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송이 : 학교에 가다.

22~26화 분량.

1

퇴원하자마자 시설에 돌아온 나는 내 퇴원 파티를 해주는 애들과 선생님에게 저녁 늦게까지 시달리다가 겨우 빠져나왔다.

퇴원 파티, 라니. 물론 생각보다 오래 병원에 입원해 있기도 했고 같이 입원했던 애들은 진즉에 퇴원해서 더 그렇게 느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귀찮은 일에서 갓 해방된 내게는 불편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좋은 마음으로 해주려는 사람의 마음을 짓밟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조금 즐겨준다는 것이 이 저녁까지 붙잡혀있던 이유였다.

피곤하다는 말에 겨우 풀려났으니 그리 말 안 했으면 잠들기 전까지 시달려야 했을지도. 두렵다. 넘쳐 흐르는 아이들의 체력과 아이들과 함께 파티를 열어준 선생님들이.

“미노루, 잠깐만.”

병원에 입원해 있느라 그리웠던 내 방으로 가던 길에 나를 따라온 듯한 원장님이 나를 불러 새웠다. 원장님이 할 이야기가 있다며 원장실에 가자고 하셨고 나는 그 뒤를 따랐다.

“부르러 갔는데 그곳에 없어서 찾았거든.”

“죄송해요. 너무 피곤해서요”

“괜찮아. 퇴원한 지 하루도 안 됐으니까.”

원장실에 들어와 테이블에 앉았다. 원장님이 내게 코코아를 타 주시곤 자리에 앉으셨다.

“내가 미노루를 부른 이유는 다른 게 아니라 자, 이걸 읽어볼래?”

그러면서 내게 종이 한 장을 넘겨주셨다. 그걸 받아서 적힌 글을 보니… 등교 안내문이었다.

“퇴원하기 전에 말했던 대로 미노루는 다니던 학교의 방학이 끝나서 이제 등교해야 하거든. 그렇지만 미노루는 사정이 남다르잖니. 그래서 제안하는 거란다. 비슷한 경우의 다른 학생들은 보통 등교하지 않고 온라인 수업을 듣거든.”

“그렇군요.”

등교 안내문에도 원장님이 말씀하신 대로 학교에 직접 등교하거나 컴퓨터로 온라인 수업을 듣든지.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고 쓰여 있는 것 같다. 전부터 생각했지만, 학교에 다녀야 한다니 그것만큼은 싫었는데 이젠 피할 수 없나 보다. 계속 넘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원장님은 온라인 수업을 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는데… 미노루는 어떻게 생각하니?”

조심스럽게 그리 물어오는 원장님을 봤다. 음, 확실히 온라인 수업으로 때울 수 있다면 그게 가장 좋지.

“다른 애들도 학교에 가는 거죠?”

“응? 아, 그렇지. 모두 학교에 간단다.”

“그럼 저도 등교할게요. 등교해 보고 이후에 결정하는 것으로 해도 괜찮을까요?”

“안될 게 뭐가 있겠니. 그래. 등교해 보면 괜찮을지도 모르니까. 그러면 대답은… 다음 주에 듣는 것으로 할까. 괜찮겠니?”

“네, 괜찮아요.”

“그래. 그럼 잘 자렴, 미노루.”

그렇게 먼저 나는 이번 주 동안 등교를 해보고 그 뒤에 어떻게 할지 정하기로 했다. 등교 안내문을 돌려드리려 했는데 원장님이 가져가도 괜찮다고 하시길래 종이를 잘 접어 주머니에 넣고 원장님에게 꾸벅 인사를 한 다음에 원장실에서 나와 방으로 향했다.

학교, 학교라. 괜찮을까? 조금 걱정이 되기는 했지만 어쩌겠나. 학교에 가는 것까진 큰 문제는 없지만 진짜 문제는 초등학교 수업을 버틸 수 있는가에 대한 것이다. 거기다가 내 몸은 어리지만, 정신만큼은 대학생을 다녔던 기억이 있기 때문에 진짜 초등학생의 기력을 버틸 수 있는지도.

조금 착잡한 마음으로 가득해 오늘 밤은 어쩐지 잠이 오질 않았다.

2

“여러분, 좋은 하루예요. 오랜만에 만나니 모두 조금씩 달라진 모습이 보이네요. 방학 동안 잘 지냈나요?”

“네~~!”

선생님의 말씀에 교실의 아이들이 함께 외치는 것만 들으며 입을 다물었다. 등교일이 되고 가장 늦게 교실에 들어와 내 자리로 보이는 빈자리에 앉은 나는 낙서로 가득한 책상을 내려다봤다. 뭐, 자기 책상에 낙서하는 것은 국룰이니까. 그렇지만 조금 지저분하다는 인상이 컸다.

게다가 여자 몸 같은 것이 그려져 있기도 하고. 진짜 마음에 안 드네. 원장님에게 받은 필통에서 지우개를 꺼내 책상의 낙서를 몽땅 지웠다. 박박 지워내면서 담임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었다.

뭐, 평범한 이야기다. 그동안 뭘 하면서 지냈는가에 대한 질문이나 머리 스타일이 바뀐 애들을 언급하면서 잘 어울린다고 말한다든지.

담임 선생님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가 부드러운 웃음과 함께 넘어갔다. 등교하기 하루 전날 원장님과 함께 먼저 학교에 와서 내 사정을 밝혔다. 당연히 학교의 학생이기 때문에 먼저 부모님에 관한 이야기와 집이 방화로 전소된 소식까진 전해졌겠지만, 내 상태에 대한 소식은 아직 전해지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담임 선생님, 착하네. 좋은 선생님이야. 내게 굳이 다른 것은 묻지도 않고 주목받지 않게 해주고. 하여간에 담임 선생님의 배려를 열심히 받으며 1교시가 시작되었다.

“오늘은 단축 수업이라서 4교시까지 진행한답니다. 조회 시간 끝.”

3

1교시는 국어로 교과서를 꺼내기 위해 움직여 살펴본 결과 사물함이나 책상 밑에 교과서가 없었다. 아무래도 방학이기 때문에 책을 몽땅 집에 옮겼거나 하루마다 교과서를 바꿔 들고 가는 모양이다.

모두가 교과서를 책상 위에 올려두기 시작할 때 나는 손을 번쩍 들었고 담임 선생님을 그것을 보고 내게 물었다.

