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기
“…방이 하나밖에 안 남았다고? 혹시 여기 말고 달리 갈 데가 있나?”
“쬐끄만 마을에서 너무 많은 걸 바라는군.”
여관의 주인이라는 인간은 킬킬거리면서 열쇠 꾸러미만 달랑거렸다. 손에 달린 열쇠들이 철컹거리며 기분 나쁜 소리를 냈다.
나흘을 내리 달려 도착한 여관은 끔찍하게 낡고 붐볐으며 좁기까지 했다. 들어오던 간판에 50년 전통 어쩌구 하는 말이 적혀 있더니 거짓말은 아닌 모양이었다. 안 좋은 의미로. 하필이면 오늘 유난히 사람이 많아서 남은 방도 일 인실 하나뿐이라는데, 꼬질꼬질 너덜너덜 거지꼴의 두 사람에겐 정말이지 좋지 않은 소식이었다. 그래도 여관 주인장은 어떻게 공간을 잘 내면 두 사람이 잘 수는 있을 거라며 이빨을 털어 댔다. 울프우드가 바깥을 흘긋 돌아봤다. 영 마뜩찮기는 했지만 해가 저문 지 오래였다. 밖으로 나가 묵을 만한 다른 곳을 찾기엔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는 뜻이다. 고민하는 기색을 알아챈 건지 주인장이 열쇠를 흔드는 채로 말을 이었다.
“당신 친구도 이미 곯아떨어진 것 같고, 일 인실이니 내 특별히 한 명 값만 받지. 어떤가?”
혀를 찬 울프우드가 뒤를 돌았다. 그 말대로 뒤편의 의자에 대강 던져 놨던 밧슈는 이미 반쯤 잠에 취한 모습이다. 팔을 붙잡고 흔들었지만 어어, 하며 까딱까딱 넘어가는 고개를 보아하니 좀처럼 정신을 차릴 것 같지가 않았다. 선택의 여지라곤 없었다. 뒤통수를 벅벅 긁던 울프우드는 값을 치르고 열쇠 하나를 받았다.
한손에는 퍼니셔, 다른 손에는 동행인을 들쳐 멘 채 계단을 오르려니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니었다. 천으로 덮인 철 십자가의 끄트머리가 텅, 텅 요란스럽게 계단 위를 두드렸다. 반쯤 삭은 계단은 거진 세 사람에 달하는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불안한 비명을 질러 댔다.
“계단 부수면 수리비는 반드시 청구할 테니 그렇게 아쇼!”
요란한 삐걱거림은 멀리서 듣기에도 거북한 소리였던 모양이다. 카운터에서 목을 길게 내뺀 주인장이 소리를 질렀다. 인상을 구긴 울프우드는 대꾸도 않고 조심스럽게 이층으로 올라섰다.
녹이 슬어 뻑뻑한 열쇠는 구멍에 잘 들어가지도 않아서 제법 공을 들여야 했다. 과하게 힘을 줬다가 열쇠가 뚝 부러지는 꼴은 면하고 싶었던 까닭이었는데, 그러는 동안에도 어깨에 얹힌 빗자루는 태평하게 고개나 까딱거렸다. 바닥으로 내버리지 않은 것은 모처럼 발휘한 성직자의 자비였다.
그는 거대 십자가와 거대 빗자루를 양 팔에 낀 채 문을 몸으로 밀어 방 안으로 들어오고서야 밧슈를 침대 위로 털어냈다. 침대 위로 철퍼덕 드러누운 모습을 잠깐 내려다보다가 퍼니셔를 문가에 세워 두고, 그 옆에 같이 털석 앉았다. 선글라스까지 벗어 탁자 위에 올려 둔 다음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좁은 여관, 동행인의 규칙적인 숨소리만이 울리는 방 안은 쉽게도 정적에 빠져들었다. 그 정적에 파묻혀 침묵하는 그의 검은 눈이 차츰 가라앉았다.
납치로부터 시작된 용진성에서의 충돌, 홈프릭과 건틀렛, 레가트와 크림슨네일의 개입, 밧슈의 폭주까지. 멀지 않은 기억들이 안개처럼 머릿속을 떠돌았다. 죽은 자들을 묻고 부서진 마을에서 손을 보태다 떠나온 지도 벌써 며칠이었으나 그 밤의 기억은 좀처럼 머릿속을 떠날 줄을 몰랐다.
