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f3trs
고장났던 생수 플랜트가 기적적으로 회생하면서 마을은 한바탕 축제를 벌였다. 몇 주만에 되살아난 플랜트는 깨끗한 물을 쏟아냈고, 제네오라 록의 사람들은 더는 탁하게 오염된 물로 연명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들은 사막 한가운데서 천천히 말라죽지 않아도, 사랑하는 사람들이 탈수에 시달리다 쓰러지는 모습을 보고만 있지 않아도 되었다. 대부분의 플랜트 기사가 요구하
후미진 골목 안쪽에 위치한 자그마한 바. 내부에는 테이블 너댓 개와 겨우 두 사람이 간신히 올라가는 낡은 나무 스테이지, 바 테이블 앞에엔 동그란 의자 다섯 개가 늘어서 있었다. 덩치가 크고 젊은 바텐더는 제법 능숙한 손짓으로 술을 내주곤 했지만 그뿐으로, 일즈일에 두세 번 야심한 시각에 문을 여는 가게는 입소문을 타기도 어려워 이런 곳에 가게가 있다는 사
그는 몸을 휘감는 부유감을 느꼈다. 바람이 세차게 얼굴을 두드리고 있었다. 파편처럼 몸에 묻은 핏방울이 공중으로 흩어졌다. 파란 하늘이 손에 닿을 듯 가까웠다. 중력이 뒤집힌 듯 아득한 기분에 휩싸인 채 이를 악문다. 최초의 추락에 대한 기억이 오래된 필름처럼 머릿속에 펼쳐졌다. 온 하늘을 붉게 물들이던 불꽃, 피부를 홧홧하게 태우던 폭발의 열기와 비명도
1월 디페스타에서 발행했던 맹우 <새로운 세계>를 유료발행합니다. 실물 회지를 구매해 주신 분들께서는 해당 링크 (https://pnxl.me/j9oic7) 에서 확인 부탁드립니다. 비밀번호는 실물 회지 50페이지 5번째 줄의 두 번째 단어입니다. 소문자로 적어 주세요. 그는 무수한 깃털의 형상을 본다. 비처럼 떨어져 내리는, 백지 같은 깃털들
집 없는 떠돌이 성직자 신세라지만 제 가게를 꾸려나가는 장사꾼의 마음 하나 헤아리지 못할 리 없다. 하물며 자랑하던 테이블이 눈앞에서 산산조각난 식당 주인의 마음이라야. 소동이 잦아든 뒤 밖으로 나온 식당 주인의 얼굴 위로 황망한 감정이 역력했다. 모르긴 몰라도 부서진 가구의 원수를 갚아야 할지, 도주하던 범죄자를 붙잡은 2인조에게 감사해야 할지, 또는 더
느리게 나선형 계단을 오르는 남자의 뒤로 발자국만이 선명하게 남았다. 두껍게 쌓였던 모래 먼지가 흩어져 짙은 발자국이 남은 모양새였는데, 교회에 고아원까지 겸했던 이 곳의 사정을 생각하면 오랜 시간 쌓인 먼지는 아닐 터였다. 아마도 오늘 이곳을 덮친 격렬한 전투의 흔적이 이 종탑까지 미쳤으리라고 그는 생각했다. 나중에 청소에다 수리까지 하려면 제법 골치 아
- 살아있다는 것 후일담. 먼저 읽고 감상해주세요. https://pnxl.me/e4ntyn 이른 아침, 그리운 꿈에서 깨어난 밧슈는 낡은 나무 천장을 올려다보면서 생각했다. 다녀오고 싶은 곳이 생겼다. 지금 당장. 그는 커튼을 걷는 것도 잊은 채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갈아입을 옷가지, 칫솔, 간단한 식량과 물, 그리고 정말, 정말 혹시 모를 상
…울프우드? 잠깐, 잠깐만. 너, 혹시 이름이 뭐야? 니콜라스 D. 울프우드라고. …미안. 내가 착각했나 봐. 내 친구 중에 목소리가 정말 비슷한 친구가 있었거든. 마침 그 친구도 이름이 울프우드인데다, 내가 워낙 전화를 자주 쓰는 편이 아니라 틀림없이 그 친구일 거라고 생각했었어. 애초에 내 전화번호를 아는 사람이 많이 없기도 하고. 윽, 그런 거
울프우드가 본인의 묘지 위에 앉아 있었다. 아니, 정정한다. 반투명한 니콜라스. D. 울프우드가 본인의 묘비 겸 퍼니셔 위에 올라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밧슈가 못 박힌 듯 제자리에 멈춰 섰다. “밧슈 씨?” 리비오가 의문스러운 얼굴로 돌아섰다. 경악한 밧슈의 의수가 삐걱삐걱 움직였다. 간신히 치켜든 검지손가락이 힘겹게 퍼니셔 위쪽을 가리켰지만…
