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부하지 않은 첫사랑 이야기를 아세요?

배타미송가경

() by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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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시선을, 정확하게는 시선뿐만이 아니라 관심 혹은 그 어떠한 것이든 순간에 발생하는 끌어당기는 힘이 어쩌면 중력처럼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중력도 지구가 물체를 끌어당기는 힘이니 속성은 흡사하지 않나. 우리는 매번 누군가에게, 적어도 이 지구에게 끌어당김을 당하며 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하게 자신의 시선을 단번에 가져간 유니콘 메인 화면에 혹하듯 넘어가 세 번의 면접 끝에 입사했으나 삼 년이 지날 때부터는 연차를 세어보기는커녕 꽤 비슷한 날들이 반복되어 심드렁해지고 있었다. 중력은 평생 남아 있는 성질 아닌가. 이 마음을 끌어당기는 힘의 유효기간은 언제까지일까. 중력과도 같은 일이니 평생일까. 그렇다고 하기에는 여전히 메인 화면은 예뻤고 일에 자신감이 붙었지만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어제 같은, 늘 그렇고 그런 날에 힘이 빠지고 있었다. 물론, 저를 포함한 직장인들은 다 이렇다고 스스로를 위안 삼은 지도 꽤 된 것 같았다. 대한민국 직장인들 빡빡해서 어떻게 사는 거야. 물론 더 큰 문제는 이렇게 삼십 년은 더 살아야 한다는 거다. 로또 안 되나. 아니다. 지금이야. 망해라, 지구.

그러면서도 맡은 업무를 갈무리하고, 묘하게 차분하지 않고 둥둥 떠다니는 분위기가 만들어지면 연말이 다가왔음을 실감할 수 있다는 게 참 신기했다. 이것 역시 묘한 힘이라고 여겨지기도 했다. 외부적으로는 나의 생일도, 너의 생일도, 또 누군가의 생일도 아닌 예수의 생일인 크리스마스가 십이월에 있었지만 연말이나 크리스마스 자체보다는 그 날짜에 가까워질수록 느낄 수 있는 설렘이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고 있음이 분명했다.

물론, 내부적으로는 십이월 초가 되면 올라오는 승진 및 직위 변경 명단이 상기된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일조했다. 이게 행복한 연말이 맞나. 승진을 한다 한들 그 자리를 지키고 조금 더 조직을 이끌어가야 하나는 책임감이 짙어질 테고, 승진이 되지 않으면 다음을 기대해야 한다는 실망감과 아쉬움은 누가 이해해 줄 수 있을까. 그래.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이야. 망해라, 지구.

오 마이 갓. 아니, 나무관세음보살. 승진을 했다. 하반기에 들어서며 예상하지 못 했던 가경의 인사 발령으로 인해 갑작스럽게 생긴 팀장 자리의 공석을 두 눈 뜨고 볼 수 없어 팀장의 부사수였던 자신이 틈틈이 그 역할까지 다 하느라 진이 빠졌던 하반기를 보상받는 느낌이다가도 단단히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일은 재미있고, 자신과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자신이 한 단계 올라갈수록 기다리지 않고 똑같이 한 단계 올라가는 가경을 따라잡을 재간이 없었다. 가경의 위치와 능력을 따라잡고 싶은 게 아니었다. 그럴 생각도 없었고, 어쩌면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치기어린 입사 초반에나 가경과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생각했지, 지금은 가경과 오래 일하고 싶었다. 이런 마음이 무색하게 물리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멀어지는 느낌은 자신이 붙잡을 수 없을 만큼 커져 있었다. 가경의 가까이에서 같이 일하고 싶었는데 이는 더 이상 쉬운 일이 아닌 게 되어버렸다.

승진 공고가 인트라넷에 올라오자마자 몰려든 축하는 곧장 그날 저녁 회식 자리로까지 이어졌다. 승진은 내가 했는데, 왜 지들이 술은 더 마시고 지랄이야. 초반부터 축하와 함께 빠르게 삼켜낸 소주는 타미의 귓가까지 올라와 얼얼해지는 기분이었다. 내가 승진하는 게 싫었으면 말로 해, 얘들아. 웅얼거리는 타미의 목소리는 그저 허공으로 흩어졌고 한참 부어라마셔라 하던 영우가 총대라도 맨 것처럼 고개를 가까이 끌고 왔다. 어우, 야. 부담스러워. 좀 멀리 가. 술을 마셔도 적응이 안 돼요, 얘는.

