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파랑

醉中眞談 (上)

살파랑 장경x고윤

기록 by 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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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수=사령관(제가 대수라는 호칭을 좋아해서 그대로 쓰기로 했습니다ㅠ)

*고윤의 말투가 정발판과 좀 차이가 있습니다. 감안하고 읽어주세요.

 

불현듯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한밤중이었다.

고윤은 기묘한 적막 속에서 무거운 눈꺼풀을 깜박였다. 머릿속은 따뜻한 물에 푹 잠긴 것처럼 나른했지만, 보통 사람보다 훨씬 예민한 후각은 후유증이 남은 눈과 귀보다 먼저 습관처럼 주변을 헤아렸다.

제일 처음 느낀 것은 공기 중을 떠도는 은은한 향이었다. 어떤 냄새인지 정확히 알 수 없어 의아해하던 그는 문득 이것이 안신산과 다른 무언가가 섞여서 나는 향임을 깨달았다. 안신산의 향은 그의 목과 어깨 부근에서 느껴지는 조용한 숨결의 주인에게 체취나 다름없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하나는 무엇인지 모르겠다. 나른한 머리로 의아해하던 고윤은 한발 늦게 그것이 주향酒香임을 깨달았다.

그는 한동안 이 익숙하고 친근한 냄새를 거의 맡아보지 못했다. 진경서가 이제 부상이 다 나았다는 진단을 내릴 때까지 그의 집 폐하께서 평소 술병조차 눈에 띄지 않게 친히 관리하셨기 때문이다. 그 어느 날 심역이 가져온 술? 폐하의 입술에서 나는 맛은 아주 잘 보았다. 그는 자기 사람들이 모인 떠들썩한 자리에서도 술잔을 만져보지도 못한 채 입맛만 다셔야 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약간 낯설어진 냄새가 아주 익숙한 안신산의 향과 섞여 짙게 풍기고 있었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던 둘은 막상 섞이고 나니 의외로 잘 어우러졌다. 정확히 어떤 술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안신산에 은은한 꽃향기가 어우러지고 그 끄트머리에 약간 달짝지근한 냄새가 깔리는 것이 썩 운치 있다. 그는 단 것을 좋아하지 않지만 이 향은 꽤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왜 술이지? 고윤은 아직 나른한 머리를 굴려 생각했다.

서서히 깨어나기 시작하여 상황파악에 들어간 머릿속과 달리 그의 몸은 긴장 한 톨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나른하게 풀어져 포근한 이불 속에 파묻힌 채였다. 왕년의 딱딱함을 찾아볼 수 없는 안락하고 포근한 침상은 두 사람분의 체온으로 데워져 평소 차갑기만 한 고윤의 손발까지 따뜻하게 만들었다.

그의 목과 어깨 부근에 얼굴을 파묻다시피 한 장경은 아주 곤히 잠들어 있는 듯했다. 서로의 체온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빈틈없이 붙어있는 몸에서 느리고 규칙적인 고동이 전해져 왔다. 잠시 그 호흡이 얼마나 평온하고 고요한지 헤아려보던 고윤은 문득 나른하다고만 생각했던 몸의 여기저기가 묘하게 욱신거리는 것을 깨달았다.

낯선 느낌은 아니었다. 분명 아픔이기는 하지만 반드시 그것만이라고는 할 수 없는 저릿하고 더운 열기의 여운이 전신을 휘돌고 있었다. 그것을 자각하자 한동안 계속 시달린 것이 분명한 허리가 본격적으로 지근거리며 아파 왔다. 그는 작은 한숨을 내쉬며 자세를 약간 바꾸려다가, 무심코 움직인 다리 안쪽에서 느껴지는 축축하고 끈적이는 느낌에 저도 모르게 창백하게 굳어버렸다. 잠시 후, 희미한 분노가 솟구쳤다.

이 작은 개자식은 제 의부를 실컷 괴롭혀놓고 혼자 편하게 자고 있단 말이렷다?

의부를 극진히 모시지 못할망정 어찌 이리 뻔뻔하게 굴 수 있어?

“이게 대체…….”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말이 술기운 섞인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잠들어 있던 장경이 그 소리에 반응하듯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모르게 숨을 죽인 고윤은 문득 상대에게서 숨길 수 없을 정도로 짙은 주향을 맡았다. 그의 작은 장경에게서 나는 거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선명한 만취의 증거였다. 그는 한층 더 황당하여 입을 뻐끔거렸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작금의 몸 상태와 익숙한 여운으로 보아 자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확실했다. 동시에 그는 지금으로부터 몇 년 전, 곤드레만드레 취해 장경을 상대로 저질렀던 부끄러운 일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설마 자신이 또 그때처럼 만취해서 돼먹지 못한 짓을 했단 말인가! 게다가 이번엔 허리띠만 푸른 게 아니라 끝까지 갔어!

