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우

내일 이 별이 멸망한다면

노맨즈랜드 by f3t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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밧슈는 오래 전에 들었던 이야기에 대해서 떠올렸다. 온 별을 휩쓸었던 세계 멸망에 대한 소문 이야기. 그 이야기 속에서 종말론자들은 고대 문명의 달력이나 운석의 움직임 따위를 근거로 종말이 목전에 다가왔음을 주장했고, 다른 사람들은 그를 헛소문 취급하면서도 걱정 어린 대화를 나누고는 했다. 정말로 종말이 목전에 있을까, 내일 갑자기 이 별이 멸망할까.

인류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치지도, 실제로 종말을 불러일으키지도 못한 해프닝에 불과했으므로 신천지로 향하는 이민선의 데이터베이스에는 남아 있지 않은 이야기였다. 다만 선별되어 수록된 기록이 아니라, 사람 한 명이 오롯이 쌓아 올린 기억 속에는 그런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오히려 선명하게 남아 있는 법이라.

막 인간을 향해 호기심을 꽃피우는 어린아이들의 침대 맡에서, 렘 세이브렘이 그 이야기를 꺼내 든 건 그런 간단한 이유에서였다.

 

― 그래서 한때는 세계가 멸망한다느니 하는 이야기가 돌기도 했었어. 사람들이란 건 그래, 확신보다 가능성에 더 많은 기대를 거는 경향이 있거든. 과학적인 증거나 증명보다도 말야. 정작 그 날이 오고 보니 아무 일도 안 일어나서 결국엔 헛소문인 걸로 밝혀졌지만.

― 그게 뭐야, 이상해.

― 그치?

 

밧슈가 중얼거렸고 렘은 동의하며 웃었다. 손을 뻗어 가볍게 두 사람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 뭐, 그래도 모든 사람이 그걸 믿은 건 아니었으니까. 나는 그렇게 갑자기 한순간에 세상이 망하지는 않을 거라고 믿는 쪽이었지.

 

빙그레 웃는 얼굴 앞에서 그 때의 밧슈는, 그게 정말 렘다운 말이라고 생각했었다. 그 속을 꿰뚫어 본건지 렘이 몸을 일으키면서 램프의 전원을 껐다. 방 안이 어둠에 휩싸였지만 그는 여전히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캄캄한 그림자 속에서도 별처럼 반짝이는 눈동자로.

 

― 그래도 가끔은 생각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더라. 만약 그게 정말이었다면 뭘 할지. 좋아하는 일을 할 수도 있고, 가족을 보러 갈 수도 있고… 그냥 가장 좋아하는 장소에서 시간을 보낼 수도 있고. 밧슈하고 나이브스도 한번 생각해 봐. 오늘 잠들기 전까지 열심히 생각하고, 내일 아침에 일어나서는 그 생각한 걸 하루 종일 하는 거지. 재밌을 것 같지 않아?

 

 

“또 뭔 쓸데없는 소리냐, 그건.”

“쓸데없다니! 그래도 한 번쯤 생각해 볼 수는 있잖아. 내일 이 별이 멸망한다면 어떨 것 같은지, 뭘 하고 있을 것 같은지.”

 

나 참, 정없긴. 중얼거리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드는 모습에 울프우드가 눈을 가늘게 떴다. 밧슈는 능청스레 킬킬댔다.

종족명 플랜트 추정 연령 미상의 저 동행인은 종종 이상한 화제를 끌고 오곤 했다. 소금물이 시야 끝부터 끝까지 펼쳐진 행성이나 온갖 기묘한 생물 같은 것들이었는데, 들어본 적은 고사하고 하나같이 상상해본 적도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얼버무리기를 어린 시절 보호자로부터 들은 이야기라던데…… 나이 지긋한 노인들이 내미는 사진 속에서도 지금과 별 다를 바 없는 얼굴로 웃고 있는 자식의 어린 시절이라고 해봤자 가늠이 안 되기는 마찬가지였다. 다만 저런 이야기를 나눌 때면 울프우드로선 쉽사리 볼 수 없는 얼굴로 바보같이 웃고 있으니 굳이 캐묻지 않을 뿐이다.

마침 주문한 술이 나왔다. 싸구려 유리잔에 담긴 노란 액체가 흐린 전등 빛 아래서 일렁였다. 후우, 길게 담배 연기를 뱉어낸 울프우드가 손에 든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맞은편의 밧슈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울프우드를 바라보는 채였다.

울프우드는 그 시선에 대꾸하는 대신 술잔을 손에 들었다. 체질 탓에 쉽게 취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꼭 취하지 않아도 술이 필요한 날이 있었다. 어째서인지 매번 사건의 눈이 되고 마는 빗자루에게 휘말린 오늘 같은 날이라면 특히. 원인 모를 불편함을 느끼면서 울프우드가 밧슈를 턱짓했다.

 

“너는 어떨 것 같은데, 빗자루.”

“음….”

“막지도 못 하고 사람들을 구할 방법도 없다면.”

 

그가 덧붙였다. 언제나 최악을 가정하는 건 그가 가장 잘 하는 일이다. 밧슈가 눈을 깜빡이다가, 곧 파란 눈동자를 굴려 시선을 피했다.

느지막한 밤, 마을 내 유일한 펍의 분위기는 시끌시끌했다. 온갖 사람들이 오늘 쳐들어온 도적떼 놈들이 어떻게 꽁지 빠져라 도망쳤는지 누구누구 댁이 어떤 상처를 훈장처럼 달고 살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떠들어댔다. 울프우드는 의자에 기대앉은 채 잔을 기울였고 밧슈는 술잔에 난 자글자글한 흠집을 만지작거렸다. 가볍게 물은 것치고 생각이 많은 모양이었다.

