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으로의 여행
- 죽음에 대한 은유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는 마지막이 목전에 있음을 깨달았다.
낯익은 바람이 손끝을 휘감아 당기고 있었다. 더블팽과 트립 오브 데스가 일평생 몰고 다녔던, 죽음의 냄새가 나는 바람이다. 마침내 그 바람이 자신을 향해 불고 있었다.
리비오는 아주 천천히 숨을 내뱉었다.
긴 인생이라고도, 후회 없는 인생이라고도 할 수 없었다. 미카엘의 눈에서 받은 시술은 그 효과만큼 부작용도 확실했던 까닭이다. 부상과 회복을 반복할수록 그는 빠르게 쇠약해졌다. 말년의 채펠이, 미카엘의 눈에서 지냈던 사람들이, 그리고 니콜라스가 그러했듯이. 한동안 활동을 함께했던 밧슈는 그 모습을 체감할 때마다 상당히 복잡하다는 표정을 짓고는 했지만... 사실 리비오는 그게 꼭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루가 지나갈 때마다 주름이 늘고 수염이 나는 모습을 거울로 보고 있으면 시간이 아주 빠르게 지나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리비오는 자신이 구한 사람들과 자신이 죽인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씩 떠올렸다. 흐릿하기도 하고, 선명하기도 하고... 이상할 정도로 짙은 연기에 가려진 것처럼 보이지 않는 얼굴이 많았다. 리비오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들을 떠올려내려 애쓰다가 이내 고개를 휘저었다. 애초에 이제 와서 생각해낸대도 별 의미도 없는 이야기였다. 설령 죽어 사라진다 해도 심장 깊이 새겨진 죄의 증거가 지워지지는 않을 테니. 푹신한 의자 등받이에 깊이 몸을 기댄 채 그는 바람 빠지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입을 열었더니 마른기침이 말보다 먼저 튀어나왔다. 따끔거리는 목에 손을 댄 리비오가 소리 내어 이름을 부른다.
라즐로.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성격 나쁜 친구는 예전부터 늘 한번에 대답하는 법이 없었다. 못 들을 리가 없었을 텐데도, 꼭 한 번씩은 모른 척 고개를 돌리곤 했다. 리비오는 참을성 있게 잠시 기다렸다가 다시 불렀다.
라즐로, 듣고 있지?
그제서야 그의 오랜 친구는 나타난다. 사실 나타난 건 아니긴 했다. 리비오의 오랜 친구라면, 라즐로라면... 한참 전부터 이쪽에 신경을 기울이고 있었을 테니까.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어쩐지 그랬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익숙한 목소리가 희미하게 한숨을 내쉰다.
듣고 있었어. 네가 어울리지도 않는 청승을 떨 때부터 말이야...
어울리지도 않는 청승이라니. 오늘 정도는 좀 봐 줘. 조금 특별한 날이잖아.
......그래, 오늘만이다. 정말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알겠지.
리비오는 눈을 감은 채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미카엘의 눈에서 훈련하고 나면 이런 일이 꽤 자주 있었다. 둘은 한 사람이면서 다른 사람이라 라즐로가 가진 천부적인 재능은 리비오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것이었고, 리비오는 내쳐지지 않기 위해서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야만 했다. 목에서 쇠 맛이 날 만큼 달리고, 팔다리가 움직이지 않을 때까지 더블 팽을 휘두르고. 그러다가 탈진해 정신을 잃고 나면 늘 혼자 남겨진 그를 깨우는 건 라즐로였다. 리비오는 그 순간이 좋았다. 그의 인생에 있어 누군가 따스하게...
...사실 라즐로가 리비오를 깨우면서 하던 말이 그다지 따스하지는 않았지만, 아무튼. 누군가 손을 뻗어 주는 일은 많지 않았기 때문에. 그건 그의 스승이었던 자나 형이었던 사람과는 다른 감각이었다. 이 세상에 홀로 남아도 그만큼은 제 곁에 있어 주리라는 믿음, 언제고 함께 움직이게 되리라는 확신 따위를 몸에 두르고 나면 뼈를 에는 외로움도 모습을 감췄다. 그래서 리비오는 훈련장에 아무도 없는 날이면 차가운 대리석 바닥 위에 눈을 감고 누운 채 라즐로에게 말을 걸고는 했다. 주로 나누는 건 생산적인 대화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들이었는데, 라즐로는 조금 성가셔하는 기색을 내비치면서도 성실하게 대답을 내놓았다. 꼭 지금처럼.
예전에는 그렇게 일찍 기절하듯이 잠들더니, 요새는 많이 늦어졌군.
그러게. 예전만큼 몸을 움직일 일이 없어서 그럴지도 모르지. 밤이 되면 많은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놈의 생각. 내가 볼 때는 그게 문제야. 시끄러워서 잠을 잘 수가 없잖아.
뭐야, 라즐로. 너도 잠을 자?
네가 자는 게 내가 자는 거지, 뭐 특별할 게 있냐.
하긴, 그렇네. 오늘도 같이 잠들겠구나...
리비오가 속삭이듯이 말했고, 라즐로는 잠시 침묵했다.
당연하지.
리비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창문 밖에서 동이 트고 있었다. 머나먼 지평선 너머에서 모습을 드러낸 태양이 광활한 사막을 지나 리비오의 발치까지 빛을 쏟아냈다. 그는 발치까지 밀려온 붉은 햇빛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봤다. 창틀에 매달린 그림자가 웅덩이처럼 고여 있었다. 뭔가를 기다리듯이. 가만히 그 그림자를 바라보던 리비오는 이상한 감정이 가슴 깊은 곳에서 고개를 드는 것을 느낀다. 추측컨대 두려움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이봐, 라즐로. 정말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이 다음에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어? 그러니까, 눈을 감고 나면.
청승 잘 떨더니 갑자기 왜 이래. 야, 생각을 좀 해봐라. 네가 모르는 걸 내가 알겠냐?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드네. 그래, 그 말이 맞다. 내가 모르는 걸 네가 알 리 없겠지.
저건 저거대로 어째 어감이 좀 그런데.
뭐 어때, 맞는 말이잖아.
리비오는 킥킥거리면서 웃었다. 그에겐 이제 입을 열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쿠션이 깔린 안락의자가 부드럽게 흔들렸다. 리비오는 가만히 그 움직임에 몸을 싣는다. 교회에 마련된 작은 방 안은 아직 밤의 냉기로 서늘했지만, 더는 외롭지 않았다. 그에겐 괴로움을 나누었던 가족이 있었고, 같이 역경을 헤쳐 나온 동료가 있고, 그리고 기나긴 삶을 함께 걸어갈 친구까지 있다. 후회뿐인 삶이었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 그는 가슴이 이루 말할 수 없는 충족감으로 차오름을 느꼈다. 눈으로 새어 나온 그 감정이 볼을 타고 흐른다.
이제는 라즐로도 함께 눈을 감고 있었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는 알 수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종소리가 들린다. 낯익은 바람이 창문을 넘어 들어와 길게 기른 머리카락을 흩어 놓고 얼굴을 어루만졌다. 두 사람은 손을 잡은 채 기꺼이 그 바람을 타고 몸을 일으켰다. 아마도 아주 긴 여행이 될 테지만 더이상 두렵지는 않았다. 길을 잃는다면 재능 많은 그의 친구가 그를 이끌 테고, 그 친구가 힘이 빠져 주저앉는다면 언제라도 자신이 그를 일으킬 테니까.
그러니 자, 비로소 떠날 때다. 죽음으로의 여행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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