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로 된 로봇답게 행동해

종뱅 / 근미래 기담

불쌍한 꼬마 종수를 기억하시나요? 모두에게 사랑받는 아이였지요. 끝없는 환상을 주는 아이였어요. 종수는 일곱 살의 나이로 은막에 데뷔해서, 바로 우상으로 떠올랐습니다.

잠깐 빛나다가 사라지는 아역들과는 어딘가 달랐습니다. 종수는 기자들의 카메라 앞에서 아주 초연하게 보였어요. 스크린에 거대한 이미지로 비칠 때도요. 그 태도가 사람들의 이목을 사로잡고, 심장을 뒤흔들어놓기에 충분했을 것 같네요. 곧 우상의 자리에 올랐거든요. 그러니까, 살과 피가 있는 우상이요. 그리고 꽤 여러 해를 우상으로 지냈어요. 그때까지는 모든 게 좋았죠.

누가 그랬던가요, 현대인은 살과 피의 우상을 숭배한다고. 살과 피의 우상이 그들을 만족시키지 못하면 목을 자른다고.(다행히 종수의 목은 멀쩡했지만요.) 어쩌면 종수가 당한 건 신성모독이었을지도 모르겠네요. 공식적으로는 영화 촬영 중에 생긴 사고였습니다. 손쓸 수도 없이 순식간에 불타올라서, 목숨만 겨우 건졌어요. 특수 분장을 하지 않아도 특수 분장을 한 것 같은 모습이 되어버린 거예요. 관계자들은 뭘 하고 있던 걸까요?

사고가 고통스러웠던 것처럼 추락의 과정도 길고 고통스러웠습니다. 열렬한 숭배자의 수만큼, 우상을 끌어 내려서 침을 뱉고 밟아 짓뭉개고 싶어하는 사람도 많았어요. 그저 우상으로서 숭배받아 왔기 때문에.

활동하지 않는 사이에 치료와 재활 과정을 소셜 미디어에 중계하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었던 것 같았습니다. 결과적으로는 돌파구가 아니라 악수였어요. 도마 위의 고깃덩어리로 내던져진 셈이었죠. 종수는 아직도 기억합니다. 미디엄 레어가 된 건지, 아니면 미디엄 웰던이 된 건지 물어보던 누군가의 조롱을요. 그 외에도 여과되지 않은 반응들은 너무나도 많았습니다. 은퇴하고 칩거에 들어간다는 선택을 할 정도로 치명적이었어요. 그리고는 더욱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가지고 있거나 누릴 수 있었던 여러 가지도 포기했죠. 자살 시도요? 몇 번이었을까요?

어쨌든 지금은, 사람들의 관심에서는 멀어졌지만 종수는 잘 살고 있어요. 종수를 이해해 주는 너그러운 연인과 함께요. 더는 변덕스럽고 잔인한 반응에 휩쓸리지 않아도 돼요.

결국 미디엄 웰던이 된 거 아니냐고? 너 어디 사냐?

* * *

원한다면 얼마든지 사람의 기억과 의식을, 인격을 최신형 칩셋에 이식할 수 있다. 거추장스러운 원래 몸뚱이에서 벗어나 기계 몸으로 살아갈 수 있다. 유지와 관리만 잘 된다면 영생도 가능할지 모른다. 참으로 편리하게도.

최종수는 이미 그렇게 살고 있다. 애인 한 명, 더미 하나와 함께. 우연히 길에서 최종수를 발견했다고 상상해 보라. 까맣고 복슬복슬한 동물 인형을 안고 있는 장신의 남성을.

다가가서 그에게 현학적인 주제, 이를테면 자아의 연속성과 동일성 같은 이야기를 건네 보라. 예의바르지만 냉담한 반응이 돌아올 것이다. 최종수 자신의 솔직한 견해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는다. 인형이 정확히 토끼인지, 고양이인지, 혹은 다른 무언가인지 물어 보더라도 마찬가지다.(이건 그냥 변덕이다. 고양이 인형이 맞다.) 티타늄 뼈대를 덮은 인공 털가죽이 방염 재질이라는 것도.

그리고 최종수의 반응은 품에 안긴 인형으로부터 나온다. 스피커가 달려 있어 성인 남성의 목소리로 말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인형이 본체, 남자가 더미다.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본다면, 동심원이 새겨진 회색 눈동자 네 개도 당신을 빤히 쳐다볼 것이다. 본체 인형과 더미, 둘 다. 더미의 실리콘 피부는 유리처럼 매끈하고 그 이목구비는 이질적일 정도로 완벽하다. 어쩌면 최종수가 가졌던 원래 모습보다 더욱.

