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송이 : 함께 타오르자

27~32화 분량.

1

그간 많은 일이 있었다.

첫 번째로 키치로에게 사과를 받았다. 때려서 미안하다고. 세이토 역시 키치로와 함께 내게 사과를 했다. 나는 둘의 사과를 받아들였고 친구가 되었다.

같은 반 애들은 그것을 보고 술렁였지만 그래도 내가 변했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인정해준 것 같았다.

두 번째로 유키가 더는 내게 거부감을 보이지 않았다. 전에는 다가가려고만 해도 겁을 먹었는데 이제는 먼저 다가와 인사도 해줬다.

유키와 함께 밋쨩, 그러니까 미츠키도 친근하게 굴어줬고 이후부터 같은 반 여자애들도 날 더는 피하지 않기 시작했다.

세 번째로 아침 운동을 시작했다. 내 몸은 같은 반의 제일 작은 애보다 훨씬 작았기에 아침 운동은 필수였다. 아침 5시에 일어나 6시까지 적당한 운동을 하고 7시까지 학교에 갈 준비를 마치고 등교한다. 그것이 요즘의 아침 루틴이었다.

네 번째로는…

 

2

“또 오셨어요?”

나는 시설 앞에 서 있는 엔데버를 올려다봤다. 시설 운동장에 있는 나무가 빨간 옷을 입기 시작한 만큼 날이 좀 쌀쌀해졌기에 어른을 바깥에 그냥 세워두기도 뭐해서 안에 들어갈 것이냐고 물었다. 엔데버는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잠시 들렀다. …이걸.”

그러면서 내게 검은 봉투를 건네줬다. 이게 뭐지? 그걸 받아 안을 확인해보니 목도리였다. 보라색 목도리. 게다가 모자와 장갑까지 세트로 된 것 같은… 아니, 잠깐? 이거 뜨개질? 뜨개질로 한 거야? 놀래서 엔데버를 올려다봤다.

“이건?”

“레이가 전해달라고 해서 말이다.”

“레이 씨가요?”

“애들 겨울나기 용품을 만들면서 함께 만들었다는군.”

과연. 최근에 학교생활로 바빠지고 레이 씨도 나름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훈련을 하고 있다고 들어서 연락이 뜸해지기는 했다. 이것까지 할 정도로 많이 나아졌구나, 레이 씨.

침묵하던 엔데버가 흠? 하고 의아한 기색을 비쳤다. 목도리를 들어 올려 확인하다가 엔데버를 봤다. 왜 그러냐는 물음에 엔데버가 확신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커진 것 같군.”

“네?”

“전엔…….”

응? 엔데버는 뭔가 어림잡는 듯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봤다.

“겨우 무릎 정도였는데.”

엔데버의 정강이를 찼다. 물론 엔데버는 아파하는 기색은 없었다. 오히려 그게 지금 때린 것이 맞냐는 듯이 빤히 쳐다봐서 한 대 더 발로 깠다.

 

3

아직 겨울이 아니므로 나는 그날 받았던 겨울나기 용품을 방에 잘 모셔 뒀다. 나중에 감사 인사라도 해야겠지. 개인용 핸드폰을 가지기 어려운 시설의 생활이기에 따로 공용 전화로 연락을 해야겠지만 말이다.

알람을 맞춰 두었기에 새벽에 일어나 학교 준비물을 챙기고 원장님에게 인사를 하고(놀랍게도 원장님은 새벽 4시 기상이라고 하셨다.) 시설에서 나와 기지개를 쭉 켰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온 지도 조금 지나서 그런지 아침 해가 늦게 떠 바깥은 아직 어두웠다. 6시에 가까워지면 그제야 밝아지던가?

걸음을 옮겨 천천히 경보로 길을 따라 뛰다 보면 우유 배달을 하는 배달원과 두세 번 정도 마주친다. 물론 각기 다른 사람들이다. 도지나 씨와 휴토 씨 그리고 이지마 씨는 맨 처음 나와 마주쳤을 땐 엄청나게 놀랐었는데 지금은 익숙하게 내게 인사를 하고 배달하러 가거나 남은 우유라며 내게 우유를 선물해주기도 했다.

물론 매번 받기는 뭐해서 그냥 원장님에게 부탁해서 우유를 살 수 있게 돈도 들고 다니기 시작했지만.

“오늘도 힘내라~”

이지마 씨는 내게 우유를 건네주곤 자전거 페달을 밟고 빠르게 이동했다. 받은 우유는 다음 목적지, 공터에 도착할 때까진 들고 가기로 했다.

공터에 도착해서 스트레칭과 국민체조(한국에서 초등학교 때 하는 그 체조 말이다)를 했다.

일본에서 그러니까 히로아카 세계관에서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아는 운동법은 이게 전부였다. 핸드폰이 없으니 유튜브로 운동법을 검색할 수도 없어서 힘들기도 하고. 그래도 키치로가 운동 책을 빌려줘서 도움이 좀 됐지만 말이다.

적당히 몸을 풀고 내가 기억하는 ‘훈련법’을 시작했다.

그 ‘훈련법’이란… 팔굽혀펴기 100번, 윗몸일으키기 100번, 스쿼트 100번이다! 참고로 달리기 10km는 아직 무리라서 못하고 있다. 그건 중학교에 들어간 뒤부터 시작할 생각이었다.

어디서 많이 본 훈련법이 아니냐고? 어어, 그야 당연하지. 전에 봤던 만화에서 나온 훈련법이니까.

물론 그걸 따라 한다고 초인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육체를 만드는 것은 할 수 있으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까지만 하기로 했다.

각각 100번씩 하는 것이 목표이자 결승 골이었고 지금은 많이 해 봐야 20번이다. 그래도 저번보다는 나았다. 한 번도 못 했던 적도 있는데 뭘.

마지막은 받은 우유를 원샷하는 것.

다 마신 다음에 분리수거도 제대로 했다.

 

4

운동을 마치고 시설로 돌아와 씻은 다음에 시설의 식당을 책임지는 요니오씨와 함께 아침을 준비한다. 돕는 것은 어디까지나 감자 껍질을 벗기는 것과 접시를 옮기고 물을 준비하고 젓가락과 수저를 준비하는 정도였지만 말이다.

“오늘도 수고 많았어, 미노루.”

“뭘요. 요니오 씨도 수고 많으셨어요.”

“어쩜 이렇게 착할까?”

요니오 씨는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곤 다시 주방으로 들어가셨다. 나는 애들이 우르르 나오기 전에 미리 밥을 먹은 다음에 다시 방으로 향하기로 했다. 그때쯤에서야 방에서 나오기 시작하는 애들과 마주쳐서 인사를 해주고 방에 들어와서 혹시 잊은 것은 없는지 가방과 준비물을 다시 확인하고 등교하기 전까지 책을 읽기로 했다.

전엔 이렇게까지 공부할 일이 없었는데. 어쩐지 조금 슬퍼졌다.

적당히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고 등교할 시간이 되면 가방을 메고 시설을 나와 학교 근처의 삼거리에서 함께 등교할 애들을 기다렸다.

“야~ 미노루~!”

“미~노루~”

저쪽에서 키치로와 세이토가 손을 흔들며 달려왔다.

“안녕, 미노루.”

그리고 이쪽에선 유키가 인사를 하며 다가왔다.

“오늘도 미노루가 제일 일찍 나왔어!”

“대체 몇 시에 나오는 거야?”

“다들 숙제는 했어?”

“숙제 있어?!”

“숙제가 뭐야?”

“그래, 그래. 그럴 줄 알았어. 학교에서 보여줄게.”

“후후… 미노루는 상냥하네.”

그렇게 나 포함 네 명이 함께 등교를 시작했다. 세이토가 어젯밤에 동생이 울어서 큰일이었다고 말하고 키치로가 어제 저녁 식사 때 채소를 남겨서 엄마가 뭐라 했다고 말하고 유키와 나는 그에 맞춰서 대꾸를 해줬다. 나름대로 사이가 좋아진 우리는 반에서 유독 사이좋은 친구 사이가 됐다.

처음엔 미츠키가 싫어할 줄 알았는데…

“드디어 유키에게 친구가 생기다니. 기뻐!”

오히려 기뻐했다. 소꿉친구인 유키가 제 곁에서 맴돌기만 하고 다른 애들과 친해지지 못해서 안타까워하고 있었다고 했다.

