할지 몰라 우물거리는 시도폰에게 베론이 다가왔다. 엉망이 된 얼굴로 추태를 부려 죄송하다고 사과한 베론은 뒷수습은 자신이 할 테니 쉬라며 시도폰을 떠밀었다.

“아니, 잠시만요. 저는 탐사대를 꾸려서 거길 다시 조사해 볼 거예요.”

시도폰의 말에 주변이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의식불명의 부상자들을 옮기던 기사들도, 제 발로 걸어서 건물로 들어가려던 부상자들도, 마차 안에서 조용히 눈물을 흘리며 베론의 시신을 깨끗이 닦던 사제들도 행동을 멈췄다.

“…말도 안 되는 억지 부리지 마십시오. 저는 당신까지 똑같은 방법으로 잃을 생각이 없습니다.”

이가 부득부득 갈리는 소리를 내며 살벌하게 일갈한 베론이 두코와 프라이에에게 빨리 집행자를 모시고 돌아가라고 명령했다.

“그렇다고 밤에 혼자 몰래 다녀올 생각은 하지 마. 이번에 너 없어지면 정말 난리 날 거야. 이번엔 우리도 못 도와줘.”

두코가 시도폰의 팔을 붙잡고 걸어가며 속삭였다. 프라이에도 고개를 끄덕이며 시도폰이 방에 도착할 때까지 긴장을 풀지 않았다.

“…그래 알았어. 몰래 나가거나 그러지 않을게.”

둘을 안심시킨 시도폰은 문을 닫고 루카의 도움으로 갑옷을 벗었다. 한참 동안 추운 곳에 있다가, 따뜻한 실내로 들어오자, 시도폰은 그제 서야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돌아볼 수 있었다. 눈치를 보던 루카가 폰에게 다가갔다.

“옷은 조금 있다가 갈아입으시려고요?”

“응, 그런데 루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었어?”

“아뇨…. 듣지 못했어요. 다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서요.”

루카가 설명을 요구하는 듯한 눈으로 시도폰을 바라보았지만, 그 시선을 외면한 폰이 또 그를 방에서 쫓아냈다.

“하…,”

문고리를 붙잡은 폰이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무릎이 큰 소릴 내며 바닥에 부딪혔고 긴장이 풀린 몸이 떨려왔다. 일이 벌어진 당시엔 그걸 수습해야 한다는 긴장감 때문에 저도 모르게 침착하게 움직였지만, 이렇게 모든 일이 끝나고 혼자 있게 되자 도저히 두 다리로 서 있을 수 없었다.

‘베론보다 먼저 보고를 받고 뛰어나갔으면 헤일로를 구할 수 있었을 텐데. 기다리지 말고 바로 나도 따라갔어야 했어. 이렇게까지 일이 심각할 줄 알았다면….’

3년은 어떻게 보면 짧은 시간이었지만, 헤일로를 존경하고 진심으로 따르게 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 시간 동안 나는 헤일로에게 기사가 되는 방법을 배웠다. 단순히 힘을 가진 강자가 아니라, 뒤에 있는 모든 이들을 지키는 기사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제야 좀 감을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당신을 보좌할 기사는 제가 아니라 당신 또래의 아이들입니다. 두코나 프라이에가 가장 유력하다고 생각해서 미리 말해주긴 했습니다만, 또 다른 누군가가 나타날 수도 있겠죠. 불경한 말씀을 잠깐 드리자면, 집행자께서 빨리빨리 크셔서 제가 안심하고 은퇴할 수 있게 되면 좋겠습니다. 농사짓는 걸 다들 반대하셨으니, 이제 저 녀석들이 당신을 보필하는 걸 지켜보며 여생을 보내는 게 제 소박한 꿈입니다.’

두코를 불러서 무슨 이야기를 했느냐고 물었을 때 헤일로에게 들은 대답이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무의식적으로 무릎을 매만졌고, 나는 그걸 보면서 쓴 것을 들이킨 것 같은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였었다.

