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타브] 효율성에 대하여
2번 체형 셀다린 드로우 소서러(야생) 타브
짜증나.
경동맥이 끊어져 그륵거리며 고꾸라진 시체를 질질 끌고 가면서 아스타리온은 그렇게 생각했다.
한 방울도 아쉬워하며 마셔 온 향기로운 피가 온 사방에 흥건했다.
마셔, 아스타리온. 어서.
죽기 직전에는 어디선가 기운이 솟아난다더니, 근육도 별로 없는 소서러가 쥐어잡은 목덜미가 아플 정도였다.
경직된 목을 찢은 송곳니도, 익히 아는 달콤함을 탐하는 혓바닥도 불쾌했다.
타는 듯한 갈증이 비켜난 자리에는 개미 떼에게 갉아 먹히는 듯한 포만감이 차올랐다.
눈 앞의 적이 먼저다. 알고 있다.
주어진 일을 해 내는 건 아스타리온이 언제나 잘 하는 일이다. 그리고 생물의 피를 빨아 전투 밑천으로 삼는 건 몇 안 되는 기껍게 할 수 있는 일 중 하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스타리온은 짜증이 났다.
한 번 불이 붙은 짜증은 점점 몸집을 불려 종래에는 익숙한 숨결마저 거슬리게 만들었다.
나란히 편 옆 침낭에서 자다 자신의 가슴팍으로 굴러 들어온 금빛 머리통을 끌어안고 있다가 아스타리온은 또 생각했다.
아, 진짜 짜증나네.
그리고 이번에는, 생각에 그치지 않고 짜증의 근원인 애송이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어헉, 뭐야, 글라키- 으붑."
연인의 품에 감싸여 곤히 잠들었던 빈혈 소서러가 반사적으로 외치려는 주문을 잽싸게 제지하고 그 배 위에 올라타 제압했다.
당혹으로 흔들리던 호박색 눈동자가 상대를 인식하고 -지금 입이 틀어막히고 손목이 잡혀 덮쳐지고 있는데도- 안심하는 광경이 짜증스런 와중에도 퍽 만족스러웠다. 그 덕에 아스타리온의 입에서 흘러나온 얼러댐은 의도했던 것 보다 부드러웠다.
"쉿-. 습격 아니니까. 자는 애들 다 깨우지는 말자고. 알겠지, 자기? 알았으면 끄덕여 봐."
끄덕 보다는 까딱 에 가까운 조그만 움직임이긴 했지만 확실한 동의 표시에 아스타리온이 물러나 옆으로 앉았다.
심란한 잠버릇을 참아주지 않는 연인을 두어 오밤중의 봉변이 익숙한 타브도 그를 따라 허리를 세웠다.
"왜 그래, 아스타리온. 나 또 자다가 당신 엉덩이라도 더듬었어? ...그건 아닌가보네.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냐고? 자기야, 엉덩이 같은 소리 하고 자빠지지 말고, 정말 찔리는 거 없어?"
누가 소서러 아니랄까봐 인생을 척수반사로 사는지라 섬세한 연인의 심기를 꽤, 제법 자주, 정확히는 하루에 꼬박꼬박 한 번 정도는 거스르고 있는 타브가 대답할 말을 찾는 데에는 다소 시간이 걸렸다.
아침식사 할 때 비트 스프가 피랑 성분이 비슷하다는데 먹어보라고 해서 그런가? 아냐, 이건 벌써 한 소리 들었는데. 같은 걸로 두 번 혼내진 않는단말야. 그럼 아까 전투 할 때 내 피를 뒤집어 써서 그런가? 그건 불가항력이었잖아. 아니면 내 시체 간수하기가 귀찮았나? 요새 살이 좀 찌긴 해서 무겁긴 했겠지만 그런 거 가지고 삐지기엔 어차피 할신이 끌고왔을텐데... 그리고 섀도하트가 금방 생환 주문 써 줘서 야영지는 걸어왔는데... 진짜로 아까 가슴이라도 더듬었나... 근데 요새는 가슴은 좀 참아주던데... 가슴 아니고 역시 엉덩이인가...
연인의 생각이 산으로 가고 있는 걸 이백년간 갈고닦아온 눈치로 알아챈 뱀파이어 스폰의 이마에 힘줄이 섰다.
"일단, 자기 표정 보니까 전혀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건 알겠어. 그래도 어디 한 번 말해봐. 뭘 잘못했나."
"혹시 야식 시간에 자꾸 먹을 거 냄새 나서 그런가? 한 입 먹을…음~ 흠. 자기야, 아스타리온. 그냥 당신이 알려주면 안 될까? 내가 더 말하면 당신 언데드 최초로 혈압 올라서 쓰러질 수 있을 것 같은데."
태평하게 뒤통수나 긁으면서 주워섬기는 말은, 하루 종일 농축되었던 짜증의 정수를 흘러넘치게 하는 마지막 한 방울이 되기에 차고 넘쳤다.