아니, 이젠 거리낄 사이도 아닌데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평생 살아오며 후회나 자괴감을 느껴본 적이 거의 없는 대장군은 이내 빠르게 생각을 고쳤다. 게다가 술 냄새를 폴폴 풍기는 건 자신이 아니라 장경이다. 이것은 그의 첫 번째 고민을 해결해주는 동시에 두 번째 고민을 불러왔다.

취한 게 자신이 아니라 장경이라니. 착각이라기엔 관자놀이가 지근거리거나 속이 메스껍다거나 하는 숙취의 증상이 전혀 없다. 그럼 정말로 장경이 만취한 채로 이런저런 일을 저질렀다는 게 확실한데, 설마 이 애의 주사가 자신만큼이나 돼먹지 못한 것이었단 말인가?

근묵자흑이란 말이 이런 데에도 통용되는 건지 진지하게 고심하던 고윤은 여전히 깨어날 기미가 없는 장경의 머리를 조심스레 베개에 누이고 살짝 몸을 일으켰다.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몸이 이불 속에서 빠져나오니 약간 서느런 기운이 피부를 스쳐 소름이 돋았다. 다리 사이에서 느껴지는 이루 말로 할 수 없는 느낌과 허리를 비롯한 여기저기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잠시 잊고 있었던 분노가 울컥 솟구쳤으나, 상황을 파악하는 게 우선이었다.

어슴푸레한 달빛에 잠긴 방안에선 멀리서 들려오는 희미한 바람소리와 방 한가운데에 있는 화로의 풀무에서 나는 작은 소음만이 들려오고 있었다. 침대맡을 더듬어 등을 켜니 곧 은은한 빛이 방안을 살며시 밝혔다. 고윤은 몸을 약간 틀어 장경의 얼굴을 가리며 방안을 훑어보았다. 그의 눈은 밤에는 여전히 그닥 쓸모가 없었지만, 빛이 있으니 유리경을 쓰지 않아도 방 안에 있는 사물의 대략적인 형태 정도는 볼 수 있었다.

어렴풋이 보이는 방안은 그가 기억하는 평소의 모습과 약간 달랐다. 제일 먼저 발견한 차이점은 탁자 위에 어지러이 널려 있는 술병과 술잔들이다. 두 개의 술잔은 각각 쓰러져 아무렇게나 탁자 위를 굴러다니고 있었는데, 다행히 내용물은 다 마셔버렸는지 잘 보이지 않는 눈으로 보기에도 참사는 일어나지 않은 듯했다. 그러니까 술을 마시긴 마셨단 뜻이군. 고윤은 혀를 차려다가 널브러진 술잔과 술병 사이에 홀로 곱게 핀 매화꽃을 보고 잠시 멈칫했다. 순간 잠들기 전의 기억이 하나둘 뇌리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자희, 꽃이 피었어요.”

고윤이 침상 위를 딱 알맞게 데우는 햇볕 아래에서 막 눈을 떴을 때, 장경은 후부의 정원에서 갓 피어난 매화꽃 한 가지를 꺾어 가져왔다. 덕분에 고윤은 눈을 뜨자마자 희고 긴 손가락이 매우 섬세하게 움직여 꽃가지를 다듬는 장면을 감상할 수 있었다. 곱게 핀 매화는 꽃잎 한 장 상하지 않고 화병에 꽂혀 방안을 화사하게 장식했다. 반쯤 몸을 일으킨 그는 그 광경을 보고 기분이 좋아졌다. 어여쁘게 피어난 꽃도 좋지만 장경의 어릴 적이 생각난 탓이다. 장경은 어릴 때부터 언제든지 의부를 생각해주는 아이였고, 훌쩍 자라 관계가 많이 바뀌어버린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의부에게 제일 먼저 보여주려고 가져온 거야?”

“그럼 제가 의부가 아닌 누구에게 가져다드리겠습니까?”

농 섞인 물음에 웃음기 어린 부드러운 대답이 돌아왔다. 고윤은 더더욱 기분이 좋아졌다.