단순히 치열한 전투였기 때문은 아니었다. 채펠마저 쏴버리고 미카엘의 눈을 나온 몸인 데다, 동행하는 건 무려 그 인간 태풍이었으니 이제 와서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쉽사리 그 기억을 떨쳐낼 수 없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자가 한 말 때문일 테다.
확신에 차 배반을 논하던 사내의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눈이 보이지 않았는데도 울프우드는 의 표정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나 했다. 배반자의 눈이라고? 형편 좋은 소리 하고 있네. 울프우드는 기묘한 불쾌감에 휩싸인 채 눈을 감았다. 꼭 그날처럼 다시 세상이 아득한 어둠 속으로 내려앉았다. 그림자처럼 발목을 얽어 잡아당기는 듯한 감각이 그를 휘감았다.
정말이지 형편 좋은 소리였다, 울프우드에겐.
그는 2년 전 제네오라 록에서 밀리온즈 나이브스와 대면했으며 그 순간을 아직 잊지 못했다. 그 인간 아닌 존재는 여전히 인류 절멸을 갈망했고… 그로부터 말미암은 울프우드의 악몽은 여전히 이스트 디셈버에 실재했다. 그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그는 안내인이었다. 밧슈 더 스탬피드를 밀리온즈 나이브스의 앞으로, 인간의 가장 강력한 우군을 가장 강력한 적 앞까지 데려가는 자. 결판을 내는 건 그의 몫이 될 수 없다는 뜻이다.
미드버레이가 그랬듯이, 그리고 계시니 운명이니 하는 것들이 이야기하듯이 인간의 힘으로는 피할 수 없는 궤도에 올라 있다고 그는 직감하고 있었다.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질지는 알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뒷덜미를 쓸어내린 울프우드가 자신의 동행인을 돌아봤다. 침대에 드러누운 밧슈는 무슨 좋은 꿈이라도 꾸는 건지 희미하게 웃는 얼굴이었다. 벗지 않은 선글라스는 베개에 눌려 눈꺼풀 자국이 남았고, 빳빳하게 세웠던 머리카락은 얼굴 위로 흩어졌는데도 불편한 기색이 없었다.
그 꼴을 가만히 보고 있으니 가슴 한쪽이 돌이라도 괴인 듯 무거웠다. 그는 자신이 짊어지고 올라왔던 몸의 굴곡을 기억해냈다. 자신보다 약간 낮은 체온과 딱딱하고 차가운 의수의 감각까지.
울프우드가 불시에 손가락을 튕겼다. 튕긴 손가락이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이마와 부딪혀 딱, 경쾌한 소리가 났다. 밧슈는 단박에 눈을 번쩍 떴다.
“악!”
“그만 졸고 정신 차려, 침대도 하나밖에 없는데 그 꼴로 잘 셈이냐.”
잠이 덜 깬 눈을 끔뻑이는 밧슈가 이마를 부여잡았다. 누운 채 올려다보는 얼굴이 사뭇 억울한 기색이었다. 아프다면서 원망하는 얼굴인 것이 분명해서 울프우드는 코웃음쳤다. 어울리지도 않게 청승을 떤 탓인지 손가락에 조금 힘이 많이 들어간 건 사실이라 양심이 콕콕 찔리긴 했다만, 그다지 중요한 사실은 아녔다.
“자는 척 하다가 진짜 잠든 걸 침대까지 들어다 눕혀줬으니 적당히 해라. 이쪽은 딸린 짐도 있었단 말이다. 더럽게 무거운 걸로.”
“…아니, 그래도 어쩔 수 없었으니까 좀 봐줘.”
“그래, 그러니까.”
파란 시선이 슬금슬금 돌아갔다가, 울프우드를 흘끔 바라봤다. 짧은 순간 눈이 마주쳤고 울프우드는 피하지 않았다.
밧슈의 말이 맞았다. 마을 유일한 여관이라는 곳에 밧슈의 수배서가 대문짝만하게 붙어 있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했다. 울프우드의 한발 뒤에서 여관으로 들어서던 밧슈는 광경을 목격하자마자 머리를 흔들고 고개를 숙였다. 취한 사람마냥 비틀거리다 어깨에 기대어 발을 끌기까지 하는 모양새에 의문스럽기도 잠시, 상황을 깨달은 울프우드는 자연스레 그를 대강 걸치고 주인장 앞에 섰더랬다.
