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fido

2부 11화

헤일로 사망

“피데이스님, 잠시….”

수행단 아이들의 훈련 시간이었지만, 헤일로가 임무 수행을 나가는 바람에 피데이스가 대신 아이들의 지도를 맡고 있었다. 한창 훈련이 진행되던 중, 한 사제가 다급히 문을 열고 들어와 피데이스를 불렀고 귓속말로 무언가 전달했다. 점점 심각해지는 피데이스의 표정에, 목검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가득했던 방이 점차 조용해졌다.

“왜… 그런 일이, 알겠습니다. 일단 훈련은 중단하고 아이들은 각자 방으로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아이들을 부탁드립니다.”

피데이스가 잰걸음으로 시도폰에게 다가갔다.

“잠깐 일이 생겼습니다. 함께 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본관 문을 닫고 나서야 피데이스는 시도폰을 돌아보았다.

“단장님께 무슨 일이 생긴 것 같다고 합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저도 전해 듣지 못했습니다만, 헤일로 단장님이 향한 곳에서 이상할 정도로 강한 악이 감지되었다는 보고가 있었다고 합니다.”

“오늘 임무는 간단한 시찰이었을 텐데요…. 아무튼 가보죠, 베론은 어디 있나요?”

“부단장님은 아마 먼저 출발하셨을 겁니다. 저희보다 소식이 일찍 도착했을 텐데 함께 여기까지 안 온 걸 보면 아마도 그럴 테죠. 장비를 갖추고 정문에서 만나기로 할까요?”

시도폰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제들은 같이 가나요?”

“그건 모르겠습니다. 제가 물어보고 올 테니 조금 늦더라도 기다려주시길.”

그 말을 마지막으로 두 사람은 각자의 길로 갈라졌다. 방으로 뛰어든 시도폰에, 청소하던 루카가 깜짝 놀라 뒤돌아보았다.

“이 시간에 어쩐 일이세요? 지금은 훈련장에 계실….”

“미안, 급하게 나가야 해서. 무장하는 것 좀 도와줘. 급해.”

“아, 알겠습니다.”

루카는 시도폰의 무장을 도와주다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고, 시도폰은 망설이다가 모르겠다고 답했다. 냉정한 말이지만, 지금 상황에서 루카에게 이것저것 말하면 시간만 지체될 것 같았다.

“다 됐다. 고마워, 창은 어차피 나만 들 수 있으니까 가져다주지 않아도 돼. 그럼 다녀올게.”

굉장히 빠른 속도로 말을 뱉은 시도폰이 창을 쥔 채 방을 나섰다. 남겨진 루카는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서 멍하니 있다가, 다시 먼지떨이를 들었다.

 

두코와 몇몇 기사들이 정문에서 시도폰을 맞이했다. 그들은 다소 긴장된 표정으로 웅성거렸지만 단지 그뿐이고, 불안한 분위기 같은 건 감돌지 않았다. 두코가 발로 바닥을 툭툭 치며 시도폰에게 말했다.

“피데이스 님이 인솔할 거라고 하셔서 기다리는 중인데, 언제 오시는 거지?”

“그러게, 사람들 모으느라 무장이 늦으셨을 것 같긴 한데. 언니는 무슨 일인지 들었어?”

“정확하게는 못 들었어. 도움이 필요할 것 같은데 같이 가줄 수 있겠냐고만 물어보시던걸.”

‘헤일로 님께 무슨 일이 있다는 건 못 들었나 보네.’

그렇다고 하니 시도폰도 굳이 헤일로를 언급할 필요는 없었다. 와중에 베론이 없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던 두코가 다른 기사에게 그가 어디 있는지 물었고, 그도 모른다고 답하면서 기사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부단장님이 늦으시는 건 좀 이상하네.”

“그러게, 단장님이 밖에 계시니까 부단장님은 여기 계셨을 텐데.”

“혹시 알고 계신 게 있으십니까?”