최종수와 더미는 대개 무선으로, 가끔은 유선으로 연결되어 있다. 최종수가 더미를 제어한다. 더미는 본체를 들고 외출하거나 집안일을 하고, 때론 애인을 만족시켜 주기도 한다.

다시 상상해 보라. 침대 위에는 두 남자가 엉켜 있고 협탁 옆 안락의자에는 인형이 놓인, 안락한 광경을. 앞뒤로 왕복하는 허리의 움직임과 인형이 꼬리를 까딱거리는 리듬은 거의 비슷하다. 숨을 헐떡이며 열락에 찬 신음을 내는 건 한 사람뿐이다. 두 살 연상의 애인.

암전, 그리고 다시 용명. 굴 껍질의 안쪽 같은 하얀 색이 퍼진다. 여운마저 사라지고 나면 더미를 갈무리해 둔다. 잘 씻어서 물기를 닦고, 파자마를 입혀 안락의자에 앉힌다. 이건 최종수의 애인이 하는 일이다. 그의 이름은 박병찬이며, 조금 더 이전에는 간병인 겸 비서로 이 집에 있었다. 타인을 돌보는 데 익숙한 손놀림은 더미의 뺨을 타고 흐르는 물방울을 닦아 낸다. 어째서인지 박병찬은 그것이 눈물처럼 보인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대수롭지 않은 일이다.

“올려 줘.”

  

최종수는 짤막한 팔다리를 움직여, 박병찬의 발치로 다가온다. 무언가 원하는 게 있을 때면 귀를 쫑긋거린다.

“어허. 올려 주세요, 해야지. 종수야.”

“싫어. 올려 줘.”

“우리 종수, 싸가지는 어디에 버리고 왔을까?”

“태워먹었는데?”

둘에게 이런 농담은 익숙하다. 그 다음으로 박병찬이 해야 할 일도 정해져 있다. 최종수를 들어 올려서 침대에 눕히는 것. 그리고 그 옆에 함께 누워 잠드는 것.

“내일 상담 가는 거 잊지 말고.”

“…너도 같이 갈 거잖아.”

기계 몸은 잠들 수 없더라도, 굿 나잇, 종수. 굿 나잇, 더미.

시대가 발전해도 여전한 것들은 여전하다. 예를 들자면 어린이 과학 그리기 대회의 단골 소재, 돔으로 둘러싸인 해저 도시나 월면 기지. 인간에게 반항하는 기계들에 대한 막연한 공포 등등.

외출에서 돌아온 최종수와 박병찬이 맞닥뜨린 사건은 후자에 가까웠다. 분명히 외출 전에는 얌전히 거실에 앉혀 두었던 더미가, 돌아와 보니 사라지고 없었던 것이다.

“해킹당한 거 아니야?”

최종수가 고개를 저었다. 움직이는 서슬에 인조 감각모가 파르르 떨렸다.

“아냐. 그건 나하고만 연결돼 있어. 공개 통신망에 접속시킨 적도 없고.”

박병찬은 최종수를 거실에 내려놓고 집안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단정하게 개켜진 파자마가 침대 위에 올려져 있었다. 더미에게 입혀 놓았던 파자마였다. 귀중품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티셔츠와 청바지, 재킷 같은 평상복 몇몇이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가 갈아입혀서 가져간 걸까? 현관으로 가 보니 신발 한 쌍도 없어진 채였다.

“봐, 종수야. 다른 건 다 제자리에 있는데, 옷가지만 없어졌다. 더미한테 입혀 뒀던 파자마만 저기, 저렇게….”

최종수가 성큼성큼 걸어오던 박병찬의 정강이에 부딪혀 나동그라졌다.

“아이고, 미안.”

“나, 잠깐만 들고 있어줘. 현관문 손잡이 앞에.”

바닥에서 일 미터보다 조금 더 위에 들려진 최종수는, 맞은편의 현관문 손잡이를 빤히 바라보았다. 동심원들이 제각기 빠르게 돌았다. 매끈하게 처리된 금속 표면의 색과 같은 눈동자 색. 최종수를 이루고 있는 뼈대의 색. 칩셋 회로의 색.

“다른 사람 지문은 안 보여. 누가 들어왔다 나간 거 같지도 않아.”

