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fido

2부 14화

장례를 치르고 온 기사단

“나는 루카가 고아인 줄 알았는데 아버지가 살아계실 줄은 몰랐네. 어… 말이 좀 그렇다, 그래도 무슨 뜻인지 알겠지?”

“응, 나도 단장님께 들었던 건데-.”

뒷말을 잇지 못한 시도폰은 걸음을 멈췄고 그의 뒤통수를 보고 있던 프라이에도 그제야 누가 복도에 있는지 깨닫고 제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뱉었던 말이 없었던 게 될 리는 없었다.

“제 아버지가 살아계신다고요?”

“루카, 저기 그게.”

“확인된 건 아니네. 그저 그렇게 주장하는 이가 나타났을 뿐이야.”

부정하려던 프라이에가 말을 더듬었고, 루카의 얼굴은 창백해졌다. 결국, 폰이 솔직하게 대답했고 루카는 들고 있던 서류뭉치를 꼭 껴안았다.

“저를… 내보내시려는 건 아니죠?”

생뚱맞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루카의 질문에 프라이에와 시도폰은 크게 뜬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루카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종이 끝을 계속 매만졌다.

“그럴 리가, 난 자네가 나가고 싶다고 말할까 봐 그걸 걱정했어.”

“전 여기가 좋아요. 저의 집은 여기고 제 가족들도 기사단 식구들이라고 생각하고 살았는데, 갑자기 저렇게 튀어나온 사람을 제가 따라갈 리 없잖아요.”

간절함이 뚝뚝 묻어나오는 말이었다. 루카는 빠르게 말을 잇고는 두 사람의 대답을 기다렸다. 입을 연 사람은 프라이에였다.

“아무래도 혈연은 쉽게 끊어낼 수 없으니까… 우리가 널 오해했던 것 같아, 미안해. 당연히 널 내보낼 리는 없어. 저 사람이 내놓으라고 한들, 네가 안 나가겠다는데 우리가 뭐하러 가족을 남한테 보내겠니?”

옆에서 시도폰이 고개를 끄덕였다. 결정되었으니 이제 돌아가자고 폰이 앞장섰고 루카가 뒤따랐다. 따라오지 않는 프라이에를 의아하게 바라보던 루카는, 별다른 말 없이 돌아선 폰에게 물었다.

“집행자님, 프라이에님은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시는 건가요?”

“그럴 것 같네. 아마 자네의 의사를 문지기들에게 말해주려고 간 걸 거야.”

“그나저나…저랑 그분이랑 많이 닮았나 보네요. 사람들이 다들 보자마자 알아챈 걸 보면.”

“….”

차마 부정하지 못했던 시도폰은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혹시 궁금하면 보러 가도 괜찮네.”

“아뇨! 궁금하진 않아요. 그냥 다른 분들이 저를 그 사람과 연관 없는 사람으로 생각해줬으면 좋겠어요.”

“말해두지, 그리고 아마 다들 대수롭지 않게 넘어갈 거네.”

이야기가 마무리되고 나서야 시도폰의 눈에 루카의 서류가 들어왔다. 아까 서류 처리는 다 한 것 같은데 이번엔 무슨 서류가 또 생긴 걸까. 폰의 시선을 따라가던 루카는 제 품에 있는 서류를 들어 보이며 다음 해 북부 기사단 지원단 목록이라고 말했다.

“아직은 1차 지원 목록이라 사람 수가 그리 많지 않더라고요. 금방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쉬고 싶다고 말하려던 시도폰은 팔랑거리는 종이를 보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거기서 오드샤의 가문을 발견해버렸기 때문에 외면할 수 없었다.

‘이디스 갈릴레아… 치유 사제 자원이고 내년에 마지막 학년이라서 지원했나 보네. 동생이겠지? 오랜만에 오드샤 이야기도 들을 수 있겠다.’

시도폰은 그렇게 생각하며, 다음날에도 루카의 아버지가 버티고 서 있을지 걱정했지만 기우였다. 문지기들의 말에 따르면 그는 해가 지자마자 욕을 하면서 돌아갔다고 한다. 그러곤 다음 날 아침까지도 보이지 않았기에 다들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하지만 폰은 루카에게 얼마간은 마을에 가지 말라고 명령했다.