“미노루 군, 무슨 일이니?”

“교과서를 두고 왔어요. 옆의 친구랑 같이 봐도 괜찮을까요?”

내 말에 애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미노루가 존댓말 썼어!” “미노루가 교과서 보겠다고 했어!” “선생님한테 말하려고 손도 들었어!” 하는 목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착잡해졌다. 미네타 미노루, 학교에서 대체 무슨 이미지였던 걸까.

“그렇구나. 그러면… 유키 양, 미노루 군과 오늘 하루 교과서를 함께 봐 주겠니?”

내 옆에 있는 애 이름이 유키인 모양이다. 회색빛이 강한 하얀 머리카락을 가진 유키는 나를 흘겨보다가 고개를 팩 돌렸다. 어, 어라. 왠지 대놓고 거부하는 것 같은데.

그렇지만 교과서는 보여주겠다는 양 책상을 옆으로 옮겨와서 나도 책상을 옆으로 끌어 붙였다.

“고마워, 유키.”

“…….”

유키는 아무 말 없이 붙은 책상으로 아주 조금만 교과서를 빼 주었다. 보기 불편하기는 하지만 아예 보이지 않는 것도 아니므로 괜찮았다.

근데 아무리 봐도 유키의 반응이 좀 심상치 않았다.

 

4

1교시 수업이 끝났다. 초등학교 수업이 맞나? 이렇게 어려웠나? 조금 복잡하다. 내가 그동안 초등학생을 너무 우습게 본 것은 아닐까 싶다. 복잡한 마음을 털어내며 유키가 날 불편해하는 것 같길래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노루!”

“야, 미노루!”

사물함 앞에 있는 내 옆으로 다가온 두 사람은 내 이름을 부르며 기웃거렸다. 한 명은 고슴도치처럼 생겼고 한 명은 엉덩이에 꼬리가 달려있었다. 근데 이름을 모르겠다.

“전화했는데 왜 안 받았어!”

“우리 수영장 같이 가기로 했잖아~”

그, 그랬니? 그거 미안하다. 수영장 갈 생각도 못 했거든.

아니, 그야? 눈 뜨자마자 남자애에게 빙의되었고 그게 미네타 미노루였다는 것에 충격받고, 납치당할 뻔하고, 살해당할 뻔하고, 막장 가족 사이에 껴서 고통받았거든. 그게 고작 방학 동안 일어난 일이라는 게 너무 어이없다.

“미안해. 잊고 있었어.”

그걸 사실대로 말하는 것도 어려워서 그냥 그렇게 말했다.

“뭐, 됐어! 우리끼리 재미있게 놀았거든!”

“맞아!”

어어, 그러니. 그럼 됐다.

“앗, 빈틈~!”

“꺅! 야, 키치로!!”

“헤헤, 미츠아는 핑크래요~!”

…….

아니, 시벌. 내가 뭘 본거지. 갑자기 왜 여자애 치마를 들친 건데? 뭔데?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키치로(꼬리 달린 애) 옆에 있던 녀석도 갑자기 다른 여자애 치마를 들쳐버린 것이었다.

“으아앙!!”

“세이토!!!”

“메~롱~!”

키치로와 세이토는 이제 나를 쳐다본다. 뭔데. 왜. 저 시선, 마치 이제 네 차례이지 않냐는 듯이 보는 시선에 나는 머리가 아파졌다. 그렇구나. 이제야 확실히 알겠다. 유키가 나를 피하는 이유.

이때부터 썩을 싹이 보였던 거구나. 망할. 이 미친 미네타 미노루. 그래. 다 커서만 그랬던 게 아니겠지. 예전부터 싹이 있었겠지. 내가 그걸 생각 못 했네. 머리가 지끈거리다 못해 울리는 기분이 든다. 내가 한 짓도 아닌데 그로 인한 여파가 앞으로의 학교생활을 엉망으로 만들 것 같았다.

 

5

복잡한 마음을 속에 담으며 나는 내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타이밍 좋게 다음 교시를 알리는 예비 종이 울렸기에 키치로와 세이토가 아쉽다는 듯이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둘이 각자의 자리로 돌아간 것을 보고 나는 그저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저 망할 꼬맹이들을 어쩜 좋지. 그리고 그동안 미네타 미노루가 해왔던 짓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고민이 됐다. 그리고 그 고민이 무색하게도 시간은 금방 흘러 4교시가 끝나 하교하는 시간이 되었다.

어라, 벌써? 내가 뭘 했더라. 생각해 봐도 그냥 고민만 실컷 했던 것 같은데? 확실히 초등학교라서 그런지 수업 시간이 짧네.

시끌벅적하게 내 옆으로 와서 떠들던 키치로와 세이토가 함께 하교하자고 제안했으나 거절하고 할 일을 하기 위해 교무실로 가기로 했다.

“무슨 일이니?”

교무실로 내가 오자 담임 선생님이 조금 놀란 듯싶었다.

“교과서를 받고 싶어서요.”

“오. 음. 그렇구나.”

1교시 때부터 생각했는데 담임 선생님의 반응이 이상하지 않아? 그럴만하다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방학 전까지만 해도 엄청난 사고뭉치였을 미네타니까.

“그래. 내가 너무 신경을 못 썼구나. 집이 전소되었다고 했던가? 그러면 교과서가 없을 수도 있었는데….”

“괜찮아요.”

“그, 그러니? 우선 책을 받아와야 하니 그동안 유키와 함께 책을 보겠니?”

어, 그건 조금. 유키는 나를 불편해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런 애 옆에 계속 붙어 있는 것도 미안하기도 해서 어떻게 안 되겠냐고 물었더니 담임 선생님은 으음, 하고 정수리를 긁적이시곤 옆자리의 다른 선생님을 불렀다.

“미오 선생님 혹시 남은 교과서 가지고 계신 게 있나요?”

“음, 아뇨. 학급 인원 수에 딱 맞게 주문을 해서요.”

“그런가요. 미노루, 선생님이 최대한 빨리 구해 볼 테니 조금만 기다려주겠니?”

“네, 알겠어요. 감사합니다.”

“하, 하하. 그래.”

담임 선생님에게 꾸벅 인사하고 교무실 밖으로 나와 문을 닫았다. 그리고 문이 완전히 닫히기 전에 담임 선생님과 미오 선생님의 대화가 들렸다.