차장님. 아니, 팀장님. 팀장님도 혹시 첫사랑 있으세요? 영우의 물음에 타미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니네가 중고딩도 아니고 무슨 첫사랑 타령이야. 차라리 소고기를 더 시키겠다고 해. 언제적 첫사랑을……. 기억 안 나, 죽었어. 그렇게 말하며 뜨끈하게 올라온 두 볼을 손등으로 꾹 누르고는 영우를 흘기듯 바라보면 영우가 눈썹을 까딱이며 누군가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타미에게 틈틈이 쓸데없는 수작이나 부리는 영훈에게 대충 신호를 보내는 것 같았다. 이럴 때 보면 중고딩이랑 다를 게 없는 것 같다니까. 

"아니, 이렇게 일만 열심히 하셔도 첫사랑은 있을 거 아니에요. 이럴 때 아니면 저희가 언제 듣겠어요."

"…… 저기 온다."

타미의 시선이 다시 한 번 식당 입구 쪽에 걸렸다. 그래, 어쩌면 마음을 끌어당기는 힘 역시 없어지지 않을지 모를 일이었다. 또 시선이 흘렀다. 유니콘 메인 화면에 넘어갔던 것처럼, 처음 입사하자마자 가경을 봤을 때처럼.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은 당연하듯 타미의 시선이 가경에게 걸리지 않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마음이 끌려가는 일은 중력과도 같은 일이라는 공식이 다시 한 번 맞춰지고 있었다.

진부하지 않은 첫사랑 이야기를 아세요?

배타미 송가경

* 해당 글은 익명으로부터 무료 커미션(이라고 쓰고 내기)을 받고(에 져서) 작성된 글입니다.

** 미리 메리 크리스마스! 미리 해피 뉴 이어!

타미의 목소리에 팀원들의 고개가 자연스럽게 식당 입구 쪽으로 돌아갔다. 타미의 시선 끝에 걸린 사람은 가경이었다. 가경이 대수롭지 않게 코트를 벗으며 타미의 옆자리로 비집고 들어오는 사이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타미는 자신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은 가경의 허벅지를 자신의 손바닥으로 토닥이며 눈썹을 까딱였고, 가경은 미세하게 표정을 구기며 뜨끈해진 손을 떼어냈다. 가경의 손이 차가웠다. 가뜩이나 몸도 차가운 사람인지라 겨울에는 쉽게 녹지도 않는다는 걸 알고 있다는 사실을 핑계 삼아 그 손끝을 엄지와 검지로 꽉 잡았다.

본부장님, 지금 배 차장님…… 아니지, 배 팀장님 첫사랑 이야기 듣는 중이었습니다. 야, 조용히 안 해? 가경이 자연스럽게 타미의 잔에 채워진 소주를 털어 마시며 꽤 흥미롭다는 듯 타미에게 시선을 두었다. 나도 궁금하네, 그 이야기는. 가볍게 툭 던지는 가경의 목소리가 왜 이렇게까지 얄밉게 느껴지나 싶어 손끝만 부여잡고 있던 손을 풀어 깍지를 끼면 굳이 밀어내지 않는 가경의 의중이 궁금해졌다. 하지만, 얄미운 영우와 가경의 대화에 입술을 꽉 한 번 깨무는 사이 자연스럽게 맞잡은 손이 풀려 엉켜가던 생각의 끈 역시 탁 풀려버렸다. 물론, 가경이 스스로 손을 풀었다고 하기에는 쓸데없이 과음을 하는 회식 문화의 영향력이 꽤 컸지만. 본부장님, 잔 받으십쇼! 여전히 죽을 것처럼 마시는 회식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도 않았지만 하필 눈치도 없이 병을 들고 다가오는 사람이 영훈이라는 사실 때문에 타미의 표정이 구겨졌다. 그러다가도 가경이 짧게 혀를 차는 소리가 들리자 타미는 턱을 괴고 그 모습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술을 따르던 영훈이 타미와 눈이 마주치자 바보 같은 놈이 따라서 웃었다. 네가 마음에 들어서 웃은 게 아니라 네가 수작 부리는 걸 알고 있는 송가경의 반응이 마음에 들어서 웃은 거라고는 차마 말하지 못 하고 잔부터 부딪혔다. 본부장님도 오셨으니까 다시 한 번, 짠!

