밧울 전력 모음

행복한 2월이었다

Curtain Call by 펠멜
11
1
0

로스트 테크놀로지

맥시멈 기반 / 설정 날조 주의

"본 적 없다고? 지구를?"

밧슈는 물어보자마자 자신의 실수를 알아챘다. TV도 제대로 보급되지 않은 척박한 사막 행성, 이곳 노맨즈랜드에서 울프우드가 어디에서 지구의 모습을 볼 수 있었을까. '지구'를 아는 것만도 기초적인 교육은 받았구나 감탄을 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울프우드는 무표정하게 이쪽을 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턱을 톡톡, 두드리며 잠시 고민에 빠졌던 밧슈는 빠르게 결심을 내리고 제안했다.

"지구, 보러 갈래?"

그 배의 잔해는 기억 그대로의 위치에 있었다.

마침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 들를 수 있었다. 원래 가려던 방향에서는 약간 우회하게 됐지만, 여행이란 것이 그런 변수와의 작용인 법이니까.

암석 지역의 지하로 통하는 길을 한참 기어가듯 들어가야 있는 거대한 공동. 그 한가운데에 놓인 비교적 형체가 유지되어 있는 소형선. 시원하게 뚫린 천장에서부터 환하게 빛이 쏟아지고 있다. 햇빛을 받아 은색 금속이 반짝반짝 빛나고 유선형의 배가 돌바닥에서 솟구친 은빛 고래처럼 서있다. 침입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오는 길이 어둡고 미끄럽고 복잡해서 여태까지 외부로부터 발각되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이건......"

퍼니셔를 걸친 채로 울프우드가 약간 헐떡이며 말했다. 오는 길이 험했어도 겨우 그 정도로 숨이 모자를 그가 아니니, 분명 경탄 때문일 것이다.

밧슈는 저절로 웃음 지었다.

"들어가자."

전력을 공급해줄 플랜트가 따로 없이 자체 배터리로만 움직이고 있는 이 배는 수명이 곧 한계에 도달할 것이다. 들어올 수 있는 기회도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밧슈는 능숙하게 최상단을 향했다. 개폐문이 열리고 드러난 광경에 울프우드가 또다시 숨을 훅, 들이켰다.

"로스트 테크놀로지......"

"우주망원경이야."

매끈한 은색의 거대한 원통 형태를 가리키며 밧슈가 설명했다.

"즉, 지상에선 그냥 고철덩어리란 뜻이지."

"무슨 소리야?"

"지상에서는 전파나 가시광선을 이용한 관측 외에는 할 수가 없어서, 애초에 우주망원경이 만들어진 이유도 그것 때문이거든, 대기의 영향을 받지 않는 우주에서 관측하려는 용도로--- 미안, 재미 없지."

"아니......"

"어쨌든 우주에서 쓰일 목적으로 만들어진 친구라는 거야. 여기서는 무용지물."

우주망원경은 쓸 수 없지만 데이터는 보여줄 수 있다. 밧슈는 컨트롤 패널을 조작해서 홀로그램을 띄웠다. 하는 김에 남은 전력 잔량을 확인했다. 역시, 몇 년 남지 않았다.

"봐, 이게 푸른별, 지구."

"이것이 지구......"

홀로그램은 제법 실제 같아 보였다. 넋을 잃고 바라보는 울프우드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밧슈는 설명했다.

"저 푸른색이 전부 물이래."

"저게 다?"

"바다라고 한다던걸."

"바다...... 별을 덮을 만큼의 물이라니, 상상도 할 수 없군."

노맨즈랜드와의 현실과 비교하는지, 울프우드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밧슈는 다음 사진을 홀로그램으로 띄웠다.

"이게 숲."

"숲, 이라면."

"나무가 우거진 지역을 그렇게 말한대. 아, 네 이름에도 나무가 들어가있구나. 그렇다면,"

개와 닮은 짐승이 홀로그램으로 띄워지자 울프우드가 뭐냐고 묻는 듯이 쳐다봤다. 밧슈는 이를 드러내놓고 씨익 웃고 말았다.

"저게 늑대."

"허."

"개보다 크대."

"길거리를 떠도는 비루먹은 개들보단 훨씬 멋있잖아."

