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세계
1월 디페스타 신간 유료발행
1월 디페스타에서 발행했던 맹우 <새로운 세계>를 유료발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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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무수한 깃털의 형상을 본다.
비처럼 떨어져 내리는, 백지 같은 깃털들을.
목차
폭풍주의보
주극성
깨어서 꾸는 꿈
낯익고도 외로운 세계
폭풍주의보
꿈에서 깨어나는 순간은 늘 잔인한 법이다.
현실이라 믿어 의심치 않던 것들이 모조리 붕괴하고,
낯선 현실이 파도처럼 사람을 집어삼키는 순간.
남자는 비명과 함께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가로막혔던 호흡이 한발 늦게 터져 나왔다. 가쁜 숨을 몰아쉬다 심장 언저리를 움켜쥔 건 반쯤 반사적인 동작이었다. 그 동작에 흰 이불이 부스럭거리며 미끄러지고, 그리고 짧은 정적.
남자의 회잿빛 눈동자가 넓지 않은 방 안을 다급하게 훑었다. 부드럽게 나부끼는 남색 커튼, 벽 가운데에 걸린 십자가와 책 여러 권이 정연하게 꽂힌 책장, 탁자에 기대 세워 둔 호신용 라이플…. 재빠르게 굴러가던 시선이 탁자 위에서 멈췄다. 정확히는 어수선한 탁자 한구석의 작은 액자에서.
완전히 깨어나지 못한 정신으로도 그 액자에 대한 사실은 어렵지 않게 떠올랐다. 얼마 전의 대청소 날, 고아원의 현관부터 다락까지 먼지 한 톨 없게 쓸고 닦았던 날 찍은 사진이었다. 멀리서 카메라 셔터만 누르려다가 아이들 손에 이끌려 프레임으로 들어간 사진이기도 했다.
침대에 앉은 채로 남자가 심호흡했다. 사진 속에서 조금 어색하게 웃는 자신과 환한 아이들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으니, 차갑다 못해 뻣뻣하던 손에 차츰 온기가 돌았다. 그는 천천히 평온을 되찾았다. 그래, 집이다. 특별할 것 하나 없는 그의 집이었다. 위험하거나 불안한 건 없었다.
그러나 간밤의 꿈에서 원인된 불안은 쉽사리 잦아들 줄을 모르고, 남자는 좀처럼 심장 언저리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긴장으로 경련하는 손바닥 아래서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땀방울이 등을 따라 흘러내리고, 목덜미도 식은땀으로 축축해서 서늘한 한기가 돌았다. 머릿속에서 온갖 정보가 휘몰아쳐 어지러웠다. 남자가 이를 짓씹었다.
또 같은 꿈이다. 저번에도, 분명……
……
…분명, 뭐였지?
머리가 멍해졌다. 손에 잡힐 듯 어른거리던 진실이 순식간에 멀어졌다.
힘이 탁 풀어지는 게 느껴졌다. 송골송골 맺힌 땀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고, 희미한 불쾌감과 기억나지 않는 꿈의 잔상만이 안개처럼 남았다. 미간을 사납게 찌푸린 남자가 관자놀이를 짚었다. 등골이 서늘해지는 어둠이나 기억나지 않는 꿈 같은 것들이 멀어지고 현실이 들이닥쳤다. 콧잔등을 스치는 건조한 공기와 버석거리는 이불의 감촉, 무릎 위로 쏟아지는 햇볕의 온기 같은 것들이.
다만 여전히 찝찝하고 신경이 쓰이는 것만큼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 그는 깊이 한숨을 내쉬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어쩐지 요즘 좋지 않은 꿈을 자주 꾸는 기분이었다. 정작 깨어나고 보면 기억에 남는 게 없어서 그렇지.
그래도 일단 지금은 움직여야만 했다. 시계의 시침은 이미 숫자 7과 사이에 있었고, 두 번째 태양도 지평선에 걸려 있었다. 새벽 기도가 있는 날이 아니었으니 망정이지……. 남자가 혀를 찼다.
똑똑. 문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온 건 바로 그때의 일이었다. 조심스러우면서도 급한 기색이 역력해서 거의 한 번처럼 들리는 노크였다. 잠시 텀을 두고 기다렸다가, 조금 큰 소리로 한 번 더.
“울프우드, 괜찮아?”
