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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AU
후미진 골목 안쪽에 위치한 자그마한 바. 내부에는 테이블 너댓 개와 겨우 두 사람이 간신히 올라가는 낡은 나무 스테이지, 바 테이블 앞엔 동그란 의자 다섯 개가 늘어서 있었다. 덩치가 크고 젊은 바텐더는 제법 능숙한 손짓으로 술을 내주곤 했지만 그뿐으로, 일주일에 두세 번 야심한 시각에 문을 여는 가게는 입소문을 타기도 어려워 이런 곳에 가게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드물 지경이었다.
그런 곳에 등장한 뉴—페이스란 눈에 띄기 마련이다. 새벽녘이 다 되어서 가게로 들어선 남자의 경우가 꼭 그랬다. 흰 셔츠에 까만 수트. 넥타이는 하지 않았고 대신 단추를 두어 개 풀었다. 새카만 머리카락은 빛을 빨아들이는 듯하고, 검은 눈은 어둠 속에서도 기묘하게 번뜩이는 듯했다. 오래되어 먼지 낀 바의 조명 아래서는 거의 형체만 보여서, 그는 마치 유령이 걸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덕분에 그 남자가 등 뒤에 검은 기타 케이스까지 메고 있다는 사실은 그가 바 테이블을 향해 가까이 다가오고서야 알 수 있었다. 거침없이 실내를 가로지른 남자가 테이블에 기대 섰다. 퍽 친근하게 바텐더의 이름을 부른다. 리비오.
“너무 늦은 거 아냐? 곧 있으면 문 닫을 시간인데.”
“이 자식이, 와달라고 사정사정을 할 땐 언제고. 누군 시간이 남아돌아서 여기까지 온 줄 아냐.”
“그런 적 없거든. 바쁘면 안 와도 된다니까. 기껏 온 김에 뭐라도 줄까?”
“됐어, 차 끌고 왔어.”
“그럼 오렌지 주스로.”
남자가 불만스럽다는 듯이 눈썹을 치켜들었지만, 바텐더는 모른 체 돌아섰다. 바텐더는 누구에게나 무던하고 친절하게 구는 사람이긴 했으나 두 사람 사이에선 단순한 친절을 넘어 아주 오래 알아 온 관계 특유의 친밀감이 느껴졌다.
친구인가? 가족? 밧슈가 이 가게에 드나들게 된 지는 대략 반 년이 흘렀지만, 바텐더의 지인이 찾아온 건 처음이라, 그는 무심코 그 남자를 멍하니 바라봤다. 역시 가족이려나, 안그래도 형한테 한번쯤 찾아오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으니….
남자가 밧슈를 향해 고개를 돌린 건 그 즈음이다. 남자의 선명한 검은색 눈동자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희미한 빛을 발했다. 그 남자가 흔들림 없이 밧슈를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었다는 의미다. 밧슈는 그제서야 실례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아, 죄송합니다. 처음 보는 분인 것 같아서….”
남자는 놀란 건지, 당황한 건지 알 수 없는 얼굴로 몇 번인가 입을 달싹거렸다. 그러다가 잠시 후에야 아뇨, 괜찮습니다. 하는 대답을 내놓았다. 이상하다면야 이상한 반응이었지만, 그 원인이 자신이라면 어쨌든 할 말이 없는 법이다. 정말 죄송합니다…. 재차 사과하면서 밧슈가 멋쩍게 볼을 긁적였다. 남자는 그 얼굴을 잠시 들여다보다가, 둘러멘 기타를 대충 의자에 기대 세워 놓고는 밧슈의 옆 자리에 다가와 앉았다. 갑자기 줄어든 거리에 밧슈가 눈만 깜빡이고 있으니 그가 손을 내민다. 의미를 알 수 없었던 조금 전의 표정은 어디 가고, 어느새 사람 좋게 웃는 얼굴이다.
“괜찮습니다, 가끔은 그런 일도 있는 거죠. 울프우드입니다. 니콜라스 D. 울프우드.”