“그럼 기사님들이 돌아오기 전까지 마을과 교류하는 일은 할 사람이 있나요?”

“그건 솔라와 아이들에게 시킬 거야. 그 아이들이 빠릿빠릿하게 일을 해낼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네. 사실 이미 오늘 일은 시켜놨으니 곧 있으면 돌아올 테지.”

딱 맞게 폰의 집무실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문 너머에서 솔라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는 허락을 받은 뒤 문을 열었고, 들고 온 서류를 책상에 놓으며 어떤 자료인지 설명했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설명과 함께, 솔라는 서류의 어느 부분에 그 내용이 있는지 알려주기까지 했다.

“잘 들었네, 처음이었는데 이렇게까지 잘 해올 줄은 몰랐어. 루카, 어때? 믿을 만하지 않나?”

“흠, 이 정도면 안심하고 맡겨도 되겠어요. 잘 부탁해요, 솔라님.”

솔라는 들어주셔서 감사하다며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시도폰은 언젠가 솔라의 반짝이는 눈빛을 두려워했던 걸 후회하며 그에게 나가봐도 좋다고 말했다.

“저….”

저답지 않게 조심스레 입을 연 솔라에게 두 사람의 시선이 쏠렸다.

“지난번에 제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기사단에 들어왔으면 하는지 말씀해주셨던 거,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말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그걸 답할 수 있게 된 거지? 말해보게, 편하게 말해도 괜찮아.”

“사실 이번 일 때문에 상인과 이야기하면서 속이 상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응?”

시도폰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솔라가 고개를 저었다.

“걱정하실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북부가 위험해질 것 같다는 이야기였고 저는 당신께서 절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리라는 걸 믿고 있었으니까, 그의 걱정에 기분이 나빠졌던 겁니다. 그래도 그 사람을 지키고 싶지 않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외려 악마들을 막아내고 그런 사람들을 안심시켜주고 싶다는 마음이 커졌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솔라의 눈은 올곧게 시도폰을 바라보고 있었고, 폰은 제 입꼬리가 어느새 올라갔다는 것도 모르고 양손을 깍지낀 채 턱밑에 받쳐두고 있었다.

“…더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 구체적으로 뭔가 답을 내놓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아니, 충분하네. 부관 시험은 오순절 이후에 구체적인 날짜가 나올 예정이니 그때까지만 기다리게. 후보가 자네 말고도 두 명이 더 있어서 시험은 생략할 수 없게 되었지. 잘 준비해보도록.”

경례하는 솔라에게, 루카가 부관 시험 준비와 관련된 서류를 건네주었다. 솔라가 돌아간 뒤, 루카도 물린 시도폰은 솔라가 부관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두코나 프라이에도 분명 날 잘 도와주지만. 그 두 사람은 누굴 보좌하는 역할보다는… 역시 이끄는 역할이 어울린단 말이야. 게다가 둘 다 근접 무기를 사용하니까 같이 있으면 서로에게 방해야. 솔라는 원거리인데 다가 상황을 파악하고 내 행동에 맞추는 걸 잘 하는 편이지. 다른 후보들한텐 미안하지만 난 역시 솔라가 보좌관이 되었으면 좋겠네. 잘 해야 할 텐데.’

이럴 줄 알았으면 베론에게 심사를 맡기지 말 걸 그랬다며 시도폰은 속으로 푸념했다가, ‘그랬으면 공정한 시험이 안 됐겠지.’라는 생각을 하며 마음을 고쳐먹었다.


얼마 뒤, 장례식을 마친 베론과 기사들이 돌아왔다. 물론 헤일로의 시신은 신전의 무덤에 두고서. 시도폰은 기사들이 무거운 마음도 그곳에 함께 남겨두고 왔으면 좋았으리라고 생각했다. 몇몇은 헤일로를 잘 보내주고 온 것 같았고 몇몇은 여전히 그를 떠나보내지 못한 것 같았다.

‘피데이스는 전자, 베론은 후자. 시간만이 약이겠지.’

멀쩡한 얼굴로 보호소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 피데이스를 보며 시도폰이 땀을 닦았다. 아침 순찰을 다녀와서 쉬려고 했는데 피데이스가 오랜만에 아이들을 보자고 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따라와 버렸다. 아이들의 반짝이는 눈빛을 이기지 못하고 같이 훈련하다가 대련까지 해주고 나니, 아무리 튼튼한 시도폰이래도 숨이 찰 수밖에 없었다. 피데이스가 건넨 수건을 받아든 시도폰은, 그에게 신전 분위기는 어떻냐고 물었다.

