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

디지몬 스토리 사이버슬루스 해커스메모리 플레이 타래 백업

통모짜 by 모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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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람에 앞서서,

사이버슬루스 감상은 ‘스에도 아케미’에 초점을 맞추어 전개됩니다.

게임을 플레이 하면서 스에도 아케미를 편협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조금 못된 말을 했기 때문에, 스에도 아케미를 중점으로 플레이 후기를 작성했다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해커스메모리 감상은 ‘미시마 에리카’에 초점을 맞추어 진행했습니다. 그 이유는 모두가 아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시 스에도는 미친 게 맞는 것 같아요. 부정적인 의미의 미쳤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 상황에 안 미치는 게 이상하지요. 하부P가 풀어준 설정에 따르면, 스에도는 가족을 잃고 그 기억을 스스로 지웠다는 설정이라고 하니까요. 그의 주장이 어떻게 보면 허울 좋은 개소리인 것도 맞지만 이유가 있는 것이지요. 결국 이 사람은 마도카(자기의 존재를 담보로 걸고 세상의 진보─라는 단어를 쓰기엔 어폐가 있는 듯하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간다는 의미로서 사용했습니다─를 이룩했지요)였지요. 그는 많은 선택지 속에서 방황했고, 나름대로 정론을 주장하는 듯했지만 결국 슬픔을 받아들인다는 결론을 낸 것이 좋았습니다. 주인공의 슬픔을 없애주고 싶었지만, 주인공이 슬픔을 받아들였기에 그가 더 이상 손을 댈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했다는 게 좋은 것이지요.

사이버슬루스는 전뇌탐정, 탐정으로서 여러 사건을 해결해가며 진상에 다다른다는 시놉시스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방향성으로 만들어진 게임이기에, 플레이어들은 애초부터 슬픔을 잃어버리는 세계를 택할 수 없을 겁니다. 슬픔은 상처를 다루는 한 방법이기 때문이지요. 감정을 다루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덮어 두고 외면해서는 감정은 고여 썩을 뿐이겠죠.

탐정이 해야 하는 일은? 진상을 파헤쳐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것과 마주 봐야 하지요. 슬픔이 없어지고 불행이 사라지는 세계의 기준이 뭔지 저는 잘 모르겠지만, 스에도는 리얼 월드를 디지털화해서 마음대로 바꿀 수 있게 되면 그 수단을 이용해 인간 세상이 발전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슬픔 또한 없어질 것이라고요. 낙관적인 전망이지요? 그러나 슬픔이 없는 세계라는 것은 인간의 발전 가능성을 아예 지워버린 세계로, 스에도가 바라는 궁극적인 목표와도 대치되게 됩니다.

사슬을 플레이하면서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를 많이 떠올렸는데요.(SF의 고전이자 명작이지요) 유고의 아바타에 깃든 인공지능이 자신을 유고라고 주장하는 장면이나, 스에도가 디지털화 된 세계를 마음대로 개변하여 슬픔 없는 세계로 만들겠다고 하는 걸 보면 비슷한 부분이 떠오르더라고요.

저 소설에서 주요한 설정으로 나오는 것이 바로 감정이입 장치인데, 이것은 후반부에 안드로이드와 인간을 가르는 커다란 차이로 기능합니다. 돌을 맞는 순교자를 보면서 그 사람의 고통과 슬픔에 공감할 수 있는가 없는가의 차이. 벌레의 다리를 뜯으면서 즐거워하는지 슬퍼하는지의 차이.

