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fido

4부 13화

누군가 중얼거렸다.

“눈은 전혀 내리지 않고 있는데….”

그의 말대로 길거리는 깨끗했다. 눈이 금방이라도 내릴 것처럼 하늘이 어두웠고 입김이 나올 정도로 추웠지만, 아직 눈은 내리지 않았다. 일반인들은 모두 도망친 조용한 거리에서, 아페가 시도폰에게 물었다.

“원래 여기에선 신전이나 거주관이 보이지 않는 건가요?”

“…아뇨. 거주관이라면 몰라도 신전은 지붕이 뾰족하고 높은 편입니다. 여기서 매번 보였어요. 지금은… 전혀 보이지 않아요.”

다들 당황스러워하며 멈춰있을 때 솔라가 시도폰에게 말했다.

“단장님. 일단 가시죠. 여기서 보고 있어봤자 알 수 있는 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자세히 보시면 아시겠지만 저건 눈이 아니라 새하얀 기둥이 여러 개 꽂힌 것 같습니다.”

망설이던 시도폰은 겨우 마음을 다잡고 언덕을 향해 기사들을 이끌었다. 가까이 갈수록 사람들의 비명이 커졌다.

“자작나무가….”

시도폰에겐 너무도 익숙한 나무들이 길을 막고 있었다. 나무들 사이로 거주관이 보였기에 시도폰은 떨리는 손으로 나무를 일부 불태우고 진입했다.

거주관을 향해 달려가는 말발굽 소리가 점점 빨라졌고, 마침내 그 비명에 공포보다 슬픔이 더 크게 담겼다고 느꼈을 때, 시도폰은 거주관으로 꾸역꾸역 머리를 들이미는 악마들을 발견했다.

‘전부 인간형이라고?’

놀라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야 할 일이 달라지는 건 아니었다. 즉시 한 손으로 창을 빼 든 시도폰이 외쳤다.

“전원, 공격!”

분노한 푸른 불꽃이 악마들이 미처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그것들을 불태웠다. 뒤이어 기사들이 달려들었고, 시도폰은 악마들을 소탕하며 거주관 내부를 살폈다.

비명의 주인 중 몇은 이미 죽고, 몇은 간신히 살아남은 것 같았다.

시도폰의 뒤를 따라, 악마들의 잔해로 끈적거리는 거주관을 돌아다니던 아페는 생존자들의 상처를 치유하며 기사들의 안위를 살폈다. 누군가 외쳤다.

“저하! 뒤를 조심하십시오!”

‘늦었어!’

황급히 뒤를 돌아본 아페는 놀란 나머지 눈을 감고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우지끈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한참 후에도 아무런 아픔이 느껴지지 않았다. 다급한 손길이 아페를 끌었다. 아페가 말했다.

“이디스? 미안해요, 정신을 못 차려서….”

“아뇨, 저야말로 공격에만 전념하느라 저하를 돕는다는 걸 까먹었어요, 죄송합니다. 인간형 악마는 처음 상대해봐서 흥분했어요.”

이디스는 살짝 웃으며 악마의 체액이 묻은 해머를 고쳐 잡았다. 무의식적으로 바닥을 내려다본 아페는 자신을 습격했던 악마가 머리를 잃고 바닥에 처박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무래도 이디스는 기사가 적성에 맞았던 것 같은데….’

이후로 아페와 이디스는 기사들을 살리러 고군분투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들이 노력한다고 해도 모두를 구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신전 소속 기사가 악마와 대적하다가 밀려, 시체를 밟고 뒤로 넘어졌다.

그걸 본 시도폰이 달려갔지만, 먹음직스러운 먹잇감을 눈치챈 악마들이 그보다 빨랐다. 주변에 있던 악마들까지 달려들어 넘어진 기사를 둥글게 감쌌고, 기사의 단말마와 함께 시도폰이 그들을 모조리 베어버렸을 때는 이미 늦었었다.

슬퍼할 시간은 없었다. 가망이 없다면 버려야 한다. 하지만, 시도폰은 바로 그곳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순식간에 그의 목을 노리고 달려든 악마에게, 시도폰은 팔 하나를 내어줄 각오를 하고 몸을 돌렸다.