문에 머리를 박듯이 대고 눈에 힘을 주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흘러내리는 눈물이 멈추진 않았다. 입술을 꽉 깨물어 소리를 죽였고 터져 나오려고 하는 축축한 숨도 간신히 삼켰다. 애써 이성적으로 다른 일을 생각해보려고 해도, 헤일로와 있었던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면서 감정은 수그러들지 않고 더욱 커지기만 했다. 그리고 주마등의 끝엔 아까 본 싸늘한 시신이 기다리고 있었다. 항상 당당하고 호탕하게 웃던 얼굴은 어디로 가고 딱딱하게 굳은 슬픈 얼굴만이 박제되어 남았나.

그렇게 몇 분이나 지났을까, 시도폰은 고개를 들었다. 아직 단장의 죽음을 받아들인 것도 아니고, 감정이 가라앉은 것도 아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단장을 생각해서라도 정신 차려야지. 기사단은 북부를, 세계를 악마에게서 지켜야지. 내가 계속 이러고 있다고 단장이 다시 돌아와 주진 않을 거 아냐.’

또 단장을 생각하느라 울컥한 시도폰은 간신히 그걸 참고 책상에 앉았다. 그리곤 힘이 풀린 손으로 종이와 펜을 잡고, 글자를 써 내려갔다.

‘기사단은 어떻게 통솔해야 하지? 베론과 슈바헨이 도와주겠지만 단장이 없으면 그 두 사람이 있다고 해도 전과 똑같을 순 없어. 지금쯤이면 다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았겠지? 기사들의 사기도 문제지만 인원도 심각한데…. 이미 3년 전 일 때문에 기사단 입단 연령도 임시로 낮췄잖아, 여기서 더 낮출 순 없어. 그럼 악마들은 어떻게 막아야 하는 거야, 나 혼자서 감당할 수 있을까? 무리해서 돌아다닌다고 해도 그게 가능할지 모르겠어. 정 안되면 남부에 부탁해보자, 아무리 북부랑 껄끄러운 사이라고 해도 이런 건 도와주겠지.’

이마를 짚으며 생각을 정리해나가던 시도폰이 가로로 줄을 긋고 그 아래엔 ‘하얀 로브’라고 썼다. 프라이에가 말했던 그 사람, 악마를 부려서 이 사단을 만든 장본인에 대해서도 알아볼 필요가 있으니까. 문득, 옛날에 악마를 섬기는 마을을 조사하러 갔던 것이 떠오른 시도폰은 한참 멈춰있던 펜을 다시 놀렸다.

‘그 사람은 악마 숭배자…겠지. 네발 동물형의 상위 악마를 소환해서 계약을 맺었다면, 그것들을 부릴 수 있었던 건 이해가 돼. 하지만 그러면 악마를 진심으로 따르는 사람일 텐데 왜 헤일로에게 미안하다고 했을까? 애초에 프라이에가 제대로 보고 들은 게 맞는 걸까?’

그제야 시도폰은 프라이에 이외의 부상자들에게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었다는 걸 떠올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굴에 남은 눈물 자국도 거울로 확인하고 마구 문대어 없앴다. 창문을 열고 찬바람을 잠깐 쐬어 달아오른 얼굴을 가라앉힌 시도폰이 문으로 향했다.

‘왜 거기서 갑자기 악마가 튀어나왔는지 알아보려면 다른 목격자가 필요해. 의식을 차린 사람들이 있는지 살펴봐야겠어.’

덜커덩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렸고 시도폰은 곧바로 부상자들을 호송한 의무실로 향했다. 의무실 팻말이 달린 문을 두드리자, 안에선 의자 끄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 집행자님! 들어오시죠. 대부분 의식이 돌아와서 지금은 기력을 회복시키는 중이었습니다. 다만, 아직 상황을 설명하진 못해서 그쪽은 좀 피해주십사….”

난감해하는 사제의 얼굴 뒤로 의아한 표정의 부상자들이 보였다. 그들은 시도폰을 알아보고 일어서서 경례하려 했지만, 시도폰이 손을 휘저어 말렸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려고 왔네, 한 명씩 면담하고 싶은데 의무실 안에 그럴 만한 공간이 있는가?”

“이쪽입니다. 외과적인 시술을 할 때 사용하는 방인데, 지금은 환기 중이라 온도가 낮아서 환자를 오래 두기엔 적합하지 않습니다.”

“알겠네, 빨리 끝내도록 하지.”