슬픔이 없는 세계에서는 우울함도 없을 것이고 불행도 없으며, 모두가 행복할 겁니다. 디지털화된 세상에서 뭐든지 생각한 대로 고칠 수 있다면, 아주 좋겠죠. 그렇지만 그건 <멋진 신세계>에서 나온 소마를 먹는 일과 뭐가 다른가 싶더라고요. 일시적으로 감정을 거세해봤자 사람은 진정으로 '진화'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스에도의 저런 주장은 방어기제로 보입니다. 아이들이 괴로워하는 것을 보며 에덴의 기능에 대해 큰 회의를 느꼈을 테고, 일단 슬픈 기억을 없애서 애들을 일상으로 돌려보냈으나 어째서 우리가 이런 불행을 겪어야 하는지에 대한 죄책감과 좌절감을 맛봤겠지요. 그렇기에 그는 이런 감정이 아예 사라진다면, 헤어지거나 한쪽이 사라져서 이별하지 않게 된다면..? 인간이 더 궁극적으로 높은 단계로 진화하게 된다면... 이라는 생각을 품게 된 것도 당연하게 보입니다. 슬픈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슬픔을 다루기보다는, 아예 원인을 없애버리자고 생각하는 것이, 자신이 그걸 위해 노력하면 된다는 쪽이 자기 자신의 정신을 지키는 데에는 더 편하니까요.

그때 연구원들과 아이들이 모두 상담이나 치료를 받았다면.. 이런 일이 안 났을지도 모르고.. 하지만 모든 이야기는 필연적으로 흘러가야 하고, 현대사회에서 상부의 압력은 필수적인 요소이며 연구원과 같은 실무자들이 모든 책임을 떠안는 것도 마찬가지죠, 안타깝게도 말이에요.

게임은 계속 진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그 정체를 알아차리는 순간 이야기는 급격하게 결론으로 향합니다. 그렇기에 이 이야기는 애초부터 묻어둬야 하는 문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고, 스에도는 처음부터 틀린 답을 고르고 있었다고 말해주지요. 그러나 그 의도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니기에.. 여기서 주인공이자 플레이어블 캐릭터, 메타적으로 플레이어를 상징하는 캐릭터 아미(타쿠미)는 스에도를 보며 선택을 내려야 합니다.

우리가 항상 소마를 먹고 살 수는 없습니다. 또한 진화는 언제나 높은 단계로 발전하는 것을 뜻하는 게 아니다. 진화는 단순하게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며, 슬픔을 받아들이는 것은 이 복잡한 현대사회에서 꼭 필요한 것이지요, 아예 슬픔을 없애버리는 것보다요. 인간은 슬퍼하고 이별을 받아들이고 죽음을 애도하면서 문명을 발전시켰고 살아남았습니다.

사실 사람을 살게 하는 것은 기술도 아니고 지식도 아니고,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라고 생각해요. 슬픔과 불행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인간사에서 거세하는 것은 곧 인간을 평면적으로 만드는 것이고, 그것은 환경에 적응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인간을 약하게 만드는 것이라고요. 저희가 보기에는 눈이 없어서 불편해보이는 곤충들이 사실은 어두운 동굴에서 적응하여 눈이 퇴화된 것인데, 그것도 진화의 일종인 것을 보면 그렇지요. 어쩌면 인간은 서로를 생각한다고 해도, 서로를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생물일지도 모르고요.

이렇듯 스에도는 인간에 대한 가능성을 믿었기에 인간을 위해 새로운 세계를 만들고자 하였다는 모순을 품은 캐릭터라 보고 있으면 슬픈 것 같습니다.

슬픔을 덮어두어선 안 되죠... 아미(주인공)가 그 기억을 떠올리지 못했다면 스에도를 찾기 위해 이터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겠죠... 더 이상 누구도 두고 갈 수 없어. 이 마음은 결국 상처뿐인 과거를 알았기에 아미가 기억해낸 마음입니다. 스에도가 아미를 위해 지워 준 기억이지만, 결국 아미는 그 기억 덕분에 스에도를 찾으러 가겠다고 제 의지로 결정했습니다.