걱정스러운 목소리는 문 너머로 들려오는 걸 감안하고서라도 귀에 익지 않은 자의 것이다. 하지만 그가 교회의 목사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방문자가 누구인지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그를 저렇게 스스럼없이 대하는 사람도 많지 않았거니와, 목사를 세례명이 아닌 성으로 부르는 인물은 더 적었다. 지금 이 도시에는 고작 한 명뿐이고.
남자가 망설임 없이 문을 열었다. 문턱을 사이에 두고 방문자가 손을 내렸다. 대답이 없어 다시 노크할 심산이었던 모양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찾아온 그는 평소처럼 새카만 머리카락을 빗자루처럼 세우고, 오렌지색 고글을 목에 건 차림이었다. 기장이 긴 외투는 이른 아침의 흐린 그림자 속에서도 선명한 붉은색을 띠었다.
남자가 방문자의 이름을 불렀다.
“세이브렘.”
“비명이 들린 것 같아서.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파란 시선이 걱정스럽게 안색을 살피는 게 느껴졌다. 목사는 조금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정말 괜찮다고 이야기하려면 아마도 웃는 편이 좋으리라는 사실은 그도 알았지만, 도무지 입꼬리가 움직이질 않았다. 그는 괜히 시선을 피하면서 대꾸했다.
“그냥 안 좋은 꿈을 좀 꿨어.”
“꿈?”
“별일 아냐. 벌써 기억도 안 나고.”
세이브렘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그러나 정말로 더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없었던 까닭에 남자는 시선을 피하기만 했다. 그는 주변인들에게 걱정을 사는 편이 아니라서 어떻게 대꾸해야 할지 감이 잘 잡히지 않았다. 심지어 그게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외부인이라면 더더욱.
세이브렘은 더 하고 싶은 이야기라도 있는 것처럼 주저하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좀처럼 눈이 마주치지 않자 곧 고개를 내저었다.
“…그럼 다행이네.”
“그런데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교회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
“아냐, 재스민이 부탁해서 온 거야. 그동안 한 번도 늦은 적 없었던 목사님이 오늘따라 너무 안 오신다면서 한번 보고 와 달라고. 설마 늦잠 잤을 줄은 나도 몰랐지만.”
그리고는 또 언제 심각한 표정이었냐는 것처럼 웃는다. 이 자식이 지금 늦었다고 멕이는 건가. 남자가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고, 세이브렘이 모른 척 돌아섰다. 짐짓 능청스러운 동작이다.
“아무튼 천천히 나와. 교회 사람들한테는 금방 올 거라고 전해줄게.”
말을 마친 세이브렘이 팔을 뻗었다. 검은 장갑을 낀 손이 남자의 어깨를 가볍게 쥐고 도로 집으로 밀어 넣었다. 아침도 잊지 말고 꼭 먹고! 경쾌한 목소리로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은 세이브렘은 당황한 남자가 어어, 하며 그를 붙잡기도 전에 후다닥 문을 닫았다. 이견은 안 받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별안간 조용한 집 안에 남겨진 남자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긴장이 풀린 탓인지 바람 빠지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제멋대로 들이닥칠 때는 언제고, 문밖의 걸음 소리가 멀어지는 게 들렸다. 남자는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느린 발걸음이 완전히 들리지 않게 되고서야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밧슈 세이브렘은 얼마 전부터 이 마을에 드나드는 플랜트 기사였다. 플랜트 기사는 상당히 바쁘다는 세간의 인식치고 상당히… 한가해 보이는 인물이기는 했지만.
이 황량한 사막 행성. 땅에서 나는 거라곤 독성을 띄는 곤충과 식용보다는 수송용으로 쓰이는 대형 토착 조류, 흙먼지 날리는 모래와 석유뿐인 곳이다. 에너지만 공급된다면 그 어떤 물질이라도 생산해낼 수 있는 플랜트는 그야말로 인류의 삶을 지탱하는 존재들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인류는 그들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에. 인류에 필적하는, 혹은 그 이상의 지능을 갖고 출처 모를 힘으로 물자를 구축한다는 사실만을 추측할 뿐, 그들은 백 오십여 년 전 인류가 잃어버린 기술 중에서도 가장 불가사의한 것으로 꼽혔다.