"개들의 조상이라고 하던데."

"거참, 이름 한 번 거창하네."

자기 이름의 뜻을 이제 처음 제대로 안 건가? 밧슈는 굳이 캐묻지 않았다.

"더 보고 싶은 게 있어? 지구 관련해서."

"......도시, 를."

지구의 도시는 인구가 밀집한 거대한 메트로폴리스, 마천루가 빌딩숲을 이루고 첨단을 달리는 기술의 집약 그 자체, 엉킨 거미줄 같은 고층빌딩 사이를 자동차와 호버카가 누빈다.

그 영상 자료를 울프우드는 열망의 눈길로 올려다봤다. 아마 그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저곳에 가고 싶다'가 아닐 것이다. '저곳으로 보내고 싶다'일 것이다, 그런 사내니까.

홀로그램이 꺼진 후에도 울프우드는 가만히 앉아서 여운에 잠겨있었다. 밧슈는 우주망원경을 쳐다본 채로, 각자 생각에 잠겼다.

시간이 조금 지나고, 밧슈가 먼저 침묵을 깨뜨렸다.

"저 녀석이 우주에서 제 몫을 할 날이 올까."

"......글쎄."

별안간 울프우드가 환하게 웃었다. 두 눈이 접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그래도, 희망이 있으니까."

밧슈는 조금 놀랐다가, 이내 따라서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희망이 있지."

암석 동굴 한가운데 튀어나온 은빛 고래와 같은 함선을 빠져나와 두 개의 태양 아래의 지상으로 다시 올라오며, 밧슈는 상상했다.

푸르른 숲에 서있는 울프우드를,

풍요로운 도시에서 살아갈 사람들을,

무한한 우주에서 우리를 위해 사진을 찍어줄 우주망원경을,

감히 희망해보았다.


손가락키스

맥시멈 기반 🔫주의

문득 닿은 손가락의 감촉과 함께 울프우드는 어렴풋한 잠에서 깼다.

"무슨 일이야..."

목에서 나온 소리는 잠겨서 평소보다도 쉬어 있었다. 스스로의 목소리에 인상을 찡그리는데 손가락을 꽉 쥐는 손길이 있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더 자."

"넌 거기서 왜 그러고 있는데..."

"잠이 안 와서."

"잠이 안 온다고 남의 손을 만지작거리고 있어?"

눈을 가늘게 뜨고 옆을 보자, 간이 의자에 앉은 환자복 차림의 밧슈가 보인다. 해가 지고 밤이 내린 홈의 병실은 어두웠고 중간중간 켜져있는 비상등밖에 광원이 없었다. 창백하고 희미한 빛 아래에서도 밧슈는 뚜렷하게 잘 보였다. 애꿎은 남의 손가락을 매만지는 그는 생각이 많아 보이는 얼굴이었다.

울프우드는 밧슈에게 잡혀있는 손을 털었다. 빠르게 자리를 옆으로 옮기고서 이불을 들어올렸다.

"들어와."

"어?"

"잠 좀 자자. 오던가 가던가."

"아, ......아. 그래."

밧슈가 조금 어색해하며 침대 옆으로 기어들어왔다. 그 어깨 위로 울프우드는 이불을 꼼꼼히 덮어주었다. 침대는 약간 넓은 편이었지만 큼직한 남자 둘이 나란히 누워서 자기에는 조금 좁았다. 편한 자세를 찾아 조금 뒤척였다.

이쪽에 등을 보인 채로 옆으로 누운 밧슈가 규칙적인 호흡을 하고 있지만 잠든 게 아닌 것은 알았다. 그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울프우드는 눈을 감았다.

순식간에 퍼진 온기에 따뜻해져서, 예상과 다르게 빠르게 잠이 재방문해주었다.

* * *

문득 닿은 생경한 느낌과 함께 울프우드는 어렴풋한 잠에서 깼다.

"뭔데......"

목이 다 긁혀서 피가 나오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쉰 소리가 나왔다. 심한 목소리에 눈살을 찌푸리는데 손가락을 감싸오는 매끈하고 지나치게 부드러워서 소름이 돋는 감촉이 있었다. 순간 잠이 확 깨서 울프우드는 고개를 확 치켜들어 눈을 크게 떴다.