“세상에. 미네타가 저렇게 예의 바른 애였나요?”

“아무래도 겪은 사건이 매우 힘들었던 모양이에요.”

“그래도 저렇게 순식간에 사람이 달라진 것처럼 변하나요? 우리 반 애들도 저렇게 되면 좋겠는데.”

“미오 선생님 부모 잃은 아이예요. 그런 말씀은 하지 마세요.”

“아… 죄, 죄송합니다.”

“아이가 듣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기세요.”

음, 죄송합니다. 다 듣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굳이 그걸 티 낼 생각은 없었기에 얼른 벗어나기로 했다.

 

6

“학교는 어땠니?”

“이제 첫날이라 잘 모르겠어요.”

“오랜만에 친구들 만나서 좋지는 않았고?”

“초등학생은 정말 잘 떠들고 시끄럽더라고요.”

“어머나.”

단축 수업으로 4교시만 하고 하교하게 된 나는 그대로 레이 씨의 병문안을 왔다. 그냥 시설로 돌아가기는 좀 그래서였지만 그래도 레이 씨는 나를 반겨주셨다.

“이제 미노루를 만나는 게 어려워지겠다고 생각하니 슬프네.”

“레이 씨도 참.”

“학교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렴.”

음. 내가 시선을 피하자 레이 씨가 옅게 웃었다. 그렇게 시답지 않은 오늘 하루에 관한 이야기, 학교에서 또 다른 일은 없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시설로 돌아갈 시간이 다 되어 가자 레이 씨가 나를 불렀다.

“저번엔 정말로 고마웠단다, 미노루.”

“어, 아니.”

내게 허리 숙여 감사 인사를 하는 레이 씨의 모습에 덜그럭거렸다. 아니, 그때 내가 뭘 했다고. 물론 엔데버 아저씨에겐 뭐라 하기는 했지만.

“네 덕분에 나는 용기를 낼 수 있었고 엔지와 마주 보고 대화를 나눌 수 있었어. 그 대화를 통해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의논할 수 있었지.”

그랬어? 언제 둘이 대화를 나눴대? 그리고 허리를 펴고 레이 씨는 웃었다.

“엔지를 통해 아이들에게 편지도 보냈단다. 아직 만날 준비는 덜 되었지만 그래도… 나아질 것을 아니까. 모두 미노루 덕분이야.”

레이 씨는 팔을 벌렸고 나는 그런 레이 씨를 보다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그 품에 들어가 레이 씨를 껴안았다. 마주 안았다기엔 어려운 형태지만, 뭐 어쩌겠어.

“다음엔 가족 소개를 제대로 해줄 수 있으면 좋겠구나.”

“저도요.”

레이 씨는 한참이나 나를 껴안고 있었다.

 

7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나는 학교 앞 문방구에 들어갔다. 필요한 물건은 이미 원장님이 구해 주셨지만 잠깐이나마 유키에게 책을 빌리게 된 입장이기에 유키에게 간식거리라도 사주기로 했다.

문방구에는 내가 초등학교 시절 때 봤던 불량 식품들과 처음 보는 것들이 뒤섞여 있었다. 한국의 불량 식품은 익숙하였지만 일본 쪽 불량 식품은 낯설긴 하네.

불량 식품 쪽을 훑다가 깨달았다. 유키의 취향이 어떤지 모른다. 아무거나 사 갔는데 유키가 싫어하면 어쩌지, 하고 고민이 들었으나 곧 부질없음을 알았다.

애들 입맛이 거기서 거기지.

내 취향 반, 다른 애들이 고르는 거 반 해서 용돈이라고 받은 500엔으로(어디서 주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새벽에 호크스가 주고 날아갔다) 샀다. 거스름돈으로 250엔 돌려받았고 봉투에 싹 다 담아서 등교했다.

덕분에 맛난 것 좀 샀다, 호크스! (고맙다!)

물론 250엔어치 전부를 유키에게 다 줄건 아니고.

"미노루! 놀자!"

"놀자!"

"자, 이거 줄 테니까 자리로 돌아가."

"와!"

"고마워!"

그렇다. 귀찮게 옆으로 와서 떠드는 두 녀석에게 줄 뇌물도 좀 있다. 쟤네가 싫은 것은 아니지만, 하여튼 불편을 감수하고 곁에 두고 싶지는 않다.

 

8

내 자리로 와서 가방을 책상 걸이에 걸고 필통을 책상 위에 올려두고 이번 1교시는 뭔가 봤다. 수학이었다. 아, 수학. 싫네, 수학.

"……."

그런 나를 유키가 가만히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왜 쳐다보지? 의아해서 돌아보니 유키는 깜짝 놀라며 고개를 돌려버린다.

"유키."

내가 이름을 부르자 유키가 또다시 깜짝 놀란다.

이러니까 어쩐지 내가 괴롭히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그래도 이야기할 것이 있고 해둬야 하는 이야기니까.

"있지. 사실 개인적인 사정으로 나한테 교과서가 없거든. 그래서 담임 선생님께 교과서를 받기 전엔 유키와 함께 교과서를 보게 됐어. 그래서 잘 부탁한다는 의미로 간식을 좀 사 왔는데, 받아줄래?"

검은 봉투를 유키에게 건네며 말하니 유키가 새파란 얼굴로 나를 돌아봤다. 아니, 저렇게까지 싫어할 일인가?

"야! 미노루! 너 또 유키 괴롭히는 거야!?"

유키와 나 사이로 분홍색 머리카락이 끼어들었다. 딱히 괴롭힐 생각 없었는데 그렇게 보였으려나? 오해하지 말아 달라고 하려는데…

"그 봉투에 그때처럼 벌레가 들어있는 거지!?"

오해할 만하네. 와, 씨. 미네타 새끼는 나한테 도움이 되질 않아요. 젠장. 울고 싶다. 근데 울면 안 돼.

"내…가 그…랬지."

"그래!"

"이번엔 진짜야. 믿어줄래?"

"어떻게 믿어!!"

그렇지요.

보통 그렇겠지요. 크으윽, 저 말에 반박할 수 없어서 슬프다!

미네타 미노루! 넌 진짜 나쁜 놈이야!

유키는 분홍 머리 애 뒤에 숨어서 꼼짝도 안 했다. 분홍 머리도 내게 손가락질하며 유키 앞에서 비킬 생각이 없어 보였고.