그런 그들조차 병과 노화를 피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인류가 이 땅에 착륙했던 초기에는 많은 플랜트들이 무분별하게 죽어 나가는 일도 있었다고 했다. 환경의 변화와 관리 부실로 인한 죽음들이었다. 그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나타난 자들이 플랜트 기사다. 그들이 갖는 힘의 원천은 물론, 머나먼 모성의 인류가 어떻게 그들을 창조했었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노맨즈랜드의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그야말로 눈부신 발전이었다. 죽어 가는 플랜트들의 병과 아픔을 알고, 소통을 위해 온갖 기계와 기술을 동원하고, 공감, 이해, 전달.
그리고 마침내 플랜트 기사라는 자들이 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걸린 시간만 자그마치 칠십여 년.
백 오십 년 역사의 절반이 넘는 시간을 할애하고서야 그들은 겨우 손을 잡을 수 있었다. 신문이나 라디오에서 떠들어 대는 내용을 들어 보면 그 외에도 이런저런 복잡한 사정이 많이 있었다고는 하는데… 어떻게 된 일이건 소도시의 목사 나부랭이인 남자는 잘 모르는 일이고.
간단히 요약하자면 어느 도시에서든 모셔 가려고 혈안이 된 고급 인력이라는 뜻이 되겠다. 어느 마을에서는 아픈 플랜트를 고쳐만 준다면 억만금도 줄 수 있다던가. 마을 하나 분의 목숨 값으로는 싼 편이긴 했다.
그러니까, 이틀 전 고아원의 말썽꾸러기들이 이제 우리도 비행기가 생겼다면서 문자 그대로 잡아 - 포획해 - 온 세이브렘이 자신을 플랜트 기사라고 소개했을 땐 남자도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뜻이다. 어린아이들은 아직 그 직업이 의미하는 바를 알지 못했고, 서툰 관절기에 당해 한바탕 흙바닥을 구른 세이브렘 본인도 크게 개의치 않는 바람에 남자만 이상한 꼴이 되기는 했다만.
“전 정말 괜찮아요. 아이들은 좋아하거든요. 사실 교회를 찾다가 골목에서 길을 잃었었는데… 이 아이들 덕분에 여기까지 안내받은 것도 있, 으악!”
대답하다가 신이 난 아이들에게 이끌려 한 번 더 우당탕탕 흙바닥을 굴러다닌 건 별개의 일이다.
어쨌든 밧슈 세이브렘은 정말로 신경 쓰지 않았다. 흙먼지를 툭툭 털고 일어나 아이들이 활기차서 보기 좋다며 일손을 돕게 해달라고 하더니, 아이들과도 곧잘 어울려 놀았다. 인간 정글짐 신세가 되고도 이이녀석들 내가 바로 밧슈 더 스탬피드다 어쩐다 하면서 뛰어다녔다는 뜻이다. 저래서야 본인이 신난 건지 아이들이 신난 건지 알 수 없겠다 싶을 정도로.
물론 갑작스럽게 나타나 접근하는, 그것도 무려 플랜트 기사씩이나 되는 자가 의심스럽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 다음 날 아예 근처에 있는 게 좋겠다면서, 교회 뒤편의 공터에 경비행기 한 대를 이끌고 나타나기까지 하자 그를 향한 불신은 더욱 깊어졌다. 플랜트에 이상은 없는지 점검해 주겠다고만 해도 먹고 잘 곳 정도는 마련할 수 있을 텐데.
하지만 그의 심정이 어떻건 아이들이 신나게 노는 데에다 초를 칠 수도 없고. 아이들은 간만에 힘 좋고 체력 좋은 놀이 상대가 - 공공의 적이 - 생겨 좋아했고, 세이브렘은 비행기를 태워 달라고 조르는 아이들은 위험하다고 달래면서도 열성적으로 아이들 사이에 섞여 놀았다. 분위기가 과열된다 싶으면 적절히 타이르기까지 하니 금상첨화였다.
옷매무새를 가다듬던 남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옷깃을 만지작거리며 깊이 생각에 잠겼지만, 그런다고 답이 나올 리는 없었다. 명확하게 형용하기 어려운 기분이 들었다. 묘한 불쾌감이나 새로운 존재에게서 기인한 불안감 같다가도, 낯익은 기시감의 형태를 보이기도 했다. 어쩌면 전부 다일 지도 모르는 거고.
밧슈 세이브렘.
