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다는 것
울프우드가 본인의 묘지 위에 앉아 있었다.
아니, 정정한다. 반투명한 니콜라스. D. 울프우드가 본인의 묘비 겸 퍼니셔 위에 올라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밧슈가 못 박힌 듯 제자리에 멈춰 섰다.
“밧슈 씨?”
리비오가 의문스러운 얼굴로 돌아섰다. 경악한 밧슈의 의수가 삐걱삐걱 움직였다. 간신히 치켜든 검지손가락이 힘겹게 퍼니셔 위쪽을 가리켰지만… 역시 리비오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밧슈의 턱이 바닥에 닿을 듯 떨어진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아니, 저거… 저거 안 보여?!"
"어, 어디요? 뭐 있어요?!"
덩달아 긴장한 리비오가 펄쩍 뛰었다. 두어 번 입을 뻐끔거리다가 다물어 버리는 밧슈의 모습에 불안한 눈초리로 주위를 훑었지만, 그런다고 안 보이는 게 보일 리 없다는 게 문제였다. 아무리 리비오 더 더블팽이고 라즐로 더 트립 오브 데스여도 보이지 않는 것까지 찾아낼 수는 없었기 때문에.
여기서 한 가지 더 안타까운 점이라면, 2년 만에 가족의 묘를 찾은 친구가 유령이라도 본 사람처럼 구는 이 상황에 대해 설명해줄 사람이 없다는 점이렸다. 리비오 반경 이십 미터 내의 두 명 중 하나는 죽어서까지 담배나 피고 앉아있는 니코틴 유령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온 힘을 다해 현실 도피 중이었다. 반투명한 친구가 본인의 관 십이 피트 위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다는 현실로부터.
퍼니셔 위에 아슬아슬 올라앉은 울프우드가 움직인 건 그 때였다. 혼란에 빠진 두 사람을 알기나 하는 건지, 한낮의 그림자처럼 투명한 그 형체가 어쩐지 불만스러운 손길로 담배꽁초를 털어내고는 몸을 일으켰다. 움직임을 따라 검은 외투 자락이 느리게 나풀거렸다. 숨죽인 밧슈가 그 모습에 시선을 고정했다. 변함없이 검은 선글라스를 낀 얼굴이 돌아서고… 마침내 시선이 스친다.
죽은 자와 눈이 마주친다니, 판타지 소설 같은 일이 따로 있지.
하지만 그는 맹세할 수 있었다. 정말로 눈이 마주쳤다. 그건 밧슈 더 스탬피드의 긴 평생 상상해본 적도 없는 일이기도 했다. 반투명한 울프우드의 흰 눈동자 너머로 모래 알갱이가 희미하게 비쳐 보이는 듯했다. 짧은 침묵이 흘렀고 밧슈는 그게 정말로 정적이었는지 혹은 자신의 착각인지 알 수 없었다. 아니면 드디어 자신이 미쳤든지. 경악에 빠진 울프우드가 입을 떡 벌린 게 다음 순간이다. 정확히 2분 전의 밧슈와 같은 표정이었다. 긴 손가락이 거침없이 밧슈를 삿대질했고, 그 거친 몸짓에 중지와 약지 사이에 끼워져 있던 투명한 장초가 팔랑팔랑 허공으로 떨어져 내렸다. 제법 과격한 반응에 밧슈가 몸을 굳히는 찰나… 멀리서 거센 바람이 불어온다.
빨랫줄에 널린 이불이 날아갈 듯 펄럭였고 긴 붉은색 코트 자락은 사정없이 흔들렸다. 옆에 선 리비오는 깊이 눌러 쓴 모자가 날아갈세라 급히 손을 들어 잡았다. 바람에 모래 먼지가 휘날렸다. 밧슈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울프우드는 마법처럼 사라져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정적이 흐른다. 이번만큼은 착각이 아니었다.
“밧슈 씨, 정말 괜찮으세요?”
리비오가 불안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른침을 삼킨 밧슈는 모르는 새 리비오의 한쪽 손이 허리춤에 가 있음을 깨닫는다. 그 동작이 습격에 대비하기 위함이라는 사실도. 이곳은 노맨즈랜드, 그리고 리비오의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인간 태풍 밧슈 더 스탬피드였다. 여전히 그의 얼굴이 그려진 수배서가 온 행성에 나돌았으며 지구군은 사상 최악의 흉악범을 쫒는 데 혈안이 된 채였다. 몇 년간 줄곧 실패한 탓인지 최근 들어서는 좀 잠잠해졌다지만, 그렇다고 이상한 반응을 허투루 넘길 만큼 여유로운 상황인 것도 아니었다. 그건 장본인인 밧슈가 가장 잘 알았다.
다만 이 장소가 밧슈에게 있어 얼마나 의미 깊은 곳인지 리비오도 모르지 않기 때문에… 그는 구태여 더 캐묻지 않고 밧슈를 바라보기만 했다. 복잡한 얼굴로 무덤가를 응시하던 밧슈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아무 일 없었다는 양 웃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다시 부드럽게 바람이 불었다. 동그란 선글라스 위로 햇빛이 번져 리비오는 밧슈의 표정을 알 수 없었다.
“아하하하…. 미안, 놀랐지. 날이 더워서 잠깐 헛것을 봤나 봐.”
“그랬다면 다행이네요.”
그런 얼굴 앞에서 보일 수 있는 반응이라면 대개 정해져 있는 편이다. 리비오는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처럼 웃길 택했다. 이 뜨겁고 혹독한 행성에서 신기루 정도는 그다지 드문 일이 아니기도 했다. 아이들이 뛰어다니는 고아원 안쪽으로 밧슈를 안내하면서 리비오가 농담처럼 묻는다.
“혹시 뭘 봤는지 물어봐도 돼요?”
“으음, 니코틴 중독자?”
“하긴, 그 사람이면 못 끊었을 것 같긴 해요. 전에… 싸울 때도, 담배 한 대만 피겠대서 얼마나 어이가 없었는지.”
리비오는 대수롭잖게 어깨를 으쓱였고 밧슈는 대꾸 없이 크게 웃었다.
아주 긴 시간이 흐른 기분이 들었다.
웅크린 채 소파 위를 지키던 그는 해가 저물 무렵이 되어서야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소파의 반대편 끝에 앉은 울프우드는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밧슈는 닿을 수 없는 곳을.
생기 없는 뺨에 눈물이 말라붙은 자리가 선명했다. 손을 뻗었더니 믿기 어려울 만큼 쉽게 닿았다. 움직임도 저항도 없었다. 손끝에 닿는 감각이 못내 거칠어서 밧슈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그는 조심스레 그 뺨을 쓸어내리다가, 느린 손길로 울프우드의 눈을 감겼다. 늘어진 몸까지 들어다 바르게 눕혔더니 울프우드는 꼭 깊은 잠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밧슈는 그 모습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자리를 떴다. 멀리 가야 하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고아원 근처에 적당한 장소가 있었다. 삽을 찾을 정신은 없었지만 마른 모래가 섞인 흙은 맨손으로도 충분히 잘 파였다. 최대한 느적거리고 싶었던 밧슈에게는 그다지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매장한 땅 위를 덮을 돌 위에는 큼지막하게 십자가를 새겼다. 이름까지 새기는 편이 좋을까 고민하다가, 퍼니셔에 대해 떠올리고는 그만뒀다. 형편없는 실력으로 조각을 하겠다고 설치다가 기껏 구한 돌을 깨 먹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나서야 밧슈는 소파로 돌아갔다. 온 세상이 밤으로 덮인 시간이었다. 한낮의 뜨거운 열기는 식어버린 지 한참인데 울프우드는 여전히 잠든 것처럼 누워 있다. 밧슈가 울프우드를 안아 들었다. 생명의 온기 대신 뼛속까지 스며드는 한기가 몸에 감겼다.
그리고 그 순간 그는 침대 위에서 눈을 뜬다.
꿈이었다.
멍하니 푸른 천장을 올려다보던 밧슈가 천천히 옆으로 돌아누웠다. 오후 내내 아이들에게 어울린 탓에 아직도 저릿저릿한 어깨를 두드리는 채였다.
방주 사건이 일단락되고 나서 대피했던 사람들은 리비오와 함께 이 곳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다른 곳에서 다시 고아원을 일으키는 것이 좋을까 고민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가족이 있는 이 곳에서 계속 지내기로 결심했다고, 앞으로도 이 곳에서 계속 지낼 예정이라고 전해 들었다. 그러니 쉴 곳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돌아와도 된다고, 니콜라스도 그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언제 봐도 변함없이 심지가 곧은 사람들이었다. 이런저런 수난이 있었는데도 티 없이 활기차게 자란 아이들만 봐도 그랬다. 하나같이 활달하고 밝아서 2년 만에 돌연 찾아온 니콜라스 형의 친구에게도 큰 거부감 없이 다가와 줬다.
