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우

오른손

소재제공 : 건뼝님

노맨즈랜드 by f3t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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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없는 떠돌이 성직자 신세라지만 제 가게를 꾸려나가는 장사꾼의 마음 하나 헤아리지 못할 리 없다. 하물며 자랑하던 테이블이 눈앞에서 산산조각난 식당 주인의 마음이라야.

소동이 잦아든 뒤 밖으로 나온 식당 주인의 얼굴 위로 황망한 감정이 역력했다. 모르긴 몰라도 부서진 가구의 원수를 갚아야 할지, 도주하던 범죄자를 붙잡은 2인조에게 감사해야 할지, 또는 더 큰 피해가 일어나지 않은 것에 안도해야 할지 갈팡질팡하는 모양이었다. 어쩌면 트럭이 날아다니고 총성이 연달아 울리던 조금 전의 싸움에 압도당했을 지도 모르고. 끙끙대던 그를 보고 넉살 좋게 낄낄대면서도 값을 받아내던 좀 전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아무리 살인청부업자라지만 저런 걸 보고도 못 본 체할 만큼 매정한 작자는 아니었다, 울프우드는. 그는 이미 멀어진 밧슈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머리를 벅벅 긁으며 주머니를 뒤집었다. 대강 긁어모았더니 겨우 지폐 한 뭉텅이가 됐다.

모로 봐도 테이블 값으로는 조금 과한 돈이다만, 특제 테이블이니 뭐니 자랑했으니 아마 크게 마진이 남지도 않을 테다. 손해 배상을 받을 줄은 몰랐는지 눈이 등잔만 해진 식당 주인에게 울프우드는 잠시 고민하다가 가볍게 덧붙였다. 정리하면서 술도 두 병 부탁하지. 얄팍한 주머니 사정으로 부리는 사치였다.

 

문을 열자 침대에 누워 있던 밧슈가 슬쩍 고개를 들었다가, 울프우드임을 확인하고는 다시 드러누웠다. 연기 속에서 한바탕 소동을 벌인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선글라스는 탁자 위에, 붉은 코트는 한쪽 벽에 벗어 둔 편안한 차림이었다. 울프우드는 잠시 그 자리에 선 채 방 안을 둘러보다가, 밧슈가 다시 고개를 들고 뭐 하느냐고 묻고서야 천천히 안으로 들어섰다.

하나 있는 탁자 위는 선글라스 외에도 지도, 총, 탄피 같은 잡다한 것들로 너저분했다. 가방에 들어 있던 걸 모조리 쏟아붓기라도 한 것 같다고 생각하던 울프우드는 정말로 밧슈의 낡은 천 가방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고개를 돌려 쳐다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변명하듯이 묘하게 시선이 어긋났다.

 

“가방은?”

“아, 오후에 마을 어린애들이랑 놀다가 좀 찢어졌어. 사과도 제대로 받았고, 내일 제대로 꿰매서 돌려주겠다고 하길래……, 그냥 급한 대로 탁자 위에 쏟아뒀지. 좀 너저분하긴 하지만.”

"대체 뭘 하고 놀았길래 그게 찢어져?"

"음, 현상수배범과 경찰 놀이 했지. 참고로 내가 경찰 역이었어."

 

600억짜리 경찰관이라니 거 참 드문 놀이 상대긴 하겠네. 울프우드가 헛웃음을 쳤고 밧슈는 여전히 누운 채 어깨만 으쓱였다.

울프우드가 다시 탁자 위로 시선을 옮겼다. 늘어선 소지품들 중에서 시선을 잡아끄는 건, 당연히 무방비하게 방치된 무기였다. 그 주인의 성정을 고려하건대 아마 당분간은 사명을 다할 일이 없을 총 한 자루. 그는 잠시 그 총이 주인의 손에서 장전되고 겨누어지는 모습을 떠올리다가, 곧 탁자 위에 술병을 올려두고 돌아섰다.

어느새 선명한 파란색 눈이 그를 보고 있었다. 울프우드는 눈을 피하는 대신 눈썹을 들어 올렸다. 기다렸다는 듯이 밧슈가 묻는다.

 

“어째 좀 늦는다 싶더니 갑자기 웬 술이래? 아까 봤을 때도 마시다 온 거 아니었어?”