안절부절못하는 사제를 진정시키고, 시도폰은 환자와 함께 방으로 들어갔다. 활짝 열린 창문을 등진 시도폰이 왼손으로 하늘색 불꽃을 작게 피워냈다.

“다친 곳은 괜찮나? 그런 일이 발생했다는 걸 뒤늦게 알아서 구하러 가는 게 늦었네, 사과하지.”

“아, 아닙니다! 경계를 소홀히 한 저희의 불찰입니다.”

환자가 허둥지둥 무릎을 꿇으려고 하자 당황한 시도폰이 그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책임을 물으려고 한 게 아니니까 긴장하진 말고, 생각나는 대로 질문에 대답해줬으면 좋겠어. 당시 어떤 상황이었는지 간략하게 설명해주게.”

침대에 엉거주춤하게 걸터앉은 그가 마음을 다스리는 듯 숨을 길게 내뱉고 증언을 시작했다.

“옙. 저는 다른 기사들과 마찬가지로 단장님의 뒤에서 순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가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렸고, 악마들이 튀어나와서 바로 검을 빼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베어내는데, 전혀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분명 처음 봤을 땐 수가 적어서 금방 처리할 수 있을 거라고 예상했는데, 안일한 판단이었습니다.”

“악마들이 나오기 전, 전조증상 같은 건 전혀 느끼지 못했나?”

“송구합니다. 그런 건 전혀 없었습니다. 비명을 듣기 전에 반응한 사람은 단장님이 유일할 겁니다.”
새로운 진술이었다. 시도폰은 단장이 어떻게 반응했느냐 물었고 잠시 고민하던 기사는 기억을 더듬는 것처럼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비명이 들리기 직전에 고개를 뒤쪽으로, 그러니까 저희 쪽으로 돌리셨는데 표정이 심상치 않으셨습니다. 단순히 놀랐다기보다는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것 같은…, 그런 표정은 저도 여태까지 본 적이 없어서 덩달아 섬찟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

그 뒤로도 다른 기사들을 면담한 시도폰은 프라이에가 헛것을 본 게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문제는 단장이 왜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 없다는 거였는데, 악마가 나타나자마자 전투가 시작되어 그걸 물어보는 게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새로운 문제가 하나 더 생긴 건가…. 아냐, 그 악마 숭배자가 단장만 감지할 수 있을 정도로 기척을 지우고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겠지.’

파고들수록 불길한 인물을 생각하던 시도폰은 다시 현장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의무실을 나서려던 시도폰의 앞에 그림자가 졌다. 폰이 고개를 들자, 부상자 한 명이 결연한 표정으로 그의 앞을 막아선 것이 보였다.

“이게 무슨 뜻이지? 말하고 싶은 게 있다면 아까 말해도 되었을 텐데.”

“저희는 단장님의 상태가 궁금합니다. 다치셨다면 저희와 같은 의무실로 오셔야 하는데 어디 계신 겁니까? 다른 사제님들께 여쭈어봐도 다들 침묵하시니 답답하고 두렵습니다.”
시도폰이 옆의 사제를 흘끔 쳐다보자, 난감해진 그는 안정을 취해야 한다며 부상자를 침대로 데려가려 했다. 하지만 사제의 미약한 힘에 기사는 꿈쩍도 하지 않았고, 마음이 급해진 시도폰은 사실을 말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노선을 틀었다. 이 사실을 그들이 받아들일 수 있게 전달할 자신이 없었으니까.

“나중에 설명해줌세, 나 말고 베론이…. 아니, 아무튼 노련한 사제의 판단을 내가 그르칠 수 없지, 조금만 기다려주게.”

기사를 가볍게 밀어낸 시도폰이 속으로 미안하다고 외치며 문을 열었고, 오들오들 떨고 있는 아페와 마주쳤다. 난방도 안 되는 복도에서 얼마나 오래 기다렸는지, 아페의 코와 손끝이 빨갛게 물들어 있었고, 중간중간 코를 훌쩍이는 소리도 들려왔다.

“아, 나오셨군요. 환자들, 은 괜찮은가요?”

덜덜 떨리는 몸에서 짧게 끊겨 나오는 말에, 시도폰이 다급하게 불을 피워냈다.