다시 말해, 의미심장한 얼굴로 자리를 비킨 리비오를 대신해 밧슈가 인간 나무 역할을 수행해야 했다는 뜻이다. 어디 나무뿐이랴, 양 팔에 애들을 주렁주렁 달고 뛰어다니는 건 예삿일이고 짓궂은 장난에 놀란 체도 해 줘야 했다. 최근 하얀 이불보를 뒤집어쓰고 서로를 골리는 데 재미가 들린 아이들에게 밧슈는 공동 타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코너에서 갑자기 나타나 우와악 소리 지르는 아이들 앞에서 밧슈는 뒤로 넘어가고 한바탕 구르고 웃고 아무튼 최선을 다했다. 리비오 형은 안 놀라는 게 너무 잘 보여서 재미가 없다나 뭐라나.
힘들긴 했어도 최근 들어 가장 즐거운 오후였다. 이 곳에서 그는 흉악한 수배범이 아니라 니콜라스 형 친구로 지낼 수 있었던 덕분이기도 했다. 그의 이름 앞에 달린 600억 달러는 진작 효력이 상실되었으나 방주 사건 이후 지구군에서 발행한 수배서는 아직 유효했다. 행성 곳곳으로 송출된 방송도 제법 입소문을 타서 최근에는 어느 마을을 가도 금세 정체가 드러나기 마련이었다.
물론 메릴과 밀리의 노력 덕분에 예전만큼 쫓기는 이 없다곤 해도, 느긋하고 조용하고 아무튼 로하스 스타일로 살고 싶은 밧슈는 저기 인간 태풍이 있다! 하는 일보다는 이런 일상이 좋았다. 뭐, 아무리 밧슈라도 혈기왕성한 아이들의 체력을 감당하기는 조금 버겁긴 했지만, 아무튼!
조용히 웃음을 터트린 밧슈가 다시 바로 누웠다. 아직 새벽이 깊었다. 내일도 인간 목마 나무 그 외 기타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려면 조금 더 자 두는 편이 좋았다. 내일은 꼭 리비오도 못 도망가게 잡고 있어야지. 나보다 덩치도 크고 힘도 좋아서 올라타기에는 저쪽이 더 재미있을 거라고 아이들에게 속살거리리라. 그리고 아이들과 같이 이불보를 뒤집어쓰고 오늘의 복수를 이뤄내리라.
굳게 다짐하며 이불을 끌어 덮으려던 순간이다. 그는 불현듯 어둠 속에 누군가 서 있음을 깨달았다. 달빛이 비치는 창문 옆, 그림자가 드리워 가장 어두운 방 안쪽의 구석에서… 검은 형체가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언제부터? 표정을 굳힌 밧슈가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몸을 일으켰다. 그의 총이 침대맡에 놓여 있었지만 이곳은 낡은 교회였고, 아래층에는 아이들이 잠들어 있었다. 섣불리 손을 뻗었다 문제를 일으킬 수는 없었다. 눈을 가늘게 뜬 밧슈가 그 사람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방 안이 어두운 데다 까만 옷을 입고 있어 뭘 원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애초에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저기 서 있다는 것부터가 말이 되나?
“…밧슈 더 스탬피드를 찾아온 거라면 날이 안 좋은데.”
짧은 침묵.
“무슨 용건이야?”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목덜미에 식은땀이 흘렀다. 무력 행사를 하러 온 것만큼은 아니길 간절히 바라면서 밧슈가 다시 입을 열려던 찰나.
그림자 속에 잠겨 있던 사람이 한발 먼저 어둠 속에서 나왔다. 움직이는 것은 보였으나 발이 바닥을 딛는 소리는 나지 않았다. 그건 기묘하게도 걷는다기보다 미끄러진다는 말이 어울리는 몸짓이었다. 창문 너머로 흘러드는 달빛 아래 반투명한 모습이 드러났다. 새카만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의 신체 너머로 낡은 창틀이 비쳐 보였다. 그리고 밧슈는 그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건 울프우드였다.
울프우드가 밧슈를 보고 있었다.
죽은 자는 과연 어디로 가는가.
애초에 죽음 이후의 삶이란 것은 존재하는가. 생각해본 적 없는 일이다. 죽은 사람들은 종종 웃는 얼굴로 우는 얼굴로 그것도 아니면 고통스러워하는 얼굴로 밧슈의 꿈 속에 모습을 드러냈으나 한 번도 말을 걸어 온 적은 없었다. 닿을 수 없는 벽 너머에 한 발짝 떨어져 선 채로 그를 관망하기만 했다.
밧슈는 그 사람들을 향해 달리다가 벽이 부서져라 두드려댔고 결국엔 그 앞에 무릎 꿇고 빌었다. 하지만 늘 변하는 건 없었다. 변하는 건 늘 그뿐이었다. 그들은 늘 같은 얼굴로 웃으면서 이 편을 돌아보는데 밧슈는 웃기도 했고 우는 날도 있었다. 붉은 코트를 입기 시작했으며 몸에는 상처와 흉터가 늘었고 머리는 점점 검어졌다. 그들의 꿈을 꾸고 일어난 날에는 여전히 괴로웠지만 예전만큼 매몰되어 시간을 보내지는 않았다. 그렇게 밧슈는 바뀌어왔다. 불변하는 그들 모두를 뒤로하고...
그러나 이번에는 다르다.
밧슈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울프우드는 뭐라 입을 뻐끔거리는가 싶더니, 이내 성가시다는 듯 머리를 헤집었다. 검은 머리카락이 기묘한 박자로 나풀거렸다. 그는 그대로 창문 옆의 책상까지 소리 없이 걸어가서는 책꽂이에 마구잡이로 꽂혀 있던 전단지 한 장을 꺼냈다. 주위를 둘러보다가 책상 한쪽에서 펜을 찾아내고는 종이 위에 뭔가를 휘갈겼다. 뒤쪽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꼴만 아니었다면 그가 살아있대도 믿을 법한 모습이었다. 밧슈는 그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었고, 그사이 한 손에 펜을 든 채 다가온 울프우드가 종이를 내밀었다. 밧슈는 멍한 정신으로도 그걸 받아 들었다. 종이에는 검은 잉크로 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오랜만이다, 빗자루
그 문장과 울프우드를 번갈아 바라보던 밧슈가 한쪽 손을 들었다. 울프우드가 어깨를 으쓱였고 밧슈는 그대로 빡 소리가 날 만큼 머리를 내려쳤다. 꿈이라면 깨고 싶은 마음 반 현실이라면 이대로 기절해 버리고 싶은 마음 반이었는데 안타깝게도 둘 다 실패했다. 애꿎은 정수리만 얼얼했다.
까딱하면 비명이 나올 것 같은데 누군가 목을 틀어쥔 것처럼 숨 쉬기가 힘들었다. 어둠 속에 우뚝 서 있는 형체, 반투명한 손에 잡혀 허공을 떠도는 펜, 낯익은 필체…, 그리고 오랜만이다 하는 간단하기 짝이 없는 한 마디. 그 한 마디가 이상할 정도로 읽히질 않았다. 아주 오래 전에 읽었던 오컬트 서적의 구절이나 어딘가에서 전해 든 미신 따위만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유령은 대체로 사람에게 원한을 가져 포악한 성향을 보이며 사람을 잡아먹는 어쩌고 저쩌고. 그다지 도움이 되는 정보는 아니었고 외려 머릿속을 뒤흔들기만 했다.
머리에 피가 몰리고 심장이 쿵쿵 뛰는 와중에 단 한 가지만 명료했다.
지금 그의 곁에 있었다. 밧슈가 직접 수습해 묻은 그의 친구가.
종이 끄트머리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간다. 그가 손에 쥐고 살아온 건 총과 렘에게 건네받은 하얀 차표였다. 십자가니 목탁이니 경전이니 하는 것들이 아니라. 이런 상황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었다. 빅 폴, 로스트 줄라이, 피프스 문…. 살아있는 사람의 원망을 받는 것만으로도 벅찬 삶이다. 그 원망이 제 심장을 찌르지 않게 가능한 한 멀리 도망치는 것만으로도 남은 평생을 다 쓸 수 있을 터였다. 오랜 시간과 선의가, 그가 살린 생명이 그들의 원망과 상처를 치료해줄 수 있기를 믿으면서.
하지만 죽은 사람은? 도망칠 수도 시간이 해결해 주지도 않는 사람들은? 더는 낫지 못하는 사람들은?
아, 어떡하지. 기묘한 불안감에 휩싸인 채 밧슈가 어금니를 깨문다. 울프우드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보고 싶지 않았다. 이 목사가 원망이니 원한이니 하는 것들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그는 모진 말을 뱉어서라도 홀로 떠날 만큼 결의를 굳힌 사람이었으며 남은 감정들은 모조리 밧슈의 몫이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왜? 왜 그는 자신의 앞에 나타났으며 나의 눈에만 보이는가. 왜 하필 이 곳에….