하지만 악마는 입을 벌린 채 시도폰의 바로 앞에서 멈추어 고꾸라졌고, 그 뒤엔 솔라가 있었다. 벌처럼 소리를 내며, 솔라의 십자가가 악마의 몸 곳곳에서 빠져나왔다. 시도폰은 짧게 감사를 전하고 남은 악마들의 수를 셌다.

‘그렇게 많지 않아, 하지만 한참을 죽인 것 같은데 이정도라니.’

그때 갑작스레 들린 폭발음에 모두가 잠시 멈추었다. 소리가 들린 위치를 가늠하던 시도폰은 문득 생각난 듯 중얼거렸다.

“아이들은?”

그와 함께 악마를 상대하던 솔라는 몇 마리는 십자가에게 맡기고 시도폰에게 물었다.

“단장님, 소리가 들린 곳이 어디인지 짐작이 가십니까?”

“지하인 것 같네, 그곳엔 사제들의 유골을 보관해둔 카타콤이 있어. 그리고 비상시에는 그곳의 입구를 막을 수 있는 콘피테오르가 새겨져 있네. 그게 발동된 모양이야.”

시도폰은 창을 휘둘러 다른 기사들을 습격하려던 악마의 뒤를 베었다. 그리고 그는 바로 거주관 밖으로 뛰쳐나가며 솔라에게 명령했다.

“자네는 기사들과 이곳을 정리하고 내 쪽으로 오게!”

가타부타 자신의 위치를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솔라는 시도폰이 어디에 있는지 바로 찾아낼 수 있을 테니까.

카타콤은 가까운 곳에 있었기에 시도폰은 그저 숨이 차도록 뛰었다.


“당장 그 문에서 떨어져!”

이미 무너진 벽을 긁고 있던 악마들이 순식간에 시도폰의 공격에 나가떨어졌다. 창의 뭉툭한 끝으로 시도폰이 돌을 몇 개 치웠을 즘, 또다시 지하에서 폭발음이 울렸다.

“젠장, 젠장.”

다급한 마음에 시도폰은 창을 던지고 맨손으로 벽을 파냈다. 손끝이 까지고 회복되길 반복했고, 고통은 끊임없이 갱신되었지만, 시도폰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거주관에서 아이들과 코지, 센의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어. 아직 자세히 조사하진 않았지만, 악마들에게 맞서는 게 불가능한 아이들의 시신이 한 구도 발견되지 않았다는 건, 누군가가 아이들을 데리고 이미 피했다는 뜻이겠지.’

마침내 숨겨진 콘피테오르를 발견하고 그것을 외우자, 무너진 벽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깜깜한 지하 속으로 불덩이를 몇 개 던져본 시도폰이 바닥에 내버려 둔 창을 다시 주워, 안으로 들어갔다. 계단을 급하게 내려가는 발걸음 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아까 폭발음이 들렸던 곳은 이쪽…인데, 이 길이 맞나? 매번 코지를 따라서 와서 까딱 잘못하면 아이들을 찾기도 전에 내가 길을 잃겠어.’

이런 상황에서 큰 소리를 냈다간 악마들에게 들킬 수 있었지만, 시도폰에겐 그런 것도 나쁘지 않았다. 아이들과 코지에게 갈 악마가 그 소리를 듣고 자신에게 온다면 오히려 괜찮은 일이라는 생각에, 시도폰이 입 앞으로 손을 모아 외쳤다.

“코지! 여기 있어? 대답해!”

그러자 멀리서 바닥을 박차고 뛰어오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본능적으로 그것이 인간의 것이 아님을 눈치챈 시도폰은 불꽃을 피워올린 채 그 소리를 향해 걸어갔다.

잠시 후, 자신에게 달려든 악마의 공격을 피한 시도폰이, 침착하게 그것의 심장 쪽으로 손을 찔러넣었다. 어두운 지하 동굴 속, 악마가 불타오르며 비명을 질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잠잠해졌다.

쓰레기를 내다 버리듯 악마를 바닥에 던져버린 시도폰은 그것이 질질 흘린 악한 기운을 역추적했다.

또다시 무너져 내린 벽 앞에 악마들이 둥글게 모여있었다. 슬슬 질린 시도폰이 이번엔 창을 휘둘렀고, 마침내 악마들에게 가려져 있던 누군가의 형체가 드러났다.

얼굴이 악마의 체액 때문에 검게 가려져 있었지만, 그의 손목을 본 순간, 시도폰은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작고 투명한 돌이 매달린 가죽끈 팔찌가 매인 손목은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그동안 용돈을 모아둔 보람이 있네! 예쁘다. 너도 사게?’