머리를 흐트러뜨리고 조는 척만으로 들키지 않은 건 역시 천운이었다. 그걸 끌고 올라오는 건 귀찮기 짝이 없는 일이긴 했지만 그 덕분에 이슬 맞지 않고 잘 수 있게 된 것도 사실이었으므로 더 책할 생각은 없었다.
멋쩍은 밧슈의 시선 앞에서 울프우드가 고개를 돌리고 욕실 쪽을 턱짓했다. 몸을 일으킨 밧슈가 늘어져라 기지개를 켰다.
“먼저 씻을래?”
“아니, 너 먼저 씻어라.”
손을 휘적이는 모습에 붉은 코트를 벗어던진 밧슈가 욕실 문 너머로 사라졌다. 곧 희미한 물소리와 - 악 차거! - 비명이 잔잔하게 방 안을 채웠다.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울프우드가 습관처럼 담뱃불을 붙였다. 입술 사이에 끼워 깊이 빨아들였다가 다시 내쉬었다. 익숙한 냄새가 곁을 휘감았다. 창문을 열지 않았다간 씻고 나온 밧슈 더 스탬피드가 그를 창밖으로 던져 버리려 들 게 뻔했으므로, 그는 물 먹은 듯 축축 처지는 몸을 이끌어 창문을 열어젖혔다. 책상 앞의 스툴을 끌어다 창가에 놓은 그가 창틀에 팔을 괴고 앉았다.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목을 간지럽혔다. 울프우드는 천천히 눈을 깜빡이면서 머릿속에 지도를 그렸다. 제네오라 록에서부터 그가 지나온 길, 밧슈 더 스탬피드를 찾아내기 위해 헤매었던 길과 마침내 밧슈를 찾아내 함께 걸었던 길까지.
조금 돌아오긴 했지만 도착이 머지않았다. 얼마 전에 구태여 비스트가 울프우드에게 말을 전한 것이 그 증거였다. 그리고 멀지 않은 미래에 밧슈 더 스탬피드가 밀리온즈 나이브스와 만나면, 마침내 어떤 식으로든 결정되리라. 모든 것이. 울프우드가 길게 연기를 뱉었다.
그래, 하지만 그게 뭐 어떻단 말인가?
설령 그것이 이미 정해진 인간의 결말이며 그의 손으로 바꿀 수 없는 결론이라 해도 납득할 생각은 없었다. 체념이니 뭐니 하는 것들은 그의 성미에는 안 맞았다. 순순히 죽어 줄 생각이라곤 추호도 없었다. 저 자식이 인간의 가장 강력한 우군이라고. 희망이라고? 그렇다면 울프우드는 그 희망마저 등불 삼아 쥐고 나아가야 했다.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그 희망이 꺼지지 않도록 안배하고 함께 걸을 생각이었다. 그렇게 결정했다.
그리고 돌아갈 것이다.
곧 밧슈가 다시 나왔다. 욕실 문이 열리고 문 너머에 갇혀 있던 습기가 피부 위로 끼쳤다. 머리에 대충 수건을 얹은 밧슈가 걸어 나왔다. 흉터로 가득한 상체는 이제 익숙하다 못해 일상적일 지경이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울프우드가 문득 물었다. 물 차갑냐? 빙그레 웃는 낯의 밧슈가 파르라니 질린 입술로 대답했다. 엄청.
마지막 남은 방이라고 돈도 비싸게 받아 처먹더니 이딴 곳도 여관이라고. 울프우드가 투덜거리면서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 일어났다. 밧슈는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처럼 그 쪽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울프우드는 굳이 돌아보지 않고 욕실 문을 닫아 버렸다.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은 말마따나 살을 엘 듯 차가웠다. 이 더운 별에서 구태여 찬 물을 쏟아붓는 것도 악취미적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는 조금 이를 갈았다.
욕실에서 나왔을 때에는 창가에 앉은 밧슈의 모습이 보였다. 울프우드가 앉았던 바로 그 자리에 밧슈가 앉아 있었다. 창문은 여전히 열린 채, 담배 연기는 거의 흩어져 희미하게만 남아 감돌았다. 탁자의 재떨이에는 불이 거의 꺼진 장초가 하나 놓여 있었는데 아무리 봐도 씻기 전에 꺼버렸던 건 아니라서 그는 가볍게 혀를 찼다.