경쾌한 딱 소리가 조용한 방 안을 울렸다. 잡생각하지 말라는 듯 유령이 손에 들고 있는 펜으로 그의 뒤통수를 후려친 소리였다. 악! 반사적으로 머리를 감싸 쥔 밧슈가 침대 위로 웅크려 앉았다. 얼마나 세게 쳤는지 눈물이 핑 돌았다. 아니, 아니다. 진짜로 눈물이 나고 있었다. 몸을 둥글게 만 채 밧슈가 이불에 얼굴을 묻었다. 눈에 열기가 몰려 홧홧했다. 아무래도 오래 살기는 한 모양이다. 유령한테 얻어맞았다고 눈물도 빼 보고. 아무리 유령이 되었다지만 자비 없는 손속이나 무식하게 센 힘은 여전했다. 훌쩍거리면서 밧슈가 얻어맞은 뒤통수를 문질렀다.
어쩐지 좀 아프다 싶더니 맞은 자리가 벌써 부어오르는 것 같, 잠깐, 이거 진짜야?
거짓말처럼 눈물이 쏙 들어갔다. 못 믿겠다는 얼굴로 밧슈가 머리카락 사이를 더듬거렸다. 물론 그렇다고 이미 맞은 게 없던 일이 될 리는 없어서, 그의 뒤통수에는 펜 모양대로 길쭉하게 혹이 났다. 유령이고 뭐고, 황망해진 밧슈가 얼떨떨하게 울프우드를 올려다본다.
반투명한 얼굴은 어째 귀찮아 보이기도, 의기양양해 보이기도 했다. 이상하기 짝이 없는 표정이었다는 의미다. 혼란스러운 밧슈의 심정을 알기나 하는 건지. 울프우드는 다시 미끄러지듯이 움직였다. 뚜껑을 닫은 펜으로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 번 두드리고는, 펜 끝으로 그의 등을 찔렀다. 예고 없는 접촉에 긴장하는 건 잠시였다. 닿은 펜 끝이 느리지만 조심스러운 손길로 등 한복판에 선을 그었다.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
그리고 그 한 마디의 의미를 밧슈가 모를 리 없다. 정말이지 울프우드는 하나도 변한 게 없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결국 밧슈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린다. 눈물 자국이 지워지지 않아 우습기 짝이 없는 얼굴일 게 뻔한데도 멈출 수가 없었다. 소리 죽여 한참을 웃다 등을 세워 앉은 밧슈가 돌아 앉았다. 유령은 침대 위의 허공에 어정쩡하게 앉은 모습이었다. 밧슈는 느리게 눈을 깜빡이는 반투명한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손바닥을 펴서 내밀었다.
“등 말고 여기다 써 줘, 울프우드.”
소리 내어 속삭이는 이름이 어쩐지 낯설었다. 그간 부를 일이 없었으니 어쩌면 당연할 텐데…. 다시 움직인 펜이 천천히, 그의 손바닥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잉크가 남은 손바닥이 간질간질했다. 밧슈가 주먹을 쥔다. 정말이다. 그가 정말 여기 있었다.
울프우드가 안내인이고 밧슈가 나이브스의 동생이었던 때의 일이다. 서로에 대해 많은 것을 알지 못했으나 함께 사막을 가로지르던 때.
직전 마을에서 구한 싸구려 자동차는 초대형 웜즈의 이동에 휘말려 모래더미에 파묻혔다. 자동차를 덮치는 거대한 모래 파도 속에서 비명도 질러보고 있는 힘껏 브레이크를 밟았다가 부숴도 보고 급하게 퍼니셔로 천장도 뚫어 보고.
아무튼 자동차를 휴지조각으로 만든 뒤에야 겨우겨우 살아 나온 두 사람은, 꼬질꼬질 처량한 신세로 야영을 준비하고 있었다. 모래 더미에 묻힌 고물 차를 어떻게든 꺼내 보겠다며 오후 내내 용을 쓰고도 실패한 결과였다. 장작으로 쓸 만한 것들을 찾아다 쌓은 밧슈가 문득 물었다.
“다음 마을까지는 얼마나 남았더라?”
밧슈가 손가락을 까딱였고 울프우드가 성냥갑을 던졌다. 어렵지 않게 잡아챈 밧슈가 성냥을 꺼내 불을 붙였다. 붉게 타는 성냥을 장작 사이에 던져 넣었더니 금세 크게 타올랐다.
울프우드는 모래의 습격을 받은 퍼니셔의 조정에 열중해 있었다. 차의 천장과 그 위를 덮고 있던 모래까지 한번에 날려 버린 퍼니셔는 역시 훌륭한 무기였지만, 반쯤 모래에 파묻힌 채 사용했던 게 문제였다. 두 사람이 입에 들어간 모래를 에퉤퉤 뱉어 내며 밖으로 빠져나왔을 즈음에는 퍼니셔도 모래를 잔뜩 먹어 불안하게 덜컥거리고 있었다. 울프우드는 성가시기 짝이 없다는 얼굴로 모래 털기 작업에 들어가야만 했다. 무릎에 올려놓은 철 십자가를 들여다보면서 울프우드가 밧슈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대꾸했다.
“자동차로 반나절쯤 걸리는데 이제 차가 없으니… 하루 종일?”
“내일 해가 떨어지기 전에 도착하기나 하면 다행이겠네.”
“하루 정도 버틸 물은 있으니 다행이지.”
“그러게……. 조난자 신세는 싫은데 말이지. 오거스타 행 버스가 운 좋게 우릴 발견할 리도 없고.”
그제야 고개를 든 울프우드가 코웃음을 쳤다.
“운전 못 해서 얹혀 가는 자식이 말이 많아.”
“헹, 나도 배운다면 배울 수 있거든? 가르쳐 주고나 그런 말 하시지?”
“시끄러워! 저번에 네가 해먹은 내 바이크가 어떤 꼴이 됐는지 벌써 까먹었냐?”
물론 안 잊었다. 밧슈가 바위에다 가져다 박은 울프우드의 안젤리카는 그대로 고물상에 팔아넘겨야 하는 꼴이 됐다. 그걸 직접 끌고 가서 값을 치른 게 밧슈였으니 까먹을 수 있을 리도 없었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밧슈가 모르는 척 시선을 피했다. 울프우드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정리가 끝난 퍼니셔를 능숙하게 천으로 감싸 감췄다.
어둠 속에서 노란 빛이 두 사람 위로 어른거리고 있었다. 불 끄트머리에서 튕겨져 나온 불티가 허공으로 흩어졌다. 울프우드가 십자가를 옆의 바위에 세워 두는 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보면서 밧슈가 턱을 괴었다. 울프우드나 밧슈나, 자신의 이야기를 자랑스레 떠드는 류의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에 짧지 않은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그 정적이 어색해 입을 열기엔, 그 때의 두 사람은 그렇게 선뜻 선을 넘어갈 만큼 친숙한 사이도 아니었거니와 굳이 서로가 정해 둔 선을 넘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하늘을 천장 삼고 사막을 침대 삼아 잠들게 되는 이런 날이면 꼭 싱숭생숭 이상한 충동에 시달리게 되는 법이다. 한 발짝 정도는, 아주 약간 정도는 더 가까워져도 될 것 같은 기분. 결국 서두를 뗀 건 밧슈였다.
“울프우드는 정착하고 싶은 마음 없어?”
담배에 불을 붙이던 울프우드의 고개가 돌아갔다. 단번에 눈이 마주치고서야 아차 싶었다. 밧슈가 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니, 저번 일을 뭐라 하는 건 아냐. 물론 그 시절이 조금 더 길었다면 좋았겠지만… 어차피 나이브스가 결심했다면 나도 언젠가는 움직여야 했을 테니까.”
“글쎄, 딱히? 가야 할 곳도 있고, 아무래도 일 때문에 돌아다니는 거니까.”
“만약 언젠가 일을 못하게 되는 날이 오면?”
“그건 생각 안 해 봤는데.”
울프우드가 깊이 숨을 들이켰다. 다시 길게 내쉬는 숨에 하얀 연기가 섞여 있었다. 바람을 타고 독한 담배 냄새가 풍겼다. 지평선 너머를 바라보는 울프우드의 시선이 그는 알지 못하는 곳에 닿는다. 밧슈는 오래 전에 지나가듯이 들었던 고아원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갈 곳이라면 역시 교회야? 고아원이랬던가.”
“와, 그 얘길 아직도 기억하네. …뭐, 그렇지.”
울프우드가 담배를 문 채 대강 대답했다. 울프우드의 시선은 여전히 그는 닿을 수 없는 곳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눈이 마주치지는 않았다. 그러나 밧슈는 불현듯 그의 동행인이 거짓말을 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돌아가야 할 곳으로 여기면서도 돌아가지 않으리라 다짐하는 사람들. 그리움과 슬픔을 저울질한 끝에 그리움을 선택하고 만 사람들. 알아챈 것은 순전히 밧슈 또한 같은 생각을 품고 살아야 하는 사람일 탓이리라. 다만 이 말을 입 밖으로 냈다간 네가 할 말이냐는 핀잔이 뒤따를 게 뻔해서, 밧슈는 가볍게 웃어 넘겼다. 미심쩍은 울프우드의 시선이 뒤따랐으나 굳이 대답해줄 필요성은 느끼지 못했다.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밧슈가 자리를 깔고 눕는다. 내일 하루종일 걸어야 할 거 아냐? 얼른 자는 게 좋겠어. 말을 마친 밧슈가 돌아노워 눈을 감았다. 하지만 그렇게 말한 것치고 일찍 잠에 들 수는 없었다. 신경 쓰이게 했던 건지, 한참이 지나도록 울프우드가 움직이지 않은 까닭이었다. 밀려드는 잠을 간신히 밀어내면서, 밧슈는 조금 미안하다는 생각을 했던 것도 같았다.