장경이 거들어주는 대로 유리경을 쓰고 창밖을 보니 과연 매화나무에 꽃이 피어 있었다. 지난밤 눈이 내렸는지 정원은 온통 얇고 흰 비단을 덮은 듯했는데, 홍매紅梅 위에도 어김없이 흰 눈이 얇게 덮여 과연 정취가 훌륭했다.

이건 썩 괜찮은 하루의 시작이다. 고윤은 그렇게 생각했다. 아마 그의 집 폐하도 그렇게 생각하셨을 것이다. 어여쁜 홍매를 꺾어다 방에 장식하는 장경의 얼굴이 평소보다 묘하게 기분 좋아 보였기 때문이다. 그 느낌이 착각이 아니었음을 증명하듯, 정월 16일을 제외하고는 새해 내내 쉴새 없이 바빴던 장경은 모처럼 후부에서 고윤과 함께 느긋한 하루를 보냈다.

연호가 바뀐 지 어느덧 몇 년이 지났다. 거세게 몰아치던 개혁의 급류도 서서히 가라앉아 잔잔한 물결이 되었으니, 항시 바쁜 태시제도 그 틈을 타 전보다는 조금 한가해졌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연말부터 연초까지, 두 해의 마무리와 시작이라는 가장 바쁜 시기에 이런 여유를 만들 수 있었겠는가. 허나 그 여유를 얻은 장본인인 폐하께서는 한낮부터 직접 찬간에 서서 안정후의 식사를 준비하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폐하께서 이런 날에도 친히 찬간에 서 계시니 신이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이제는 후부의 노복들조차 익숙해져 말리지 않는 광경이긴 하지만, 정말 효심이 깊다고 해야 할지 안주인으로서 모범적인 태도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미인의 뒤태를 구경하기 위해 찬간에 고개를 들이밀었던 고대수가 농 삼아 건넨 말에 장경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여상스레 답했다.

“최근 제가 의부를 모시는 데에 너무 소홀했던 것 같아서 그러는 것이니, 부담 갖지 말고 편히 계시지요.”

그것은 세상에서 장경과 가장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얼마 전 정월 16일에도 고윤에게 직접 장수면을 만들어준 사람이 할 말인가. 고윤은 괜히 주변을 기웃거리며 장경의 어깨너머를 훔쳐보았다. 채도를 쥔 손이 어찌나 능숙하게 움직이는지 내심 감탄스러울 정도였다.

그날 상에 오른 요리는 전부 고윤의 입맛에 딱 맞는 것들이었다. 비록 푸른 잎 채소가 빠지지 않고 올라오긴 했지만 이젠 눈을 감거나 코를 막지 않고서도 먹을 수 있었다-물론 삼키는 건 괴로웠다-. 식후에는 장경과 서재에서 묵은 책이나 필사본을 뒤척이며 해묵은 이야기를 끄집어내 보고, 구오지존의 무릎을 베개 삼아 한가로이 오수를 즐기기도 했다. 느지막이 깨어난 뒤에는 눈 덮인 정원의 풍경을 감상했다.

“자희, 바람이 차니 이만 창을 닫는 게 좋겠습니다.”

“이 정도는 괜찮아. 애초에 네가 밖은 너무 춥다고 해서 안에 들어온 거잖아?”

고윤은 방 안임에도 갖옷을 가져올 기세인 장경을 말리며 기분 좋게 그의 손목을 끌어당겼다.

“그렇게 걱정되면 네가 따뜻하게 해주면 되지. 안 그래?”

“…….”

손목 안쪽을 은근히 쓸어내리는 손길에 장경은 순간 말문이 막힌 채 순순히 끌려왔다. 늘 그렇듯 저를 놀리기 위한 말임을 알면서도 그 은근한 희롱에 얼굴이 뜨거워졌다. 태시제의 붉어진 얼굴을 본 안정후가 무엄하게도 웃음을 터뜨렸지만 그를 탓할 사람은 이 자리에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황제 자신조차도.

곁에 앉은 장경의 어깨를 끌어안은 고윤은 긴 숨을 내쉬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겨울의 낮은 짧아 이제 막 유시酉時가 될 무렵인데도 벌써 어스름이 깔리기 시작했다. 타오르는 불처럼 찾아온 황혼 아래 녹지 않은 눈은 주홍색 염료로 물들인 듯 하다. 황혼 저편에 어둑한 구름이 깔린 것을 보아하니 밤에는 또다시 눈이 내릴 모양이었다. 매화꽃이 시린 바람에 가냘프게 흔들리고, 간혹 정원을 가로지르는 노복들의 발걸음 소리만이 아련하게 들릴 뿐 사위는 조용했다. 고즈넉하기 그지없는 풍경이었다.

