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우

환향

노맨즈랜드 by f3t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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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사적 측면에서 이야기하자면 노맨즈랜드는 실패한 행성이다.

무거운 중력, 희박한 수분, 온 행성을 뒤덮은 사막. 아무리 플랜트들이 협조한다고 해도 그곳은 인간이 살아남기에는 너무나 척박한 행성이었다. 지오플랜트가 가동되지 않으면 기껏 심은 식물도 금세 죽어버리고, 땅 속에는 물 대신 석유가 흐르는 땅. 그곳의 삶에 대한 많은 기록들도 그들이 생활 전반을 플랜트에 의지하는 불안정한 형태로 살아가고 있었다고 진술했다.

물론 연방 정부는 쉽사리 포기하지 않았다. 한때 인류의 모성이었으나 지금은 오염 물질로 뒤덮여 발 디딜 수조차 없는 지구보다야 조금 살기 힘든 사막 행성의 상황이 훨씬 나았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 곳에는 걸을 수 있는 땅과 숨 쉴 수 있는 공기가, 파란 하늘이 있었다. (물론 이건 표면적인 입장이고, 그 행성의 인류 모두를 이주시키는 것보다 그 행성에서의 생존 권역 확장이 조금 더 싸게 먹혔던 이유도 있기는 했다.)

쉬운 작업은 아니었다.

초거대 융합체를 형성한 자립종 플랜트가 그곳에 도달한 첫 번째 함선을 공중분해 시킨 것이 첫 번째 문제였다. 전대미문의 사태였던 바, 연방 정부는 해당 개체의 반응이 소실된 이후로도 한동안 노맨즈랜드의 자립종에 대한 경계를 늦출 수 없었다.

두 번째로는 플랜트의 도움 없이 식수와 식량을 조달할 방법을 찾는 게 문제였고, 노맨즈랜드에 자생하는 곤충형 외계 생명체 ‘웜즈’와의 충돌이 세 번째 문제였다. 그 외에도 그 사막 행성에서 인류 문명이 당면한 문제는 수도 없이 많았고, 그 해답을 찾는 동안 그 별의 문명은 점차 시들어가고 있었다.

결국 노맨즈랜드 서력 374년. 인류 최후의 도시 디셈버의 플랜트 관리자가 쌍둥이자리 너머로 향하는 콜드 슬립에 든 것을 끝으로, 연방 정부는 해당 행성을 인류 거주 불가 지역으로 규정했다. 행성에 대한 모든 지원은 중단되었으며 노맨즈랜드는 한때 인류가 불시착했던 죽음의 별로 기록되었다.

 

 

계기판의 착륙 표시가 천천히 깜빡였다. 중력 확인, 공기압 확인, 대기 중 유해 물질 확인. 딱딱한 기계음이 형식적인 검사 결과를 뱉었고, 남자는 발을 까딱이면서 그 소리를 듣고 있었다. 이내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기체가 완전히 땅에 내려앉았다. 의자에 몸을 밀착한 채 눈을 감고 있던 남자가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뻣뻣하게 굳은 몸을 쭉 펴면서 늘어져라 기지개를 켜고는, 선반 위를 더듬어 무전기를 찾아냈다.

여기저기 흠집이 난 무전기의 붉은 LED가 불안하게 깜빡였다. 남자는 조금 질린 얼굴로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정확히 십 초가 흐르자 옆면을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총 세 번. 더 때렸다간 무전기도 없이 이 먼 행성에서 실종되는 거 이냐? 스멀스멀 불안감이 엄습할 무렵에야 상단의 전구가 노란색으로 점멸했다. 연결되었다는 뜻이었다.

 

“보고합니다. N-471 노맨즈랜드 착륙, 문제없음. 이상.”

 

곧 무전기가 지지직거리면서 목소리를 뱉었다. 인류가 퇴거하던 당시 행성 주위를 공전하던 위성도 함께 작동을 정지한 까닭에 절망적인 연결 상태였다. 무전기의 싸구려 스피커 너머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노이즈가 잔뜩 낀 주제에 거창하기까지 해서, 그는 한참동안 스피커를 귀에 들이대고 인상을 써야 했다.

그렇게 용을 써서 들은 지령은 언뜻 듣기엔 사뭇 대단한 말이라도 되는 것처럼 장황했다만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앞으로 수고하라는 의미였다. 무전기가 마지막으로 기계음을 두 번 냈다.