대답이 나온 건 조금 더 시간이 흐른 뒤였다.

 

“글쎄. 가진 돈을 다 털어서 도넛 사 먹기? 당장 내일이면 할 수 있는 게 없잖아. 하루면 누굴 만나러 갈 수 있는 시간도 아니고.”

“그럼 일주일 뒤라고 생각하던가.”

“…열심히 생각 중인데 그렇게 막 바꾸지 말아 줄래?”

 

억울하게 대꾸한 밧슈가 한결 누그러진 얼굴로 술잔을 들었다. 울프우드는 이제껏 두 사람이 지나온 마을들을 하나씩 떠올렸다. 그 마을에서 만나고 연을 맺고 다시 오겠다며 약속했던 이들을, 두고 떠났던 이들과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르는 이들을…….

 

“뭐, 모래바다 쪽에는 꼭 한번 찾아가야겠지. 루이다, 브래드… 고마운 사람들이나 날 오래 전부터 알았을 사람들이 정말 많으니까. 멀리까지 순식간에 이동할 방법이 있다면 가고 싶은 곳이 더 많지만, 그래. 남은 시간이 딱 일주일이면.”

“흐음.”

“그 반응은 뭐야.”

 

투덜거리면서 술을 들이키는 밧슈의 표정이 그리 좋지만은 않다. 어쩐지 불만스러운 얼굴로 반쯤 남은 잔을 바라보고 있나 싶더니 결국 말릴 새도 없이 남은 술을 모조리 털어 넣었다. 한 잔 더! 이어 외치는 말에 울프우드가 입을 벌렸다.

 

“아니, 아까는 빈털터리다 어쩐다 하더니 한 잔 더는 무슨 얼어죽을!”

“몰라, 안 되면 총알이라도 팔지, 뭐. 총알 한 발에 피자 토스트가 몇 갠데 설마 술 한 잔을 못 마시겠어?”

“이거 진짜 대책 없는 자식이네.”

 

사람 좋은 얼굴의 주인장은 금세 잔을 내왔다. 뭐 때문에 그렇게 속이 탄 건지, 받아 들기 무섭게 또 반을 비운 밧슈가 탕 소리 나게 탁자 위로 잔을 내렸다. 울프우드는 대략 한 시간 뒤 주정뱅이 하나를 등에 업고 방으로 올라가게 되리라는 미래를 예감했다.

한숨을 내쉰 울프우드가 담배 한 개비를 새로 꺼내 입에 물었다. 성냥 위로 한 차례 불꽃이 일었다가, 곧 연기가 되어 느릿느릿 흩어졌다. 밧슈는 여전히 알기 어려운 표정으로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탁자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괴었다. 노란 빛 아래 얼굴이 약간 붉었다.

 

“너는 어때, 울프우드.”

“어쩌고 말고 할 게 있겠냐. 당장 내일 죽느냐 사느냐가 총질 한 번에 걸렸는데 세계 멸망이고 나발이고.”

“아니, 그것도 맞는 말이긴 한데…, 하고 싶은 건 없냐는 말이지. 보러 가고 싶은 사람이나. 너도 나처럼 일주일이 있다면.”

“없다, 그런 거.”

“진짜? 한 명도?”

 

되묻는 말에 입을 다문 건 반사적인 반응이었다.

찰나의 정적 끝에 울프우드가 혀를 찼다. 늦었군. 밧슈가 변함없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이 앉은 테이블 위로 침묵이 흘렀다. 밧슈는 느린 동작으로 다시 술잔을 기울였고, 울프우드는 담배를 입에 문 채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잡아뗄 거였다면 망설여서는 안 됐다. 술주정뱅이 주제에 쓸데없이 눈치만 빨라서는….

 

“방금 뭔가 엄청 귀가 가려웠는데.”

“찔리냐?”

 

밧슈가 눈을 가늘게 떴고 울프우드는 대꾸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어쩐지 속이 드글드글 끓는 기분이 들었다. 저 기묘한 동행인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늘 이랬다. 신학서에나 나올 법한 소리를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걸 보고 있으면 십자가니 목사니 하는 건 사실 저 놈한테 더 어울리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아니, 굳이 따지자면 저런 놈은 신학서에 등장하는 쪽인가? 그런 주제에 오지랖은 오지랖대로 넓고. 비틀리게 조소한 울프우드가 남은 술을 단번에 털어 넣었다.

 

“…쓸데없이 착각하지 마라, 빗자루. 죽을 날 받아 놓고 찾아갈 바엔 차라리 안 가는 게 낫다고 생각할 뿐이다.”

“왜? 다시 못 만날지도 모르잖아.”

“차라리 다시는 못 보는 편이 나을 때도 있다는 걸 모르지는 않을 텐데. 그게 늙어 죽을 일 없는 놈한테만 해당되는 말 같냐.”

 

밧슈가 입을 다물 때였다.

자의건 타의건 같이 다닌 시간이 얼만데. 밧슈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온 세상에 하고 다닌다는 건 울프우드가 가장 잘 알았다. 정확히는 지킬 생각 없는 약속들을. 이상하게 오늘따라 술 맛이 쓰다. 깊어 가는 밤 주위 사람들은 신이 나서 소리 높여 노래를 부르고 술잔을 부딪치는데 두 사람 사이를 가로지르는 정적은 무겁기만 했다.

결국 울프우드가 머리를 헤집고 손을 치켜든다. 여기도 한 잔 더! 한 시간 후의 주정뱅이가 한 명 더 추가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살살 눈치를 살피던 밧슈가 먼저 억눌린 웃음을 흘리고 울프우드가 한쪽 눈썹을 불만스레 치켜들었지만, 다시 그 주제에 대한 말이 나오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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