‘응, 근데 난 잃어버릴 것 같으니까 머리끈으로 쓰려고.’

훈련 때문인지 가죽끈이 싸구려였던 건지, 시도폰은 머리끈을 산 지 일 년 만에 그걸 끊어먹었다. 그것은 지금 서랍 한구석에 얌전히 보관되어 있을 것이었다.

시도폰은 떨리는 손으로 바닥에 늘어진 이의 얼굴을 쓸었다. 정화가 검은색 액체를 걷어냈고, 마침내 드러난 얼굴에서 회색 눈동자가 시도폰의 불꽃을 반사했다.

“코지… 안돼. 금방, 금방 치료할게.”

시도폰이 코지의 이마에 손을 대고 이디스에게 했던 것처럼 신성력을 흘려 넣었다. 하지만 이미 너무 많은 피를 흘린 몸은, 신성력을 받아내지도 못하고 그대로 흘려보냈다.

치료를 받는 이도, 하는 이도 그걸 모르지 않았다. 간신히 입을 연 코지가 말했다.

“그만해도 괜찮아. 나도 내 상태가 어떤지 알아.”

“아냐, 아니야….”

“이 벽, 뒤에… 아이들이 있어. 좁은 곳이라 금방, 하, 숨쉬기 힘들어질 거야, 빨리 그 애들부터… 구해줘.”

“할, 수 있어. 그전에 너부터 살릴 거야.”

손만큼 떨리는 목소리에 코지는 애써 미소를 지으려 했지만, 너무 졸려서 얼굴 근육이 그의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시도폰은 여전히 코지에게서 손을 떼지 않았다.

“많이 아팠지, 미안해. 내가 조금만 더 빨리 왔었어도.”

“괜찮아, 하나도 아프지 않아. 조금 졸린 것뿐이야.”

간신히 뻗어낸 코지의 손이 시도폰의 뺨에 닿았다. 그 손은 뺨을 가득 적신 눈물을 닦아냈다.

“나아 말로… 미안해. 내가 조금만 더 강했어도 버틸 수 있었을 텐데. 나 없이 네가 여기서 길을 잃으면 어떡하지?”

“그런 말 하지 마. 어떻게든 내가…!”

시도폰의 외침과 함께 그의 뺨에 붙어있던 손이 아래로 떨어졌다. 힘없이 늘어진 팔과, 멈춘 입, 감기지 않는 회색 눈을 보던 시도폰은 잠시 숨을 멈추었다.

“….”

그는 천천히 손을 옮겨 코지의 눈을 감겨주었고, 아직 체온이 남은 몸을 조심스레 끌어안았다. 아이들은 구해내겠다는 다짐도, 구해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도 할 수 없었다.

시도폰은 자신의 망토를 끌러, 코지의 몸을 감싸 다시 바닥에 뉘었다. 그는 혹여나 아이들이 코지를 알아볼까 봐, 그의 얼굴까지 가렸다.

“나중에 다시 올게. 그때까지만 기다려줘.”

그때 누군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 시도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단장님, 위쪽은 정리가 끝났습니다. 그분은….”

솔라의 물음은 흐리게 끝맺어졌다. 창을 다시 등에 멘 시도폰이 그를 지나치며 어딘가로 향했고, 솔라는 그를 따라 어떤 벽 앞에 섰다.

“부수게. 이 뒤에 아이들이 있다고 하니 그걸 고려해서.”

“예.”

어두운 동굴에서 잠깐 섬광이 번쩍이더니 벽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무너져 내렸다. 그 뒤에서 잔뜩 겁먹고 있던 아이들은 시도폰의 불꽃을 알아보고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애써 상냥한 표정을 지어 보인 시도폰이 가장 키가 큰 아이에게 물었다.

“오토 대주교님과 센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니?”

질문을 받은 아이는 고개를 저었다. 그를 대신해, 그의 옆에 있던 아이가 대답했다.

“대주교님과 센 오빠는, 코지 언니께 저희를 맡기고 다른 곳으로 가셨어요. 악마를 유인하겠다고… 하셨는데, 몇 마리가 저희를 따라와서 코지 언니가 저희를 여기로 보냈어요.”

“코지 누나는 어디 있어요?”

“맞아, 언니는요?”