한 기사가 시도폰에게 물었다. 물론 시도폰도 모른다고 대답했고, 어떻게 얼버무려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에 피데이스가 도착했다. 옆에는 아페도 함께였다.

“아페 님은 왜 데리고 오신 건가요?”

헤일로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고 하니, 결코 유쾌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아페를, 열 살짜리를 데리고 와도 되는 걸까? 시도폰이 눈을 가늘게 뜨고 피데이스에게 묻자 그도 딱히 내키지 않았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지금 남아있는 말이 얼마 없어서 그 녀석들에게 축성을 걸어주십사 모셔온 겁니다. 아무래도 한 마리당 두 명씩 타야 할 것 같아서요. 당연히 동행으로 모신 건 아닙니다.”

“…저는 가면 안 되나요?”

아페의 물음에 그를 제외한 모두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들 허리춤까지 오는 아이를, 그것도 왕녀 출신을 무슨 상황인지도 모르는 곳에 데려갈 리가 없었다.

“하지만 집행자님은 열 살에 전투에 나가셔서 각성까지 하셨는데….”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아페가 중얼거리자 사람들의 시선이 시도폰에게로 쏠렸다. 당연히 원망하거나 하는 눈빛은 아니었고, 어떻게든 해달라는 간절한 표정이었다. 두코는 아페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한숨을 쉬었고 시도폰에게 ‘조금 세게 말해야 할 것 같아. 고집이 세신 분이셔서.’라고 조언했다.

“아페 님, 당신께서 가겠다고 하시면 당연히 지켜드릴 순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당신을 지키는 동안은 다른 누군가를 도우러 갈 수 없어요. 그런 걸 원하시나요?”

“아니요, 절대로 그렇지 않아요. 죄송합니다. 하지만 정말 불길한 느낌이 들어서 여러분만 보내고 싶지 않아요.”

잠깐 고개를 숙이길래, 아페가 포기한 줄 알았던 시도폰이었지만, 아페는 포기하지 않았다. 평소 같았으면 시도폰의 말에 만족하지 못해도 고개를 끄덕이고 넘어갔을 텐데, 오늘따라 아페가 제 뜻을 거두지 않았다.

“…그러면 제일 후방에서 얌전히 계실 수 있으십니까? 그러시다면 제가 책임지고 동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두코가 경악하며 말렸다. 하지만 아페는 냉큼 폰의 뒤로 붙었고, 시도폰은 시간이 지체되었다며 기사들에게 출전을 명했다. 물론 시도폰도 아페의 그런 말을 완전히 믿는 건 아니었다. 카리타스가 보낸 편지가, 아페는 어느 정도 불안을 감지할 수 있는 것 같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믿을 뿐이었다. 아페와의 대화가 마무리되고 피데이스가 사람들을 둘러보다 소리쳤다.

“위치는 순찰 구역 중 테라 10번에 해당하는 곳입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그곳에서 강력한 악의 기운이 검출되었다고 하기에, 그곳의 상황을 확인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다들 저를 따라와 주시고, 항상 전투태세를 유지해주시기 바랍니다.”

피데이스를 선두로 기사들이 말을 몰았다. ‘테라’가 기사단장의 순찰코스를 뜻하는 단어인 것을 모르는 이가 없었기에, 아까의 어수선한 분위기는 사라지고 무거운 긴장감만 맴돌았다. 침착한 듯 보였던 피데이스도,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속도를 올리는 것으로 보아 마음이 급한 것 같았다. 하지만 누구도 속도를 늦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무 일 없어야 할 텐데. 10번처럼 안전한 곳에서 악마의 기운이 감지되었다는 것도 솔직히 안 믿긴단 말이야.’

“저기, 집행자님 이동 중에 죄송하지만 여쭤볼 게 있어요.”

시도폰은 제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지금 저희가 가고 있는 곳을 순찰하기로 하신 분이 누구신지 알고 계신 가요?”

