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우

변하지 않는 것

노맨즈랜드 by f3t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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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아있다는 것 후일담. 먼저 읽고 감상해주세요. https://pnxl.me/e4ntyn

이른 아침, 그리운 꿈에서 깨어난 밧슈는 낡은 나무 천장을 올려다보면서 생각했다. 다녀오고 싶은 곳이 생겼다. 지금 당장.

 

그는 커튼을 걷는 것도 잊은 채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갈아입을 옷가지, 칫솔, 간단한 식량과 물, 그리고 정말, 정말 혹시 모를 상황을 위한 총까지. 그의 오랜 친구는 제법 오랫동안 서랍 깊은 곳에서 잠들어 있었던 까닭에 후 바람을 불었더니 뿌옇게 먼지가 일었다. 낡은 커튼 너머로 희미하게 비치는 햇빛 아래서 흰 먼지들이 천천히 나풀거렸다. 밧슈는 점차 가라앉는 먼지를 한동안 바라보다가 챙기던 짐을 발치에 내려놓았다. 총을 탁자 위에 올려두고는, 선반 안쪽을 더듬어 솔과 윤활유를 찾아냈다.

그가 정착한 이 마을은 정말로 작고 평화로운 곳이라 총을 쥐지 않은 지는 제법 오래 된 참이었다. 그런데도 손에 잡히는 감각이 못내 친근해서… 가슴 한쪽이 울렁거리는 기분이었다. 총을 낯설어하는 건맨이라니, 그건 그거대로 이상한 말이긴 했지만.

하지만 그는 지금 당장 가고 싶은 곳이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랜 친구의 힘을 조금 빌려야 했고. 되도록 그런 일이 없었으면 하는 한편, 세상 일이 그렇게 형편 좋게 흘러가지 않는 사실도 밧슈는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바라건 바라지 않건 이게 필요한 순간이 오고 마리라.

그는 깊이 숨을 들이켰다가 내쉬고, 천천히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뒤이은 건 눈을 감고도 할 수 있을 만큼 익숙해진 과정이었다. 한순간 잊어버렸을까 걱정한 것이 무색할 만큼 손가락이 알아서 움직였다. 약실과 손잡이를 분해하고, 총열을 닦아내고. 익숙하면서 낯선 금속음과 기름 냄새가 방 안을 채운다.

 

마지막으로 홈에 다녀온 지 벌써 몇 년이 흘렀다. 유령이 두 번 다시 밧슈의 앞에 나타나지 않은 지도 몇 년이 지났다는 뜻이었다.

부상을 입고 깨어난 새벽, 친구의 유령과 헤어진 날. 밧슈는 이스트 디셈버로 향하던 걸음을 돌려 정처 없이 걷기 시작했다. 나이브스가 심고 떠난 나무를 보았고 옥토번을 지나쳤다. 그는 발길 닿는 대로 걸었고 잡히는 대로 버스와 샌드스팀에 올랐다. 아주, 아주 오랜만에 줄라이의 풍경도 보았고, 용진성, 토님 타운, 메이 시티까지. 그리고도 많은 장소들을 지나쳤다.

퍼니셔가 세워진 그 곳이 아니라면 어디든 좋았다. 밧슈는 울프우드가 없을 만한 곳을 찾아다녔다. 물론 그다지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어디를 가던 과거의 기억이 모래폭풍처럼 불어닥쳤다. 발목을 휘감고 그를 붙들었다. 그 긴 삶에서 그 사람이 차지한 시간은 기껏해야 2년이었는데. 기나긴 사람의 인생과 그보다 긴 밧슈의 삶에서, 고작 2년하고도 몇 달이었는데도…. 밧슈의 얼굴 위로 씁쓸한 미소가 번진다.

 

그는 멈추지 않고 손을 움직였다. 꽤 오랫동안 관리하지 않은 데다, 먼지 쌓인 서랍 안쪽에 방치해둔 탓인지 손 끝에 걸리는 감각이 제법 뻑뻑했다. 이거 총알이 제대로 나가기나 하면 다행이겠는데. 이쯤 되니 총을 수리해줬던 브랜든에게 미안해질 지경이었다. 밧슈는 조금 더 고개를 숙이고 정비에 열중했다.