꽃은 진작에 다 졌고 인간들이 사랑에 미치는 계절도 진작에 지나갔는데 왜. 코 끝을 스치는 숨에 목덜미가 홧홧해졌다. 열어 둔 창문을 타고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낡은 회잿빛 커튼이 펄럭여 둥근 곡선을 그린다. 그제서야 그는 아침에 일어나 걷은 커튼을 묶어 두는 걸 잊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좋은 일이긴 했다. 펼쳐 둔 책장이 몇번 팔락이
인류사적 측면에서 이야기하자면 노맨즈랜드는 실패한 행성이다. 무거운 중력, 희박한 수분, 온 행성을 뒤덮은 사막. 아무리 플랜트들이 협조한다고 해도 그곳은 인간이 살아남기에는 너무나 척박한 행성이었다. 지오플랜트가 가동되지 않으면 기껏 심은 식물도 금세 죽어버리고, 땅 속에는 물 대신 석유가 흐르는 땅. 그곳의 삶에 대한 많은 기록들도 그들이 생활 전반을
울프우드가 조용히 눈을 떴다. 푸르스름한 커튼이 드리운 창문 밖이 겨우 희끗하게 밝아 오고 있었다. 팔을 쭉 펴면서 그는 탁상 위에 놓인 시계의 숫자를 읽었다. 오전 여섯 시 십삼 분. 휴일 아침을 시작하기엔 적잖이 이른 시간이었으나, 아무렴 어떤가. 그는 침대가 흔들리지 않게 조심히 몸을 일으켰다. 문을 열고 나가면서 그는 흘긋 뒤를 살폈다. 다행스럽게도
거센 폭풍의 한복판이다. 문짝에 매달려 절박하게 문을 두드려댄 건 분명 밧슈였지만, 집주인이 문을 열어 주지 않는대도 그를 탓할 수는 없다는 뜻이었다. 분명 어제까지는 폭풍 예고 같은 거 없었잖아! 밧슈가 비명을 지르면서 굳게 닫힌 문에 거미처럼 달라붙었다. 싸늘한 바람이 목덜미를 스치는가 싶더니 우지끈 쿵, 하는 소리가 뒤를 이었다. 그를 아슬아슬하게 스
“…방이 하나밖에 안 남았다고? 혹시 여기 말고 달리 갈 데가 있나?” “쬐끄만 마을에서 너무 많은 걸 바라는군.” 여관의 주인이라는 인간은 킬킬거리면서 열쇠 꾸러미만 달랑거렸다. 손에 달린 열쇠들이 철컹거리며 기분 나쁜 소리를 냈다. 나흘을 내리 달려 도착한 여관은 끔찍하게 낡고 붐볐으며 좁기까지 했다. 들어오던 간판에 50년 전통 어쩌구 하는 말이
색 짙은 눈이 빠르게 주위를 훑었다. 방금 전의 폭발로 무너진 건물, 다시 붕괴할 조짐은 없어 보이는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수도가 터져 졸졸 흐르는 물소리 너머로 빠르게 뛰어다니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울프우드가 나직이 혀를 찬다. 조금 더 귀를 기울였더니 밧슈 더 스탬피드니 인간 태풍이니 하는 단어들도 들려온 탓이다. 이미 짐작하고 있기는 했다. 퍼니
밧슈는 오래 전에 들었던 이야기에 대해서 떠올렸다. 온 별을 휩쓸었던 세계 멸망에 대한 소문 이야기. 그 이야기 속에서 종말론자들은 고대 문명의 달력이나 운석의 움직임 따위를 근거로 종말이 목전에 다가왔음을 주장했고, 다른 사람들은 그를 헛소문 취급하면서도 걱정 어린 대화를 나누고는 했다. 정말로 종말이 목전에 있을까, 내일 갑자기 이 별이 멸망할까. 인류
- 신간 작업 도중 작성했던 폐기 원고를 조금 다듬어 공개합니다. 폐기 원고인 만큼 뒷 이야기는 딱히 존재하지 않습니다… - 신간 스포일러 요소 없음! 맞다, 태풍. 울프우드는 망연한 얼굴로 두 걸음 앞의 바깥을 내다봤다. 그러니까,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무지막지한 비가 쏟아지는 바깥을. 대단한 폭우였다. 냉기가 어린 바람이 불자 차가운 물방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