가끔 있는 일이었다. 그가 지독한 골초였던 데 반해 밧슈는 좀처럼 담배를 입에 대는 법이 없었다. 물론 아예 손도 안 대는 건 아니었다. 오늘처럼 종종은 슬그머니 한 개비를 가져다 불을 붙였다가, 몇 모금 만에 콜록콜록 다 뱉어내며 내려놓고는 했다. 다 피우지도 못할 거면서 자꾸 입에 대는 건 대체 무슨 심보인지 모르겠다만. 울프우드가 손을 뻗어 피우다 만 담배를 집어 물었다.
창틀에 양 팔을 올리고 고개를 기댄 밧슈는 다시 잠든 모양이었다. 잘 거면 제대로 누워서 자라. 어깨를 붙잡아 일으켰더니 가물가물 눈을 뜬다. 두어 번 시간을 들여 눈을 끔뻑이자 시선이 조금 또렷해졌다.
“아니, 침대가 하나길래… 울프우드는?”
“걱정 마라, 대충 알아서 잘 테니까.”
밧슈가 잠을 깨려는 듯 고개를 털었다. 그 얼굴에다 길게 숨을 뱉었더니 단박에 켁, 기침한 밧슈가 몸을 일으켰다. 울프우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렇게 질색하는 담배에 손 그만 좀 대고.”
“아니, 뭐… 그냥 가끔 그런 날이 있는 거지.”
밧슈가 끙, 앓는 소리를 내면서 뒤통수를 긁적이다가 덧붙였다. 미안. 사과를 받으려던 건 아니었으므로 울프우드는 등만 툭툭 밀었다. 밧슈는 울프우드가 미는 대로 침대에 올라 앉아 몸을 늘어뜨렸고, 울프우드는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운 채 다시 스툴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늘어져라 하품한 밧슈가 눈가를 꾹꾹 눌렀다.
“거기서 자게?”
“아니.”
“내일 운전은 너인 거 까먹지 말고…”
“안 까먹었다, 인마.”
울프우드가 다시 길게 숨을 내쉬었다. 창문 너머 밤하늘로 흰 연기가 어른어른 흩어졌다. 밧슈는 곧 다시 규칙적인 숨을 내쉬기 시작했다. 불편할 게 분명한데도 침대 안쪽에 아슬아슬 자리 잡은 자세였다. 간신히 한 명이 더 누울 수 있도록.
울프우드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바람 빠지듯이 웃었다.
밧슈는 조금 이른 시간에 눈을 떴다. 닫힌 창문 너머의 지평선이 하얗게 밝아 오는 시각이었다. 아직 채 어둠이 걷히지 않은 방 안, 가까운 곳에 누운 검은 뒤통수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가 소리 없이 미소지었다. 어쩌면 눕지 않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다행이었다. 본래 한명이 누워야 할 곳에 체격 있는 사람이 둘이나 누운 탓인지 침대 프레임이 불안하게 끼익거렸지만 부서질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애초에 덩치 큰 남자 둘을 일 인실에다 밀어 넣었으면 여관 주인도 이 정도는 감수하겠지.
그는 굳은 몸을 풀면서 조심스레 약간 더 가까이 누웠다. 돌아누운 등이 닿을 듯 가까웠다.
방 안은 정적에 휩싸여 있었다. 밧슈는 좁은 간격을 두고 떨어진 신체의 온기를 느꼈다. 손끝에 닿을 듯 말 듯 아슬한 열기를 느끼면서 그는 찬찬히 귀를 기울였다. 멀지 않은 곳에서 희미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숨을 죽이고도 간신히 들리는 소리였다.
새카맣게 차려입은 정장, 등에 멘 큼지막한 십자가까지. 낮의 동행인은 눈에 안 띄려야 안 띌 수가 없는 차림이었다. 목사라는 직업은 둘째치고, 십자가를 감은 천을 풀면 누구나 그에게 주목하도록 하는 힘이 있었다.
밤에는 달랐다. 낮에는 새카만 차림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끌었다면, 밤에 울프우드는 꼭 죽은 사람처럼 잠에 들었다. 좀처럼 뒤척이지 않는 건 물론이고 숨소리마저 희미했다. 다른 사람에 비해 높은 체온이며 빠른 회복력을 생각하면 기이한 일이다. 그런데도 좀처럼 푹 잠들지를 못하는 건지, 예민한 건지. 밧슈가 손이라도 잡으려 하면 즉시 눈을 뜨고 무슨 일 있느냐 물어보고는 했다. 그마저도 최근 들어 더욱 심해졌음을 밧슈는 알고 있었다.