“유키가 미노루랑 다른 애들이랑 친해진 것 같아서 좋아. 물론 조금 섭섭하기는 하지만 이 정도는 괜찮아! 내가 매일 유키와 같이 있어 줄 수는 없으니까.”

미츠키는 정말 어른스러운 것 같았다.

 

5

수업을 마치면 다시 시설로 돌아와 미취학 애들과 함께 놀아준다. 선생님이 계시지만 아직 어려서 개성 사용법이 미숙하기에 가끔 돌발 상황이 생기면 여러모로 일손이 부족해지고는 했다.

가끔 중학교나 고등학교에서 봉사 활동으로 시설에 자주 들러 주기도 하지만, 그것도 방학 때나 주말에 주로 오는 편이었다. 그래서 방학이 아닌 이런 평일엔 내가 일손을 보태 주기 시작했다.

“형! 형아! 땅 파줘!”

“응.”

“오빠! 주먹밥 만들어줘!”

“그래.”

“형! 이것 봐!”

“잘하네.”

“이거봐!”

“응, 괜찮네.”

5살, 6살. 어린 애들은 체력이 무한대라고 하더니 진짜였다. 운동하면서 체력이 좀 늘어난 것 같았는데 착각인 것 같다. 선생님들은 어떻게 이걸 버티시지? 괜히 존경심이 솟아오르고 그러네.

“어쩐지 미노루가 있으면 애들 돌보는 게 좀 편해지는 것 같지 않아요?”

“그러게요….”

저희가 할 일을 애가 하고 있네. 그런 말을 중얼거리는 선생님을 돌아볼 수 없어서 애들이 뭐 봐달라고 할 때마다 몸을 움직였다.

 

6

곧 첫눈이 올지도 모른다는 소식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붉고 노란 옷을 입었던 나무들이 하나둘 겨울옷으로 갈아입으면서 점차 세상이 겨울을 준비하고 있다는 게 눈에 보였다.

내가 이곳에 온 지도 반년이 흘렀다. 정확하게 따지자면, 5개월가량.

잘 살다가 갑자기 다른 사람에게 빙의되어 앞으로 이 몸으로 살아 가야 한다는 것을 어떻게든 받아들이려고 노력하고, 빙의 되기 전에 벌어진 일을 수습하며 바쁘게 지냈다.

그 중간에 여러 일이 있었지만.

하여튼 나는 나 나름대로 이 세상을 살아 가며 익숙해지고 있었다. 빙의되기 전의 기억이 남아있지만, 이곳에서 살면서 새로운 추억을 쌓아 조금씩이지만 잊어가겠지. 그래도 그것이 나쁘다는 게 아니다. 처음에야 이곳에서 미네타 미노루로서 살아 가야 한다는 것과 양소현으로서의 전부를 잊어야 한다는 것이 싫었을 뿐이다.

나는 나다.

더는 양소현으로서 살지는 못하지만. 미네타 미노루의 몸에서 그를 대신해서 살아 가지만.

나는 나다.

그걸 지금에서야 깨달았다. 뭐가 되었든 나는 나다. 나는 나로서 살아갈 것이고 원작대로 흘러가지 않기를 바라며 지금을 살아 갈 것이다.

 

7

“오늘 학교 끝나면 같이 놀지 않을래?”

키치로가 내 책상 옆에 붙어서 말했다. 음, 어쩔까. 내가 고민을 하는 모습을 본 키치로가 서둘러 세이토를 불렀다. 세이토는 가시를 잔뜩 내려서 나한테 엉겨 붙었다. 그러자 옆에서 우리 쪽을 힐끗거리던 유키까지 가세해서 나는 세이토와 유키한테 안겨서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알겠어….”

“앗싸!”

“작전 성공!”

어라, 작전? 작전이었어? 세이토와 키치로 그리고 유키가 하이파이브하는 것을 보며 조금 허탈해졌다. 내가 그렇게 애들이랑 놀러… 가지 않았지. 응. 지금 생각해보니 그렇네. 응.

“어디 갈래?”

“파비엔에 맛있는 케이크가 있어. 거기는 어때?”

“파비엔이라… 비싸지 않아?”

“파비엔? 아! 나 알아! 누나가 그러는데 거기에 신메뉴가 맛있대! 가격도 적당하다고 했는데… 미노루는 어때?”

애들끼리 회의를 하듯이 조잘거리는 걸 듣다가 내 이름을 불러서 정신을 붙잡았다. 그보다 파비엔이 어딘데?

“파비엔이 어디야?”

내 말에 애들이 침묵했다가 서로를 마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파비엔 가자.”

“파비엔뿐이네.”

“파비엔에 가서 맛있는 거 먹자.”

뭐지? 뭐지? 애들이 한마음이 되어서 나를 바라본다. 어쩐지 사명감으로 똘똘 뭉쳐진 느낌이었다. 으, 응. 그래. 가서 맛있는 거 먹자, 그래. 애들의 기세에 져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8

여기는 파비엔. 이름으로 불러서 몰랐는데 이 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카페라 한다. 처음엔 무슨 놀이터? 놀이 기구가 있는 그런 곳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내가 너무 낡은걸까? 요즘 초등학교 애들도 카페에서 놀고 그러나? 의아했지만 애들이 가자고 했으니까.

애들이 메뉴판을 보면서 뭘 먹을지 고르기 시작한 것을 보고 나도 슬쩍 메뉴를 살펴봤다. 카페여서 그런지 메뉴는 거의 비슷했다. 아, 파르페가 있네. 커피 푸딩도 있고.

“유키 너는 뭐 고를 거야?”

“으음… 이거, 딸기 빅 슈.”

“세이토는?”

“나는 딸기 듬뿍 라떼!”

“미노루는?”

밖은 춥지만, 카페 안은 상당히 따뜻했다. 애초에 나는 아아메파였기에 추운 것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지만 애들도 있는데 홀로 커피를 시킬 수는 없기에 나 역시 애들과 비슷하게 맞춘 메뉴를 고르기로 했다.

딸기가 철이어서 그런지 파비엔의 메뉴 대부분이 ‘딸기가 가득’하다는 표현이 많았기에 애들이 골랐던 메뉴를 확인해봤다.

유키가 고른 딸기 빅 슈, 보통의 슈보다 크고 그 안에는 그냥 슈크림이 아니라 딸기 슈크림이 들어간 디저트였다.

세이토가 고른 것은 평소의 딸기 라떼보다 올라간 토핑이 많은 것이었다.

키치로는 딸기가 올라간 딸기 요거트였다. 역시 평소의 딸기 요거트보다 딸기의 양이 상당했다.

역시나 딸기밭이구나. 그렇다면 나도…

“딸기 파르페 주세요.”

주문했던 메뉴는 오래 걸리지 않고 금방 나왔다. 신의 속도인가? 조금 놀라운 속도였다.

창가 테이블에 앉아 각자 선택했던 메뉴를 자기 앞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라떼와 요거트만 마시는 키치로와 세이토를 위해서 허니 브레드도 시켰다.

“잘 먹겠습니다!”

그와 동시에 모두 한 입씩 자기가 시킨 메뉴를 입에 넣었다. 귀엽기는. 애들이 먹는 것을 본 다음에서야 함께 나온 수저로 딸기 파르페를 한 입 퍼서 입에 넣었다.

생크림과 딸기 그리고 새콤한 딸기 잼. 조화롭다고 할 수 있는 맛이었다. 이 가게가 왜 인기가 많은지 알 것 같았다.

아니, 진짜로. 진짜. 이거 정말 맛있다.

근데 애들 왜저리 속닥거리지? 모르겠지만, 맛있다. 여기, 좋은 가게야. 아아메도 잘 말 것 같은데. 나중에 몰래 와야겠어. 그런 생각을 하며 한 입 더 퍼서 입에 넣었다. 맛있다.

 

9

행복하게 먹을 것 다 먹고 몸을 좀 따뜻하게 덥힌 다음에서야 파비엔에서 나왔다. 찬 것을 먹은 후였으니까 좀 늦게 나온 것이 좋은 선택이었던 것 같다.

“다음에 또 파비엔 오자!”

“응! 나 다음엔 초코 먹고 싶어!”

“나는 바닐라.”

“맞아. 파비엔은 다른 것도 맛있으니까.”

