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fido

2부 13화

솔라의 훈련, 루카의 아버지

남부로 보낸 편지는 사흘 만에 답장이 왔고, 유족은 당연히 장례를 남부에서 치르길 원했다. 답장을 받은 날 밤, 시도폰은 자신의 집무실에서 베론을 맞았다.

“정말 장례식에 참여하지 않으실 생각입니까?”

침묵하던 베론이 자신을 등진 시도폰에게 물었다. 바깥을 보며 생각에 잠겨있느라 말이 없던 시도폰이 뒤돌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단장님과 당신이 하던 대로 해야죠. 저는 여길 지킬 겁니다. 다시는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그러니까 남부 사람들한테는 제가 잘 지낸다고만 말해주세요.”

“제가 말하는 걸 그 사람들이 믿을 것 같진 않군요.”

“그래도 말하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소식이 없으면 불안하잖아요.”

시도폰이 피곤한 듯 눈가를 꾹꾹 누르다가 수행단 아이들은 괜찮으냐고 물었다.

“예. 다들 충격이 크긴 하지만, 일상생활이 불가능하다든가, 불안해하는 아이는 없었습니다. 그때 잘 수습해주신 덕분입니다. 제가 그때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서….”

그 일 이후로 베론은 틈만 나면 시도폰에게 사과했고, 그럴 때마다 시도폰은 괜찮다고 답했다.

‘솔직히, 아이들은 시신이나 부상자를 직접 보지 않은 데다가 오래 있었던 것도 아니니까 크게 걱정하진 않았는데…. 기사들이 더 문제였지.’

베론을 비롯해서, 기사단에 오래 있었던 사람들은 큰 상심에 빠져 며칠 동안 제대로 음식을 먹지도 않고, 종일 눈물만 흘렸었다. 그나마 피데이스는 평소처럼 행동하는가 싶었는데, 그가 무기를 닦던 수건으로 그대로 얼굴을 닦으려 하길래 시도폰이 급하게 말리기도 했다. 그는 시도폰과 비슷한 생각을 하며 늦게 그곳에 도착한 자신을 책하고 있었는데, 그 탓인지 신성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시도폰은 어차피 사태를 수습하는 동안은 훈련을 못 하니 쉬고 있으라고 위로해주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다음날, 시도폰은 정문에서 남부로 돌아가는 수행단과 기사들을 배웅했고, 곧바로 집무실로 향했다. 시끌벅적했던 아이들이 사라지자 안 그래도 조용했던 기사단 건물은 물에 가라앉은 돌처럼 침묵에 빠졌다. 애써 헤일로를 떠올리려 하지 않았던 시도폰이었지만, 지나치게 적막한 환경에서 사람이 상념에 빠지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점심쯤, 프라이에가 집무실 문을 두드렸을 때 시도폰은 잠긴 목소리로 들어오라고 대답했다.

“…순찰 순번은 이렇게 정했어. 네가 말한 대로 하긴 했는데, 이러면 피곤하지 않겠어? 너무 무리하는 것 같은데.”

“아냐, 괜찮아. 다른 사람을 보내고 불안해하는 것보다는 내가 가는 게 나아. 베론이 돌아오기 전까진 이렇게 하자. 고마워.”

프라이에는 시도폰의 상태를 캐묻지 않고 용건이 끝나자마자 돌아갔다.

‘그러고 보니 피데이스가 애들을 맡겨두고 갔지. 바빠서 그쪽은 신경을 못 썼네.’

자신이 없는 동안 보호소 아이들을 잘 부탁한다며, 피데이스가 본부에 아이들을 데려왔었다. 마을에서 잘 지내고 있는 게 아니었냐고 시도폰이 묻자, 기사단장 일이 마을에 퍼진 게 문제가 되었다는 답이 돌아왔다.

‘아이들을 맡아주던 상인이 북부는 불안해서 못 버티겠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잠시 다른 건물에 아이들을 의탁해두었는데 그이도 떠난다고 하길래 어쩔 수 없었습니다. 당장 기사단에서 별도의 건물을 매입하거나 하는 건 불가능할 것 같아서 데려왔습니다. 죄송합니다.’