“제가 기억하기로는 헤일로 단장님과 북부 기사단 중 일반기사 두어 명, 수습 세 명이었습니다. 그중에 프라이에가 수습으로 포함되어 있죠.”

“그렇군요. 일찍 도착해야겠어요.”

고개를 끄덕인 시도폰이 말을 더 힘차게 몰았다. 눈이 쌓이지 않은 흙바닥에선 말발굽들이 바닥을 박차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고 기사들은 그 소리가 자신의 심장박동 소리라도 되는 것처럼 말을 몰았다. 그리고 테라 6번쯤 되었을 때, 시도폰은 후방에서 선두로 치고 올라왔다.

“갑자기 내가 앞장서서 놀랐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도착하자마자 전투를 해야 할 것 같아서요, 다들 대비해주시기 바랍니다.”

단호하게 소리치는 시도폰의 뒤엔 떨리는 손으로 그의 허리를 붙들고 ‘괜히 온 걸까?’라며 두려움에 떨고 있는 아페가 있었다. 점점 가까워지는 악의 기운에, 비겁하게도 아페는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위험할 수도 있다는 걸 알려주기만 하고 빠진다고 한들, 자신을 비난할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그런 생각 중에 무심코 뒤를 돌아본 아페는 두코와 눈이 마주쳤다. 찰나였지만, 아페는 두코의 눈에서 두려움을 읽어낼 수 있었다. 시야를 넓힌 아페는 다른 기사들도 비슷한 눈을 하고 달리고 있음을 알았다. 하지만 그들은 아페와 다른 것을 두려워하는 듯했다.

‘저 사람들을 동료를 잃을까 봐 두려운 거겠지, 나랑은 다르게.’

저런 사람들과 함께하고 있으면서 제 안위나 걱정했다니, 아페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지 못하고 시도폰의 허리춤을 더 세게 붙잡았다.

‘이번에는 잘 할 거야. 도움이 되려고 온 거잖아.’

테라 9번을 지나치자 피비린내가 바람에 실려 왔다.

“아페 님, 부상자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그들을 중심으로 수호 결계를 부탁드립니다.”

“당연히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런데 저기, 뭔가 이상해요. 왜 베론 님만 버티고 계시는 거죠?”

“그럴 리 없어요, 나머지 인원은 쌓인 눈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단장님마저 당했을 수가 있나 싶지만….”

조금 더 가까이 간 시도폰이 말을 잇지 못했다. 먼저 도착했었던 베론이 쓰러져 있는 기사들을 악마에게서 지키기 위해 보호막을 세우고 버티고 있었고, 막에 들러붙지 않은 악마들이 또 한 무리가 있었다. 사냥에 성공한 무리 동물이 도취감에 휩싸여 먹이를 뜯듯이, 게걸스럽게 무언가를 찢어발기고 있는 악마들을 보자마자 아페는 구토감에 눈을 감았다.

“전원, 바로 전투에 들어갑니다!”

말이 멈추자마자 뛰어내린 시도폰을 따라서 기사들이 악마에게 달려들었다. 베론에게 들러붙어 있는 악마를 먼저 몰아내라고 지시한 시도폰은, 이어서 아페에게 부상자들의 회복을 부탁했다.

“프라이에? 뭘 보고 있는 거야? 일어서!”

넋이 나간 채 주저앉아 밖을 보고 있던 프라이에를, 두코가 발견하고 다그쳤다. 다른 이들에 비하면 경상이었는데도 프라이에는 자리에서 일어나질 못했다. 그동안 피데이스는 베론에게 다가가서 지원군이 왔음을 알렸다.

“베론 경, 왜 먼저 그렇게 뛰어나간 겁니까? 경? 이런, 집행자님, 베론 경의 상태가 이상합니다. 분명 보호막은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는데 사람은 의식이 거의 날아간 것처럼 반응이 없습니다. 갑옷 때문에 정확한 상태를 알 순 없지만….”