그건 나도 같은 마음이었다. 파비엔, 좋은 카페야. 커피 향도 좋았고. 카페 사장님도 좋은 분 같았고. 우리가 카페에서 나갈 때 사이좋은 친구들이라며 사탕도 쥐여주셨으니까.

“이제 뭐 해?”

“뭐하긴! 추우니까 이제 집에 가야지!”

세이토의 말에 키치로가 그리 답했다. 확실히 겨울이 다가오니 부는 바람도 칼바람처럼 느껴졌다. 그건 세이토도 마찬가지인 듯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그러면 여기서 헤어질까?”

“나랑 세이토는 같은 방향이니까 여기서 먼저 갈게.”

“응. 그러면 유키는… 내가 근처까지 바래다줄게.”

“고마워, 미노루.”

“좋아! 내일 보자!”

“내일 봐, 얘들아!”

“잘 가, 얘들아.”

“넘어지지 마.”

유키와 나는 두 사람을 배웅해준 뒤에 걸음을 옮겼다. 유키의 집은 시설과 거리가 좀 있기는 했다. 그래도 혼자 집으로 보내는 것도 못된 짓 같아서 배웅해줄 생각이었다.

“내일 두 사람은 또 숙제 안 해오겠지?”

“그렇겠지. 우리 둘이 바쁘겠네.”

“후후, 맞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유키와 함께 길을 걸었다. 유키나 나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며 대화를 하는 편이기에 대화는 잘 이어지는 편이었다.

“곧 기말인데 미노루는 좀 어때?”

“아… 조금 걱정되기는 해.”

“그, 그럼….”

응? 어쩐지 유키가 조금 머뭇거리며 내 눈치를 살폈다. 왜 그러지?

“나랑 같이….”

 

10

“여어.”

 

11

유키의 말을 중간에 끊고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거기엔 저무는 해를 등지고 서 있는 사람이 있었다. 그 덕분에 그림자가 길고 길어 나와 유키를 덮을 정도였다.

“찾고 있었다고.”

그런 말을 하며 한 걸음 그 사람이 다가왔다.

이상한 기분에 나는 유키의 앞으로 나서며 유키를 뒤로 숨겼다.

“아하. 뭐야, 걔를 지키려고?”

웃긴다는 듯이. 비웃음이 섞인 말투에 나는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누구지? 나는 저 사람을 모르는데. 어쩐지 저 사람은 나를 아는 듯한 말투였다.

혹시 나와 그 애 말고도 이곳에 원작에 대해 아는 사람이 있었던 것일까? 저 사람도 미네타 미노루를 배제하기 위해서 찾아온 것은 아닐까? 갑자기 드는 생각에 나는 유키에게 속닥였다.

“유키, 도망가.”

“그, 그렇지만.”

“나도 도망칠….”

“도망치려고?”

바로 앞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놀라서 나는 그대로 유키를 밀쳐냈다.

“뛰어!!”

유키는 밀려나며 곧바로 뛰어갔고 그 모습을 지켜본 다음에서야 고개를 돌려 나를 내려다보는 사람을 쳐다봤다. 여전히 저무는 해를 등으로 지고 있어 어떤 얼굴인지 보이질 않았다.

“뭐. 괜찮아. 쟨 필요 없으니까.”

뛰어간 유키에게 시선을 준 듯 고개가 잠시 멀어졌다가 내게 다시금 닿았다.

“……누구, 야?”

“아? 아하하. 뭐야, 모르는 건가? 하긴… 이야기했을 리가 없지.”

그렇지. 응. 그러면서 뭔가 혼자 알겠다는 듯이 혼잣말을 했다. 긴장감에 손바닥이 축축해지는 기분이다. 이대로 도망치면…

“그러니까. 야. 이번엔 내 이야기 좀 들어봐.”

쭈그려 앉아 내 머리통을 내리누르는 그 사람의 충혈된 눈과 마주쳤다. 흉측한 자국들. 겨우 끼워놓은 듯한 신체. 타들어 간 피부. 곳곳에 남은 손톱자국.

이 사람은…

“엔데버와 엄마 이야기도 들어줬잖아. 그럼… 내 이야기도 들어줄 수 있는 거 아니야?”

응? 그렇지? 그러면서 웃는 그 사람의 얼굴이 참으로 차갑게 타올라서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12★

“저기가 지금 내가 사는 곳.”

손가락 끝이 가리키는 곳은 단독 주택. 겉으로는 딱히 이상한 점이 하나 없는 집이었다. 다른 점을 꼽자면 여긴 주택이 모여있는 주택가가 아니라 산 중턱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주택이라는 점이다.

그 사람은 나에게 따라오라는 말과 함께 여기까지 나를 데려왔다. 뭐 하나 제대로 파악된 것이 없는데 여기까지 와버렸네.

이대로 계속 같이 가도 되는 걸까? 지금이라도 도망치는 것이 늦지는 않았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지만 어째서인지 도망칠 수 없었다. 마주쳤던 충혈된 눈과 차갑게 타오르던 미소가 괜히 마음에 걸렸다.

대화하자는 것부터가 더욱…

“뭐해? 들어와.”

고민하다가 들려온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주택의 현관문으로 보이는 문을 열고 그 앞에 서서 손짓하는 게 보였다. 유키, 잘 도망쳤겠지. 잠깐 뒤를 돌아봤다가 얌전히 말을 따르기로 했다. 인제 와서 물러났다가 일이 커지는 것은 좋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안으로 들어가니 저녁인데도 어두웠다. 밖에서 봤을 땐 창문이 나 있기는 했는데. 그렇다면 창문을 모두 커튼으로 가린 걸까? 그럴 이유가 있는 건가?

이런 곳이지만 전기는 들어오는 모양인지 전등 스위치를 눌러 거실을 밝혀주었다. 그 덕에 집이 밝아져 그렇게 어둡지는 않았다.

“의외네. 여기까지 제 발로 오다니… 보통은 그냥 도망치지 않나?”

“도망치면 위험할 테니까.”

“머리는 잘 돌아가는 모양이네.”

하얀 천으로 덮인 가구들 사이로 걸어가던 그 사람은 긴 소파에 털썩 앉았다.

“나는 널 알아. 미네타 미노루. 10살. 사사초 5학년 2반 16번. 맞지? 지금은 데이온 시설에서 살고 있고.”

나에 대해 다 알고 있다. 이름뿐만 아니라 내가 어디에서 사는지까지. 솔직하게 말하자면 소름 돋았다. 어디서 내 정보를 그렇게 찾은 것이고 어째서 모은 것인지.

이유를 알 수 없었기에 더욱 말이다.

“그러니 네 소개는 필요 없어. 내 소개를 하자면….”

하얀 머리카락을 벅벅 긁더니 고민하는 듯싶었다. 잠시간 침묵으로 일관하더니 곧 킬킬 짧은 웃음을 흘린 다음 손뼉을 치곤 말했다.

“다비. 그래, 날 다비라고 부르면 되겠네.”

다비?

다비라고? 내 기억이 맞는다면… 빌런 연합의 그 ‘다비’인가?

 

13

“너도 자리에 앉는 게 어때? 할 이야기도 있고.”

할 이야기, 라. 무슨 이야길 하고 싶은 걸까? 그보다, 다비는 검은 머리카락이지 않았나? 왜 하얀 머리카락을 하고 있지? 의아한 점이 많이 있었지만, 가만히 나를 바라보는 다비의 시선에 소파의 맞은편에 있는 소파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왜 그렇게 겁먹었어?”

그러면서 씩 웃는데… 아니, 이런 상황에서 누가 겁을 먹지 않겠냐고. 내가 아무 말 없자 다비가 눈을 가늘게 뜨며 이어 말했다.

“난 지금 널 죽일 생각은 없거든….”

지금. 지금이라고. 지금이라고 했겠다. 죽일 생각은 어쨌든 했다는 거 아니야? 그런 거잖아?

“너는… 그래. 아직 사용 용도가 충분해. 인질 정도로.”

다비는 흥얼거리듯, 노래를 부르듯 말했다. 즐겁다는 듯이.

“인질… 이요?”

“어. 그 사람을, 엔데버를, 토도로키 엔지를 끌고 올 인질.”

다비와 엔데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이 부분이 원작에서도 나왔나? 친구와 봤을 땐 그런 내용은 없었는데. 애초에 히로아카가 완결 나지도 않았으니까. 원작에 적히지 않은 부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다비는 엔데버에게 무슨 원한이 있는 걸까? “언제 올까, 응?” 나도 모르는 것을 물어보던 다비가 만면에 미소를 띤 채 내게 물었다.