그리고 정적.

그는 경쾌하게 손목을 움직였다. 손끝을 떠난 무전기가 깔끔한 포물선을 그리며 짐 무더기 위에 안착했다. 행성에서 그가 수행해야 할 것들은 이미 모두 숙지되어 있는 상태였고, 다음 보고 예정일은 행성을 떠나기 직전이다. 당분간은 저놈의 고물 무전기를 꺼낼 일도 쓸 일도 없으리라. 예산도 많은 자식들이 작작 좀 해 처먹고 무전기나 바꿔 줄 것이지. 투덜거리면서 그는 다시 운전석에 주저앉았다.

유리창 너머로 들이치는 햇살이 뜨거웠다. 남자는 군복 오른쪽 가슴의 주머니에서 선글라스를 꺼내 썼다. 물 흐르듯이 담배까지 꺼내 물려다가, 이 탐사선이 그의 생명줄이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어렵사리 관뒀다. 한동안 못 피워서 아쉽긴 하다만 목숨과 맞바꿀 정도는 아니었다.

지평선 멀리서 초대형 웜즈가 모래 위로 뛰어올랐다. 먼 곳에서 모래가 파도처럼 크게 일었다가 곧 고요해졌다. 정착이 실패한 것도 저런 웜즈들 때문이라더니. 생각에 잠겼던 남자가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짙은 모래 먼지와 함께 탐사선의 바퀴가 모래 위를 내달리기 시작했다. 천장에 매달린 작은 십자가만이 찰랑찰랑 흔들린다.

남자는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다른 손으로는 계기판을 두드려 지도를 띄웠다. 그가 확인해야 할 사항은 사과나무 군락지였다. 이 죽음의 황무지 별에서 그냥 사과나무도 아니고 군락지라니 무슨 헛소리인가 싶다마는, 아무튼 있단다. 인류가 이 별에 살던 시절부터 아직까지 그 생명을 이어 나가고 있는 초대형 사과나무가, 그리고 그 한 그루를 중심으로 자라난 숲이.

그 때문에 본 함에서 출발하기 직전까지 그 문제의 사과나무 군락지 및 온갖 행성의 과실수에 대한 설명을 머릿속에 입력하는 악몽 같은 시간을 견뎌야 했다. 안타깝게도 그가 군인이고 그런 지식과 이백 광년 즈음 떨어진 삶을 살아왔다는 건, 그 상황을 모면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의 담당이었던 과학자는 도리어 눈을 빛내며 이번 조사의 중요성과 그 조사의 밑바탕이 될 사전 정찰, 다시 말해 남자가 맡은 작업의 필요성을 설명하는 데 열을 올렸다. 그렇다고는 해도 영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는 건 마찬가지라 반쯤 졸면서 들었던 것들이었는데.

지도를 들여다보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가, 허, 하고 헛웃음을 뱉었다. 다시 지도를 향했던 시선이 금세 위로 들렸다.

 

“…이건 정말 눈이 뒤집힐 만 하네.”

 

정말이지 비현실적이기 짝이 없는 광경이었다, 그건.

온통 모래뿐인 지평선 끝자락의 작은 점처럼 보이던 녹색 형체는 손톱만하다가, 사람 크기였다가 결국엔 온 시야를 빼곡하게 가렸다. 허공을 향해 뻗은 푸른 이파리들이 천장처럼 하늘을 덮어 큼지막한 그늘이 졌다. 그 거대한 나무 곁으로도 키 작은 것들이 듬성듬성 뿌리를 내려 작은 숲을 이루고 있었다. 모래의 망망대해 한 가운데에서.

흉터 많은 손가락이 다시 기판 위를 두드렸다. 미끄러지듯 굴러가던 바퀴가 점차 느려지다가 곧 정지했다. 그는 조금 조급한 손길로 문손잡이를 쥐었다. 문을 열고 모래바닥에 내려서면서, 남자기 믿기 어렵다는 듯 선글라스를 위로 들어올린다.

시야를 가득 채운 녹색, 직선으로 뻗은 짙은 갈색 가지, 코끝을 스치는 달큰한 과실의 냄새… 정말 나무가 있었다, 인간도 플랜트도 남지 않은 이 별에.

