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우

무기는 무기일 뿐이다

노맨즈랜드 by f3t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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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 짙은 눈이 빠르게 주위를 훑었다. 방금 전의 폭발로 무너진 건물, 다시 붕괴할 조짐은 없어 보이는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수도가 터져 졸졸 흐르는 물소리 너머로 빠르게 뛰어다니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울프우드가 나직이 혀를 찬다. 조금 더 귀를 기울였더니 밧슈 더 스탬피드니 인간 태풍이니 하는 단어들도 들려온 탓이다. 이미 짐작하고 있기는 했다. 퍼니셔를 노릴 만한 것들은 이렇게 화려하고 시끄러운 방식과는 거리가 먼 작자들이었다.

이제껏 제법 시간이 흘렀다만 사상 최악의 현상범과 동행한다는 사실이 이렇게까지 실감 난 적은 처음이었다. 어디부터가 함정이었지? 가게로 들어오던 때? 두 사람이 방을 잡은 이후에 현상금 사냥꾼과 작당한 건가? 그도 아니면 이 마을 전체가? …어느 쪽이 정답이건 그다지 즐거운 가정은 아니었다. 그만큼 습격자의 수도 늘어남을 의미했으므로.

울프우드가 팔을 움직여 시야를 가린 피를 닦아냈다. 낙하하는 돌에 머리를 맞아 시야가 어질어질했으나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적어도 이 주위를 배회하는 것들을 정리할 정도의 시간은 주어지리라.

이봐, 빗자루. 소리를 낮춰 불렀으나 무너진 벽 너머에서는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울프우드는 숨을 죽이고 벽 너머에 감각을 세웠다. 자신의 피 냄새에 섞여 다쳤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래도 깨어 있긴 한 듯했다. 울프우드는 이를 악물고 다시 불렀다. 야. 그제야 대꾸가 돌아왔다. 멍한 목소리였다.

 

“미안, 울프우드. 다친 덴 없어?”

“걱정 마라, 신께서 보살피셨다.”

“피 냄새가 나.”

“착각이야.”

 

성가시게 눈치만 빨라서는.

 

“…정말 괜찮은 거 맞아?”

“문제없으니 신경 쓰지 마. 너는?”

“나도 멀쩡해. 그것보다… 내 총이 네 쪽으로 튕겨 나간 것 같은데. 그쪽에 있어?”

 

멀리서 다시 사람들이 뛰쳐나가는 소리와 저기 있다, 얼른 찾아, 여기 어디 있을 거다! 외쳐대는 소리가 벼락처럼 들렸다. 울프우드는 주의 깊게 사람들이 삽이며 장비를 찾아 멀어지길 기다렸다가 몸을 움직였다. 흩어진 돌무더기를 헤치자 길쭉한 은빛 물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밧슈의 말마따나 그의 총이었다. 좀처럼 타인을 상처 입히지 않으려 드는 그의 동행인이 유일하게 들고 다니는 무기이기도 했고. 울프우드는 가물가물한 정신으로 퍼니셔의 위치를 가늠했다. 분명 아까 잠들기 전에 숙소 문가에 세워 뒀던 것 같은데. 그는 가볍게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고는 벽 너머의 빗자루에게 물었다. 그가 손에 쥔 낡은 갈색 가죽 손잡이는 먼지를 뒤집어 쓴 탓에 거의 희었다.

 

“퍼니셔는?”

“내 쪽에 있어. 다행히 망가지지는 않은 것 같네.”

 

이 무슨 신의 장난인가.

벽 너머의 빗자루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아마 제 총이 살인자의 손에 들어가니 어쩌니 하는 건 생각도 않고, 제가 퍼니셔를 사용했을 때 그가 불쾌해할 것 따위나 생각하고 있을 게 뻔했다. 울프우드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탐탁찮은 일임은 틀림없다. 그건, 퍼니셔는 저런 놈이 들어선 안 되는 물건이었다. 쓸데없이 무겁고 불필요하게 파괴적이며, 이 세상에 다시없을 만큼 살인에 특화된 무기. 짤막한 그 이름을 우상처럼 떠받드는 정신 나간 것들의 도구. 아무도 죽이지 않겠다며 꿋꿋하게 이 별을 떠도는 저런 자식이 들어서는 안 되는… 죄의 증표나 다름없었다, 저건.

