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돌아가고 싶지 않았던

[OC] 에밀, 아첼레란도 | 단델리온

천문대 by 매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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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은 묵묵히 천장을 바라보았다. 연락이 올 리 없는 휴대폰이 옆에 놓여져 있었다. 몸을 일으키고 책상 위에 시선을 두었다. 오늘의 아침 식사인 토스트가 준비되어 있었다. 너, 꿈을 꾸는가. 응, 꿈을 꾸는가. 에밀은 책상 앞에 앉았다. 아침 식사 옆에는 예쁘게 정리된 악보집들과 악보가 있었다. 째깍거리는 소리가 조용한 방에 퍼졌다. 고개를 들면 지금은 2시였다. 커튼 너머로 빛이 스며들어오는 걸 보아하니 아마도 낮이겠지. 에밀은 오늘도 낮을 맞이했다. 새로운 하루를 맞이했다. 새로운 하루가 올 것이다. 에밀은 그 모든게 역겨웠다. 흘러가는 시간이 혐오스러웠다. 에밀은 제 방문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토스트를 들었다. 그는 방문을 한참 바라보았다. 방문을 열고 나섰다.

에밀?

당혹스러운 목소리가 그의 귀에 들려왔다. 에밀은 아첼레란도를 바라보았다. 아첼레란도는 꽤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에밀이 방 밖으로 나온 건 오랜만의 일이었다. 아첼레란도는 물었다. 아픈 곳은 없어? 몸은 괜찮아? 어디 불편한 점이라도 있었어? 섞여있는 걱정의 목소리에서 에밀은 느꼈다. 역시 내게는 선배밖에 없지? 그렇지? 누구도 걱정해주지 않는 나를 걱정해주는 건 오직 선배 뿐이지? 에밀은 아첼레란도의 표정을 보았다. 내가 무엇이든 나를 인정해줄 표정을. 내가 무엇이든 나를 알아봐줄 표정을. 에밀은 눈을 깜빡였다. 선배. 에밀은 말을 이어갔다. 우리 잠깐 밖에 나갈까요.


벌써 겨울인가요. 선배.

곧 연말이야.

에밀은 고개를 돌렸다. 새하얀 눈이 길거리에 쌓여있었다. 펠튼 거리에는 어김없이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연말이 다가오면 펠튼 거리는 분주해졌다. 연말의 축제를 위해서 예술의 거리는 바쁘게 움직였다. 선배도 뭔가 하나요? 아첼레란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혼자서 무대에 올라 비올라를 연주할 계획이었다. 아무래도, 한 때의 영광이라 일컬어지는 ‘소프라노’ 의 비올리스트가 참여하지 않을 순 없었으니까. 너는 아프다고 얘기해뒀어. 아첼레란도는 그러고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었다. 에밀도 그 뒤를 따랐다.

에밀은 무언가 이야기해야 했다. 하지만 그 무언가를 이야기할 용기가 전혀 나지 않았다. 그 뒤가 두려웠다. 일그러짐이 두려웠다. 공포가 두려웠다. 그 누구도 나를 반겨주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공포가 되어 머리를 지배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새하얀 눈밭 위에 서 있었다. 새하얗다. 새하얗다. 정말로 새하얀 색이었다. 에밀은 보았다. 그 새하얀 색을 물들이는 적색을 보았다. 분명 헛것이다. 분명 존재하지 않는다. 선배. 아첼레란도는 걸음을 멈춰서고 고개를 돌렸다.

저도 무대에 오르게 해주세요.

아첼레란도가 에밀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답은 느리게 오지 않았다. 그럴게. 당황한 티를 거의 내지 않고 그는 그리 말했다. 아첼레란도는 제 휴대폰을 꺼냈다. 어딘가에 전화를 거는 그 모습을 보다가 에밀은 고개를 돌렸다. 에밀이 바라본 곳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누군가가 있었다. 에밀은 제 눈에 들어온 이에게 말을 걸었다. 무엇을 원해요? 존재하지 않는 이가 답했다. 네가 바라는 것. 그 속삭임을 들으며 에밀은 눈가를 찌푸렸다. 아첼레란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밀. 에밀이 고개를 돌려 아첼레란도를 바라보았다. 새빨간 색의 거리에 홀로 은빛을 내는 이를 바라보았다.

선배는 오늘도 이렇게 반짝이는데.

너라고 해서 다를 거 없어.

달라요, 선배. 나는 흑빛이고 선배는 은빛인걸.

아첼레란도는 침묵했다. 의견에 동의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 이상 에밀을 자극해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했다. 선배. 빛나요. 무척이나. 저는 그래서 선배가 좋아요. 한 마디 한 마디, 에밀은 힘겹게 말을 뱉었다. 그러니까 선배. 선배. 선배. 내 곁에 영원히 있어줄 거죠? 그 물음에 아첼레란도는 입을 열었다. 물론이지. 그렇지만 한 가지 짚고 넘어가자면 인연이란 게 정말 영원히 함께할 수 있을까? 이론적으로 그것이 정녕 가능한 일이던가. 아첼레란도는 에밀을 보며 웃었다. 그러니 부디, 네가 나아가기를 빌어.