그건 피데이스의 잘못이 아니지 않냐고 말한 시도폰은 보호소 아이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단장 사후의 일을 처리하느라 아이들을 꼼꼼하게 신경 쓰지 못했는데, 이제야 그걸 깨달은 시도폰이 의자에 묻혀있던 몸을 억지로 떼어냈다.

심란한 마음과는 다르게, 날씨는 좋았다. 2월의 끝자락이라 그런지 봄 내음도 조금씩 나는 것 같았다. 아이들이 좋아할 법한 단 것들을 싸 들고 시도폰이 도착했을 때, 보호소 아이들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며 반짝반짝한 눈으로 맞아주었다. 솔라는 일이 바쁘셨을 텐데 어떻게 오셨냐며 시도폰에게서 바구니를 받아들었다.

“피데이스가 말했나 보군, 다들 잘 지냈나?”

“네! 덕분에요. 항상 감사하고 있어요.”

처음엔 바뀐 시도폰의 말투 때문인지 아이들이 다가가길 망설였지만, 붙임성 좋은 아이가 용기를 내어 대답한 뒤로 분위기는 쉽게 풀렸다. 살아있는 시체처럼 걸어 다니는 기사들만 봤던 시도폰은, 의외로 아이들의 밝은 모습에 놀라 처음 자신에게 대답해준 아이에게 물었다.

“단장의 소식은 들었을 텐데, 다들 잘 극복한 모양이군. 불안해하지도 않고….”

“저희는 당신을 믿고 있었으니까요. 그때처럼 저희를 지켜주실 거라고.”

옆에서 까불거리는 아이가 말을 얹었다.

“테일러 아저씨는 무섭다고 중부로 급하게 짐 싸서 내려가시긴 하셨지만, 금방 돌아오실 것 같아요. 아저씬 북부를 정말 좋아한다고 하셨고, 또… 당신께서 악마를 금방 무찔러 주실 거니까요.”

경전 공부라고는 다섯 해도 못 해본 아이들이 자신을 굳건히 믿어주고 있다는 데에, 시도폰은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사실 헤일로가 그렇게 된 이후로 기사단은 악마에게 완전히 패배한 것 같은 분위기에 잠식되어 있었기에, 시도폰은 자신이 뭔갈 하더라도 의미가 있을 것 같지 않다는 자괴감을 자주 느끼고 있었다. 아이들이 준 뿌듯함이, 알게 모르게 쳐져 있던 시도폰의 어깨를 펴주었다.

시도폰이 ‘당연하지. 기사단 인원만 보충되면 악마들이 다신 빛을 보지 못 하게 만들어주겠네!’라고 말하며 오랜만에 아이들의 훈련을 봐주겠다고 말했다. 말이 훈련이지, 거의 시도폰의 연속대련과 같은 이벤트였기에 아이들은 신나서 무기를 가지러 달려나갔다. 아이들과 같이 달리지 않고 제 옆에 서 있는 솔라 쪽으로 시도폰이 몸을 돌렸다.

“바구니는 어디 따로 놔두고 자네도 무기를 가지러 가야 하지 않겠나?”

“무기는 항상 소지하고 있습니다. 누가 먼저 도착한다고 하더라도 첫 대련 상대는 제가 되겠죠. 바구니는 제 다음 차례인 아이에게 맡겨두려고 합니다.”

솔라는 진지한 얼굴로 허리에 찬 검을 매만졌다. 망토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았던 검이 그 존재감을 마침내 드러냈다. 그동안 솔라와 대련하면서 그의 성장을 쭉 지켜봤던 시도폰은, 솔라와의 대련이 기대되었기에 뭐라 하지 않고 몸을 풀었다.

‘두코나 프라이에도 재밌지만 둘 다 근거리다 보니까 솔라랑은 느낌이 다르단 말이지.’