그럼 남은 방법은 봉투를 책상 위에 탈탈 털어서 보여주는 수밖에 없었다.

내가 책상으로 가서 봉투를 탈탈 털어내니 분홍 머리 애가 의아해하다가 봉투에서 나오는 간식 더미에 이상한 표정을 했다.

나와 간식 더미를 번갈아 보더니 다시금 내게 손가락질했다.

"이거 날짜 지난 거 아니야?!"

"오늘 아침에 산 건데…."

"그, 그래?"

당황스럽니? 그, 미안하다. 그렇지만 봉투 안에 벌레가 없다는 것을 알려줄 적당한 방법이 이것뿐이라서. 바닥에 쏟을 수는 없잖아.

"정말로 유키한테 고마워서 주는 거야?"

분홍 머리 애는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유키 앞에 서서 내게 물었고 유키는 분홍 머리 애 뒤에서 책상 위에 올라간 간식을 보고 아까보단 밝은 표정을 지었다.

"응. 정말로. 너도 좀 먹을래?"

"그래! 유키, 골라봐."

"응, 밋쨩."

오. 드디어 목소리 들었네. 밋쨩 뒤에서 겨우 나온 유키와 밋쨩은 간식 더미에서 간식을 고르기 시작했다.

많이 골라라. 너네 거야.

 

9

간식(이라 하고 뇌물)을 주니 유키가 조금은 나를 받아준 것 같다.

“유….”

“힉!”

아닌 것 같다.

 

10

오늘 하루도 유키는 나를 열심히 피했다. 뭐, 하루아침에 달라지리라 생각하는 것도 이상하긴 했지.

조금 안일했을지도. 정확히 어떻게 피해를 받았는지 제대로 알게 된 것이라곤 봉투 안에 벌레를 집어넣고 그걸 유키에게 줬다는 것 정도? 하지만 그것만 했을 리가 없다. 반 분위기를 보면 알 수 있지.

미네타에게 피해를 받은 것은 이 반에서 유키뿐만이 아닐 거다. 심지어 10살이다. 그 이전에도 미네타에게 괴롭힘 받은 애들이 있겠지. 그걸 생각하니 정말 앞날이 막막하다. 애들끼리 하는 장난이라고 치부하고 넘어가기엔 찝찝하기도 했고.

최대한 애들을 불편하게 만들기 싫어서 되도록 조용히 지내기 위해 수업 내용을 필기한 공책만 살피니 몇몇 애는 사고를 치지 않는 나를 더 불안해하는 것 같았다.

약간 폭풍전야 같은 느낌이려나. 하긴 미네타와 다른 두 녀석이 이 반에서 가장 사고를 잘 치는 문제아 3인방으로 불렸던 것 같으니까. 이젠 2인방이 되겠지만.

아직 이틀이니까. 유키도 그렇고 다른 반 애들에게도 그렇고 내가 더는 전과 같은 행동을 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을 행동으로써 보여줄 수밖에 없었다.

내가 한 일도 아니지만.

제일 억울한 건 나지만.

미네타 미노루가 되었으니 살아 가야 한다고 한 건 나였으니까.

과거에 했던 말이 좀 아니, 꽤 많이 후회된다. 후회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도 아니지만.

하……. 오늘따라 우유가 쓰네…….

 

11

오늘로 사흘째. 나에게 드디어 교과서가 생겼다. 드디어 유키한테 책을 빌려보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었다.

내 몫의 교과서는 우선 모두 챙겨서 시설에 옮겨뒀다. 복습 좀 해둬야지. 초등학교 수준이라고는 하지만 버벅거리는 건 싫었으니까 말이다.

학교에는 필요한 과목의 교과서만 챙겨가기로 했다. 다행히 6교시 밖에 없어서 책을 6권만 들고 다니면 되니 힘들이지 않을 수 있었다. 나중엔 그냥 학교에 두고 필요한 과목의 교과서만 챙겨야지.

학교생활은 무난했다. 키치로와 세이토가 자꾸 나한테 놀자고 하는 것을 제외하면 조용한 생활이었지.

쟤네는 내가 거절을 해도 계속해서 놀자고 하네. 지칠 법하지 않나? 되레 내가 지치고 있었다. 쟤들이 내 옆에 와서 유키에게 장난을 치거나 다른 여자애들을 괴롭히는 짓을 하니까. 같은 반의 다른 남자애들은 얌전한 편에 속하는데 어떻게 이런 애들이 있는 걸까 싶다.

아니 어쩌면 쟤들이 너무 날뛰어서 다른 애들이 얌전해 보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아무 사건도 일어나지 않고 학교에 간 지 닷새가 되었을 때 사건이 발생했다.

 

12

“이제 청소 시간이야. 다들 책상 뒤로 밀자!”

6교시가 끝나고 청소 시간이 되자 애들이 책상을 뒤로 밀기 시작했다. 나도 마찬가지로 책상을 뒤로 밀고 청소할 준비를 했다.

그런 와중에 장난꾸러기 둘이 내게 다가왔다.

“야, 미노루! 집에 가자!”

“그래, 가자!”

그걸 지켜보던 밋쨩(학급 반장)이 와서 외쳤다.

“야! 너네! 청소하고 가!”

“싫네요~”

“메롱메롱~”

와, 유치해. 5학년이나 되었는데도 저러는구나. 조금 착잡해졌다. 아무리 개성 시대라고는 하지만 이렇게까지 애들 인성이… 아니지. 얘네가 너무 유치한 거지, 그래. 다른 애들까지 싸잡아 욕하면 안 되지.

계속해서 밋쨩과 유치한 말다툼을 이어 가길래 키치로와 세이토에게 빗자루를 건네줬다.

“얼른 청소하고 돌아가자.”

“뭐어?!”

“그냥 가자~!”

계속해서 그냥 가자고 말하는 두 사람을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글렀네. 저걸 내가 어떻게 해 줄 생각은 없다. 내가 뭐 선생님도 아니고. 그리고 부모님도 아니잖아. 나는 그냥 쟤네의 동급생일 뿐.

둘을 무시하고 나는 내 할 일이나 하기로 했다. 책상을 뒤로 싹 다 밀어뒀으니 그냥 바닥을 쓸기만 하면 됐다.

“야, 미노루!”

“너 우리 무시하냐!?”