분위기란 게 저렇게 동전 뒤집듯 바뀔 수도 있는 건가. 밧슈는 잠시 얼떨떨한 얼굴로 남자—울프우드와 그의 손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결국 악수했다. 밧슈 세이브렘입니다. 어색함이 채 가시지 않은 인사였으나 울프우드는 변함없이 웃는 얼굴로 붕붕 소리가 나도록 밧슈의 손을 흔들어대기만 했다. 그 새카만 수트 차림만 보고 유령이니 뭐니 생각했던 게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아는 사이에요? 두 분.”
그 사이 리비오가 차가운 잔에 오렌지 주스를 내 왔다. 밧슈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뇨, 방금 처음 봤어요.”
“이상하게 친근해 보이셔서 혹시나 했네요. 아, 이쪽은 제 형이에요. 저번에 말씀드렸던 니콜라스 형. 그리고 이쪽은 밧슈 씨. 내가 말했던 우리 가게 단골.”
“아, 단골이셨군. 이 녀석이 늘 신세를 지고 있는 건 아닐까 모르겠네요.”
“에이, 아니에요. 저도 여기 분위기가 좋아서 오는 건데요.”
매끄럽게 대꾸하면서 밧슈가 눈을 한번 감았다 떴다. 울프우드가 그렇다면야, 하고 시선을 거두었다. 좀처럼 감정을 읽을 수 없는 새카만 눈동자가 떨어져 나갔다. 직후 남자는 자신의 동생에게 잘 지내고 있는 거 맞냐느니, 어째 더 큰 거 아니냐느니 하는 잔소리를 쏟아냈으므로 밧슈는 조용히 가슴만 쓸어내렸다. 남자의 검은 눈동자는 묘하게 등골을 서늘하게 만드는 힘이 있어서, 그는 희미한 안도감에 휩싸인 채 다시 술잔으로 고개를 돌렸다.
유리잔에 담긴 투명한 갈색 액체 위로 자신의 눈이 비쳐 보였다. 그는 문득 그게 꼭 선글라스를 낀 것 같다고 떠올렸다. 실없긴 해도 제법 마음에 든 상상이라, 그는 옆에 동석한 남자가 다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것은 깨닫지 못한 채 TV며 패션 잡지 같은 곳에서 스치듯 봤던 선글라스 디자인에 대한 생각에 빠졌다.
다만 그런 꺼림칙함과는 별개로, 울프우드는 꽤 말이 잘 통하는 사람이었다. 간단히 어느 대학에 다니는지, 무슨 직업인지 하는 이야기가 오갔다. 밧슈가 자신을 철학교육과 학생이라고 소개했을 때 울프우드는 어쩐지 알만하다는 표정이었지만, 어릴 적에 사격도 했었다는 대목에서는 조금 눈을 크게 떴다. 뭐, 보기 힘든 스포츠긴 하니까요. 의외로 이에 대해 울프우드가 관심을 보인 덕분에, 다음에 만나면 사격 내기라도 하자는 이야기까지 오갔다.
“울프우드 씨도 사격 배우셨어요?”
“아뇨, 따로 배우진 않았고 그냥 예전부터 특기였거든요. 저보다 잘 쏘는 사람은 이제껏 한 명 밖에 못 봤습니다.”
“맞아요, 어릴적에도 시장 같은 데서 몇 번 도전했다가 탈탈 털렸다니까요. 다른 동생들도 한 번도 못 이겼어요. 오히려 누가 형을 이겨먹었다는 게 놀라운데요. 그게 누구야, 진짜?”
“넌 모르는 사람.”
울프우드는 이 곳에서 네 시간 떨어진 도시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있다고 했다. 온통 새카만 수트 차림과 기타와 신학?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라 오묘한 눈으로 쳐다봤더니 리비오가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쵸, 신학생보다는 좀 저승사자 같은 이미지죠. 능청스런 동조에, 울프우드가 한동안 싸늘한 시선으로 제 동생을 바라본 것은 두말할 것도 없는 이야기였다.
그렇게 다시 시침이 시계를 한 바퀴 돌고, 어느새 가게 안에 세 사람 만이 남았을 때였다. 끊어지지 않던 대화 소리도 밧슈가 술에 취하면서 차츰 늘어지는 참이었다. 잔을 닦던 리비오가 울프우드의 기타 케이스를 잠시 바라보더니 물었다.