"너는내가지금 흡혈귀말고 무슨걸귀라도되는줄알아?! 네 그 올챙이가 파먹은 뇌에는 스스로를 보호해야한다는 생각이 없어? 원래 호구인줄은 익히 알고 있긴 했지만 죽었다 깨어났다가 첫 마디가 맛있었냐인게 어? 입에서 나올 말이야? 아니, 애초에 도대체 대강 죽어가면 포션달라고 할 생각은 안 하고 모가지를 아예 네 손으로 송곳니에 갖다바치는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그러고서는 지금 또 다 죽어가는 애 피를 빨라고? 너 내가 지켜주고 싶다고 했던 건 기억은 해? 그러면서 내가 배고픈데 들이댄 피투성이 모가지에다가 못 이기고 입 대고 빨고 널 내가 죽이게 만드는 게 너는 지금 아예 잘못한 일 고려대상 목록에 조차 없어? 내가 뭐 바알 스폰이라 내 손으로 자주자주 널 죽여도 참 즐거울 수 있는 줄 알아?!"
폭풍처럼 몰아치는 분노가 선사한 감동에 레이젤이 땅을 쾅 내리쳐 화답했다. 츠크바! 사랑 싸움은 낮에 해라!
씩씩대며 벌떡 일어난 아스타리온이 홱 돌아섰다.
"오늘은 혼자 잘거야. 짜증나니까 꺼져."
여기서 꺼지란다고 진짜 꺼지면 내일 아침에는 정말로 큰일 난다. 타브에게도 그 정도의 눈치는 있어서 성큼성큼 걸어나가는 아스타리온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갔다. 다행히도 따라가는 것까지 걷어차이지는 않았다는 데에 위안을 삼았다.
아까처럼 심연에서 우러나오는 외침이 아니고서야 야영지 동료들에게는 말소리가 흘러들어가지 않을 만큼 적당한 거리까지 걸어나오고 나서 창백한 엘프의 발걸음이 멈췄다. 타브가 이 때만을 기다렸던 변명을 줄줄 해방시켰다.
"아스타리온. 미안해. 난 그냥... 우리 좀 빠듯하게 움직이는 바람에 계속 배고파했잖아, 당신. 난 어차피 큰 주문 준비해 둔 것도 다 썼고, 적은 많고, 난 가만히 있어도 금방 죽을 것 같고 내 사랑도 다쳤는데 그게 더 효율적일 것 같았어...근데! 앞으로 조심할게! 다음엔 안 그럴게!"
그리고 처음 만난 날에 죽을 때 까지 쪽쪽 잘 빨아먹길래 별 생각 없는 줄 알았다는 말은 목구멍으로 꿀꺽 삼켰다. 이 얘기 하면 정말로 큰일 난다(2).
아스타리온이 깊고 긴 한숨을 푸욱 내쉬더니 적당한 바위에 대충 걸터앉았다. 그리고는 드디어 고요하게 잠긴 홍옥의 눈동자가 타브를 응시했다.
"달링, 너는... 하... 그래. 내가 달링 버릇을 잘못 들였나 봐. 이렇게 박애주의자로 키우는 게 아닌데. 물론 배 고픈거, 끔찍하지. 눈 앞에 피 두고 못 먹는거? 짜증나지. 그렇지만 내가 뭐 열흘을 굶었어, 보름을 굶었어? 해봤자 사흘이잖아. 사흘도 길다는 소리 할거면 가만히 있어. 그건 성장기인 자기 기준이잖아. 하... 그래. 성장기. 자기야, 내가 이 어린 애하고 지금... 뭐야? 웃겨? 웃음이 나와, 지금?"
"아하하. 아니, 그냥... 아스타리온도 별로 그렇게 늙은 것도 아니면서. 오백 살도 안 됐잖아. 물론 내가 훨씬 어리지. 그치만 알잖아. 난 그냥 당신한테만 그러는거야. 내 사랑한테 완전 홀딱 반해있으니까."
이때다 싶어 냉큼 무릎을 꿇은 타브가 아스타리온의 새하얀 손을 끌더니 아양부리듯이 볼을 기댔다. 새카만 눈꺼풀 사이 금빛으로 반짝이는 홍채가 달처럼 휘어졌다. 글자 그대로 시커멓고 덩치도 별반 차이 없는 스물 두 살짜리 드로우가 귀여워보이다니. 아스타리온, 갈 데까지 갔다, 진짜로.
"그래도 이야기 해 줘서 고마워. 내가 눈치는 없어도 당신 기분이 상하는 건 정말로 싫거든. 뭐든 즐거운 일만 하게 해주고 싶단 말이야. 또 이렇게 짜증나는 일 있으면 꼭 이야기 해 줘. 두 번 실수는 안 하는 거 알잖아."
"참 나... 이렇게 깜찍한 소리는 또 잘 한 단 말이야."
"그럼. 애인한테 아주 잘 배웠거든. 그래서 잘 해. 입 맞춰도 돼?"
"아주 질리지가 않지? 그렇겠지, 물론."
숲 속에서는 한동안 점막 부딪히는 소리와 연인의 키득거림이 이어지다가 이내 끊겼다.
그림자 엘프와 창백한 엘프가 서로 꼭 끌어안고 잠들기 직전에, 타브는 생각했다.
이제 죽기 직전에는 빨아먹으라고 하지 말아야겠다. 아스타리온 상처 치료도 별로 안 된 것 같던데, 화만 나게 만들고. 너무 효율성 떨어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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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로우가 안 잔다는 건 압니다만은 많이 다쳐서 천사물약 멕였다는 설정을 마음의 눈으로 보아주십시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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