가장 먼저 되돌아온 아이가 헉헉거리며 숨을 골랐다. 얼마 후 고개를 든 아이는, 자신에게 건네진 바구니를 마주하고 한숨을 쉬며 그것을 받아들었다.

“자, 그럼 시작하지. 이제 그건 다섯 개까지 만들 수 있었던 것 같은데.”

시도폰은 솔라의 주변에서 주인을 호위하듯 회전하는 세 개의 십자가를 보며 손목을 주물렀다.

“예. 도와주신 덕분에 다섯 개까지 가능합니다. 하지만 시작부터 모든 패를 보여드릴 생각은 없어서요.”

“내 패는 이것 하나뿐인데.”

“가장 강력한 패잖습니까?”

“….”

한 마디도 솔라가 지지 않자, 시도폰은 농담은 그만두겠다며 양손으로 창을 잡았다. 그가 달려드는 것과 동시에 솔라가 세 개의 십자가를 시도폰의 정면으로 날렸다. 날아오는 것들을 재빠르게 피한 시도폰이 ‘이렇게 쉬울 리가 없는데.’라며 뒤돌자, 그 생각을 예상이라도 한 듯 십자가들이 되돌아 날아들었다.

‘이쪽에서도 두 개가 오고.’

앞뒤로 십자가가 날아드는 상황에서 시도폰은 나머지 하나가 어디로 갔는지 상상했다. 처음 솔라가 날린 것은 세 개, 그중 되돌아온 것은 두 개, 지금 솔라에게서 날아오고 있는 것이 두 개이니 하나가 남았다. 당연하게도 위에 있으리라 생각해 고개를 들었지만, 머리 위엔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만이 유유자적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예상을 빗나가긴 했지만, 이렇게 해주면 오히려 내게 유리한 거 아닌가?”

시도폰이 위로 높게 뛰어올랐고, 그를 향해 날아오던 네 개의 십자가는 목표를 잃고 속도 때문에 그대로 땅에 박혔다. 솔라는 태연한 얼굴로 하늘에 떠오른 시도폰을 보다가 태양이 눈 부신지 눈을 찡그렸고, 그 표정에 시선을 빼앗긴 시도폰은 등 뒤에서 날아오는 마지막 하나를 피하지 못했다.

“…허!”
하지만 승리는 시도폰의 것이었다. 공중에서 별다른 디딤대 없이 그대로 몸을 틀어 제게 날아오는 십자가를 쳐내고 바닥으로 착지한 시도폰이 그대로 솔라에게 달려들었다. 만전의 자세로 기다리던 솔라였지만 몇 합 만에 솔라는 검을 놓쳤고 패배를 인정했다. 검과 창이 부딪히는 동안, 솔라는 제 무기들을 불러들이려 했으나 시도폰은 그럴 틈을 주지 않고 몰아붙였었다.

“좋은 대련 감사드립니다.”

“나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네, 반응 속도도 많이 좋아졌고 그것들을 다루는 것도 제법 익숙해진 것 같군.”

“마지막엔 전혀 활용하지 못해서 부끄럽습니다.”

솔라는 못내 아쉬운 듯 십자가들을 불러들여 이리저리 날려보다가 신성력으로 되돌렸고, 시도폰은 자신에게 버금갈 정도로 빠른 악마는 없을 테니 그런 건 괜찮다고 말하며 다음 사람을 불렀다. 차례로 시도폰에게 패배한 아이들이 솔라 옆에 자리를 잡고 훈련을 지켜보았다. 장난스레 떠들기도 했지만, 아이들은 시도폰과 상대 아이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집중해서 보면서 자신은 다음번에 어떻게 해야 할지를 고민했다. 마지막 아이까지 상대한 시도폰이 숨을 고르고 솔라가 건네준 물을 마셨다.

“다음은 단체로 훈련할 시간이군. 난 이제 해야 할 일이 있어서 가보겠네. 오래 있지 못해서 미안하지만, 자네들은 내가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 다행이야.”