“너 그런 기능도 있었어?”

“흥.”

최종수는 꼬리를 위아래로 꿈틀였다.

“바이러스도 아니지, 해킹도 아니지. 사람이 드나들면 티가 나는데 그것도 아니지.”

“더미에 네 옷만 걸쳐서 사라졌고.”

둘의 집에는 홈 카메라를 설치해 두지 않았다. 카메라라면 아무튼 진절머리가 난다는 최종수의 고집 때문이었다. 안 그래도 인생의 많은 시간을 카메라 앞에서 보내 왔다고.

“…경찰에 도난 신고는 해 두자.”

“그건 싫어.”

“그러면 어쩌게.”

여전히, 최종수는 타인의 시선에 민감하다. 그럴 때마다 박병찬은 사람들이 그를 기억하기를 원하는 건지, 아니면 잊어버리기를 원하는 건지 모르겠다고 생각한다.(그리고 이 의문을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싸움이 난다. 현명한 사람은 말을 아끼는 법이다.)

“찾으러 가자. 저게 걸치고 간 거, 내가 산책할 때 자주 입던 거야.”

“뭐야, 더미가 스스로 움직여서 가출이라도 했다는 거야?”

박병찬은 웃었지만, 최종수는 웃지 않았다.

“아무래도 그런 거 같아.”

바야흐로 장르가 홈 비디오에서 초자연 호러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열린 문으로 잘못 나간 로봇 청소기는 귀여운 일화지만, 자의식이 생길 리가 없는 사물이 스스로 말하고 움직이기 시작하면 일상의 파국이다.

옛날, 속눈썹이 길고 아래 뺨이 통통했던 꼬마 종수는 리얼리티 쇼 프로그램에 출연한 적이 있었다. 어른들의 도움 없이 멀리 심부름을 다녀오는 종수. 곤경에 처해도 울지 않고 침착한 종수. 누구에게나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말하는 종수. 그 뒤를 카메라와 각종 촬영장비를 든 어른들이 뒤따랐다….

연예계와 멀어진 어른 최종수도 울지 않는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기계 몸에는 그런 기능을 일부러 넣지 않았으니까. 화상으로 녹아내린 두피에 인격 데이터 수집용 전극을 꽂고 있을 때, 최종수는 이미 결정을 내렸다.

대신 망상과 통찰의 사이에서 최종수는 박병찬을 이끈다. 어린 시절처럼 등을 곧게 펴고, 고개를 들어올려 시선을 맞추고, 한 마디를 더한다.

“머리 위에 올려 주면 안 돼?”

“종수야, 나한테도 체면이라는 게 있거든?”

“난 그런 거 몰라. 올려 줘.”

“에라이….”

길거리의 어느 가게나 식당을 가든 로봇이 있다.(무언가 색다른 걸 기대하며 방문하는 파인다이닝 레스토랑 같은 곳이라면 모를까) 고도의 인공지능이 탑재된 종류는 아니고, 여전히 단순 업무만 할 수 있는 종류다. 그러니까 커피를 사는 김에 가출한 더미에 대해 물어볼 수는 없는 것이다. 저기, 저희 집 가전제품이 집을 나갔는데요, 혹시 보신 적 있으신가요….

하지만 최종수의 더미는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었다. 둘의 집 근처 카페, 야외 테이블에 우두커니 앉은 채로. 평소에도 종종 들르던 곳이었다. 로봇 점원에게는 쓸데없이 알은체하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었으므로.

“뭐야. 저기 있었네. 이 거리에서 무선 연결 돼?”

박병찬의 어깨 위에서, 최종수가 양 귀를 쫑긋거리며 짤막한 팔을 쭉 내뻗었다. 발바닥에 붙은 검보라색 육구가 함께 움찔였다.

“아니, 안 먹혀. 원래는 됐는데… 완전히 차단당한 느낌이야.”

둘의 말소리가 들렸는지, 더미가 고개를 들고 이쪽을 빤히 쳐다보았다. 무기질적인 회색 눈동자와 박병찬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러자 더미는 일어나서 어딘가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마치 따라오라는 것처럼.

사실 박병찬은 이 소동을 기계의 오작동이거나 교묘한 스토킹쯤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어느 쪽이든 당혹스러운 일이지만 제조사의 서비스 센터나 경찰을 찾아갈 일이지, 초자연적인 무언가가 있다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저 평소처럼 최종수를 잘 달래서 상식적으로 대응하면 될 일이라고 보았다. 전혀 아니었다.