가경이 합류하자 다시 시작된 회식은 금세 불이 붙어 시끄러워졌다. 얘네는 지치지도 않나 봐. 나 벌써부터 세월 차이 같은 걸 느끼고 싶지는 않은데. 같은 테이블에 있던 영우와 영훈도 동기들 틈에 들어가서 고주망태가 되어가고 있었고 그나마 천천히 마시고 있던 은정이도 화장실을 갔는지 사라지고 없었다. 그리고, 타미의 옆에 앉아 있는 가경은 고기를 먹는 둥 마는 둥이었다. 원래도 테이블에 깔린 안주는 손도 대지 않고 술만 마시는 사람이라지만 이럴 때 아니면 언제 먹는다고. 물론, 선배 카드가 긁히겠지만. 타미는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뜨며 술이 채워진 가경의 잔을 제 입에 털어넣고 타들어가기 직전의 고기를 가경의 앞접시 위에 올렸다. 술만 마시지 말고요. 작게 웅얼거리는 목소리에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던 가경이 타미가 마시던 잔에 술을 채워서 끌어오며 시선을 맞춘다.

"이야기는 왜 안 해 주는데?"

"무슨 이야기?"

"첫사랑 이야기 중이었다며."

선배도 그런 이야기가 궁금해요? 의외다. 타미는 그렇게 말하며 가경이 마시던 잔에 다시 술을 채웠다. 궁금해지게 만든 사람이 누군데. 타미는 가경이 이렇게 대답할 때마다 좋았다. 정확하게는 그 당연함이 자신에게 꽂히는 게 좋았다. 배타미라서 궁금할 수밖에 없다는 듯 말하는 저 어투가 너무나도 좋았다. 가경이 타미가 마시던 잔을 계속 사용하려는 듯 다시 술을 채웠다. 고기 먹으라니까, 선배. 타미는 술이 좀 깬다 싶다가도 다시 알코올을 들이키니 확 올라오는 취기에 입고 있던 두툼한 터틀넥의 목 부분을 얼굴까지 끌어올렸다. 취기로 인해 여전히 얼굴이 후끈한데 고기 불판의 열기까지 더하니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열기라도 막자는 생각이었다. 그러고 있으니 하얀 얼굴에 눈만 보이는 타미를 바라보던 가경이 다시 한 번 술을 들이키고는 고개를 살짝 숙여 타미의 목 부분에 손가락을 걸고 슬쩍 내려 뜨끈해진 볼을 손가락으로 쓱 쓰다듬는다. 손가락 끝에 닿는 볼이 뜨끈했다. 너 그만 마셔야겠다.

가경이 술을 마실 때마다 튀어나오는 버릇, 정확하게는 타미의 기준에서 자신에게만 하는 버릇이 하나 있다면 깜빡이도 켜지 않고 둘 사이의 거리를 확 좁히는 횟수를 늘리고는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딱 지금처럼. 타미는 알겠다는 듯 고개만 주억이고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 한 채 눈을 굴렸다. 이 선배는 이럴 때마다 더 취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다는 건 알까. 속으로만 중얼거리며 몇 번 더 잔을 채워서 술을 마시는 가경을 빤히 바라보는 것이 타미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가경을 보고 있노라면 입사하기 전에 유니콘의 메인 화면에 시선을 빼앗겼던 기분과 유사한 마음이 들어 마음이 울렁거렸다. 가경은 유니콘을 자신만큼 좋아했으니 가경의 그 마음을 좋아하지 않는 방법이 있었을까. 처음에는 그 마음을 좋아했다. 유니콘을 좋아하는 송가경의 마음.  물론, 업무적인 경험치와 유니콘에 대한 애정도가 켜켜이 쌓일수록 유니콘만큼 가경이 좋아진 것은 꼭 정해져 있는 일처럼 느껴질 만큼 당연했다. 그래서 가경이 당연하게 자신의 옆에 타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또 울렁거렸고, 그 어투에서 코라도 박고 울고 싶었다. 애타는 것처럼 뒤흔들리는 울렁거림을 멈추고 싶었다.