“있잖아. 아버지를 어떻게 구슬린 거야?”

 

14

아…버지?

 

15

잠깐.

잠깐잠깐. 내가 뭘 들은 거지? 머리가, 머리가 아픈데? 잠깐만. 아버지? 다비의 아빠가 엔데버라고? 레이 씨의 아들?

아. 그러고 보니 아까 다비가 ‘엔데버와 엄마’라고 했었지. 왜 그 부분에서 눈치를 못 챈 걸까. 바보인가, 나는!

그 둘에게 쇼토와 두 사람을 제외하고 또 다른 아이가 있었나? 확실히 있었다는 듯한 발언이 몇 번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두 사람은 내게 세 자식 말고 다른 자식이 더 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내 계획이 물거품이 되어버렸어. 알아들어? 내가 생각한 계획은 엔데버의 성공작─ 쇼토 말이야. 그 성공작이 크게 성공했을 때 내가 그 누구보다 자랑스러울 쇼토를 죽여서 엔데버에게 ‘복수’를 하려고 했어. 그런데 말이야….”

다비가 눈가의 타들어 간 피부를 손톱으로 긁기 시작했다.

“그게… 틀어졌어. 그게 누구 탓일 것 같아?”

긁혀지는 피부가 벗겨지고 피가 흐르기 시작할 때에야 다비는 긁는 것을 멈췄다. 그런데도 시선이 내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차가운 청록색 눈동자가 나만을 봤다.

“너야.”

나를 지목하지 않았음에도 나를 지목하는 것 같았다.

“너라고.”

목을 움켜쥐지도 않았음에도 목을 움켜쥔 것 같이 느껴졌다.

“네가.”

새파란 불꽃 같은 눈동자가 나를 태우는 것 같았다.

“모두 망가트렸어.”

다비는 나를 바라봤다.

“나는 이곳에 있는데.”

다비는 웃었다.

“이곳에 남아있는데.”

다비는 울었다.

“멋대로 엉켜있던 실이 풀렸어.”

흐르는 것은 눈물이 아니었다.

“있잖아.”

피였다. 상처에서 흐르는 피가 눈물처럼 흘러내렸다.

“어떻게 구슬린 거야? 응? 뭘 했길래 그 사람 눈에서 독기가 그렇게 빠져나간 거야? 지독할 정도로 거부하던 그 눈이 제대로 쇼토를, 나츠 군을, 후유미 쨩을 그리고 엄마를 보더라.”

웃는 얼굴에서 분노가 느껴졌다.

“야, 들어봐. 그때까지 단 한 번도 그러지 않던 사람이─ 그렇게 하는 모습을 보면… 응? 어떻게 생각해? 내 말 듣고 있어? 엔데버가 쇼토를, 성공작을…! 제대로 보고 있다고! 그렇게 되면 나 같은 실패작은 이제 잊혀도 괜찮은 거야? 어!?”

거칠어진 감정에 푸른 불길이 크게 일어났다. 뜨거운 열기가 느껴지며 푸른 불꽃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뜨겁게 타올랐다. 소파에 붙은 푸른 불꽃은 점차 주변으로 퍼지며 온 주변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16

할 말을 잃었다. 다비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나는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엔데버의, 레이 씨의 사정을 내가 전부 다 아는 것은 아니었다. 그 둘이 내게 다 밝히지 못한 이야기가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것이 함부로 내게 말하지 못할 만한 사정인 것 정도는, 누구에게 가볍게 내뱉을 이야기가 아닌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이 정도로 무겁고, 이렇게나 어둡고, 이런 식으로 듣게 될 줄은 몰랐다.

가슴이 울렁거린다. 울렁거리다 못해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아. 지금, 이 앞에 있는 사람은… 두 사람이 숨기고 있던 비밀이구나.

“뭐야, 울어? 지금 내 이야기를 듣고, 울어주는 거야?”

다비가 내게 한 걸음 다가왔다.

“내 눈물샘은 그날 이후로 타들어서 그런지 잘 나오지 않아. 고장 났지.”

다비가 내게 한 걸음 더 다가왔다. 무대에 오른 듯이 주변이 푸른 불꽃으로 잠식되는 중에도 다비는 아무렇지 않게 서 있었다.

“처음엔 억울했어. 내가 수년을 걸쳐 생각해낸 계획이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졌으니까. 정말 멋진 계획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고? 이게 성공한다면 나도 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거든.”

양팔을 벌리며 다비가 웃었다. 정말로. 그때가 되면 눈물이 나올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너무 웃어서 나오는 눈물이.

“생각지도 못한 방해가 들어왔지. 설마 그렇게 엔데버가 쉽게 무너질 줄 몰랐어. 생각해봐. 언제까지나 그딴 식으로 살아갈 줄 알았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마음이 흔들려 후회를 하고 앞으로 나아가려고 한다고 하면 어떨 거라 생각해? NO.1을 향한 더러운 집념이 퇴색되는 것을 목격한 내 심정은 어땠을 것 같아?”

말 좀 해보지 그래? 다비는 그리 중얼거리며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거기에 마음을 강하게 먹은 엄마가 있었던 게 포인트였던 걸까? 그저 팔려온 건 아니라는 건가? 응? 그거 알고 있어? 엔데버와 엄마는 개성 혼을 했거든?”

다시금 한 걸음. 다비는 내게 더 다가왔다. 아직 두 사람이 내게 해주지 않았던 이야기를 하면서.

“몰랐지? 둘 사이에서 나라는 실패작이 있다는 것도.”

양손으로 자기 자신을 가리키는 다비가 고개를 기울였다.

“이렇게 살아있다는 것도.”

이런 꼴로 살아있다고. 다비가 나를 내려다봤다. 푸른 불꽃으로 뒤덮인 이곳에서 아직 불길이 닿지 않은 이 좁은 공간에서 나와 다비 둘만이 서로를 마주 봤다.

“거기서 그렇게 제대로 된 길을 찾아서 걸어서는 안 됐어. 내가 원하는 대로 좀 더 비틀어지고 일그러지고 흉측하게 구겨졌어야 했는데…….”

네 탓이라며 다비가 내게 손가락질 해왔다. 모든 것이 엉망이 된 것은 네 탓이라며. 계속해서, 계속해서.

“엄마도, 나츠 군도, 후유미 쨩도 그 누구도 나를 이해하지 못했어. 엔데버조차 나를 이해해주지 않았지. 너무하지 않아? 그렇게 내가 말했는데 아무도 듣지 않았어.”

흐르는 눈물을 닦아냈으나 계속해서 흘러내렸다. 처절하게 외치는, 속 안에 담아뒀던 이야기를 하는 다비에게서 내 친구를 봤다. 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제일 친했던 친구를.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미 덧씌워지듯 보이기 시작했다.

나도 내 친구를 이해해주지 못했다. 친구가 말했는데도 듣지 못했다. 그때는 몰랐으니까. 그 작은 신호가 그런 것인지 전혀 몰랐으니까.

“……. 야.”

다비가 나를 불렀다. 일그러진 표정으로 나를 노려봤다.

“왜 그렇게 우는 거야? 내가 그렇게 불쌍해?!”

타오르던 불길이 더욱 솟아올랐다. 매캐한 연기가 거실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나를 동정이라도 하는 거야?!!”

그렇게 쉬운 단어였으면 좋겠다. 차라리 그런 것이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이 감정은 그 정도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차라리 한없이 가벼웠다면 그저 불쌍하다고 생각하고 말았겠지.

TV에서 하는 광고 중에 가난하거나 한 부모라던가 소년가장의 생활고를 도와달라는 내용이 있다. 그런 것을 보면 주머니 사정이 넉넉할 때는 도와주는 편이었다. 그저 나름의 자기 위안을 하면서.

그런데 지금은? 그리 말하고 자기 위안을 하며 끝낼 수 있을까?

저렇게 괴롭다는 듯이 서 있는 사람을 두고? 그럴 수 없다. 그럴 수는 없었다.

내가 왜 이렇게까지 이들과 엮이는지는 모르겠지만 손을 뻗을 수밖에 없었고 말해줘야 했다. 내 친구에게, 지연이에게 해주고 싶었던 것을 다비에게 해주고 싶었으니까.

