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을 거스르는 이름
커미션 작업물 | 젤다 | 드림
약 2100자
전쟁은 반드시 상흔을 남긴다.
A는 어두운 낯으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대신전 근처는 전투의 흔적으로 황폐해 있었다. 벽면 여기저기 남은 무기의 잔흔이, 움푹 패이고 그을린 대지가, 그 위에 흩어진 시신의 무리를 그는 보았다. 참담한 심정으로 그는 손을 모으고 하일리아를 향해 기도를 올렸다. 죽은 이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서. 신전의 부흥을 위해서. 그 와중에도 어떤 상념이 자꾸만 머릿속에 끼어들었다.
기억을 되찾고 싶었다. 자신의 머릿속에 문득문득 비어 있는 공백을 메꾸고 싶었다. 한때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누구와 만나 어떤 생을 보냈는지 궁금했다. A가 찾던 답은 분명 거기에 있었다. 하지만 우악스러운 손에 베일이 벗겨지고, 순간의 위협이 그에게 엄습하는 순간 그는 그만 소리를 내고 말았다.
세계를 향한 묵언수행이 허수로 돌아갔으며, 맹약은 깨어졌다. 잃어버린 기억을 다시는 찾을 수 없음을 그는 직감했다.
그렇다면 이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가? 갈피를 찾지 못한 채 A는 한참 동안 눈을 감고 있었다. 그 사이 주변에서 부산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살아남은 이들이 하나둘씩 달려와 시신을 치웠다. 비틀린 팔다리를 끙끙대며 바르게 펴고 들것에 업어 날랐다. 부상자들을 부축해 반파된 신전 안으로 데려갔다. 물을 퍼와 잔불에 끼얹었다. 수습할 인력이 무척 부족했으므로, A는 나서서 그들을 거들었다.
*
시간이 훌쩍 흘렀다. A는 홀로 한편의 천막 아래에 남아 다시금 두 손을 모았다. 흰 천을 덮은 시체들 앞에서 위령 기도를 마치고, 굽혔던 무릎을 펴며 뒤를 돌아보았다. 저물녘의 붉은 빛으로 물든 하늘이 보였다. 누군가 노을을 등진 채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A는 역광을 받은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붉은 눈동자와 문득 눈이 마주쳤다. I였다. 영영 사라져 버린 기억의 파편이 담긴 사람. 그가 무뚝뚝한 얼굴로 걸어와 손에 쥐고 있던 흰 베일을 건네주었다. A는 내내 굳어 있던 입가를 움직여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살짝 숙여 감사를 표했다.
“감사해요.”
“무녀님,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네. 덕분에요. 대신전을 지켜주셔서 감사해요, I 경.”
긴 묵언수행 탓에 소리 내어 말하는 게 못내 어색하게 느껴졌다. A는 양손으로 베일을 꼭 쥐었다. 베일에 물기가 약간 배어 있었는데, 흙바닥을 뒹굴던 것을 대강 씻어낸 듯했다. 그 사이 I가 진중한 시선으로 A를 훑어보았다. 머리칼이 흐트러지고, 백색의 옷에는 흙먼지가 묻었으나 신전기사단의 호위 덕에 크게 다친 곳은 없었다.
“…다행이군요. 저는 다시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럼.”
I가 작은 목례를 끝으로 등을 돌렸다. 단단한 체격이 절도 있는 동작으로 몇 걸음 멀어졌을 때, A는 문득 그를 불러세웠다.
“저, 저기…!”
걸음이 멈췄다.
“당신에게 나의 이름을 알려주고 싶어요! …들어 주시겠어요?”
I가 석양을 등진 채 고개를 틀어 A를 돌아보았다가, 천천히 몸을 돌려 걸음을 물렸다. 어둑한 초저녁의 하늘에 저무는 햇빛만이 고요히 사위를 밝혔다.
그가 훌쩍 눈앞에 당도했을 때, A는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모두가 한창 정신없을 때이니 그를 찾는 이도 무척 많을 것임을 안다. 그럼에도 전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그에게만은 꼭 알려주고 싶었다.
“바쁘신데 죄송해요. 당신께는 꼭 알려드리고 싶어서….”
“아뇨, 괜찮습니다. 말씀하십시오.”
I가 답하자, A는 머뭇대며 그의 낯을 바라보았다. 붉은 눈동자를, 어떤 일이 있어도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견고한 표정을 보았다. 마음을 굳히며 양손에 든 베일을 더 힘주어 잡는다.
더는 잃어버린 기억을 찾지 못할 것이다. I와 자신에 대해, 세계의 이면 속으로 사라진 기억을 A는 영원히 알지 못할 것이다. 약속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르고, 정해진 결말은 결코 번복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는 I가 뒤돌아 멀어지는 짧은 사이, I에게 손을 뻗기로 결심했다. 휘청이는 뱃머리에서 닻을 내리듯. 그리하면 일말의 조각이나마 건질 수 있는 것처럼.
“제 이름은… A예요.”
시선과 시선이 얽힌다.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한 초저녁 밤의 서늘한 공기가 드러난 피부에 닿는다. 매캐한 냄새가 섞인 바람에 반쯤 풀어진 머리카락이 흩날린다. 무감히 응시하던 눈동자에 드물게도 당황이 서린다.
세계의 인과를 거스른 기억이 그리운 향취를 머금고 제자리를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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