 

하지만 밧슈가 온 별을 헤메건 말건 여전히 시간은 막을 길 없이 흐른다. 이번에도 그 시간이 많은 걸 해결했다.

목적 없이 별을 떠돌던 그는 한 마을에 정착했다. 십자가를 짊어진 목사도 인간 태풍도 알지 못하는 마을이었다. 스미스나 엘릭스가 그랬던 것처럼 다른 이름을 쓰기 시작했고, 더는 머리를 세우지 않았다.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으니 총을 들 일도, 붉은 코트를 입을 일도 점점 사라졌다.

번듯한 일자리도 생겼다. 아침 여덟 시부터 오후 다섯 시까지. 광장 근처의 카페에서 커피를 내리거나 카운터를 지키는 일을 하게 됐다. 처음에는 굉장히 서툴렀는데, 몇 달이 지나자 꽤 호평을 받을 만큼 발전했다. 카페 일을 마치면 광장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에게 어울렸다가 밤이 되면 집으로 돌아와 신문을 읽었다.

신문에는 지구와의 협업이 어쩌고 지오플랜트가 어쩌고, 어느 도시의 플랜트들이 어쩌고 하는 이야기가 주로 나왔다. 종종 루이다의 사진이 실리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런 날이면 꼭 사진 곁에 브래드나 익숙한 얼굴의 사람들도 같이 찍혀 나오곤 해서 그는 웃음을 터뜨리곤 했다. 이렇게나마 그들의 안부를 확인할 수 있음은 좋은 일이었다.

그리고도 남는 시간에야 그는 울프우드의 생각을 했다. 문명이 지고 다시 서는 동안에도 잠들어 있었던 사람들을 바라보던 유령에 대한 생각을, 그리고 살아있다는 것과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생각을.

이 모래별에서 백 오십 년을 헤매고도 찾지 못한 물음에 대한 해답을.

 

밧슈가 천천히 솔을 내려놓았다. 그의 손에는 다시 깔끔해진 총이 들려 있었다. 전문가처럼 완벽한 솜씨는 아니었으나… 짧은 여행을 위해서라면 이 정도로도 충분하리라. 느릿느릿 눈을 감은 밧슈가 총을 들어올렸다. 차가운 총신이 이마에 닿았다. 짙게 밴 초연 냄새가 희미하게 코끝을 스친다.

저번에는 그가 자신을 찾았으니 이번에는 자신이 그를 찾을 차례였다. 짐 깊숙이 총을 집어넣은 밧슈가 몸을 일으켰다.

 

 

“아, 나왔다!”

문을 열고 나섰더니 집 앞에서 공을 굴리며 놀던 아이들 몇이 그를 돌아봤다. 마을에서 알아주는 장난꾸러기들은 평소와 다름없이 힘 있는 동작으로 밧슈에게 달려들었다. 미래를 예감한 밧슈가 잠깐, 잠깐! 하며 급히 만류했지만, 신난 아이들이 그걸 들을 리가. 그는 으아악 꼴사나운 소리를 내며 뒤로 넘어갔고 우당탕탕 요란한 소리와 함께 한 차례 흙먼지가 일었다.

역대 최악의 현상범을 훌륭하게 제압해낸 아이들이 까르륵 웃었다. 아이들에게 깔리고 매달리고 끌어안긴 채 밧슈가 손바닥으로 바닥을 두드렸다. 항복, 항복! 항복이라니까! 평소와 다름없는 리벳 타운의 일상이었다. 맞은편 골목에서 힘 넘치는 아이들에게 습격당한 마을 청년의 모습을 바라보던 꽃집 아주머니가 깊이 한숨을 내쉬고었다. 이놈들아, 항복이라잖니! 그만 놓아줘! 호통 소리에 아이들이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리면서 골목 사이로 사라졌다. 고개를 내저으면서 느긋한 걸음으로 밧슈에게 다가섰다.

“나 참, 적당히 혼이라도 내는 건 어때? 매번 그렇게나 시달리면서.”

