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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맨즈랜드 by f3t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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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카엘의 눈 관련 개인적 날조 주의

태양이 지평선 너머로 모습을 감추고 느릿느릿 그림자가 드리우는 시간이다. 일과를 마치고, 다가오는 주말을 만끽하는 이들이 곳곳의 탁자에 모여 앉아 술잔을 기울이는 시간. 시뻘건 노을이 비치는 실내엔 금요일 저녁의 열기가 가득 감돌았다. 자자, 사양 말고 얼른 마시게. 주인장, 여기 럼으로 한 잔! 그리고 와하하하 하는 웃음소리가 한 차례. 소란스러운 와중에도 나이 든 바텐더는 요령 좋게 잔을 늘어놓고 술을 꺼내 내밀었다.

도어벨 소리와 함께 나무 문이 열린 건 완전히 해가 사라진 뒤의 일이다.

오래된 경첩이 요란스럽게 끼익거리고 덩치 큰 남자가 실내로 들어섰다. 곳곳의 테이블에 둘러앉은 사람 몇이 약간의 흥미를 띈 얼굴로 문가를 바라보다가, 곧 다시 고개를 돌렸다. 거 봐, 다음 손님은 덩치가 클 거라니까. 웃기지 마라, 애초에 이 시간에 손님이 올 리가 없다며 호언장담하더니.

그는 새카만 망토를 단단히 두르고 챙 넓은 모자까지 깊이 눌러 쓴 차림이었다. 얼굴을 약간 비스듬히 기울인 덕분에, 큰 덩치에도 얼굴을 자세히 살피기 어려웠다. 모자챙 위에서 형광등 빛이 흐물흐물 쏟아져 얼굴이며 회잿빛 머리칼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안쪽 테이블에 앉은 손님 두세 명은 호기심 어린 눈길을 던졌다가, 곧 기세에 눌려 아무것도 보지 못한 척 고개를 돌렸다. 하늘에선 두 개의 태양이 살인적으로 내려쬐고 밤에는 기이한 바람이 휘몰아치는 이 사막, 정말로 위험한 인간이 누구인지 판별하는 것 정도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므로….

남자는 닫힌 문 앞에 잠시 서 있다가, 천천히 가게를 가로질렀다. 낡은 마루 위로 큰 덩치가 움직이는데도 마치 유령처럼 옷자락이 사악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늙은 바텐더의 앞까지 도달한 남자가 의자를 뺴고 그 앞에 앉는다. 컵을 닦던 바텐더가 반응 없이 고개를 들었다. 

- 이봐, 독하지 않은 건 없나?

- 사막 한 가운데서 그런 걸 찾는군. 술에 물이라도 타 주면 되나?

바텐더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남자는 낮은 소리로 킬킬거리면서 웃다가,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카운터 위로 주먹을 올렸다. 달그락, 소리와 함께 그 손안에서 은화 하나가 떨어졌다.

- 그보다 주인장.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말이지…

- 묻고 싶은 것이라면?

- 이 동전의 주인. 혹시 누군지 아나?

실내의 모든 이들이 일제히 총기를 꺼내든 건 바로 그 순간이다. 일상의 열기와 희미한 소란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고, 살얼음판 같은 긴장감만이 가게에 떠돌았다. 다음 손님을 두고 내기를 하던 이들도, 구석에 앉아 새로운 손님을 흥미롭게 흘끔거리던 이들도, 술에 취해 탁자 위로 엎어져 있던 이들도… 치뜬 눈에는 목표물만이 정확하게 담긴 채다.

바텐더는 변화 없는 표정으로 컵과 냅킨을 내려놓았다. 이어 느린 동작으로 남자가 내려놓은 동전을 들어 살핀다. 탁한 빛 아래서도 불길하게 번뜩이는 은화는 과연 의심할 바 없는 진품이다. 게다가 그 위에 양각된 세 개의 십자가.

그 의미를 깨달은 바텐더가 희미하게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갈무리하며 동전을 다시 내려놓았다. 탁한 눈동자가 데굴데굴 굴러갔다. 그러거나 말거나, 태연한 얼굴로 카운터에 기대 앉은 남자는 고개를 기울이기만 했다. 모자챙이 묘한 각도로 그의 오른 얼굴을 가리고 남자가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었다. 포위당했다고는 여길 수 없는 여유다.

- 이거야 원, 환영 인사가 너무 격한데.

- 역대 최고의 퍼니셔에겐 오히려 누추한 편이지. ……복귀가 아주 늦었군. 이유가 있나?

- '내 친구'에게 일이 좀 있었거든. 처리하는 데 제법 걸렸지.

- 친구라면…….

바텐더가 동전으로 시선을 내린다. 남자는 대답 대신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은화를 뒤집었다. 송곳니 두 개. 바텐더가 맥 빠진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놀랍지도 않군. 뒤로 돌아서면서 손을 휘휘 내젓자, 남자에게 총구를 겨누던 인원 모두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도로 술잔을 들고, 부딪히고, 요란스럽게 웃고. 살인청부업자 조직의 정보국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평범한 술집으로 돌아간 모습에 남자가 주위를 한번 돌아본다. 바텐더가 큭큭 웃었다.

- 당신에겐 제법 우스운 광경이기야 하겠군. 우리 쪽에서도 성직자가 아닌 인원은 많지 않긴 해.

-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이유가 있나?

- 정보지, 정보. 성직자들은 못 얻는 정보를 얻을 수 있거든. 그보다 기록엔 채펠과 함께 출발한 걸로 나와 있는데.

바텐더의 눈이 한 차례 남자를 훑는다. 동행이 있는 모습으로는 안 보였다. 악취미적일 만큼 제자를 구속하던 스승의 흔적도 보이지 않았고.