그런데도 현실감은 잘 느껴지지 않는다. 심장이 멎을 듯한 놀라움도, 척추를 타고 내려오는 섬뜩함도 없다. 이렇게나 기묘한 일을 겪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단 따라가 보자.”

대답 대신 최종수는 박병찬의 뒤통수에 달라붙었다.

“…거긴 잡아당기지 마. 두피 당겨서 아파.”

박병찬이 한 걸음씩 옮길 때마다 더미도 같은 속도로 움직였다. 발걸음을 멈추면 더미도 그 자리에서 멈추고 뒤돌아보았다. 그렇게 한참을 걸었다. 더미는 작은 상점들로 들어찬 거리를 지나, 고가 철도가 드리운 그림자 아래로 향했다.

이제 최종수와 박병찬도 더미가 자신들을 어디로 인도하는지 알 수 있었다.

두 사람이 동거를 시작하고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사소한 일로 대판 싸웠고, 욕설과 모욕과 비난이 오갔고, 서로를 한껏 경멸하며 소강 상태에 들어갔다. 그러던 중 최종수는 더미와 함께 집을 나갔다. 나중에 박병찬이 시무룩한 최종수를 찾아낸 곳은 어딘가의 폐건물 안이었다. 건설업체의 부도 때문에 그대로 버려진 고층 건물. 아직도 사업자와 소송 중이라 철거 명령도 건축 허가 취소도 나오지 않는 과거의 흉물. 층층대를 올라가고 또 올라간 끝에, 박병찬은 쓰레기 더미 위에 앉아 있던 최종수와 더미를 발견할 수 있었다. 건물 전면이 창문 없이 뚫려 있어서, 금방이라도 몸을 일으켜 허공으로 발을 내딛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지금도, 더미는 예의 그곳에 있었다. 치워질 일 없는 쓰레기 더미 앞에 서서. 숨을 몰아쉬는 박병찬의 앞에서 보란 듯이 투명한 액체를 자신의 몸에 들이부었다. 가연성 물질 특유의 코를 찌르는 냄새가 났다. 헝클어진 까만 머리가 푹 젖어 더미의 이마에 달라붙었다. 속눈썹 끝에 맺힌 액체가 눈물처럼 방울졌다. 체액처럼 기능하는 인공 액체는 분비할 수 있지만, 더미는 울지 못한다.

더미는 말할 수 없다. 박병찬과 대화하고 더미의 몸체를 조종하는 건 최종수의 역할이다. 그래서 더미는, 사람의 염(念)과 정(精)에 오랫동안 노출된 끝에어느 날 자의식이 깃든 더미는, 자신의 마음을 깨달은 더미는, 결코 최종수 본인이 될 수 없는 더미는, 자신이 없어지는 게 더 낫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쓰레기 더미를 뒤로 하고 앞으로 몇 발자국 더. 더미는 쓰라린 눈으로 박병찬을 바라보며 웃었다. 박병찬은 그게 무엇인지 알아보았다. 사랑에 실패했다고 확신하는 사람의 눈이었다.

더미는 소리 없이 입술을 달싹인다. 나는 더 좋은 연인이 되어 줄 수 있는데, 그럴 수가 없네. 네 곁에 나로서 있을 수도 없어. 유감이야…. 정말로, 정말로 유감이야. 내가 타들어 간 다음에도 움직이면 때려서 부숴 줘. 재는 여기에 남겨 놓고 가. 네 마음 속에 남지 않으면 의미가 없을 테니까.

더미는 망설임 없이 성냥을 꺼내들고 불을 그어 당겼다. 극단적으로 살아있는 열기가, 매연이 엄습해 왔다.

박병찬은 반사적으로 최종수를 끌어안고 몸을 움츠렸다. 잠시 후 숙였던 고개를 들고 눈을 뜨자 더미는 이미 불타는 덩어리가 되어 있었다.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가, 그대로 힘없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재와 연기는 모두 무채색. 바람을 타고 어디론가 흩어져 버린다. 더미의 흔적도 아마 그럴 것이다. 어떤 마음은 덧없으며, 한순간에 무가치하고 허망하게 사라져 버린다. 보답받을 수도, 누군가가 알아 줄 수도 없다. 

  “…돌아가자.”

 최종수는 박병찬의 앞머리에 날아와 붙은 잿가루를 툭툭 쳐서 떨쳐냈다. 

  공연은 여기서 끝이다. 안녕, 더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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