물론 그렇다고는 해도 결국 울프우드는 이 곳으로 돌아왔으니 이제는 하등 의미 없는 이야기였다. 그 과정이 마냥 좋았다고는 못 하겠지만.
늘어져라 기지개를 켠 밧슈가, 머리맡에 놓인 종이에 시선을 뒀다. 검은 글자가 빼곡하게 적힌 종이는 간밤의 일이 꿈이 아니었음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손에 적어 달라고 의기양양 이야기하긴 했지만, 몇 번의 소통 실패 끝에 다시 종이를 집어 드는 울프우드 앞에서 밧슈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곤 없었다. 이걸로 하자. 순식간에 새겨진 다섯 글자에 밧슈는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2년이라는 시간은 짧으면서 길다. 울프우드는 그가 볼 수 없었던 옥토번에서의 결전에 대해 물었다. 기억하기 싫으면 굳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된다고 손을 휘젓기는 했지만…, 밧슈는 기꺼이 그 때의 기억을 되살렸다. 리비오와의 협업부터 지구군의 등장, 레가트와의 충돌, 나이브스와의 결전, 그리고 마침내 두 사람이 내려 앉은 마을과 사과나무까지.
긴 이야기였고, 특히나 레가트의 숨을 거둔 것이 누구인지 이야기하는 대목에서 밧슈는 상당히 긴 시간을 들여야만 했다. 그 때를 떠올리는 건 제법 시간이 흐른 이야기인데도 심장을 찢어발기는 듯한 감각이었다. 손에 얼굴을 묻은 밧슈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울프우드는 아무런 반응도 대답도 않은 채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의 이야기를 모두 들었다. 이야기가 모두 끝나고 나서야 울프우드는 밧슈의 손에서 종이를 가져가더니, 몇 자를 새겨 다시 내밀었다. 고맙다고. 다른 말은 없었다. 그 글자를 손에 쥐고 연거푸 읽는 밧슈에게 울프우드는 한 문장만을 덧붙였다.
이러다 해 뜨겠다. 얼른 자라
그리고 아침이 밝았다. 문득 종이를 집어 든 밧슈는 잠든 사이 종이 위에 새롭게 적힌 문장을 발견했다. 몰랐는데 빗자루 너 잠버릇 끝내준다. 좀처럼 의미를 알 수 없는 문장이었다. 백 오십 년 인생 처음 듣는 이야기기도 했다. 무슨 뜻이냐고 물으려 황급히 반투명한 형체를 찾았으나 안타깝게도 이미 자리를 뜬 지 오래였다. 조금 허탈해진 심정으로 밧슈가 뒤통수를 긁었다.
새벽에 일찍 깼다가 잠든 탓인지 이미 해가 중천이었다. 눈치를 보며 살금살금 일 층으로 내려갔더니 눈을 반짝반짝 빛내는 아이들이 그를 맞았다. 밧슈 형이다! 빗자루 오빠다! 어젯밤 기껏 세운, 리비오를 동료 나무 삼겠다는 계획은 이미 물 건너갔다는 뜻이다. 빨랫감을 이고 고아원을 나서면서 리비오가 상큼하게 웃었다.
“밧슈 씨, 오늘도 잘 부탁합니다!”
리비오오오오 애타게 불렀지만 아무래도 닿을 리 없다. 메릴이 이 모습을 봤다면 이명을 인간 태풍에서 인간 정글짐으로 바꿔야 하는 거 아니냐고 물었을 텐데.
오후의 종목은 숨바꼭질이었다. 첫 술래는 밧슈의 허리께에나 올 법한 작은 아이였는데, 귀신같은 솜씨로 숨바꼭질이 시작된 지 2분여 만에 세탁기 뒤에 숨은 인간 태풍을 찾아냈다. 나름 진심으로 숨었던 밧슈는 식은땀을 흘리면서 이 아이가 지구군이나 방송국에 취직하지 않기를 바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옷자락을 쥔 조막만한 손에 이끌려 마당으로 나갔더니 아무도 없었다. 운 나쁘게도 첫 희생자가 된 밧슈의 허벅지를 토닥토닥 두드린 아이가 총총 뛰어 교회 안으로 돌아갔다. 멀지 않은 퍼니셔 위에서 울프우드가 킬킬 웃는 게 보였다. 일부러 쉬운 곳에 숨은 거라고 항변하고 싶었지만, 그럴 새도 없이 다른 아이를 찾아 마당으로 데려오는 술래의 모습에 눈물만 삼켜야만 했다. 울프우드는 허공을 떠다니면서 웃었다.
술래가 몇 차례인가 바뀌고, 해가 저물 무렵에는 식사 준비도 거들었다. 오랜 떠돌이 생활로 간단한 요리 정도는 손에 익은 덕분이었다. 식탁 위에 샐러드와 스파게티, 수프 따위가 차례로 놓였다. 긴 식탁에 아이들이 차례로 앉고 나면 다같이 손을 모아 잡고 식전 기도를 올렸다. 밧슈는 신자가 아니었지만 기꺼이 함께 손을 모아 쥐었다.
다만 그의 곁에서 울프우드가 함께 서서 기도하는 탓에 기도문이 뭐였는지는 하나도 안 들렸다. 피망이며 토마토를 먹지 않겠다며 슬그머니 그릇 한구석에 빼 두는 아이들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멜리나 아주머니의 시선을 받고 결국 전부 먹어야 했다.
식사를 모두 마치고 나서야 밧슈는 다시 방으로 올라왔다. 빗자루 형 잘 자요! 안녕히 주무세요! 계단 위로 고개를 빼꼼 내밀고 인사하는 아이들에게 손을 흔들어 준 밧슈가 방 문을 닫았다. 찰칵, 가벼운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면 어느 새 침대 위를 차지하고 누운 채 살랑살랑 손을 흔드는 울프우드가 보였다.
어둠 속에서 본 그 모습은 꼭 정말 살아있는 사람이 누워 있는 것처럼 보여서…. 밧슈가 희미하게 웃는다.
그는 침대로 가까이 다가가 걸터앉았다. 시트가 한차례 흔들려 먼지가 일었다. 밧슈가 손을 내밀었고 울프우드가 뚜껑이 닫힌 펜 끝을 그 위에 얹었다. 그러다 한순간 손이 겹쳤지만, 달리 특이한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밧슈가 입을 다물었고 울프우드도 아무 일 없다는 듯이 굴었다. 대신 천천히 한 획씩, 손바닥 위에 글자를 덧그린다. 밧슈는 눈을 감고 그 글자를 읽었다.
넌 앞으로도 숨바꼭질은 하지 마라
“무슨 소리야, 이래봬도 그 현상금을 달고도 잘 다녔거든? 2년이나 숨었던 적도 있고.”
별 전체를 뒤져서 2년이면 싸게 먹힌 거지 내가 그때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기나 해?
“…아, 아무튼. 그리고 애들하고 노느라 봐준 거였어. 그 다음부턴 안 들켰잖아.”
방심한 거 아니고?
변명할 말이 없어 밧슈가는 앓는 소리를 냈다. 조금 억울해진 마음으로 눈을 떴더니 어느새 울프우드가 바로 옆에 앉아 있었다.몸이 움찔 떨린 건 어쩔 수 없는 반응이었다. 유령과 같이 살아봤어야 놀라지 않는 법이라도 알지. 묘한 반응에 울프우드가 눈썹을 치켜들었고, 밧슈는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눈을 감는 건 별로 안 좋은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그래서 아까 그건 무슨 의미였어? 잠버릇 얘기. 혹시 나 어젯밤에 뭐 했어?”
그냥 잠꼬대 끝내줬다고. 무슨 꿈을 꾸는지 뒤통수를 붙들고 끙끙 앓으시던데
“켁, 잠꼬대… 잠깐, 뒤통수면 그거 너한테 맞아서 그런 거 아냐?!”
뭐 얼마나 세게 쳤다고 그러냐
“얼마나 세게 치기는. 그거 진짜 아팠거든? 혹이 아직도 남아 있다니까?”
한쪽은 속삭임, 한쪽은 글자. 기묘한 필담이었으나 서로 소통하는 데엔 문제가 없었다. 게다가 밧슈는, 가만히 그 글자들에 집중하고 있다 보면 울프우드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유령은 아무런 소리를 내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밤은 빠르게 지나갔다. 밧슈가 떠나기로 계획한 날이 밝았다는 뜻이다.