“부단장께 여쭤 보…기는 아무래도 힘드시겠죠. 당연히 헤일로 단장의 비극을 슬퍼하는 분위기긴 했습니다만, 나중에 장례식을 마무리한 뒤에 조금 이상한 기류가 흐르더군요. 고위 사제들은 입을 다물고 모르쇠 하는 데에 도가 튼 인간들이라 별로 들을 만한 게 없었고, 그 아랫것들한테 들은 게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이야기하기엔….”

거기까지 말한 피데이스가 힐끗 고개를 돌려 아이들 쪽을 바라봤다.

“계속 말하게.”

“하…. 실은 북부 기사단장이 교체되었다는 것에 긍정적인 이들이 있었습니다.”

순간 시도폰의 손에서 작은 불길이 일자, 피데이스가 깜짝 놀라 그에게 진정하라고 일렀다. 아이들이 보지 못하도록 제 옷으로 불꽃을 가린 피데이스는, 작은 목소리로 ‘이래서 여기에서 말씀드리지 않으려고 했던 겁니다.’라고 속삭였다. 불꽃은 금방 사그라들었지만, 이어지는 시도폰의 말에선 분노가 뚝뚝 떨어졌다.

“어떤 이가 그런 말을 했는지는 아나?”

“그것까진 모릅니다. 모르는 얼굴이었으니까요. 제가 남부에 마지막으로 갔던 게 10년 전입니다.”

“….”

“단장이 남부와 척을 지고 살았다는 소릴 듣긴 했지만, 그건 사실이 아닌 것을 알고 계실 겁니다. 남부의 교회와 왕정 간의 정쟁에 질린 단장이, 북부를 지키기 위해 했던 행동들이었는데, 그걸 자기들 멋대로 왜곡하고 있더군요. 당신께서 남부 출신이라는 것 때문에 더 기가 산 것처럼 보였습니다.”

“평민에 거주관 출신이라고 무시할 땐 언제고, 이제야 그런 취급을 하다니 웃기지도 않는군.”

한때 신전의 정문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정원 담벼락에 난 작은 문으로 몰래 드나들었던 시도폰은 그 시절을 회상하며 어이없어했다. 시도폰은, 빨래하다가 손이 얼 것 같다며 힘들어했던 코지, 경전을 외우지 않는다고 모욕을 들었던 자신, 그리고 농사일을 하다가 다쳤는데도 되려 혼나기만 했던 얀과 센을 떠올렸다.

“자기들이 했던 짓거리는 전혀 생각을 못 하는군. 그 말엔 진실만이 있다고 맹세할 수 있겠나?”

“맹세합니다.”

진정하고자 심호흡을 하는 시도폰의 옆에서. 그를 내려다보던 피데이스는 무언가 더 말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자신의 등을 가볍게 치고 지나간 십자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솔라가 피데이스와 눈을 마주치자마자 손으로 작게 엑스자를 그렸고, 피데이스는 말없이 다시 시도폰을 바라보았다.

“일단 알겠네. 유념하도록 하지.”

시도폰의 피데이스의 배웅도 받지 않고 곧장 집무실로 돌아갔다. 루카에게 태연한 척 차를 받아 마신 시도폰은, 물이 데워지는 동안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고민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다지 생각나는 게 없는데. 그 사람들한테 복수한답시고 악마들을 통과시킬 수도 없잖아. 답답하네, 단장님도 이런 마음이었을까?’

사람들을 악한 것들에게서 지키는 담장으로써, 시도폰과 북부 기사단은 남부가 아무리 아니꼬워도 할 수 있는 보복이라고 할 게 없었다. 일련의 사건들로 줄어든 인적, 물적 자원을 생각하면, 오히려 남부에 잘 보여야 했지, 대척할 상황이 아니었다.

“물이 거의 다 데워졌습니다.”

루카의 말이 끝나자마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베론이 들어가도 되겠냐고 물었고, 그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기에 시도폰은 씻는 걸 미루고 그를 맞았다. 북부로 돌아온 이래로, 가장 무덤덤한 얼굴을 하고 베론이 시도폰의 앞에 섰다.