 

17

솔직한 심정으로 다비가 내게 쏟아붓는 말은 모두 화풀이나 마찬가지다. 나는 어디까지나 외부인에 가까웠고 다비에게 피해를 준 건 엔데버와 레이 씨 두 사람이었다. 물론 엔데버의 잘못이 더 큰 것 같다고 생각하지만, 두 사람은 부부였고 다비는 두 사람의 아이였으니까.

나로선 그 세 사람이 해결해야 할 일에 피해를 받은 사람이다.

그런데도 나는…

“다비가 불쌍하고, 가엾다고 생각해.”

“그게 동정이 아니면 뭔데!!”

푸른 불꽃이 나를 덮쳤지만 뜨겁다는 느낌은 없었다. 일렁거리던 푸른 불꽃이 나를 훑고 지나갔다.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다비조차 의아하다는 얼굴이 되었으니까. 다비의 개성이 내게 제대로 닿지 않은 건가? 다비가 행동을 멈춘 틈을 타서 푸른 불꽃을 피해 그를 향해 다가갔다.

“다비, 자기 자신을 실패작이라고 말하지 마.”

“뭐?”

“다비는 실패작이 아니야.”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다가가자 다비는 되려 뒷걸음을 쳤다. 방금과는 상황이 달라진 것이나 다름이 없다.

“자기 자신을 실패작이라고 말하면 결국 자기 자신도 그것을 인정한다는 뜻이야. 그것만큼 슬픈 것은 없어. 다비 너는 실패작이 아니야. 그저 조금 부족한 사람이지. 누구나 부족한 점이 있어. 나도 그렇고, 엔데버도 그렇고, 레이 씨도 그렇고. 완벽한 사람이라는 것은 없어.”

“쇼토는 엔데버가 바라던 성공작이야!!”

“그럴지도 몰라.”

“그렇다면!”

“그렇지만 그것이 완벽한 사람이라는 소리가 아니야, 다비. 쇼토도 아직 어리고 부족한 점이 많아. 쇼토는 쇼토야. 성공작도 무엇도 아닌 쇼토. 다비, 네 동생이란 말이야.”

“동생…?”

멈추지 않는 눈물을 닦아내며 계속해서 다비에게 다가갔다. 이대로 다비를 두고 볼 수는 없었다. 내버려 둬서도 안 됐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엔데버와 레이 씨 그리고 다비의 관계를 내가 전부 해결을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있을 것이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비릿한 미소를 달고 있던 때와 달리 지금은 감정적으로 격양되고 표정을 일그러트린 다비를 바라보며 나는 말했다.

“우리 이야기하자.”

“…….”

“아직 제대로 이야기를 듣지 못한 것 같아. 나한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더 있을 것 같은데….”

“들어서 뭐하게.”

가시가 돋친 말투. 역시 맨 처음 내게 다가왔던 때와는 달랐다.

“다비의 이야기를 들어줄게.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도 아니고 다비의 이야기를. 내가 들어줄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말해줘. 말하지 않으면 모르거든. 아무것도. 도와주고 싶어도 말하지 않으면 몰라.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은 정말로 슬픈 일이야. 내가 겪어보지 못한 일이기에 공감할 수 없는 것 역시. 내가 겪어보지 못한 일은 그것이 감히 어떤 것인지 파악조차 할 수 없으니까.”

나에겐 지연이가 그랬다. 지연이가 겪었던 고통이, 슬픔이 어떤지 몰랐다. 이야기 해주지 않았으니까. 그럴만한 사정이 있다는 것은 지연이가 나에게 비밀을 숨겼다는 슬픔이 지나고 나서야 깨달았다.

지연이가 나와 부모님이 잘 지내는 것을 보고서 하고 싶어도 말하지 못했다는 것을. 화목한 가족이었던 우리 집에서 지연이가 자신의 집에 관한 이야기를 일절 하지 않은 것도. 우리 집에 놀러 올 땐 항상 집에 부모님이 없을 때 온다는 것도.

모두 지연이가 떠난 이후에서야 깨달았다.

“그러니까 이야기 해줘. 들어줄게. 나는 시간이 넘쳐나거든. 다비가 겪은 이야기를 듣는 것 정도는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고. 다비를 알아갈 시간을 줘. 다비가 어떤 사람이고 뭘 좋아하고 어떤 것을 싫어하는지 알고 싶어. 그리고 그다음엔… 우리 친구가 되지 않을래?”

“친…구?”

“응. 친구.”

내 말에 다비가 허, 하고 웃음을 흘렸다. 너 진짜 미친 것 아니냐는 듯이 다비가 눈을 크게 뜨고 째려봤다.

“너, 멍청이냐? 인질로서 쓸모없어지면 죽일 생각을 한 사람이라고!”

“응.”

“이대로 태워버리면 너는 죽는다고!!”

“알아.”

다비는 입을 다물고 침묵했다. 또다시 내가 다가간 만큼 다비가 물러섰다.

“겨우….”

침묵하던 다비가 중얼거렸다.

“겨우… 겨우 그 정도로 쉽게 풀릴 거라 생각하는 거야? 내 증오가, 복수심이 그렇게 하찮다고 생각해!? 망가트릴 거야! 나를 이렇게 만들어버린 토도로키 엔지를! 나를 태어나게 한 엄마를! 두 사람의 성공작인 쇼토를!! 모두, 모두!!”

날 두고 괜찮아지려고 하지 마!!! 커다란 불길이 다비의 몸에서 피어올랐다. 아까부터 불길이 더욱 거세지는 것 같다. 그 때문인지 화상 자국이 점차 커지는 것 같았다. 이대로 계속 화력을 올리면… 다비가 죽을지도 몰라.

 

18

손을 뻗으면 뜨거우리라 생각했던 불길이 그렇게 뜨겁지 않았다. 아니, 뜨거운데 뇌가 받아들이는 것이 늦는 것일 수도 있다. 아까와 같은 상황에 이상함을 느꼈지만…

멈춰 있을 시간이 없었다. 이대로 가다간 다비가 자멸할 게 뻔해.

그러니까… 이렇게!!

 

19

꽝!

 

20

다비는 두 눈을 크게 떴다. 이마를 통해 상당한 충격을 받아 몸이 기우뚱 기울어졌다. 털썩, 무릎을 꿇고 번쩍이던 시야가 정상적으로 돌아왔을 때 제 멱살을 붙잡은 미노루의 모습에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대체… 대체 뭣 때문에!”

“다비가 더는 다치지 말았으면 해서 그랬어!!”

“…뭐?”

“지금 자기 자신조차 상처 입힐 정도로 개성을 쓰고 있잖아. 그대로 있으면 죽어버릴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냥 두겠냐고!!”

“네가 무슨 상관인데! 내가 죽든 말든!”

“상관있어!!!”

다시금 이마를 통해 꽝, 충격을 받았다. 다비는, 토우야는 어이가 없었다. 제 멱살을 붙잡고 있는 이 망할 꼬맹이는 어디서 나오는 힘인지 벗어날 수도 없게 붙잡고 있었고 머리는 또 얼마나 단단한지 머리가 띵할 정도로 아파져 왔다.

“내가 아까 말했잖아. 다비의 친구가 되고 싶다고. 친구가 죽는 꼴은 못 봐!! 그러니까 이제 진정해!”

“뭘 진정하라는 거야!! 이거 놔! 놓으라고!!”

친구가 되고 싶다고? 정말 어이가 없었다. 방금까지 제가 한 말을 듣기는 한 것인지. 아니면 극한의 상황으로 인해 머리가 어떻게 된 것은 아닌지. 토우야는 질색할 수밖에 없었다. 다비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 놓지 않는 거냐고!! 너도 죽을 셈이야?!”

이 불길 속에서. 저까지 불 싸지르는 불길 속에서 미노루는 계속해서 제 멱살을 붙잡고 있었다.

“복수할 거야! 날 이렇게 만든 녀석들을 저 밑바닥으로 끌어내려 버둥거리게 만들고 그 꼴을 보며 웃을 거야! 울 거라고!!”

“나는 한 번도 그걸 하지 말라고 한 적 없어, 다비.”

“……뭐?”

토우야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미노루를 바라봤다. 방금, 뭐라고?