곁에 있던 밧슈가 서둘러 안심시켰다.

"아무것도 아냐. 더 자."

"너 그 깃털은 왜 나와 있는데?"

"그냥 확인 좀 하려고..."

"뭘 확인한다고 그걸로 내 손을 만지작거리고 있어?"

방주에서 추락한 그들은 커다란 바위 아래를 피난처로 삼고 몸을 숨기고 있었다. 일단 밤을 보내고 움직일 생각이었다. 울프우드는 아프고 지친 상태였고 밧슈도 오랜 감금으로 몸 상태가 엉망이었다.

잠 좀 자게 냅두라고 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이 녀석은 왜 저걸로 깨작대서 사람을 깨우지, 싶어서 울프우드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걸로 뭐하고 있었냐니까?"

"그렇게 물으니까 내가 무슨 나쁜 짓이라도 한 것 같잖아......"

안쓰러울 정도로 메마른 몸이며 상한 얼굴을 하고선 밧슈는 평소처럼 난처한 얼굴로 웃었다.

"......그냥 네가 살아있나 확인하려던 것뿐이야."

맥 빠지는 대답에 울프우드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서 뻗어나온 깃털들 사이로 손을 내밀어, 밧슈의 맨손을 잡았다.

"이제 됐냐."

"......응."

"진짜 잠 좀 자자."

긴장했던 몸에 힘을 빼고 다시 바위에 기대었다. 두 눈을 감고 다시 휴식을 찾았다. 느슨하게 잡혀있던 밧슈의 오른손이 손가락 틈으로 파고들어 깍지를 끼더니 꽈악 힘을 주어서 맞잡았다.

맞닿은 피부를 통해 전해진 체온과 함께, 순식간에 잠들어버렸다.

* * *

밧슈는 울프우드의 손을 잡아 올렸다.

손가락을 뻗어 그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길게 매만져보았다. 언젠가 홈의 병실에서 그랬던 것처럼.

울프우드는 깨어나지 않는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파고들어 깍지를 끼고 꽈악 힘을 주어 잡았다. 얼마 전 바위 아래에서 그랬던 것처럼.

울프우드는 눈을 뜨지 않는다.

그래서 밧슈도 눈을 감는다. 맞잡은 채로 울프우드의 손을 들어올려,

그 조용하게 잠든 손가락에

조심스레 입맞췄다.


수족관

맥시멈 환생 AU / 근미래 SF / 설정 날조 주의

"느려, 울프우드!"

"느린 건 너겠지!"

교복을 입은 금발의 소년과 흑발의 소년이 앞다투며 언덕길을 뛰어 올라가고 있었다. 바람이 선선하게 부는 화창한 초여름의 날, 완벽한 날씨였다.

금발의 소년을 밀치며 울프우드라 불리운 흑발의 소년이 먼저 담벼락에 손을 짚었다.

"이겼다!"

"치사해!"

"승리를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하는 법!"

"좀 가려라, 좀!"

크게 어깨를 들썩이며 숨을 고르는 금발의 친구를 향해 울프우드가 씩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만 투덜대고 승복해라, 빗자루."

"참나, 반칙했으면서."

마지막으로 투덜거림을 덧붙이고서 빗자루 - 밧슈는 울프우드의 손을 잡았다.

"들어가자, 메릴이 바로 들어오랬어."

과연, 건물의 정문은 열려있었고, 들어가니 바로 메릴이 맞아주었다.

"어서 와, 찾아오는 길이 어렵진 않았지?"

"안 헤매고 바로 왔어, 걱정 마!"

"그럼 다행이다. 자, 바로 체험하러 가볼까?"

'줄라이 아쿠아리움'은 다음 달 1일에 개장이 예정된 세계 최초의 가상 현실 수족관이다.

20XX년, 극에 달한 환경오염으로 해수면은 치솟고 인류는 삶의 터전의 50%를 잃었다.

20XX년, 전세계 모든 국가가 동물 보호 협약에 가입했다. 지구 상의 모든 동물원과 수족관이 문을 닫았다.

21XX년, 해수면 상승과 온난화 현상이 완화되었다. 세계환경보호협회는 '즉각적인 위험'에서 '잠재적인 위험'으로 환경 감시 레벨을 낮추었다.