모래 위로 쌓인 낙엽 때문에 나무 주위의 모래만 색이 검고 푹신했고, 바닥을 떨어져 구르는 사과에서는 코를 찌르는 단 내가 풍겼다. 왱왱거리는 작은 웜즈를 손을 휘저어 쫒으면서 남자가 손을 뻗었다. 낮은 가지에서 사과 하나를 잡아당겨 따고는 옷에 문질러 먼지를 닦아냈다. 반들반들 윤이 나고 벌레 먹은 기색도 없는 게, 본 함에서라면 높으신 분들 식탁에나 올라갈 법한 과일이었다.

돌아가기 전까지 사과나 실컷 먹어야겠군. 웜즈들도 신이 나서 처먹고 있는 걸 보니 인간이 먹는다고 죽지는 않을 테다.

하지만 크게 사과를 한 입 베어 문 남자는 즉시 전언을 철회했다. 단 맛을 즐기지 않는 그에겐 지나치게 달았던 탓이다. 그가 먹기는 무슨, 디셈버 도시 터의 동쪽에서 합류하기로 되어 있는 동료에게나 몇 개 주워다 줘야 할 판이다. 단 걸 좋아하는 놈이니 아마 반기면 반겼지 거절하진 않겠지 하는 추측이었다.

그래도 그는 그 자리에서 사과 하나를 다 먹었다. 단 과즙 때문에 혀가 아리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는 선글라스를 벗어 넣고 천천히 걸었다. 숲은 깊이 들어갈수록 보다 울창해졌다. 얼마나 울창하게 자란 건지 한낮인데도 그늘 안쪽은 밤처럼 어두컴컴했다. 가장 거대한 나무 앞에 도달하고서야 걸음을 멈춘 그가 한동안 머리 위를 올려다봤다. 흔들리는 나뭇잎 사이로 시원한 바람이 불었고, 빽빽한 나무줄기 사이로는 먼 사막의 풍경이 신기루처럼 비쳐 보였다.

언뜻 듣기로는 이 행성에 자생하던 생물의 돌연변이다 아니다 다른 외계 존재가 심은 나무다 웃기지 마라 지오플랜트 개간 과정에서 나타난 사과나무의 아종이다 하는 추측이 난무한다던데, 직접 보니 의견이 분분할 만도 했다. 직접 눈앞에서 보고 있는 그조차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을 지경이었으니 사진만으로 뭔가 알아낼 수 있을 리가. 마침 떨어진 이파리가 머리 위로 내려앉아 그는 고개를 흔들어 털어냈다.

어쨌든 달리 위험한 것도 보이지는 않고, 조심해야 할 사항이라곤 까마득한 높이에서 떨어지는 주먹만 한 사과뿐이라고 보고하면 되리라. 자그마한 웜즈가 좀 많긴 한데 모기처럼 무는 것도 아니고, 하나같이 사과에 정신이 팔려 왱왱거리기 바빴다. 채식한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 없는데 몇 백 년 간 진화라도 한 모양이었다.

미련 없이 돌아서려던 남자의 시야에 나무 그림자 같은 형체가 잡혔다. 그가 반사적으로 걸음을 멈췄다.

 

자그마한 오두막이었다. 나무 그림자에 가려져 보지 못한 모양인데, 이 곳까지 오던 길에 발견했던 무너진 술집이나 마을의 잔해와는 확실히 다른 모습이었다. 상당히 낡은 외양인데도 용케 멀쩡한 꼴이었다. 창문에는 두껍게 먼지가 껴 안쪽이 보이지 않았고, 문고리며 경첩에는 녹이 슬었으며 지붕 위엔 나뭇잎이 층을 이루며 쌓여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무너지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관리가 전혀 되지 않은 걸 보니 누가 살고 있지는 않고, 아무래도 몇 백 년 전의 유적이 기적적으로 그 형태를 유지한 것에 불과하리라.

하지만 그는 불현 듯 저 곳을 확인해야겠다는 직감에 사로잡혔다. 별다른 이유나 논리조차 없이, 다만 반드시 그래야겠다는 생각에 휘감겼다. 누군가가 등을 떠밀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가 천천히 문을 향해 다가선다. 발밑에서 마른 이파리들이 바스락대며 부스러졌다. 문고리를 잡았더니 거친 쇠의 감촉이 장갑 아래로 도 느껴졌다. 힘을 실어 당기자 오래된 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 인간이 온 건 오랜만인데.