“그건 다비의 일이잖아. 그것을 내가 무슨 이유로 말리겠어. 그건 어디까지나 아저씨와 레이 씨가 해결해야 하고 감내해야 하는 일이지. 그러니까 마음대로 해”

무슨 말이야? 복수, 해도 괜찮다고?

“나는 그저 다비와 친구가 되고 싶은 것뿐이야. 다비에 대해 알고 싶은 것뿐이니까. 다른 누구도 아니라 다비, 너 말이야.”

토우야는 할 말을 잃은 채 입을 벌렸다. 복수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들을 줄 알았더니 오히려 옆에서 부추기듯 복수하라고 말하고 있었다. 자기는 관계없다며 엔데버와 엄마가 받아들여야 하는 일이라 말한다.

“이건 아저씨도, 레이 씨도, 쇼토와도 상관없어. 알겠어? 날 봐! 내가 지금 누굴 보고 있어?”

보라색 눈동자에 제 얼굴이 비친다. 토우야는 제 일그러진 얼굴을 비추는 눈동자를 피하고 싶었다. 그러나 피할 수 없었다.

나를 보고 있다.

미노루가 나(토우야)를 보고 있다.

“다비, 말해봐. 내가 지금 누굴 보고 있어?”

“……. 나.”

“맞아. 나는 지금 다비를 보고 있어. 다비에게 친구가 되겠냐고 묻고 있기도 하고.”

“너는….”

토우야는 뭔가를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멋대로 제 벽을 부숴버리며 강행해서 쳐들어온 포도송이 같은 놈이 나갈 일 없다며 자리를 차지해버렸다. 웃기지도 않지.

제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이게 뭐지? 왜 멋대로 들어와서 자리를 차지하지? 그런데도 그렇게까지… 짜증 나지는 않았다. 그래. 짜증 나지는 않았다. 이게 뭐지? 나는, 나는 왜. 그렇게까지 짜증이 나고 괴롭고 슬펐는데. 어째서.

방금까지 끓어오르던 감정이 바닥으로 가라앉은 기분이 들었다. 그것이 마냥 싫지 않았다. 저를 봐준다고 했기 때문일까? 이야기를 들어준다고 해서? 그것도 아니면 친구가 되준다고 했으니까?

하. 친구? 친구라고? 자길 죽이려고 한 사람과 친구가 되고 싶다는 미노루가 정말이지…

“넌… 너는 정말 멍청하고 바보 같고 어이없는 놈이야.”

토우야가 그리 말하자 미노루가 토우야의 멱살을 놓으며 웃었다.

“다 말했니? 이제 할 일을 하자.”

그에 토우야는 어쩐지 식은땀이 났다. 미노루의 등 뒤로 누군가의 형상이 잠시나마 보였다.

 

21

다비와 미노루가 소년만화풍으로 부대끼고 있기 3시간 전, 유키는 미노루에게 밀쳐지듯 도망쳤다.

무서운 사람! 무서운 사람이 미노루를! 유키는 풀리는 다리를 억지로 움직여 달렸다. 히어로. 히어로를 찾아야 해! 미노루가 위험해!!

그러다가 갈림길에서 걸어오는 사람을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부딪혀버린 유키는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제게 손을 뻗어오는 커다란 사람을 보고 심장이 쿵쾅거렸다.

“괜찮나?”

유키는 그 사람을 본 적이 있었다. TV에서 신문에서 잡지에서. 몇 번씩이고.

“미처 주변을 살피지 못해 미안하군. 어딜 가던 중이었지? 그런데 안색이 좋지 않은 듯한데….”

히어로다. NO. 2 히어로. 엔데버. 유키는 제게 손을 내밀은 엔데버의 손을 잡았다. 엔데버는 예상보다 차가운 아이의 손과 다급하게 잡아 오는 행동 그리고 무언가 겁에 질린 표정에서 무언가 일이 있음을 깨닫고 몸을 굽혔다.

“무슨 일이지?”

“미, 미노루가….”

유키는 흑, 흑. 울음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히어로를, NO.2 히어로를 발견해서 안도감이 들은 것이다. 미노루를 구해줄 거야! 그렇기에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낯을 가리던 유키가 힘내서 용기를 냈다.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내며 엔데버를 똑바로 바라봤다.

“제 친구가 위험해요!! 무서운 빌런이 데려갔어요!!”

 

22

엔데버는 유키에게서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다. 물론 핸드폰으로 녹음을 해서. 경찰에게서 사전 조사를 받아야하지만, 미성년자이기에 히어로로서 그리 판단하고 먼저 유키를 집에 돌려보냈다.

인근 경찰과 연락해 유키에게 설명 들은대로 납치되었다는 아이를 조사했다. 사실 조사라고 할 것도 없었다. 이미 납치된 아이가 누구인지, 어디에서 사는지도 알고 있었으니까.

경찰과 함께 히어로 코스튬으로 제대로 갈아입은 엔데버가 데이온 시설에 들렸다. 문을 열고 나온 시설의 선생이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찾아오던 엔데버가 코스튬을 입은 것과 그 옆으로 경찰이 함께 있는 것을 보고 무언가 일이 생겼음을 깨닫고 곧장 원장실로 안내하겠다며 걸음을 빨리했다.

“무슨 일이시죠?”

원장실로 오자 스즈메가 경찰과 엔데버를 맞이하며 자리를 권했으나 모두 사양하곤 곧장 이야기에 들어갔다. 스즈메의 물음에 엔데버가 먼저 입을 열었다.

“미노루가 납치된 것 같다.”

“……!! 마, 말도 안 돼요! 그 아이가 또?!”

“스즈메 원장님, 또라니 무슨 말씀이시죠?”

함께 온 경찰 대원이 의아한 듯 묻자 스즈메가 안경을 고쳐 쓰며 어떻게든 평정을 되찾은 낯으로 조급하게 답했다.

“그 아이, 여러 사건을 겪은 상태에요. 부모를 잃은 지 이제 5개월도 되지 않았고 빌런과 마주쳐 납치될 뻔도 하고 살해당할 뻔도 했어요. 그런 아이에게 또 이런 일이….”

“원장님, 진정하세요.”

“진정해야죠. 그래요. 누가 납치했는지는 소식은 있나요?”

그 말과 함께 경찰 대원은 가지고 온 자료와 노트북을 원장실로 가지고 들어와 펼쳐두기 시작했다. 스즈메는 뒤로 물러나 그들이 편하게 일할 수 있도록 했다.

“우선 구조 요청을 한 아이는 이키기리 유키, 10살. 이번 납치 사건의 피해자와 친구 사이로 함께 집으로 돌아가던 중 낯선 사람이 ‘찾아다녔다.’라는 말을 했다는 것을 한 것으로 보아 어쩌면 면식범이거나 전에 있던 사건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경찰 대원의 말에 스즈메가 놀란 얼굴로 외쳤다.

“이전 사건… 빌런 하트!”

“예. 맞습니다. 지금은 타르타로스에 갇혀있긴 하지만, 빌런 하트의 이름은 아직도 뒷세계─ 그러니까 빌런에겐 잘 팔리는 이름이니까요.”

스즈메는 안경을 고쳐 쓰며 입을 다물었다. 왜 그 아이에게 이렇게 계속해서 재난이 찾아오는 것인지 모르겠다.

경찰 대원은 스즈메에게 미노루가 주로 만난 사람이나 다른 신체적 특징이 있는지 물었다.

엔데버는 조용히 수사를 시작하는 경찰 대원을 지켜보며 생각에 잠겼다. 레이에게 알리면 당장이라도 뛰쳐나올지도 모르겠다. 만약을 대비하여 열기를 쌓아 올리며 범인이 특정되자마자 뛰쳐나갈 준비를 했다.

그리고 난장판이라고도 할 수 있는 복잡한 이들 사이로 빨간 날개를 퍼덕이며 다가오는 한 사람.

“미노루는 어디 있어요? 선물도 사왔는…데… 어라.”

호크스가 미노루 방에 아무도 없다며 원장실로 찾아온 것이었다. 곧 원장실에 엔데버는 물론이요. 경찰 대원과 초조해 보이는 스즈메를 본 호크스는 빠르게 어째서 미노루가 지금 이곳에 없는지에 대한 결론을 내렸다.

곧장 바깥으로 달려가 날개를 펼쳐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23

하늘 높이 날아오른 호크스는 곧장 의심스러운 건물을 확인했다. 범인 특정은 경찰에게 맡기면 됐다. 자신은 그 범인이 사용할 법한 건물을 확인해 비교하면 됐으니까.