‘이상하다, 목소리는 힘이 없어서 걱정했는데 왜 이렇게 침착해 보이지?’

“굳이 돌려 말하지 않겠습니다. 정식으로 단장직을 맡아주십시오.”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건지 물어도 되겠나?”

피데이스의 말이 생각났던 시도폰은 제 앞에서 말하고 있는 사람은 남부의 사제들이 아니라 베론이라는 사실을 억지로 상기시키며 화를 참았다.

“이 나라의 끝에서 끝까지 왕복하는 동안 생각할 시간이 많았습니다. 저는 당신보다 배는 많은 나이를 먹고도 그런 상황에서 제대로 대처하지도 못했고, 추한 모습을 보이기까지 했잖습니까. 기사단의 실질적인 지휘는 당신께서 하고 있음에도, 단지 부단장이었다는 이유로 제가 임시 단장직을 맡는 게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장례식도 무사히 마무리되었으니 정식으로 단장이 되어주십시오.”

말을 마치고 베론이 허리를 숙였다. 그의 말대로 단장의 임무 대부분은 이미 시도폰이 맡고 있었기에, 이대로 폰이 단장이 되어도 문제는 없었다. 다만 아까의 대화가 마음에 걸렸던 시도폰은 바로 단장직을 맡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컸다. 다행히 거절할 만한 핑계도 있었다.

“잊었나 본데, 나는 아직 제대로 기사 서임을 받지 않았네. 열여섯 나이에 남부에서 성인식을 치르면서 정식 기사가 되어야 단장이 될 수 있을 테지.”

“집행자께서 단장이 되겠다는데 반대할 사람이 있을 리가 없잖습니까.”

“그야…, 다들 내가 두려워서 말을 못 하긴 하겠지.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자네가 빨리 복귀해서 내 업무를 가져갔으면 하네. 단장 일이 좀 많아야지, 개인 훈련할 시간이 부족해졌어.”

마지막은 장난스럽게 마무리한 시도폰에 베론이 이마를 짚었다.

“삼 년이나 기다리라는 말씀입니까.”

“어쩔 수 없지 않나, 규칙이 그러한데.”

한숨을 푹푹 쉬고, 단념한 베론이 방을 나갔다. 시도폰은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처음 들어왔을 때 베론의 표정은 임시 단장직을 내려놓고 편해질 수 있다는 마음 때문에 그렇게 초연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아예 기사단을 그만두겠다고 말하는 줄 알고 긴장했어. 아니었구나.’

돌아온 루카가 조심스레 씻겠냐고 물었고 시도폰은 그러마 대답하며 일어섰다. 정오의 햇살이 비스듬하게 들어오는 욕실에서 시도폰은 베론이 가져다준 카리타스의 편지에 대해 생각했다. 답장을 기다리는 편지는 아니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부담감은 없었다. 손이 물속에서 의미 없이 휘적거렸다.

‘내가 그때 급해서 사무적인 내용으로만 편지를 쓰긴 했지만 정말 거기에 대한 답만 올 거라곤 생각을 못 했어. 뭘 하고 지냈는지 정도는 써줄 줄 알았는데 지원을 못 해준다는 말만 적혀있을 줄이야.’

목까지 물에 잠겨있어서 답답한 줄 알았던 시도폰은, 몸을 일으켰다. 어깨 아래로 내려온 수면을 바라보아도 뭔가가 목을 조이고 있는 듯한 감각은 사라지지 않았다. 시도폰이 고개를 좌우로 세게 흔들었고, 머리카락을 적셨던 물이 사방에 튀었다.

‘아냐, 이런 생각 해봤자 뭐해. 그냥 내가 열심히 하면 될 거야.’

그러기 위해선 피로를 풀어야 한다며 시도폰은 다시 물에 잠긴 채 몸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물이 찰랑거리며 햇살에 반짝였고, 그만큼 반짝이는 얼굴로 시도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야 할 일이 많았기에 이렇게 오래 여유를 즐길 수는 없지만, 그건 반대로 말하면 해볼 수 있는 일이 많다는 거니까.

 

1496년 5월 25일, 솔라가 시험을 통과하고 시도폰의 부관으로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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