 울렁거림을 멈추기 위해 저녁 같이 먹지 않겠냐, 커피 마시러 나가는 건 어떠냐, 주말에 뭐 하냐, 영화 좋아하냐……. 수도 없이 물음표를 던졌지만 반응도 하지 않고 있다가 한 번씩 훅 당기는 사람이 가경이었다. 지구가 늘 우리를 당기고 있다고 믿고 있지만, 한 번씩 이론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예외 현상이 발생해서 모든 언론에서 떠들어대고 과학자들이 놀라는 것처럼 저런 수많은 질문 끝에 가경이 택했던 것은 딱 한 마디는 타미에게 있어 예외 현상이라고 해도 다를 바가 없을 만큼 놀라웠다. 주말에 시간 괜찮으면 드라이브 갈까. 진짜 열받아, 송가경.

그 이후로 생일이나 상술이라고 불리는 기념일을 챙기는 것은 물론이고 먼저 손을 잡는다거나, 슬쩍 날이 춥다는 핑계로 품에 안긴다거나 하는 일들이 잦아졌다. 지난 회식 때는 미쳤다고 먼저 뽀뽀도 한 것 같은데 이제 더는 정말 당겨지지 않는 사람은 가경이었다. 물론, 밀어내지도 않았다. 좋다는 건지, 싫다는 건지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있는 그대로 타미를 받아 주고 있는 사람이었기에 더 이상 나아갈 수도, 멈출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선배, 아까 그 첫사랑 이야기 있잖아요."

"진짜 있긴 했나 봐?"

"내 나이가 몇인데."

"나이랑 상관이 있나."

  

예전에는 처음 좋아했던 사람이 첫사랑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첫 짝사랑에 가까운 것 같아요. 뭣도 모르고 두근거림 하나로 버텼거나 혹은 너무 운이 좋게 서로 마음에 들어 모든 걸 다 쏟아냈지만 미성숙해서 힘들기만 하잖아요. 내 첫사랑은 그 모든 걸 다 겪은 다음에 제일 좋아하는 사람인 것 같아요. 생각보다 깊게 생각했네, 배타미. 선배는 대체 나를 뭘로 생각하는 거야, 진짜. 그런데 애들이 일만 이렇게 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첫사랑을 계속 묻는 거예요. 응, 그래서. 그런데 그 타이밍에 선배가 딱 들어오는 거야. 응. 그래서 내가 뭐라고 했는 줄 알아요? 뭐라고 했는데. …… 저기 온다. 타미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가경이 잔에 다시 술을 채웠다. 싫은 건가 싶어서 타미는 끌어올리고 있던 니트의 목 부분을 다시 끌어내리고 저 역시 잔을 찾았다. 

"진부하죠. 원래 첫사랑은 다 진부하잖아."

"전혀."

"응?"

가경은 타미의 되물음에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벗어둔 코트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담배를 찾는 것 같았는데,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던  타미가 느릿하게 따라 일어나 가경의 코트를 챙겨 식당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도 바람 좀 쐬고 오게. 식당 곳곳에 애들이 잠들어 있거나 누가 봐도 술에 꼴았다는 표현 말고는 어울릴 수 없는 상태인지라 슬슬 정리가 필요할 것 같기도 했다. 식당 뒤편으로 걸음을 옮기면 타미가 가경의 양쪽 코트 주머니를 한참 뒤적여 담배를 찾을 때까지 가경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가만히 기다렸다. 그리고는 담배를 하나 꺼내서 입에 물며 한 걸음 정도 떨어지는 모습까지 타미는 그 모든 게 얄궂다고 생각했다. 기다리긴 왜 기다리고, 떨어지기는 왜 떨어지냐고. 의중을 알 수 없는 뜻밖의 다정함에 이 모든 중력을 얼마나 거스르고 싶어지는지 모르겠지.