1단지에 지하 통로. 3단지에 반쯤 무너진 주택. 4단지에 공사가 중단된 건물. 그리고 산 중턱에 자리 잡은 빈 주택. 의심스러운 장소를 한 번 눈에 담은 호크스는 지하 통로부터 살폈다.

그곳에서 숨어있던 빌런 하나를 잡아 경찰서에 보냈다.

3단지에 있는 반쯤 무너진 주택에선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고 4단지에 있는 공사가 중단된 건물에서도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남은 곳은…

호크스의 시선이 산 중턱으로 향했고 그와 동시에 푸른 불꽃이 저택을 집어삼키듯 타오르기 시작했다. 곧장이라도 그곳으로 날아갈 것처럼 날개를 퍼덕이던 중 징징,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를 받은 뒤 호크스는 입을 다물고 몸을 돌려 그대로 데이온 시설로 돌아갔다. 범인을 특정했다는 연락이 왔다.

자신은 가면허 히어로. 데이온 시설에는 그 사람이 있으니까. 엔데버가.

 

24

호크스가 도착하자 설명을 준비하던 경찰 대원이 노트북에 연결한 빔프로젝터에 사진 한 장을 올렸다.

“납치한 빌런으로 생각되는 이의 사진입니다. 마침 그 근처의 풍경을 찍던 제보자가 제보해주신 것입니다.”

저무는 해가 건물 사이에서 빛나는 풍경이 찍혀진 사진이 보이고 그 구석에 미노루와 미노루를 데려간 것으로 생각되는 빌런이 찍혀있는 모습이 보였다.

“강제로 끌고 가는 모습은 아닙니다만, 함께 가지 않으면 위협하겠다고 협박했을 가능성이 존재하는 한 우선 이 사진 속의 남성을 납치한 빌런으로 추정하고….”

경찰 대원의 이야기를 들으며 엔데버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새하얀 머리카락을 가진, 남성. 어디서 본 듯한 흐릿한 인형. 엔데버는 설마, 설마 하면서 계속해서 사진을 뚫어지라 쳐다봤다.

아니기를 바랐고, 그럴 리가 없기를 바랐다.

그러나. 엔데버는 주먹을 꽉 쥘 수밖에 없었다. 어디서 본 듯했다면 저로 인해 미노루가 납치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으니까.

“이제 이야기해도 됩니까?”

호크스가 손을 들고 말했다. 범인의 특정을 끝낸 경찰 대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으나 이 자리에 있는 NO. 2 히어로나 원장이 별말이 없는 것을 보면 히어로이거나 가면허가 있는 히어로일 수도 있었다.

“저는 먼저 수상한 장소를 하늘 위에서 살펴봤습니다. 조금 전 산 중턱에서 푸른 불꽃을 발견. 아무래도 범인의…”

“거기가 어디지.”

이어지던 호크스의 말을 중간에 끊어낸 엔데버의 행동에 스즈메와 경찰 대원은 깜짝 놀랐다. 호크스는 말이 중간에 끊겼음에도 다른 말 없이 안내하겠다며 먼저 앞장섰고 엔데버는 호크스를 따라나서기 전에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데려올 테니… 기다리고 있도록 해.”

따라오지 않아도 괜찮다는 이야기에 경찰 대원은 머뭇거렸다. 아무리 NO. 2 히어로라고 해도 독단적으로 행동을 해서는 안 되었으나 그 NO. 2 히어로가 그러겠다고 말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을 것을 짐작한 경찰 대원은 만약을 위해 구급차를 불러두겠다는 이야기와 빌런 수송을 위한 준비를 해두겠다며 빠르게 움직였다.

스즈메는 가만히 엔데버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고 엔데버는 곧장 호크스가 날아간 곳으로 달려가 불의 화력을 이용해 높게 날아올랐다.

빨간 날개는 어두워진 하늘에서도 이정표라도 되듯 눈에 띄었기에 금방 따라잡을 수 있었다. 그게 아니어도 저렇게 밝고 푸르게 타오르는 불길이 보이는 것을 무시할 수는 없었기에 그곳으로 향했다.

 

25

호크스가 가장 먼저 도착하고 그다음으로 엔데버가 도착했다. 호크스는 불길을 바라보며 예상보다 거센 화력에 다가갈 생각을 못 했고 엔데버는 묘한 기시감을 느끼며 그 앞을 바라봤다.

“이제 어쩌죠, 엔데버?”

“…그 전에 히어로 명은?”

“……호크스. 호크스입니다, 엔데버. 큐슈에 히어로 사무소를 열 예정이고요.”

웃으며 말하는 호크스를 본 엔데버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노루를 처음 만났을 때 봤던 기억이 있다. 훈련한 것 같더니 실제로도 히어로가 될 예정이라고 하니 엔데버는 호크스를 뒤로 물릴 생각은 없었다.

“그렇다면 지금은 가면허 상태겠지. 임시로 내 사이드 킥으로서 이번 사건 현장에 참여하도록.”

강압적일 정도의 어투였으나 호크스는 그것이 참으로 친절한 설명임을 깨달았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분위기였다. 앞으로 가는 것을, NO.1을 목표로 해서 달려가기만 하던 사람이 뒤를 쳐다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을 호크스가 싫어할 리가 없었다. 오히려…

“영광입니다, NO. 2!”

그리 말하며 웃었다.

 

26

“그렇지만 화력이 상당한데요… 어쩌죠?”

서로 팀업을 하기로 하기는 했으나 지금 당장은 주택을 불태우고 있는 푸른 불꽃을 어찌하는지가 문제였다.

엔데버는 가만히 불꽃을 바라보다가 호크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호크스. 어떤 개성을 사용하지?”

“제 강철 날개는 하늘을 날 수도 있고 깃털을 날개에서 분리 후 하나하나 조정할 수도 있어요. 진동과 소리도 감지할 수 있죠.”

“……. 불엔 취약하겠군.”

“맞아요.”

그래. 하필 불. 주택을 불태우는 불길은 가시지 않고 계속해서 타오르고 있었다. 엔데버는 불길이 시작된 위치와 그나마 불길이 덜 닿는 곳을 빠르게 찾아냈다.

“화장실로 보이는 작은 창문을 통해 깃털을 보낼 수 있겠나?”

“해볼게요.”

날개에서 빠져나온 깃털 서너 개가 빠르게 날아갔다.

“……좋아. 두 개 정도는 불길에 닿아 재가 되었지만, 아직 두 개가 남았… 들려요, 목소리. 엔데버!”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 있겠나?”

엔데버의 말에 호크스가 미간을 좁히며 귀를 기울이는 듯한 시늉을 했다. 곧, “다 탔어요.” 하고 허리를 편 호크스가 엔데버를 돌아봤다.

“미노루의 목소리, 확인했어요. 빌런으로 확인된 남성 역시. 이름은… 다비. 타들어 가는 중이어서 제대로 들린 것이 몇 개 되지 않았지만…….”

호크스는 무언가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말해라.”

엔데버의 재촉에 호크스가 몇 번 입을 달싹이다가 결심했는지 한 번 숨을 내뱉은 다음에서야 말을 했다.

“엔데버… 당신의…… 자식인 것 같아요.”

그 말에 엔데버는 양 주먹을 꽉 쥐었다. 이 기묘한 기시감. 낯익은 인형. 푸른 불꽃. 엔데버는 점차 커지기 시작하는 주택 앞에서 작아질 수밖에 없었다. 분명 1층 정도밖에 되지 않은 주택임에도 거대한 건축물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이 착각임을 알고 있으나 엔데버에겐 그리 보였다.

“어찌할 건가요? 미노루와 빌런 다비가 있는 위치는 파악했어요.”

진입하실 거면 피해를 최소화할 위치를 말할게요. 호크스의 말에 엔데버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어디지?”

“…! 지금 저희가 서 있는 정면에서 오른쪽이 텅 비었어요. 진입하려면 그곳이 포인트예요.”

“뒤로 좀 물러나도록.”

엔데버는 곧장 지금까지 끌어올린 화력을 집중해 호크스가 언급한 곳을 뚫어냈다. 산으로 피해가 더 퍼지지 않게 불길을 하늘 높이 돌리는 것도 잊지 않고. 호크스는 그것을 보고 굉장하다는 듯이 휘파람을 불었다. 저것 역시 한두 번 해보는 것으로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았으니까.