피데이스의 말에, 시도폰은 비슷한 상태인 프라이에의 시선을 따라갔다가 악마의 발에 짓밟히고 있는 익숙한 망토를 발견하고 심장이 내려앉았다.

 

지원군이 왔는데도 베론이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지, 부상자들을 두고도 모든 악마가 왜 그곳에 달려들지 않았는지 단박에 알아버렸으니까. 시도폰과 비슷한 시점에, 다른 기사들도 보호막 밖에서 홀로 버티고 있었던 누군가를 알아차린 모양이다. 그들의 단장이었던 사람을. 누가 먼저라고 할 거 없이 기사들이 달려들었다. 더는 그 사람을 악마들에게 뜯어먹히게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악마들을 나무토막처럼 도륙 내면서도 기사들은 계속 바닥을 살폈다. 눈물로 흐려진 시야였지만, 그들은 단장의 손가락 한 마디도 밟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싸웠다. 마침내 모든 악마가 쓰러져 눈 위의 그림자처럼 스며들었을 때, 기사들은 무기를 거두지도 못하고 그대로 땅에 떨구고 말았다. 아무도 그의 시신에 손을 대지 못하고 있을 때 치료에만 전념하던 아페가 일어섰다.

‘다들 움직이질 못하고 있어. 어떻게 해야 하지?’

아페는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멀쩡해 보이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부상자들은 의식이 없었고 산 사람들은 말이 없었다. 기사들을 이끌어야 할 베론도 보호막을 전개했던 자세 그대로 굳어서 움직이지 않았다. 투구를 쓰고 있어 표정이 보이지 않았지만, 갑옷이 가끔 들썩이는 거로 보아 울고 있는 게 분명했다.

“…언제까지 이렇게 둘 순 없습니다. 두 사람은 단장님을 이쪽으로 옮겨주세요.”

시도폰이 무거운 목소리로 사람들을 부르고 망토를 끌러 바닥에 내려놓았다. 호명된 기사 둘은 피로 범벅된 건틀릿을 벗고 떨리는 손으로 헤일로를 들어 올렸다. 힘없이 들리는 몸에, 기사들은 입술을 깨물었다. 조심스레 그를 망토 위로 옮기는 것을 지켜보던 시도폰이 피데이스를 불렀다.

“피데이스, 부상자를 호송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페 님이 회복시켜주시긴 했지만, 저 상태로 말을 타는 건 무리니까 마차를 불러와 주십시오.”

언제나 침착하던 피데이스답게 그는 이런 상황에서도 남들보단 멀쩡해 보였다. 그는 창백한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타고 점점 멀어지는 피데이스를 보다가, 누군가가 베론을 다급하게 부르는 소리에 시도폰은 고개를 돌렸다.

“집행자님! 부단장께서….”

기사 여럿이 달려들어 베론을 붙잡고 있었다. 폰은 달려가서 베론의 목을 향한 검을 그대로 올려쳐 날려버렸고 저 멀리 날아간 검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땅에 떨어졌다. 검이 날아갔는데도 베론은 버둥거리는 걸 멈추지 않았다. 알아듣지도 못할 기이한 신음이 그의 투구에서 세어나갔고 폰은 그 소리를 그치게 할 방법이 없으리란 걸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천천히 베론에게 다가간 시도폰이 그의 투구를 벗기자 땀과 눈물로 얼룩진 얼굴이 드러났다. 다시 한번 입술을 세게 문 시도폰이 그대로 베론의 목덜미를 쳐 기절시켰고, 기사들은 그를 부상자들 옆에 뉘었다.

“…두코, 프라이에는 상태가 어때?”

“말은 할 수 있는 것 같은데 지금 뭔가 물어봐도 제대로 된 대답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반쯤 넋이 나가 앉아있는 프라이에에게, 두코가 물통을 건네주고 일어섰다. 조심스레 프라이에 앞에 한쪽 무릎을 꿇은 시도폰이 그와 눈을 맞추고 물었다.