뒤에서 두 사람이 짜증을 냈지만, 거기에 어울려 줄 생각은 없다. 차라리 얼른 치우고 집에 갈 준비하는 게 훨씬 나았으니까 말이다.

“너희도 그럴 시간에 청소하는 게 더 나을걸?”

밋쨩도 마찬가지였는지 애들을 상대하는 건 그만두고 청소를 하기 시작했고 다른 애들도 하나둘씩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반에서 청소하지 않는 건 두 사람뿐이었다.

“이게 진짜! 왜 자꾸 우리를 무시하는데!”

키치로는 그렇게 말하며 나를 밀쳤다. 다행히 넘어지지는 않았지만, 옆에 있던 밋쨩까지 밀쳐져서 어이없다는 듯이 나섰다.

“너희 뭐 하는 짓이야! 잘못은 너희가 했잖아!”

“미노루가 계속 우리를 무시하니까 그렇지!”

“넌 끼어들지 마!”

“난 학급 반장이야!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끼어들어야 하거든!?”

어어, 아니 갑자기 왜 싸울 분위기야? 지, 진정해 보자. …라고 말하기에는 많이 늦었나?

“키치로. 청소부터 끝내고 이야기하자.”

“싫어!”

“그럼 지금 하자고?”

“어!”

이 못난 꼬맹이를 어쩜 좋지.

“그럼 말할게. 요 며칠 동안 정말 많이 불편했어. 계속 내가 거부하는데도 들이밀기도 하고. 이번에도 그래. 분명 청소하고 가자고 했는데도 너희는 싫다고만 말하고 청소를 돕지도 않았잖아. 청소하지 않으면 다들 집에 일찍 돌아갈 수 없으니까 청소를 우선시한 것뿐이야.”

무시했다는 말에는 반박하지 않기로 했다. 무시한 건 맞으니까.

내 말에 키치로는 당황한 듯 눈을 껌뻑이며 어버버거렸다. 옆에 있던 세이토 역시 나를 보며 당황했다.

“미, 미노루가 옳은 말을 하네…?”

아니 왜 거기서 그런 말을 하고 그래, 밋쨩.

 

13

“이, 이상하잖아! 우린 삼총사잖아!”

“그래, 그래! 키치로 말이 옳다, 옳다!”

“미안, 사양할게.”

내 말에 주위에 있던 애들이 “에엑?!”하고 소리를 냈다. 뭐, 뭐야. 얘들아, 왜 그런 반응이니.

“무, 무, 무, 무슨 소리야! 같은 반이 된 이후에 삼총사가 되자고 한 건 너잖아!”

미네타가 그랬구나.

“이제 삼총사는 하지 않을게. 미안해.”

또다시 애들이 “에엑?!?!!”하고 소리를 냈다.

키치로와 세이토는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내가 너무 내 생각만 말한 걸까? 그렇지만 쟤네 둘이 저지르는 짓은 그렇게 좋은 것도 아니고 장난만 치고 애들을 괴롭히기도 하니 옹호하고 싶지도 않았다.

“나 이제 장난치고 싶지 않아. 여자애들 치마 들치는 것도 싫고. 1년하고 반년만 지나면 중학교에 올라가는데 계속 그러고 싶어? 어린애로 사는 것도 적당히 해야지. 그러다가 부모님 귀에 들어가면 부모님이 얼마나 힘들어할지는 알아? 다른 애들이 너희를 어떻게 보는지는 알아?”

…….

아. 말이 좀 심했나? 내뱉고 나서야 깨달았다. 아무리 그래도 쟤들은 초등학생 5학년 이제 10살이다. 미숙할 수밖에 없는데. 내가 너무 애들을 높은 시선으로 봐버린 것은 아닐까?

쟤들도 결국 그냥 나랑 놀고 싶어 했던 것뿐이고 조금 배움이 늦은 것뿐일 텐데 색안경 끼고 내버려 둔 건 아니었던가?

깨닫고 난 이후는 늦었다.

“그래서 어쩌라고!!”

키치로가 내게 달려들었다.

 

14

그건 순식간에 벌어졌다. 얼얼한 뺨과 비명 소리. 내 위에 올라탄 키치로를 막으려는 애들과 내 멱살을 붙잡은 키치로.

무슨 일이 벌어졌지? 아. 날아오는 주먹에 눈을 질끈 감았다. 눈을 감아도 아픔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눈앞이 번쩍이는 충격에 악, 소리가 절로 나왔다.

“요 며칠 계속! 나를 깔보는! 눈으로! 보고!”

확실히. 초등학생이라는 이유로, 장난꾸러기라는 이유로 얘들을 못났다고 생각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

“너도 그랬으면서! 갑자기 달라져서는!!”

어쩌면 키치로 입장에선 내가 배신자였을지도 모르겠다. 매일같이 함께 놀던 친구가 갑자기 뒤돌아선 것이니까.

“같이 놀자고 해도! 거절하면서!!!”

내가 너무 내 생각만 했구나.

“무슨 일이 있는지 알려주지도 않고! 연락도 안 받고!! 뭐냐고!! 우리는 친구 아니었냐고!!”

키치로의 주먹이 멈췄다. 얼얼한 뺨과 달리 정신이 맑아진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울고 있는 키치로를 보고 마음이 복잡해졌다. 얘한텐 미네타는 친구였구나. 삼총사라고 자칭할 만큼 가장 친한 친구.

어쩌면 키치로 입장에선 내가 친구를 뺏어간 거나 다름없지 않을까?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야!”

담임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담임 선생님 뒤로 유키가 따라 들어왔다. 유키가 교무실로 가서 선생님을 불러온 모양이다.

“우선 키치로, 일어나렴.”

담임 선생님은 키치로부터 일으킨 다음에서야 나를 일으켜 세워줬다.

“선….”

말을 하려다가 깨달았다. 입술 찢어졌네. 아프다.

“우선 상담실로 가자꾸나. 키치로, 너도.”

키치로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담임 선생님과 함께 교실에서 나가기 전에 유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키치로 1

모가키 키치로는 절친이 최근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방학이 끝나고 단축 수업을 하게 되어 함께 놀러 가자고 했는ㄷ 미노루가 사양했을 때부터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으나 하루하루 지날수록 점차 눈에 띄도록 달라져서 기분이 몹시 나빴다.