시도폰은 아이들에게 대답할 수 없었다. 그는 간신히 눈물을 참고 아이들에게 일단 바깥으로 나가자고 이야기했다.

불안한 눈빛의 아이들을 이끌고, 검은 망토로 덮인 코지를 지나친 시도폰이 마침내 바깥으로 나오자… 하얀 눈이 내렸다.

‘대주교님과 센 둘 다 전투 경험은 거의 없었던 거로 알고 있어. 그런 두 사람이라면 이미….’

두통으로 펄떡이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른 시도폰은 기사 한 명을 집어 아이들을 마을로 대피시키라고 명령했다.

몇몇 아이들은 거주관 어른들의 행방이 궁금한 듯 불만스럽고, 불안한 표정을 지었지만, 사태가 심각하다는 건 눈치챘는지 별다른 반항은 하지 않았다.

시도폰이 고개를 들자 신전과 거주관 사이의 숲이 눈에 들어왔다. 어렸을 때 아이들과 술래잡기를 했던 곳이고 어른들 몰래 카리타스와 만났던 곳이기도 했다.

회상은 짧았다.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는 기사들에게 몸을 돌린 시도폰이 말했다.

“부상자는?”

아페가 대답했다.

“세 사람이에요. 응급처치는 했지만, 세 사람 다 온전한 치료를 위해서는 많은 신성력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처치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인원 한 명 한 명이 절실한 상황이었으니 부상병을 지키기 위해 많은 사람을 남겨두고 갈 수 없었다. 그렇다고 모든 부상을 치료하고 출발하기엔 치유 사제의 신성력도 무한하진 않았다.

‘신전에서 여기까지는 그리 멀지 않아, 어렸을 때 내가 뛰어도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으니까.’

결정을 내린 시도폰이 말했다.

“크로마, 자네가 부상병들을 지키게. 혹시 악마가 튀어나오면 바로 화살을 쏴서 연락하도록 하고.”

“…네, 명령 받들겠습니다!”

솔라를 걱정하는 듯, 크로마는 그를 곁눈질로 바라보았지만, 솔라는 이미 신전으로 갈 채비를 다 하고 시도폰의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더 설명하거나 지시할 건 없었다. 시도폰은 언덕을 향해 올라갔고, 숲을 통과하던 중 오토 대주교와 센의 시신을 발견했다.

“여기… 계셨군요.”

‘마을로 내려가는 게 가장 안전했겠지만, 그랬다간 그곳의 거주민들이 죽었겠지. 신전으로 가기엔…, 그곳이 발원지였으니까 그쪽으로 가는 건 불가능했을 테고.’

기사 중 거주관 출신이었던 몇 명이 슬픈 얼굴로 그들의 눈을 감겨주고 시신의 위치를 표시해두었다. 시도폰 또한 마음속으로 그들의 안식을 바라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 두 사람의 주변에서 신전 소속 기사들의 시신도 함께 발견되었다. 이디스는 다른 이들보다 열심히 기사들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그 모습에 아페는 찾는 사람이 있냐고 물었고, 이디스는 낮은 목소리로 언니가 제3 신전에 있다고 대답했다.

“이만 보고 가지.”

시도폰이 말했다. 말을 타고 가기엔 언덕의 경사가 가팔랐기에 기사들은 뛰다시피 걸어갔다.

흐렸던 하늘은 신전을 깔아뭉개듯 드리웠고, 거주관과 다르게 신전 쪽에선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갑옷 속에서 기사들은, 자신들의 숨소리와 갑옷이 절그럭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걸었다. 누구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지만, 그들은 이 정적이 너무나 괴로웠다.

‘카리….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불안한 마음이 시도폰의 다리를 계속 아래로 당겼지만, 시도폰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갑옷의 무게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속도를 냈다.

마침내 휘날리는 가루눈 속에서 신전이 모습을 드러냈다.

눈처럼 새하얀 자작나무가 신전을 감싸듯이 빽빽하게 자라나 있었고, 나무의 무늬는 불결한 침입자를 보는 감시자의 눈처럼 기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많은 눈동자가 자신을 쳐다보는 듯한 감각에 기사들은 입을 다물었다. 그들은 언덕을 올라오느라 숨이 부족하다는 사실도 잊은 채, 그 황망하고, 어딘가 비현실적인 광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언니! 제 목소리 들리세요? 대답하세요!”