하지만 이런 상황에선 달리 방법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게다가 빗자루라면 저걸 든 채 추적자들로부터 무사히 도망칠 수 있으리라는 사실도 자명했고. 계산을 마친 울프우드가 밧슈의 총을 고쳐 들었다. 수천수만 번 누군가가 쥐고 길들여 온 손잡이가 손 안에서 이질적으로 겉돌았다.

 

“이건 잠깐 맡아두마. 저번과는 다르게 여유가 없는 상황이라 총알 좀 써도 원망하지 말고. 무사히 마을을 벗어나서 돌려줄게.”

“그래, 어디서 만날래?”

“아까 바이크를 세워 뒀던 곳으로.”

“그게 아직 멀쩡할까?”

“설마. 우리를 잡을 생각이었다면 그것부터 부숴 놓았겠지.”

“말도 안돼, 걸어서 다음 마을까지 가야 한다니…….”

 

밧슈가 투덜거렸다. 제법 장난스러운 어투라 울프우드는 낮은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피가 점차 멎었고 정신은 보다 또렷해진다. 무너진 잔해 틈으로 푸른 눈동자가 보였다가 사라진 것도 같다. 희미하게 누군가가 몸을 일으키는 소리와 무거운 중화기가 부딪혀 텅텅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울프우드는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한 마디 덧붙였다.

 

“다치지 말고 보자, 빗자루. 우리 지금 짐을 싹 잃어서 빈털터리거든. 붕대도 없어.”

“…….”

“그냥 그렇다고.”

“…그래. 너도 다치지 말고.”

 

두 사람은 각자 잔해를 치우고 밖으로 나섰다. 밤공기를 들이마시기 무섭게 총구가 눈앞에 들이밀어졌으나 다행히 그것이 바로 불을 뿜는 일은 없었다. 울프우드는 총을 든 사람들의 면면을 살피다가, 튀어나오려는 한숨을 겨우 삼켰다. 현상금 사냥꾼은 무슨. 협박의 기본조차 모르는 멍청한 자식들이었다. 아마도 오늘 저녁까지는 평범하게 밥을 먹고 일상을 떠들었을 그런 작자들.

반대편에서 폭탄 같은 것이 터지는 소리가 연달아 들렸고, 총이며 폭탄 따위로 무장한 남자들이 서로 저쪽이 타깃이네 어쩌네 하면서 달려가는 꼴도 보였다. 울프우드는 그 모습을 가볍게 일별하며 겉옷 안주머니나 뒤졌다. 다행히 물에 젖지 않은 담배 한 대가 나왔다. 약간 접히긴 했지만 피우는 데엔 문제없어 보였다.

그걸 입에 물면서, 그는 등을 세워 바르게 섰다. 일견 적의가 없음을 나타내는 모습처럼 보인 건지 그에게 총구를 들이밀던 남자 하나가 손을 내렸다.

 

“이봐, 당신. 인간 태풍의 동행인이지?”

 

이것부터 시작이군. 정말 몰라서 묻는 건 아닐 테니 구태여 부인할 필요 없는 물음이었다. 울프우드는 건성으로 고개를 까딱이면서 바지 주머니 깊숙한 곳에서 성냥 한 개비를 찾아냈다. 역시 사람은 준비성이 철저해야 해. 짐을 다 잃었을 때를 대비해서 여기저기 흩어 놓아야 한다고. 남자가 그 꼴을 보곤 다시 입을 열었다.

 

“불필요하게 살인할 생각은 없어. 게다가 성직자를 죽이는 건 우리 입장에서도 조금 껄끄럽거든. 네가 그의 일행이긴 하지만, 혹시 협력한다면 당신은 살려주겠다고 약속하지.”

 

울프우드는 대꾸하는 대신 총의 손잡이 부분에 성냥을 그어 불을 붙였다. 짙은 담배 연기가 감싸듯 흐른다. 땅에 떨어뜨린 성냥을 발로 비벼 끈 울프우드가 깊이 숨을 내쉬었다. 다행스럽게도 약실에 든 탄환은 충분했다. 비어 있었다면 이번에야말로 그 머리카락을 뽑아 빗자루로 만들어 버렸을 텐데.

손잡이에 손을 얽었더니 즉시 가까운 곳에서 총성이 울렸다. 탄환은 그의 발치에 박혔다. 남자의 얼굴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감하기라도 하듯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어느새 멀리까지 도망간 폭발음에 귀를 기울이면서 울프우드가 작게 웃었다.