“아, 맞다. 그래서, 연주는 안 하고 갈 거야?”
“아깐 너무 늦게 온 거 아니냐더니? 지금 시간이 몇 신데…. 게다가 지금 아무도 없잖아.”
“아직 한 명 있긴 하지.”
정정하는 말에, 거의 빈 주스 잔을 까딱이던 울프우드가 아차, 하며 밧슈를 돌아봤다. 손님이긴 해도, 한동안 바 카운터에 붙어 리비오와 울프우드와 열심히 떠들어댄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 밧슈는 손만 휘저었다. 상관없다는 뜻이었다. 어쩐지 나른한 얼굴의 밧슈를 바라보다가 울프우드가 고개를 돌려 자신의 기타 케이스를 돌아봤다.
“지금 해도 저렇게 취해서 딱히 의미 없을 것 같긴 해.”
“그렇긴 한데… 내일 돌아가려면 지금밖에 없으니까. 내일은 안 열 생각이거든.”
“뭐야, 왜?”
“아마 잘걸?”
“허, 자랑이다. 네, 그… 뭐냐. 헬스 트레이너? 는 별 말 안 해?”
밧슈도 아는 사람이었다. 라즐로. 멀지 않은 곳에서 헬스장을 하고 있는 리비오의 지인이라던가. 형제라는 얘기를 들었던 것도 같고, 설명하기 복잡한 사이라고 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 몽롱한 사고로는 잘 떠오르지 않는 화제였다. 리비오는 끙, 앓는 소리를 내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걔는… 하지. 그래서 자주 안 열잖아.”
“멋대로구만.”
“내 가겐데, 뭐.”
“그야 그렇지.”
밧슈는 카운터에 턱을 괴고 두 형제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이 가게를 단골처럼 드나들긴 해도, 이렇게 취한 건 참 오랜만이었다. 느리게 끔뻑이는 눈꺼풀을 애써 들어 올리면서 울프우드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니 리비오가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자리를 떴다. 가게 안에는 밧슈와 울프우드 두 사람만이 남았다.
밧슈가 잠에 취해 앞으로 무너지려는 팔을 애써 바로 세웠다. 바로 옆 자리의 울프우드는 그런 밧슈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전히 새카만 눈동자지만, 기묘하게도 전과 같은 꺼림칙함은 들지 않았다. 울프우드는 웃는 건지 쓸쓸한 건지 알 수 없는 얼굴로 밧슈를 바라보다가, 곧 고개를 흔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노래 듣고 술이나 깨라, 빗자루 자식아.
오늘 처음 만난 사이에 하기엔 꽤 친근한 언사다. 밧슈가 눈을 끔뻑였다. 꿈인가? 하지만 그걸 재차 묻기도 전에 울프우드는 이미 저만치 멀어져 있었다. 기타 케이스에서 꺼낸 기타를 어깨에 멘 채로.
기타를 손에 든 그가 스테이지 위로 올라섰다. 바 한쪽 구석에 마련된 스테이지는 정말 낡고 좁아서, 걸음을 딛을 때마다 나무 삐그덕거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실내를 울렸다. 울프우드는 그 위에서 몇 걸음 걸어 보더니, 리비오가 사라진 문 쪽을 흘끔이면서 투덜거렸다.
“에라이. 기타라도 쳐 달라니 뭐니 할거면 무대 수리부터 하라니까.”
뾰족한 말투였지만, 정말로 기분이 나쁜 것 같아 보이진 않았다. 울프우드가 벽면을 더듬어 전등의 스위치를 켰다. 바로 위의 전등이 두어 번 깜빡거리다 켜지고 나니, 좀 오래되고 협소하긴 해도 번듯한 무대가 생겼다. 알딸딸한 정신이라도 남의 연주를 귀 기울여 들을 정신은 남아 있었던 밧슈가 턱을 괸 팔을 풀고 바로 앉았다. 음정을 맞추며 몇 번 현을 튕기던 울프우드가 고개를 들었다가, 그 모습을 보곤 비죽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었다.