시도폰의 마지막 말에는 짙은 안도가 담겨있었다. 그를 배웅하고 훈련을 준비하려던 솔라는 그 마지막 말을 곱씹다가 다른 아이들에게 일을 맡기고, 시도폰을 쫓아갔다.

“잠시만요,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슨 일 있나?”

의아한 표정으로 뒤돌아본 시도폰은, 솔라가 갑자기 한쪽 무릎을 꿇자 당황하며 그를 일으켜 세우려 했다.

“저는 기사단에 들어가서 당신을 가장 가까이서 모시는 이가 되고 싶습니다.”

솔라에게 향하던 시도폰의 손이 멈췄다. 고민하던 시도폰은 솔라가 양손으로 받치고 있는 검을 손으로 살짝 누르고, 무릎을 꿇어 솔라와 시선을 맞췄다.

“나는 동료가 필요한 거지 그렇게 받들어 섬기는 사람이 필요한 게 아니야. 이 자리에 있는 사람이 그런 말을 해도 되는 건진 모르겠지만, 일단 내가 생각하기에 필요한 사람은 나와 동등한 동료라고.”

폰은 애써 쓰고 있던 진지한 말투를 잠깐 내려놓기로 했다. 솔라는 낯선 단어를 들은 것처럼 시도폰을 바라보았고, 그 눈빛에 폰이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난 네가 기사단에 들어오는 이유가 내가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하는 거야. 기사는 나를 섬기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잖아. …너를 부관으로 맞지 않겠다는 건 아니야, 하지만 네가 정식 기사 서임 전까지 기사의 마음가짐에 대해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해줬으면 좋겠어.”

사실 시도폰은 이 말을 자신에게 해야 하지 않나 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계속 내가 하고 있던 고민이니까 솔라에게도 이 말을 해주고 싶었던 걸까.’

시도폰은 처음엔 자신을, 그다음엔 카리타스를, 주변인들을, 얼굴도 모르는 살아있는 인간들을 지키고자 했다. 그러면서도 계속 한 사람에게 집중되는 마음 때문에, 자신은 집행자로서 자격이 있는 인간인 것인지 아닌지 의문스러웠다. 주민들을 만나고 기사들을 만나 직접 그들의 삶을 들어보면 그런 불평등한 마음이 옅게 잊히긴 했지만, 여전히 시도폰은 자신을 의심하고 있었다.

“기사의 마음가짐이요….”

“응. 누군가를 돕고 싶다, 지키고 싶다는 마음이 중요한 건 맞지만 그게 단 몇 명을 위한 것이면 안 되잖아. 물론 이렇게 말하는 나도, 너희와 기사단을 남부의 이름 모를 귀족들과 비교해서 더 아끼지 않는다고 자신할 수 없어.”

시도폰은 검을 집어 들어 그걸로 땅을 짚고 일어났다. 그의 행동을 좇던 솔라도 무심코 몸을 일으켰고 폰은 솔라에게 검을 돌려주었다.

“그래도 계속, 계속 생각하다 보면 모두를 공평하게 생각할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어. 위대하신 분께서 이런 고민을 하는 내게서 힘을 거두지 않는 것도, 그걸 알고 계시니까 그런 게 아닐까? 말이 길어졌네, 아무튼 난 네가 입단 전까지 그걸 깊게 생각해봤으면 좋겠어.”

쑥스러웠던 시도폰이 말을 마무리하고 ‘가볼게, 돌아가서 쉬어… 아, 훈련한다고 했지. 힘내, 기다릴게.’라며 자리를 떴다.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솔라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숙소로 돌아갔다. 달음박질치는 솔라의 얼굴엔 고뇌와 환희가 담겨있었다.

“어때, 애들은 잘 지내지?”