“아하하, 아녜요. 아이들이 활기차면 좋은 거죠. 저도 보고 있으면 즐거운걸요.”

“그 넘치는 활기를 이상한 데다 쓰고 있으니 문제지. 성격도 좋긴.”

옷에 붙은 먼지를 털어낸 밧슈가 일어섰다. 얼얼한 등허리를 슥슥 문지르는 채였다. 그제야 그의 차림을 훑은 아주머니는, 성격 좋은 마을 청년이 제법 기묘한 차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노란 선글라스, 붉은 코트에 제법 묵직해 보이는 짐까지. 꼭 이 마을에 처음 오던 날 같은 풍경이었다, 그는. 꼬질꼬질하다 못해 거무죽죽하던 그 때에 비하자면 지금은 표정도, 차림도 훨씬 나았지만.

“묘한 차림이네. 여행이라도 다녀오게?”

“잠깐 친구를 좀 만나러 다녀오려고요. 아마 몇 달 정도 걸릴 거에요.”

“몇 달? 이런, 헤럴드 씨가 아쉬워하시겠다. 당분간 못 나온다고 말은 해놨고?”

헤럴드는 밧슈가 일하는 카페의 점장이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서야 밧슈가 아차 한 표정을 지었다. 당장 오늘 아침에 갑작스럽게 떠나기로 결정한 마당에 미리 말할 시간 같은 게 있었을 리가 없었던 탓이다. 밧슈가 어색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젓자 아주머니가 혀를 끌끌 찼다.

“얼른 가서 얘기해. 당분간 정신없이 바쁘시겠군. 뭐, 그 영감 일은 내 알 바 아니고. 조심해서 다녀와.”

“그럼요, 꼭 그럴게요. 그동안 아주머니도 건강히 잘 지내세요.”

“그 때처럼 장례식이라도 다녀온 표정으로 돌아오지 말고!”

걱정 어린 말에 밧슈가 웃음을 터뜨렸다. 죽은 친구를 만나러 가는 셈이니 장례식이라는 말이 틀리지는 않을 텐데. 휘휘 손을 내젓고 그대로 돌아서서 골목을 떠나려던 밧슈의 걸음이 문득 느려졌다. 가판대에 줄을 맞춰 늘어선 꽃 화분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꽃.

“참… 아주머니, 혹시 가게에서 조화도 파세요?”

 

 

목적지는 확고했고 시간을 지체할 필요는 없었다. 갈 곳과 돌아올 곳이 확실한 마당에 굳이 길을 돌아갈 필요도 없었고, 이번에는 의견을 묻거나 취향을 따져야 할 동행인도 없었다. 우연한 기회로 디셈버로 향하는 샌드스팀을 타고 난 뒤론 지도를 펼칠 이유도 사라졌다. 동그란 창문 너머로 일정하게 이어지는 사막 풍경을 내다보면서 밧슈가 할 일이라고는 도착까지 남은 시간을 가늠하는 것 정도가 전부였다.

샌드스팀의 곁에서 함께 사막을 건너던 카라반이 도적단에게 습격당해 심장을 졸이는 일이 있긴 했지만, 다행스럽게도 사태는 사망자 없이 종료되었다. 밧슈가 개입할 새도 없었던 건 물론이고 그가 총을 뽑아야 하는 상황도 오지 않았다. 최대한 조용하고 무탈하게 여행하길 바랐던 그에겐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사막을 가로지르는 배 위의 일과는 간단했고, 시간은 예상했던 것보다 빠르게 흘렀다. 마을을 나오기까지 꽤 단단한 각오가 필요했던 것치고는 짧은 여정이 되고 말았다는 뜻이었다.

느지막한 오후에 디셈버에 도착해, 동쪽으로 향하는 버스를 잡아 타고 달리기도 꼬박 네 시간. 마침내 그가 낯익은 도시에 도착했을 때 세상은 이미 완연한 밤이었다. 끼익거리는 불안한 소리와 함께 버스의 문이 열렸다. 밧슈는 밝은 얼굴로 네 시간 사이 친해진 옆 좌석의 제임스와 작별하고, 운전 솜씨가 그다지 좋지 못했던 버스 기사에게 값까지 치른 후에야 버스에서 내렸다. 등 뒤에서 다시 요란스러운 기계음과 함께 문이 닫히는가 싶더니 버스는 곧 그를 뒤로하고 밤의 사막으로 뛰어들어갔다.