스에도가 신의 주사위 이런 말 했지만 사실은 그냥 자신이 없애버렸던 과거에서도 미래에 대한 희망을 찾으려고 하는 아이들을 보고 모든 것을 놓아버렸다고 생각해요. 그가 여태까지 고민하고 치열하게 사투해 온 것들이 수포로 돌아갔다는 허탈감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겠지요. 그저 그는 이 순간에 적응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의미로는 진정한 의미의 진화를 이룩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요. 슬픈 상황에 적응하여, 단단해지는 거 말이에요. 그래서 그는 마도카가 되어버렸고(..) 물론 농담입니다 마도카랑은 궤가 다르니까요.

최후까지 보니까 스에도 아케미는 정말 마일도랑 비슷한 캐릭터입니다. 마일도는 악역에게 조종당했지만 선한 마음을 가진 인물이지요. 반면에 스에도는 조종은 무슨 나름 양의 방향의 마음을 가진 인물이지만, 나름대로 그들이 올곧게 믿어온 신념이 있었고, 어찌 되었든 그 신념이 불러온 것이 신념의 어두운 단면이었다는 것이 안타깝기도 하지요.

하지만 생각해보면 모든 게 스에도의 실험의 일부였던 것 같기도 하지요. 여튼 그는 평범한 인간이라기보다는 인외에 가까운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스에도 아케미라는 캐릭터에 관해서도 아쉬운 점이 매우 많지요. 진화라는 단어를 그렇게만 받아들이는 건!! .... 개인적으로 사회진화론, 이런 생각이 나서 엔딩까지 그를 조금 고깝게 보기도 했습니다. 스에도 아케미 씨에게 사죄드립니다.

이런 면에서 사슬은 뚜렷한 악역이 없고, 그냥 프로타고니스트와 안타고니스트들만 잔뜩 나오는 얘기였구나, 싶은 게 결론이겠네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꺼무위키에서는 스에도 보고 인간찬가라고 했는데 사실 스에도 자체가 그런 캐릭터라기보다는그가 인간찬가를 이해하게 되는 이야기였다고 생각해요. 인간찬가는 어딘가 덜떨어지고 상처받음에도 다시 일어서는 인간의 이야기니까요.

인간을 이해하게 된 인외가.. 자신의 기억 데이터로 인간을 되살린 게 너무 완벽한 거 같아요 … 이해의 끝판왕이잖아요 이건 알파몬이 받아들인 아미가 완벽한 아미가 아닐지 몰라도 결국 아미는 그것을 받아들여 살아난 게 … (+다른 디지몬들의 이해도)

사랑에 뭐 다른 게 있겠습니까? 상대를 알고자 하는 욕망이 사랑인 거지 알파몬이랑 아미는 이로써 서로를 사랑하고있다는 걸 ,,,,불완전한 이해여도 헤아리는 마음이 곧 바람이 되어 기적을 일으킨 게 완벽하다고 생각해요 …


그리고 해커스메모리. 사슬보다 플레이타래를 상세하게 작성하였으나, 유의미한 정보값이 없다고 판단하여 후기로 작성했던타래를 조금 다듬어서 업로드합니다.

확실히 사슬은 아미가 플레이어블 캐릭터로서의 특성이 더 강했다면, 케이스케는 타쿠마와 더 비슷한 느낌. 그리고 이건 아미와 케이스케의 소속과도 관련되어 있는데 일단 해메 하는 중이라 짧게만 말하자면... 아미는 탐정 사무소 조수, 아미와 깊은 연을 맺는 것은 탐정은 쿄코이고

거기서 그치지 않고 과거의 연이 있는 다른 캐릭터들도 이야기에 엮여들어가지만 이건 이야기가 아미를 끌어들이는 것에 가깝고. 해메는 케이스케가 후디에라는 해커 그룹에 소속되어 그들과 상호작용하면서 나아가는 이야기라서 스토리 전개의 밀도로만 따지면 해메가 조금 더 드라마틱하다고 생각함.