작은 마당이 딸린 민가는 아니지만 살풍경하던 후부는 새로이 단장해 따뜻하고 편안했고, 침실에서 품에 가인佳人을 안고 운치 있는 정경을 즐길 수 있으니, 실로 아주 좋은 날이다. 설핏 웃던 고윤은 그 끝에 문득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이런 날 좋은 술이 있다면 더 바랄 게 없겠는데…….

 

 

……그게 원인이었나? 거기까지 떠올린 고윤은 멀쩡하던 머리가 지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무심코 손을 들어 막 태양혈을 주무르려던 차, 곤히 잠들어 있던 장경이 몸을 뒤척였다. 잠결에 움직인 팔이 허리 근처를 스쳐 고윤은 저도 모르게 짧은 숨을 들이마셨다.

장경은 보통 매우 얌전하고 조용히 자기 때문에 작금의 뒤척임 또한 크지 않았다. 이불이 바스락거리는 가벼운 마찰음도 거의 들리지 않았지만 고윤은 그의 미세한 움직임을 확실히 느꼈다. 그대로 잠잠해질 듯하던 장경은 잠시 침상 위를 더듬는가 싶더니 고윤의 허리를 찾아 감싸왔다. 아무래도 무의식적인 행동인 듯 했다. 고윤은 들이마셨던 숨을 천천히 내쉬며 살짝 몸을 비틀었다. 아마도 밤새 시달린 게 분명한 배 안쪽이 팔에 눌리며 묘하게 지근거렸다. 정무로 바쁜 와중에도 단련을 게을리하지 않는, 얇지만 견고한 근육이 붙어있는 팔의 감촉이 정사의 열기가 남아있는 피부 위로 선명히 느껴졌다. 고윤은 그 팔을 치워낼까 하다가, 문득 불빛에 비친 장경의 얼굴을 보고 흠칫 놀라 눈을 가늘게 뜨고 시력을 집중했다.

“……장경?”

조심스러운 부름에도 장경은 눈을 뜨지 않았다. 고른 숨을 내쉬는 입술과 뺨이 평소보다 혈색이 좋아 눈길을 끈다. 그러나 고윤의 시선이 멎은 것은 다른 부위였다.

얌전히 내리감긴 눈꺼풀 아래, 눈가가 붉다. 고윤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을 받으며 손을 내밀었다. 촘촘하고 풍성한 속눈썹은 평소보다 조금 무겁게 내리 감겨 있었는데, 그 끄트머리를 조심스레 훑으니 손끝에 희미한 물기가 묻어났다. 처음에는 미지근했으나 금세 차가워진 감촉은 분명 자신의 좋지 않은 시력이 잘못 본 게 아님을 증명했다. 고윤은 말없이 손끝을 비볐다. 차가워진 물기가 살갗에 스며드는 것 같았다.

그는 굳은 표정으로 생각했다. : 대체 자신은 무슨 짓을 저질렀나?

머릿속에서 즐겁게 속삭이는 자신의 목소리가 윙윙 울렸다.

‘신이 그간 폐하의 명을 충실히 지켰사온데, 폐하께선 이 충직한 신하에게 상을 내리실 생각이 없으십니까?’

고윤은 술도 마시지 않았는데 취한 사람처럼 줄줄이 매끄러운 말을 쏟아놓았다. 아무리 혀에 기름칠을 하고 이리저리 돌려 말해봤자, 결국 결론은 단순했다.

‘대수는 정말 스스로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이오?’

금주령을 풀어달라는 은근한 조름에 그를 지그시 바라보던 장경은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감추지도 않았다. 물론 고대수의 철면피가 그 정도에 무너질 만큼 약할 리 없다. 고윤은 장경의 표정과 목소리가 전보다 조금 물러졌음을 재빨리 짚어내고 주특기인 감언이설로 그를 꾀었다. 이제 진 소저가 부상도 다 나았다고 했으니 그동안 고생한 의부에게 작은 즐거움 정도는 누리게 해주어도 되잖아. 네가 이렇게 컸는데 의부가 너와 단둘이 술잔을 나눠본 적이 없어 섭섭하다. 마침 날이 저물고 눈도 내리려 하니 너와 한 잔 마셔야 하지 않겠느냐*…….