21XX년, 세계 각국의 기술자들이 모여 세계 최초의 가상 현실 동물원을 개장하였다.

그리고 오늘, '줄라이 아쿠아리움'에 밧슈와 울프우드는 지인 찬스로 개장 전에 초대되는 행운을 누리는 중이었다.

메릴이 내미는 고글을 받아들며 밧슈가 신기해했다.

"와, 많이 경량화됐네. 동물원에서는 이따만하게 커다란 걸 써야했는데."

"후훗, 기술의 발전이 얼마나 빠른데."

고글을 쓴 두 십대 소년을 방의 한가운데에 내버려두고 메릴은 급하게 컨트롤 룸으로 올라갔다.

"곧 시작될 거야, 너무 놀라지 마!"

놀랐다. 그야, 갑자기.

고래가 발 밑에서 솟구쳐 올라오면 누구나 놀라서 비명을 지를 거다.

간신히 멸종 위기에서 벗어난, 흰수염고래가 두 사람을 휩쓸고 올라가면서 깊은 심해가 펼쳐졌다.

푸르다못해 검은 바다 속으로 현기증 나는 감각과 함께 떨어지며, 온갖 수중 생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은빛 비늘을 반짝이며 자랑하는 물고기 떼와, 알록달록한 산호초 군락, 형형색색의 열대어들, 해파리와 문어와 해초와 불가사리와 온갖 생명체들이 휘몰아쳤다.

"뭐야 이거, 수족관이 아니라 스쿠버다이빙이잖아...!!"

정신이 없어서 몰랐는데, 밧슈에게 울프우드가 바짝 붙어서서 팔을 두 손으로 꽈악 잡고 있었다.

"울프우드? 괜찮아?"

"이, 이렇게 실감 난다고는, 아니, 수족관이란 게 이런 거야? 이건 그냥 바다잖아!"

"그러게. 동물원이랑은 많이 다르네. 옛날에 있었다는 사파리 체험 같은 컨셉이었잖아, 차도 탔고."

"난 수영 못하는데 냅다 이러는 게 어딨냐고!"

밧슈는 푸웃, 웃었다.

"수영 못해도 상관없잖아, 버츄얼인데!"

"기분의 문제다!!"

"앗 저기 봐, 돌고래야 울프우드!"

순식간에 다가온 돌고래 떼가 그들을 끼고 빙글빙글 헤엄쳤다. 밧슈는 와핫, 웃음을 터뜨리며 손을 뻗어 돌고래를 만져보았다. 당연히, 만져지지는 않았지만, 손길이 기분 좋은 듯 돌고래가 끼루룩 소리를 내며 위로 솟구쳐올랐다. 밧슈와 울프우드도 함께 떠올라서, 수면 위로 점프하는 돌고래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주위의 풍경은 순식간에 바뀌어, 어느새 남극의 빙하가 펼쳐졌다. 많이 녹아버린 지금의 모습이 아닌, 언젠가 빙하가 드넓게 펼쳐져있던 과거의 모습의 재현이었다.

빙판 위로 미끄러지는 황제펭귄들의 모습이 보이더니, 그들과 함께 다시 바닷속으로 빠져들었다. 과연 새는 새인지, 물결을 타고 펭귄들은 날으는 듯이 유영했다. 덤벼드는 물범을 피해 펭귄들이 다시 위로 올라가고, 이번엔 범고래가 빼곡한 이빨을 보이며 덤벼들어서, 울프우드는 자신도 모르게 으악, 소리를 쳤다.

가상 현실은 남극 바다에서 볼 수 있는 바다 생물들을 몇 가지 더 보여준 이후에, 천천히 페이드아웃 되었다.

끝난 것을 알아채자 울프우드가 바로 고글을 벗으며 크게 한숨을 터뜨렸다.

"와, 장난 아니다 진짜."

"엄청 재밌었어, 그치!!!"

"간 떨어지는 줄 알았다. 심장이 아직도 쿵쾅거려."

"그 정도였어?"

"진짜다. 느껴지나?"