“프라이에, 지금 당장 이런 걸 물어보는 거 나도 싫은데, 추가 피해가 생길까 봐 걱정돼.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말해줘.”

지난 일을 회상하던 프라이에가 온몸을 떨자, 곁에서 지켜보던 두코가 그의 어깨를 살짝 눌렀다. 물을 한 모금 마시고 프라이에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이 구역에서의 순찰을 마치고 돌아가려던 참이었어. 여기만 확인하면 다시 돌아갈 수 있으니까 다들 들뜬 마음으로 수상한 게 없는지 살펴보고 있었는데, 저기 있는 수풀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는 거야. 들짐승일까 싶어서 다가갔는데 갑자기 사람이 튀어나왔어, 나이는 우리보다 좀 많아 보이는 여자였는데 얼굴이 잘 기억나지 않아. 북부에서 그렇게 얇은 옷차림으로 다니는 사람은 없으니까.”

“무슨 옷을 입고 있었길래….”

“하얗고 얇은 로브랑 비슷한 색의 긴 바지가 다였어. 신발을 안 신고 맨발로 서 있더라, 그때부터 이상하다는 걸 알아챘어야 했는데.”

프라이에가 마른 입술을 씹었다. 한 글자씩 내뱉는 것도 괴로운지 미간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지만, 말을 멈추진 않았다.

“그 사람은 우리한테 미안하다고 했어. 뭐가 미안하냐고 물어보려고 했는데… 눈을 깜빡이자마자 사라졌지, 그리고 바로 습격이 시작됐어. 수풀에서 갑자기 악마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한 거야.”

‘아무리 급습이라고 해도 적은 인원이 아닌데 왜 이렇게까지 된 거지.’

의문을 품었지만, 시도폰은 차마 그것까지 물어보진 못했다. 다행히 프라이에는 그것까지 설명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처음엔 세 마리뿐인데 다가 네발 동물형이라 처리하기 쉬울 줄 알았어. 그런데 그놈들을 상대하는 동안 점점 악마들의 수가 늘어났어. 부끄러운 말이지만 내가 두 번째로 부상 때문에 쓰러졌고 남은 기사들도 하나둘 다쳤어. 그러던 중에 부단장님이 도착했는데….”

프라이에는 눈을 감은 채 죽은 듯이 누워있는 베론을 한번 쳐다보고 말을 이었다.

“단장님이, 당신께서 악마들의 시선을 끌 테니 부상자들을 보호하라고 명령하셨어. 당연히 부단장님은 함께 싸우겠다고 하셨는데 이미 단장님 외에는 싸울 수 있는 기사가 없어서…. 부상자들을 전부 포기하지 않는 이상, 그건 불가능했던 거야.”

‘그래서 베론이 움직이지 못하고 그러고 있었구나.’

이후는 설명하지 않아도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기에 시도폰은 그쪽을 더 물어보지 않고 대화의 화제를 돌렸다.

“악마는 우리가 다 처리한 거지?”

시도폰의 물음에 프라이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여자가 남아있을 거야. 악마들이 나타나고 나서 바로 사라졌으니까.”

안 그래도 그 사람의 존재가 신경 쓰였던 시도폰이 머리카락이나 눈의 색은 못 보았냐고 물었다. 하얀 옷으로 싸맸던 사람이라고 하면 기억나는 건 금색의 낯선 이뿐이었으니까. 게다가 그와 비슷하게 애초에 없었던 사람처럼 사라졌다고 하니 더욱 신경 쓰였다.

“봤던 거 같은데 기억이 안 나, 밝은색이었던 것 같은데…”

“알겠어. 일단 당장 그 사람을 찾긴 힘들 것 같으니까 쉬고 있어.”

마침 부상자 이송용 마차가 도착했기에 시도폰은 그들을 맞으러 일어났다. 참혹한 현장에, 마차를 끌고 온 기사들이 당황하며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었지만, 시도폰은 환자 이송이 먼저라며 그들을 닦달했다.