그리고 노래를 시작했다. 시작하겠다는 말이나 소개는 불필요했다.
잔잔한 기타 선율 위로 여유로운 목소리가 붙었다. 대화를 내눌 땐 사뭇 날카로웠던 목소리였는데, 박자와 음이 붙자 듣기 좋은 중저음이 됐다. 머리 바로 위에서 쏟아지는 푸르스름한 빛이 울프우드의 얼굴 위로 음영을 드리웠다. 가볍게 몸을 까딱이자 그의 등 뒤로 그림자가 너울거렸다. 단단한 손가락이 넥을 훑는다. 구둣발이 느긋하게 바닥을 두드려 박자를 잡았다.
…I'll never let you go again like I did….
울프우드가 부르는 건 밧슈도 아는 노래였다. 부러 찾아 들은 건 아니었고… 어딘가의 길거리 공연에서 들었던가, 아니면 우연히 들어간 카페에서 적당히 틀어 둔 걸 들었던가. 어쨌든 들어본 노래였는데, 지금은 잘 기억이 나질 않았다.
지금은, 그래.
…I would never fall in love again until I found her…
그냥 노래가 들렸다.
그다지 대단한 노래는 아니었다. 드럼도 베이스도 없이, 그래봤자 낡은 기타 솔로 한 명. 그래봤자 마이크도 없는 보컬 한 명. 서툰 건지, 긴장한 건지 모를 손은 종종 음을 잘못 내기도 했다. 노래가 끊기지 않고 진행되는 건 순전히 모르는 척 넘어가는 덕분이었다. 지나가던 길에 마주쳤다면, 물론 밧슈라면 급한 일이 없다면 연주가 끝날 때까지 서서 들어 주었을 테다. 하지만 울프우드는 달랐다. 그 새카만 형상은 언뜻 유령 같아 보이기까지 하고, 기타 연주는 아직 조금 서툴었다. 사랑이니 널 찾고 있었다느니 하는 가사는 그의 얼굴관 지독히도 안 어울리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그 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어서.
…You fell, I caught you…
어느새 밧슈는 그의 움직임을 샅샅이 쫓는다. 새파란 눈이 찬찬히 남자를 훑었다. 한 치도 변하지 않은 모습을. 조용히 까딱거리는 구둣발과 피크를 쥔 손, 기타 넥을 짚는 손, 노래를 따라 흔들리는 동작. 그리고 찡그리듯 웃는 얼굴을.
…I lost within the darkness but then I found you…
울프우드가 밧슈를 보고 있었다. 어스름한 조명 아래서 노래가 끝난다.
…I found you.
이번 주 글리프 창작 주제가 밴드라길래 노래를 부르는 맹우가 보고 싶다! 에서 시작했는데… 어쩌다보니 울프우드만.
이것저것 플롯이 바뀌고 새로운 설정이 들어가고 하긴 했지만 간단히 말하자면 오래 전부터 기억하고 있던 울프우드가 아무것도 모르는 밧슈를 찾아가는 이야기입니다.
리비오는 아직 모르지만 라즐로는 아는 쪽이라던가, 얘네는 언젠가 같이 운동하다가 떠올릴 것 같다던가, 울프우드가 기타를 배우게 된 계기는 이전에 총을 쐈던 손으로 다른 뭔가를 하고 싶어서라던가… 가게 와서 기타 연주라고 하고 가라는 말을 리비오가 하긴 했지만 반쯤 농담이었고, 정작 단골 손님에 대한 설명을 듣다가 학기 중에 네 시간 운전해서 찾아온 건 울프우드의 자의였다던가. 생각나는 뒷이야기가 이래저래 많은데, 글에 표현도 못하고 따로 쓰고 싶단 생각도 안 드는 바람에 주저리주저리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 참 그렇네요.
노래 가사는 마지막 한 마디가 좋아서 선정했습니다. 울프우드는 늘 밧슈를 찾아내는 쪽이었으니까요. 세상이 한번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관계를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라 어쩔 수 없는 듯 합니다. 아래 어쿠스틱 기타 버전으로 들으며 작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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