울프우드가 밧슈의 오른손을 잡아다 끌어서 자신의 왼쪽 가슴에 대었다. 밧슈는 순식간에 귀까지 빨개진 채, "아, 그러네, 진짜 빨리 뛰네, 그러네." 횡설수설하며 손을 회수해서 자신의 주머니에 푹, 찔러넣었다.

컨트롤 룸에서 다시 내려온 메릴에게 밧슈와 울프우드는 한바탕 소감을 쏟아냈고, 울프우드는 약간의 3D 멀미가 났는지 바람을 쐬어야겠다고 먼저 나갔다.

회수한 고글을 들고 떠나려는 메릴을 밧슈가 슬쩍 잡았다.

"근데 메릴,"

"음?"

"내가 봤는데, 옛날에 수족관은 데이트 명소였다는데."

"어, 아, 나도 자료에서 봤어."

"이런 박진감 넘치는 것도 좋지만, 조금 천천히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방법도 있으면 좋을 것 같아."

"아아, 그러네. 그런 것도 정말 좋겠다. 고려해볼게. 고마워, 밧슈!"

문까지 바래다준 메릴이, 싱긋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다음엔 데이트 코스로 초대할게, 울프우드랑 다시 와!"

밧슈도 웃으며 대답했다.

"기대하고 있을게."

울프우드는 바다가 보이는 곳에 서서 담장에 기대어 담배를 피고 있었다. 밧슈는 그의 머리카락 끝을 슬쩍 어루만지며 옆에 섰다.

"멀미는?"

"괜찮아졌어. 심한 것도 아니었고."

"다행이다."

밧슈는 바다를 바라봤다. 푸르른, 생명의 원천이자 죽음의 신. 수많은 생명을 품고 수많은 죽음을 묻고 살아가는 천재지변.

멸망의 유예를 받은 이 지구에서 평화로운 일상을 누리는 초현실적인 배경으로 잘 어울린다.

"다음번엔 조금 더 느긋하게 볼 수 있는 것도 개발해보겠대."

"그래?"

"응, 그때 한 번 더 오자. 울프우드."

담배 꽁초를 돌에 눌러 끄고서 휴대용 포켓에 집어넣고 울프우드가 밧슈를 돌아보았다.

밧슈는 순간 넋을 놓았다. 불어오는 온화한 바닷바람과 여름을 맞아 푸르게 잎사귀가 돋은 나무와 풀, 그 가운데에 선 울프우드를 보며,

낙원에 온 기분도 조금 들었기 때문에.

"좋다, 그땐 제대로 데이트 해보자."

"어... 어?"

"이제 그만 가자, 아. 배고프다."

"어? 뭐라고, 데이트? 데이트라고, 울프우드?"

"밥 뭐 먹을까? 너 뭐 먹고 싶은 거 있나?"

"나 제대로 들은 거 맞지? 울프우드!"

기온은 다소 고온. 해수면은 지금도 아주 조금씩 상승 중. 멸망의 유예를 받은 이 지구의 한 구석에서,

수족관 데이트를 마치고 밧슈와 울프우드는 언덕길을 다시 달렸다.


발렌타인 데이

98 기반 / 날조 주의 * 트윗 참조

"으아아아아악!!!"

"울프우드!! 잡아!!!"

자신을 향해 뻗어진 밧슈의 손을 간신히 움켜쥐고, 울프우드는 건물 옥상을 힘껏 박찼다. 두 사람은 무사히 지상을 벗어났다. 따라오던 추격자들이 공중에다가 총질을 해댔지만 기적적으로 모두 빗나갔다. 헬기에 달린 사다리를 엉금엉금 올라간 밧슈와 울프우드는 겨우겨우 (비교적) 안전한 헬기 안으로 기어들어갈 수 있었다.

헬기의 의자 하나에는 이미 퍼니셔가 꽁꽁 매여있고, 부조종석에서 밀리가 활짝 웃는 얼굴로 둘을 돌아보며 맞아주었다.

"두 분 모두 무사하시네요! 탈출 성공!!"

의자에 앉아 안전벨트를 매면서 울프우드는 식은땀투성이의 웃는 얼굴을 돌려주었다. 밧슈는 이미 의자에 널부러져버렸다.

"괜찮아, 밀리?!"

"전부 올라잇이에요, 선배!"