추적 때문은 아니었다. 목에 600억 더블 달러가 걸려 있었을 때에도 밧슈는 마을과 숙소를 전전하며 한 곳에 제법 오래 머물렀었다. 하물며 지금은 지구군 측의 추적도 느슨해진 시기인 만큼, 머물고자 한다면 더 머물 수 있었다. 하지만… 정말 더 머물렀다간 아예 떠나지 못하게 될 것 같아서. 울망울망한 눈의 아이들을 뒤로하고 밧슈가 가방을 둘러멨다. 리비오도 아쉬운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그를 배웅했다.
“좀 더 있다가 가셔도 될 것 같은데...”
“다음에 꼭 다시 올게. 너는 계속 여기 있게?”
“네. 딱히 돌아가야 할 이유도 모르겠고, 그 쪽에서도 더는 연락이 없어서요. 아마 그렇게 큰 일이 있었으니 죽었다고 생각하는 거겠죠. 할 수 있는 한은 숨죽이고 살 계획입니다.”
웃으며 이야기하는 리비오의 얼굴은 예전보다 훨씬 행복해 보였다. 2년 동안 리비오도 나름대로 결심을 내린 것 같았다. 밧슈가 화답하듯 마주 웃었다.
“좋아 보여서 다행이네. 울프우드도 좋아할 거야.”
리비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다시 환하게 웃었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네요! 사실 리비오 바로 옆에서 이미 시커먼 유령이 기특하다는 양 알짱거리고 있긴 했다. 금방이라도 등이며 어깨를 두드리기라도 할 듯이. 밧슈는 그 모습을 곁눈질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정말로 돌아서면서 밧슈가 크게 손을 휘저었다. 문 앞까지 달려 나온 아이들이 손을 흔들어 인사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무작정 걷기를 한참. 고아원이 손톱만 해 보일 만큼 멀리 오고 나서야 밧슈가 뒤를 돌아봤다. 묘하게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그으래서―
“그래서, 진짜 올 거야? 애들은 어쩌고?”
두 걸음 뒤에서 밧슈의 뒤를 따라 걷던 울프우드가 손가락을 까딱였다. 밧슈는 잠자코 펜과 손바닥을 내밀었다. 사막 한 가운데 노랗게 타는 모래 위에서 유령이 펜을 움직인다. 바람 탓인지, 모래 탓인지. 교회에서 이야기를 나눌 때보다 알아듣기가 어려웠다. 대충 리비오가 있어 괜찮을 거라는 이야기였다.
“아니, 그래도… 괜찮겠어, 정말?”
사실 밧슈에게 나쁠 건 없었다. 어차피 혼자 떠도는 신세에 조금 독특한 동행인이 하나 추가된대도 문제될 것 없었다. 게다가 같이 샌드스팀에 타도 요금을 낼 필요도 없고, 심지어는 그게… 울프우드라니. 오히려 밧슈에게는 환영할 만한 일이다.
문제가 되는 건 울프우드 쪽이었다. 고아원이, 그리고 그 곳의 사람들이 이 유령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기 때문에. 하지만 다시 그 얼굴을 돌아봐도 울프우드는 이미 결정을 내린 얼굴이었다. 그가 다시 손을 움직여 글자를 쓴다.
오래 비울 것도 아니고. 어차피 네 볼일이 끝나면 다시 돌아갈 생각이거든
“내 볼일이 뭔 줄 알고?”
기껏해야 사람 만나는 일이겠지
아니라고 잡아떼기에 울프우드는 밧슈를 너무 잘 알았다. 정확한 대답이었다. 말을 잃은 밧슈 앞에서 유령이 웃는다.
괜찮을 거야. 가자
그렇게 유령과의 기묘한 동행이 시작되었다.
두 사람이 함께했던 대부분의 시간은 이와 같은 동행이었으므로 특별할 건 없었다. 다른 점이라면 이번에는 밧슈가 안내인 역을 맡았다는 것과, 두 사람 다 운전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므로 샌드스팀이나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시간이 늘어난 것뿐이었다.
머지않아 걷는 시간보다 버스 좌석에 함께 앉아 보내는 시간이 늘었다. 울프우드는 사람이 많이 없을 땐 비어 있는 밧슈의 옆 좌석에 앉았고, 사람이 많아 만석일 땐 밧슈의 앞에 서 있었다. 유령도 이런 데에 탈 수 있네. 그 모습을 본 밧슈는 중얼거렸고, 울프우드는 대답 대신 어깨만 으쓱였다.
사막의 풍경이 드리우는 창가에 기대앉은 채, 허공에 대고 중얼대다 보면 종종 이상한 사람을 보는 듯한 시선이 따라붙기도 했다. 물론 밧슈는 신경쓰지 않았다. 현상금을 노리고 달려드는 것보다야 이 편이 차라리 낫기도 했고, 사람이 많은 실내에서는 울프우드가 펜을 잡지 않아 대화가 금세 끊어진 덕분도 있었다. 다시 조용히 입을 다물고 유령의 얼굴을 올려다보고 있으면 그런 시선은 오래지 않아 사라지고는 했다.
동행하면서 밧슈는 유령에 대한 것들을 물었다. 글자를 써서 전하는 까닭에 울프우드가 모든 이야기를 하는 데에는 밧슈보다 더 긴 시간이 필요했다. 캄캄한 숙소 방 안, 울프우드는 침대 위에 종이를 펼쳐 둔 채 오랜 이야기를 풀어냈다.
2년 전 아무도 없는 이스트 디셈버에서 눈을 뜬 것, 그 이후 밧슈가 오기 전까지 자신을 볼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것, 그 뒤로는 달리 갈 곳도 없어 지박령처럼 교회에 붙어 지냈던 것. 대체로 아이들을 지켜보다가 다칠 것 같은 시점에 슬그머니 끼어드는 식이었다고도 덧붙였다.
유령은 졸리지도 배가 고프지도 않다는 점, 살아 있는 것엔 닿을 수 없지만 정신을 집중하면 펜이나 종이 같은 것들은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점, 바닥을 딛는 느낌이 나지 않아 아직도 좀 이상하다는 점, 아무런 소리도 낼 수 없다는 점… 그 외에도 많은 것들에 대해 듣기는 했는데 머릿속에 잘 들어오지는 않았다. 들어봤자 직접 유령이 되지 않는 이상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 뿐이었다.
그러다 문득 왜 유령이 된 것 같냐고도 물었는데, 그건 울프우드 본인도 짐작 가는 게 없다는 대답을 내놓았다.
“유령 치고 아는 게 없네….”
이 빗자루가 저번부터 빡치게 하네
"아, 농담! 농담! 장난!"
감이 잡히지 않는 건 밧슈도 마찬가지였으므로 두 사람은 울프우드의 종이가 검은 글자로 빼곡해질 때까지 추측을 늘어놓는 데 열을 올렸다. 하지만 그러고 나서도 마땅히 정답이다 싶은 건 찾을 수 없었다.
울프우드는 유령이 되어서도 입에 담배를 물고 살았다. 밧슈는 만질 수도 없는 반투명한 담배였는데, 밧슈가 울프우드를 처음 봤을 때도 입에 물고 있던 것이었다. 밧슈가 잠들고 나면 울프우드는 온 밤이 지나가도록 창문 바깥을 보고 담배를 태우면서 시간을 보냈다. 밧슈가 잠에서 깨 고개를 들면, 창가에 반투명한 형상이 서 있는 것이 일상으로 자리잡을 정도였다.
어떻게 유령이 담배를 펴? 밧슈의 물음에는 리비오가 종종 무덤가에서 태워 준다고 대답했다. 그렇게 완전히 태우고 나면 어째서인지 손에 들고 입에 물 수 있다던가.
“그게 뭐야, 담배꽁초도 영혼이 있어?”
나는 모르지
“엑, 모른다니…. 울프우드도 같은 유령이잖아.”
사람을 담배꽁초 유령 같은 거하고 동일시하지 마라
울프우드가 눈을 가늘게 떴다. 밧슈는 다음 마을에 도착하면 담배를 사서 태워 주겠다고 약속하고서야 그 날카로운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대화는 대체로 밤에 이루어졌다. 낮 동안 사람들 사이에 섞여 이동하다가 해가 지고 난 뒤의 숙소 방이나 야영지의 모닥불 옆에서 둘만 남았을 때에야 울프우드는 펜을 집어 들었다. 대체로 하루 일과에 관한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이 오갔고 종종 옛날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아주 가끔 이 다음엔 뭘 할 생각이냐는 물음을 던지기도 했는데, 이 동행부터가 행선지만 정해 놓고 발길 가는 대로 가는 여행길인지라 둘 다 제대로 대답을 내어 놓지는 못했다. 지도를 들여다보던 밧슈가 충동적으로 이 쪽으로 가볼까, 하면 울프우드가 고개를 끄덕이는 식으로 다음 경로가 정해졌다.