‘당신은 여전히 감언이설이 대단하네요.’

줄줄이 이어지는 고윤의 말을 듣던 장경이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말은 그렇게 해도 웃음기가 묻어나는 목소리에 고윤은 금주령이 해제될 가능성이 코앞에 있음을 직감했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도화안을 가늘게 휘며 눈웃음을 짓는 그를 본 장경은 시선을 약간 돌리며 한숨을 쉬었다.

‘그럼 정말 한 잔만입니다.’

‘그건 말이 그렇다는 거지. 장경, 의부에게 이러면 못 써.’

‘한 잔이라고 먼저 말한 게 누구였지요?’

이런 몹쓸 것. 고윤은 우선 한 수 접고 후일을 도모하기로 했다.

약간의 실랑이 후 왕숙이 차려온 술상은 간소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간소하다 한들 오랫동안 술병 구경조차 하기 힘들었던 고윤에게는 만한전석 부럽지 않은 차림이었다. 고운 매화꽃을 병풍 삼아 흥청망청 놀아나는 방탕한 세가 공자처럼 앉아 술병을 열자 기다렸다는 듯 향긋한 냄새가 흘러나왔다. 깊게 숨을 들이마시니 훅 끼쳐오는 진한 주향에 벌써부터 즐거웠다.

‘……부상이 다 나았다고는 해도 안심하면 안 됩니다. 당신은 그동안 몸을 너무 혹사했으니 앞으로도 항상 주의해야 돼요’

싱글벙글 웃고 있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던 장경이 말했다. 그는 마치 고윤이 당장 술을 병째 들이키지 않을까 걱정하는 듯했다. 이 녀석이 누굴 술꾼으로 아나. 고윤은 걱정 말라며 손을 휘저었다.

‘알겠어. 그래도 가끔은 괜찮잖아. 너와 함께 마시는 거고, 술도 한 병뿐인데.’

‘한 잔만이라고 하셨잖아요.’

‘미인을 옆에 끼고 꽃을 보며 마시는 술인데 한 잔으로 되겠어?’

그 말에 장경의 미간이 조금 찌푸려졌다. 그 뺨에 살짝 올라온 붉은 기를 본 고윤은 웃으며 술병을 살짝 흔들었다. 찰랑이는 소리와 함께 향긋한 냄새가 한결 더 짙게 올라왔다.

예정에 없이 벌어진 술자리는 의외로 화기애애하게 진행되었다. 고윤은 직접 장경의 잔을 채워주었고, 자신의 앞에 놓인 한 잔의 술을 일부러 아끼고 아껴서 천천히 마셨다. 고윤이 정말 단 한 잔으로 끝낼 리 없을 거라 예상하고 신중히 그를 살피던 장경은 제 술잔이 비었음에도 아직 반 이상 남아있는 고윤의 술잔을 보고는 의외라는 듯한 눈을 했다. 표정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으나 고윤은 그 눈에 스쳐 지나가는 기색을 민감하게 읽어내고는 속으로 괘씸하여 혀를 찼다.

그는 이제까지 그랬듯 절제할 마음이 있으면 술 따위는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을 수 있었다. 아예 마시고 싶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장경을 걱정시키면서까지 아득바득 마실 이유는 추호도 없다. 간혹 장경과 벌이는 가벼운 실랑이는 말 그대로 소소한 흥에 불과했다. 헌데 이 몹쓸 것은 의심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보고있지 않은가?

‘자, 잔이 비면 안 되지. 나는 얼마 못 마신다지만 너는 아니잖아. 의부가 따라주마.’

‘잠깐, 자희…….’

장경은 난처해하면서도 고윤이 주는 것을 거절하지 못하고 새로 채워진 술잔을 받았다.

전에 지나가듯 들은 바에 의하면 장경의 주량은 기껏해야 보통 정도라고 했다. 이전에는 자신이 완전히 만취해버려 장경의 취한 모습을 볼 기회가 없었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고윤은 너무 노골적이지 않게 장경을 관찰했다.

그의 흑심을 알 리 없는 장경은 단정히 앉아 천천히 술잔을 비웠다. 살짝 내리깐 눈과 잔을 받친 손가락의 우아함이 술이 아니라 귀한 차를 마시는 것처럼 보인다. 고윤은 그 자태에 눈이 즐거워짐과 함께 흐뭇함을 느끼며 동시에 그것이 언제 무너질지 기대되었다. 물론 겉으로 드러난 그의 표정은 불손한 기미라곤 한 치도 느껴지지 않았으며, 그저 오랜만에 장경과 함께 술을 맛보게 된 선량한 즐거움만이 가득해 보였다.