그는 점점 멀어지는 네모난 형상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주위는 고요했고 발밑에서 푹신한 모래의 감촉이 느껴졌다. 서늘한 바람이 기분 좋게 목덜미를 휩쓸고 지나가는 걸 느낀 밧슈가 다시 눈을 떴다.

오래간만의 방문이었고, 밧슈가 정착해 직업을 얻고 인간 태풍이 아닌 그저 평범한 마을 청년으로 살아가는 사이 이곳도 많이 변한 모습이었지만… 굳이 도시를 헤집어 목적지를 찾을 필요는 없었다. 구멍 뚫린 달의 희미한 빛 아래, 우뚝 선 종탑과 그 꼭대기에 놓인 십자가의 형상이 망막에 맺혔다. 밧슈는 이전과는 사뭇 다른 교회의 풍경을 둘러보면서, 그 쪽을 향해 묵직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가장 많이 변한 모습이라면 역시 정원이었다. 지구와의 협력이 계속되면서 도시를 중심으로 지오플랜트들이 자리를 잡았다더니, 아마 이곳도 그 영향권에 든 모양이었다. 온통 모래로 덮였던 정원에는 푹신한 잔디가 깔린 채였고, 담장처럼 교회를 둘러싼 나무의 가지에선 색색의 꽃이며 열매가 부드럽게 흔들렸다. 마당 구석에 마련된 자그마한 텃밭에서는 동그란 토마토가 발갛게 익어 가고 있었다. 쭈그리고 앉아 주렁주렁 달린 토마토를 잠시 들여다보던 밧슈가 몸을 일으켜 다시 걷기 시작했다.

어쨌거나 좋은 변화임은 틀림없었다. 이 별에서 인류가 자립할 길이 늘어난다는 건 플랜트에게나 인간에게나 긍정적인 징후일 테니까. 그래, 이거면 된 거였다. 급하게 모든 것이 바뀔 필요는 없었다.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하리라. 쓸데없이 낙관적인 생각긴 해서, 밧슈는 제 풀에 조금 웃었다.

정원이 그랬듯이 그가 목적했던 무덤의 근처도 많이 변한 모습이었다. 걸음을 늦추다 완전히 멈춰 선 그는 가장 먼저 품을 뒤져 담배 한 갑과 라이터를 찾아냈다.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문 채 불을 붙여 첫 모금을 깊이 들이켰다. 영 익숙해지기 힘든 감각이 폐부를 깊이 채웠다가 이내 다시 빠져나갔다. 대체 이런 걸 무슨 맛으로 피우는 거야, 너는. 작은 소리로 투덜거린 밧슈가 담배를 조심스레 무덤 위에 올려놓았다.

“이런 건 아이들이 보면 안 좋기야 하겠지만, 뭐. 지금은 밤이니까.”

어깨를 으쓱인 밧슈는 담배가 바람에 날려 풀 위로 떨어지지 않도록 돌로 괴어 놓고 나서야, 기억과는 조금 다른 무덤의 모습을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모래에 깎인 곳이 늘어난 덮개석의 십자가 조각을 조심스레 매만지다가, 오른쪽으로 조금 삐뚤어진 퍼니셔도 똑바로 세웠다. 그리고는 그 십자가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시원한 바람이 다시 멀리서 불어왔다. 무덤 주위로 만발한 흰 꽃이 살랑살랑 손목 언저리를 간질였다. 한 눈에 보기에도 신경 써서 가꾼 듯한 꽃이며, 무덤 위에 가지런히 놓인 흰 국화까지.

“너무 정원 한복판에 묻어 놓은 건 아닐까 싶었는데… 괜찮아 보여서 다행이네.”

속삭이듯이. 조용한 목소리로 중얼거린 밧슈가 비로소 고개를 들었다. 그림자 같은 형체가 십자가 위에 앉아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새카만 머리카락 너머로 희끗한 달이, 캄캄한 밤하늘이 비쳐 보였으나… 그는 어렵지 않게 색채 옅은 눈동자가 향하고 있는 곳을 알아차렸다. 단번에 시선이 맞닿았고 밧슈가 마침내 웃는다.

