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우

그 때로 돌아간다면

노맨즈랜드 by f3t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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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프우드가 조용히 눈을 떴다. 푸르스름한 커튼이 드리운 창문 밖이 겨우 희끗하게 밝아 오고 있었다. 팔을 쭉 펴면서 그는 탁상 위에 놓인 시계의 숫자를 읽었다. 오전 여섯 시 십삼 분. 휴일 아침을 시작하기엔 적잖이 이른 시간이었으나, 아무렴 어떤가. 그는 침대가 흔들리지 않게 조심히 몸을 일으켰다.

문을 열고 나가면서 그는 흘긋 뒤를 살폈다. 다행스럽게도 미동도 없이 잠든 빗자루는 깬 기색이 없다. 울프우드는 완전히 침실에서 빠져나와, 조심히 문을 닫았다.

오늘은 모처럼 온종일 집에서 쉬어도 되는 날이었다. 달리 일정이 있는 날도 아니었으며, 미리 세워 둔 계획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이렇게 일찍 일어날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일찍 눈이 뜨인 이유라고 한다면… 글쎄, 꿈자리가 안 좋았나. 오랜만에 오래 전의 꿈을 꾼 건 사실이었으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아직까지도 잘 믿기지 않는 일이었으나 그는 두 번 살고 있었다. 오래 전 그는 이 지구에서 몇 억 광년 떨어진 사막 행성에서 몇 해를 살았고 죽었다. 그리고 다시 태어났다. 약 이십 년 치 기억을 떠올려낸 건 일곱 살 때. 동생들과 숨바꼭질을 하던 중이었다. 크게 충격을 받지는 않았다. 행성과 환경이 바뀌었달 뿐이지 그의 곁에 있는 사람들은 기억 속과 비슷했던 까닭이다. 어떻게 된 일이건 일곱 살의 어린애가 거부할 수 있는 종류의 상황도 아니었거니와, 딱히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이곳에는 그가 사랑했던 모든 이들이 숨 쉬고 살아가고 있었다. 훨씬 풍족했으며 그는 살인함으로써 목숨을 구가하지 않아도 되었다.

울프우드는 더 이상 쫓거나 쫓기지 않아도 되었으며 그를, 그리고 그의 가족을 위협하는 두려움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이곳에서 온전히 니콜라스 D. 울프우드로 남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빗자루가 있었다. 밧슈 더 스탬피드가.

그와는 이 년 전에 학교에서 만났다. 이곳에서는 스탬피드 대신 세이브렘이라던데, 울프우드로선 그 이름이 좀처럼 입에 붙지 않아 고민이었다. 서로 기억이 있다는 걸 알게 된 계기도 무의식적으로 밧슈 더 스탬피드라 부른 탓이었으니 말은 다 한 셈이다. 언젠가 이 사실을 고백했더니 어차피 빗자루라고 부르면서 무슨 상관이냐는 소리를 듣기도 했었다.

사실 멀쩡한 이름을 두고 언제까지 빗자루라는 웃기지도 않은 호칭으로 부르긴 조금 미안하다 싶어 시도해 보지 않은 건 아니었는데, 언젠가 밧슈, 하고 불렀더니 이름이 불린 본인도 상당히 충격받은 얼굴로 쳐다보기에 깔끔하게 포기했다. 이제는 정말 될 대로 되겠지 싶었다. 본인도 빗자루 쪽이 더 좋다는데 별 수 있나.

실없는 기억을 떠올리면서 울프우드가 낮게 웃음을 터뜨린다.

호칭이 어떻고 딛고 선 별이 어떻던, 중요한 점은 종족이나 수명의 문제도 더는 두 사람을 갈라놓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적어도 지구에서만큼은 두 사람 모두 특별할 것 없이 살아온 생물이었다. 이 곳에서 울프우드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스물 두 해를 살았고 밧슈는 그보다 약간 덜 살았다. 백 사십 몇 년이 아니라, 고작해야 몇 개월 정도.

그들은 비로소 그런 일상을 살아가고 있었다. 세계를 뛰어넘어서야.

 

 

아직 새벽의 한기가 감도는 거실을 둘러본 울프우드가 주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조금 이른 시간인 게 걸리기야 하지만, 뭐… 안 되겠다 싶으면 깨워야지. 시간이 몇 시건 오늘 아침 당번은 울프우드였다. 절대로, 저번에 빗자루 자식이 아침 먹으라며 여섯 시에 이불을 뺏어가서 이러는 게 절대로 아니었다.

사실 맞았다. 그날 울프우드는 과제를 하다 새벽 세 시에 겨우 잠든 참이었다. 다크서클을 늘어뜨린 채 노려보고 있었더니 빗자루도 제 잘못을 아는지 곱게 이불을 돌려주기야 했지만 원래 니콜라스 D. 울프우드는 은원이 확실한 사람이었다. 받은 게 있다면 돌려줘야지. 그가 음흉하게 웃으면서 프라이팬을 꺼내 들었다.

아침부터 거창한 걸 하기도 좀 그렇고, 간단한 토스트 정도가 좋겠지. 어제 빗자루가 사 온 파운드케이크도 있으니 커피와 함께 먹으면 나쁘지 않을 테다. 메뉴를 결정한 울프우드가 재료를 꺼내 막 가스불을 켰을 무렵이다. 울프우드는 주방 식탁 옆에 누군가가 그림자처럼 서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도로 불을 껐다.