지나치는 마을 중에는 두 사람이 처음 가는 곳도 오래 전에 머물렀던 곳도 있었다. 기억 속의 풍경과 마주할 때면 밧슈는 지나가듯이 퍼니셔를 들고 올 걸 그랬다고 속삭이면서 뒤를 돌아봤다. 그러면 울프우드는 한 발짝 뒤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밤에 펜을 잡으면 니가 무슨 남의 묘비를 훔쳐가는 도굴꾼이냐고 휘갈겼다. 2년 전 그걸 묘비 삼아 세워 두고 떠난 건 밧슈였지만, 지금에 와서 그랬다가는 정말 도굴꾼 신세가 되는 것도 틀린 말은 아니라서, 밧슈는 식은땀을 흘리며 시선을 돌리곤 했다.
울프우드는 펜을 세워 탁상을 두드리는 습관이 생겼다. 생전에는 펜을 쥘 일조차 많지 않았으니 밧슈와 함께 다니면서 생긴 습관이었다. 아니 그래도, 너도 있으니까 도굴꾼은 아닐지도 모르지…. 맞나? 주절거리는 밧슈를 바라보면서 탁상을 두드리던 울프우드는 종이를 잡아당겼다. 몇 자를 휘갈겨 다시 내밀었더니 밧슈의 시선이 종이 위에 고정됐다.
홈으로 간다고 했었지
“응, 더 늦기 전에 한 번은 가야 할 것 같아서.”
더 늦기 전에?
“으음, 뭐. 머리도 완전히 까매졌고, 이제는 정말 수명이 얼마나 남았는지 나도 모르겠어서.”
울프우드가 잠시 펜을 멈췄다. 무슨 그런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느냐는 얼굴이었다. 대꾸할 할 말이 없어서 밧슈는 웃기만 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울프우드가 다시 몇 자 적는다.
거기 정착할 생각이냐?
“어, 아니?”
대답은 즉시 나왔다. 울프우드는 말문이 막힌 듯 한참 움직이지를 않았다. 그가 더 설명을 요구하는 일은 없었다. 밧슈의 심정을 대충은 알겠다는 듯이.
홈의 사람들은 여전히 밧슈를 반갑게 맞았다. 낯익은 사람들, 제시카, 브래드... 그리고 루이더까지 나와 밧슈에게 인사를 건넸다. 밧슈는 마찬가지로 환하게 웃는 얼굴로 화답했다.
2년. 파괴된 도시와 별에 만연한 혼란을 수습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지구군의 합류,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 날 옥토번의 하늘을 덮은 수많은 깃털. 그 덕분에 지금은 대부분의 도시가 거의 안정되었다고 루이더는 전했다.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지구와의 교신을 지속적으로 이어 나가고 있어… 이 별에서 인류가 살아남는 것도 먼 이야기는 아니라고, 그런 희망에 대한 이야기도 전했다. 밧슈에겐 더없이 기쁜 소식임이 틀림없었다.
“정말 다행이다. 이번만큼은 정말 잘 됐으면 좋겠는데. 그치?”
“그래. 기왕이면 이번 기회에 네 수배서도 좀 없애 버리고 말이야.”
브래드가 옆에서 끼어들었다. 지구군 녀석들, 쓸데없이 널 뒤쫒는 일 같은 데다 뺄 인력이 있으면 이쪽에나 힘을 보탤 것이지…. 어째 맺힌 게 많은 듯한 목소리였다. 다들 밧슈를 환영하긴 해도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으니, 어지간히도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걸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아하하, 그래도 요즘에는 많이 느슨해졌으니까. 너무 걱정하지는 않아도 돼. 나야말로 너희 쪽을 도와줄 수 없어서 미안한걸.”
그 속 좋은 얼굴에 혀를 차면서도 브래드는 굳이 더 입을 열지 않았다. 그게 저를 향한 걱정에서 기인한 태도라는 걸 알아서 밧슈는 기분 좋게 웃었다.
퍼펫 마스터와 나인 라이브즈의 습격 때 파괴되었던 영역도 수리가 거의 끝났다면서, 아이들이 즐거운 얼굴로 밧슈를 이끌었다. 어어, 자그마한 손길에 끌려가다가 뒤를 흘끔인 밧슈는 울프우드가 코너 끝에서 손을 흔드는 모습을 보고 눈을 끔뻑였다. 눈이 마주치자 울프우드는 입을 뻐끔거리면서 손가락으로 옆을 가리키더니, 뭐라 말릴 새도 없이 미끄러지듯이 코너를 돌아 사라졌다. 반사적으로 걸음이 멈췄다.
앞서 나가던 어린아이가 그를 돌아봤다.
“밧슈, 왜 그래?”
“아, 아냐, 아무것도….”
하긴, 울프우드도 이 곳에 온 적이 있었다. 애초에 이제껏 한시도 떨어져 있지 않았던 건 울프우드도 밧슈도 낯선 곳에 있었던 탓이 컸다. 둘 다 아는 곳에서 잠시 둘러보고 오겠다는 걸 밧슈가 잡을 이유도 없을 뿐더러, 여기서까지 구태여 같이 다녀야 할 필요도 없었다. 밧슈가 고개를 내저으면서 다시 걸음을 옮긴다. 잘 때가 되면 어련히 찾아오겠지 싶으면서도… 어쩐지 가슴 한 쪽에 돌이 놓인 것처럼 불편했다. 이유는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새로 보수한 티가 나는 벽, 소박하지만 정겨운 식사까지. 간만에 홈에서 맞는 저녁은 정말 즐거웠다. 모처럼의 손님이 왔으니 다들 신이 나서는 술병을 따고 이마에 넥타이를 감고 한바탕 술판을 벌였는데, 밧슈는 아까 모습을 감춘 울프우드가 저녁 내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이 마음에 걸려 많이 마시지 않았다. 와하하 웃는 사람들 틈에서 그는 신경 쓰이지 않는 척 환한 얼굴로 웃으면서 술잔을 옆 자리로 밀었다. 물론 울프우드가 걱정되는 것도 사실이었지만, 밧슈를 환영하겠다고 마련한 자리인데 빠져나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내내 주머니에 든 펜을 연신 만지작거리기만 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울프우드는 밤이 늦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침대에 앉아 시간을 보내던 밧슈가 피로에 못 이겨 잠들어 버릴 때까지.
다음 날 해가 뜨자마자 밧슈는 방을 나섰다. 혹시 보면 글자라도 남겨 알라는 뜻으로 부러 종이를 펼쳐 두고 잠에 들었었는데, 아침에 일어나고 봤더니 종이와 펜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밧슈는 울프우드가 그가 잠든 방을 찾지 못했을 가능성에 대해 떠올렸다. 아니면 늘 보는 모습처럼 내내 생각에 잠겨 실내를 떠돌았을 가능성이나… 그것도 아니면, 방에 들어왔다가도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고 다시 나가 버렸을 가능성을. 정처 없이 걷던 걸음이 우뚝 멈췄다.
불현듯 울프우드가 마음먹고 숨어 버린다면 밧슈는 그를 찾아낼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탓이다. 만질 수도 소리를 들을 수도 없는 유령을 놓치지 않으려면 눈으로 쫒는 수밖에는 없었다. 그 형체를 한 번 시야에서 놓친다면, 유령이 스스로 밧슈의 눈앞에 나타날 때까지 기약 없는 기다림을 계속해야 한다는 사실까지도. 밧슈가 마른침을 삼켰다.
한참 그 자리에 못 박힌 것처럼 서 있던 밧슈는, 근처를 지나가던 주민이 그를 발견하고 나서야 다시 몸을 움직였다. 괜찮냐는 물음에 밧슈는 습관적으로 웃으면서 대답했다. 당연히 괜찮아. 사실 아니었다. 목이 타는 것 같았다. 온종일 물을 아무리 마셔도 쉽사리 나아지지를 않는 기분이었다.
다행스럽게도 그날 밤이 깊기 전에 밧슈는 울프우드를 찾아냈다. 오랜만에 왔으니 둘러본다는 핑계로 오만 곳을 다 돌아다녀야 하긴 했으나, 겸사겸사 그간 얼굴 보지 못한 사람들과도 인사를 나누었으니 허탈하지는 않았다. 결과적으로 목표로 했던 울프우드를 찾아내기도 했고.
중추 에어리어의 콜드 슬립 실린더. 검은 유령은 수많은 사람들이 잠든 그곳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그의 숨을 따라 희뿌연 연기가 아지랑이처럼 아른거리다가, 냄새도 형체도 없이 흩어졌다. 그 모습이 꼭 사라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여서 밧슈는 크게 소리 내어 그의 이름을 부를 뻔 했다. 겨우 입을 다문 밧슈는, 발소리를 내며 천천히 다가가 나란히 섰다. 울프우드의 시선은 잠든 수많은 사람들에게로 고정되어 있었다.
“언제부터 여기 있었던 거야.”
희미한 속삭임이었지만, 쥐 죽은 것처럼 고요한 곳에서는 메아리처럼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밧슈가 반사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울프우드는 흰 눈동자로 그를 흘긋 바라보고는, 대답 없이 다시 실린더 내부로 시선을 옮겼다. 줄과 열을 맞춰 캡슐 속에 잠든 사람들, 비로소 모든 것이 해결된 뒤에야 깨어날 수 있을 사람들. 밧슈가 다시 입을 열어 물으면서 주머니 속에 넣어 가져온 펜을 내민다. 의미 모를 초조함에 입이 말랐다.