가경이 담배 연기를 내뱉을 때마다 그를 따라 타미도 크게 숨을 내뱉었다. 코끝에 머무는 알코올 향에 머리가 크게 흔들리는 것만 같았다. 내일이 주말이라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타미는 등지고 있던 벽면에서 떨어져 자세를 고쳐 잡았다. 와, 아직도 나한테 바닥이 축하한다고 악수를 하네. 누가 축하를 이렇게 죽을 때까지 해. 타미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며 말을 이었다. 애들 택시 좀 잡아 주고 보내야겠다.

그러자 담배를 마저 피우던 가경이 꽁초를 바닥에 버리고 굽으로 짓밟으며 취기와 졸음에 눌려 모든 행동이 느려진 타미의 손목을 잡았다. 너도 집에 가야지, 배타미. 여전히 차가운 손가락이 뜨끈한 살결 위를 감싸자 소름이 돋는 것만 같았다. 가경이 앞장 서서 나오는 통에 타미가 끌려서 나오는 듯한 모양새가 낯설기도 했지만, 지금처럼 가경이 가지고 있는 마음의 힘에 속수무책으로 끌리고 싶었다. 진짜 중력도 아닌데 방향이 바뀐다고 세상이 뒤집어지겠어? 식당 뒤편에서 벗어나 널브러진 팀원들을 한 명씩 택시에 태우기 시작하면 영훈을 영우와 함께 가경이 직접 택시에 밀어 넣는 모습이 꽤 웃기다고 생각했다. 저럴 때 보면 다 큰 어른은 아닌데, 저 선배도. 마지막 한 대를 보낼 때쯤 가경이 허리를 숙이고 타미에게 작게 중얼거렸다. 너는 내 차 타고 가고 가지 그래. 어차피 가는 길이니까. 그러면 타미는 그저 고개를 주억이는 일 말고는 할 수 없었다. 지구가 끌어당기는데 사과가 떨어지지 않고 배길 수 있나.

가경이 식당에 들어가 계산을 하는 동안 타미는 가경의 차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 눈을 감았다. 오늘도 회식이 무사히 끝났다는 안도감과 함께 정신을 붙잡고 마셨던 취기가 아직도 머릿속을 빙글빙글 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타미는 작게 중얼거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배타미, 여기서 잠들면 입 돌아가. 죽는다. 안 돼. 아니, 선배가 있는데도 안 되나? 그렇게 한참을 생각하는 대로 말을 내뱉고 있을 때쯤 자신의 어깨를 붙잡고 일으키는 손길에 눈을 떴다. 가경이었다.

"뭐가 안 되는데."

"이러는 거?"

겨우 자리에서 일어난 타미가 뒤를 돌아 그대로 가경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담배 냄새가 짙다 싶다가도 그 너머로 느껴지는 익숙한 체향에 입꼬리가 올라간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향에 그렇게 예민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가경을 알고 나니 향까지 좋을 수 있구나 싶었다. 손을 뻗어 허리를 감싸지도, 이러지 말라고 말하지도 않는 가경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차라리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는데. 지금이야, 지구야. 망해. 망하라고.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다 보면 가경이 길게 숨을 내쉬며 다시 타미의 어깨를 붙잡아 둘 사이에 틈을 만들었다. 저번에는 뽀뽀를 해도 넘어가더니. 타미는 괜히 입술을 비죽이며 시선을 자신의 발끝에 고정했다. 안 돼? 타미의 물음에 가경은 조금 전에 식당에서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고개를 숙였다. 둘 사이가 다시 좁아졌다.

지금과 같이 거리를 좁힐 때마다 사람이 얼마나 바보처럼 굴게 되는지 이 선배는 모르나 보다. 타미는 그렇게 생각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가경은 특별한 행동을 하지 않아도 저를 긴장하게 만들었고, 기대하게 만들었으며 그 모든 것이 무너진다고 해도 큰 실망을 하게끔 만들지도 않았다. 적당히 선을 지키고 있는다는 것이 이런 것일까. 배타미. 응? 타미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가경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아, 너무 가까운데. 선을 지키기는커녕 넘어가고 싶어지게 만드는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겠다, 송가경아. 물론 뒤이어 들리는 목소리에 힘이 쭉 빠지고 말았지만. 승진 축하해, 배타미 팀장.