제 방에서 업무를 보고 있던 프라이에가 시도폰을 맞아주었다. 시도폰은 창을 벽에 세워두고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단 본부는 여전히 삭막하고 어두운 분위기였지만, 폰의 표정은 아이들을 만나기 전과 달라져 있었다. 다행히도 기운을 차린 듯한 폰의 모습에 프라이에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두 사람은 장례식 이후의 일을 논의하며 시도폰의 집무실로 향했다. 대충 일의 가락이 잡힌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게.”

“옙, 순찰 임무를 완료했습니다. 순찰자는 무사히 복귀, 이상 현상 또한 전무했습니다.”

“테라는 언제부터 돌아야 하지?”

“지금부터…세 시간 뒤입니다.”

“그래, 수고했네.”

시도폰은 다시 서류로 눈을 돌렸다. 그런데 보고를 마친 기사는 할 말이 남았는지 돌아가지 않고 계속 그 자리에 서 있었고, 그걸 알아챈 폰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시도폰이 서류의 작은 글씨를 읽느라 눈썹을 찌푸린 채 쳐다보는 바람에, 기사는 말을 절었다.

“돌아오는 길에, 정문에서 자신을 루카의 아버지라고 소리치는 사람을 목격하였습니다. 제가 문을 통과할 때 같이 들어오려고 하는 걸 겨우 떼어놓고 왔는데, 아무래도 불안합니다.”

“루카가 내 시종이라는 걸 알게 되고 나서 뭐라도 연줄을 대보려는 인간이겠지. 내버려 두게. 아무리 봄이 가까워 날이 풀렸다고 해도 밤까지 그렇게 버틸 순 없을 테니.”

어이가 없었던 프라이에는 목을 쓸어내렸다.

“정문 쪽에서 이상한 소리가 난다 했더니….”

“오래 그러고 있었나?”

시도폰의 물음에 프라이에가 잠깐 기억을 더듬었다.

“당신께서 아이들 숙소로 떠난 직후부터였을 겁니다.”

꽤 오랜 시간 그러고 있었다는 사실에 시도폰이 황당해하며 서류를 내려놓았다.

“할 일도 많은데 별 희한한 것들이 다 있군. 얼굴이나 한번 봄세, 가보지.”

“저는 일이나 하고 있겠습니다.”

“자네도 같이 가야지, 임시긴 하지만 지금은 자네가 내 부관이니까.”

“…빨리 솔라가 들어와야 할 텐데 말입니다.”

나가기 싫어서 뭉그적거리는 프라이에를 아랑곳하지 않고, 시도폰은 복도로 나섰다. 보고하러 왔던 기사도 얼떨결에 둘을 따라나섰다가, 시도폰이 쉬라고 지시하자 정신을 차리고 돌아갔다. 프라이에가 문지기들의 방문을 두드리자 난처한 표정의 문지기들이 문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그러다가 프라이에의 뒤에 서 있는 시도폰을 발견하고 나서, 그들은 우당탕 소리를 내며 문을 열고 차렷 자세를 취했다. 여전히 루카의 아버지라 주장하는 남자는 알아듣지도 못할 말을 외치고 있었다.

“꽤 오래 저러고 있다고 들었네, 대화는 나누어 보았는가?”

문지기 두 사람 중 키가 큰 쪽이 대답했다.

“당연히 나누어 보았습니다만, 도저히 말이 통하지 않았습니다. 처음엔 루카라는 아이가 없다는 식으로 둘러댔는데, 얼마 전 루카가 기사들을 대신해서 잔금을 치르러 마을에 들른 사실을 알고 있어서 금방 거짓말인 걸 들켜버렸습니다. 그다음으로는 루카의 아버지라는 증거가 있느냐고 물었는데, 루카가 어느 마을에서 구조되었는지를 대답하더군요. 게다가….”

키가 큰 쪽이 작은 쪽에 눈짓했다.

“게다가 솔직히 저희가 보기에도 루카와 많이 닮았습니다. 분명 성별이 다르지만, 왜, 첫 딸은 아버지를 닮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자는 고생을 꽤 했는지, 몰골이 좀 상하긴 했던 것 같은데 그래도 그… 분위기라는 게.”