 

기이한 목소리가 울린 게 바로 그 때였다. 명확하게 사람의 언어면서도 인간의 음성은 아닌 것. 문을 등지고 돌아선 건, 이성보다도 몸에 새겨진 습관이나 다름없었다. 본능적으로 빼든 권총이 손에 들려 있는 채였다. 검은 눈동자가 급하게 주위를 훑는다. 한차례 바람이 불어 나뭇잎이 솨아아 길게 울었다.

 

― 너무 그러지 마. 이래봬도 꽤 반가워하는 중이거든.

 

머리 위에서 다각거리는 소리가 났다. 수백 쌍의 다리가 나뭇가지 위를 훑는 소리였다. 그는 고개를 들었다가 아연해졌다. 늙은 고목을 타고, 거대한 웜즈가 땅을 향해 내려오고 있었다. 벌레의 형상이었으나 오래된 구전 속의 뱀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남자가 총구를 들어 그것의 머리를 겨눴다. 아마 크게 도움이 되지는 않겠지만.

 

― 너희는 참 재미있단 말이지. 아주 오래 전에 쫓기듯 도망쳐놓고 다시 이 별에 발을 들이다니. 수명도 짧은 주제에 이제 와서 뭔가를 찾으러 온 건지, 아니면 건방지게 또 이 별을 지배하려 들 셈인 건지… 어느 쪽이야?

“미안하지만, 그런 건 나중에 오는 놈들한테나 물어봐. 난 그냥 정찰대라 아는 게 없거든.”

― 기껏 큰마음 먹고 모습을 드러냈더니 어째 놀라지도 않고. 아니, 이건 네가 특이한 건가? 예전 인간들은 이 정도 크기면 혼비백산해서 도망가기 바빴었는데.

“…글쎄, 어떨까.”

 

바람 소리 사이로 수천 장의 벌레 날개가 스치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이 웃고 있음을 알아차린 남자가 인상을 썼다.

 

― 우와, 기분 나쁘니까 할 말 다 했으면 빨리 꺼지라는 얼굴.

 

남자는 대답 대신 권총의 손잡이를 더 단단히 쥐었다. 예의 그 벌레 날개 소리는 점점 더 커졌다. 온 사방에서 웜즈가 날갯짓하는 듯한 기이함이었으나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이미 알아차리고도 행동하지 않는 이유는 모르겠으나, 저것을 인간의 사고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만큼은 잘 알고 있었다. 인간을 쉽사리 먹이 삼지는 않겠지만, 섣불리 대답했다간 무슨 결과가 나올지 예측하기 힘들다는 것도.

소리는 한순간에 시작되었듯이 한순간에 멎었다.

 

―재미없긴. 뭐, 됐어. 나도 갑자기 총 맞는 건 싫으니까, 네 말대로 다음에 오는 인간들이나 기다려 보지. 오늘은 모처럼이니 그냥 보내주지만... 다음에 오게 되면 더 그럴듯한 변명을 생각해 오는 게 좋겠어.

 

이어지는 목소리는 흥미를 잃은 기색이 명백했다. 인간이 그러하듯 머리에 해당될 법한 부위가 가볍게 좌우로 흔들렸다. 아래에서 올려다보기엔 위협적인 동작밖에 안 되었으므로 남자는 쉽사리 경계를 풀지 못했다. 그러나 긴장한 게 무색하게도 말을 마친 그것은 미끄러지듯이 나무를 타고 올랐다. 다각거리는 소리가 시끄럽게 사위를 메우다가, 이내 완전한 정적이 흐른다. 바람소리만이 남았다.

권총을 갈무리한 남자는 그제야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허리를 짚은 채 땀으로 축축한 뒷덜미를 쓸어내렸다. 줄곧 악물고 있던 하관이 아렸다. 성가신 자식들 같으니라고. ‘저것들’에 대해 어떻게 보고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지능이 없는 외계 생명체로 알려진 웜즈가 실은 사람 말을 할 줄 알아서 대화까지 나눴다? 군인 나부랭이가 열사병에 걸려 쓴 판타지 소설 취급이나 안 받으면 다행이었다. 신경질적으로 뒷머리를 긁은 그가 돌아섰다.