 

“허튼 짓 하지 마. 지금 당신 주위를 포위한 게 몇 명인지―”

“그걸 정말로 알려 주고 싶었으면 내가 나오자마자 죽였어야지.”

 

굳이 다 듣고 있을 필요 없는 말이다. 예리한 총성이 밤공기를 가로질렀다. 어깨를 움켜쥔 남자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울프우드는 기민하게 움직였다. 총알이 사방에서 빗발쳤으나 사격을 피할 만한 엄폐물은 주위에 차고 넘쳤다. 잔해 뒤에 몸을 숨긴 그가 손을 뻗어 총알을 난사해대는 한 명을 조준했다. 노리는 곳은 머리. 총구 끝이 흔들리는 법은 없으며…… 우선 한 명.

방아쇠를 당기려던 손가락이 순간 움직이지 않았다. 억겁 같은 찰나 싸늘한 정적이 흘렀고 울프우드는 깨달았다. 늦었다. 이를 악문 울프우드가 급히 몸을 웅크렸고, 눈을 감기 무섭게 가까운 곳에서 폭탄이 터졌다. 막는다고 막았는데도 귀가 끔찍하게 웅웅거렸다.

왜 안 쐈지? 퍼니셔는 자문한다. 그가 숨을 들이쉬면서 손에 쥔 총을 내려다봤다. 긴 시간 같은 방법으로 쥐어 온 탓에 그 모양대로 자국이 남은 손잡이. 그 위로 아무렇게나 두른 손바닥에 흥건하게 땀이 고여 있었고, 총을 쥔 손마저 잘게 떨렸다. 살인을 처음 하는 인간이라도 되는 것처럼.

울프우드가 앞으로 몸을 굴렸다. 바위 뒤에서 총을 든 남자 몇이 튀어나왔다. 빈틈투성이인 움직임이었고 마음먹었다면 그들이 고통 없이 떠나도록 안배하는 건 아무 일도 아니었다. 그에겐 담배에 불을 붙이듯 간단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니콜라스에게 부여된 힘과 재능은 그런 종류의 것이다. 그가 받은 훈련이라곤 모조리 그런 식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는 쏘지 못했다. 오로지 그의 손에 들린 것이 밧슈 더 스탬피드의 총이기 때문에.

허벅지며 어깨를 붙잡고 엎어지는 것들에게 다가가 그 손에 들린 총을 걷어찬 울프우드가 조소했다. 위선자 같으니. 이런다고 네 손에 묻은 피가 지워질 일은 없는데도, 그 자식처럼 불사신도 아닌데다 그렇게 살아남겠다고 버둥거려 온 놈이 이제 와서…….

무기는 무기일 뿐이다. 그 무기가 누구의 것이건 인간은 총에 맞으면 죽고 살인자가 되는 건 그 무기를 쥔 사람이다. 그 물건에 죗값을 묻는 사람은 없었다. 그 무기의 주인이 살인하지 않는 자라 해도 다르지 않은 사실이었다. 훗날 그것이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간다면 그건 언젠가는 남의 생명을 빼앗을 것이고 누군가를 고통 속에 밀어 넣으리라. 아무런 죄책감도 고뇌도 없이.

무기는 그렇게 만들어진 물건이다.

지켜야 할 것은 인간이 아니라 사명. 완벽한 숭배에 기초해 완전히 멸사봉공하고, 모든 것을 완수하는 자.

 

무기는 어디까지나 무기일 뿐이고…….

 

그러한 기능이야말로 존재의 이유임을 알라.

 

그러나 그는 아니다. 니콜라스 D. 울프우드는 명백히 인간이었다. 자신의 죄를 알고 신앙에 기대며 고뇌하는 위선자일지언정 인간이었다.

살아 있는 사람이다.

깊이 한숨을 내쉰 울프우드가 손에 든 총을 내던지려다가, 다시 주먹을 쥐었다. 그 자리에 우뚝 선 채 어깨를 늘어뜨리고 손으로 눈가를 덮었다.

밤공기가 살을 엘 것처럼 부는 듯했다. 매캐한 화약 냄새, 흙냄새… 그 모든 것들 사이에서 피비린내만이 선명했다. 야속하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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