사슬도 드라마틱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드라마틱은 그냥 전개 자체에서 오는 느낌을 떠나, 각각 요소가 딱 들어맞아서 틈이 없다는 느낌. 이건 이미 사슬로 앞선 이야기를 풀었기에 가능한 전개이기도 하고 (굳이 할 필요 없는 얘기는 해메에서 짚고 넘어가지 않는다는 선택과 집중)

시스템 자체는 전혀 변화한 것이 없는데, 해메는 스토리 자체에 더 온전히 집중하게 된다는 것이. 아마도 아미는 이야기 시작하면서 깊은 관계를 맺는 것이 쿄코로 한정되어 있는데, 해메의 케이스케가 더 많은 이들과 이야기를 중첩해 나아가기 때문인 것 같음 (호감도 이벤트?도 있고

물론 아미도 그렇지만 (사슬 좋아합니다 애초에 같은 이야기니까요) 의외로 몰입하게 만드는 요인에는 플레이어를 얼만큼 그 세계로 끌어들이냐는 요소가 갈리는데, 플레이어블 캐릭터에게 강한 특성을 불어넣어서 아예 스토리 자체에 푹 빠지게 만든다는 선택지도 있기 때문에 ....

그리고 기본적으로 케이스케는 딱 그런 느낌의 캐릭터라고 생각함. 플레이어블 캐릭터치고는 개성이 강하고, 주인공을 하기에는 조금 약함. 하지만 스토리 안에서 제 역할을 하는 데는 충분해서 한 편의 좋은 이야기였다~ 하게 하는 캐릭터. 케이스케 덕분에 다른 애들의 상호작용이 더 잘 보여서 좋음

그리고 사슬에서 계속 강조되어 왔던 가상 세계와 현실 세계의 괴리, 진짜 나는 누구인가? 메시지가 해메에서 더 강조된다는 걸 생각하면... 사슬에서는 아미와 알파몬이 그 얘기를 했다면, (그리고 해결도 둘이 했죠) 해메에서는 케이스케와 에리카가 그 얘기를 하고 있음 (더 강력한 방법으로)

지금 좀 시무룩한 상태인데요, 해메 엔딩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운 이야기가 끝이 난다는 건 어째서 이렇게 슬픈 걸까요.. 거두절미하고 얘기해 보자면, 해메는 사슬과 같은 시간선인데 다른 위치의 인물들을 그리고 있어서 비슷한 듯 다른 얘기를 할 수 있어서 좋았던 거 같습니다. 그리고 아마 사슬 좋아하시는 분과 해메 좋아하시는 분들. 취향 극명하게 갈리실 듯하네요. 평가도 좀 갈릴 거 같은데요?

일단 두 게임 모두 스토리의 플롯이: 경계선에 선 주인공으로 자기 자신을 찾아나가는 것이지만.. 거기에 부차적으로 다른 이들과 엮이고, 세계의 진실과 명운이 관련되면서 다른 느낌의 이야기가 되었네요 (근데 진짜 하부p는 카쿠도 감독을 얼마나 사랑하는 거죠?)

사슬에 대해서는 이미 예전에 얘기한 바 있지만.. 사슬은 전뇌탐정, 즉 단서를 바탕으로 자기 자신을 찾아가고 세계의 진실을 찾아가는 이야기. 그러니까 시작은 타의였다 할지라도 주도적으로 나아가는 주인공이 키워드였고. 또 무엇보다 탐정은 >단서<가 중요한 역할이잖요?

사실 사슬에서 탐정!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단서!라는 부분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작중에서도 알파몬이 아미에게 네 손으로 단서를 잡아라, 전뇌탐정! 이런 대사를 쳤던 걸로 봐서는 중요한 건 단서. 그러니까 즉 ‘파편’을 찾는 게 중요했던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해메의 중요 키워드인 기억은 단서와는 개념부터 아예 다르죠. 기억은 거대한 덩어리로 이미지되고, 파편화된 것들을 끌어모아서 기억으로 만드는 느낌인 데다가.. 무엇보다 기억은 정체성의 기반이라고 봐도 무방하니까요.