 

그리고 마침내 작은 방 안으로 걸음을 내딛는다. 오래된 방 안은 퀴퀴한 먼지 냄새로 가득했고, 또한 상당히 어두웠기 때문에 그는 방 안에 들어서고도 한동안 눈가를 찡그려야 했다. 그가 부채질하듯 손을 휘저어 냄새를 쫒았다. 느리게 눈을 깜빡였고, 안쪽을 제대로 돌아본 건 눈이 어둠에 적응되고 나서의 일이었다. 느리게 돌아간 눈동자가 낡고 먼지 쌓인 흔적들을 훑었다.

단정하게 정돈된 침대, 책장을 채우는 몇 권의 책, 책상 위에 놓인 노트 한 권과 오래된 총 한 자루, 동그란 선글라스, 그리고 벽에 걸린 붉은 코트 한 벌. 그가 몸을 굳혔다. 아주 긴 시간이 흘러 기억하던 것보다 색이 많이 옅어졌으나 잘못 볼 리는 없었다.

밧슈 더 스탬피드의 옷이다.

 

 

남자의 얼굴에서 표정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무감한 낯으로 그는 문가에 못 박힌 듯 서 있다가, 가벼운 바람이 등을 밀듯이 간지럽히고 나서야 앞으로 나아갔다. 나뭇잎 사이로, 그리고 하얗게 먼지 낀 창문 사이로 햇볕이 간신히 들어왔다. 벽과 벽에 걸린 코트 위로 희미한 금빛이 어른거렸다. 바랜 종이를 닮은 색이다.

책상 위에 놓인 총은 아주 오랜 기간 관리되지 않아 녹이 짙었다. 손잡이는 삭을 대로 삭았고, 방아쇠가 제대로 눌리지도 않는 게 당연할 만큼 끔찍한 상태였으나… 남자는 어렵지 않게 그 총의 원래 모습을 떠올려냈다. 저절로 픽 웃음이 샜다.

 

“…기껏 깔끔하게 관리해서 넘겨줬더니, 결국 이렇게 내버려두고.”

 

한숨이 섞인 말이었다. 누구 들으라는 듯 꽤 큰 소리로 중얼거렸으나, 들릴 리 없는 말이라는 것까지 모르지는 않았다.

총을 옆으로 내려놓은 남자가 그 옆에 놓여 있던 노트를 들었다. 파란 표지의 노트는 제법 손을 탄 데 더해 낡기까지 해서 부스러질 듯 아슬했다. 모래 냄새를 잔뜩 뒤집어쓴 건 덤이었다. 그는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표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천천히 한 장을 넘겼다.

지나가는 시간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이야기를 들은 메릴이 글을 쓰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습니다. 만나지 못한 몇 년 사이 메릴은 많이 변했고, 나보다도 현명해진 듯합니다. 제법 규모가 큰 도시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책을 쓰거나 읽고는 하니 나쁘지 않은 선택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부끄럽게도 나는 펜보다 총을 쥐고 산 시간이 긴 사람입니다. 기껏 노트를 받아 책상에 앉았는데도 무엇을 써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일기나 기록은 물론이고 하다못해 그 흔한 편지마저 써본 적이 드무니 당연한 일일 겁니다.

 

첫 번째 페이지는 그걸로 끝이었다. 길지 않은 문장들인데도 고심한 티가 많이 났다. 책상에 앉아 머리를 짚는 모습이 눈에 훤해서 남자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페이지를 다음 장으로 넘겼다. 첫 문장은 이랬다.

꼬박 일 년 만에 쓰는 글입니다.

작심삼일도 아니고 일 년에 한 장씩 쓰는 자식이 여기 있네. 남자는 눈썹을 치켜든 채 마저 읽었다.

 

꼬박 일 년 만에 쓰는 글입니다. 달리 이유가 있었다기보다는 차일피일 미루다 잊어버린 것뿐이기 때문에 메릴에게는 비밀로 할 겁니다. 하지만 여전히 무엇을 써야 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는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일기 쓰는 걸 미루다 잊어버리고 만 밧슈 더 스탬피드라니. 어린 동생들에게 들려주면 그 애들도 그처럼 웃음을 터뜨리고 마리라. 어린애들은 물론 지구의 많은 사람들은 그 인간 태풍이 누군지 모르지만, 일기 쓰기를 미룬 바람에 혼이 날까 비밀로 한 어른의 이야기는 제법 아이들의 흥미를 끌 게 뻔했다.