의외로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사람은 이디스였다. 그는 해머로 자작나무를 내려쳐 부쉈고, 그 소리에 시도폰이 겨우 나무에서 눈을 뗐다.

울타리처럼 거주관과 신전을 감싸고 있던 아래쪽의 나무들과 다르게, 신전의 자작나무들은 빈 곳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건물 안쪽까지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앞장선 시도폰과 솔라가 나란히 나무를 불태우며 길을 냈다. 악한 기운이 점차 가까워지는 게 생생하게 느껴져, 시도폰은 자기도 모르게 긴장했고 다른 기사들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다.

마침내 입구 쪽을 뚫어낸 기사들은 짙은 피비린내와 무덤 속 같은 침묵에 삼켜졌다.

사제복을 입은 시신들이 발치에 널려있었다. 악마에게 맞서려던 사람도, 도망치려던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모든 행동이 무의미했다는 걸 증명하는 풍경이 펼쳐졌다.

시신에서 나는 냄새에 익숙하다고 자부하는 기사들이었지만, 여태 그들이 맡아본 것과는 차원이 다르게 짙고 퀴퀴한 냄새였다.

시도폰은 이디스의 약한 비위를 걱정했지만, 정작 본인은 그런 냄새나 광경 따위 인지하지 못한 것처럼 거침없이 발을 디뎠다.

“이디스, 정신 차려!”

시도폰은 팔을 뻗어 이디스를 뒤로 잡아당겼고, 이디스가 원래 있던 자리엔 십자가가 꽂혔다. 그 아래엔 악마의 손이 괴로운 듯 꿈틀거리며 박혀 있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나무 뒤에 가려졌던 악마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곳곳에서 번뜩이는 붉은 눈에 기사들이 무기를 들었다.

이디스를 후방으로 보낸 시도폰은 후들거리는 손으로 창을 단단히 붙잡았다.

거주관에 있던 악마들과 겉으로 보기엔 다를 게 없었던 악마들이 달려들었지만, 그때보다 기사들의 체력은 현저히 떨어져 있었다. 동작이 굼뜨고, 숨소리가 지나치게 컸다.

이를 악문 기사들이 악마와 사투를 벌였지만, 시도폰과 솔라를 제외하면 밀리는 것이 사실이었다. 기사들의 계속되는 부상을 치유하던 아페와 이디스도 힘에 부쳐 의식이 반쯤 몸에서 뜬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서 있었다.

그때 아페가 결심한 듯, 양손을 맞잡은 채 무언가를 중얼거렸고, 순식간에 악마들이 튕겨 나갔다.

기사들을 감싼 둥근 구 모양의 반투명 막이 만들어져 악마로부터 그들을 보호했는데, 기사들이 한숨 돌렸다는 표정을 지은 것과 다르게 시도폰과 솔라의 안색은 파랗게 질렸다.

“저하? 저하!”

이디스는 제 옆에서 무릎을 꿇은 아페를 일으키려 했지만, 아페는 깍지 낀 손으로 땅을 짚은 채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는 눈물과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로 계속 기도했고, 막의 경계에선 악마들이 반투명한 장벽을 깨부술 듯 두드렸다.

“당장 이걸 거두세요! 죽고 싶으신 겁니까?”

시도폰이 외쳤다. 그러자 그 못지않게 큰 목소리로 아페가 소리쳤다.

“그럴 리 없잖아요! 저도 살고 싶어요…, 하지만 혼자서 살고 싶지 않으니까, 어쩔 수 없잖아요!”

그러자 아페의 옆에 이디스가 꿇어앉았다. 이디스는 아페를 일으켜 자신에게 기대게 했고, 그와 마찬가지로 양손을 맞잡았다.

아페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졌다. 이디스는 일그러진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시도폰에게,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웃으며 대답했다.

“제가 돕겠습니다. 저희가 버티는 동안 어떻게든 방법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시도폰이 각성했을 때와 똑같은 상황이었다. 다른 점이라면, 시도폰에겐 더 주어질 힘 같은 게 없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이대로 있다간 모두가 죽을 것이다. 아페와 이디스가 모든 힘을 소진하고, 사라진 방어막 안에서 버틸 수 있는 사람은 시도폰과… 운이 좋다면 솔라도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가장 많은 사람을 살릴 방법이 무엇일까? 시도폰은 마음을 정했다. 그는 솔라에게 말했다.