“아페 님께서 치료해주셔서 외상은 전부 나았지만 이대로 오래 둘 순 없다. 그리고 피데이스 뒤에 있는…그래, 당신은 이쪽으로 와줘.”

헤일로의 시신 위엔 아무것도 덮여있지 않아서 마차를 끌고 온 기사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바로 눈치챘다. 뒤쪽의 다른 기사들을 흘겨본 시도폰은 신경질적으로 창을 바닥에 내리쳤다.

“동요하지 마. 다른 기사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얼른 마차에 옮겨, 빨리!”

피데이스와 기사는 망토째로 헤일로를 들어 올려 마차에 실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마차의 천을 내려 안쪽을 가린 기사는 시도폰에게 잠깐 원망의 눈빛을 보내는 듯했다.

“…단장을 그렇게 만든 자가 아직 남아있을 수 있다. 다른 기사까지 그렇게 만들고 싶지 않으면 침착하게 행동하도록.”

살벌하게 일갈한 시도폰은 피데이스에게 기사들을 데리고 돌아가라고 명령했다.

“당신께선 어떻게 하시려고…”

“혼자 돌아다니진 않을 겁니다. 말을 타고 주변을 순찰하기만 하고 돌아가려고요. 환자들을 잘 부탁합니다. 그리고…베론도요.”

“두코만 불러오면 되겠습니까?”

잠시의 침묵 후 피데이스가 묻자 시도폰이 고개를 끄덕였다. 프라이에에게 계속 말을 걸고 있던 두코는 피데이스가 다가가서 전언하자 한숨을 한 번 쉬더니 시도폰에게로 걸어왔다.

“가십시다, 프라이에가 걱정되긴 하지만 이대로 붙들고 있다고 해도 상태가 더 좋아질 것 같진 않아. 지금 중요한 건 추가 피해를 막는 거니까.”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지금 바로 추가 인원을 데리고 오라고 하는 건 힘들 것 같아서 우리 둘이서만 갈 거야.”

“잠깐만, 둘만으론 힘들 거야! 방금까지 봤잖아, 헤일로 단장님에 일반기사 둘, 수습 기사 셋이 당했어. 네가 강한 건 알지만 무모한 일이라고. 당장 둘이서만 가려고 하지 말고, 다 같이 돌아가서 조사단을 꾸리고 여기 다시 오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데.”

피데이스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걸 허락한 거냐고 씨근거리며 말하는 두코에게, 시도폰은 난감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사실 혼자 돌아다니려고 했어. 아, 잠시만 반박은 좀 있다가 받을 테니까 들어봐. 내가 혼자 다녀도 괜찮다고 생각한 이유는 두 가지야. 첫 번째는 감, 두 번째는 아페 님의 말.”

“첫 번째는 생략해도 되지 않겠어?”

“반박은 좀 이따 하라니까 정말. 우선 첫 번째로 이 주변엔 우리가 죽인 악마들 외의 다른 악한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 즉, 여기까지 침입한 악마는 이놈들이 전부라는 거겠지.”

“프라이에가 말했던 그자가 악마를 더 불러오면 어떡하려고?”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 그런데 아페 님이 이상한 말씀을 하시더라고. 부상자들을 살펴봤을 때, 악마들이 인간의 약점 부위를 노리고 ‘죽지 않을 만큼만’ 공격했대, 본능적으로 아무 데나 물어뜯기 바쁠 네발 동물형이 왜 그런 짓을 했을까?”

“그자에게 조종당해서 그랬던 거겠지…라기엔 공격하는 정도를 조절했다는 게 더 이상해, 아니 그게 애초에 가능한 일인가?”

“가능하냐 불가능하냐를 따지는 건 일이 이미 일어난 시점에선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일단 그자의 목적이 뭐였을지 생각해보자. 그자는 단장이 부상자들을 지키게 했어. 자신을 제외하고 모두가 죽었다면 단장은 그 자리에서 도망쳐서 제 몸을 보전할 수라도 있었겠지만, 기사들을 적당히 다치게 해서 두고 가지도 못하게 하면 그들을 지키려고 버티는 단장을 처리할 수 있을 거라고 예상한 거겠지.”