뻥 뚫린 주택은 푸르고 붉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 사이로 푸른 불길 속에 함께 있는 미노루와 빌런 다비의 모습을 본 엔데버와 호크스가 빠르게 주택 안으로 들어갔다.

 

27

다비는 최선을 다해 제 몸에 붙은 불길을 제어해 보려고 했다.

“콜록, 콜록.”

제 품에서 피를 토하며 기침을 하는 미노루를 보면서 다비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왜, 왜! 왜 안 되느냐고! 몇 번이고 해봤잖아! 가라앉으라고!

조금 전까지는 멀쩡하게 말을 했다. 그런데 아주 잠깐 사이에, 콜록대고 기침을 하더니… 이렇게. 피를 토했다. 숨쉬기 어렵다는 듯이 색색거리는 숨소리도 들려왔다.

“젠장, 젠장, 젠장!”

다급해졌다. 이대로라면 정말로 미노루는 죽어버릴지도 모른다.

“괜…찮, 콜록!”

“괜찮긴 무슨! 개소리하지 말고 정신이나 붙잡고 있으라고!!”

불안정한 상태가 계속된다면 위험하다. 지금은 가라앉혀야 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지만 어떻게 그러는데. 이 불길이 멋대로 계속해서 타오르는데 어떻게 해야…!

“거기까지다.”

머리 위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다비는 머릿속이 새하얗게 되었다. 그 자식이다. 망할 아버지다. 토도로키 엔지다! 엔데버다!!

“적당히 해라! 미노루를 죽일 생각이냐!”

“하! 당신이 할 말이야!? 뒤져라, 엔데버!!!”

죽인다, 죽여버린다! 절망감을 주는 복수는 하지 못하더라도 이런 복수라도 하겠노라며 다비는 엔데버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다비의 옆을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형상에 눈이 뒤집혀 엔데버에게 달려들던 다비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확보했습니다, 엔데버. 저는 이대로 후퇴하겠습니다.”

“신병을 맡기겠다.”

빨간 날개의, 조사를 통해서 알게 된 인물. 다비의 눈이 잠시 미노루에게 닿았다가 고개를 돌렸다. 됐어. 이제 된 거야. 이대로 이 망할 아버지와 함께 타오르면 되는 거야!!

 

28

호크스는 미노루를 품에 안고 빠르게 날아갔다. 가는 길 경찰차 무리가 산 중턱으로 날아가는 것이 보였고 그 뒤를 쫓듯 구급차가 이동하는 것이 보여 호크스는 몸을 틀어 구급차로 향했다.

구급차를 운전하던 구급대원이 빨간 깃털을 발견하곤 깃털이 가리키는 방향을 확인하곤 정차했다. 구급차가 멈추자 곧장 땅으로 내려온 호크스는 구급대원에게 환자, 미노루를 넘겨주었고 구급대원은 환자의 상태를 확인한 후 구급차에 태웠다.

앞서가던 경찰차 중 가장 맨 뒤에서 이동하던 차량이 후진해서 다가오더니 거기에서 츠카우치가 차에서 내렸다.

“당신은….”

호크스는 그를 알아본 듯 눈썹을 들어 올렸다. 츠카우치는 호크스에게 모자를 들어 올려 인사를 하곤 미노루의 상태를 확인했다. 아주 잠깐뿐이었지만. 츠카우치는 구급대원에게 말했다.

“우선 피해자부터 병원으로 이송을.”

“네.”

구급차가 완전히 자리에서 떠난 이후에 츠카우치가 호크스에게 물었다.

“상황은 어때?”

“현재 엔데버가….”

빌런, 인가? 호크스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엔데버와 엔데버의… 자식.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어째서 엔데버의 자식이 미노루를 노린 것인지 어째서 엔데버를 ‘죽이겠다’라며 달려들었는지.

“엔데버가 맡았다면 큰 문제는 없겠지.”

“그게… 그걸 모르겠습니다.”

“…! 엔데버보다 강하다는 뜻이야?”

“그게 아닙니다. 그냥… 참, 츠카우치 씨 소방차도 불러주세요. 저는 우선 다시 엔데버에게 돌아가겠습니다.”

호크스는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이는 츠카우치를 두고 경찰차의 행렬보다 먼저 날아서 현장으로 돌아왔다.

그곳에는 불꽃들이 서로 맞부딪히고 있었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면 깃털이 녹아버릴지도 모르는 열기에 호크스는 두 사람 사이에 낄 타이밍을 찾았다. 어찌 되었든 빌런을 제압하기는 해야 했으니까. 엔데버의 자식을 빌런이라고 해야 하는지는 여전히 모르겠지만 말이다.

“뭐 하는 거냐고! 그러고도 히어로냐!! 제대로, 하란, 말이야!!!”

“토우야, 그만둬라!!!”

와우. 호크스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조금 더 물러났다. 아까는 다비, 라는 이름이었는데 지금은 토우야인가. 푸른 불꽃과 붉은 화염이 뒤섞이지 못하고 서로의 자리를 집어삼킬 듯이 넘실거리고 있다.

“으아아아!!”

달려드는 다비의 주먹을 피하지 않고 맞은 엔데버는 그대로 다비의 팔을 잡아 제압했다.

“쿨럭!”

“……이제, 그만해라.”

“젠…장. 젠장…!!”

“그때…! 너를… 잃은 줄 알았다. 그런데 이렇게….”

“닥쳐!! 토우야는 죽었다! 그때 뒤졌다고!! 이제… 이젠 다비다! 나는 다비로 살 거야!!”

거칠게 타오르던 불꽃은 주변에 살아있기라도 하듯 여전했으나 두 사람 사이엔 불길이 없기에 그곳에 내려온 호크스는 엔데버를 바라봤다. 무언가 사정이 있구나. 엔데버는 토우야를 다비를 제압한 채로 호크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미노루는?”

“구급차에 실려 먼저 병원으로 옮겼어요. 그리고 소방차도 불렀고 츠카우치 씨가 이리 올 거예요.”

“……그런가.”

“그래서… 어찌하실 건가요? 저 사람 말이에요.”

“…….”

엔데버는 말없이 얌전히 제압당한 토우야를 내려다봤다. 할 말이 없었다. 호크스도 별말 없이 입을 다물었다. 이번 일은 자신이 끼어들 수는 없는 것 같았다. 우선은…

“얼른 소방차가 오면 좋겠네요. 이대로 산불이 크게 나면 큰일 날 테니까요….”

호크스의 말에 엔데버가 침묵으로 긍정을 했다. 곧 한 방울, 하늘에서 물이 떨어졌다. 토독, 토독하고 몇 방울 더 떨어지더니 이내 쏴아아,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축축해지기 시작한 두 사람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봤다. 거세지는 않지만, 주변을 불태우는 불을 식히기 좋은 빗줄기였다.

“타이밍, 죽이네요.”

호크스가 그리 말했고 엔데버가 다시금 침묵으로 긍정했다.

 

29

스즈메는 서둘러 미노루가 입원한 병원으로 찾아갔다. 엔데버와 호크스에게서 납치한 범죄자를 제압하고 현재 이송 중이라는 소식을 들어 안심한 상태였다. 그러나, 병원에 와서 미노루의 상태를 보곤 놀랄 수밖에 없었다.

“수, 수술이요?”

“네. 식도와 폐에 화상을 입었습니다. 그 외에도 내장 기관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중이어서 급하게 긴급 수술에 들어갔으니 우선은 환자의 신상명세와 보호자의….”

이어지는 의사의 설명을 들으며 스즈메는 참담해졌다.

그 작은 아이가 무슨 잘못이 있길래. 이렇게 빈번히 아이를 괴롭게 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인지. 스즈메는 작성해야 할 서류를 모두 작성한 이후에 수술실 앞에서 대기했다.

호크스는 다른 일은 엔데버에게 맡긴 이후 병원으로 날아왔다. 물론 엔데버가 시킨 일에 가깝지만, 저 역시 이곳으로 날아올 예정이기도 했다.

“원장님.”

“호크스….”

수술실 앞에서 초조하게 움직이는 스즈메를 본 호크스가 우선 그를 진정시켰다. 그리곤 아직 불이 들어와 있는 수술실을 바라보며 “미노루는 괜찮을 거예요.” 하고 스즈메를 그리고 자신을 달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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