“누구누구 구해주겠다고 박살 낸 테이블 값 물어 주면서, 겸사겸사."

"여비는 괜찮은 거 맞지?"

"글쎄다, 그건 다음 마을에 가 봐야 알겠는데. 그래도 하루쯤은 괜찮을걸. 그래봤자 이젠 무를 수도 없는데, 기왕 이렇게 된 거 같이 한잔하지. 정말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술로 달라고 한 참이거든.”

 

울프우드가 턱짓하며 잔 두 개를 흔들었다. 억센 손안에서 유리잔이 서로 부딪혀 달그락거렸다.

밧슈는 침대 위에 누워 잠시 눈동자를 굴리다가, 이내 몸을 일으켰다. 침대에서 내려오려 다리를 내리는 모습에 술의 라벨을 뜯던 울프우드가 손을 내저었다. 그대로 있으라는 뜻이었다. 이거 치우는 것도 일인데, 그냥 침대에서 먹지. 그 말에 탁자의 모습을 다시 확인한 밧슈가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울프우드는 정장 겉옷을 대강 벗어다 의자에 걸쳐 두고 술병을 기울였다. 조르륵 경쾌한 소리와 함께 잔이 차오르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알싸하면서 독한 향이 풍겼다. 과연 좋은 술이다.

 

“목사님이 따라 주는 술이라니, 이거 감개무량한데.”

“관둬, 술 마실 때마다 그 소리 할 셈이냐.”

"어, 못할 건 없는데?"

"이제껏 네가 먹은 술값부터 사고 친 거 물어주느라 나간 경비까지 싹 토해내고 싶으면 해 보시던가."

 

에이. 장난이지, 장난. 밧슈가 침대 위에 얌전히 앉아 웃음을 터뜨렸고 울프우드는 눈을 흘기면서도 잔을 건넸다. 밧슈는 변함없이 웃는 얼굴로 받아 든다.

 

 

간만의 술자리는 제법 오래 이어졌다. 한참 말 없이 병만 기울이는 분위기를 견디다 못해 밧슈가 카드 한 벌을 찾아온 덕분이었다. 아마 과거 이 방에 머물렀던 투숙객 중 누군가가 두고 간 모양이었는데, 제법 고급품인지 오래 방치된 태가 나는데도 차르륵 고운 소리를 내며 섞였다. 밧슈였나 울프우드였나, 누군가가 이렇게 오래된 걸 아직도 안 치운 거냐고 숙소의 위생 상태에 의문을 제기하기는 했지만… 술에 취해 카드 게임을 즐기는 둘에겐 아무래도 좋은 이야기였다.

다만 카드 한 벌이 생겼다고 해도 밧슈와 울프우드가 아는 카드 게임이 그리 많지 않았던 까닭에, 카드는 금세 한쪽에 쌓였다가 다시 둘의 손으로 나누어지기를 반복했다. 결과는 밧슈가 이길 때도 울프우드가 이길 때도 있었는데, 게임이 끝날 때마다 승패와는 관계없이 한 잔씩 들이켰더니 술잔도 금세 비워지고는 했다.

얼굴이 벌게진 둘이 각자 앞으로도 도박은 절대 하지 말아야지, 하고 제 운에 대해 고찰할 무렵에는 술 두 병이 모두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마지막 남은 술을 한 방울까지 털어 마신 밧슈가 잔을 흔들었다. 영락없이 술주정뱅이 꼴이라 울프우드는 낄낄거렸다. 밧슈는 능청스럽게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침대 위에 흩어진 카드를 모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늘어져라 하품한 울프우드가 문득 창문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간만의 여유를 부린 탓일까, 모르는 사이 새벽이 깊었다. 가장 오래 노맨즈랜드의 밤하늘을 밝히는 다섯 번째 달마저 지평선에 걸린 시간이다. 달 표면에 그려진 거대한 구멍이 기묘하고도 섬뜩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것이 무엇의 흔적인지는 누구보다도 울프우드가 가장 잘 안다.