시간이 흘러갔다. 점점 연말 축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에밀은 아첼레란도와 가끔 연주를 연습했다. 아무리 천재 플루티스트라 할 지라도 서로 합은 잘 맞춰야 했으니까. 에밀은 제 방에서 제 휴대폰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주 긴 시간 동안 에밀을 만나지 못했던 그가 휴대폰 속에서 에밀을 보고 있었다. 음성 합성 엔진이자 인공지능인 단델리온은 에밀에게 물었다. 오랜만이야, 무슨 일이야? 에밀은 가만히 단델리온을 보다가 물었다.

리온, 나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어디로?

모르겠어. 하지만 그래야 할 것 같아.

그 전에 학교부터 가. 바보.

단델리온이 웃었다. 에밀은 단델리온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학교에 가면 뭔가 달라질까? 단델리온은 손가락으로 숫자를 셌다.

네가 올해 열 여섯이니까. 곧 고등학생이네. 그치? 네 선배한테 부탁해서 고등학교에 가 보는 것부터 시작하는 건 어때?

너는 천재니까 대학교까지는 나가지 않아도 괜찮을 거야. 단델리온이 고개를 저었다. 에밀은 눈을 깜빡였다. 학교에 가면 뭐가 달라질까. 에밀은 1년 전을 기억하고 있었다. 단델리온은 이야기했다. 가만히 정체하고 싶지는 않잖아. 너에겐 꿈이 있잖아. 나아가고자 하는 꿈. 발전하고자 하는 꿈. 그런 것들.

흑빛은 반짝이지 못하지만, 에밀은 그럼에도 빛나고 싶었다. 언젠가의 미래에서 누구보다 반짝반짝 빛나고 싶었다. 그래야만 아첼레란도의 곁에 설 수 있을 거라고 에밀은 생각했다. 빛나는 이의 옆에서 빛나고 싶었다. 아첼레란도는 은빛이니까. 그렇기에 흑빛이라도 빛나야 했다. 그건 에밀의 꿈이었다. 반드시 이뤄야 하고 반드시 이루고 싶은 꿈. 단델리온은 다시 이야기했다. 네 선배라면 틀림없이 해결책을 찾아내실 거니까. 말이라도 해보자.

에밀은 고개를 들었다. 제 방문을 에밀은 가만히 바라보았다. 저 문을 열고 나가면 그 너머에 있나요, 선배?

그 너머에서 나도 반짝이고 있나요?


선배, 무대가 잘 끝나면요. 연말 선물로 받고 싶은 게 있어요.

아첼레란도가 에밀을 돌아보았다. 두 사람은 무대 뒤에 서 있었다. 연미복을 입은 두 사람은 누구보다 어엿하고 대단한 음악가였다. 아첼레란도가 물었다. 뭘 받고 싶어? 에밀은 바로 답하지 못했다. 한참을 우물쭈물거리다가, 두 사람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펠튼 거리의 자랑, 천재 음악가 두 사람을 이 자리에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아첼레란도는 에밀을 바라보며 웃었다. 뭐든 들어줄게. 아첼레란도는 에밀에게 손을 내밀었다. 에밀은 손을 잡았다. 그리고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갔다.

무대에 섰다.

많은 이들이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1년 가까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소프라노의 플루티스트가 무대에 서 있었다. 아첼레란도는 에밀의 손을 놓아주고는 제 가슴팍에 손을 올렸다. 에밀도 그 행동을 따라했다. 에밀은 무대에 서지 않은지 1년이 다 되어갔다. 그럼에도 에밀은 익숙하게 인사했다. 비올라를 들고, 플루트를 들고. 에밀은 이 술렁임이 두려웠다. 하지만 옆에 아첼레란도가 있었다. 그리고 내가 이뤄야 하는 소원이 있었다. 익숙한 그 곡으로 관객들을 맞이하기로 했다. 두 사람의 약속은 그러했다.

환상은 곧 광기에 가깝지 않은가. 환상광기곡이 그들을 맞이했다.


에밀, 보여? 너도 빛나고 있어.

에밀은 가쁘게 호흡했다. 소프라노의 이름과 아첼레란도의 이름, 에밀의 이름을 그들은 외치고 있었다. 에밀은 관객석을 바라보았다. 이 순간을 그의 몸은 기억하고 있었다. 이 순간을 그의 머리는 기억하고 있었으며 알고 있었다. 이런 소름끼치는 순간을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온 몸에 감도는 이 전율을 그는 알고 있었다. 선배, 선배. 에밀은 아첼레란도를 돌아보았다.

제가 무대에 서 있는 거 맞죠.

아첼레란도는 에밀의 손을 잡았다. 그러고는 위로 들었다.

박수갈채와 함께 공연이 끝이 났다. 두 사람은 천천히 무대 뒤로 퇴장했다. 무대 뒤에 있던 관계자들과 다른 참여자들이 두 사람을 맞이했다. 걱정한 보람이 없다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들 동감하고 있었다. 에밀은 한 관계자에게서 물병을 받았다. 아첼레란도가 에밀을 톡톡 건드렸다. 그래서, 원하는 선물이 뭐야? 에밀은 아첼레란도를 한참 바라보았다. 입을 열고 답했다.

선배, 저 학교에 가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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