평소에도 저는 기억이 자아의 중심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서 (기억상실로 인한 인격 변신!?은 아니더라도 사람이 살아가면서 얻은 경험이 그 사람을 만들어준다고 생각하거든요.) 기억은 사람이 열심히 쌓은 벽돌집이고, 그 벽돌 하나가 빠지면 그 사람의 자아가 와르르 무너질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기억은 파편이 될 수 없는 존재죠, 하지만 해메에서는 파편화된 기억을 붙잡고 사는 친구가 나와요.

에리카는 기억을 서버에 보관하고 있기에 그 애가 파편화된 기억을 붙잡고 산다고 직관적으로 말할 수는 없겠지만, 파편화된 기억이라는 말은 벽돌 하나를 빼면 무너질 수 있는 위험성<<이라는 측면에서 사용했어요. 에리카는 그런 위험성을 갖고 있지요. 사실 케이스케는 에리카를 기억하는 사람, 관찰자로서 나온 케이스라고 봅니다.

단서를 붙잡아서 결국 자기 자신을 되찾고 세계를 구한 사슬의 아미와는 다르게, 에리카는 파편화된 기억을 지키기 위해 결국 자기 자신을 한 단계 바꾸죠. 나비는 호접지몽의 의미도 있겠지만 결국 번데기에서 나온다는 의미도 있을 테니까요. 사슬과 해메의 서사가 진행되는 방식은 방향이 다르다고 생각하고. (단순히 히어로-비히어로 서사 얘기와는 다르게) 그래서 사슬은 대부분의 사람이 음~ 할 수도 있는데 해메는 조금 불편해하는 사람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왜냐하면 이 이야기는 결국 아픈 기억이 나를 성장시킨다는 얘기를 계속하고 있고, 그래야 자기 자신을 붙잡을 수 있다~고 얘기하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사슬 때도 말했지만 사슬도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고 그것이 세상을 구하는 중요한 열쇠가 되었죠. 하지만 사슬은 그 기억을 극복하는 과정을 보여주었는데 (어찌 되었든 그 친구들은 원인 제공자이자 해결사이니까) 해메의 끝은 굉장히.. 가차없지요, 어떤 의미로. 둘 다 엔딩에서 이별을 다루고 있지만, 어떠한 이별은 존재조차 희미해져 버린다는 것이 슬프죠.

보통 사람들은 기억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망각하는 것이고 그게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능력이기도 해요. 에리카의 기억 서버 디자인이 굉장히 흥미로웠는데, 그곳만 구조와 디자인이 아예 다르죠. 에리카 자체가 이 세계에서 동떨어져 있다는 걸 알려주는 것이기도 하고... 2D 배경이 나오면서, 기억이라는 관념의 복잡함과 불가해함을 보여준 거 같기도 해요.

애초에 에리카는 무언가를 잊어버릴 수 없는 사람이니까, 사슬 친구들처럼 잃어버린 기억을 통해 뭔갈 깨닫고 성장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여기서는 사슬에서 한 얘기를 다시 강조해서 얘기하는데.. 결국 떼어낼 수 없다는 거죠. 아무리 슬픈 기억이든 괴로운 과거이든 에리카는 그걸 다 끌어안고 떠나야 했고, 그래서 그애는 떠났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케이스케의 역할이 중요해집니다. 저는 에리카와 케이스케, 두 사람의 특성을 합치면 완벽 주인공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에리카와 케이스케는 커플링적으로도 좋지만(ㅎㅎ) 두 사람이 특성을 나눠가져서 이야기를 더 풍부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재밌었어요.

이 세계는 에리카를 잊어버렸지만. 케이스케는 에리카를 기억할 거라고 다짐하죠. 다짐도 잊히지만.. 그래도 여기서는 케이스케에게 그 역할이 간 거죠. 에리카가 못하는 것, 잃어버린 기억을 수복하고 (수복하지 않아도 좋아요, 그저 그 상실에서 배우는 게 있다면) 한 걸음 나아가는 거 말이에요.