“알겠네, 내가 직접 보지.”

시도폰이 성벽 위로 올라가는 계단으로 향했다.

“이쪽에서 이야기하시지 않고요?”

프라이에는 문지기들이 사용하는 방을 가리켰다. 그 방의 창문을 열면 바로 그자와 대면할 수 있었기에 대화만이 목적이었다면 굳이 위로 올라갈 이유는 없었다.

“말로만 하면 알아먹을 것 같지 않아서.”

간단히 대답하고 사라져버린 시도폰을 따라, 프라이에도 계단을 올랐다.

“…집행자께서 친히 와주시다니 감사합니다! 제발 제 말을 좀 들어주십시오.”

간절한 목소리로 누군가 소리쳤다. 시도폰은 천천히 아래를 내려다보았고, 거기엔 정말로 루카와 닮은 젊은 남자가 서 있었다. 그의 바람과 다르게, 폰은 그의 헛소리를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남자가 말을 이으려고 입을 벙긋 열었을 때, 시도폰이 말을 가로챘다.

“그대는 루카를 데려오려고 온 건가, 아니면 다른 목적이 있어서 왔는가?”

“아비가 된 자로서, 아이의 얼굴이 보고 싶어서 찾아온 것인데 다른 목적일랑 있겠습니까? 한 번만 얼굴을 마주 보고 이야기해보고 싶을 뿐입니다.”

“지극히 타당한 말이지만, 물어볼 게 있네. 루카는 그대의 얼굴을 본 적도 없는데 만난다고 해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당연히 있습죠, 인간이라면 누구나 제 뿌리를 궁금해할 테니까요. 게다가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의지할 가족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루카가 안심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가 비굴한 미소를 짓자 프라이에는 시도폰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 문지기들에게서 들었는데 저자가 마을에선 꽤 인기인인가 봐. 입담이 좋아서 여기저기 불려 다니면서 이야기를 해준다나.”

“…이번 일까지 떠들고 다니면 곤란한데.”

하지만 시도폰은 루카를 그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루카와 그의 어머니를 버리고 도망갔던 주제에 뻔뻔하게 고개를 쳐들고 있는 모습도 보고 싶지 않았고. 고민하던 시도폰이 다시 남자에게 외쳤다. 창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끼면서.

“루카는 그대를 그리워한다고 말한 적 없네. 돌아가게.”

“정말 이러시기입니까? 자식은 부모의 소유라고 하거늘, 아무리 위대하신 분이라 하셔도 이렇게 막무가내로 부모 자식을 갈라놓으시는 건 도리가 아닙니다!”

“정녕 내 입으로 그대의 과오를 말하게 할 생각인가?”

시도폰이 쏘아붙이자 그제야 남자의 입이 닫혔다. 삐뚤게 다물린 입 위에서, 그의 게슴츠레한 눈은 시도폰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인지 가늠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끝까지 시도폰이 그의 죄를 묻지 않자, 남자는 자신감을 회복하고 다시 똑같은 말로 소리쳤다.

“안 되겠네…. 그냥 루카를 이쪽에 오지 못하게 하고 남자가 지치는 걸 기다리는 수밖엔 없겠어.”

난감한 표정으로 프라이에가 아래를 내려다봤고 시도폰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려가자. 어차피 이 근처엔 악마들이 가까이 오지 않으니까 저렇게 놔둔다고 죽거나 다치진 않겠지.”

아이들을 만나 기껏 올라갔던 폰의 어깨가 다시 내려앉았다. 다시금 인간의 추악함에 지친 시도폰이 굳은 표정으로 내려오자, 문지기들이 그의 눈치를 살피며 옷매무새만 정리했다. 뒤에서 문을 닫은 프라이에는 루카의 사정을 몰랐지만, 폰이 저렇게 반응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는 문지기들에게 문을 열어주지 말라고 당부하며 시도폰과 함께 돌아갔고, 남은 문지기들은 비참한 곡조를 외치는 남자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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