“야, 세이토. 요즘 미노루 자식 이상하지 않아?”

“엉?”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고개를 기울인 세이토는 “걘 원래 이상했어!”라며 웃었다.

“아니, 그런 이상함이 아니야. 그 자식. 우리한테 뭔가 숨기는 게 있어.”

“숨기는 거?”

“그래! 숨기는 거! 학교 선생님들이 미노루 이야기하는 거 들었거든. 어른들만 알고 우리한텐 비밀로 한 거야. 그 자식, 절친인 우리에게 숨기는 게 있다니!”

“그런 거라면 용서할 수 없지!”

키치로와 세이토는 손을 맞잡았다. 숨긴다면 우리가 밝혀 내면 된다! 그렇게 두 사람이 하교 시간에 숨어서 미노루가 가는 길을 뒤쫓았다. 이상한 것은 미노루는 원래 가던 길로 가지 않는 것이었다.

같은 반이 된 이후에 몇 번은 함께 미노루의 집으로 간 적이 있었기에 기억하고 있었다. 이 길은 미노루의 집으로 가는 길이 아니었다.

“이상하네. 여기 미노루네 집으로 가는 길 아니잖아.”

세이토 역시 그 이상함을 깨닫고 코를 찡그렸다. 키치로는 그런 세이토의 말에 동의하며 계속해서 미노루의 뒤를 쫓았다. 그렇게 해서 도착한 곳은 데이온 시설이라는 팻말이 달린 건물이었다.

키치로는 물론 세이토는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 되었다. 미노루가 왜 자기 집을 두고 이런 곳에 왔지? 싶은 생각이 되었다.

둘은 한참 동안 데이온 시설을 지켜보다가 매일같이 놀러 갔던 놀이터로 향했다.

“있지, 키치로….”

“…왜.”

“미노루, 왜 그런 곳에 들어간 거야?”

“……내가 어떻게 알아.”

키치로는 그네에 앉아 발만 휘저었다.

“나, 집에 갈래….”

“어, 잘 가.”

세이토가 먼저 집으로 가고 키치로는 그네에 앉아서 홀로 고민하다 말았다. 미노루는 절친이니까 거기에 왜 갔는지 알려주지 않을까? 나중에 알려주려고 했을지도 모르고. 무슨 사정이 있을지도 모르고.

무슨 일이 있었더라도 우린 친구니까.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된 걸까.

키치로는 그날도 미노루와 함께 하교하자고 말했으나 거절당해서 기분이 이상했다. 우린 친구인데 어째서 저러는 건지 모르겠다.

계속해서 무시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미노루가 자신과 세이토를 바라보는 시선이 사고를 칠 때 마주하는 어른과 같은 눈빛이라서 그게 더 화가 났다.

그래서 밀쳤고 그래서 말다툼을 하게 되었다.

이러지 말아야 하는데. 친구랑 싸우는 것도 좋지 않은데. 그런 생각이 들었기에 무마시키고 말려고 생각하던 찰나 미노루가 말했다.

“나 이제 장난치고 싶지 않아. 여자애들 치마 들치는 것도 싫고. 1년하고 반년만 지나면 중학교에 올라가는데 계속 그러고 싶어? 어린애로 사는 것도 적당히 해야지. 그러다가 부모님 귀에 들어가면 부모님이 얼마나 힘들어할지는 알아? 다른 애들이 너희를 어떻게 보는지는 알아?”

그 말에 화가 울컥 튀어 올랐다.

“그래서 어쩌라고!!”

주먹이 휘둘러졌다. 솟아오른 화가 머리를 제대로 굴러가지 못하게 틀어막은 것 같았다. 내가 무슨 말 하는지 모르겠어. 밑에 깔린 미노루는 반항조차 하지 않고 휘두르는 주먹에 얻어맞고만 있고 여전히 나를 어린애 보듯이 보고 있었다. 그게 너무 싫었다.

 

14.5

“뭐, 그래도 개성을 사용하지 않아서 다행 아닌가요?”

“그렇죠. 키치로의 개성은 박살이니까요.”

“그래도 폭력은 조금….”

“개성을 사용하지 않은 폭력은 그나마 나아요, 치히로 선생님. 애들은 개성 사용이 미숙하기도 하고 조절도 모르니까요. 작년엔 개성 폭력으로 난리가 났었죠?”

“아, 맞아요. 정말 난리였죠. 하필 가해자 학생이 감전 개성이었죠. 그때만 생각해도 어휴.”

“개성 폭력이든, 그냥 폭력이든 나쁜건 마찬가지지만 위험성을 따지자면 개성 폭력이 높고 폭력은 그나마 낮은 편이에요.”

“그래서 어떻게 처분한대요?”

“글쎄요. 5학년 2반 담임 선생님이 아카이토 선생님이니 알아서 잘 해결하시겠죠. 자자, 저희도 얼른 애들 집에 보내도록 해요.”

“네, 네.”

 

모이타 1

아카이토 모이타는 앞에 마주 보고 앉은 두 사람을 보고 노안경을 고쳐 썼다. 교무실로 뛰어온 유키가 두 사람이 싸우기 시작했다고 했을 때는 당황했다. 그야 그렇다.

둘 다 사이가 좋은 친구 사이었기에 이렇게 싸울 일이 생기리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던 모이타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자….”

“그 전에. 선생님.”

말을 하려다가 미노루의 말에 모이타는 “왜 그러니?” 하고 물었다.

“키치로에게 할 말이 있어요.”

“그, 그러니?”

빨갛게 부은 뺨을 보니 뭐라고 나쁜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닐까 걱정은 되었으나 예상외로 침착한 모습으로 앉아 있는 미노루의 모습에 모이타는 고개를 끄덕여 말해도 괜찮다고 허락을 했다.

“우선 너에게 미안해. 내가 내 생각만 한 것 같아. 그렇지만 변명은 하게 해줘. 선생님께도 다른 어른들에게도 제대로 말한 적 없는 이야기거든.”

제대로 말한 적 없는 이야기? 모이타는 노안경을 다시금 고쳐 썼다. 분명 데이온 시설의 원장과 함께 학교를 찾아온 미노루는 사고의 후유증으로 부모에 대한 기억을 잃었다는 것과 그것을 굳이 외부에 알리고 싶지 않으며 이 일은 성인인 선생님들에게만 전해두고 싶다는 것을 알려왔다.