애초에 둘 뿐인 집이니 그게 누군지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모르는 사이 일어난 밧슈였다. 밧슈가 고개를 숙인 채 팔을 늘어뜨리고 서 있었다. 밧슈는 섣불리 입을 열지 않았지만 울프우드는 그가 불안정한 상태임을 깨달았다. 울프우드가 선뜻 팔을 벌린다.

“이리 와.”

“…울프우드.”

“그래, 여기 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밧슈는 느린 걸음으로 다가와 매달리듯이 울프우드를 꽉 끌어안았다. 규칙적으로 밧슈의 등을 두드리면서 울프우드도 마주 안았다. 아마 좋지 않은 꿈을 꾼 모양이지. 그는 밧슈의 몸에 팔을 두른 채 옛날 일을 생각했다. 예전에는 상처가 많아서 이것보다 거칠었고, 환경 탓인지 좀 더 덩치가 있는 느낌이었던 것 같은데…….

 

“또, 울프우드. 다른 생각 하지.”

“안 했는데.”

 

능청스레 냉큼 대답했지만 통할 리 없다. 눈치 빠른 빗자루 같으니. 울프우드가 재빨리 화두를 돌렸다. 그래서 오늘은 왜 이래?

밧슈는 울프우드보다도 훨씬 더 그 별에 오래 살았다. 예상하건대 그가 죽은 후로도 훨씬 더 긴 시간을. 그래서일까. 그 시절의 꿈을 꾸는 주기도 짧고, 받는 영향도 더 컸다. 아마 오늘도 그런 모양이었다. 밧슈가 울프우드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고 웅얼거렸다.

 

“안 들려.”

“……줄라이. 줄라이가, 사라지는 꿈이었어.”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이건 진짜 좀.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은 울프우드가 밧슈를 좀 더 단단히 안았다. 그서야 다칠 일도, 살아남기 위해 훈련할 일도 없는 부드러운 몸이 희미하게 떨리고 있음이 느껴졌다.

울프우드는 조심스럽게 말을 골랐다. 평소였다면 소용없는 일에 마음 쓰지 말라고 일갈이라도 했겠지만… 오늘은 모처럼의 이른 휴일 오전이다. 그는 성직자의 자비를 베풀기로 결정했다. 아니면 몇 개월 형 겸 동거인으로서의 조언이던가.

 

“빗자루.”

“응.”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어떻게 할 것 같냐. 그 별에 살던 때로.”

 

밧슈가 몸을 굳혔다. 울프우드가 먼저 이런 말을 꺼냈다는 걸 믿을 수 없는지 고개를 돌리는 게 느껴졌다. 울프우드는 움직이지 않고 밧슈의 등을 일정하게 두드리기만 했다. 짧은 정적이 흐른다.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뭐, 지금은 운 좋게 이런 곳에서 살고 있지만… 가끔은 그런 생각도 들거든. 사실 현실은 한쪽뿐이고 다른 쪽은 단순한 꿈이 아닐까 하고.”

“…그냥 꿈이라니, 그럴 리가 없잖아.”

“물론 너라면 아니라고 하겠지. 다만 나는 누구랑은 다르게 그쪽에서도 이쪽에서도 찔끔밖에 안 살아본 젊은 사람이라 말이다.”

 

아, 예…. 젊어서 좋겠네요. 밧슈가 투덜거렸고 울프우드가 킬킬거리면서 대꾸했다.

 

“당연히 좋지. 난 안 하거든, 그런 생각.”

“뭐야, 나도 그런 생각은 안 해. 돌아가고 싶다니….”

“글쎄다, 하는 것 같은데.”

 

울프우드가 팔을 풀고 밧슈를 가볍게 밀었다. 몇 걸음 물러난 밧슈가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울프우드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하긴, 뭐. 그렇게 오래 살았으면 그럴 만도 해. 몇 년이랬더라? 그쯤이면 할아버지라 부르기도 민망한데. 아니 진짜 아까부터 자꾸 이상한 소리 하네?! 나 그래도 울프우드 애인이거든?! 결국 밧슈가 발끈했다. 울프우드가 짧게 웃고는 말을 이었다.

 

“그만두란 애긴 안 한다. 그런다고 네가 금방 그걸 떨쳐낼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그만큼 오랫동안 그곳을 지켜봤으니까. 대신 노력 정도는 해. 우리가 있는 곳은 노맨즈랜드가 아냐,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없어. 죽인 사람도, 구하지 못한 사람도. 모두 그곳의 일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걸 최대한 오래 기억하는 것 정도가 다야.”

“…울프우드.”

“이런 말 하기엔 내 코가 석 자긴 하다만. 아무튼 너무 짓눌리지 말라는 뜻이다. 옆에서 건져 주는 것도 한계가 있어. 어린애도 아니고 달에 한 번씩 이게 무슨 일이냐. 잠도 같이 자면서.”

 

다시 한발 다가온 밧슈가 울프우드를 껴안았다. 식었던 몸에 차츰 온기가 돌았다. 그는 가만히 천장을 올려다봤고, 밧슈는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은 채 한참 침묵하더니 한참이 지나서야 어물어물 물었다. ……그래서 싫어? 울프우드가 웃음을 터뜨린다.

 

“설마. 자기 전에 자장가라도 불러 줘야 하나 고민하던 중인데.”

“아, 됐거든?”

“그럼 배고프니까 얼른 아침이나 먹자. 커피 좀 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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