괜히 그 이름을 입안에서 굴린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혓바닥이 꺼끌꺼끌했다. 수상한 자를 향한 의심과는 조금 결이 다른 감각이었다. 사라진 아이나 물건을 찾을 때도, 뭔가 결정을 내려야 할 때도 해답을 찾아 주곤 했던 그의 직감마저 이상할 만큼 잠잠해서 도통 결정이 서질 않았다.
고개를 흔든 남자가 그대로 집을 나서려다가 벽에 걸린 십자가에 대고 손을 모아 쥐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무튼 오늘도 별일 없게 해 주소서. 아멘.
모아 쥐었던 손을 풀고 남자가 문고리에 손을 올렸다. 가볍게 밀어 열고 밖으로 나서는데 창가에 놓인 오래된 라디오에서 지지직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다음은 일기 예보입니다. 이스트 디셈버를 향해 북상 중인 대형 폭풍이 내일 오후 도시를 관통할 것으로 보이며…….
이내 문이 닫힌다. 집 안은 다시 정적에 휩싸였다.
멀리서 뛰어놀던 아이 몇이 그를 발견하고 크게 손을 흔들었다. 니콜라스 목사님! 신나게 부르는 목소리가 정겨웠다. 안대로 눈을 가리고 아이들을 찾아 뛰어다니던 세이브렘이 안대를 풀었다. 술래잡기라도 하고 있던 듯했다.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쳤고 남자는 감사의 뜻을 담아 고개를 까딱여 인사했다. 세이브렘이 어색하게 웃었다.
“뭘. 별일도 아니었는데.”
“별일이 아니었다기엔 운이 좋았죠. 누가 찾아오기라도 했다간 꼼짝없이 늦잠 자서 교회도 내버려둔 불량 목사 취급을 받았을 텐데.”
좋은 아침이에요, 니콜라스 목사님. 교회 안쪽에서 멜라니 아주머니가 웃는 얼굴로 걸어 나왔다. 그 옆에 바구니를 든 재스민도 함께 있었다. 뼈아프지만 틀리지 않은 말이었으므로 남자는 반박하지 못하고 끙, 앓는 소리만 냈다. 남자는 할 말이 없다는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결국 고개만 휘휘 내젓고 말았다.
“불행한 어린 양을 아버지께서 굽어살피신 거죠. 너희도 기도 열심히 해라, 그러다 보면 오늘 나처럼 한번쯤 봐 주실 테니까.”
남자 주위로 다가온 아이들이 와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멜라니 아주머니가 못 말린다는 듯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눈을 반짝이는 아이들의 머리를 대강 쓰다듬고는, 돌아서서 교회로 들어가려던 남자가 문득 멈춰 섰다.
“그리고보니 내일 폭풍 예보가 있던데요. 오후쯤부터.”
“이런, 정말요? 오늘은 좀 분주하겠네요. 빨랫줄이나 유리창도 한번씩 손봐야겠고….”
“지붕은 제가 확인할게요. 어제 수리하면서 간단히 보긴 해서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멜라니 아주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랫동안 아이들을 돌봐 온 아주머니는 이런 때에도 뭘 해야 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오늘 내로 확인해야 하는 것들을 적당히 나누고, 아이들에게 하나씩 도와 달라고 부탁하고…….
“밧슈 씨는 안에서 저하고 재스민을 좀 거들어 주시겠어요?”
한 발짝 떨어져서 아이들과 아주머니, 그리고 남자를 바라보던 세이브렘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아, 네! 남자는 재빨리 멜라니 아주머니의 뒤를 따라 고아원 안쪽으로 들어서는 세이브렘의 새카만 뒤통수를 잠시 바라봤다. 목사님? 빨래터로 향하려던 재스민이 그 모습을 보고 고개를 기울였다. 남자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지붕으로 향하는 사다리에 올랐다.
멜라니 아주머니의 지휘와 아이들의 노력 끝에 폭풍 대비는 순조로웠다. 평소보다 일손이 는 덕분도 있었다. 남자가 지붕의 깨진 부분을 수리하고 날아가지 않도록 고정하는 동안 아이들과 세이브렘은 마당의 물건들을 실내로 들여놓고, 유리창에 테이프를 붙이거나 판자를 댔다. 오전에 널었던 빨래도 해가 지기 전에는 들여놓을 테다.