“오랜만이야, 울프우드.”

간만의 재회였다.

 

 

반투명한 그 형체는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밧슈의 반응을 살피는 건지, 한참동안 몇 피트 위의 그 자리에서 그를 내려다보았다. 밧슈도 마찬가지로 고개를 치켜든 채 그 모습을 가만히 올려다봤다. 색채 옅은 유령의 눈과 색을 잃지 않은 파란 눈이 서로를 샅샅이 훑는다. 정적이 길게 이어졌다.

먼저 고개를 돌린 건 유령 쪽이었다. 울프우드는 못내 불만스러운 얼굴로 몸을 일으키더니 훌쩍 십자가에서 뛰어내려 밧슈의 옆으로 내려섰다. 그가 움직이는 데엔 그 어떤 소리도 동반되지 않았고, 밧슈는 시선만 움직여 울프우드를 좇았다. 밧슈 옆에 날듯이 내려앉은 울프우드가 고개를 까딱였다. 할 말이 있으면 하라는 뜻이었다.

밧슈의 입이 댓발 튀어나왔다.

“몇 년 만에 보자마자 한다는 소리가 겨우 그거야? …아, 성가시다는 얼굴 하지 말고!”

밧슈가 울프우드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한숨을 내쉬었다. 울프우드는 그런 자신의 친구를 바라보다가 팔짱을 꼈다. 변명할 말이 없는 건 아니었으나 굳이 입을 열고 싶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물론 빗자루가 무탈히 살아가고 있음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는 자신을 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고, 은인이었으며 친구였다. 소중한 인연이었고 한편으로는, 그를 다시 살아가고 싶게 만드는 사람 중 한 명이기도 했다. 살아있는 것처럼 느끼게 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멀리서 다가오는 붉은 형체를 보자마자 안도감이 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제 와서? 싶은 생각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울프우드에겐 아직도 그 날이 선명했다. 급박한 순간 어쩔 수 없이 그를 향하던 새파란 시선과, 두 사람이 동시에 예감한 결말과… 그리고 폭발에 휘말린 그의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던 기분 같은 것들이. 이 모든 것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한 적은 없었지만 밧슈라고 그런 심정을 이해하지 못한 것도 아니었을 테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

의문스러워하는 울프우드의 표정을 알아차린 건지 밧슈가 고개를 흔들었다.

“이제 와서랄 것도 없잖아. 그냥 온거야. 저번에 왔을 때 리비오도, 다른 아이들도 다시 오라고 했으니까 슬슬 한번 얼굴 볼 때도 된 것 같아서. …아, 진짜거든? 그 먼 곳에 날 두고 가버린 유령한테 할 말 같은 거 없거든?”

짧은 침묵. 씨알도 안 먹힐 말이란 걸 밧슈도 알고 울프우드도 알고, 온 세상이 다 알았다. 애초에 리비오나 고아원의 아이들이 목적이었다면 굳이 이 시간을 맞춰 도착하지도 않았을 테고, 도착했다 해도 교회로 먼저 향했을 터였다. 정원을 가로질러 십자가 앞에 주저앉는 게 아니라. 밧슈가 입을 다물었다. 울프우드는 표정을 풀지 않았다.

사실 많았다. 할 말도 많고, 하고 싶은 말도 많고. 다만 울프우드가 예상했듯이 밧슈도 울프우드가 떠났던 이유를 이해하기 때문에 섣불리 입을 열지 못할 뿐이었다. 늘 진심을 담아 이야기하는 건 백 육십 몇 년간 밧슈가 해 온 일이었는데 이상하게, 유령의 흰 눈을 바라보고 있으니 좀처럼 입이 떨어질 줄을 몰랐다. 남들보다 긴 삶이 무색하게도 그랬다. 밧슈가 입을 열기까지는 조금 더 시간이 걸렸다.