“울프우드, 무슨 생각해?”
울프우드는 의수의 손바닥 위에 놓인 펜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한참 뒤에야 아주 느리고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그걸 집어 들었다.
살아있다는 것에 대해서
“…살아있다는 것?”
그냥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어서. 살아 있지만 움직이지 않는 저 사람들이나 나나 다를 게
문장은 거기서 끊겼다. 울프우드는 자못 복잡한 얼굴이었다. 잠시 멈추었다가 그가 이어서 쓴다.
미안, 지금 몇 시지?
“미안할 건 없고. 지금 시간이, 그러니까… 오후 아홉 시?”
잔뜩 가라앉아 있던 울프우드가 흠칫 굳더니, 이내 입을 떠억 벌렸다. 아홉 시? 정말 시간 감각도 없이 생각에 빠져 있었던 모양이었다. 어쩐지 떨리는 펜끝으로 설마 나 여기 하루 종일 있었냐? 하고 묻는 모습에 밧슈는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고개를 끄덕였더니 울프우드는 정말 할 말이 없다는 표정으로 뒤통수를 헤집었다. 하긴, 이곳은 하루 종일 어두컴컴한데다 해가 뜨고 지는 모습도 볼 수 없었다. 시계도 없으니 시간을 가늠하기 어려울 만 했다.
울프우드가 다시 펜을 움직였다.
기다렸겠네, 정말 미안
“괜찮아, 어제는 나도 피곤해서 금방 잠들었는걸.”
면목 없다는 얼굴의 울프우드가 뒷덜미를 쓸어내린다. 밧슈는 훨씬 나아진 기분으로 방으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내내 주기적으로 뒤를 돌아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울프우드는 변함없이 한 발짝 뒤에서 밧슈를 따라오고 있었다. 그는 시종일관 가라앉은 기색이었는데, 괜찮으냐고 물어도 제대로 대답해 주지는 않았다.
그날 잠들기 전에 밧슈는 울프우드가 한 이야기에 대해 생각했다. 살아있다는 것. 밧슈는 아주 오랜 시간 사람들을 살리기 위한 삶을 살았다. 그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아왔건, 앞으로 손에 쥐고 살아갈 차표가 백지인 건 모든 사람이 동일하기 때문에, 그들 모두가 렘이 살린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가 살린 사람들이 덧없이 죽어가는 걸 바라지 않으며, 그리고… 그렇게 많은 사람을 살려도 부족할 만큼 그의 죄가 깊기 때문에.
하지만 울프우드는? 울프우드는 살아있는 사람인가, 아니면 죽은 사람인가?
눈을 감은 밧슈는 그날 밤 울프우드에 관한 꿈을 꿨다. 반투명하지도 소리를 잃지도 않은 울프우드에 대한 꿈을. 손을 잡을 수 있고 뜨거운 피를 흘리던….
그들은 일주일을 머물렀다.
첫 날 이후로 울프우드는 혼자 사라지지 않았고 밧슈는 그걸 다행으로 여겼다. 말하지 않은 불안이 켜켜이 쌓이고 있음을 알았으나 적어도 이 관계 속에서 그걸 해소할 방법은 없으리란 것도 알았다. 울프우드는 변함없이 담배를 피웠고, 밧슈의 곁에 머물렀으며, 변함없이 잠들기 전에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글로 썼다. 밧슈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것만으로도.
…정말이었다.
2년에 비하자면 일주일은 정말 짧은 시간임이 틀림없었다. 홈의 사람들과의 작별도 고아원에서의 작별이 그랬던 것처럼 긴 아쉬움이 남았다. 다만 이곳 사람들은 두문불출하는 밧슈의 성정을 진작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달랐다. 이별에 무게를 달 수는 없다지만 마지막으로 찾아갔을 때가 십 년 만이었던 것도 한몫했다. 2년이면 많이 짧아진 셈이었다. 그들은 눈물보다 웃음으로 밧슈를 배웅하길 택했다.
“이봐, 밧슈! 나 죽기 전에는 다시 와야 한다!”
“이놈의 영감이 또 불길한 소리 하고 있네!”
밧슈는 황급히 반드시 그러겠다고 외쳤다. 브래드가 킬킬 웃음을 터뜨렸고 밧슈는 근심 어린 한숨을 내쉰다. 환영 인사만큼이나 긴 작별인사를 마치고서야 두 사람은 다시 사막으로 나왔다. 밧슈는 붉은 코트 대신 홈에서 그가 입곤 하던 평상복 차림이었다. 그 모습을 오랫동안 바라보던 울프우드가 손짓했다. 이제는 당연하다는 듯 밧슈가 손을 내민다.
괜찮은 거 맞아?
“뭐가?”
옷. 그거 덕분에 그나마 네 몸에 구멍이 덜 뚫렸던 거 아니었냐
"윽, 말을 해도 꼭 그렇게… 아마 조용히만 다니면 괜찮을걸. 이것 봐, 머리도 새까매진데다 세우지도 않았잖아."
그놈의 조용히가 됐으면 네가 인간 태풍이라고 안 불렸겠지
밧슈가 눈을 흘겼다. 울프우드는 뭐가 문제냐는 양 어깨를 으쓱였다. 맞는 말이긴 했다.
“…홈은 지구군하고 협력하고 있으니까, 혹시라도 알아보는 사람이 있으면 곤란하잖아. 이 근방을 벗어나면 다시 입어야지.”
그리고 나서야 울프우드는 펜을 거두었다.
이번에도 행선지만 정해 둔 여행길이었다. 울프우드는 굳이 다시 얘기하지 않았지만 밧슈는 울프우드가 돌아가리라는 사실을 알았다. 이스트 디셈버 쪽에서 주목할 만한 기삿거리는 나오지 않았으니 아마 리비오와 고아원은 괜찮을 테지만… 그 곳이 울프우드의 돌아갈 곳인 이상은.
다시 돌아가는 길에는 오던 길보다 술을 좀 더 마셨다.
처음에는 술집에서 혼자 테이블을 차지하고 그 앞에 한잔, 맞은편 유령이 앉은 자리에 한 잔을 놓아두고 마셨는데, 아무래도 옆에서 보기엔 그게… 소위 말하는 헌팅처럼 보였던 모양이었다. 몇 차례인가 처음 보는 사람이 그 술을 마셔 버린 뒤로 밧슈는, 두 사람은 술을 사들고 숙소로 돌아와서 마셨다.
대체로 창가의 탁자에 자리를 잡았지만 여의치 않을 때는 침대에서도 마셨다. 그러다 침대에 술을 쏟아 알코올 냄새와 함께 잠을 청한 적도 있었는데, 그 뒤로는 행여나 쏟을까 울프우드의 잔은 채우지도 못했고, 밧슈의 잔도 채우는 족족 들이켜야 했다. 울프우드는 허공에 뜬 채로 그 모습을 모두 바라보고 있었다.
종종은 방 한가운데에 소파가 있는 곳도 있었다. 방주인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밧슈는 거기 앉을 생각이 없었다. 울프우드는 소파 난간에 올라앉은 채 불만스러운 얼굴의 밧슈를 비웃었다. 밧슈는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정작 울프우드도 안 앉으면서.”
그래서 앉으라고?
“…아니, 앉지 마….”
적당히 취기가 오르고 나면 밧슈는 말이 없어졌다. 언젠가는 술을 마시면 되레 시끌시끌해졌는데, 이상한 일이다.
대신 상기된 얼굴로 탁자에 턱을 괴고 울프우드의 이름을 불렀다. 울프우드는 그 호명에 맞춰 펜으로 탁자를 일정하게 두드렸다. 딱, 딱, 딱…. 변함없는 그 박자를 들으면서 밧슈는 대체로 잠에 들었으나 아주 가끔은 손을 뻗었다. 흉터 진 손가락은 반투명한 손을 맥없이 통과해 펜에 닿았다. 그럴 때면 울프우드는 미련 없이 손을 뗐다. 탁자를 두드리는 소리가 멈추고 밧슈는 형용할 수 없는 얼굴로 울프우드를 바라보고는 했다. 아주 긴 시간 동안. 모르는 새 말할 수 없는 불안이 두 사람 사이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살아있는 건 못 만진댔지.”
바람이 거세게 불어왔다. 밧슈는 나란히 선 울프우드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검은 머리카락은 바람조차 맞지 않는 듯 고요하기만 했고, 그가 태우는 담배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았다. 핀으로 집어 고정한 것처럼. 여전히 지평선에 시선을 고정한 울프우드가 고개를 까딱이는 게 보였다. 흐음, 콧소리를 낸 밧슈가 고개를 돌렸다.
“역시 그건 조금 아쉽네.”