“그렇게까지 단장을 죽이려고 했다고….”

두코는 말끝을 흐렸지만, 시도폰의 추리가 어색하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언제 저렇게까지 생각한 거지? 아까 일 터지고 제일 먼저 수습한 것도 그렇고, 추론하는 것도 그렇고, 애가 언제 이렇게 큰 거야.’

마차들이 덜커덩 소리를 내며 본부로 돌아가기 시작하자 두코가 다급하게 말했다.

“그래서, 그 사람의 의도가 그렇다고 치자. 그거랑 우리 둘이서만 여길 순찰하는 게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거야? 정말 단장을 죽이는 것, 그 자체가 그 사람의 목적이었으니까 우리는 안전할 거라는 거야?”

처음 두코의 물음에 대답하려던 시도폰은 입을 벙긋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코는 자신의 논리에 한 치의 의심조차 하지 않는 듯한 폰을 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인간이, 자기가 옳다고 생각한 주장에 근거를 끼워 맞추고, 그 주장을 타당하다고 말하는 건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었지만, 지금처럼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는 순간에 폰이 이렇게 행동하는 건 문제였다. 두코의 한숨은 이 사실을 어떻게 폰에게 이해시킬 수 있는지를 고민하다가 튀어나온 것이었다.

“나 혼자라도 괜찮아, 무사히 돌아갈 테니까.”

“너 지금 그게 무슨 소리야? 널 여기 혼자 두고 가라고? 네 추리가 이상하진 않아,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하지만 생각해봐, 단장을 죽이는 것만 목적이라고 어떻게 단정 지을 수 있어? 단장 다음이 너라는 생각은 안 해봤으니까 그렇게 말하는 거잖아.”

“…그건 그래. 정말 단장님만이 목표였다고 생각하는 건 내 감이지.”

차마 자신이 생각하는 하얀 로브의 그 사람을 설명할 수 없었던 시도폰은 ‘감’이라는 단어로 말을 마무리했다. 결국, 두코에게 끌려가 말에 올라탄 시도폰은 계속 프라이에의 증언을 되새김질했고, 말은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왜 그 사람이 미안하다고 했을까? 미안할 짓은 안 하면 되잖아. 왜 단장을 죽이는 게 잘못된 일이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 그런 거지? 죽여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나?’

“폰! 정신 차리고 말 고삐 똑바로 잡아. 이런 상태로 혼자서 순찰할 수 있었을 리가 없잖아.”

폰의 뒤에서 두코가 소리쳤다. 마차와의 거리를 줄이기 위해 좀 더 속도를 내고 있던 터라, 방심하면 안 되는 순간이었는데 시도폰이 위태로워 보이는 자세로 말을 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 응, 제대로 할게.”

“아까 사태 수습할 때는 어른스럽게, 아니 오히려 다른 어른들보다 더 대처를 침착하게 하더니만. 나도 프라이에가 말한 그 사람이 정말 수상하고 신경 쓰이긴 해, 하지만 네가 아까 말한 것처럼 지금 우리 둘이서 수색하는 건… 힘들어, 빨리 정비하고 돌아오자.”

두코는 그 말을 뒤로하고 속도를 높여서 시도폰을 앞질렀다. 문득 시도폰은 정오의 환한 빛으로 둘러싸인 두코와 그 앞의 마차들, 기사들을 보며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이 혹시 제 착각이었던가 싶어졌다. 새들은 평화롭게 지저귀고 숲은 평소처럼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냈다. 악한 기운은 진작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따뜻하고, 조용한 풍경만이 펼쳐졌다. 하지만 본부에 도착해서 일행을 맞이하러 나온 슈바헨과 사제들의 표정을 보고, 시도폰은 현실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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