“덕분에 환자들은 대부분 의식을 차렸고 아직 누워있는 자도 외상은 다 치료된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 추운 곳에서 제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셨나요? 문이라도 두드리셨어야죠.”

“저도 그러려고 했는데,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말에 도저히 그럴 자신이 안 생기더라고요. 다들 단장을 걱정하고 있는데… 어떻게 그걸 말해요.”

다행히 문은 닫힌 지 오래였다. 뒤를 돌아본 시도폰이 안도의 한숨을 쉬고 아페의 어깨를 감쌌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아페는 딱딱하게 굳었지만, 시도폰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불꽃을 피웠는데 온기를 받아야 할 당사자가 다가오려고 하지 않으니 직접 전달할 수밖에.

시도폰이 옆에 붙어서 ‘이렇게 몸을 떠는데 정말로 괜찮은 것 맞나요?’라는 등 걱정하는 말을 해댔지만, 아페는 시도폰이 너무 가깝다는 걸 의식한 나머지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겨우 정신을 차린 아페가 ‘다, 단장님 말인데요.’라고 겨우 말문을 텄다.

“네, 말씀하세요.”

“단장님 가족분께는 언제 연락을 드릴 생각이신지 궁금해서요. 여동생분과는 꾸준히 편지를 주고받으신다고 하셨던 게 기억이 나서.”

“아…. 그렇네요.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았는데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그쪽에도 편지를 보내야겠군요.”

“렌테 사제님은 오면서 뵈었어요. 곧장 본인 사무실로 들어가시던 걸요.”

“감사합니다. 남부에 소식을 알리면서 지원 요청을 할 생각인데…, 아페 님 혹시 글 좀 써보셨나요?”

당황한 아페는 고개를 저으려다가 카리타스의 지휘하에서 강제로 기른 공문서 쓰기 능력을 떠올렸다. 이런 상황에 뭐라도 도움이 되고 싶기도 했고, 시도폰이 ‘그러면 제 방에 같이 가셔서 저를 좀 도와주셨으면 합니다.’라고 덧붙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성녀님 밑에서 많이 배웠어요,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행이다. 대필 맡겨두고 조사하러 가면 될 거 같아.’

시도폰의 집무실 앞에서 두 사람은 전혀 다른 걸 기대하고 있었다. 편지지와 펜을 책상에 올려둔 시도폰이 아페를 의자에 앉히고 어떤 내용을 쓰면 되는지 설명했다.

“그럼, 저는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누가 오면 저와 함께 있다고 말씀하시고 문 열어주지 마세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어딜 다녀오시길래 그런….”

“잠시 현장에 다녀올 생각입니다. 아페 님께서도 거기에 더는 악한 것이 없다는 걸 알고 계시잖아요? 문제없을 겁니다. 악마를 퇴치하겠다 같은 건 아니고 확인할 게 있어서 잠깐 다녀오는 거예요.”

“물론 제가 그걸 확인하긴 했는데, 집행자께서 사라지시면 다른 사람들도 불안해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몰래 다녀오려고 하는 거예요. 혼자 갈 거니까 빨리 다녀올 수 있을 겁니다.”

아페가 붙잡으려고 일어서자 시도폰이 급히 변명하며 문을 열었다.

“어디 가십니까?”

문 너머엔 초췌한 얼굴의 베론이 서 있었다. 놀라서 심장을 부여잡으려던 걸 참고, 시도폰은 태연하게 화장실을 다녀올 거라고 변명했다.

“창은 왜 들고 계신 겁니까? 무거우실 텐데 두고 가시죠.”

“….”

베론이 한숨을 쉬었다.

“그런 거짓말이 통할 것 같다고 생각하십니까? 아까 충분히 제 말을 이해하신 줄 알았는데…, 왜 자꾸 그곳에 가려고 하시는 겁니까?”

“그야 당연히, 악마들을 소환한 사람의 흔적을 찾는 거죠. 찾아내서 처단해야 하니까.”

‘4년 전에 남부에서 만난 사람이 여기 있는 게 맞는지 확인하고 싶다는 걸 어떻게 말해.’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에 시도폰의 양심이 쿡쿡 찔려왔지만, 베론은 그것까지 눈치채진 못한 것 같았다. ‘탐사대는 내일 꾸리겠습니다. 그러니 오늘은 참아주십시오.’라며 베론이 시도폰을 방안으로 밀어 넣고 문을 닫았다. 아페는 속으로 안도하며 편지를 썼고, 폰은 창을 거치대에 걸어두고 자리에 앉았다.