"그럼, 상승!"

메릴이 능숙하게 헬기를 컨트롤하자 기체가 공중으로 솟구쳐올랐다. 울프우드는 뚫린 기체 너머로 멀어지는 지상의 도시를 바라보며 크게 한숨 쉬었다.

--- 대체 이 지경으로 일이 꼬일지는 처음에는 정말 몰랐다.

* * *

카풀렛은 일견 평화로워 보이지만, 이웃 마을 몬테규와 극심한 분쟁에 시달리는 마을이었다.

보급품을 구하며 마을을 한 바퀴 돈 울프우드는 이곳은 최대한 빨리 벗어나는 게 좋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쉬고 있는 보험 아가씨들과 어딘가로 사라져버린 빗자루도 얼른 찾아서 정보를 공유하고, 다음 마을로 떠나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문제의 그 빗자루, 밧슈 더 스탬피드가 아리따운 아가씨에게 붙잡혀서 쩔쩔매는 한심한 꼴을 보자 더욱 그 생각이 강해졌다.

"어이, 노닥거릴 시간 없어. 어서 아가씨들을 찾아서--"

"울프우드! 찾고 있었어, 글쎄, 여기의 아리따운 줄리아 양이 글쎄,"

"목사님! 제발, 저희를 긍휼히 여겨 도와주세요!"

자초지종을 들어보자 하니, 흑발의 긴 생머리가 매력적인 이 아가씨가 글쎄, 맹랑하게도 이웃 마을 몬테규의 청년과 비밀 결혼을 하고 사랑의 도피를 떠날 계획이라는 것이다.

'빗자루 이 자식은 이 마을에 도착한 지 얼마나 됐다고 이런 트러블에......'

그런 새삼스러운 골치 아픔이 현기증과 함께 찾아왔다. 울프우드는 잠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고민하다가, 눈앞에 두 손을 꼭 모으고 두 눈을 번쩍번쩍 빛내고 있는, 만만치 않아 보이는 아가씨와, 비슷한 포즈로 두 손을 꼭 모으고 같잖은 귀여운 척을 하고 있는 밧슈를 번갈아 노려보고서는, 크게 숨을 푹 쉬었다.

"좋습니다! 신의 대리인으로서, 당신들의 혼인성사를 축복하도록 하지요!"

"감사합니다, 목사님!"

"대신!"

줄리아가 두 눈을 크게 깜빡였다. 밧슈도 어리둥절한 얼굴로 울프우드를 바라봤다. 울프우드가 손가락을 세 개 펼쳐서 들어보였다.

"주례 가격은, 3만 더블달러!"

"잠깐, 울프우드!"

"위험 수당 포함된 가격입니다."

"울프우드으!"

밧슈가 황급히 울프우드에게 다가서서 귓속말을 속삭였다.

"성직자가 주례에 대금을 받다니 그건 좀---"

"좋아요!"

"조, 좋아요?"

밧슈가 화들짝 놀라며 돌아보았다. 줄리아가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드리겠어요, 3만 더블달러, 모두 현금으로!"

줄리아가 씩씩하게 다가와서는 울프우드의 손을 꽈악 쥐고서 요청했다.

"그러니 저희의 결혼에 주례를 서주세요!"

* * *

--- 그런 연유로, 울프우드는 정장 위에 예배복을 걸치고 도시 외곽에 버려진, 허름한 교회에서 주례 준비를 하게 되었다.

줄리아가 어째서 그렇게나 필사적으로 구는 건가 했는데, 시간에 맞춰 그녀와 팔짱을 끼고 등장한 잘생긴 붉은 머리의 청년을 보고 울프우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 뜯어먹고 살려고 그러는구나, 그렇다면 인정! 3만 더블달러, 올인!

단출한 흰 옷차림의 두 사람은 화려한 장식도 축하해주는 친지도 하나 없이 결혼식을 올리면서도 그 누구보다도 행복해 보였고, 웃음이 얼굴에서 떠나지 않아 광채가 흐르는 것 같았다.

울프우드는 제 몫의 일을 했다. 급하게 결혼하는 남녀의 주례를 서주는 게 처음도 아니었다. 능숙하게 식을 이끌어갔고, 반지가 교환되었으며, 맹세의 입맞춤이 있었다.

