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우

Wuthering Library

노맨즈랜드 by f3t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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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간 작업 도중 작성했던 폐기 원고를 조금 다듬어 공개합니다. 폐기 원고인 만큼 뒷 이야기는 딱히 존재하지 않습니다…

- 신간 스포일러 요소 없음!

맞다, 태풍.

울프우드는 망연한 얼굴로 두 걸음 앞의 바깥을 내다봤다. 그러니까,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무지막지한 비가 쏟아지는 바깥을.

대단한 폭우였다. 냉기가 어린 바람이 불자 차가운 물방울 몇 개가 튀어 바짓단에 동글동글한 자국이 남았다. 도서관 옆길로 이어지는 언덕에선 탁한 흙탕물이 폭포처럼 흘러내렸고, 입구로 올라오는 계단마저 본래의 목적을 잊은 양 빗물을 아래로 떨어뜨리기만 했다. 저래서야 계단이라기보다는 잘 조각된 분수 꼴이다. 빗방울이 거세게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 사이로 물이 흘러내리는 소리도 함께 들려왔다.

우르릉, 쾅! 때맞춰 천둥이 친다. 세상이 번쩍 밝아졌다가 도로 어두워졌다.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는 울프우드의 얼굴도 따라서 한층 더 어두워졌다. 힘 빠진 왼쪽 어깨에서는 힘이 빠진 가방끈이 주르륵 미끄러진 건 불가항력이었다. 내용물을 다시 확인할 것도 없이, 우산이나 우비 같은 건 들어 있지 않은 가방이었다.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그는 오늘 이 도서관에서 밤을 새게 생겼다는 뜻이다. 그것도 오래된 노트북, 강의노트, 그리고 이런 빗속에 뛰어들었다간 이십 초도 버티지 못할 낡은 가방과 함께.

아무리 그의 집이 사람 사는 곳 답지 않은 꼴이라지만 그것과 이건 다른 문제인 법이다. 그리고 단언하건대, 이건 종강이 이틀 남은 대학생에게는 정말로, 정말로 좋지 않은 소식이었다. 

울프우드는 한참을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차양 밖을 노려보면서, 우산의 행방을 몇번이고 머릿속에서 되짚기 바빴다. 물론 그렇다고 현실이 변할 리는 없었지만. 

이미 비는 쏟아지고 예보에 따르면 오늘 밤 내내 쭉 비가 올 예정이라고 했다. 내일 오전 태풍이 도심부에서 멀어지고 나서야 겨우 잦아든다고 하던가. 도서관 내 편의점의 우산마저 이미 다른 학생들이 발 빠르게 채간 탓에, 꼼짝없이 하룻밤 노숙해야 하는 신세였다. 막 끝마친 과제가 든 노트북을 품에 안고 저 거센 빗줄기 사이로 뛰어들 게 아닌 이상은.

결국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내일의 일이 아예 걱정되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지금 당장은 이번 학기의 학점이 더 중요했다. 그리고 내일 제출해야 할 과제가. 어쩐지 머리가 아파오는 듯해서, 그는 주머니를 더듬어 담배 한 개비와 라이터를 꺼내 들었다.

그런데 그가 막 담배를 입에 물려던 차였다.

누군가가 요란하게 젖은 계단을 뛰어올라오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다급한 걸음마다 고인 물이 튀어 철퍽거리는 소리가 났다. 즉시 울프우드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이 날씨에? 이 비를 뚫고? 미친 건가?

의문 섞인 시선이 계단 쪽으로 향하는 것과 누군가 세찬 빗줄기를 헤치고 지붕 안쪽으로 뛰어들어 온 건 거의 동시의 일이었다. 쫄딱 젖은 붉은 후드 차림의 남자였다. 그는 마른 대리석을 밟고도 두어 걸음 더 뛰어들어가더니, 도서관의 출입문 손잡이를 붙들고서야 간신히 멈춰 섰다. 깊이 뒤집어쓴 후드를 벗자, 유리창에서 흘러나오는 도서관 빛에 둥근 안경과 얼굴이 어른어른 드러났다. 울프우드도 아는 얼굴이었다.

빗자루처럼 세워 올린 금발, 보기 드문 새빨간 색 외투와 테가 동그란 안경을 피부거죽처럼 두르고 다니는 남자. 원예학과 3학년 밧슈 세이브렘. 통칭 인간 태풍 밧슈 더 스탬피드! 왜 그런 이명이 붙었더라…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아무튼 이 대학에선 꽤 유명인이었다.

그리고 약 오 분 전에 도서관을 나선 사람이기도 했고.

…그러니까, 우산을 들고 제대로 걸어 나간 사람.

하지만 지금 그의 손엔 우산 그 비스무리한 것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다만 비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젖어 물방울만 뚝뚝 떨어뜨리고 있을 따름이었다. 울프우드의 의아한 시선을 느낀 건지 숨을 고르던 세이브렘이 그가 서 있는 쪽을 흘끔이면서,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우산이… 그, 바람에 날아가는 바람에……."