그 뒤로는 일기였다. 그가 몇 시에 일어났으며 아침에 일어나 어떻게 마을 일을 도왔는지 어떤 대화를 했는지. 시시콜콜하게 그날 하루 일과를 적어 놓은 글이었는데 일 년 만인 데다 뭘 써야 할지 모르겠다고 한 것치고는 나름 나쁘지 않은 솜씨였다. 남의 일기를 들여다보는 기묘한 기분에 휩싸였지만, 불만이면 부활해서 막아 보시던지. 그는 페이지를 넘겨서 다음 장을 읽었다.

 

가끔은 예전 일들에 대해 많이 생각합니다. 길었던 삶 속에서도 피프스 문 이후부터 방주 사건까지의 5년 간 만났던 사람들은 상흔처럼 나의 기억 속에 남았습니다. 나의 형제와 나에게 새로운 이름을 준 사람들, 나를 믿어 준 사람들, 나를 죽이려 했던 사람들, 그리고, 내가 백지로 된 티켓을 나누고 싶었던 사람까지. 방주 사건이 일단락되고도 참 많은 시간이 흘러 대부분은 이제 만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 이후로는 며칠 간격으로 일기와 회고가 번갈아가면서 나왔다. 남자는 그 글자들을 한 글자씩 전부 읽다가, 손을 움직여 몇 장을 한 번에 넘겼다.

 

얼마 전에는 결혼식에 다녀왔습니다. 홈에서 자란 아이로 오래 전 홈에 습격이 있었을 때 나의 실수로 다쳤던 아이였습니다. 꽤 오래 그쪽을 찾아가지 못했는데도 최근 마음이 잘 맞는 사람을 만나 평생을 약속하기로 결정했다면서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NLBC의 방송을 통해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내 얼굴을 알고, 덕분에 가는 곳마다 바람 잘 날이 없어 조금 고민했지만… 그런 마음을 안 건지. 추신으로 오지 않으면 당신이 올 때까지 웨딩드레스를 벗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바람에 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결혼식은 즐거웠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축복 속에서 두 사람은 서로에게 미래를 맡겼고 맹세를 나눴습니다. 긴 삶 중에서도 결혼식에 함께할 수 있었던 경험은 많지 않았던 덕분에 내게도 더없이 즐겁고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홈의 사람들은 여전히 친절하고, 때로는 나도 그곳에 섞여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다만 나는 내가 흘려보내는 시간들이 저들과 얼마나 다른지 알고 그 격차가 어쩔 수 없이 두렵기 때문에 굳이 말로 꺼내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미 나이브스의 나무가 베이지 않도록 지키기로 결정하기도 했으니까요.

하지만 그래도 가끔은 생각합니다. 만약 이스트 디셈버의 교회에 묻힌 그 사람이 살아있었다면요. 결혼이라는 이름으로 묶일 만한 관계는 아니었고, 당시의 나는 내 스스로 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조차 정확하게 알지 못했지만… 정말 만약에 그가 살아있었다면.

그는 아직 그곳을 지키고 있고 나는, 내가 아는 사람이 한 명도 남지 않았는데도 종종 그곳을 방문합니다. 내가 세워 둔 십자가가 쓰러지지 않는 이상은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그러니까, 정말 그가 살아있었다면… 지금과는 조금 다른 생활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는 꽤 오랜 시간 굳어 있었다.

한참이 흐르고서야 남자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읽던 걸 내려놓고 책꽂이의 가장 오른쪽에 꽂힌 마지막 노트를 꺼내 들었다. 책등을 쥔 채 페이지를 둥글게 구부려 페이지를 넘겼다.

메마른 책장이 파르르 사뭇 요란스럽게 넘어갔다. 망설임 없이 넘어간 책장이 마지막 한 장을 남기고 멈췄다. 책장 사이에 끼워져 있던 종이 한 장이 팔랑팔랑 탁자 위로 떨어져 내렸다.

남자는 시선만 움직여 그 종이를 살피다가, 천천히 손을 뻗어 집어 들었다. 그건 그림이 그려진 종이였다. 때맞춰 구름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해가 창문 너머로 그림 위를 비추었다. 꽃 그림이었는데, 그는 한 눈에 무슨 꽃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붉은 제라늄.