그리고 가경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아까 첫사랑 이야기 말이야. 첫사랑 이야기? 응, 네 첫사랑 이야기. 응. 진부하지 않다고 했잖아. 응. 왜 진부하지 않은지 알아? 왜인데? 타미의 물음에 다시 가경이 고개를 떼어내고 둘 사이의 거리를 넓혔다. 지 마음대로야, 아주. 타미가 자신도 모르게 툭 나온 말에 놀라 손으로 입을 막았지만 이미 뱉고 난 다음이었다. 그 모습에 가경이 미간을 좁히면서도 어이가 없는지 미세하게 올라가는 입꼬리가 선명하게 타미의 눈에 들어왔다. 이것 봐, 왜 웃냐고. 오해라고 한들 왜 오해하게 만드는데. 이번에는 겨우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가경을 흘기고 있으면 난감하다는 듯 마른침을 삼킨다. 이것 봐, 이것 봐. 대체 왜.......

"좋아하는 사람의 첫사랑이 되는 일이 진부할 수 있나?"

"어?"

"좋더라."

그래, 늘 이런 식이었다. 가경이 타미를 밀고 들어오는 일은 매번 바닥으로 곧장 떨어지던 사과가 아주 잠시라도 공중에 머물렀다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과 같은, 이론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예외적인 현상과 다를 바가 없었다. 타미가 당기고 있던 힘이 오히려 반대로 작용할 때의 아이러니. 그렇게 말하고는 단발 위로 훤히 드러난 뒷목을 손바닥으로 매만지는 가경의 모습을 타미는 가만히 눈에 담았다. 누군가를 좋아하면 매번 못나고, 서툴고, 난감해지는 걸 아는 사람이었구나. 아이러니함을 알고 있구나.

중력이 반대로 작용한다면 이 지구에 있는 모든 생명체와 물체는 지금 자신이 느끼는 기분을 느끼게 되는 것일까. 세상의 모든 것들이 공중에 떠 있다면 지금 제 기분과 흡사할 것이라고 감히 장담하며 타미는 눈을 깜빡였다. 대답 충분해? 가경의 물음에 타미는 입술을 달싹거리다가도 목소리를 내지 못 했다. 이 모든 것들이 정말 순식간에 벌어지는 예외 현상인 것처럼 찰나일까 봐 겁이 났다. 그저 단순 오류 혹은 아이러니로 치부될까 봐 지금 이 상황에 그 어떠한 말도 붙이고 싶지 않았다. 

첫사랑이라는 말, 계속 유효하면 좋겠는데. 첫 짝사랑을 겪고 난 다음에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라며. 가경의 뒷말에 그제야 타미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내뱉으며 표정을 구겼다. 진부하지도 않은데 어떻게 멈출 수 있겠어요.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선배는. 타미는 길게 숨을 내쉬고는 조금 전과 같이 가경의 어깨에 이마를 기대었다. 내 머리가 울리는 건지, 가경의 심장이 뛰는 건지 분간도 되지 않았다. 아, 내 심장이 토하는 소리일 수도 있겠다. 타미야. 자신을 부르는 가경의 목소리가 전해져 자신의 몸 전체가 울리는 것만 같았다. 전과 다른 울렁거림이었다. 애가 타서 울고 싶었는데 지금은 이렇게 사라져도 좋겠다 싶었다.

"선배."

"응."

"좋아해요."

"알아."

"그 대답 말고."

"나도."

"진짜?"

"아니, 내가 더."

차량 뒷좌석에 나란히 앉아 가는 사이에 타미는 맞잡은 손을 살살 흔들었다. 선배. 그만 좀 불러. 아니, 내 말 좀 들어 봐. 언제부터였어요? 궁금해? 선배라면 안 궁금하겠어요? 글쎄. 그 대답 말고요. 메인 화면이 예뻐서 들어왔다고 했을 때. 뭐? 앞에 봐. 야, 송가경. 배타미, 시끄러워. 아, 선배! 응, 타미야.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죠. 너부터 고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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