“원래 제가 해야 하는 일이니까 편지지 한 장은 이쪽으로 주시겠어요. 지금은 누구에게 편지를 쓰고 계신 가요?”

“단장님 가족분은 제가 잘 몰라서 먼저 남부에 있는 교회 쪽으로 쓰고 있었어요. 저는 이것만 쓰면 될까요?”

“네, 부탁드려요. 그쪽은 제가 쓰고, 음… 보내는 김에 카리한테도 써야겠다.”

“성녀님께 요즘도 편지 자주 쓰시나 보네요.”

아페의 목소리가 미묘하게 낮아졌지만, 시도폰이 알아챌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아페 님이 신전으로 오시고 나서, 요새는 일이 좀 적어졌는지 편지 보내는 빈도가 잦아졌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열심히 쓰고 있답니다.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런가요, 도움이 되어서 다행이에요.”
곧바로 침묵이 이어졌고, 조용한 방에선 펜촉이 종이와 마찰하는 소리만 울렸다. 얼마가 지나서 편지를 다 쓴 아페가 마실 거라도 가져오겠다며 일어섰고, 시도폰은 옆방의 루카에게 말하면 바로 가져다줄 거라 답했다.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시도폰이 누구냐고 물었다.

“수습 기사 두코입니다. 보고 드릴 것이 있습니다. 들어가도 됩니까?”

“응, 들어와. 무슨 일이야?”

두코는 가라앉은 표정으로 들어왔다가 아페를 발견하고 억지로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아, 아페 님 여기 계셨군요. 방에 안 계시길래 어디 가셨는지 걱정했습니다.”

“집행자께서 편지 쓰는 걸 돕고 있었어요. 제가 해야 할 건 다 해서 음료라도 가져다드리려고 일어선 거고요.”

아페는 여전히 자신을 어린이 취급하는 두코가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한 달 전 두코의 품에서 엉엉 울었던 것이 떠올라 급히 방을 나섰다.

“오는 길에 의무실을 지나치는데, 우는 소리가 나더라. 다들 알게 됐나 봐.”

“얼마 전까지 베론이 여기 있었어. 곧장 의무실로 갔나 보네.”

시도폰은 펜을 놀리던 손을 멈추고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 결국, 펜을 내려놓은 시도폰이 다른 기사들은 이미 소식을 알고 있느냐고 물었고 두코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장례식은 어떻게 진행될 거 같아? 단장님의 고향 가문이 남부 쪽이라고 들은 것 같은데.”

두코의 물음에 시도폰이 한숨을 쉬었다.

“정확한 건 유족의 답장이 오면 결정되겠지만, 장례식은 아마 남부에서 치러질 거 같아. 단장님이 여동생분과 자주 편지를 나눌 정도로 각별한 사이였으니까 굳이 여기서 장례를 치르진 않겠지. 근데 그래서 걱정이야, 원래대로라면 수행단 훈련을 2월 말까지 해야 하는데… 장례식을 남부에서 한다고 하면 남은 기간은 거기로 이동하는 데 다 사용될 테니까.”

시도폰은 스스로 너무 냉정한 말을 하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기사단 인원에 보충이 필요한 상황에 수행단을 제대로 훈련 시키지도 못하면 인원 수급 문제는 더 심각해질 뿐이었다. 다행히 저의를 파악한 두코도 턱을 괴며 고민에 빠졌다.

“후반부 훈련 중에 실제로 전투와 관련된 것들이 많으니까…. 여기서 장례를 치르는 걸 허락해 주면 좋을 텐데.”

끙끙거리던 두 사람은 아페가 문을 열어달라고 외치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두코가 문을 열자 루카가 컵 세 개가 올려진 쟁반을 들고 아페 옆에 서 있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후다닥 컵을 책상에 올려둔 루카는 나가버렸고 그의 등에다 대고, 두코는 자기 것도 챙겨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다. 세 사람은 음료가 식어서 미지근해질 때까지 대책을 세우다가 각자 일정을 수행하러 해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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