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선계단
초혼
느리게 나선형 계단을 오르는 남자의 뒤로 발자국만이 선명하게 남았다. 두껍게 쌓였던 모래 먼지가 흩어져 짙은 발자국이 남은 모양새였는데, 교회에 고아원까지 겸했던 이 곳의 사정을 생각하면 오랜 시간 쌓인 먼지는 아닐 터였다. 아마도 오늘 이곳을 덮친 격렬한 전투의 흔적이 이 종탑까지 미쳤으리라고 그는 생각했다.
나중에 청소에다 수리까지 하려면 제법 골치 아프겠는걸……. 벽에 남은 탄흔을 손끝으로 쓸면서 그가 중얼거린다. 나직한 중얼거림이 좁은 계단 통로를 따라 메아리쳤다.
금 간 벽에 머물던 시선이 자신의 손으로 옮겨갔다. 시간은 어느새 저녁이라, 불타는 석양빛이 그림자의 경계를 넘어 손끝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계단을 오르던 남자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린다. 파란 눈동자 위로 붉은 노을이 쏟아졌다. 곧 먼 바위산의 능선을 따라 그림자를 늘어뜨리는 십자가 몇 개를, 그리고 멀지 않은 정원의 묘비 없는 무덤을 차례로 담는다. 모두 그가 묻은 이들의 흔적이었다. 천둥이 지나가고 난 뒤, 아무도 없는 도시에서….
잠시 움직이지 않던 남자가 곧 눈을 뜬다. 가라앉혔던 깃털이 다시 제 존재감을 뽐낸 탓이었다. 에이, 또 이러네. 그가 부러 밝은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인생의 아주 긴 시간 동안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기관은 섬세하고 변덕스럽기 짝이 없는 것들이라… 조금만 신경을 놓아도 금세 꿈틀꿈틀 모습을 보이기 일쑤였다.
뭐, 아까 과하게 힘을 쓴 탓에 감각이 곤두선 탓도 있긴 하겠지만, 지금 당장 가라앉힐 방법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나마 오늘 이 도시에 남은 사람이라곤 그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다른 한 명 뿐이라는 사실이 다행이었다. 이런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 겁을 먹고 도망치거나 그를 공격할 일은 없을 테니까. 그리고 적어도 오늘만큼은, 지금만큼은….
그의 의사대로 움직이지 않는 힘이 기꺼울 지경이라.
다시 한 걸음, 계단 위를 향해 걷는 남자의 곁으로 희끗하고 작은 그림자가 뛰어들었다. 반투명한 소년의 형상이다. 남자가 가볍게 웃음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남자와 같은 계단 위에 나란히 선 소년은 어느새 빗자루를 손에 든 모습이었다. 몇 계단 전에는 갓난아이를 품에 안고 재우더니, 그 아이가 더는 품에 안고 다니지 않아도 될 만큼 자란 모양이지.
그 소년은 요령 좋게 비질을 계속하다가도 옆을 보며 씩 웃거나 와하하 웃음을 터뜨리거나 했다.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아마 곁에 누가 있었으리라. 시선이 약간 낮은 걸 보아 소년보다 어린 가족이었을 테고… 어쩌면 아까 비행선에 태워 보낸 아이들 중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지금 그가 보고 있는 상대가.
남자는 다시 걷는다. 계단을 오를 때마다 소년의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 지나갔다. 계단 한 칸을 오르자 그는 높은 곳에 올라가기라도 한 건지 조심스러우면서 다급한 동작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고, 또 한 칸을 오르자 키 작은 아이의 손을 잡듯이 자세를 조금 낮춘 채였다.
다시 한 칸을 올랐을 때, 소년은 남자가 있는 쪽을 돌아보며 손을 휘젓고 있었다. 그는 그것이 가족에게 건네는 작별 인사임을 깨달았다.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다시 한 칸을 오르자 소년은 많이 달라진 차림이었다. 새카만 훈련복 차림의 소년이 손에 권총을 들었다. 반투명한 눈에는 복잡한 감정이 휘몰아치고 목덜미는 땀으로 번들거리는 채였다. 남자는 지체 없이 한 칸을 더 올랐다. 침잠한 눈동자가 소년의 형체를 좇는다. 고요한 눈으로 발치를 내려다보는 소년의 다리가 피로 흥건했다.