“솔라, 부탁할 게 있네.”

“말씀하십시오.”

“내가 뭔가를 하고 나서… 모두를 데리고 여기서 벗어나게. 내 걱정은 하지 말고, 뒤돌아보지도 말고.”

악마들을 상대하느라 흘린 땀을 훔친 솔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저는 당신의 부관입니다. 그런 제게 당신을 두고 가라는 명령을 내리신다고요? 그런 명령은 따를 수 없습니다. 그리고 혼자서 저들을 전부 상대할 수 있을 거라고 어떻게 장담하십니까?”

“미안하지만 나는 자네들을 지키면서 저들을 상대하는 것보다 나 혼자 하는 게 더 편해.”

창을 쥐지 않은 손으로 주먹을 쥔 시도폰은 기도하듯 고개를 숙이며 그 손을 코끝에 가져다 댔다.

“[우리가 가는 길을 푸른 불꽃이 지킬 것이니, 두려워 말고 나아갈 수 있게 해주소서.]”

그것은 시도폰이 만든 축성 구절이었다. 본디 축성 구절이란 남에게 사용하는 것이다.

‘내가 이 사람이 다치지 않길 바라니, 부디 위대하신 분께서 이 사람을 보호해주십시오.’의 의미를 지닌 문장이었다.

하지만 이 축성을 집행자 본인이 사용하면 그건 조금 다른 의미로 변한다. 시도폰은 집행자가 되고 나서 헤일로에게 그 의미를 전해 들었을 때, 놀라서 그 의미가 맞는지 여러 번 되물었었다.

‘그런 걸 사용할 정도의 상황이 자주 생기나요?’

‘그럴 것 같지는 않습니다. 사용된 횟수가 역사서에 기록될 정도로 적었으니까요. 하지만….’

동그란 눈으로 제게 답변을 재촉하는 시도폰에게, 헤일로는 씁쓸한 얼굴로 대답했다.

‘역대 집행자 중에서 그것을 사용하지 않은 분들은 없었습니다.’

하늘색 불꽃이 바닥에서부터 타오르며 시도폰의 몸을 감싸고 올라갔다.

당황한 솔라는 시도폰에게 다가가려던 걸음을 멈추고 그 불꽃을 흔들리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어떤 대가든 치르겠습니다. 설령 그것이 나의 죽음이라고 할지라도.’

헤일로가 말해준 또 다른 의미, 시도폰은 당시 그 의지를 완전히 받아들여 이해하진 못했다. 나의 목숨을 걸어서라도 지키고 싶은 사람들이 생기는 마음을, 고작 열 살짜리 아이가 느끼고 있을 리 없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의 시도폰은 마음으로 그 의지를 느낄 수 있었다.

불꽃은 이내 사그라들었지만, 솔라는 시도폰의 눈에서 여전히 일렁이는 불꽃을 보았다. 얼떨떨하게 서 있던 솔라의 뒤에서 악마들이 찢어질 듯 비명을 질렀다.

천천히 뒤를 돌아본 솔라는 한겨울이라는 사실을 잊을 정도로 따스한 기운에 검을 내려놓았다.

신성한 불길이 그 공간의 모든 악마를 집어삼켰고, 시도폰의 창은 그것들의 비명에 공명하듯 몸을 떨었다.

악마들이 재가 되어 흩날렸고, 마침내 처음 신전에 도착했을 때처럼 그곳이 고요해졌을 때, 아페와 이디스는 방어막을 조심히 거두어들였다.


부가설명) 옛날 옛날 진짜 초반에… 나왔던 팔찌라서 기억 못 할 거 같음.

소득도 없는데 굳이 몇 바퀴나 폰과 코지의 방을 돌아다닌 얀은 두 사람에게 생활복의 주머니를 뒤집어 보이라고 명령했다. 폰의 주머니에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고, 코지의 주머니에서는 손수건과 작고 투명한 돌이 매달린 가죽끈 팔찌가 나왔다. 시장에 나갈 수 있는 날에 그동안 모아둔 용돈을 써서 폰과 코지가 각각 산 팔찌였다. 폰은 산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잃어버릴 것 같다며 그것을 머리끈으로 사용했지만, 코지는 꼬박꼬박 손목에 끼고 다녔다.

사제들은 개인적인 사치품을 가져선 안 되지만, 아이들에겐 조금 너그러운 기준이 적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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