- 갈 날이 머잖은 양반이긴 했지. 재능을 보는 눈은 좋은데 키우는 데엔 영….

중얼거리던 바텐더가 고개를 설레설레 젓다가, 짐짓 놀란 체를 했다. 어이쿠, 실언했군. 남자는 손을 휘휘 젓기만 했다. 신경 쓰지 않는다는 어투다.

그리고 그 행동으로부터 가게 내의 이들이 유추할 수 있는 사실이 몇 가지 있다. 하나, 아마도 역사상 가장 영광된 직위를 손에 넣었을 이 남자는 현재 자신의 스승과는 결별했고, 둘, 그는 그 사실에 큰 유감을 갖고 있지도 않으므로… 셋, 그가 본단으로 돌아갔을 때엔 비로소 자신의 세력이 필요하리라는 것. 그리고 어쩌면 지금 이곳의 그들이 그 세력이 될 수도 있으리라는 것.

아무리 넉살 좋게 웃고 떠들며 술잔을 나눈다지만 이런 오지에 처박힌 신세가 달가울 리 없다. 바텐더의 눈에 한순간 이채가 돌았다. 카운터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앉은 리비오는 그것이 탐욕임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과연 미카엘의 눈이 아닌지 금세 표정을 지우고 무감한 얼굴로 돌아갔지만, 그 눈빛마저 감출 수는 없는 법이다.

걸린 것 같지. 그래, 대어로군… 왼 얼굴의 문신을 쓸어내리면서 리비오가 턱을 괸다. 연녹색 눈동자가 천천히 굴러갔다.

- 그래서 말인데, 지금 급히 무기가 필요할 일이 생겨서.

- …퍼니셔는?

- 채펠을 죽인 놈에게 복수하느라.

담담히 뱉는 이의 양심이 따끔따끔 찔리는 중이리란 건 라즐로만 아는 일이다. 영 납득하지 못한 기색의 바텐더를 보면서 라즐로가 킬킬거렸다. 넌 역시 거짓말은 하지 마라. 집중 안 되니까 조용히 하는 게 어때, 라즐로. 그러게 그냥 내가 한다니까? 리비오는 듣는 체도 않았다. 애초에 그에게만 들리는 말이니 티 내는 것조차 안 될 노릇이다만은. 그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 그쪽에도 또 다른 퍼니셔가 있었거든. 그 뒤처리까지 제법 걸렸어.

- 또 다른 퍼니셔라면….

- 그 왜, 채펠을 그 꼴로 만들었던.

아하. 바텐더가 탄식한다. 폐쇄적인 그들 사이에서 제 발로 걸어 나간 '그'는 제법 유명한 이야기였던 탓이다. 스스로 스승을 쓰러뜨리고 도망친 자. 눈앞의 남자와는 다른 의미로 대단한 자였다. 그리고 진실이라면, 그들 눈앞의 남자의 몸값을 더 올리는 소식이기도 했고….

하지만 리비오는 그 맹목에 속이 울렁거린다. '그'가 실제로도 리비오와 라즐로를 능가했음은 그다지 중요치 않다. 그건 그에 대해 이야기하고 납득시켜야 하는 이 상황 자체에서 오는 감각이었다. 아마도 불쾌함일지도 모르고, 후회일지도 모르고. 어쩌면 연민일지도, 그리움일지도, 망설임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 지금 당장 쓸 수 있는 총이 있나?

리비오가 조금 성급하게 묻는다. 라즐로가 침착하라 속삭인다. 다만 눈앞의 은화에 눈이 먼 이들은 이변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어느새 두 사람의 주위엔 침묵이 감돈다. 곳곳에서 취객을 연기하던 자들마저 그를 주목하고 있었다. 경계가 아닌 기대의 빛으로.

웃는 얼굴의 바텐더가 카운터 아래에서 상자 하나를 꺼내 들었다.

- 물론 있지. 퍼니셔에 비할 바는 못 되겠지만…

리비오가 상자 속에서 총기를 꺼내 쥔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제법 손에 익은 무기다. 익숙한 감촉이 손에 감겼다. 급하게 쓰기엔 나쁘지 않을 걸세. 총기를 뒤집으며 샅샅이 살피던 리비오가 천천히 손을 내린다.

- 마음에 드나?

- 나쁘지 않군, 정말로.

눈을 가볍게 감았다가 다시 떴다. 결단은 늘 어려운 일이다. 이건 역시 내가 할게. 도와줘?

아니. 그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모자 그림자에 가려졌던 얼굴이 비로소 제대로 드러난다. 하얗게 번뜩이는 눈이 정확하게 목표물을 담긴 채다. 여러 차례의 총성이 연달아 밤공기를 가른다.

암살자니 뭐니 해봤자 결국 이런 꼴이라니까……. 괜히 투덜거리면서 리비오가 몸을 일으켰다. 숨소리도, 심장 박동도 남지 않은 실내에는 싸늘한 적막만이 흐른다. 발치에 떨어진 은화를 주워 든 그가 반파된 카운터 위에 총을 돌려놓는다.

- 과연 좋은 총인데. 잘 썼어.

듣지는 못하겠지만. 리비오는 들어왔을 때 그랬던 것처럼 가게를 가로질러 문을 열었다. 시간은 어느새 동틀 녘이다. 열린 문틈으로 늘어진 볕이 피가 낭자한 내부를 비춘다. 그는 잠시 그 자리에 서서 먼 동을 바라보다가, 다시 모자를 깊이 눌러 썼다. 긴 그림자가 얼굴 위로 드리워 표정을 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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