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꽃은 진작에 다 졌고 인간들이 사랑에 미치는 계절도 진작에 지나갔는데 왜.
코 끝을 스치는 숨에 목덜미가 홧홧해졌다. 열어 둔 창문을 타고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낡은 회잿빛 커튼이 펄럭여 둥근 곡선을 그린다. 그제서야 그는 아침에 일어나 걷은 커튼을 묶어 두는 걸 잊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좋은 일이긴 했다. 펼쳐 둔 책장이 몇번 팔락이다가 이내 파르륵 경쾌한 소리를 내며 넘어갔다. 그는 그게 꼭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소리라고 생각했다. 전체 연령가 로맨스 영화 속에서 결정적인 순간의 소리를 감추기 위해 들어간다던지, 아니면 주인공의 가장 아름답고 행복하고 아무튼 좋은 추억에 배경처럼 들어간다던지. 재스민이나 고아원의 여자아이들이 손을 꼭 모아 잡고 보던 걸 어깨너머로 본 게 다였던 까닭에 잘은 모르겠지만 아무튼 니콜라스도 대충 그런 영화 속에 떨어진 기분이 들기는 했다. 왜 주제에도 안 맞는 이상한 헛소리나 늘어놓고 있느냐면... 가슴이 너무 빠르게 뛰어서 이런 생각이라도 하지 않으면 못 견딜 기분이 든 탓이다.
눈앞에서 깜빡이는 푸른 눈동자는 꼭 머나먼 바다를 연상시켰다. 까딱 발을 잘못 딛었다간 빠져 버릴 것 같은.
울프우드.
속삭이듯 부르는 소리가 어느 때보다 가깝다. 이상한 소리를 낼 것 같아 니콜라스가 반사적으로 혀를 깨물었다.
입 맞춰도 돼?
묻는 말 끝이 흐릿하게 떨리고, 조심스럽게 잡아 오는 손은 땀으로 축축했다. 이제 보니 문제의 그 파란 눈동자도 바짝 긴장한 게 보였다. 평소였다면 입술을 물고 웃음을 참으며 놀리기라도 했을텐데 지금은 똑같은 꼴이라 할 말이 없었다. 끝내주게 더운 여름, 둘만 있는 작은 자취방, 입으로 뱉을 수 있을 것만큼 뛰는 심장, 꼭 붙잡은 손이며 맞닿은 피부로부터 전해지는 열기... 그러니까, 그가 할 수 있는 대답이라면 이미 정해져 있었다는 의미다.
열기가 훅 끼쳤다. 입술 위로 물컹한 게 와 닿았고 니콜라스는 그 감촉이 정말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대단히 운명적이고 낭만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날씨는 지독하리만치 덥고 목덜미는 땀으로 축축했으며 더위 때문인지 열기 때문인지 머리는 어질어질했다. 기껏 용기 내어 닿은 입술조차 물컹하고 축축하고 아무튼 이상했는데도...
그런데도 떨어진다는 사실이 못내 아쉬워서.
자신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떠올린 니콜라스는 신이라도 찾고 싶었다. 정말 신이 이 기도를 들었다면 불경하다며 경을 칠 지도 모르는 일이다. 니콜라스가 몸을 뒤로 빼는 순간 뜨거운 손이 그를 붙들었다. 예의 그 새파란 눈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번만큼은 흔들림 없이.
하, 한번만 더 하자.
그렇게 묻는 사람의 얼굴은 토마토처럼 상기된 채였다. 잡힌 팔목이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화끈거렸다. 거울을 볼 수는 없었지만, 아마도 저 파란 눈에 비치는 제 모습도 비슷하리라. 니콜라스는 두어 번 입을 뻐끔거리다가 그만뒀다. 그러니까,
그가 할 수 있는 대답이라면 이미 정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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