결국 술 한 병을 거의 다 비운 건 장경이었다. 일부러 작은 병을 가져오라고 일렀기 때문에 실제로 그리 많은 양은 아니었지만 고윤은 여기서 멈출 생각이 없었다. 그는 장경을 구슬려 겨우 따라낸 두 번째 잔을 만지작거리며 웃었다.

‘뭐야, 네가 거의 다 마셨네. 의부와 마시니 좋지? 조금 더 마실 테냐?’

‘……자희, 지금 일부러 이러는 거지요?’

장경은 이미 고윤이 술을 계속 따라줄 때부터 그의 의도를 눈치챘다. 어디 그에게 한두 번 당해보았던가. 그럼에도 오늘 그가 하자는 대로 따라주었던 건, 가끔은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간 철저히 술을 금했던 건 고윤의 몸이 회복되지 않아서였다. 물론 회복되었다 해도 그간 독과 묵은 부상으로 혹사당한 몸이 새것처럼 멀쩡해졌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장경은 앞으로도 그가 내키는 대로 술을 마시도록 내버려 둘 생각이 전혀 없었다. 다만 저를 꾀는 말임을 알면서도 단둘이 술잔을 나누어 본 적이 없어 섭섭하다는 말에 마음이 약간 물러졌다. 스스로 의식하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날 유난히 기분이 좋았던 탓이기도 했다.

고윤은 과거엔 꿈꾸어본 적도 없고 어쩌면 평생 맞지 못했을지도 모르는 평온한 일상을 맞이했다. 그리고 그 곁에 자신이 있다. 새삼스러운 그 사실과 고윤의 감언이설이 장경을 설득시켰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장경은 머릿속에 아주 살짝 올라온 술기운을 몰아내기 위해 부러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 됩니다. 당신은 이미 두 잔째잖아요.’

‘아직 두 잔째는 마시지도 않았어.’

‘그럼 마저 드시고 끝내세요.’

타협의 여지가 보이지 않는 장경을 본 고윤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 많이 마시지는 않았지만 제법 독한 술 덕분에 장경의 뺨은 미미하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는 탁자 위의 잔을 만지작거리던 손을 슬그머니 움직여 조금 떨어진 곳에 놓여 있던 장경의 손끝을 가볍게 건드렸다.

‘아들, 정말 한 잔 더 마실 생각 없어?’

살짝 닿은 손끝이 가볍게 움찔거렸다. 매정하게 손을 거둬들인 장경이 재차 단호하게 말했다.

‘의부, 처음에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고윤은 당황하지 않고 피식 웃으며 제 몫의 술잔을 들었다. 잔 속에 찰랑이며 가득 차 있던 술을 단숨에 들이키는 그를 본 장경이 얼굴을 찌푸렸다.

‘당신…….’

그 말은 채 이어지지 않고 허무하게 끊겼다. 재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난 고윤이 장경의 턱을 쥐고 깊게 입 맞추었기 때문이다.

머금고 있던 술을 약간 벌어진 입술 사이로 옮기며 혀를 섞자 당황한 장경이 몸을 굳혔다. 고윤은 그대로 탁자를 짚고 몸을 숙였다. 무심코 올라온 손이 그의 허리를 휘감았다. 고윤은 그 손이 끌어당기는 대로 허리를 굽히며 그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장경의 입안은 뜨겁고 자신과 같은 맛이 났다. 같은 술을 마셨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스칠락 말락 한 거리에 있는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예민한 피부로 전해져왔다.

‘……한 잔 더 할까?’

한참 만에 입술을 떼고 묻자 장경이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젖은 입술이 와사등의 빛을 받아 반들거렸다. 고윤은 그 입술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허리에 감긴 팔에서 벗어나 다시 자리에 앉았다.

 


*<마침 날이 저물고 눈도 내리려 하니 너와 한 잔 마셔야 하지 않겠느냐> 본문에 들어간 고윤의 이 대사는 백거이의 시 문유십구(問劉十九)에서 가져온 구절입니다.

綠蟻新醅酒 녹의 술이 새로 부글부글 익어가고

紅泥小火爐 화로에는 숯불이 벌겋다

晩來天欲雪 저녁이 오고 하늘에서 눈이 내리려 하는데

能飮一杯無 어찌 한 잔 안할 수 있으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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