"……손수건이라도 드릴까요? 한 번도 안 쓴 건데."

"응, 고마워……."

아, 기억났다.

어딜 가던 태풍에 휘말리듯 불운에 휘말리고 만대서 인간 태풍이랬었다. 그 본인이 사서 고생을 자처하는 것보다도, 지나칠 만큼 사건사고가 따라다니는 인물이라서. 축제 중에 천막이 무너졌다느니 엘리베이터가 고장났다느니 하는 이야기들이 탄식과 함께 한 발 늦게 떠올랐다. 그리고 아마 오늘의 일도.

울프우드는 어쩐지 밧슈 세이브렘이 측은해졌다. 그는 기꺼이 가방 속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손수건을 건넸다. 며칠 전의 학교 축제의 어느 부스에서 사격 게임의 상품으로 받았던 손수건이었다. 정작 그는 쓸 일이 없어 포장조차 뜯지 않고 있었는데 이래서야 오히려 다행인 셈이다. 세이브렘은 조금 멋쩍어 보이기도 한 얼굴로 손수건을 받아 들고는, 옷과 머리카락의 물기를 털기 시작했다.

울프우드는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곧 몸을 돌려 도서관 안쪽으로 들어왔다. 열심히 젖은 옷을 털고 있는 사람 옆에서 담배를 피우기도 영 어색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탓이다.

푹 젖은 운동화가 매끈한 대리석 위로 눌렸다가 다시 들리면서 기묘한 발소리를 냈다. 물을 잔뜩 먹은 솜을 유리창 위로 꾹 눌렀다가 떼는 듯한 소리였다. 도서관 로비의 긴 의자 위로 드러누워 있던 울프우드가 얼굴을 덮고 있던 책을 들어올리고 고개를 들었다.

품이 넉넉한 하얀 셔츠에 검은 조끼 차림의 세이브렘이 로비와 카페테리아를 나누는 경계에 서 있었다. 붉은 후드집업과 손수건은 어딘가에 널어 말리는 모양인지 보이지 않았다. 짧은 사이 제법 열심히 옷을 짜냈는지 더이상 물이 뚝뚝 떨어지지도 않았다. 여전히 어두운 색으로 젖어 있긴 했지만.

울프우드가 상체를 일으켰다.

허락을 구하듯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던 밧슈가 천천히 다가왔다. 느린 걸음마다 운동화 소리가 요란하게 메아리쳤다. 널찍하고 조용한 로비였던 탓에 더욱 크게 들렸다. 걷는 본인은 나름 소리를 내지 않겠다고 노력하는 모양인데, 그다지 효과가 있지는 않아서 걸음걸이만 우스워 보였다.

울프우드의 옆에 털석 주저앉은 밧슈가 등받이에 기대 앉았다. 물에 젖은 옷이 철제 판 위로 늘어졌다. 울프우드는 약간 떨어져서 앉았다. 이런 곳에서 옷이 젖는 건 사양하고 싶었던 탓이다.

"고마워, 덕분에 좀 나은 것 같아. 손수건은… 나중에 꼭 빨아서 다시 돌려줄게."

"아뇨, 안 돌려주셔도 됩니다. 어차피 안 쓸 것 같거든요."

그 말에 밧슈가 크게 웃었다. 영문을 알지 못해 울프우드가 눈을 끔뻑였다.

"축제 사격 부스에서 받은 거지? 1등상으로."

​"네."

"그거 우리 과 부스였거든. 원예학과."

켁, 울프우드가 허리를 세웠다. 밧슈가 조심스럽게 접어 가져왔던 손수건을 펼쳐 보였다. 멋들어진 나뭇잎 문양의 손수건 구석에 작게 새겨진 글자가 보였다. 노맨즈랜드 대학 원예학과. 이런 실수를.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할지 알지 못해 눈동자만 굴리는 울프우드를 앞에 두고, 밧슈가 여전히 웃음 섞인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때 상품 타갈 때 옆에 나도 있었거든. 압도적인 1등이었으니까 기억하고 있어. 상품을 건네면서도 영 손수건 같은 건 안 쓸 것 같이 생겼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설마 정말로 안 썼을 줄이야. 덕분에 도움 받은 신세긴 하지만."

세상 어느 원예학과가 축제에서 사격 부스를 열고, 그 1등상으로 손수건을 걸어 놓나 했더니.

"참고로 부스는 내 아이디어였지!"

이 놈이었군. 그러고도 밧슈는 가위바위보에서 이겼다느니, 나름 동조하는 학생들도 있었다느니 하는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친구들에게 등 떠밀려 상품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고 참여했던 울프우드로선 아무래도 좋은 이야기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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