 

어제 마커스와 딜런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들은 이 행성에 마지막 남은 사람으로, 지구의 함선이 이 별의 모든 사람들을 실어 나르는 모습을 보고도 나고 자란 고향을 떠날 수 없다고 주장한 부부였습니다. 다행히도 지구의 사람들은 그를 가엾게 여겨 많은 식량을 남겨 주었지만 나는 늘 그들이 염려스러웠습니다. 나이 든 몸으로 홀로 남는다는 것의 어려움을 짐작했으니까요.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이곳에서라면, 한날한시에 눈을 감고 함께 묻힐 수 있어 좋다고 웃었습니다. 내가 자신들을 묻길 바라지 않으며, 혼자 두고 가게 되어 미안하다고도요. 두 사람은 의자에 앉아 함께 마지막 숨을 내쉬었고 다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나는 맞은편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는, 기꺼이 그들의 바람을 들어 주기로 결정했습니다. 나는 그들의 무릎에 담요를 덮어 준 다음 문을 잠그고 이곳으로 돌아왔습니다.

아, 그리고 드디어 때가 왔습니다. 비로소 나는 돌아갈 겁니다. 내가 영원히 사랑하는 이들에게로. 나의 수많은 가족들, 그리운 친구들, 그리고 이 별에서 살아갔던 모든 사람들에게로. 그들이 아직 나를 반기리라고 간절히 기도하면서 서쪽으로 긴 여행을 떠나려 합니다. 내가 가장 그리워한 사람이 잠든 곳을 향해서, 서쪽으로, 서쪽으로.

마커스와 딜런이 잠든 집의 문을 잠그고 나오면서부터 생각한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 사람은 내가 그의 곁에 눕길 바라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마커스와 딜런이 내가 두 사람을 묻지 않길 바랐던 것처럼. 하지만 지금 나는 이 드넓은 별에 마침내 홀로 남았고 나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 별을 떠난 인간이 언제쯤 이곳에 다시 발을 딛게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들이 과연 이 숲을 탐사하고, 내 기록을 발견하게 될지도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누군가 이 글을 읽는다면 나를 알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 주십시오. 밧슈 더 스탬피드는 결국 마지막까지 살아남았으며 이제 영원히 잠들 거라고.

 

하나하나 정성스레 눌러 쓴 글자, 애정이 가득 담긴 짤막한 문장… 그리고 그 아래에 남은 쭈글쭈글한 물방울 자국. 남자는 손끝을 세워 그 자국을 훑었다. 그가 알지 못하는 시간에 대해 떠올리듯이, 그리고 어쩌면 그리워하듯이.

정말 바보같은 빗자루 같으니.

 

 

탐사선이 마른 대지를 가로질렀다. 이스트 디셈버 터에서 합류하기로 한 동료는 널찍한 폐허에 표지판처럼 서 있었다. 뜨거운 사막의 햇살 아래 선명한 금발이 반짝였다. 검은 탐사복에 붉은 스카프, 금빛 머리카락. 그의 동료는 인간 표지판 역할로도 모자라 이쪽이라며 연신 손을 흔들어댔다.

남자는 그 근처에 탐사선을 세우고 모래 위에 내려섰다. 그를 발견한 동료가 손을 흔들면서 가까이 다가왔다.

 

“웬일이래, 네가 이렇게 늦고? 합류 예상 날짜는 어제였잖아.”

“꽤 재밌는 걸 발견해서. 누가 몇 십 년 치 일기를 남겨 뒀더라고.”

“일기? 누군지는 몰라도 그게 아직도 남아 있었다는 게 놀랍… 잠깐, 잠깐만. 네 탐사 포인트가 정확히 어디였지?”

“사과나무 군락지. 간 김에 상태 좋은 사과 몇 개 실어 왔으니 먹고 싶으면 먹어라. 엄청 단 게 네 취향이겠더라. 하나 정도는 샘플 삼아 본선에 갖고 가야겠지만.”

 

그리고 이건 네 선물.

명쾌하게 대답한 남자가 짓궂은 표정으로 주머니에서 꺼낸 걸 던졌다. 오두막에서 아주 오랜 시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을 선글라스였다. 다리가 삐죽거리고 알은 주황색인 동그란 선글라스.

남자의 동료는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걸 얼결에 받아 들었다가, 그 일기의 주인이 누구인지 깨닫고는 입을 벌렸다. 곧 파랗게 질리더니 이내 하얘졌다가 다시 빨개졌다.

 

“그, 그걸 다 읽었어? 진짜?”

“뭐, 읽으라던데. 읊어 주랴? 밧슈 더 스탬피드는 결국―”

“으악, 그만,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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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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