"---이로써 두 사람이 부부가 되었음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굉음과 함께 교회 벽을 부수며 밧슈 더 스탬피드가 등장했다.

"모두 다 피해!! 두 사람, 이리로!"

울프우드는 재깍 예배복을 벗어던지며 권총을 손에 들었다. 밧슈와 함께, 방금 막 탄생한 신혼 부부를 경호하며 뒷문으로 이끌었다.

문을 빠져나가자, 메릴과 밀리가 지프 차에 앉아 대기 중이었다.

"어서 타세요!"

"빨리요!"

신랑이 먼저 탑승했고, 신부가 차에 오르기 전에 울프우드의 손을 잡으며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신부님. 정말로요."

울프우드는 픽, 웃으며 그녀의 손을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돈 받고 한 일이니까 신경 쓰지 마시죠."

신부가 빙그레 웃었다.

"신의 가호가 함께하길."

"당신에게도."

그리고 차는 떠났고, 미끼용으로 준비된 다른 차량에 울프우드와 밧슈가 탑승하고서, 요란하게 다른 방향으로 차를 몰기 시작했다.

차는 벌집이 되었고, 줄리아의 결혼을 지지하는 친지들의 합류로 두 사람은 겨우 목숨을 건졌으나, 결투는 더욱 격화되어, 마침내 카풀렛 시와 몬테규 시의 전면전으로 확산, 두 사람도 어느 순간 갈라지게 되고, 울프우드는 권총을 버리고 새로운 총을 몇 번이나 주워가며 시가전에 돌입, 이러다가 진짜 죽겠다 싶은 순간,

하늘에서 요란한 헬기 소리와 함께 사다리에 매달린 밧슈가 등장했다.

"울프우드!! 잡아!!!"

그리고 그들은 도시를 탈출했다.

* * *

이제 정말 벗어났다 싶을 정도 멀어진 후에야 헬기는 천천히 하강하여, 넓은 암석 지대 어딘가에 착지했다. 숨을 돌린 울프우드가 물었다.

"어디서 난 헬기야, 대체? 아니, 헬기 운전은 어떻게 할 줄 아는 거야?"

"줄리아 씨의 집이 굉장한 대가문이더라고요. 두 사람을 태우고 도시를 벗어나자 기다리고 있던 어머니로부터, 헬기를 제공 받았어요."

"그리고 선배는 못하는 게 없죠!!"

"후아......"

울프우드는 의자에 축 늘어지고서, 다른 질문을 했다.

"이 헬기는 어떻게 돌려줘야 하지?"

"추적 장치가 있으니, 근처에 주차해놓으면 알아서 회수하겠다고 했어요."

"그것 참, 다 알면서도 내버려두었다 이건지......"

"그런데, 울프우드."

늘어져서 눈 위를 팔로 덮고 있던 밧슈가 말을 꺼냈다.

"3만 더블달러, 현금으로, 받았어?"

"......어라."

울프우드가 더듬더듬 자신의 주머니란 주머니는 모두 짚어보았다. 그런다고 없는 3만 더블달러가 생겨나는 것도 아닌데.

"...어라?"

"풋,"

푸하하하하하, 밧슈가 팔을 내리고 배를 잡고 폭소를 터뜨렸다.

"당당하게 요구해놓고, 한 푼도 못 받았어!"

"사람의 비참한 꼴을 비웃는 게 아니야, 빗자루!!"

"하하핫, 너의 그런 점이 정말 좋아, 울프우드!"

밧슈가 일어나면서 울프우드 또한 붙잡아서 일으켜 세웠다.

"가자! 내가 살게! 이런 날엔 축하주를 마셔줘야지!"

헬기에서 훌쩍 뛰어내려서 천천히 석양으로 물드는 하늘을 배경으로 밧슈가 외쳤다.

"어서, 메릴, 밀리도!"

조종칸에서 메릴과 밀리는 서로를 바라보고, 울프우드와도 눈길을 교환한 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었다.

그리고 먼저 출발한 밧슈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네 사람의 그림자가 사이 좋게 바닥에 나란히 늘어섰다.

카테고리
#2차창작
페어
#BL
추가태그
#전력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