그 내용에 숨겨진 게 있었던 걸까? 조금 긴장된 얼굴로 조용히 있던 모이타는 이어진 미노루의 말에 입을 떡 벌렸다.

“여름 방학 때 어떤 사고로 인해서 그 전까지의 기억이 전혀 없어. 내가 미네타 미노루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 외의 것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 부모님이 어떻게 생겼는지 무슨 이름인지. 같은 반의 친구들과 담임 선생님의 이름도. 내게 어떤 친구가 있었는지. 그 친구들과 어떤 추억이 있었는지조차.”

상상 이상의 내용이었다. 사고 이후, 라는 것은 부모님을 잃은 사건이겠지. 모이타는 벌렸던 입을 다물었다. 그래서 이렇게까지 타인 같았던 것일까?

맨 처음엔 그저 아이가 사고로 인해 정신적으로 매우 힘들어 철이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과는 결이 달랐다. 아이는 많은 부분이 빠져서 허무해진 것이다. 그로 인해 성격이 뒤바뀔 정도로.

모이타는 키치로에게 시선을 돌렸다. 키치로 역시 상당히 충격받은 얼굴이었다.

“그래서 너와 내가 얼마나 친했는지 몰라. 차라리 첫날에 제대로 설명했다면 네가 이렇게까지 화내지는 않았을 텐데 내가 실수를 한 것 같아. 정말 미안해.”

미노루의 말에도 키치로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돌렸다. 모이타가 뭐라고 하려고 입을 열려다가 말았다.

“일주일간 학교에 다녀보고 온라인 수업을 할지, 계속 학교에 다닐지 정하기로 했거든. 이번 일로 너와 선생님 그리고 학교에도 폐를 끼쳤으니 그냥 온라인 수업을 듣는 게 나을 것 같아. 짧은 기간 동안 고마웠어. 선생님도 감사했습니다.”

그렇게 말해버리는 미노루에 모이타는 눈만 깜빡일 수밖에 없었다. 이야기의 진행, 너무 빠르지 않아? 시선이 미노루와 키치로를 반복적으로 돌아봤다.

“…해.”

작게 들려온 말에 모이타는 중간에 껴 있다가 키치로에게 시선을 돌렸다. 방금 뭐라고 하려고 했니?

“왜 멋대로 이야기를 진행하냐고! 나는 그게 싫다고! 난 니 동생이 아니라 친구라고! 동갑이야!! 너, 도망가기만 해봐! 다음 주에 반드시 등교해!! 그때! 그때… 사, 사과…할 테니까….”

키치로의 말에 미노루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둘은 그렇게 상담실에서 나갔다. 그 중간에 껴 있던 모이타는 노안경을 고쳐 쓰며 중얼거렸다.

“요즘 애들은 잘 모르겠다니까….”

 

15

“그래서?”

빨간 날개를 퍼덕이며 엄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호크스의 시선을 피했다.

“그 얼굴, 어떻게 된 거야?”

응? 미노루. 잔잔하게 날 부르며 되묻는 호크스에 나는 그저,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난 엔데버에 호크스가 팬보이 얼굴되기 같은 일이 벌어지기를 바랐으나 그런 일은 없었다.

“오늘은 시간이 좀 남거든.”

그러면서 웃는데 참 무서웠다. 이럴 땐 나타나지도 않고. 아저씨가 눈치가 없어요, 정말.

 

16

도망치려던 나는 호크스의 날개에 붙잡혔다. 너무하다. 어린애에게 개성이나 사용하고. 내가 째려보니 호크스가 웃으면서 손가락으로 뺨을 가리켰다.

말해 주기 전까진 놓아주지 않을 것이라는 그런 뜻인가? 버둥거려 봐도 호크스에게 안겨 있으니 허공에서 발을 구르며 힘을 빼기만 할 뿐이었다. 포기할 생각 없어 보이니 어쩔 수 없네.

“알았어, 알았어. 이야기할게.”

“다행이다. 순순히 이야기해 주지 않았으면 뒷조사를 할 뻔했잖아.”

?

아니, 무슨 그런 무서운 농담을 그렇게 가볍게 하는 거야.

…….

농담 맞지?

 

17

원장님에게 잠시 놀다 온다고 이야기를 하고 호크스와 함께 마을을 돌다가 적당한 빈 건물의 옥상에 올라와 앉았다. 호크스는 나한테 핫초코를 줬고 자기는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나도 마시고 싶다, 아메리카노.

“어른이 되고 마시도록.”

그런 말이나 하며 호로롭, 커피를 마시는 호크스가 괜히 얄미웠다. 그냥 말하지 말까? 했으나 이미 이야기하기로 했으니 오늘 있었던 일을 간단하게 전했다. 반 친구와 소통의 부재로 인하여 싸우게 됐다고.

물론 기억이 없다는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늦게 알려주면 왜 지금 알려주냐고 뭐라 할 것 같고 기억이 다 없다는 것을 알면 불쌍한 녀석 취급할지도 모르니까.

내가 한 말을 조용히 듣던 호크스가 방긋 웃었다.

“그렇다고 주먹을 날려? 어떤 놈이야?”

화났나? 왜지? 우선 호크스부터 말리기로 했다.

“애들 싸움에 끼는 거 아니야. 추해.”

“추….”

“추해.

내 말에 어쩐지 호크스가 축 처졌다. 호크스가 끼어들면 어쩐지 일이 더 복잡해질 것 같고. 게다가 이미 일이 반쯤 해결되기는 했으니까 귀찮은 일은 만들지 않기로 했다.

핫초코를 마시고 있는데 호크스의 손가락이 내 뺨에 콕 닿았다.

“아프진 않아?”

“지금은 딱히.

“이렇게 부었는데?”

그런가? 콕 하고 닿았던 호크스의 손가락이 곧 뺨을 쓸어줬다. 살살 만져지는 뺨은 이제 아프진 않았다. 사실 처음엔 좀 아프긴 했지만 이젠 좀 부은 정도뿐이라서 괜찮았다.

처음 얼굴을 맞은 것 치곤 제법 점잖은 반응을 보일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사실 좀 울고 싶었을지도. 억울하고 황당해서 그래서.

“미노루, 정말 괜찮아?”

그렇게 다정하게 물어보면 참던 게 나올 것 같은데. 울컥했던 것은 금방 가라앉지 않았다. 목구멍 바로 아래까지 올라온 듯한 것을 겨우 참았다.