그는 몇 년 전의 일을 떠올렸다. 나이브스. 타인의 입에서 나올 줄 몰랐던 형제의 이름은 섬뜩하리만치 날이 서 있는 것처럼 들렸다. 그 이름을 입 밖으로 뱉던 남자는 굳은 얼굴이었고, 당시의 밧슈로서는 그 서늘하기만 한 표정을 읽기 어려웠으나… 지금이라면 안다. 두 사람이 지나온 시간은 그런 종류의 시간이었다.
밧슈는 여전히 울프우드가 어째서 그 이름을 아는지 알지 못하고 그의 과거가 어떠했는지, 어쩌다 그 거대한 십자가를 들고 다니는지, 어쩌다 안내인이 되었는지, 그가 그토록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울프우드가 편안할 때 짓는 표정은 알았다. 어떻게 웃고 어떻게 두려워하는지. 어떻게 화를 내는지. 그의 다정이 어떤 식으로 세상에 작용하는지 알았다.
그가 이야기하지 않은 진실 외의 것들을 알았다.
물론 다른 것들에 대해 알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건 아니다. 엘릭스와 울프우드가 만났을 때부터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 시간 동안 불어난 의문점이 없을 리가. 가슴 깊은 곳의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라도 묻고 싶은 건 차고 넘쳤다. 다만 두 사람 모두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기엔 서로에게 그만큼의 여유가 없음을 모르지 않기 때문에…
언젠가는 시간이 해결해주리라 믿고 기다릴 뿐이다. 그건 밧슈가 가장 잘 하는 일이었다. 말 그대로 그에겐 차고 넘칠 만큼 긴 시간이 있었으므로.
아쉬운 점이라면 두 사람을 위해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다는 점이겠지. 밧슈가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침대 시트가 부드럽게 바스락거렸다. 그는 고개를 들고 창밖을 내다봤다. 울프우드는 본인을 안내인이라고 했고, 밧슈는 그가 나이브스의 이름을 알았기에 따라나섰다. 목적지에 대해서는 듣지 못했지만, 인간 아닌 것의 직감이 밧슈의 귀에 속삭여대고 있었다. 머지않았다고. 울프우드가 깊이 잠들지 못하는 것도 비슷한 이유이리라.
밧슈가 손을 뻗어 울프우드를 가볍게 당겼다. 등 돌리고 누웠던 자의 얼굴이 희미한 빛 아래에 드러났다. 일그러진 채 식은땀이 줄줄 흐르는 얼굴이었다. 울프우드. 밧슈가 불렀다. 짧은 정적이 지나 죽은 자가 일어나듯이 눈꺼풀이 올라갔다.
붉게 충혈된 눈이 잠시간 허공을 떠돌다, 곧 정확히 밧슈를 응시했다. 밧슈는 한순간 그 눈에 차오른 공포를 목격했고, 그것이 다음 순간 씻은 듯이 사라지는 것 또한 목격했다.
“…빗자루.”
“악몽을 꾸는 것 같아서 깨웠어. 괜찮아? 괜히 깨운 건 아니지?”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울프우드는 어깨를 짚은 밧슈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겹쳤다. 마른 입술 사이로 안도 섞인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는 몇 번인가 더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가, 다시 내쉬었다. 피로감으로 가득한 눈을 끔뻑거리다가 천천히 감았다. 여전히 손은 겹친 채였다. 맞닿은 피부가 못내 뜨겁다.
밧슈는 짧은 순간 그 온기를 느끼다가 곧 손을 빼냈다. 울프우드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올려다봤고, 밧슈는 울프우드의 옆에 나란히 누웠다. 침대 위에서 두 사람의 어깨가 꼭 맞닿았다. 방은 좁고 침대는 더 좁다. 하지만 새벽이니까. 곧 먼동이 트는 새벽이 올 테니까…
울프우드가 느리게 눈을 깜빡이다가 다시 감는 게 보였다. 밧슈가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바람처럼 들리는 소리였다. 손보다는 이 편이 더 나을걸. 잠시 침묵하던 울프우드가 흐린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렇네…. 찡그리듯이 웃은 밧슈가 따라 눈을 감았다.
다시 정적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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