점심 식사를 마쳤을 무렵에는 그를 찾는 사람이 몇 명 찾아오기도 했다. 남자가 목사로 있는 교회는 규모도 작고, 지금에 와서는 예배를 위한 교회의 역할보다도 고아원의 역할이 큰 덕분에 남자는 주로 고아원의 일손을 도우면서 하루를 보내고는 했지만 그렇다고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건 아니었다. 남자는 목사로서 성심성의껏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또 기도했다.
대화를 마치고, 사람들을 돌려보낸 뒤 밖으로 나왔더니 교회 문 옆에 세이브렘이 서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벽에 낙서라도 하다 걸린 어린애처럼 눈에 띄게 펄쩍 뛰었다. 수상하기 짝이 없는 반응에 남자가 미간을 좁혔다.
“뭐야?”
“…어어, 아무 일 없어. 별일 아냐.”
남자도 그때야 깨달은 사실인데, 세이브렘은 거짓말에 별 재능이 없었다. 뚫어져라 보고 있으니 슬금슬금 시선이 어긋났다.
“고아원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아니, 그건 아니고…….”
“그럼 뭔데.”
미간을 찡그린 세이브렘이 끙, 앓는 소리를 내면서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뭔가 골치 아픈 일이라도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이 분. 세이브렘이 한 마디도 하지 못한 이 분이기도 했고, 남자의 인내심이 바닥난 이 분이기도 했다. 남자가 미련 없이 돌아섰다.
“간다.”
“뭐? 잠깐, 잠깐 기다려!”
“이 자식이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똑바로 얘기 안 해?”
“그게, 그러니까…….”
“한번만 더 말꼬리 흐렸다간 진짜 간다.”
울프우드, 매정해! 세이브렘이 웃기지도 않은 얼굴로 항변했다. 물론 남자는 귓등으로도 안 들었다. 다시 길지 않은 침묵이 흘렀고, 남자가 완전히 몸을 돌려 버리기 직전이 되어서야 세이브렘이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어, 알았어. 미안. 다른 게 아니고… 지금부터 플랜트 점검하러 시청에 다녀올 건데, 같이 가자고 할까 싶어서.”
저렇게 터무니없는 물음일 줄 알았다면 기다릴 필요도 없었을 텐데. 남자가 팔짱을 꼈다.
“방금 일하고 나온 목사한테 그게 할 소리냐. 교회를 비워두라고?”
“원래 폭풍이 오는 전날은 일찍 닫는다며. 여긴 고아원이 딸리기도 했고, 다른 사람들도 폭풍 대비로 바쁠 테니까.”
아예 틀린 말도 아니었으므로 남자의 한쪽 눈썹이 위로 들렸다. 그 얘기 누구한테 들었냐? 세이브렘은 눈동자를 한 바퀴 굴리고는 대답했다. 멜라니 아주머니가.
이쯤 되니 남자도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남자가 희미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멜라니 아주머니로부터 말을 들은 건 맞을 터였다. 고아원에서 교회 사정을 그렇게 잘 아는 사람이라 봐야 많지 않았고, 외부인인 세이브렘이 그들의 사정을 혼자 알아냈을 리도 없었으니까. 그런데 왜? ……오늘이 무슨 날인가?
고민하던 남자의 머릿속에 불현듯 이번 달 달력이 스쳐지나갔다.
“…그리고보니, 오늘이 12월 6일이었던가.”
세이브렘이 켁, 목 졸린 듯한 소리를 냈다. 들켜선 안 될 걸 들키기라도 한 기색이다. 정말이지 말을 꾸며내는 데엔 재주가 없는 놈이었다. 아하. 깨달음의 탄식이 남자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세이브렘이 허둥거리기 시작했다.
“아니, 아닐걸, 오늘 7일 아냐? 6일인가?”
씨알도 안 먹힐 말이었다. 남자가 측은하게 세이브렘을 바라봤고, 결국 그가 어깨를 떨어뜨렸다. 남자가 바람 빠지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매년 하던 거라 신경 안 써도 돼. 몇 시까지 오래?”
“……일곱 시.”
“딱 적당하겠네. 가자. 시청.”
이래서야 주객이 전도된 모양새다만, 어쨌든. 터벅터벅 힘없이 걷는 세이브렘이 얼굴이 어쩐지 울상이었다. 그 모습이 어쩔 수 없이 웃겨서 남자는 한 번 더 킬킬거리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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