“이러나저러나 미노루는 아직 어리구나.

그러면서 날 안아 등을 도닥여주기 시작한 호크스 덕분에 오늘 있던 짜증이 풀리면서 괜히 눈가에 물기가 고였다.

뭘까. 나는 왜 여전히 내 감정을 애매하게 느끼는 걸까. 남의 몸에 들어오게 되면서 생긴 부작용일까? 내 일을 너무 남의 일로 느끼는 것도 타인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도.

더는 신님을 만날 수 없으니 물어볼 길도 없었다. 바보같이 이런 것 하나 묻지도 않고 내가 양소현이었을 때의 기억에만 집착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미네타 미노루가 가지고 있었을 기억이 하나도 없는 것도 내 탓일지도 모르겠다.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맴돌았다. 피곤하고, 귀찮다. 그리고 짜증이 났던 것 같다. 내 등을 도닥이는 부드러운 손길이 멈출 기미 없이 계속 이어져서 위로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나를 달래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 손길이 좋아서 눈을 감았다.

 

호크스 1

호크스는 조용히 잠든 아이를 내려다봤다. 감은 눈에 흘러넘친 눈물이 보여 한숨을 푹 내쉬었다. 조심스럽게 물기를 닦아내고 부어오른 뺨을 다시금 만져봤다. 이렇게 작은데 때릴 곳이 어디 있다고.

역시 뒷조사를 해야 하나? 그러나 미노루가 애들 싸움에 끼어드는 것은 추하다고 했으니 참기로 했다. 아니, 그렇지만.

“나도 참.

헛웃음을 흘리며 아직 남아있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이마셨다.

미네타 미노루. 나이 10살. 특이 사항으론 빌런 하트에 의해 부모와 부모의 기억을 잃은 상태. 거기에 추측하기로는…

“기억상실….”

미노루는 평소에도, 어느 때에도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아니, 어쩌면 ‘할 이야기’가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미노루는 늘 자신의 이야기보단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다른 사람에게 들은 이야기를 하고는 했었다.

호크스가 미노루의 기억상실에 대해서 눈치를 챈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그만큼 미노루가 숨기려고 했던 것 같았으니까. 저가 눈치를 챈 만큼 가장 가까이에 있던 사람, 스즈메 씨 역시 눈치를 챘을지도 모르겠다. 미노루와 통화를 할 때 언뜻 들었던 레이 씨라는 사람 역시도.

“기억 없이 자신의 이름만 가지고 세상을 사는 건 어떤 기분일까?”

어린 시절 살인자인 아버지로 인하여 그와 관련된 모든 것이 지워진 채 공안에서 자란 자신으로서도 잘 모르겠다고 할 수 있겠다.

자신은 과거가 지워졌다는 걸 잘 기억하고 있으니까. 미노루는 그것과 결이 달랐다.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란. 가끔가다가 보여주는 미노루의 묘한 일면은 그 허무함일지도 모르겠다.

호크스는 잠든 미노루를 웃옷 안에 잘 넣어 품에 안고 날개를 퍼덕이며 빈 건물 옥상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바람을 맞으며 익숙하고도 빠르게 날기 시작했다.

히어로 활동에 필요한 가면허 취득은 진즉에 해두었고 사무소는 공안 측에서 완벽하게 준비해두었다. 그리고 그 지역에서 히어로로서 활약을 보여야 했다.

그럼 그 이후엔 이렇게 시간이 조금 남을 때 동생 같은 미노루를 보러 오는 것도 힘들어지겠지. 히어로로서의 활동도 있고 공안으로서의 활동도 있을 테니까.

차라리 미노루를 큐슈로 데려갈까.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매번 들었던 히어로와의 개인적 친분은 다른 이들에겐 좋은 먹잇감이라는 스즈메 씨의 충고가 잊히지 않았다.

저로 인해 이 아이가 다칠 수 있다는 것이 싫었다. 물론 누구보다 빠르게 날아갈 수 있다고 자신하지만 그런 상황 자체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호크스는 멀리서 지켜보기로 했다. 가끔 우연을 가장해 만나러 오기도 하고, 용돈도 쥐여주고, 선물도 주고 가족처럼.

데이온 시설에 도착한 호크스는 웃옷 안에 넣어뒀던 미노루를 스즈메 씨에게 조심스럽게 안겨줬다.

“일은 마치고 온 건가요?”

“네, 그럼요. 저는 빠른 남자니까요.

“그렇죠. 그럼 조심히 돌아가세요.

꾸벅 인사를 하고 돌아간 스즈메 씨의 품에 안겨 시설 안으로 들어가는 잠든 미노루를 가만히 보던 호크스는 날개를 펼쳐 다시금 하늘 위로 올라갔다.

다음에 또 들르려면 다른 일이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된 이후가 되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빠르게 날아갔다.

 

?

어둠 속에서 몇 년이나 있었던가. 퇴색되지 못한 기억이 오늘 밤에도 그를 괴롭혀 잠들지 못하게 하며 앓게 만든다. 눈을 감으면 떠오른다. 지독하게도 망막에 기록이라도 된 것처럼 파노라마처럼 보인다.

끓어오르는 감정에 맞춰 푸른 불꽃이 춤을 추는 것처럼 등 위에서 타오른다.

타들어 가는 소리가 들려온다. 짓무른 피부가 계속해서 짓무른다.

아아. 어째서, 어째서.

나는 ‘이렇게’ 됐는데.

아아. 어째서, 어째서.

바닥을 긁는다. 긁었다. 긁어 낸다. 피부를 긁어내듯, 파내듯.

푸른 불꽃이 춤을 추는 것처럼 점점 퍼져 팔 위로 넘실거린다.

아물었던 상처가 터져 피가 흘렀다. 그 피도 푸른 불꽃에 증발하며 지져지듯 상처가 아물었다. 그것이 반복된다.

쿠르릉, 하늘 위에서 천둥이 울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그는 고개를 들었다. 어두운 골목에서 파란빛을 내며 타오르는 그는 곧이어 내리는 빗줄기로 몸을 식혔다.

“이게 모두 그 녀석 때문이야….

달달 떨리는 손을 들어 얼굴을 덮었다. 손가락 틈으로 붉게 충혈된 눈이 살벌하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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