그가 가볍게 혀를 찬다. 기껏 오른 취기가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카드를 정리해 다시 있던 자리에 올려두고 돌아온 밧슈가 고개를 기울였다. 뭐야, 왜? 울프우드는 대꾸 대신 손만 휘적였다. 침대가 가볍게 뒤로 기울어졌다. 밧슈가 울프우드를 등지고 앉은 탓이다. 창문에서 쏟아지는 달빛에 방바닥에 깔린 붉은 러그 위로 길게 두 명분의 그림자가 졌다. 울프우드가 흘긋 뒤를 돌았지만, 음영에 가려진 말간 얼굴은 무슨 표정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러니까, 그는 그의 동행인이 얼마나 위험해 빠진 작자인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소년기에는 줄라이를 날려 버린 흉악범의 악명을, 미카엘의 눈을 뛰쳐나와서는 피프스 문 사건을 목격했고 불과 얼마 전에는 인간 태풍 밧슈 더 스탬피드에게 내재된 위험을 눈앞에서 목도했다. 완전히 회복되지 못해 흐린 시야 속에서도 더없이 고압적이고, 흉악하기 짝이 없던 그 형태. 그 힘.

하지만 그런데도 그가 그에게 느끼는 감정이란 온전한 두려움과는 거리가 먼 것이라.

방 안에 짧은 정적이 감돌고, 울프우드가 깊이 한숨을 내쉰다. 가볍게 눈을 내리감고, 상체를 뒤로 기울이고… 그리고 마침내 등에 서늘한 온기가 닿는다. 갑작스러운 접촉 탓인지 맞닿은 몸이 흠칫 굳었다.

"… 울프우드?"

"됐으니까."

 

뒤로 짚은 손에 거친 손가락이 걸렸다. 기계로 이루어진 손이 아닌 인의 손이었다. 병기의 방아쇠가 되는 손이자 달에 구멍을 뚫은 손이고… 동시에 인간을 죽이지 않는 손이다. 어떻게든 죽이지 않겠다고 발버둥 치는 손.

울프우드가 눈을 떴다. 눈앞으로 쏟아지는 시린 달빛은 눈부시고, 등에 닿는 온기는 약간 서늘해 못내 어색함이 가실 줄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태풍이, 밧슈 더 스탬피드가, 빗자루가 어떤 '사람'인지 그가 알기 때문에. 등이 맞닿았을 때의 온기를 알아버렸기 때문에, 그는 인정하고야 마는 것이다.

 

그는 밧슈 더 스탬피드를 잊지 못하리라고.

두려워하면서도 끝내 외면하지는 못할 거라고.

 

 

달의 뒷면처럼 그림자에 잠긴 밧슈는 잠시 고개를 돌려 울프우드를 바라보다가, 곧 다시 어둠 속으로 시선을 던졌다. 맞닿은 신체로부터 숨과 심장 박동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다른 플랜트와 접촉했을 때의 느낌과는 다른 감각이었다.

인간은 그들과는 많이 다른 생물이었다. 언어가 없는 대신 접촉, 혹은 지근거리에서의 직접적 의사 교환을 통해 소통하는 플랜트들과는 달리 인간은 언어를 필요로 했다. 의사를 말로 표현하고 서로 나누는 과정을 거쳐야 겨우 마음의 일부를 통할 수 있었다. 그마저도 꼭꼭 감춘 진심이나, 가면처럼 웃는 얼굴 밑의 내심은 알기 어려웠으며 때로는 마음이 변질되나 왜곡되기도 했다. 그렇게 숨기고 달라진 마음으로 서로 다투고, 싸우고, 죽이고… 그러면서도 서로 대화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생물.

 

하지만 어쩐지 지금만큼은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만 같다. 그리고 그건 그가 플랜트임과는 관계없는 사실일 것이다.

플랜트의 소통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시간과 이해가 촘촘히 쌓인 신뢰, 의지, 진심 같은 것들. 서로 배신하고 싸우고 다투며 말로서 자신을 표현해야 하는 자들만이 갖는 것. 아마도 지금 그가 느끼는 감정도 그런 것이겠지. 그리고 어쩌면, 그가 자신을 의지한다는 것이 기쁜 걸 수도 있고.

 

그림자 속에서 눈을 감은 밧슈가 조심스레 손을 움직여 그 손을 조금 더 겹친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서로 기댄 등과 얽힌 손가락의 온기가 선연하다. 울프우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밧슈 또한 입을 열지 않았지만… 밧슈는 울프우드 또한 그걸 알고 있으리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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