에리카의 와가마마를 억지로 번역한 것도 음~ 스러웠고 (좋은 의미) 또 게임이기에 이렇게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었던 메시지인가 싶고요. 게임은 저장하고 그러면서 시간을 왔다갔다 하잖아요? 이거 사슬 때도 한 얘기 같은데 그러고보니? 그러니 기억과 시간에 관해 말할 수 있는 최적의 형식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그리고 또! 타임라인에서 본 트윗이었는데. 케이스케는 히어로가 될 수 없다고 했지만 에리카에겐 히어로였다. 이 부분. 케이스케가 에리카를 직접적으로 구해준 것은 아니었지만(저는 누구도 에리카를 구할 수 없었다고 생각해요) 에리카가 원하는 자리에 있어 줬다는 것만으로. 어쩌면 에리카의 인생에 뚜벅뚜벅 들어와준 것만으로 그가 에리카의 어떠한 결핍을 채워줬다고 생각해요 (단순히 커플링적 의미가 아니더라도요.) 앞서 말했듯이 에리카와 케이스케의 특성을 합치면! 주인공이 되기 때문에...!!! 메타적으로 보면 두 사람이 있어야 서사가 진행된다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에리카가 케이스케와 헤어지는 것이 결국 이 이야기의 완결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에리카의 몸상태를 고려했을 때, 영원한 해피 엔딩을 그릴 수 없다고는 생각했는데 이렇게 헤어지는 것이.. 정말 슬펐습니다.

그리고 디지몬인 추추몬과 합쳐진 것도. 카쿠도 감독이 말한 디지몬은 인간 영혼의 반쪽.. 이것과 오버랩되어서 그렇구나~ 싶었네요. 더해서, 케이스케가 키운 디지몬들과 저스티몬과 토우몬이 후디에몬을 따라간 것 또한, 케이스케와 류지, 치토세의 영혼의 반쪽이 에리카를 쫓아간 것이니.. 결국 이런 부분에서도 디지몬이라서 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싶습니다.

에리카가 내가 누구인지 고민될 때는, 내가 지금 이곳에 있고 생각하고 있다고 한 말. 이 부분이 정말… 기억이 그 사람의 자아를 담보해준다고 생각하면, 다르게 말하면 기억만 있으면 생판 모르는 사람도 그 사람이 될 수 있는 거잖아요?

하지만 쌓아올린 유대와 관계는 그렇게 함부로 뺏을 수 없어요. 그것은 온전히 에리카가 노력한 것이고. 에리카가 있을 곳, 에리카의 자리가 되어 주었죠. 후디에는 결성되고 유지되면서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누군가에게 위안이 된다는 것이 참 흥미로우면서도 슬프지요.

기억은 완전한 것 같으면서도 불완전한데. 결국 그 불완전함을 보충하는 것 또한 불완전해 보이는 인연이라는 게 (해메에서는 유독 서로의 마음을 믿지 못하고 반목하는 녀석들이 나왔죠 말 안 해도 알겠지만) 역설적이면서도 복잡한 인간에 딱 어울리는 통찰이지 않았나 싶고요.

나 자신을 정의하는 게 타인에 의한 것이라면 조금 위험할 수는 있겠지만 사람은 다면적이고 지내는 사람들마다 다른 모습으로 비치니까요. 그런 부분을 고려해서 보면 그 사람들이 본 내가 총집합적인 나고! 이 부분은 사슬의 엔딩에서 알파몬과 아미의 대담과도 연결되죠.

다만 사슬과 해메의 결말이 달랐던 이유는.. 그 다면적인 것을 취합하여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느냐와, 다면적인 나의 조각을 남겨두고 나 자신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기 위해 떠나느냐가 다르기에 그런 것이겠지요. 앞서 사슬이랑 해메의 방향성이 다르다는 건 결국 이런 느낌이었습니다. 저는 둘 다 매우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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