그 즈음이 되자 남자는 계단을 오르는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그와 나란히 걷는 소년의 시간이 점점 빠르게 지나갔다. 소년은 갖은 무기를 들었고 때론 고통스러운 얼굴로 숨을 고르기도 했다. 눈을 질끈 감고 기도하기도, 형형한 눈으로 적의를 드러내기도, 남자도 아는 예의 그 거대한 무기를 받아 들기도 했다.
한 사람의 인생이 그를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니콜라스 D. 울프우드의 인생이.
이를 악문 밧슈가 날듯이 계단을 뛰어올랐다.
소년은 이제 그와 같은 눈높이에서 걷고 있었다. 낯익은 정장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모습이었다는 뜻이다. 십자가를 등에 짊어진 채 지친 얼굴로 걸음을 옮겼고 웃는 얼굴로 누군가에게 동전을 건넸다. 그는 알지 못하는 얼굴로 또 다른 누군가에게 총을 겨누다가 곧 뒤를 돌았다. 돌아선 손에는 흙을 잔뜩 뒤집어쓴 리볼버 하나가 들려 있었다. 밧슈의 총이다.
그는 멈추지 않고 계단을 오른다. 울프우드는 대체로 가라앉은 얼굴이었고 때로는 웃는 얼굴이었다. 그의 시간은 점점 더 빠르게 흘렀다. 그는 인간 태풍의 수배지를 들고 다녔고 누군가에게 그 수배지를 펼쳐 보이기도 했다. 복잡한 얼굴로 밧슈의 총을 들고 서 있기도 하는가 하면 그걸 신경질적으로 집어던지기도 했다.
결국에는, 본 적 있는 얼굴.
낮은 곳을 내려다보면서 울프우드가 웃는다. 낡은 리볼버는 비로소 그의 손을 떠났다. 자신의 이마에 총구를 들이대다가 곧 홈에서의 일이 스쳐 지나갔다. 바싹 말랐다가 물에 젖었다가, 긴장한 얼굴로 총을 겨누는가 하면 눈을 크게 뜨고 이를 악물기도 했다. 대부분은 그가 아는 순간이고 종종은 모르는 표정이 나왔다. 밧슈는 속도를 늦추지 않고 달린다. 애써 옆으로는 시선을 두지 않은 채였다.
계단 두 칸을 남겨 두고서야 그는 우뚝 멈춰 섰다. 먼 지평선에서 붉게 타는 햇빛이 머리 위로 쏟아졌다. 눈이 부셔서 몇 번인가 눈가를 쓸어내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열이 몰린 눈가가 뜨거워 손으로 덮는다.
옆에 선 울프우드가 가만히 밧슈를 바라보고 있었다. 손에 들린 술병에서는 금빛 술이 석양빛으로 어른거린다.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딛는 데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손에 들린 술잔이며 계단 위로 늘어진 그림자마저 그를 붙드는 듯했다. 조금 더 천천히 올라올걸, 차라리 나중에… 아주 나중에 올라오는 것도 괜찮았을 텐데. 몰아치는 후회에 밧슈가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그의 앞에 남은 건 계단 두 칸, 고작 두 칸 뿐이고… 이미 지나온 길을 돌아갈 수는 없다. 돌아가는 건 모든 걸 이루고 난 뒤여야 했다.
심호흡하는 밧슈의 옆에서 울프우드가 웃는다.
모래로 뒤덮인 이 행성은 여전히 혹독하고, 먼 서쪽을 향해 나는 방주는 여전히 그림자를 드리운 채였으므로 아직 그가 해야 할 일은 끝나지 않은 셈이다. 하지만 세상을 붉게 물들이는 낙조는 아름답고, 밤공기를 머금은 바람은 상쾌하니까… 네가 웃었으니까.
붉은 코트 자락이 거세게 휘날린다. 십자가의 그림자가 늘어져 붉은 대지 위로 긴 선을 긋고, 마지막 빛을 쏟아낸 태양이 기어이 지평선 너머로 모습을 감춘다.
그리고 마침내 호명.
울프우드.
울프우드.
울프우드,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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