“…별 이유 없이 찾아왔다는 건 진짜야. 네가 보고 싶어서 왔어. 애초에 여기 오기로 결정한 것도 충동적이었는걸. 꿈을 꿨거든. 다른 사람들하고… 네가 나오는 꿈을.”

울프우드가 밧슈를 바라보고 있었다. 밧슈는 가볍게 눈을 내리감고 지난밤의 꿈에 대해 떠올렸다. 꿈에서는 오랜만에 그가 떠나보낸 사람들이 나왔다. 렘과 시드의 함선에 타고 있던 많은 사람들, 줄라이의 사람들, 건호건즈와 이르게 삶의 끝을 맞이하고 말았던 사람들이. 당연히 울프우드도 있었다. 변함없이 그 사람들 사이에 섞여, 한 겹 벽 너머에서 밧슈를 바라보고 있었다. 변하지 않는 모습으로. 

그러므로 꿈에서 깨어난 밧슈는 울프우드의 죽음에 대해 상기한다. 차가운 온도, 뻣뻣한 손가락과 흩날리던 종잇조각, 종소리, 손끝에서 느껴지던 메마른 흙의 감촉에 대해서 떠올린다. 홈에서 울프우드가 했던 이야기에 대해서도 떠올렸다. 차가운 잠에 빠져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들과 움직이되 살아있지 못한 유령. 살아있다는 건 뭐지? 살아간다는 건 뭐지?

모르겠다. 밧슈에겐 여전히 너무 어려운 문제였다. 죽지 못해 산다느니 살아가는 이유를 모르겠다느니 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사람과 삶에 대한 이야기였다. 죽은 사람을 대하는 방식에 대한 이야기였다.

“사실 아직 잘 모르겠어. 살아있다는 게 뭔지. 나한텐 너무 어려운 문제더라. 뭐, 너라면 답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몰라도 괜찮지 않나 싶은 생각도 들더라고. 그거 때문에, 네 곁에 있으면 안 되는 이유도 없지 않나 싶고.”

예전에는 나보고 겁쟁이다 뭐다 하더니, 울프우드도 그 겁쟁이 다 된 거 아냐? 덧붙이듯 중얼거렸더니 즉시 울프우드가 눈을 가늘게 떴다. 다만 달리 반박할 말은 없는 모양이라 밧슈는 나직이 웃음을 터뜨렸다.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네가 걱정하는 게 뭔지 알아. 나도 저번과 같은 일이 또 생기는건 피하고 싶고, 사실 이런 말도 지금이니까 할 수 있는 말인걸.”

잔인한 이야기였지만 울프우드의 말이 맞긴 했다. 울프우드를 직접 묻은 게 바로 밧슈였다. 그게 모든 일의 전제가 되어야 했다. 변하지 않는 과거면서 현실이었고 그 사실을 외면해서는 안 됐다. 두 사람 사이에 거리가 필요한 건 그 탓이었다. 울프우드는 이러니저러니 해도 죽은 사람이었고 밧슈는 산 사람이기 때문에. 이제는 기억나지 않는 그의 목소리에 대해 생각하면서 밧슈가 말을 이었다.

“그래도 우리 탓은 아니었잖아. 내가 아직까지 살아남은 것도, 네가 죽었는데도 아직 여기 있는 것도, 그 때 내가 다쳤던 것도. 그냥 조금 더 시간을 보내고 싶었던 것 뿐이니까. 내 탓도 아니었고 네 탓인 것도 아니었어. 상황이 그랬던 거지. 그러니까, 이런 순간까지 무서워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시간은 정말 많은 것을 해결했다.

밧슈는 여전히 종종 꿈에서 악몽을 맞이했지만 더이상 원인 모를 두려움에도, 좀 더 신중했어야 한다는 자책에도 휩싸이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겁쟁이였고, 울프우드가 던진 물음에 대해 완전히 결론 내리기까지 한 번의 세기가 더 필요할지도 몰랐다. 그는 울프우드의 심정을 짐작했지만 완전히 이해하진 못했다. 유령이 느끼는 시간의 흐름이 어떤지, 허공을 떠다니는 감각과 세상을 떠나보내는 기분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울프우드가 두려워하는 이유를 알았다. 그 정도는 그 날 새벽녘의 창가에 서 있던 유령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누군가를 휩쓸리게 하고 싶지 않아 도망쳤던 건 밧슈가 늘 해온 일이었다.