울프우드가 가라앉은 눈으로 밧슈를 돌아본다. 짙은 선글라스 때문에 그의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 곁에는 사람이 없었지만, 어쩐지 울프우드는 펜을 들 생각이 없는 듯했다. 물론 말하지 않아도 밧슈는 그 시선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었다.
그 날은 유난히 운이 안 좋았다.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총알이 빗발쳤다. 붉은 코트, 눈 밑의 점, 사람 좋은 얼굴… 밧슈 더 스탬피드를 알아본 현상금 사냥꾼의 소행이었다. 600억 더블 달러는 아니어도, 지구군에서 건 현상금과 개인이 걸었던 2천만 더블 달러는 남아 있다. 성공했다간 말 그대로 팔자 피는 거라며 한 손에 수배지를 든 남자가 총알을 난사해댔다. 모처럼의 느긋한 휴일을 즐기던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흩어졌다.
가만히 서 있는 건 밧슈 혼자였다. 응전하는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그는 알았다. 상당히 오랜만에 잡은 총이었으나 손잡이는 자연스럽게 손에 감겼다. 평소였다면 별로 기쁘지 않을 감각이나, 빗발치는 공격을 피해 도망치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은 상황에서는 오히려 다행인 일이다. 요령 좋게 급소를 노리는 탄환을 피하면서 밧슈가 총을 겨눴다.
겨누는 곳은 오른쪽 어깨. 빗나갈 리는 없고…. 울프우드는 여전히 담배를 피면서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기묘한 불쾌감에 휩싸인 채로 그가 인상을 찡그렸다. 아니, 불안감인가?
총성은 한 번으로 족했다. 즉시 어깨를 부여잡은 사냥꾼이 총을 떨어뜨리고 바닥을 굴렀다. 베짱이 두둑한 것치고 실력은 부족한 자였다. 밧슈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이 마을은 얼른 뜨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무리 고의가 아니었다지만 이런 현상범을 마을에 들이고 싶을 리도 없었고, 이런 난동이 일어났는데 다친 사람이 없을 리도 없으니….
핏발 선 눈의 현상금 사냥꾼이 손에 폭탄을 들고 있지만 않았어도 미련 없이 그랬을 테다. 마을 바깥을 향해 몸을 돌리던 밧슈의 걸음이 멈췄다.
픽, 경쾌한 금속음과 함께 안전핀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눈을 크게 뜬 밧슈가 폭발을 피해 몸을 날렸다. 하지만 그를 향해 날아오리라 예상한 폭탄은 균형을 잃은 팔에 의해 상당히 멀리 날아갔다. 그러니까…, 한 발짝 물러서 있던 그의 동행인이 있는 방향으로.
몸이 돌아간 건 불가항력이었다. 밧슈는 한순간 두려움에 휩싸였고, 그것이 의미 없는 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엔 이미 늦었다. 거대한 폭발이 일었다. 가까운 곳에서 폭발에 휘말린 귀가 먹먹했다. 울프우드가 희게 질린 얼굴로 입을 뻐끔거리고 있었다. 이 멍청아!
거멓게 점멸하는 시야 속에서도 밧슈는 울프우드의 목소리가 기억나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나 했다. 찢어지는 듯한 총성이 다시 울렸다.
다시 눈을 떴더니 새벽녘이었다. 창문 너머, 지평선 위로 희미하게 여명이 번지고 있었다. 밧슈는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울프우드는 여전히 창가에 서 있었다. 처음 보는 공간이었지만, 그 사실만으로도 밧슈는 안도할 수 있었다.
밧슈가 천천히 주위를 살폈다. 하얀 벽, 알싸한 약 냄새, 자신의 팔에 연결된 링거 줄까지. 아무래도 병원인 듯한데, 손목이나 다른 곳이 묶여 있지 않은 걸로 보아…, 잘은 몰라도 어떻게 해결된 것이리라. 밧슈는 다시 울프우드의 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먼지 낀 것처럼 희미한 신체 너머로 새벽녘이 드리우고 있었다. 그림자조차 지지 않는 반투명한 몸 너머로. 눈을 감았다 뜨면 사라질 것 같은 풍경이 어른거렸다.
시선을 느낀 울프우드가 고개를 돌린 건 한참 뒤의 일이었다. 흰 연기를 뱉던 울프우드가 고개를 돌려 밧슈와 눈이 마주치고는, 놀란 것처럼 눈을 부릅떴다. 곧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침대로 가까이 다가왔다. 슬픈 것 같기도, 안심한 것 같기도 했지만… 정확히는 화가 난 얼굴에 가까웠다. 밧슈가 쓰게 웃었다.
“미안.”
빠르게 상처의 상태를 훑은 밧슈가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이럴 때 만큼은 회복력이 좋아서 정말 다행이었다. 울프우드는 슬슬 짜증이 난다는 표정이었지만 굳이 펜을 치켜든다거나, 아무튼 환자에게 손을 대지는 않았다. 깊이 한숨을 쉬는 듯 어깨가 한 차례 들썩였다. 낡은 펜은 울프우드의 손에 꽉 잡혀 있었다. 밧슈가 습관처럼 손을 내밀었고, 곧 손바닥에 익숙한 감각이 닿았다. 긴 말은 아니었다. 겨우 다섯 글자.
제정신이냐?
“…진짜 미안. 그때 좀, 피곤했던 것 같아. 요즘엔 이상할 정도로 그런 일이 없었기도 해서, 많이 풀어지긴 했나봐. 더 신경썼어야 하는데."
그게 아니잖아
뭐라 대꾸하려던 밧슈는 울프우드와 눈이 마주치고는 그만뒀다. 흰 눈이 형형하게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화를 내다 못해 싸늘하게 가라앉은 얼굴이었다. 이를 악문 입꼬리가 여전히 일그러져 있었다. 그 표정을 마주보고 있을 면목이 없어서… 밧슈가 시선을 내린다. 그들은 서로를 너무 잘 알았다. 깊이 쌓인 불안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서로가, 이 동행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유령은 살아있는 것처럼 행동했고 사람은 그런 유령을 살아있는 것처럼 대했다. 땅을 딛을 수 없으면서 모래를 밟는 것. 부러 다른 사람과 닿지 않으려 애를 쓰는 것. 침대에 눕고 의자에 앉고, 검은 잉크로 자신의 존재를 새기고… 그리고 그 유령 존재를 증명하는 산 사람. 밧슈는 어느 순간부터 울프우드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고, 한 발 앞서 걷는 게 아니라 옆에서 걸었다. 울프우드는 어느 순간부터 앉거나 눕는 시늉을 관뒀다. 걸을 때도 한 걸음씩이 아니라 미끄러지듯이, 움직임 없이 움직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밧슈는 살아있다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착각하게 해서 미안한데 난 죽은 사람이다
“울프우드, 이번 일은 정말 실수였어.”
죽었다고
“알아… 나도 알아.”
왜, 직접 묻어 놓고 옆에서 알짱대니 실감이 안 나더냐?
“울프우드!”
밧슈가 비명처럼 이름을 불렀다. 울프우드가 펜을 부러뜨릴 듯 쥐었다가 결국 내던졌다. 펜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마룻바닥에 처박혔고, 곧 방 안에는 무거운 정적만 감돌았다. 참담한 심정으로 밧슈가 손을 모아 잡았다. 울프우드의 손을 잡고 싶었다. 닿고 싶었다. 그러나 손끝에 닿는 건 차가운 의수의 감촉뿐이다.
“하지만 울프우드, 밤새도록 이야기했었잖아, 우리. 네가 하는 이야기를 내가 들었고, 내가 하는 이야기도 네가 들었잖아. 잠들기 전에도, 자고 일어나도, 혼자 떠돌던 길에도 네가 있었는데….”
밧슈의 눈앞에서 울프우드는 살아 움직였다. 그는 웃는 얼굴이기도 고통스러워하는 얼굴이기도, 때론 의미를 알기 어려운 얼굴이기도 했다. 닿을 수 없는 벽 너머에서 관망하던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그의 곁에 머물렀다. 펜을 들어 글자를 새겼고, 대화를 했고, 아침 인사를 했다. 밧슈가 울프우드의 얼굴을 올려다본다.
“그건 살아있는 게 아냐? 살아있다는 게 뭔데?”
울프우드는 역시 참담한 얼굴이었다. 지친 것 같기도 했다. 고개를 돌린 채 울프우드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으나 밧슈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았다.
미안
“…미안해하지 마.”
널 따라오는 게 아니었어
그리고는 정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창문 밖에서 햇빛이 드리운다. 숨을 삼킨 밧슈가 아주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믿고 싶지 않다는 듯이. 하지만 여전히 그 자리엔 아무것도 없었다. 침대맡에도, 창가에도, 방 안쪽 구석의 가장 어두운 곳에도. 느린 동작으로 주위를 살피던 밧슈가 손에 얼굴을 묻었다. 아직도 손바닥에 글자가 새겨지던 감각이 남아 있는 듯했다. 그리고 마침내 밧슈가 소리 내어 흐느꼈다.
떠나지 마, 가지 마.
목소리가 듣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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