그렇게 도망친 밧슈를 잡아온 게 울프우드였다. 그 나름의 필요에 의한 행위였을지언정 이름도 모습도 내다버리고 엘릭스로서 살아가던 그를 밧슈 더 스탬피드로, 빗자루로 끌어당긴 게 울프우드였다.

그러니 이번에는 밧슈의 차례다.

그가 살아있는 사람이건 반투명한 유령이건 그는 변함없이 울프우드였다. 밧슈는 울프우드가 보고 싶었고, 그의 생에 다시 없을 친구가, 완전히 떠나보내지 못한 유일한 사람이, 꿈의 벽 너머와 현실 양 쪽에 존재하는 사람이 그리웠다.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밧슈가 할 말이란 그것뿐이었다. 다른 건 상관없었다.

“나도 오래 머물지는 못해. 자주 오지도 않을 거야. 이제 와서 하는 이야기지만, 남반구의 작은 마을에 정착했거든. 아마 너도 안 가본 마을일걸? 그 마을에서 집도 구했고 일자리도 생겼어. 커피도 제법 잘 내린다고 인정도 받았다니까.”

울프우드는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뭐, 그렇게 됐어. 나도 내가 정착한다면 홈 쪽에서 할 줄 알았는데 말이지…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사는 것도 괜찮더라고. 울프우드가 눈짓으로 묻는다. 그 때처럼? 밧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처럼.

“거창하게 말하긴 했는데, 그냥… 가끔 이렇게라도 보면 좋겠다는 말이야. 네 말대로 같이 여행하는 건 힘들겠지. 그건 나중에 하자. 대신 이렇게 볼 때는 피하지도, 저번처럼 말없이 사라지지도 말고. 이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이 교회라면 내가 다칠 일도 없을 테고, 그렇게 가끔 만나는 거면… 네가 살아있다고 착각하는 일도 없겠지. 난 그거면 돼.”

말을 마친 밧슈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 이야기하고 나니 뒤늦게 부끄러움이 밀려들었다. 울프우드는 눈을 깜빡이면서 변함없이 밧슈를 바라보고 있었다. 짧은 침묵 끝에 팔짱을 풀고 손을 내밀었다. 밧슈는 고개를 저었다.

“펜을 말하는 거면 안 가져왔어. 애초에 그때 가지고 다니던 건 네가 집어던져서 망가졌고.”

그 말에 울프우드는 대답 없이 웃었다. 정말 전하고자 하는 말이 있었다면 나뭇가지라도 찾아와서 적으면 될 텐데 그는 앉은 자리에서 웃음을 터뜨리기만 했다. 밧슈의 표정이 불퉁해졌다. 불만이라기엔 꽤 열없는 표정이라 울프우드는 꽤 오랫동안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밧슈는 손에 얼굴을 묻었다가, 아, 그만 웃어! 하면서도 울프우드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 시선에 화답하듯이 울프우드는 잦아드는 웃음 위로 대답했다. 그래, 네 말대로 하자. 속삭임처럼 바람이 불었다. 

 

지평선 끝이 새파랗게 물들 무렵이 됐다. 울프우드가 여전히 그의 옆에 앉아있었고 밧슈는 그의 몸 너머로 비치는 여명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아이들은 일어나지도 않은 이른 시간이었지만 교회의 사람들은 밧슈를 반갑게 맞았다.

“언제 오셔도 괜찮다니까요. 한밤중이건 새벽이건.”

씩 웃는 리비오는 이미 어젯밤 도착한 밧슈를 알고 있는 눈치였다. 사람들을 깨우고 싶지 않아 부러 조용히 도착했는데도 전문가는 속일 수 없었던 모양이다. 일찍 온 김에 청승도 좀 떨고 그랬지. 밧슈는 어깨를 으쓱이면서 애써 태연하게 대꾸했다.

해가 떠 있는 동안 밧슈는 고아원의 일을 거들기도 하고, 아이들의 상대를 하기도 했다. 몇 달 간 카페 일을 하며 배운 걸 살려 주방에 서기도 했다. 달콤한 음료를 마시고 기분이 좋아진 아이들에게 칫솔을 물려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이들의 목마 놀이에 나무 역으로, 유령 놀이에 사람 역으로 어울렸고 온종일 잔디가 자란 마당을 뛰어다녔다. 진이 빠져 잔디 위에 드러눕고 나니 흰 이불보 위로 녹색 풀물이 들어 있었다.

밧슈 옆에 누운 아이가 반짝이는 눈으로 다른 아이에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요정님도 재밌게 놀았겠지? 빗자루 형도 왔잖아! 흥미가 동해 가볍게 물었더니 아이들은 한참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다가, 가끔 아이들 사이에 껴서 흰 천을 두르고 노는 키 큰 요정님에 대해 털어놓았다.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제이미 위로 떨어질 뻔한 화분을 잡아 주거나 높은 곳에 있는 물건도 요정님이 꺼내 준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흰 천을 뒤집어쓰고 놀게 된 이유부터가 그 요정님도 섞여서 놀게 하려는 모략이라나 뭐라나. 어른들한테는 비밀이지만 밧슈는 오늘 신나게 놀아줬으니 특별히 이야기해준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 정체가 누군지는 보지 않아도 알았다. 밧슈는 그 하얀 천 밑에서 걸어다니는 친구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크게 웃었다. 한참을 웃다가 밧슈는 새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가만히 누워 있었다. 마른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렸고 그 사이로 눈부신 햇빛이 스며들었다.

아이들이 낮잠에 들 무렵에는 빨래를 너는 걸 거들었다. 당분간 모래폭풍 예보가 없어 이불이며 베갯잇이며 빨래 전쟁을 벌였다고 했다. 길게 늘어뜨린 빨랫줄에 젖은 옷가지들이 차례로 널렸다. 강한 바람이 불어와 천자락이 나풀거렸다. 밧슈가 열을 맞춰 늘어선 빨랫줄을 바라보다가 몸을 돌려 교회로 돌아가려던 차였다.

그는 흩날리는 천 사이로 누군가 서 있음을 깨달았다. 하얀 천을 뒤집어쓴 형체다.

리비오는 이르게 저녁 준비를 한다고 아까 들어갔고, 아이들은 방 안에서 낮잠에 빠져 있을 시간이다. 낮잠에 들지 않은 아이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기엔 밧슈의 눈높이까지 우뚝 선 키가 걸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천 밑으로 드러난 반투명한 구두.

밧슈가 놀리듯 웃는 얼굴로 한 발짝 다가섰다. 이게 누구야, 아이들의 요정님 아냐. 속삭였더니 흰 천이 한 차례 나풀거렸다. 풀물이 든 이불보에 가려져 보이지는 않았지만 어이없어 하는 게 분명했다.

“아까 애들이 그러더라. 요정님도 같이 놀았을까~ 꽤 기대한 모양이던데. 내일은 몰래 껴 보는 건 어때?”

킥킥 웃엇더니 문제의 요정님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밧슈는 그게 거절한다기보다 멋쩍어하는 기색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애들 사이에서 인기도 좋더라. 화분도 잡아 주고, 높은 곳에 있는 물건도 꺼내 주고―”

밧슈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흰 천을 뒤집어쓴 형체가 성큼 한 발짝 다가왔고, 밧슈의 머리 위로 새하얀 천이 나풀거리면서 덮였다. 그리고 이어 입 위를 가로막는 뻣뻣한 천의 감촉. 한 겹 천자락 너머로 가벼운 질량이 입술 위로 내려앉았다가 다시 떨어졌다.

밧슈가 급히 손을 뻗어 흰 천을 잡아챘다. 그의 손 안에서 흰 천이 힘없이 나풀거리며 바닥에 끌렸다. 다시 바람이 불었고 햇볕은 따스한데… 유령의 모습은 도무지 보이질 않는다. 그는 석상처럼 그 자리에 서서 삐걱거리다가 천천히 입을 틀어막고 주저앉았다.

마침내 정적. 바람 소리만이 밧슈 주위를 감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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